3부 1장 : 황금 양모 기사단
#064
레이테는 남편의 품에서 눈을 떴다. 그녀는 자신을 옭아맨 팔을 옆으로 살짝 치우고 몸을 일으켰다.
손으로는 남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밤새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것에 대한 복수다.
편안히 잠들어 있던 남편이 팔을 들어 별안간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레이테는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부터 에르난은 정신을 차렸을 것이 뻔했다.
“좋은 아침…… 치고는 많이 이르군요. 잘 잤나요, 에르난?”
“즐거운 새해 첫날입니다, 부인.”
남편의, 잠이 덜 깨 흐릿한 눈과 나른하게 감긴 목소리가 유혹적이었다. 레이테는 다시 그의 품에 안겨들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짐짓 태연하게 말했다.
“이제 막 일어났는데 뭐가 즐거워요?”
“눈 뜨자마자 당신이 내 앞에 있는데, 이게 즐거운 일이 아니라면 뭐겠습니까.”
“매일매일 보고 있는걸요.”
“그렇지만 작년의 오늘은 이렇지 않았으니까.”
에르난은 아내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레이테는 팔에 힘을 주고 잠시 버티다가 그의 옆에 다시 누웠다. 두 사람은 단숨에 입술을 얽었다.
말랑하고 따뜻한 감촉을 오래도록 나눈 후에야 부부는 침대 밖으로 나왔다. 몸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으나 별수 없었다.
새해 첫날, 두 왕의 일정은 바빴다.
첫 일정은 아라고 대성당에서 치르는 새해 기념 미사 참석이다.
장엄하게 거행된 미사를 마친 부부가 대성당을 나오니 밖은 완전히 밝아 있었다.
겨울다운 싸늘한 바람은 불면서도, 맑고 깨끗한 하늘이 따스한 햇볕을 땅에 보내 주었다. 멀리 보이는 바닷가가 평화로웠다.
바르시나 최대의 항구도시인 아라고는 상업적 요지일뿐더러 연중 비교적 따뜻한 기후환경으로 살기에도 좋았다. 왕실은 물론이고 수많은 귀족이 이곳에서 보내는 겨울을 선호했다.
올겨울은 유독 아라고에 많은 귀족이 모였다. 새해 미사에도 바르시나답지 않게 수많은 귀족이 참석했다.
특히 젊은 아들과 동반한 귀족들이 많았다. 궁정에 떠도는 기사단에 대한 소문 탓이었다.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화합을 위해, 국왕이 직접 양국의 젊고 유능한 귀족을 선발해 새 기사단을 만든다. 우두머리는 당연히 왕 본인이다.
소문은 미노리카 섬까지 국왕 부부를 따라갔던 귀족에게서 나왔다.
특히 ‘왕께서 직접 내게 함께해 달라 말씀하셨다’며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기 바쁜 이가 있었다. 코른 후작의 조카인 세르지 피로시였다.
“하여간 경박하기는…….”
레이테는 세르지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에르난은 오히려 그 상황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가 열심히 소문을 내 주니, 요즘 귀족들 언행이 볼만하지 않습니까? 왕의 눈에 들려고 노골적으로 안달복달하는 바르시나 귀족은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기사들은 새 왕의 최측근이 될 것이 뻔했다. 그리하여 신년 알현은 어떻게든 두 왕의 눈에 들고 싶은 귀족들의 총칼 없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두 분 폐하, 제 장남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대륙에서 법학, 철학, 수학, 천문학, 그리고 신학도 공부하고 온 바르고 성실한 아이입니다.”
백발의 귀족은 신학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여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확실히 바르시나인이 신학을 공부하는 일은 흔치 않다.
“경께서는 후계자 교육에 열성적이시구려.”
에르난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의 얼굴에 단숨에 화색이 돌았다. 백작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자신이 가져온 선물을 소개했다.
“대륙 최고의 학자가 저술한 최신 군사학 서적이옵니다. 폐하의 위업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여왕께는 이것을 바칩니다. 동방의 귀한 보석을 엮어 만든 묵주입니다.”
묵주는 본래 기도하는 데에 쓰는 물건이다. 하지만 백작이 바친 묵주는 손에 쥐고 사용하기에 지나치게 화려했다. 허리에 두르는 액세서리로 사용하는 쪽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어쨌거나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은 아름다웠다.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여 만족을 표했다.
다른 귀족들도 비슷했다. 제 아들과 선물을 뽐내기에 바빴다.
그들은 사크틸라 사절단을 향해 부러운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사절단은 애초에 엄선되어 바르시나에 온 자들이다. 그러니 높은 확률로 기사단에 들 것이다.
레이테는 이 분위기가 대단히 흥미로웠다.
사크틸라 여왕을 노골적으로 못마땅하게 여기더니만, 형식적으로나마 왕으로 인정한 뒤로는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가 바뀌었다.
물론 레이테는 자신에 대한 그들의 근본적인 인식이 변화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지금의 저자세는 귀족과의 충돌을 겁내지 않고 강경하게 원하는 바를 밀어붙이는 에르난 때문일 뿐이다.
* * *
처소로 돌아온 부부는 받은 선물을 잠시 살펴보았다.
에르난은 오늘 하루에만 커다란 보석이 박힌 예장용 검 다섯 자루, 권총 두 자루, 대륙 화가의 그림 열한 점, 고전이나 시집 등 서적 열두 권, 금 사슬 목걸이 여덟 개, 가죽 구두 네 켤레, 금은으로 장식한 시계 아홉 개를 받았다.
그 외에 크리스털 기마상이나 배 모형, 깃털 색이 비현실적인 이국의 새나 처음 보는 동물,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은 체스 말 세트 등도 걸작이었다.
“책이 꽤 많네요?”
화려하기 짝이 없는 선물 행렬 속에서, 책은 아무래도 수수한 존재였다. 하지만 에르난은 그것들을 제일 기뻐하는 눈치였다.
“아, 그게…….”
에르난이 무언가 답하려 했다. 그 순간, 부부와 함께 선물을 구경하던 프란세스크가 끼어들었다.
“왕께서는 독서를 굉장히 좋아하시거든요. 거기에 얽힌 사연을 제가 아주 잘 압니다만…….”
남편의 책을 들춰 보던 레이테가 고개를 들었다. 에르난은 눈을 슬쩍 치켜뜨며 프란세스크를 노려보았다.
프란세스크는 왕의 시선을 못 본 체하며 신나게 말을 이었다.
“꽤 오래전, 왕께서 아직 소년일 때 일입니다. 당시 어울리던 동년배 귀족들이 언젠가부터 밤에 이런저런 아가씨들을 만나더랍니다. 그들은 왕자께도 밤 외출을 권유했는데, 폐하께서는 대단히 불쾌해하면서 그들과의 친분을 끊어 버리셨죠.
친구를 쫓아냈더니 놀 거리가 없어진 폐하께서는 독서에 몰두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뭐 여러 가지 많이 읽으셨는데요, 폐하도 사람은 사람인지라 외롭기는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각국의 연애시를 두루 섭렵…….”
“그만!”
에르난이 다급한 고함을 질렀다.
“여자를 소개해 주겠다면서, 어울리던 동년배를 죄다 데리고 나간 사람이 누군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애초에 그 자식들은 당신의 팔이 되기에는 너무 소인배였어요. 적당히 연애나 즐기며 놀고먹는 편이 딱 분수에 맞지요. 그래서 제가 대신 처리해 드렸잖습니까.
여왕 폐하, 당신의 남편께서는 독서로 심신을 수양하며 순결도 지키셨답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런 상상 저런 상상을 키우다가 마침내 욕망이 해금되자…….”
“당장 나가!”
결국 에르난은 버럭 소리 지르며 프란세스크를 쫓아냈다.
그래서 레이테는 공작이 다 마치지 못한 말을 직접 완성해 주려 했다. 해금된 에르난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녀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욕망이 해금되자 돈 에르난은 폭주하여 아내를 놓아주지 않고…….”
“당신까지 그러십니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에르난의 외침은 처량할 지경이었다.
“사실이잖아요?”
“돼, 됐습니다. 저는 옷을 갈아입어야겠습니다. 저녁 때 뵙지요.”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는 에르난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남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참 웃던 레이테는 이제 자신의 선물이 담긴 상자를 열었다.
“어머!”
여왕을 수행하는 시녀들이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상자에는 보석이 가득 담겨 있었다. 펜던트, 목걸이, 귀걸이, 벨트, 단추, 묵주나 십자가 같은 성물(聖物) 등등.
그래서 레이테는 조소할 수밖에 없었다.
“바르시나 분들의 상상력은 좀 부족한가 보네요.”
시녀들의 흥분에 찬 감탄이 멈추고 방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폐, 폐하. 이쪽의 다른 선물도 보셔요.”
카테리나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녀는 여왕의 불편이 무엇 때문인지 금방 눈치챈 듯했다.
사실 보석은 레이테의 마음에 쏙 들었다. 하나같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최고급품이었다.
바로 이 점이 문제였다. 선물은 보석뿐이다.
레이테의 시선이 선물 상자 옆을 향했다. 보석이 아닌 선물도 있기는 했다. 딱 두 개였다.
시스로네스 대주교가 선물한, 화려한 삽화가 그려진 성서. 그리고 남편 에르난이 선물한 갑옷 세트다.
길고 긴 귀족의 인사 행렬이 끝났을 때였다. 시종들이 갑옷을 입힌 실물 크기의 사람 모형을 들고 와 부부의 앞에 놓았다.
투구부터 구두까지 완벽하게 한 벌을 갖춘 갑옷이었다. 우아한 곡선과 섬세한 금빛 장식에 레이테는 물론이고 귀족들도 감탄했다. 에르난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부인께 드리는 제 신년 선물입니다.’
그 순간 어색하게 얼어붙었던 알현실의 분위기는 참으로 가관이었다.
“언젠가 에르난이 말했거든요. 제게도 갑옷이 있으면 좋겠다고요. 하지만 정말로 주문했을 줄은 몰랐지요. 입고 움직일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일단 에르난의 말로는 전투용이라서 충분히 가능하다던데. 카테리나가 보기에는 어떤가요?”
레이테는 짐짓 가벼운 투로 말했다. 기분은 영 씁쓸하지만,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글쎄요. 넘어지지 않을까 염려되는걸요…….”
카테리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 * *
낮에는 귀족의 선물 공세에 왕이 감탄하기 바빴지만, 밤은 왕이 귀족을 압도할 차례였다. 국왕이 귀족에게 베푸는 신년 만찬회는 낮의 분위기를 뛰어넘는 호화찬란한 자리였다.
식탁 중앙의 거대한 설탕 공예는 윤기가 좌르르 흐르며 반짝거렸다. 백조와 공작새 모형은 누구라도 넋을 잃고 바라볼 만큼 섬세했다. 두 왕의 문장에 그려진 검은 독수리도 물론 빠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거대한 범선이 나타났을 때는 모두가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요란한 장식과 음식에 비해 연회장은 기묘하게 팽팽한 긴장에 휩싸여 있었다. 화려한 장식과 음식에 감탄하기도 잠시, 귀족들은 목소리를 낮춰 옆 사람과 짧은 이야기만 나눌 뿐이었다.
모두 식사에 열중하는 척한다. 그러나 실은 힐끗힐끗 왕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아니, 반대로 왕에게 눈치를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어색함의 원인은 뻔했다. 기사단 때문이다.
에르난은 식사를 하다 말고 허탈한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가 아내에게 속삭였다.
“이 나라 사람들이 원래 좀 참을 줄을 모릅니다. 왕자를 빨리 끌고 오라며 왕에게 윽박지르고……, 뭐 그런 난리가 한두 번이었어야지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인내심이 없을 줄은 몰랐습니다. 어련히 알아서 말할 텐데 좀 기다릴 것이지.”
레이테가 픽 웃으며 말했다.
“에르난, 당신은 결혼을 얌전히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신부에게 찾아가 기어이 저지르고 만 과거가 있지 않나요? 과연. 당신도 바르시나 사람이 맞네요.”
“하긴…….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솔직히 지금 분위기는 저도 더 못 버티겠거든요.”
에르난은 수저를 들어 술잔을 가볍게 두들겼다. 소곤거리는 소리가 단숨에 잦아들었다.
“자, 모두 한자리에 모였으니, 여러분께 제안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제안이라는 단어를 들은 귀족들은 숨을 죽이고 에르난을 바라보았다.
“나와 레이테가 만들 새 시대를 자축하며, 그리고 특히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우애와 화합을 위해…….”
에르난의 목소리가 점점 느려졌다. 기다리던 이야기가 드디어 나오려 하자 노골적으로 번뜩거리는 귀족들의 눈이 영 부담스러웠다.
‘하긴, 바르시나 귀족이 국왕의 말에 이렇게 촉각을 세우는 일이 얼마나 있겠나.’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반응은 꽤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에르난은 잠깐 숨을 들이쉬었다가 남은 말을 이었다.
“……나 에르난이 직접 양국의 전도유망한 귀족을 선발하여 기사단을 창설하고자 합니다.”?
#065
이제 왕궁은 대놓고 흥분에 들썩였다. 사람들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누가 왕에게 선택받는 영광을 누릴지 이야기하기에 바빴다.
귀족들은 자식의 몸가짐 단속에 각별히 신경 썼다.
항구 근처에 공공연하게 형성된 도박장, 부도덕한 관계를 맺기에 제격이었던 사교 모임도 단숨에 썰렁해졌다. 옆구리에 여자 대신 성서를 낀 도련님들이 줄지어 성당에 출석하는 모습은 촌극이 따로 없었다.
경박한 옷차림도 싹 사라졌다. 대신 사크틸라풍에 가까운 형태로 단정하고 절도 있게 품위를 드러낸 옷을 입은 젊은 귀족들이 왕궁을 들락거렸다.
청년 귀족이 궁정에서 할 일은 많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왕궁 이곳저곳에 모여 잡담을 나누며 하루를 보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머리를 쓰는 이들이 나타났다.
귀족들은 화려한 옷 대신 교양을 과시하기에 바빴다. 그들은 남들의 이목을 사기 쉬운 중정에 모여 철학, 예술, 군사학 등을 주제로 지식을 뽐냈다.
어쩌다 왕이 근처를 지나가기라도 하면 한바탕 난리가 났다.
과장된 자세로 하는 인사는 기본이며,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는 고전 서적의 제목이 잘 보이도록 책을 들기도 하고, 가문의 문장을 일부러 옷차림에 노출하기도 했다.
“폐하!”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몸부림은 가지각색이지만, 우렁찬 외침과 왕을 향하는 초롱초롱한 눈빛은 한결같았다.
위층 난간에 몸을 기대고 쉬는 레이테에게도 그 우스운 광경이 잘 보였다.
“바르시나 귀족도 이런 일에 관심이 많군요. 지방 토호의 세력이 강하다기에 왕실 일에 별로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더니.”
“아무리 그래도 바르시나의 주인은 두 분 폐하니까요. 왕의 심복이 될 기회를 마다할 귀족은 세상에 없을 거예요.”
여왕과 함께 아래를 구경하던 카테리나가 답했다.
“마다하는 귀족이 있기는 있어요. 왕의 칭호는 껍데기라서, 권력이 있어야만 공경을 받지요. 그게 없으면 처절할 정도로 무시당한답니다.”
카테리나가 흠칫 놀라며 여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레이테는 별 감정 없이, 지나가듯 말했을 뿐이었다. 자신의 과거에 지나친 연민을 느낄 생각은 없다.
지금은 자신이 있으니까.
그래. 분명히 자신은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녀는 빠른 속도로 한계에 몰리고 있었다. 레이테는 이를 악물었다.
여왕이 중정에 내려가는 일은 드물었다. 몇 번 귀족을 직접 상대해 본 일은 있었다. 필사적으로 여왕의 환심을 사려는 이들의 발버둥이 인상적이었다.
‘발버둥의 내용에 문제가 좀 있지만.’
귀족들은 레이테가 영 듣기 싫은 말만 반복하기 일쑤였다.
결국 레이테는 그들과의 접촉을 피했다. 그래도 지금처럼 멀리서 귀족들의 모습을 가끔 지켜보면 재밌기는 했다.
간혹, 일부러 위층의 여왕을 찾아와 인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여왕 폐하.”
물론 지금 그녀에게 인사한, 짙은 감청색 옷을 놀랍도록 말쑥하게 빼입은 세르지의 목적은 여왕이 아니라 다른 이의 환심일 것이다.
“카테리나 양도 안녕하신지요.”
세르지의 태도는 예전의 모습을 못 찾을 만큼 여유가 넘쳤다. 다른 귀족들처럼 비굴해질 필요가 없는 탓이다. 그는 이미 왕에게 선택받았다.
다른 이들은 세르지를 부러워했다. 따라서 그는 한창 기세등등해진 차다.
“아…… 안녕하세요, 세뇨르. 옷이 참 멋있네요. 앞으로도 그렇게 입고 다니면 어떠신지…….”
“오오, 그러십니까? 아가씨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완전히 그를 떼어 놓기는 애매하므로 차라리 안구라도 보호하겠다는 선택인 듯했다. 레이테는 마음속으로 카테리나에게 박수를 쳤다.
카테리나가 여왕을 수행하다 보니, 여왕도 세르지를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이제 적어도 세르지의 경박한 차림새로 인해 눈이 피곤할 일은 없을 것이다.
“카테리나 양, 그만 들어갈까요?”
“벌써요? 폐하, 더 쉬셔요.”
“괜찮아요. 돌아갑시다. 돈 세르지, 다음에 만나요.”
에르난은 세르지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그가 코른 후작의 조카이기 때문이다. 대륙주의자를 회유할 수단인 셈이다.
그래서 에르난은 세르지를 기사단에 합류시키려 했다. 가문은 좋지만 물려받을 작위가 없는 세르지는 그것에 목매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레이테 개인적으로는 그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카테리나가 자꾸 난감해하니까.
레이테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여왕은 그녀 자신이 잠정적으로 ‘집무실’이라 여기는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 공간을 집무실로 여기지는 않는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바르시나인 시녀들이 여왕을 맞았다. 레이테가 정식으로 바르시나의 군주가 되자, 고위 귀족의 영애들이 선발되어 여왕을 수행했다.
“사크틸라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폐하.”
여왕이 책상에 앉자 시녀들은 여왕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해 뜨개질을 시작했다. 잠깐 시녀들을 바라보던 레이테는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펼쳤다.
사크틸라에서 레이테를 수행했던 시녀 조아나에게서 온 편지였다.
바르시나로 출발하기 직전, 조아나의 임신 사실이 알려졌다. 그녀는 안정적인 출산을 위해 사크틸라에 남게 되었다.
조아나는 오랫동안 아이를 가지지 못하다가 간신히 임신에 성공했다. 따라서 조아나는 여왕의 속을 썩이는 문제를 잘 이해해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테는 편지를 보냈다. 답장은 열흘 만에 받았다.
……사크틸라에서도 말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폐하께서 이곳에 계시지 않는지라 자주 입에 오르지는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결혼하신 지 아직 일 년도 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바쁘셨는지 저희도 잘 알고요.
그런데도 임신 운운하며 눈치 주는 자들은……, 제 개인적인 생각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나치게 무례합니다.
여왕의 골칫거리는 이것이었다. 후사. 정확히는 왕자의 출산.
부부는 결혼하자마자 내전을 치르느라 떨어져 살았다. 내전 후에는 바쁘게 북부를 순회했다. 또, 자우메의 요청을 받아 바르시나에 왔다.
축제나 즐기며 쉴 줄 알았더니 에르난이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헤젤과의 분쟁도 터졌다. 부부는 반도 땅을 벗어나 멀고 먼 섬까지 다녀와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야 누구도 진지하게 여왕의 임신을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에르난이 바르시나 왕위를 계승하면서, 부부는 완전한 형태의 공동 군주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드디어 국왕 부부의 자녀 생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왕자의 어머니가 될 레이테에게.
물론 후사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세요. 그래야 추후 건강한 왕자를…….
레이테는 마저 읽지 않고 편지를 도로 돌돌 말아 버렸다.
‘잘 나가다가 왜 결론이 똑같아진담.’
조아나는 레이테가 임신을 하고 싶어 초조해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니다. 딱히 급하게 아이를 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신 문제는 레이테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레이테는 단순히 바르시나 왕을 섬기는 아내가 아니다. 남편과 동등한 위치와 힘을 가진 공동 군주다.
하지만 후사에 대한 말이 나오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레이테가 왕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요즘 두 분 폐하께서 아침마다 졸음에 괴로워하시잖아? 부부 사이가 너무 좋은 나머지 거의 매일 밤을 지새우다시피 해서 그런다더라.’
‘침실 경비를 담당하는 기사 말로는, 얼핏얼핏 교성 비슷한 소리도 들었대. 세상에, 얼마나 뜨거운 시간을 보내시길래!’
‘조만간 왕자 전하가 탄생하지 않을까?’
‘가끔 폐하께서 아내와 단둘이 의논하겠다며 비서들을 집무실 밖으로 내쫓을 때가 있는데, 그게 사실은…….’
이런 부류의 쑥덕거림이 레이테의 귀에 곧잘 들어왔다. 짜증 나게도, 모조리 사실이었다.
소문 만들기에 몰두하는 시녀를 쫓아내고, 교양 있는 아가씨를 다시 선발했다. 입단속 못하는 경비병도 교체했다. 인원이 점점 늘어나는 왕의 비서진에게도 왕의 사생활 유출 금지를 거듭해서 경고했다.
물론 남편에게도 집무실에서 아내의 몸을 또 탐할 경우 가만두지 않겠노라고 살벌하게 협박했다.
에르난이 바르시나의 일에 바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레이테도 사크틸라의 일에 분주했다. 하지만 여왕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사는 온통 언제 태어날지도 모르는 왕자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레이테가 사람을 불러 의논하고, 안건을 처리하는 이 공간을 여왕의 집무실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레이테 본인. 남편 에르난. 부부의 속마음을 잘 파악하는 프란세스크와 카테리나 남매.
그리고 이제 여왕을 찾아오기로 약속한 사람.
“여왕 폐하.”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시스로네스 대주교가 들어왔다.
시녀들이 일제히 일어나 여왕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여왕은 사크틸라인과 면담할 때 바르시나인의 동석을 불편해했다.
여왕이 바르시나를 무시한다며 불편해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크틸라와 바르시나는 상대의 일에 간섭하지 않아야 옳다. 따라서 대놓고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불편하신 데는 없나요? 기사단 일 때문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아프실까 걱정되네요.”
에르난은 두 나라의 귀족을 모아 기사단을 만든다고 했다. 그런 탓에 대관식 후 귀국하려던 사크틸라의 사절단은 예정보다 훨씬 오래 바르시나에 머물고 있다.
“괜찮습니다. 리세우 공이 영양제를 잔뜩 챙겨 줘서 복용 중인데, 효과가 꽤 좋더군요.”
“공작이?”
의외의 이름이 나왔다. 레이테는 신기했다. 프란세스크가 언제부터 대주교와 친분이 있었다는 걸까? 더군다나 그의 친구이자 주군인 에르난은 대주교를 싫어한다.
여왕의 의문에 찬 시선을 읽었는지, 시스로네스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저나 공작이나 서로를 열심히 감시하고 캐다 보니 미운 정이 든 셈이지요.”
아하.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본론을 꺼냈다.
“급한 일은 그럭저럭 정리된 것 같으니 이제 사크틸라의 인사 문제를 본격적으로 정비해야겠어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사크틸라의 새 추기경 임명부터 성좌에 요청할까 싶어요. 바르시나 같은 나라에도 있는 추기경이 사크틸라에는 몇 년째 한 명도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저는 알레한드로 시스로네스 대주교가 그 자리에 적합하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시스로네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 * *
“여왕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보고서와 씨름하던 에르난은 시종의 말을 듣자마자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왕의 움직임에 맞춰 비서들도 집무실에서 나갈 채비를 했다.
“…….”
안으로 들어온 레이테는 그들을 향해 말없이 오른손을 흔들었다. 여왕은 돌돌 만 종이뭉치를 들고 있었다.
몸을 흠칫거린 비서들이 슬그머니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놀러 오신 것이 아니구나.
말로 하지는 않아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레이테는 남편과 의논할 일이 생길 때마다 이곳을 찾아왔다. 그럼에도 여왕의 등장은 여전히 휴식시간을 의미하는 모양이다.
“어서 와요, 레이테.”
에르난이 환히 웃으며 아내에게 다가왔다. 부부는 서로를 끌어안고 키스했다.
그러는 사이 왕과 마주 보는 위치에 의자가 놓였다. 짧지만 깊은 입맞춤을 마치고, 레이테는 자리에 앉았다.
‘그나마 앉을 자리를 놓아 주는 정도의 눈치는 생겼네.’
실로 대단한 발전이다. 레이테는 가볍게 조소했다가, 가져온 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당신이 동의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어요.”
에르난은 의아한 듯 눈을 깜박거리며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그럴 법도 했다. 굳이 에르난이 확인하지 않아도, 레이테가 서명하면 그것은 부부가 모두 동의한 일이 된다.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두 나라의 일을 따로따로 처리하되, 공동 군주라는 형식은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에르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모습을 본 레이테가 말했다.
“교황께서 직접 받아 보실 문서이니 최대한 예의를 갖춰야겠지요. 그러니 당신 이름도 넣는 성의를 보여 주었으면 해요.”
레이테가 가져온 것은 시스로네스의 추기경 임명을 요청하는 서한이었다.?
#066
에르난은 탐브레에서 입수했던 문서를 떠올렸다. 대주교가 반역자에게 근친혼 허가를 대가로 추기경 임명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던 편지다.
물론 그것을 보고서 대주교가 여왕을 배신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 편지는 반역자를 제어하기 위한 미끼였다.
하지만 추기경 임명에 대한 욕심이 가짜일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격식이 조금 떨어지기야 하겠지만, 절차상 문제는 없어요. 어차피 내 서명은 당신의 동의를 포함하니까.”
“동의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반대한다면?”
“유감이네요. 그런데 당신은 사크틸라의 인사에 개입할 수 없어요.”
“내가 직접 개입할 수는 없어도, 서명해 달라며 가져오셨으니 의견은 말해 보지요. 시스로네스의 권한이 지나치게 커지면 곤란합니다. 물론 그만큼 유능한 사람도 드뭅니다. 그렇다 해도 당신은 그에게 너무 의존하는 것 아닙니까?”
아내를 위해서라도 대주교의 권력을 적당한 수준에서 억제할 필요가 있다. 에르난의 생각은 그랬다.
레이테는 눈을 치켜뜨고 남편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시스로네스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겠어요. 그 의견은 존중하지요. 물론 이 서한은 성좌로 보내질 거예요. 사크틸라의 여왕이 그렇게 결정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테는 남편에게 건넨 서류를 도로 가져가려 했다.
그 순간, 에르난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부인. 지금 상황이 어디서 봤던 것 같지 않습니까?”
“무슨 말인가요? 그리고 손은 놓고 이야기하시지요.”
“내 마음대로 할 것이니 당신은 얌전히 나를 따르기만 하라…….”
에르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내전이 끝나고 사크틸라 북부를 순회할 때였지요. 당신은 남편을 옆에 세워 두기만 할 뿐, 어떤 의견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께 저는 아직도 그런 존재입니까?”
레이테는 남편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파르르 떠는 보랏빛 눈이 싸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에르난을 노려보았다.
“작은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한다 해도, 중요한 일을 당신 모르게 처리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수시로 이곳을 찾았지요.
당신이 이 일에 불만을 가지리라는 예상은 했어요. 그래서 더더욱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어요. 당신 의견을 들으러 왔다고요!”
레이테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었다.
“그런데 뭐? 시스로네스에게 의존한다고요? 당신 눈에는 내가 고작 그런 존재로 보이나요? 여태 당신을 찾아와 정무를 논의한 여자는 대체 누구였죠? 혹시 당신도 내가 이곳에 놀러 왔다고 생각하나요?”
에르난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레이테는 편지를 집어 들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에르난은 아내를 쫓아 밖으로 나가려 했다. 앉은 몸을 막 일으키려던 그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아내의 마지막 말이 신경 쓰였다.
‘놀러 왔다……?’
그때, 집무실 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에르난에게 들려왔다.
“두 분이 언성을 높이면서 다투는 건 처음 보는데…….”
에르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무실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아무래도 부부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비서들이 슬그머니 자리를 뜬 모양이었다.
레이테가 ‘놀러’ 왔을 때처럼.
“모두 들어와!”
에르난이 소리쳤다. 비서들이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와 왕의 앞에 섰다.
“자네들은 대체……, 내 아내를 뭐라고 생각하나?”
왕의 살벌한 물음에 비서들은 몸을 떨었다.
* * *
레이테는 이대로 서찰을 성좌로 보내 버릴 작정이었다.
정말로 절차상 아무 문제가 없었다. 글의 마지막에는 분명히 ‘사크틸라의 왕 에르난과 여왕 레이테’라고 적혀 있다. 이것이면 충분했다.
더군다나 아라고는 대륙으로 향하는 배가 하루에도 몇 편씩 있는 항구였다. 사크틸라의 사절단 중 적당한 이를 하나 골라 당장 출발시킬 수 있다.
하지만 문제의 서찰은 레이테의 집무실 책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레이테는 일부러 남편에게 찾아갔다. 남편은 시스로네스를 싫어한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상대인 만큼, 부부의 의견을 되도록 맞추고 싶었다.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고 말았지만.
레이테가 시스로네스에게 의존한다는 에르난의 말은 대단히 불쾌했다. 모든 일을 혼자 하는 왕은 없다. 시스로네스는 레이테가 쓰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반응에 날카로워진 감정을 괜히 에르난에게 풀고 말았다. 목소리를 높이는 바람에 오히려 그 다른 이들이 떠들 거리를 새로 던져준 셈이 되지 않았나?
머릿속이 복잡한 가운데, 레이테는 작게 하품을 했다.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피곤하지만 침실행이 내키지 않았다.
그곳에 가면 남편이 있다. 레이테는 그를 만날 자신이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또 자신이 그에게 어떻게 행동할지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레이테는 주변을 힐끔 살폈다. 한쪽에서 대기하는 시녀들의 안색이 피곤해 보였다.
카테리나 정도가 예외일 뿐, 여왕은 시녀들과 딱히 사적으로 친한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저런 이유로 레이테는 그들을 경계했다.
하지만 여왕 탓에 이 시간까지 잠도 못 자는 것은 미안했다. 레이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돌아가지요.”
카테리나가 여왕에게 숄을 덮어 주었다. 아무리 아라고가 따뜻한 바닷가라지만 겨울밤은 춥다. 레이테는 썰렁한 복도를 지나 침실로 향했다.
침실이 가까워질수록 레이테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침실 주변의 기분 나쁜 분위기는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관심. 그리고 압박.
호기심을 차마 다 감추지 못하는 시선들에 둘러싸인 채로 레이테는 드레스룸에서 잠옷용 슈미즈로 갈아입었다.
“에르난은?”
레이테는 무심코 말을 꺼내자마자 후회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녀가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폐하께서는 침실에 계십니다. 오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오늘 하루 고생 많았어요. 모두 돌아가 쉬도록 하세요.”
부질없는 말이다. 대다수 시녀들은 처소로 돌아가는 대신 밤새 침실 문 안쪽의 일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카테리나. 당신은 아라고에 자주 왔다지요? 다른 아가씨들은 아직 이곳 왕궁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네요. 당신이 직접 처소까지 안내해 주세요.”
카테리나에게는 미안하지만, 레이테는 되도록 시녀들을 쫓아 버리고 싶었다. 지긋지긋하고 피곤하다.
여왕의 의중을 곧바로 파악한 카테리나는 다른 시녀들을 밀어내다시피 하며 밖으로 나갔다. 레이테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도톰한 가운을 입은 에르난이 창가에 앉아 몸을 웅크린 채 졸고 있었다. 레이테는 당황해 그에게 달려갔다.
“에르난! 여기에서 자면 어떡해요!”
레이테가 남편의 등을 두들겼다. 에르난은 어깨를 떨며 번뜩 눈을 떴다가 아내를 보더니 이내 나른한 웃음을 지었다.
레이테는 웃음에 답하기보다 남편을 일으켜 침대로 이동하기에 바빴다.
“한겨울에 무슨 탈이 나려고 이래요!”
팔꿈치를 괴고 모로 누운 에르난이 옆에 자리한 아내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늦었습니까.”
다른 손으로 아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은 평소의 에르난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일 좀 하느라고요.”
“당신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레이테는 가슴 한구석이 쿡 찔리는 듯했다. 남편과 마주하기 부담스러워 괜한 시간을 끌다 돌아왔으니까.
“왜 하필 창가에서 기다려요?”
“너무 피곤해서, 그렇게라도 있지 않으면 당신이 와도 못 일어날 것 같아서요.”
“……차라리 나를 데리러 오세요.”
졸음에 여전히 취해 있던 검은 눈이 별안간 빨간 이채를 띄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도 그 빛이 선명했다.
레이테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졸려도 이런 얘기는 절대 놓치는 법이 없다.
“내 생각이 짧았습니다. 내일부터는 당장 그렇게 하지요.”
“내일은 그럴 필요가 없을걸요? 낮에는 왕립 자선병원을 방문하고, 저녁에는 아라고 귀족을 전부 초대하는 연회가 있잖아요.”
“그러면 모레…….”
“……마음대로 하세요.”
레이테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에르난은 아내를 끌어안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레이테는 가만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낮에는 미안했습니다.”
“……아니, 저야말로 괜히 흥분했어요. 나와 당신의 생각이 다를 것을 뻔히 예상했으면서 화만 냈네요.”
“그거 곤란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일치해야 한다며 열과 성을 다해 선전하고 있는데.”
“그야 선전용이고요. 당신은 내가 아니잖아요.”
“아니다……?”
부부는 완벽하게 일치해야 한다. 레이테는 강박적으로 이것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앞으로도 부부의 일치는 쭉 강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레이테는 일치라는 개념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과거와 달라졌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내 남편은 레이테가 아니고 에르난이에요. 저보다 훨씬 키도 크고, 공부도 많이 했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지요. 괜히 잘난 척하기를 좋아하느라 한 번씩 어긋나고, 글씨는 잘 쓰는데 그림은 심하게 못 그리는 사람이지요. 아, 그리고 솔직히 조금 변태. 이렇게 많은 것이 다르답니다.”
레이테는 지나치게 가까이 있는 남편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에르난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는 아내의 뺨에 자신을 대고 부드럽게 비볐다.
“아, 레이테. 방금 그것 정말 좋았습니다.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아요.”
“당신 흉본 건데요?”
레이테는 입을 삐죽이려 했지만, 그에 앞서 에르난이 입술을 덮쳐 왔다.
“다시 한 번 미안합니다. 당신을 무시할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그걸 왜 꼭 지금 말씀하시나요?”
“당신이 나를 조금도 미워하지 않는 밤을 보내고 싶으니까.”
아내의 옷을 끌어내리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이런 남자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나.
“안 미워해요.”
레이테는 싱긋싱긋 웃으며 남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편안하고 따뜻하게 잠들 것 같다.
* * *
궁정인들의 관심은 조금씩 기사단 쪽으로 기울어 갔다. 언제 태어날지 알 수 없는 왕자보다는 기사단 결성을 위한 움직임이 당장 눈앞에 보이기 때문이었다.
리세우 공작 프란세스크가 왕궁에 모습을 자주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젊은 귀족을 한두 명씩 데리고 어딘가로 가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프란세스크를 따라간 이는 왕을 만나 면담, 검술 대련, 식사 등을 했다. 그 의미를 모를 사람은 없었다.
기사단 문제는 사크틸라인 사이에서도 화젯거리였다.
눈 대신 비가 한바탕 쏟아지고, 벌써 겨울이 끝나 갈까 착각할 만큼 따뜻한 낮이었다. 레이테는 사크틸라 사절단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두 사람, 시스로네스 대주교와 아르파 공작을 집무실로 불렀다.
새 기사단에 합류시킬 사크틸라 귀족을 추천해 달라는 에르난의 요청 때문이었다.
이미 궁정인 사이에서는 사절단의 젊은 귀족은 거의 다 입단하리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새 기사단에 알맞은 고귀한 혈통과 전투력과 교양과 신심을 갖춘……, 신심이라니.”
에르난의 서한을 살펴보던 아르파 공작이 고개를 들어 여왕을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한 그에게 레이테는 어깨를 으쓱였다.
“흠, 으흠……. 폐하, 저는 돈 에르난을 존경합니다. 따라서 그분과 바르시나를 무시하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만, 종교 기사단이라니……. 솔직히 상상이 전혀 안 됩니다.”
“괜찮아요. 저도 그 이야기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는걸요.”
일부러 일정을 맞추지 않는 한, 부부가 낮에 상대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두 나라 모두 새 조직의 구성에 바쁜 탓이다.
그래서 부부의 대화는 주로 밤에 이뤄졌다. 며칠 전, 레이테는 남편에게 기사단에 대한 자세한 구상을 들었다.?
#067
레이테는 남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채 누워 있었다. 에르난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자기 손가락에 감았다 풀며 만지작거렸다.
그의 다른 손에는 낮 동안 정리했던 서류가 들려 있었다. 레이테는 그것을 함께 올려다보았다.
“기사들은 신께 영혼을 바치고 그분이 기뻐하실 규율대로 살아야 할 겁니다.”
에르난은 친절하게도 중요한 부분을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
“드디어 제가 당신이 할 말을 잃게 했네요.”
“……네.”
레이테는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히죽 웃는 에르난의 얼굴에는 그럴 줄 알았다며 신이 난 기색이 역력했다.
“왜 하필 어울리지도 않는 종교 기사단을 택했느냐고 묻지 않을 겁니까? 대답 준비해 왔는데.”
“어……, 그래요. 말씀하시지요.”
“바르시나와 사크틸라는 자연환경, 언어, 정치와 경제 구조, 이외에도 많은 것이 비슷해 보이면서도 서로 다릅니다. 그나마 두 나라 모두 비교적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일 공통 요소가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 보니 종교가 떠오르더군요.
물론 바르시나에서 종교의 영향력은 미미합니다. 하지만 일 년에 딱 한 번만 기도할지라도 자신이 신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요. 여기에 우리 동맹의 결속력과 명분을 강화할 만한 잠재력이 있다고 봅니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다. 왕의 결혼만으로는 국가 차원에서 동맹이 완성되었다고 자신하기 힘들다. 공통점을 매개로 왕이 주도하여 교류를 강화하겠다는 뜻이다.
고개를 끄덕인 레이테는 이내 장난스럽게 말했다.
“으음, 아내에게 감화되어 뒤늦게나마 신앙심이 타올랐고, 그 열정을 어떻게 표출할까 고민하다 왕다운 규모로 일을 저질러 보겠다…… 같은 답이 아니어서 다행이에요.”
“당신 표정은 마치 그런 대답이 아니라서 실망한 것처럼 보입니다만.”
“에이, 설마. 그보다 사크틸라 방식처럼 종교와 세속이 지나치게 결탁한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을 텐데요.”
“그래서 균형을 조금 맞출 생각입니다.”
“균형?”
레이테가 눈을 깜박였다. 에르난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사단의 이름을…….”
곧 레이테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분명히 종교 기사단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요.”
아르파 공작은 황당해하며 서한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공작의 옆에서 내내 대화를 듣기만 하던 시스로네스 대주교가 말했다.
“공작께서도 황금 양모 이야기는 아시지요?”
“물론입니다만, 옛 이교도 신화이지 않습니까? 신을 섬기겠다는 기사단의 이름이 어찌…….”
이교 신화의 영웅들이 모여 보물을 찾고자 원정을 떠난다. 그 보물이 바로 황금빛 양모였고, 에르난이 정한 새 기사단의 이름이었다.
아르파는 기가 막힌 듯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반면에 시스로네스는 태연했다.
“좋은 이름입니다. 황금 양모는 용의 보물이었습니다. 우리 왕께서는 용을 무찔렀던 기사 아닙니까? 그러니 전리품이 있어야지요.”
물론 레이테는 그의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 에르난은 ‘적어도 대주교는 그 이름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며 빈정거리기도 했다.
그는 원래 세속의 일에 종교적 잣대를 강경하게 들이대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에르난이 느닷없이 이교 신화를 사용한 이유 또한 그 용이라는 공통점 때문이 맞다.
‘속마음을 이렇게나 바로 간파당하니 에르난이 대주교를 싫어할 만도 하겠어.’
대주교는 황금 양모라는 이름이 무척 만족스러운 듯했다.
“바르시나인의 관점에서 종교 기사단은 다소 부담스러워 보일 겁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옛 신화를 이용해 거부감을 중화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라고 봅니다. 더군다나 황금 양모는 나라에 번영을 가져온다지 않습니까? 명분을 챙길 만큼 모조리 챙기되, 균형도 적당하군요.”
저런 압도적인 찬사를 당사자인 에르난에게 직접 한다면, 두 사람의 사이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레이테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알 수 없다.
"맞아요. 저도 처음 들었을 때는 많이 당황했지만, 곱씹어 볼수록 나쁘지 않더군요. 에르난은 기사단 일에 무척 신경 쓰고 있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다 오시지요.”
여왕의 말에 시스로네스가 얼굴을 살짝 굳혔다.
“폐하, 괜찮습니다. 저는 정말로…….”
“정말로 아파 보이니까 제발 치료 좀 받으세요.”
시스로네스는 원래 몸이 쇠약했다. 그런 데다 여왕을 따라 아라고까지 오는 길이 꽤 부담스러웠는지, 최근 그는 부쩍 수척해졌다. 여왕은 그에게 몇 차례나 휴식을 권했다.
“하지만 폐하, 기사단 일뿐만 아니라 봄에 열릴 헤젤과의 회담 준비도 해야 합니다. 곧 헤젤의 사절이 올 텐데요.”
레이테는 아라고에 도착한 직후 심발로 백작의 보고를 받았다. 엔히크 왕자를 데리고 헤젤에 간 그는 부부의 친서를 왕에게 전했다. 왕은 삼국의 회담 제안을 대단히 반겼으며 그 자리에서 바로 아들에게 회담 참석을 명했다고 한다.
심발로의 보고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신속한 회담 준비를 위해 사절을 파견하겠다는 헤젤의 연락도 왔다.
“네. 알아요. 하지만 여기는 바르시나니까 사절 맞이는 바르시나의 일이지요. 정말 중한 일이 생긴다면 사람을 보낼 테니, 다른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쉬세요. 여왕의 명령입니다.”
“……예.”
시스로네스는 마지못해 답했다.
* * *
레이테는 시스로네스를 배웅하고 다시 집무실로 돌아와 이런저런 업무를 보았다. 해가 저물어갈 때가 되어서야 레이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오늘은 남편과 저녁 식사는 함께할 수 있겠다. 몸은 고단하지만 기분은 꽤 상쾌했다.
하지만 후련함도 잠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식당이 아니라 알현실로 향해야만 했다. 갑자기 찾아온 손님을 맞기 위해서였다. 헤젤에서 보낸 사절이 두 왕을 찾아온 것이다.
“정확하게 언제 온다는 말도 없다가 하필 오늘 오다니. 하여간 헤젤은…….”
에르난이 투덜거렸다. 오랜만에 아내와 느긋하게 식사를 즐길 줄 알았더니 틀어지고 말았다. 레이테도 남편의 말에 동감했다.
“누가 헤젤 아니랄까 봐 무례하기 짝이 없네요.”
더군다나 알현실에서 두 왕을 기다리던 헤젤인 중에는 영 반갑지 않은 얼굴이 있었다. 리리우를 수행해 사크틸라에 찾아왔던 브라간사 공작이었다.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왕 에르난과 레이테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브라간사는 부부 모두와 면식이 있으며 그중 하나와는 친척 관계이기도 하다. 그러니 헤젤이 사절로 보내기에 적당한 인물이다.
하지만 레이테는 공작을 다시 보자마자 껄끄러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숙부가 죽었으므로, 이제 그는 레이테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레이테는 그와 독대했을 때의 일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그가 손에 쥔 검을 잊을 수 없었다.
만남을 마치고 사정을 알아보니 시종의 단순한 실수였다. 하지만 태연하게 과거를 추억하면서도 어쩐지 여왕을 깔보는 듯하던 태도가 더해지면 역시 껄끄러웠다.
이런 마음을 내보일 수는 없다. 레이테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환영했다.
“오랜만이네요.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브라간사가 올 줄 알았더라면 시스로네스를 며칠만 더 늦게 요양 보낼 걸 그랬다. 레이테는 무심코 생각했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시스로네스를 경계하고, 레이테가 그에게 의존한다고 생각하는 에르난이 신경 쓰여서라도 레이테는 너무 그의 도움을 구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고 보니 시스로네스와 브라간사 이야기를 한 일이 없구나.’
내전이 끝나고 헤젤의 사절단은 일주일 정도 부부와 동행했다. 하지만 시스로네스는 에르난을 사크틸라 왕으로 선포하는 의식이 끝나자마자 부르고를 떠났다. 급하게 결정된 두 왕의 북부 순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시스로네스와 브라간사는 제대로 만날 틈이 없었다.
‘……아니, 결국은 내가 피해서야.’
레이테는 일부러 브라간사에게 관심이 없는 척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국왕 폐하의 친서, 또 왕자 전하의 친서도 함께 드립니다.”
“엔히크가?”
에르난이 놀라 되물었다. 그는 엔히크의 편지를 당장 읽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애써 참으며 헤젤의 왕, 벨류의 편지를 먼저 개봉했다.
벨류 왕은 과거 레이테에게 청혼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리고 겉보기로는 그녀와 결혼 가능성이 가장 컸다. 레이테가 에르난과 결혼할 시간을 벌기 위해 그와 협상하는 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과거 따위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편지는 부부를 향한 축복으로 가득했다. 자우메 왕의 서거에 대한 애도의 메시지도 잊지 않았다.
심지어 항의 사절이랍시고 손녀를 파견한 일조차 없던 일로 여기는 듯했다. 엔히크의 일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건 조금……, 뭔가 수상한데.’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은 꺼내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손녀도, 아들과 바르시나의 사건도 작은 일은 아니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는 쪽은 부자연스럽다.
레이테가 먼저 읽고 건네준 엔히크의 편지는 외교 사절이 가져온 것치고는 대단히 사적인 뉘앙스로 가득한 글이었다.
편지는 심발로의 도움으로 귀국길이 매우 평화로웠다는 감사 인사로 시작했다. 부부를 향한 축복은 제 아버지의 것보다 훨씬 더 진정성이 느껴졌다.
두 분의 소식을 리리우에게 전해 주었더니 그 아이도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리리우는 국왕께 자신도 회담에 참석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요. 공주로서 외교 무대를 거듭 경험해 볼 필요가 있다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외교 경험보다는 두 분을 다시 만나고픈 마음이 큰 듯합니다. 특히 여왕 폐하를 어서 뵙고 싶다며, 겨울이 제발 빨리 끝나 달라고 노래를 부르더군요.
이 대목에 이르니 에르난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리리우가 부부왕에게 보이는 관심은 멋진 어른에 대한 동경에 가까워 보였다. 적어도 레이테를 대하는 태도만큼은 분명히 그랬다. 어떤 방식으로든 호의는 좋은 일이다.
“회담도 회담이지만, 공주와의 재회도 대단히 기대되는군요.”
여왕이 말하자 브라간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레이테는 이를 살짝 악물었다. 고갯짓만으로 답하는 공작의 태도가 어쩐지 건방져 보여 거북했다.
자꾸 예민해지는 최근의 기분 탓일까? 하지만 레이테가 브라간사에게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독대했을 때 그에게 느꼈던 불길함이 다시 떠올랐다.
브라간사는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에르난을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 저희 왕께서는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새로운 시대를 무척 기대하고 계십니다. 회담을 통해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기를 기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따로 만나 뵐 수 있으면 좋겠군. 그러기 위해서라도 회담이 무사히 이뤄지기를 바라네.”
“예. 성공적인 회담을 위해 일단 헤젤에서 필요로 하는 의제 몇 가지를 추려 왔습니다. 먼저 그것들의 논의 여부부터 확실히 하고자 합니다.”
지난날의 브라간사는 리리우만 수행할 뿐 별다른 행동이 없었다. 반면 지금은 인사하는 자리에서부터 본론을 꺼낼 만큼 적극적이다.
헤젤도 회담 개최에 확실히 긍정적인 모양이다. 좋은 징조다.
흡족한 미소를 짓던 레이테는 불현듯 위화감을 느꼈다.
부부는 나란히 앉아 있지만 브라간사의 시선은 오로지 에르난만을 향했다. 또 그는 에르난에게만 말했다. 마치 레이테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듯이.
“좋은 생각이오. 부인, 괜찮겠지요?”
에르난이 아내를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겠냐니? 영문을 몰라 침묵하던 레이테는 곧 남편의 말뜻을 깨달았다. 시스로네스가 부재중일 때 일을 진행해도 상관없느냐는 뜻이다.
문제없다. 레이테는 이렇게 답하려 했다. 하지만 브라간사가 먼저 말했다.
“아, 여왕 폐하께서야 당연히 부군께 동의하시겠지요.”
레이테의 손이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068
브라간사를 상대하며 레이테가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는 금방 또렷해졌다.
헤젤인들이 아라고에 온 지 닷새째였다. 오전 내내 레이테는 카테리나를 보지 못했다.
시녀가 반드시 하루종일 여왕을 수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던 카테리나가 없으니 허전했다.
점심식사를 마친 레이테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카테리나가 식당에 나타났다.
“죄송합니다, 폐하. 헤젤에서 온 의전관이 면담을 청하기에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한참 걸렸어요.”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먼저 폐하께서 못 드시는 음식이 있는지 물었어요. 그 외에 잠자리의 변화에 민감하신지, 추위나 더위는 얼마나 타시는지 같은 질문도 받았고요.”
여왕에게 직접 물을 수는 없으니, 관리는 여왕과 가장 가까운 시녀인 카테리나를 찾은 모양이었다.
“심지어 폐하께서 입을 드레스의 색까지 묻더라고요. 몇 달 뒤에 입으실 옷을 지금 어떻게 알겠느냐 답했더니, 그러면 폐하께서 선호하는 색을 알려 달래요. 푸른색을 좋아하시지만 회담은 봄에 열리니 더 화사하게 입을 수도 있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괜찮네요. 또 다른 질문은 없던가요?”
“평소에 얼마나 호화로운 접대를 받으시나, 좋아하는 봄꽃은 무엇인가……, 이런 것까지 무척 꼼꼼하게 물어 왔어요. 하지만 저는 폐하를 모신 지 오래되지 않은지라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으니, 사크틸라인 시녀에게 묻는 편이 낫겠다고 답변했습니다.”
카테리나가 차근차근 말했다. 그것을 듣는 여왕의 얼굴은 썩 밝지 않았다.
“그래요, 잘 놀고들 있네요…….”
“네?”
노골적인 빈정거림에 카테리나는 바짝 긴장했다. 드디어. 그녀는 자신의 말에 여왕이 어떻게 반응할지 어느 정도 예상한 상태였다.
“카테리나 당신이 아니라, 헤젤 말이에요. 첫날의 접견, 환영 연회, 항구 공식 견학. 남편과 함께 참석한 행사 외에 그들이 따로 저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어요. 대신 옷이니 꽃이니 하는 것이나 묻고 다닌다 이거죠…….”
“버, 벌써 나설 필요는 없으세요. 폐하께서는 본회담 때에 중대사를 논하셔야지요. 잡다한 준비는 폐하를 모시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으음, 카테리나. 그게 말이죠.
‘폐하, 혹시 의제 논의에 참석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폐하의 의중을 직접 들을 기회를 주십시오.’
브라간사 공작이 어제 이렇게 말했다더라고요, 에르난에게만. 그리고 에르난이 제게 이 이야기를 전해 주었지요.”
레이테는 헤젤 식의 느긋한 말투와 콧소리를 흉내 냈다.
헤젤의 이웃인 사크틸라의 여왕으로서, 레이테는 그들의 언어를 정식으로 배웠다. 따라서 모방은 무척 그럴듯했다. 하지만 카테리나는 웃을 수 없었다.
“첫날부터 브라간사의 태도가 무언가 수상했지요. 유독 에르난에게만 신경 쓴다 싶었더니만…….”
섬세하기 그지없는 접대 준비의 내용을 듣고 나니, 레이테는 헤젤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외교 무대의 주연으로 여왕이 설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왕을 극진히 대접하되 교섭 상대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아마도 회담에 앞서 상대국의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일 터다. 사크틸라와 바르시나는 결혼으로 동맹을 맺었다. 따라서 두 나라를 상대해야 하는 헤젤은 불리한 입장이다.
레이테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어디서 지저분한 수작질이야.”
험악하고 살벌한 말이 들리자 카테리나를 비롯한 시녀들이 놀란 눈으로 여왕을 바라보았다. 레이테는 그녀들을 향해 방긋 웃음 짓고, 성큼성큼 걸어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여왕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쳤다. 늘 기품과 여유가 넘치던 평소의 모습과는 달랐다.
복도의 귀족들이 여왕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레이테는 그것을 전부 무시했다. 뒤늦게 따라 나온 시녀들이 허둥대며 그녀를 쫓았다.
모퉁이를 휙 돌자 경비병이 문 앞을 지키는 방이 나타났다. 에르난의 집무실이다.
시종이 여왕의 방문을 알리기도 전에, 레이테는 자신의 손으로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높은 목소리로 밝게 외쳤다.
“역시, 모두 여기 계셨군요!”
거칠게 문을 열던 모습이 거짓말 같아 보일 정도로, 레이테는 우아하고 나긋나긋한 걸음걸이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의 주인인 에르난과,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고위 인사 여럿, 그리고 브라간사 공작을 필두로 한 헤젤의 사절 다수가 회의용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남편의 뒤로 가 선 여왕은 그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몸을 살짝 기댔다. 레이테는 회의 참가자들의 반응을 살폈다.
사크틸라인과 바르시나인은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눈치였다. 그들은 겸연쩍은 시선을 자기들끼리 교환했다. 펼쳐놓은 서류를 괜히 넘겨보는 등 딴청을 부리기도 했다.
에르난은 아내의 왼손을 잡아 살포시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인사와 달리, 그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아내가 등장하고서야, 너무 당연해서 전혀 생각지도 못하던 문제를 깨달았을 테니.
“안녕하신가요, 여러분. 늦어서 미안해요. 특히 헤젤 분들께 사과드려요.
많이 바쁘시지요? 이 자리를 남편에게만 알려 주고 여왕을 잊다니. 하지만 괜찮아요. 어젯밤 남편에게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헤젤인들은 굳은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역시.’
그들의 반응은 여왕에게 결례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배제한 여왕이 등장해 당황한 것이다.
브라간사 공작은 다른 이들과 달리 평정을 유지한 채로 여왕을 바라보았다.
주동자는 틀림없이 저 남자다. 레이테는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부드러운 눈웃음을 짧게 지어 보였다.
그리고 여왕은 남편의 옆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가느다란 손가락의 움직임이 지독하게 우아했다.
“어쩔 수 없지요. 여러분들이 지나치게 바쁜 탓에 내 자리를 빠뜨리는 실수를 한 것이겠지요.
괜찮아요. 자리가 없을 때는 남편에게 앉으면 그만이랍니다. 이전에도 그랬잖아요?”
레이테의 손이 남편의 얼굴선을 부드러이 쓸어내렸다. 살랑거리는 아내의 자극에 에르난은 작은 한숨을 짧게 내쉬고 이를 악물었다.
코른 후작이 매서운 눈초리로 시종을 노려보았다. 시종이 허겁지겁 의자를 들고 와 에르난의 왼편에 놓았다. 레이테가 정말로 남편의 무릎 위로 엉덩이를 걸치려던 차였다.
“고마워요, 후작.”
레이테가 방긋 웃었다. 후작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 상황의 맥락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세 나라의 왕족이 서로 사이가 좋다고 하여 그것이 평화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현실 정치에서는 언제나 이해득실을 계산할 뿐이다. 헤젤에게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동맹은 악재였다.
결혼한 남녀를 갈라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두 나라 간의 유대를 흔들 필요는 있다.
그래서 헤젤은 회담 과정에서 레이테를 배제하려 한다. 상대할 적도 줄이고, 두 나라의 갈등 또한 유도하려는 의도다.
코른은 결코 여왕을 좋아하지 않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여왕을 충실히 모셨다. 마음에 들지 않아 반항한다 해도 왕은 왕이다.
이런 마음가짐은 다른 바르시나인도 마찬가지다. 사크틸라인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레이테가 직접 나타나기 전까지, 누구도 그녀의 부재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녀가 회담에서 맡을 일은 따로 있으니까.
레이테는 에르난을 내조해야 한다. 그것이 아내의 역할이다.
그렇다면 여왕의 역할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리에 앉은 레이테는 남편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얼어붙다시피 한 주변의 분위기와 달리 그녀의 손길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것이 에르난을 더 부끄럽게 했다.
‘내가 레이테에게 회의가 있다는 걸 알려 주고도 이게 무슨 멍청한 상황이지……?’
변명은 할 수 있다. 바르시나와 사크틸라는 한 나라가 아니다. 따라서 필요 시 협력할 뿐, 부부는 기본적으로 따로 업무를 보았다.
회담 준비를 위한 헤젤 사절단과의 회의는 에르난의 집무실에서 소규모로 이뤄졌다. 에르난으로서는 자연스럽게 자기 업무의 연장선으로 회의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치졸한 변명일 따름이다. 에르난은 자신이 아내, 정확히는 여왕의 존재를 잊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잠깐만.’
차마 레이테를 바라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에르난의 뇌리에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것도 아니니, 저희가 폐하의 집무실로 찾아가겠습니다. 폐하께 부담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브라간사에게 회의 참석을 부탁받으며 들었던 말이었다. 에르난은 별생각 없이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설마, 일부러 레이테를 떠올리지 못할 상황을 만든 건가?’
에르난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남편의 그런 모습을 레이테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남편에게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레이테는 그도 헤젤에 속아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헤젤은 이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 냈다. 며칠 동안 그들이 여왕에게 보인 태도에 레이테가 카테리나에게 들은 이야기까지 조합해 보면 틀림없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남편이 아니라 저들을 향해야 했다.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난감해진 이들에게.
“여왕 폐하.”
그 순간, 브라간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레이테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헤젤을 대표하여 사과드리겠습니다. 저희의 실수를 용서해 주십시오.”
실수는 무슨, 틀림없는 고의다.
왕궁은 여왕이 언제 아들을 출산할지 궁금해하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그들에게 레이테는 왕이기에 앞서 어머니가 될 여성이었다. 헤젤은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 은근슬쩍 여왕을 소외시키려 했다.
‘궁정 분위기만 보고서 내가 서러움에 구석에서 흐느끼기나 할 귀부인일 줄 알았나 보지.’
그러나 레이테는 빈껍데기 왕으로 있을 생각이 없었다.
공작쯤 되는 이가 타국의 왕에게 엎드리다시피 하는 일은 흔치 않다. 여왕이 그들의 생각과 달리 쉽게 휘두를 수 없으리라 판단해 순순히 사과하는 것이다.
레이테의 기분은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브라간사는 그녀와 구면이다. 결국 지난 만남으로 브라간사는 그녀를 얕보게 된 셈이다.
그렇지만 모욕받았다고 해서 회담을 엎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작하기도 전에 갈등을 키울 수는 없었다.
어차피 비겁한 계획은 들통났다. 헤젤은 여왕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못한다.
“공작, 그만 일어나세요. 괜찮습니다. 바르시나에 오고서 계속 분주했으니 실수할 수도 있지요.”
레이테는 깃털이 살랑거리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은 이제 회의를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브라간사의 말로 인해, 상냥함을 한껏 연출하던 레이테의 표정은 굳어 버렸다.
“저희 쪽 의전관의 보고를 이곳에 오기 직전에 받았습니다. 오전 내내 폐하의 시녀와 면담했다는데 그 내용은 많이 부실하더군요. 문제를 알면서도 당장 회의 준비가 급하다는 핑계로 더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잠깐, 지금 하는 이야기가 다르잖아?’
레이테는 오전의 같잖았던 취향 조사를 따지러 온 것이 아니었다.
일부러 논점을 흩트리려 하나? 이만 모른 체 넘어가려 했지만,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대놓고 무례함을 지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브라간사는 레이테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폐하께서 직접 찾아오실 만큼 불쾌해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의 불찰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저희 의전관이 직접 폐하를 찾아가 상담해도 괜찮겠습니까?”
“……네?”
“반도의 평화가 찾아올 따스한 봄, 가장 아름다운 꽃이 되실 여왕 폐하를 결코 소홀히 대접하지 않겠습니다.
회의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여왕 폐하를 모실 준비조차 제대로 못 하면서 감히 무슨 논의를 하겠다는 말입니까? 저희는 큰 책임을 통감하며, 물러나 반성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브라간사는 레이테의 손을 억지로 잡아당겨 입을 맞추고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다른 헤젤인들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잠깐만요. 잠깐…….”
레이테는 헤젤인들을 멈춰 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순식간에 밖으로 나가 버렸다.?
#069
붙잡을 새도 없었다. 헤젤 사절단이 사라지자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귀족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레이테는 안색이 파리해져 있었다. 에르난은 그녀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설마…….”
왕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소란이 단숨에 멈추고 적막이 찾아왔다. 입술을 한참 달싹거리며 말을 고르던 에르난은 쥐어짜다시피 경고를 내뱉었다.
“……지금 여왕이 이곳에 괜히 찾아왔다 생각하는 이는 없겠지.”
굳은 얼굴로 귀족들을 살피던 에르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손을 맞잡은 레이테도 따라서 일어나게 되었다.
“코른. 헤젤 측에 강력하게 항의해야 할 거요.”
코른 후작은 헤젤 사절의 접대 책임자였다.
“물론입니다, 폐하.”
“무례한 행동을 저질러 놓고 사과조차 없이 도망치는 자들과 무슨 대화를 할 수 있지? 확실한 사과를 받아내기 전까지 협상은 없소.”
“예.”
코른은 단호한 목소리로 답하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는 곧바로 사절단을 쫓아갈 것이다.
에르난은 아내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흐릿했고 호흡은 불규칙했다.
지금과 비슷한 상황은 전에도 있었다. 바르시나 귀족들이 여왕의 자리를 의도적으로 챙기지 않았던 일이다.
당시 레이테는 남편보다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무슨 차이일까. 왜 아내는 그때보다 훨씬 동요할까?
잠시 고민하던 에르난은 아내의 손을 쥔 채로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레이테가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부부를 붙잡는 이는 없었다. 회의에 참석한 귀족은 물론, 복도에 모여 있던 궁정인도 마찬가지였다.
느닷없이 나타나 평소와는 다른 거친 모습으로 집무실에 쳐들어가던 여왕. 얼마 지나지 않아 쏟아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사라진 헤젤의 사절단. 잔뜩 굳은 얼굴로 그들을 쫓아간 코른 후작. 그리고 두 왕의 등장.
집무실 안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했다.
아내를 거의 끌고 갈 정도로 빠르게 걷던 에르난은 이내 속도를 늦춰 그녀와 발을 맞췄다. 곧 그들은 왕궁 밖으로 나왔다.
왕궁은 작지만 아라고 자체는 대단히 큰 도시다. 마차가 다닐 만한 큰길을 제외하고는 작은 골목이 왕궁 주변에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부부는 한참 동안 말없이 골목을 걸었다. 특별한 목적지는 없다. 그냥 발이 가는 대로 걸을 뿐이었다.
길을 이끄는 사람도 없었다. 때로는 에르난이, 때로는 레이테가 앞장섰다.
에르난은 잠시라도 조금 전의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자신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도망은 치더라도 아내를 놓을 수는 없었다.
레이테는 아예 다 잊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태우지 못한 분노가 무력감이 되어 그녀의 숨을 막히게 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남편까지 잊고 싶지는 않았다.
주변의 모습은 왕궁 근처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어두컴컴하고 허름한 길이었다. 빈민가라 부를 수준은 아니지만, 빼곡하게 세워진 건물은 낡고 칙칙했다. 어딘가에서 불쾌한 냄새가 풍겼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거리에 어울리지 않게 고급스러운 차림의 부부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라고에 여러 번 왔던 에르난조차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평복 차림의 호위기사 서너 명이 부부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둔 채 뒤를 따르고 있었다.
‘갑자기 나왔는데 금방 따라붙다니. 잘 훈련되어 있군.’
에르난은 잠시 생각했다. 돌아가면 간단한 포상이라도 내려야겠다.
돌아가면.
결국 이 방황은 수치심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잠시 저지르는 일탈일 뿐이었다.
부부가 돌아갈 곳은 정해져 있다. 두 사람 중 누구도 그곳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만 하며, 어차피 그러지 않을 마음도 없었다.
우리는 왕이니까.
두 왕은 걸음을 멈췄다. 조금 전까지 골목을 헤매던 그들의 시야가 넓게 트이더니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지나온 골목과도, 좁고 답답한 왕궁과도 다른 청명한 세상이었다. 바다 위로 비추는 햇살은 눈부셨고 하늘은 맑았다.
부부가 처음 함께 갔던 바다는 반도의 북서쪽 끝이었다. 레이테는 문득 자신이 그때와 비슷하게 갑갑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두 곳의 풍경은 완전히 다르다.
끝이 보이지 않던 망망대해는 음울한 인상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반면에 이 바다는 편안했다.
파도가 조금 높게 친다. 겨울답게 주변 공기도 서늘하다. 그러나 삭막하지 않다.
함께하는 이 또한 그때와 같으면서도 달랐다. 소통을 가로막는 벽 따위는 없다. 지친 중에도 놓고 싶지 않은 손이 있다.
“아라고를 떠나기 전에……, 바다를 다시 보러 와야겠어요. 그때면 이보다 더 평화롭겠지요?”
조금 떨리며 나오던 레이테의 목소리는 이내 평온해졌다.
“아닙니다. 오가는 배들이 엄청나게 늘어나 시끄러워집니다.”
에르난의 답을 들은 레이테는 풋 하고 웃었다. 남편의 말이 맞다. 봄이 오면 장사가 더 활발해질 것이다.
그때면 부부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 회담을 위해 사크틸라와 헤젤의 국경으로 간다.
회담. 그것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두 왕을 뒤흔들었다. 벌써 지긋지긋해졌지만, 누구도 그만두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되니까.
바닷가를 따라 한참 걷던 부부는 다시 시내로 발길을 옮겼다. 그들은 작은 광장으로 들어섰다.
광장 한쪽에는 조그마한 정원이 있었다. 한겨울의 정원이 다른 계절보다 화려함이 덜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색색의 수선화가 피어 생기를 드러냈다.
수선화는 어리석음을 뜻하는 꽃이기도 했다.
“속았어요.”
레이테가 말했다. 바다에서와 달리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지친 목소리였다. 그녀의 몸이 살짝 비틀거리자 에르난이 안아 받쳤다.
“회의에 참석해 나를 따돌리려는 헤젤의 계획을 망치면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실은 내가 어떻게 행동해도 분열은 정해진 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여왕이 회담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든 그렇지 않든, 여왕의 역할이 무엇이냐며 시끄러워지면서 갈등이 일어날 테지요. 결국 그들의 의도대로 되는 걸까요?”
회의 참석자는 부부왕보다 나이도 경험도 많은 이들이다. 그들도 헤젤의 꿍꿍이는 충분히 눈치챘을 것이다.
그래도 분열은 피하지 못할 것이다. 여왕이 회담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으므로.
동등하다는 외침은 이토록 공허하다.
브라간사와 그 일행은 자리를 떠날 때까지 딴청을 피우면서 분열만 유도한 채 자신들의 책임은 피해 버렸다.
코른을 통해 강력하게 항의하여 사과는 받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열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헤젤이 회담을 통한 평화에 관심이 있기나 할까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우리는 겨우내 당신 문제로 싸우기나 하라고 그들이 유도한 겁니다. 그리고…….”
에르난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목울대가 떨렸다.
“그리고 나 또한 속아 넘어가 당신을……. 아니, 이건 변명입니다. 그저 내 자신에게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내 깊은 곳에서, 아직도 당신은 동반자가 되지 못했던 것일까요……. 죄송합니다.”
여태껏 레이테가 들어보지 못한, 짙은 회한이었다. 에르난이라는 사람의 말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과 아내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었다.
‘안 돼. 싫어……!’
레이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그냥 속은 거예요. 속았을 뿐이니까 그런 의심은 하지 말아요. 제발…….”
아내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에르난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아닙니다.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 답답한 나머지 실언했습니다. 레이테, 당신은 내 동반자가 맞아요. 우리는 온 세상 사람과 신의 앞에서 계약으로 선언해 하나로 묶인 부부입니다.”
에르난은 아내를 끌어안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레이테는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때, 에르난의 손등 위로 눈송이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아라고에서는 수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눈이다.
몸에 닿자마자 녹던 눈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쌓이기 시작했다. 손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머리에도 눈이 내려앉았다.
“……일단 들어갑시다.”
에르난이 아내를 안은 팔을 풀어내려는데, 레이테가 말했다.
“그리고 사랑으로도.”
아. 에르난은 움직임을 멈췄다.
“우리는 문장에 그림까지 따로 그려 넣어 온 세상에 자랑할 만큼, 사랑으로 묶인 존재 아닌가요? 왜 그건 빼먹어요?”
평소의 레이테라면 훨씬 더 날카롭게 따져 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조금 뿌루퉁한 목소리여서 마치 투정을 부리는 듯했다.
귀엽다. 에르난은 웃으려 했다. 하지만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그는 몸을 흠칫거렸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기를 쓰는 레이테가 보였다.
가볍게 투정이라 부를 것이 아니었다. 레이테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남편이 없다면 그녀는 생존할 수 없다. 그녀에게는 반드시 남편이 필요하다.
그리고 에르난은 한 가지를 더 알 수 있었다.
“혹시 그것도 잊었나요……?”
사랑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것만은 절대로 아니야.’
속임수. 미숙함. 아직도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무심함.
그것들을 털어내 버리리라 다짐하며, 에르난은 몸을 살짝 굽히고 아내와 이마를 맞댔다.
“물론 아니지요. 당신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사랑으로 묶여 있습니다. 나는 그 매듭을 풀 마음이 없어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나도 마찬가지예요. 안 풀어요.”
두 사람의 팔이 엉키고 입술과 혀가 부드럽게 얽혔다. 상대의 온기가 흘러들어 왔다.
눈송이가 커다랗게 변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꼭 껴안은 두 사람의 위로 눈이 자꾸만 쌓였다.
춥지만 상관없다. 부부는 그저 상대를 더 안고 싶었다.
레이테가 발뒤꿈치를 살짝 올렸다. 이러면 남편에게 더 깊이 안길 수 있다. 그러자 에르난은 아내의 허리와 다리를 단단하게 붙잡아 아예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꺅!”
레이테는 남편을 한참 위에서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레이테와 눈을 맞췄다.
쏟아지는 하얀 눈 사이에서 검은 머리카락과 눈은 유독 또렷하게 보인다. 레이테는 그것을 혀로 핥으면 단맛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단맛이 강한 헤레스는 검어 보일 정도로 짙은 색을 띤다. 머릿속을 온통 행복하게 하는 달콤함에 취하고 싶었다.
“까맣네요.”
“무엇이?”
“당신. 잘 어울려요.”
레이테가 배시시 웃었다. 에르난은 부드러운 웃음이 피어오른 아내의 얼굴을 손으로 만지고 싶어졌다. 평소보다 더 푹신푹신한 촉감일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손은 아내의 몸을 받치고 있었다. 결국 손 대신에 뺨과 뺨이 서로 맞닿았다.
레이테가 먼저 얼굴을 가볍게 흔들며 비벼 왔다. 에르난은 눈을 감고 아내의 감촉을 음미했다. 하아, 달뜬 한숨이 입에서 절로 흘러나왔다. 숨결이 귀에 닿자 레이테가 어깨를 움츠렸다.
“흐응…….”
작디작은 자극에도 레이테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남편의 두 뺨 대신 어깨를 붙잡았다. 남편의 팔에 의지해 들어 올려진 상태에서는 이쪽이 훨씬 안정적인 자세일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얽혔다. 비스듬하게 겹친 콧등으로 눈이 내려앉으며 녹아내렸다. 그러나 입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에르난은 레이테를 꽉 붙잡고 제자리에서 돌기 시작했다.
“잠깐, 잘못하면 넘어져요!”
다급하게 입술을 뗀 레이테가 외쳤다. 그러나 에르난은 아내를 올려다보기에만 바빴다.
몇 번 몸을 휘청거렸지만 에르난은 결코 레이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난처해 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경고를 계속 무시하고 싶어지고 만다.
그녀의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 점점 더 짙어지고, 미간을 찌푸리며 이제 날카롭게 무언가를 외칠 분위기가 되고서야 에르난은 움직임을 멈췄다.?
#070
남편에게 안긴 채로, 레이테는 잠시 눈이 쏟아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크틸라에서는 겨울이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사크틸라. 레이테는 몇 달째 그곳을 떠나 타국에 와 있다.
좋은 추억보다는 괴로운 기억이 더 많은 땅이었다. 에르난과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의 삶은 감금 혹은 그에 가까운 상황으로 점철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사크틸라의 주인이다. 그것만으로도 사크틸라를 그리워할 이유는 충분했다.
‘어차피 봄이면 돌아가는데, 뭐.’
레이테는 감상을 떨쳐낼 겸 머리를 흔들어 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말했다.
“엄청나게 쌓일 거예요.”
“난리 나겠군요. 아라고는 이렇게 눈이 오는 날이 상당히 드뭅니다. 내일이면 도시가 완전히 마비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큰 사고는 없어야 할 텐데.”
무서운 속도로 눈이 쌓이고 있었다. 에르난의 발이 눈에 덮여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레이테, 춥지는 않습니까?”
“괜찮아요. 눈은 많이 내리지만 바람이 안 불어서 그러나.”
한 팔로 아내를 받친 에르난은 다른 쪽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려 남은 눈을 치워 주었다. 꼼꼼히 빗어 두어 결이 좋은 머리카락이 에르난의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흘러내리며 반짝거렸다.
남편은 레이테의 은발을 아꼈다. 만져 주는 것은 좋다. 하지만 이런 날씨에 그의 손이 시리지 않을까?
레이테는 에르난의 어깨를 짚은 양손을 조심스레 들고 에르난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손안으로 호 하고 입김을 불어 넣었다.
“당신이야말로 추울까 걱정인걸요.”
“아…… 레, 레이테…….”
무엇에 놀랐는지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남편은 귀여웠다. 레이테는 다시 한 번 숨을 훅 불어넣었다. 에르난이 몸을 움츠렸다.
레이테는 키득키득 웃으며 한 손으로 남편의 까만 머리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탈탈 털어내고 그를 와락 껴안았다.
“어, 레이테! 잠깐만!”
에르난은 제자리에서 비틀거리며 다급한 외침을 터뜨렸다. 무게 중심이 갑자기 움직이자 레이테를 붙잡기 힘든 모양이었다.
뒤늦게나마 레이테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상황을 수습해 보려 했으나 무리였다. 에르난은 몇 걸음 뒤로 걷다가 발이 꼬여 주저앉았다.
“꺄악!”
레이테는 남편의 위로 넘어졌다. 조금 아프지만 그녀는 남편이 더 걱정이었다. 레이테는 자신의 몸을 추스르고 남편도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에르난은 아내를 끌어안더니 아예 뒤로 벌러덩 누워 버렸다. 레이테는 한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다른 손으로는 눈을 짚으며 쓰러졌다.
‘차가워!’
겨우 손만으로도 이럴진대, 온몸이 눈에 파묻힌 에르난은 큰일 나지 않을까? 벌써 빨개진 그의 귀가 보였다.
동시에 그는 웃고 있었다.
너무나 시원하게 웃는 바람에, 레이테는 에르난을 일으키려던 것조차 잠시 망각한 채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최근 보았던 남편의 어느 모습보다 더 즐거워 보였다.
“안 추워요? 아픈 곳은 없나요?”
일단 일으켜 세워야 할 텐데, 말부터 걸고 말았다.
“당연히 춥습니다. 아픈 곳은 없고요.”
“일단 일어나요.”
“싫습니다.”
에르난은 아내를 꼭 껴안았다.
무슨 짓이야! 당황한 레이테가 몸부림치자 에르난은 그녀에게 입을 맞춰 왔다. 농밀한 키스에 레이테는 눈앞이 흐려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은 밖이며, 심지어 눈밭이다. 레이테는 어떻게든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몸만 옆으로 기울 뿐이었다. 에르난이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탓이다.
대신 그녀는 옆으로 쓰러질 뻔했다. 에르난은 재빨리 손을 뻗어 레이테의 머리를 받쳤다.
덕택에 레이테의 머리에는 차가운 눈이 직접 닿지 않았다. 하지만 에르난은? 그는 손에 장갑을 낀 것도 아니었다.
이만 놓아달라는 뜻에서 레이테가 머리를 휘저었다. 에르난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레이테가 날카롭게 외쳤다.
“눈 위에서 이러다 동상이라도 걸리면 어떡해요!”
“괜찮습니다. 당신이 따뜻하게 녹여 줄 텐데. 아니, 애초에 내가 얼어붙을 리가 없습니다. 당신을 갖고 싶어요. 그게 먼접니다.”
에르난이 다시 입술을 덮쳐 왔다. 거침없이 아내를 탐하는 혀의 움직임에 레이테는 몸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아……, 읏.”
레이테는 작은 신음밖에 흘릴 수 없었다.
그녀는 비로소 남편이 괜찮다고 하는 의미를 깨달았다. 아내를 응시하는 눈은 차가운 눈밭 한가운데에 어울리지 않게 뜨거웠다.
“아, 하아…….”
몸을 가득 채운 욕망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에르난이 벌떡 일어났다.
“설마하니 여기서 계속했다가는 큰일 나겠지요. 여기는 시내 한복판입니다. 더군다나 눈도 와서 추워요.”
“그, 그렇지요…….”
사실 레이테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 막 사로잡히던 차였다.
“대신…….”
에르난은 다시 아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여기서 아주 가까운 곳에 제가 잘 아는 사람의 저택이 있습니다.”
에르난은 거침없이 발을 옮겼다.
저택은 정말로 가까웠다. 광장 한쪽의 골목으로 들어가 모퉁이를 돌자마자 문이 보였다. 에르난은 망설임 없이 문을 두들겼다.
“누구십니까?”
하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문을 열었다. 에르난은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하인이 먼저 그를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폐, 폐하!”
그것으로 충분했다. 에르난은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은 평범한 외관에 비해 내부가 꽤 넓고 화려했다.
중정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눈사람을 만들기에 한창이었다. 어린 하녀부터 고급스러운 망토를 두른 중년의 귀부인까지 옹기종기 모여 오랜만에 내리는 눈을 즐기기에 바빴다.
국왕 부부를 본 그들은 각자의 움직임을 멈추고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하녀의 손에서 눈사람에게 씌우려던 모자가 바닥으로 툭 미끄러졌다.
레이테는 귀부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도 인상이 어쩐지 낯익었다. 누구지?
“오랜만입니다, 부인. 이런 식으로 인사를 드려서 죄송한데, 일단 급하니 방 좀 빌리겠습니다.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마저 눈사람을 만드십시오.”
할 말을 마친 에르난은 귀부인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회랑의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거침없는 움직임으로 보아 이 저택은 에르난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장소인 듯했다. 하지만 어떻게 보아도 이곳은 여관이 아니다.
어느 문 앞에 선 에르난은 허겁지겁 부부의 뒤를 쫓아온 하인에게 물었다.
“이곳은 정리가 되어 있겠지?”
“그렇습니다. 마님은 주인님이 언제 오더라도 바로 쉴 수 있도록 늘 방을 청소하고 따뜻함을 유지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여전하시군.”
에르난이 가볍게 웃었다. 아내를 향해 보이는 달콤한 미소와는 다른 훈훈함에 찬 미소였다.
“좋아. 방 좀 빌리겠네.”
“예, 물론……. 아니, 폐하. 방금 무슨 말씀을……?”
거침없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온 에르난은 하인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문을 닫아 버렸다.
하인의 말대로 방 안에는 기분 좋은 훈기가 감돌았다.
아무래도 이곳은 귀족의 저택인 모양이다. 방은 넓고, 가구는 하나같이 고급이었다. 허전한 곳 없이 꼼꼼하고 깔끔한 정돈이 인상적이었다.
침대의 커튼을 휙 젖힌 에르난은 그 위로 아내를 눕혔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나야 당신에게 안겨 오느라 수고랄 것은 없는데요……. 남의 집 침실을 마음대로 써도 괜찮나요?”
“괜찮습니다. 얼마든지 써도 됩니다. 우리는 왕이잖습니까? 이 나라 모든 것의 주인입니다. 왕이 비키라면 비켜야지요.”
“저기요, 그게 아니라…….”
더 항의하려던 레이테의 목소리가 멈췄다. 에르난이 곧바로 그녀의 옷을 끌어내리기 시작한 탓이다.
아내의 드러난 몸을 응시하는 눈은 붉게 타오르는 정욕을 감추지 않았다.
“일단은 당신을 사랑하게 해 줘요. 이야기는 그다음에 합시다.”
몸이 달아오른 듯 다급한 목소리였다.
레이테는 남편을 감싸 안았다.
망설임 없이 뜨거운 혀가 얽혔다. 에르난은 조금 거칠다 싶은 움직임으로 레이테를 탐했다. 아내를 갖고 싶어 혀끝까지 안달이 난 낌새가 역력했다.
“흥, 으흣.”
틀어 막힌 입 사이로 타액이 흘러내렸다. 레이테는 짧은 신음을 흘렸다. 턱선을 따라가다 아래로 툭 흐른 액체가 조금 드러나 있던 레이테의 가슴골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 간지러움이 레이테를 참을 수 없이 흥분시켰다. 이미 두 사람의 손은 상대의 옷 아래 감춰진 맨살을 찾아 이곳저곳을 더듬기에 바빴다.
단단하게 여민 겨울옷은 쉽게 속살을 드러내 주지 않았다. 에르난에게는 차분히 옷을 벗길 여유가 없었다. 그는 거의 잡아 뜯다시피 하여 아내의 드레스를 끌어내렸다.
하얗고 날렵하면서도 부드러운 여체가 에르난의 눈에 담겼다. 에르난은 감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아내가 풀어 주다 만 자신의 겉옷을 완전히 벗어 침대 밖으로 대충 집어 던졌다.
문제는 안에 입은 옷이었다. 작은 구멍에 끈을 일일이 끼워 상의와 연결한 옷은 움직이기에 편리하다. 그러나 탈의는 대단히 번거로워 시종 여럿이 동원되어야 했다.
‘이걸 또 어느 세월에 다 풀어야 하지?’
식당에서였던가? 아내를 안으려 했던 에르난은 급한 마음에 아예 옷의 매듭을 끊어 버렸고 이후 꽤 난감했었다.
레이테도 그 일이 떠올랐는지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모르겠다. 어쨌거나 어서 아내를 안고 싶다. 에르난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때, 레이테가 몸을 일으키더니 남편의 손을 붙잡았다.
“잠깐. 손 좀 치워 보세요.”
에르난은 어리둥절하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레이테의 손이 촘촘한 매듭을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당신이 이런 걸 잘 못 기다리잖아요. 그러니 내가 대신 해 주겠어요. 내 손이 훨씬 빠를 테니 조금만 참아요.”
잠깐 남편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웃음 지은 레이테는 옷을 연결한 매듭을 푸는 데에 집중했다.
아래를 내려다본 에르난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레이테는 마치 결혼식장의 신부처럼 보였다. 다 드러낸 뽀얀 맨몸을 얇고 투명하게 하늘거리는 은빛 베일이 사르르 덮었다.
실제 결혼식 때 그녀가 입었던 드레스는 정통 사크틸라 식인지라 맨살을 찾기 힘들었지만.
신부의 가는 손가락은 에르난의 허리춤에서 열심히 움직였다.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긴 은발 사이에서 흔들리는 봉긋한 가슴이 보였다.
지독하게 선정적인 모습이다. 에르난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떨렸다. 레이테가 푸는 매듭의 바로 아래에 놓인 분신이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선명했다.
‘다, 당연하잖아. 레이테가 자극하는데……. 어, 어떻게 흥분하지 않을 수가 있어……?’
당연한 현상이다. 더군다나 단단해지는 그것은 이미 수도 없이 아내를 탐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에르난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당연하고 뻔한 사실을 상기하며 에르난은 자기 몸의 반응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얼굴은 붉어지고 레이테를 붙잡은 손은 떨렸다. 마치 처음으로 성을 접하는 소년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어머나, 당신.”
마침내, 아니 당연하게도 그 모습이 아내의 눈에 띄고 말았다.
“여기가 이렇게 튀어나오고 있네요.”
레이테의 손톱 끝이 부푼 곳을 툭 가볍게 건드렸다.
“읏……!”
작디작은 자극에 반응한 에르난도, 그 정도 반응을 예상치 못한 레이테도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귀 끝까지 달아오른 남편의 얼굴을 확인한 레이테의 입매가 히죽 올라갔다.
“아하…….”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수상했다.
“레이테! 자, 잠깐…… 윽! 으읏!”
불안은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불쑥 솟아오른 것을 레이테가 그녀의 손 가득히 쥐었다. 에르난이 당황할수록, 아내의 손에 쥐어진 것은 더 단단하게 크기를 키워 갔다.
“재봉 쪽은 잘 모르지만, 남성의 옷은 이것 때문에라도 여기를 넉넉하게 만들겠네요. 옷 안에서도 이렇게 변하다니, 신기해라.”
레이테는 옷 안에 있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잘 알면서도, 처음 보는 장난감인 양 신기하게 가지고 놀았다.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고, 손끝으로 이곳저곳 꾹꾹 누르기도 했다.
“읏. 제발, 레이테. 차라리 빨리 푸, 풀어 줘요. 어서……!”
고문과도 같은 자극에 에르난은 미칠 지경이었다.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닿는 아내의 과감한 손길에 그는 이성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071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레이테는 남편이 입은 옷의 남은 매듭을 마저 풀었다. 이윽고 그녀에게 유린당하던 것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하……. 허억…….”
에르난은 목이 졸렸다가 풀린 사람이라도 된 양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내의 어깨를 붙잡았다.
“좁은 곳에서는 역시 답답했을 것 같네요.”
단단하게 솟은 것을 바라보는 레이테가 장난기 다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양손으로 기둥을 쥐고 천천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윽……! 레이테, 지금 무슨……! 잠깐……, 흐읏!”
이 정도로 자극에 어쩔 줄을 모르며 소리치는 에르난은 처음 보았다. 아니, 어쩌면 처음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르난이 흥분할 때면 레이테도 그와 함께 몸부림치기에 바빴다. 그러니 알 턱이 없다.
따라서 남편의 반응은 레이테에게 대단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미친 듯이 상대방을 갈구하다 보니, 오히려 남편의 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볼 일이 없었다.
물론 에르난이라고 딱히 여유로운 태도로 아내를 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그런 모습을 보이려 애쓰는 듯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태도가 되어 정신없이 몸을 흔들기 마련이었다.
“후우……. 레이테, 제, 제발……!”
쾌락에 떠는 남편의 모습을 제대로 감상하고 싶다. 레이테의 손놀림이 점점 과감해졌다.
“제발이라니요, 무엇을?”
“그게, 읏……!”
에르난은 제대로 답하기도 힘든 모양이었다. 아내를 단단히 쥔 그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레이테는 순간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윽, 아파요.”
가쁜 숨을 헐떡이던 에르난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흥분 어린 반응이 사라지자 의아해진 레이테가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에르난이 아내를 확 밀어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이 레이테의 다리가 벌려졌다. 에르난은 그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충분히 젖어 있음을 확인한 에르난은 방금 전까지 아내에게 농락당하던 기둥을 단번에 안으로 꽂아 넣었다.
“흐앗!”
레이테의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에르난은 알았다. 저 소리는 고통의 표현이 아니었다. 짜릿한 쾌락을 환영하는 인사나 다름없었다.
삽입은 순식간에 이뤄졌지만, 에르난은 몸을 움직이기 전에 아내에게 말부터 건넸다.
“후우, 제가 당신을 너무 꽉 잡았던가요?”
“당신이 계속 떨다가 어떻게 될지 궁금했는데…….”
“그렇다고 부인을 아프게 할 수는 없잖습니까.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잠깐 놀랐을 뿐인걸요.”
레이테는 아쉬운 듯했다. 그렇다 한들 에르난은 아내의 손에 다시 분신을 내어줄 마음은 없었다. 이미 그녀의 안으로 들어와 버렸으므로.
에르난을 꽉 끌어안는 내벽이 유독 미끌미끌했다. 아내는 그를 만지면서 대체 무엇에 흥분했을까? 이런 생각에 미치니 더는 느긋할 수가 없다. 에르난은 그녀를 꼭 껴안고 거세게 허리를 움직였다.
“흐, 응……. 흐읏!”
레이테의 반응은 얌전한 편이었다. 아니, 오히려 억지로 참는 것처럼 들릴 정도다.
에르난은 몸을 살짝 일으키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붉어진 레이테는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레이테? 어째서…….”
레이테는 남편의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누가 듣는 건 싫어요.”
“네?”
생각지도 않은 말에 에르난은 당황했다.
“궁정 사람들은 국왕 부처의 밤 생활에…… 관심이 참 많더군요. 아들을 언제 낳을지 말이에요. 당신은 몰랐나요……?”
레이테가 머뭇거리며 답했다. 에르난은 할 말을 잃었다.
아내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그도 잘 알았다. 에르난도 부부 관계나 후계자에 대한 짓궂은 농담을 종종 들었으니까.
조금 지나친 경우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 정도 장난쯤이야 궁정 생활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에르난은 그랬다.
하지만 그는 직감적으로 레이테와 자신에게 가해지는 기대와 압박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차이가 날까? 그 원인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레이테는 왕이기에 앞서 여자다. 세상은 레이테를 그렇게 본다.
‘여태 당신을 찾아와 정무를 논의한 여자는 대체 누구였죠? 혹시 당신도 내가 이곳에 놀러 왔다고 생각하나요?’
그는 레이테가 유독 예민해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후계자 문제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여왕을 여왕처럼 생각하지 못하는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 교묘하게 여왕의 존재를 지우고 그 역할을 제한하려던 시도를 보았다. 에르난마저 보기 좋게 속고 말았다.
그래서 레이테는 이런 순간마저 망설이게 된 것일까.
“기분이 좋아도 아닌 척 새침하게 구는 당신도 예쁘지만.”
에르난은 아내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는 부인의 솔직한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레이테의 손이 남편의 등을 꾹 쥐었다. 그녀의 손은 살짝 떨고 있었다.
“이곳에는 우리를 엿보고 감시하는 사람 따위는 없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왕가에 아주 호의적이고 눈치도 좋아서, 일찌감치 주변을 싹 비웠을 테지요. 경박한 말을 입에 담지도 않을 겁니다. 장담합니다.
혹시 그래도 신경 쓰입니까? 그러면 안전한 방법이 있기는 한데.”
에르난은 단숨에 아내의 입술을 덮쳤다. 레이테는 놀랐는지 몸을 흠칫거렸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남편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고, 허리가 슬금슬금 들썩이며 졸라 댔다.
사랑해 달라고.
에르난은 그 수줍은 유혹을 결코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있는 힘껏 깊숙한 곳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응…… 으읏, 으…… 흐읍, 흣……!”
남편에게 입이 막혀 끙끙대던 레이테는 답답함을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이만하면 신경 쓰지 않겠지. 에르난이 입술을 떼고 말했다.
“레이테, 빠른 것이랑 깊은 것 중에 어느 쪽이 좋아요?”
“으응……, 앗! 그, 그게…….”
“둘 다 좋지요? 압니다.”
어차피 답을 들으려는 질문은 아니었다. 에르난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부딪치는 소리의 간격도 짧아졌다. 철퍽거리는 난잡한 소리가 커질수록, 레이테의 교성도 커져 갔다.
“앗, 으흣! 하…… 흐앗, 아! 아앗, 하응……!”
아내의 울음소리는 성기에 직접 닿는 쾌락만큼이나 에르난의 흥분을 고조시켰다.
“더 울어 줘요, 더…….”
사실 그가 애원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레이테는 흥분의 끝에 몰린 듯 온몸을 흔들며 신음했다.
“아앗! 앗, 아! 흐앗…… 아, 에르, 난……! 아, 흐앗! 흐으읏!”
에르난도 아내에게 맞춰 더 과격하게 그녀의 안을 누볐다. 그는 아내의 깊은 곳에서 정욕을 쏟아냈다.
“아……, 후읏…….”
레이테는 나른한 신음을 흘리며 남편의 품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그녀의 허리가 슬금슬금 떨렸다.
“레이테, 몰라서 물어봅니다만……, 느껴집니까? 진짜로?”
남편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 잠시 고민하던 레이테는 곧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허리를 가볍게 들썩였다. 에르난은 아직 그녀에게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긴장이 팽팽하던 당신이 나른해질 때가 좋아요. 따뜻하게 안이 채워지는 것도 좋고.”
레이테는 헤실헤실 웃으며 남편의 가슴에 뺨을 대고 비비적거렸다. 나른한 동작은 이제 곧 잠들 것이라는 예고 같기도 했다.
“그런데 당신…….”
레이테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말씀하시지요, 부인.”
“혹시 도로 커졌어요?”
적나라한 질문에 부끄러워할 여유조차 없었다. 부부는 상대방의 눈에 들어찬 욕구를 느끼고 다시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 * *
레이테는 눈을 끔뻑거렸다. 아직도 밖이 밝다.
‘설마 날이 바뀐 건가…….’
아마도 그게 맞을 듯했다. 자다 깨기를 반복하면서 부부는 계속 서로를 안았으니까.
느릿느릿 몸을 일으킨 레이테는 남편의 위로 올라탔다.
마지막으로 잠들기 전에는 이런 식으로 남편을 허리 아래에 두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쳐 쓰러지도록 몸을 흔들었다.
최근에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잠자리가 있었나? 아니, 없었다.
아라고에 온 뒤, 레이테는 확실히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녀는 하루하루 날카로워졌다. 어제는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그래도 남편이 있다. 의견이 충돌할 때도, 실수할 때도 있지만 아내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이 남자가 있다.
‘고마워요.’
레이테는 몸을 숙여 에르난에게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냥 입술을 가볍게 스치기만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남편의 팔이 그녀를 덥석 붙잡았다.
“어……?”
멍하게 뜬 에르난의 눈은 초점이 흐렸다. 레이테를 잡은 팔의 힘도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아, 레이테…….”
아내를 부르는 목소리는 나른하다 못해 도로 잠이 들 것 같다.
“왜 레이테가 위에 올라와 있지. 꿈인가…….”
혼자 중얼거린 에르난은 도로 눈을 감아 버렸다.
레이테는 무언가 얄미운 기분이 들었다. 현실을 꿈으로 착각했단 말이지?
그녀는 다시 남편에게 키스했다. 살짝 스치던 것과는 달랐다. 깊고 진하게, 입술을 온통 빨아들였다. 허락하든 말든 혀를 밀어 넣어 남편의 입 안을 헤집었다.
에르난의 몸이 들썩였다. 이제야 제대로 눈을 뜬 모양이다. 그는 레이테를 감싸 안고 농밀하게 입을 맞췄다.
슬슬 숨쉬기 힘들어지지 않을까 싶을 때쯤, 레이테가 상반신을 일으켰다.
“안녕? 좋은 아침이에요.”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군요.”
“얼마나 살았다고 그런 이야기를……. 아, 이런 날이란 무슨 날인가요?”
“눈떠 보니 아내가 알몸으로 내 위에 올라타 있는 날요.”
레이테는 피식 웃고 남편의 위에서 내려오려 했다. 하지만 에르난이 그녀의 엉덩이를 잡는 바람에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왜 그런 데를 잡아요?”
“얼마나 좋습니까. 부드럽고, 탐스럽고…….”
그러나 레이테가 느끼기에는 자신의 엉덩이를 만지는 에르난의 손이야말로 가장 부드러웠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남편의 손길을 즐겼다.
“키스해 줘요, 부인.”
레이테는 조심히 몸을 굽혔다. 가슴이 먼저 남편의 몸에 닿았다. 에르난이 어깨를 떨었다. 그는 아내의 엉덩이를 쥔 손을 놓지 않았다.
이런 정도의 접촉에도 예민한가? 레이테는 그 반응이 재밌어 보였다. 그녀는 가슴을 일부러 더 남편에게 밀착하고 살살 비벼대듯 움직였다. 엉덩이를 붙잡은 남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좋아요?”
에르난은 몸을 잠시 뒤척였다. 곧, 레이테의 엉덩이에 뜨겁고 딱딱한 것이 닿았다.
“눈 뜨자마자……, 당신도 참 대단하네요.”
레이테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으면서도 상반신을 일으켰다. 엉덩이를 만지던 에르난의 손이 이번에는 가슴으로 올라왔다. 에르난이 손에 가득 쥔 살덩이를 부드럽게 굴려 주니 레이테도 기분이 좋아졌다. 몸이 슬슬 뜨거워진다.
허리를 조금씩 들썩이던 레이테는 남편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위치에 자리 잡으려 했다.
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움직임은 에르난이 빨랐다. 팔을 위로 뻗어 아내를 맛보기에 바쁘던 그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는 레이테를 재빨리 눕히고 자신의 몸으로 그녀를 덮어 버렸다. 발치에 구겨져 있던 이불도 급히 끌어올려 덮었다.
남편의 아래에 깔린 레이테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뭘까? 침입자일까? 아니면 저택 사람?
어느 쪽이든 부부가 떳떳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사실 에르난의 말이 맞았다. 왕이 장소를 쓰겠다면 쓰는 것이다.
하지만 레이테 개인으로서는……,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침대의 커튼이 천천히, 아주 살짝 열렸다. 레이테의 눈에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소리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홱 하는 거친 소리가 울리며 커튼은 도로 닫혔다.
“확인했으면 나가.”
에르난이 말했다. 쌀쌀맞은 말 같지만 딱히 위협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오히려 친근한 투에 가까웠다.
이제 레이테는 이곳이 누구의 저택인지 알 수 있었다.
“허어……, 남의 침대에서 좋은 시간 보내셨습니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리세우 공작 프란세스크였다.?
#072
‘세상에, 그러니까 에르난은 친구 집에 멋대로 들어와 친구 방에서 아내와 이런저런 것을 했고 그 아내가 바로 나란 말이지?’
왕이고 뭐고 지금 이게 무슨 민폐야! 레이테는 소리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에르난이 그녀를 덮어 누르고 있기에 말을 꺼내기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결국 레이테도 공범이었다.
“뭐, 이왕 남의 방을 마음대로 차지하셨으니 며칠 늘어지게 쉬시지요.”
프란세스크는 의외의 말을 했다.
“밤새 눈이 내려 도시가 완전히 눈에 파묻히다시피 했습니다. 왕궁으로 귀환하고 싶으셔도 못 갑니다. 귀족들도 죄다 자기 집에 갇혀서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강제 휴가입니다.”
“그러면 자네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 뭐, 어떻게든 왔겠지. 그런데 하필 왜 지금 왔나?”
“집에 들르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된 탓에 어머니께 미안해서요.”
“거짓말하지 마. ‘어머니께 죄송하긴 해도 어쩔 수 없잖습니까?’라고 나한테 분명히 말했잖아.”
“……두 분을 호위하던 기사들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곳에 계신다고.”
레이테는 어제 일을 떠올렸다. 눈을 맞으며 마냥 신나게 놀던 시간, 그때도 기사들은 멀찍이서 그들을 지켜보았을까?
부부는 왕이니 당연한 일이다. 외출할 때 수행원이 없는 쪽이 비정상이다. 레이테는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어제 일을 떠올리니 유난스레 민망해졌다.
최근 들어 주변의 지켜보는 시선에 예민했기 때문일까? 그 순간만큼은 왕이라는 처지를 잠시 잊었기 때문일까?
“제대로 일하는걸? 길이 막히기 전에 바로 왕궁으로 가 자네를 찾았겠지. 서너 명쯤 되던데, 궁에 돌아가면 명단 올리게. 뭐라도 줘야겠어.”
“알겠습니다. 제가 추천해 드리자면, 황금 양모의 목걸이는 어떨까요?”
궁정인들의 화젯거리인 기사단을 말하는 것이다.
“이래저래 지켜보니 꽤 괜찮은 이들입니다. 유서 깊은 가문은 아니지만, 그러니까 더 기회를 줘야지요. 궁에 왔던 이는 한 명뿐이고, 나머지 셋은 이 방으로 올라오는 계단에서 돌아가며 대기 중입니다.”
레이테가 몸을 흠칫거렸다. 에르난은 그녀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어느 계단인지 알 것 같은데, 방에서 꽤 멉니다. 그리고 이 정도로 철저하게 일하는 자들이라면 설령 무언가 들었다 해도 절대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잊어버렸겠지요.”
남편의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된다. 동시에 레이테는 자신이 한심했다.
이미 할 것 다 해놓고 뒤늦게 걱정해서 뭘 어쩌겠나. 사실, 궁인의 시선을 의식해 몸을 사린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왕답지 않은 태도다.
‘요즘 정말 답답하게 살았구나.’
바보 같다. 레이테는 남편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녀는 침대 밖의 프란세스크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전부 집에 갇혔을 정도면 사고가 일어났을 법도 한데요. 별일 없나요?”
사크틸라에서는 겨울마다 폭설로 크고 작은 사고가 잦았다. 이곳은 괜찮을까?
“자잘하게 있다고 합니다만, 시청에서 무리 없이 수습할 수준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행이네요. 아, 공작께서는 왕궁으로 돌아가나요?”
“일단 그렇습니다.”
“이왕 집에 왔으니 급한 일이 없다면 쉬다 가세요.”
에르난이 의아한 눈길로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레이테는 곧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아내를 무엇으로 보는 거냐며, 레이테는 말로 따지는 대신 무릎으로 가볍게 남편을 툭 쳤다.
윽! 에르난은 조그맣게 신음하며 몸을 구부렸다. 표정이 웃고 있는 것을 보아 진짜로 아프지는 않은 듯했다.
“어머니께서 아들을 무척 기다리시는 듯했어요. 공이야말로 며칠 휴가라 생각하고 집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 어떨지요?”
‘마님은 주인님이 언제 오더라도 바로 쉴 수 있도록 늘 방을 청소하고 따뜻함을 유지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레이테는 어제 침실에 들어올 때 들은 하인의 말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아들을 기다리며 방을 데워 놓다니, 어머니는 아들이 보통 그리운 것이 아닌 모양이다.
‘잠깐. 리세우 공의 어머니라면 카테리나의 어머니기도 하구나.’
비로소 레이테는 왜 처음 본 귀부인이 익숙하게 느껴졌는지 깨달았다. 카테리나의 흔적이었을 터다.
‘혹시 카테리나도 오빠와 함께 왔을까?’
“하긴, 아라고에 막 도착했을 때 동생과 한 번 들르고, 이후 한 번도 집에 안 왔군요. 오늘은 오자마자 하인의 설명을 듣고 이 방부터 온 참인지라 아직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폐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프란세스크가 답하자 레이테의 바로 위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른 폐하는 반대야.”
‘이 사람이 무슨 소리야?’
레이테는 남편을 흘겨보고 무릎으로 다시 한 번 그를 치려고 했다. 그러나 에르난이 먼저 그녀를 붙잡아 몸을 뒤집어 엎드리게 했다.
“레이테, 여기는 우리가 쉬어야 할 곳인데 왜 다른 남자더러 있다 가라고 합니까?”
에르난의 말에는 장난기가 다분했지만, 레이테는 그에 반응할 틈이 없었다. 오히려 숨을 참아야 했다.
남편의 손이 가슴을 조물조물 만지작거렸기 때문이다.
말을 할 처지가 아니니 레이테는 남편을 노려보기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실상은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이를 악물어서 밖으로 새어 나갈지도 모르는 신음을 참기에 바빴다.
“잠깐만요, 폐하. 이곳은 제 집입니다만? 어머니도 계시고 하인들도 있어요. 폐하의 별장 취급하시면 곤란합니다.”
“내가 이 나라 주인인데 뭐 어때.”
“어머니는 두 분 폐하께 폐를 끼치지 않도록 원래 쓰는 방 대신 아래층 손님방에서 밤을 보내셨다는군요. 올라오면서 하인에게 들었습니다. 저희 집안이 이렇게 왕을 지극하게 모십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충신의 집을 강탈할 생각이나 하시는군요?”
왕에게 하는 말치고 대단히 무례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레이테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젯밤, 에르난은 이 저택 사람들이 왕가에 호의적이고 눈치가 좋아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이었네.’
하지만 놀라기도 잠시, 에르난이 그녀의 가슴을 꽉 쥐었다.
“읏.”
레이테는 짧게 신음을 흘리다가, 다급히 팔을 뻗어 베개를 끌어당겼다. 그 안에 얼굴을 파묻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숨을 조용히 뱉어낼 수 있었다.
“왕궁이 별것 있나. 왕이 머무르는 곳이 왕궁이야. 아라고 궁도 예전에는 어느 후작의 저택이었다지?”
그는 태연하게 답하고 아내의 등에 입을 맞췄다. 느긋하고 부드러운 키스였다.
손은 완전히 반대로 움직였지만.
“……으읏.”
에르난의 손은 유두를 꼬집듯이 잡아 빙글빙글 돌리고 가슴 전체를 주무르듯 압박하기도 했다. 거짓말로도 느긋하다고 말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보다는…….
“세스크, 일단 좀 나가면 안 되나?”
레이테를 농락하던 손이 갑자기 빠져나갔다. 부들부들 떨던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숨이 트인다. 그녀는 여태 자신을 도와준 베개로 남편을 한 대 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에르난의 손이 먼저 그녀를 붙잡았다. 이번에는 허리였다.
“급한 일 없고 돌아가기도 글렀으니 아예 쉬라며 말한 건 자네잖나. 왕의 휴식을 보장해 주면 좋겠군. 그리고 여왕의 명도 따라야지? 어머니께 가서 아침 인사 드려. 당장.”
“…….”
“…….”
레이테와 프란세스크는 잠시 같은 기분을 느끼며 할 말을 잃었다. 에르난이 방의 주인을 쫓아내려는 의도가 너무 뻔했다.
“……예, 하루 종일 가족의 화목함을 다지겠습니다. 알아서 쉬시되, 그래도 한번은 식사하러 내려오십시오. 어머니께서는 두 분을 대접하고 싶어 하실 겁니다.”
프란세스크의 발걸음이 점점 멀어지고,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방안에는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아무리 당신이 왕이더라도 친구이자 고위 귀족은 존중해 줘야지 않나요? 어쩌면 염치도 없이…….”
레이테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따졌다.
“어차피 세스크는 우리에게 쉬라는 이야기를 하러 왔습니다. 그러니 쉬어야지요.”
에르난은 아내의 허리를 잡고 위로 올렸다. 레이테는 무릎을 꿇으며 엎드린 채 엉덩이가 들린 자세가 되었다.
아, 설마. 레이테가 이어질 일을 깨달았을 때는, 에르난도 이미 무릎을 침대에 대고 서서 레이테의 다리를 벌려 그 사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곳을 자극하는 손가락은 일부러 찰박거리는 소리가 크게 나도록 움직였다.
“흐응…….”
“잔뜩 젖었군요. 좋았습니까? 부르르 떨면서 참는 당신은 정말로 귀여웠습니다.”
손이 있던 자리에 뜨거운 것이 다가왔다. 에르난은 그것을 곧바로 집어넣는 대신, 젖은 입구에 살살 문지르기만 했다.
“솔직히 제 장난이 심하지 않았을까 걱정은 됐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관심 보이는 데에 민감했으니까.”
“아는 사람이 그래요……?”
“여기서는 그런 걱정을 정말로 안 해도 되는걸요. 그리고…….”
에르난은 자신의 것을 쥐고 아내의 밀부로 끄트머리만 살짝 밀어 넣었다.
“당신 엉덩이, 떨고 있어요. 느껴집니까? 더군다나 여기는……, 이런.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으니 제가 좀 막아 드려야겠는데요. 이 침대는 남의 것이니 되도록 깔끔하게 돌려줍시다.”
이미 밤낮을 뒹굴어 엉망이 된 지 한참이거늘, 뻔뻔하기도 했다.
단단한 기둥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입구 주변에서 자꾸 미끄러지기만 했다. 으윽. 레이테는 도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신음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간지럼을 견디기 힘들었다. 쾌락에 목마른 자신이 지나치게 품위를 잃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어서였다.
이런 걱정을 말하면 남편은 언제 우리가 품위 있는 잠자리를 가졌냐며 웃겠지만.
“……빨리.”
“네?”
의도적으로 간만 보는 자극 탓에 미칠 것 같았다.
강요는 인정할 수 없다.
결혼 계약서에 이 문구가 추가된 후, 에르난은 놀랍도록 성실하게 약속을 지켰다.
다만 그 지키는 방식까지 성실하라는 법은 없다.
어느덧 그 조항은, 레이테의 몸을 안달 나게 만들어 그녀의 입에서 직접 다음을 요구하는 말이 나오도록 하는 데에나 쓰였다. 바로 지금처럼.
결국 레이테는 팔까지 덜덜 떨며 토해 내듯 외쳤다.
“일부러 시간 끌지 말고 어서…… 흐응!”
기다렸다는 듯이, 기둥은 레이테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들어왔다.
같은 몸에 같은 물건이 들어오는데도, 남편을 눈에 직접 담으며 안길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남편이 보이지 않는다. 레이테는 조금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레이테의 뒤에 있다. 레이테의 허리를 꽉 붙든 손은 틀림없는 그의 것이었다.
“조금 더, 더 벌려 봐요.”
에르난이 속삭였다. 레이테는 조심히 무릎을 움직였다.
다리 사이가 넓어지자, 에르난은 엉덩이를 붙잡고 더 높이 들어 올렸다. 그는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 왔다.
“흣! 아…… 아앗!”
“……후우.”
에르난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도 긴장한 것처럼 들렸다.
확실히 이런 식의 결합은 처음이었다. 레이테도 짐승이 교접하는 것과 비슷한, 천박하게 당하는 자세가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여왕의 밤 생활에 관심이 많은 궁인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튀어나온 이야기였다.
‘천박하게 당하는 자세라…….’
결혼식 밤의 일 정도나 ‘당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마저 레이테의 허락 아래 치른 일이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생각했던 품위가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에르난은 처음 가는 길을 개척하듯 신중히 움직였다.
“아흣…… 응, 이상해요…….”
레이테는 이불을 꽉 쥐었다. 이렇게 버티지 않으면, 묵직하고 강렬할 자극에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그래요? 싫습니까?”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닌, 흣……!”
에르난은 팽팽하게 긴장한 아내의 굴곡진 뒤태를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쾌락에 취한 표정을 직접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을 충분히 대체할 만큼 자극적인 모습이었다.
에르난은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어루만졌다. 손에 닿는 음란한 곡선이 짜릿했다.
“하으으응! 에르난, 그런 곳을 만지면……!”
“만지면 좋다?”
“흐응, 흣……!”
아내의 반응도 기대 이상이었다. 앞으로도 자주 괴롭혀 줘야겠다.
에르난은 상체를 숙여 레이테의 등에 입을 맞췄다. 도로 몸을 일으킨 그는 무릎을 살짝 옮겨 자세를 안정시키고 더 과감하게 허리를 흔들었다.
가차 없이 몰아치는 삽입이 강한 부딪침을 반복했다. 레이테는 온몸을 떨며 울었다. 멈추지 않고 쏟아지는 자극은 쾌락이며 고통이었다.
“아……, 꺅! 흐앗! 앗! 흐읏! 흐아앗…… 으앗! 아읏!”
에르난이 아내의 위로 쓰러지다시피 엎어졌다. 뜨거운 것이 그녀의 안으로 뿌려졌다.?
#073
부부는 침실을 벗어나지 않고 느긋한 나날을 보냈다.
자다 깨기를 반복하며 서로를 안고, 때로는 창밖의 눈 쌓인 풍경을 구경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방에 있는 시집을 함께 읽기도 했다.
공작의 침실에는 하인 호출용으로 사용하는 끈이 있었다. 하지만 부부는 그것에 손도 대지 않았다. 둘만의 시간을 잠깐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침범당하고 싶지 않았다.
식사는 적당한 시간이 되면 하인이 문밖에 두고 갔다. 새로 입을 잠옷이나 베개 등을 함께 챙겨 줄 때도 있었다.
“이렇게 섬세하게 챙겨 주는데 침실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니 민망하네요. 이제 좀 내려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부인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리세우 공의 부탁도 있었잖아요.
사실 이렇게 푹 쉬어도 되나 불안하기도 하고. 눈이 꽤 많이 내렸는데 정말로 별일 없었을까요?”
“쉬어도 됩니다. 중대한 일이 생겼다면 세스크가 진작 우리를 찾아 왔을 겁니다.”
부부는 아침 식사 중이었다. 환기를 위해 열어 둔 창밖으로 아직 쌓인 눈이 보였다.
그래도 며칠 전에 비하면 많이 녹은 편이다. 사람이 지나갈 길도 좁게나마 났다. 폭설로 인한 도시 마비가 풀려 가는 모양이다.
즉,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 슬슬 가까워진다.
“공작을 무척 신임하는군요.”
“네. 세스크는 형제 같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이 저택도 잘 아는 것 같았어요. 자주 왔었나 봐요?”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에는 항상 아라고에 와서 겨울을 보냈지요. 저는 세스크를 만나러 자주 이 집에 들렀습니다.”
“보통은 귀족이 왕궁으로 올 텐데, 반대였네요.”
“이곳이 좋았으니까요.”
에르난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편안히 몸을 기댔다.
“공작부인은 바깥일에 바쁘다 못해 아예 방랑벽이 들어 버린 아들을 기다리며 늘 그 방을 정돈하는 분입니다. 남편과 딸에게도 마찬가지였고…… 아니, 그냥 이 집 가족들이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세스크는 좀 무신경해 보이지만, 그래도 제법 가족들을 잘 챙기지요. 여기는 사람 사는 곳다운 느낌이 듭니다.”
“아…….”
레이테는 남편에게 들었던 그의 부모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아들에게 준 관심은 동정심에 가까웠다.
이 저택의 분위기는 확실히 달랐다.
모든 사람이 국왕을 극진히 대접한다. 하지만 레이테는 이곳에 머무는 내내 섬세하고 진심 어린 배려를 느꼈다.
안주인부터 하인까지 모두 모여 눈사람을 만드는 화기애애한 모습도 떠올랐다.
“제가 하도 자주 찾아왔더니, 전대 공작 부부께서는 저를 왕자도 세스크의 친구도 아닌 그냥 이 집 아들처럼 챙겨 주시더군요.”
화목한 가정이라는 남편의 꿈은 부모의 불화가 싫어 생겼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곳의 따뜻함을 부러워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 같다.
‘잠깐. 어머니 같은 사람에게 여자를 업어 들고 침실에 틀어박히는 모습을 보였다는 거지…….’
레이테는 공작부인을 만나기 민망해졌다.
확실히 너그러운 사람들은 맞다. 느닷없이 쳐들어온 남녀가 왕이랍시고 집주인의 방을 며칠째 점령 중이다. 그런데 아무 항의도 하지 않는다. 프란세스크의 말이야 장난기 가득한 투정 수준이었다.
레이테가 아는 일반적인 바르시나 귀족이라면 이제 슬슬 나오라며 큰소리를 칠 법도 했다. 왕을 대놓고 쫓아내지는 못하더라도.
“더군다나 그 시절은 온종일 교사들에게 시달렸으니까요. 숨 쉴 틈도 있어야 하잖습니까?”
“잠깐만요. 그러면 공부 안 하고 도망쳐 왔다는 이야기 아닌가요?”
“세스크, 그 친구가 모범생 같던가요? 대놓고 말하자면 그는 집안 좋고 돈도 많아 장래에 대한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만 잡기를 배우고 즐기는 데에 인생을 바쳐 왔고 그 덕택에 저에게 이런저런 어른의 세계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뭐라고요?”
아내가 날카롭게 물어 오자 에르난은 손사래를 쳤다.
“당신이 뭘 상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론 수업입니다. 이론 수업!”
“저 지금 화내는 것 아닌데요.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지도 못한 과거의 일인데 무슨 상관이죠?”
“지금 당신 표정은 말이랑 완전히 반대입니다…….”
에르난이 맥없이 중얼거렸다. 레이테는 그때야 자신이 매섭게 남편을 노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자 문제로 언제나 시끄러웠던 아버지를 보면서.”
에르난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창밖에서 찬바람이 들어왔다. 그는 자리에서 창문을 닫았다.
“절제하지 못하고 살 거라면 차라리 여자를 만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별로 안 믿을 것 같지만, 결혼 전의 저는 궁정에서 금욕주의자로 통했지요.”
“정말로 안 믿기는걸요. 우리가 며칠 동안 밖에 나가지도 않고 뭘 했는지 기억하나요?”
“물론입니다. 욕망이 지나치게 넘쳐 나는 시간을 보냈지요.”
레이테는 다짐했다. 남편의 말이 사실인지 카테리나에게 반드시 물어봐야겠다. 그녀라면 거짓말을 하지 않을 테지.
에르난은 책상 주변을 뒤적여 종이와 잉크를 찾아 간단한 메시지를 적었다.
[점심때에 내려가겠습니다. H]
국왕이라는 표기 대신 이름의 머리글자로 남긴 글은 필체도 가벼웠다. 에르난에게 이곳 사람들은 정말로 친근한 존재인 듯했다.
그동안 레이테는 빈 그릇을 쟁반에 모았다. 아내에게 쟁반을 건네받은 에르난은 다 쓴 쪽지를 올리고 침실 문을 살짝 열어 밖에 두었다.
“이론으로 배우고 눈으로 실제 사례를 봤다가 이제는 몸소 체험하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에르난은 아내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깨달음?”
“여자를 한 번 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것. 정말 맞는 소리였습니다.”
레이테의 옷은 이미 끌어 내려지고 있었다.
“잠깐. 침대 밖은 추워요. 안으로 들어가요.”
레이테는 그를 침대 쪽으로 이끌었다. 침대는 온기를 유지하고자 커튼을 닫아 두었다. 레이테는 커튼을 슬쩍 열고 남편을 침대 위로 눕혔다. 남편의 위에서 몸을 겹친 그녀가 말했다.
“저는 조금 다른 것을 배웠지요.”
“뭡니까?”
에르난의 팔이 아래에서 레이테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맨살에는 남편의 입술이 닿았다. 혀끝이 살갗을 간지럽혔다.
어깨를 살짝 움츠리던 레이테는 그의 귀에 대고 비밀스러운 것을 말하듯 속삭였다.
“위험에 빠진 숙녀를 구하는 기사 따위 세상에 없다. 구출은커녕 기회를 노리고 여자를 잡아먹으려는 짐승뿐이다.”
아내의 살을 살짝 깨물고 빨아들이려던 에르난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췄다.
“……어째 시스로네스가 했을 말 같습니다?”
“네, 맞아요.”
레이테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녀의 숨결이 에르난의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과연, 배운 대로였어요. 나를 구한답시고 온 기사님은 정말로 나를 잡아먹을 생각밖에 없어서…….”
“침대에서 시스로네스라는 이름을 듣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확실히 그의 혜안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르난은 다시 아내의 목덜미를 입에 물고 혀를 살살 굴리며 빨아들였다. 레이테가 몸을 움찔거리며 작은 신음을 흘렸다.
“지금도 잡아먹을 생각밖에 안 들거든요.”
그는 레이테의 몸을 돌려 눕히고 그 위로 올라탔다.
* * *
남편은 잡아먹는다는 표현이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레이테는 정말로 그에게 잡아먹히는 줄 알았다. 적당히 물고, 적당히 빨고, 적당히 핥고, 적당히 깨물란 말이야! 그녀는 아예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가오는 에르난을 발로 밀어냈다.
“쪽지도 보냈는데 이제 슬슬 내려가야죠. 짐승인 남편께서는 아직도 아내가 고픈 모양인데, 나는 음식이 먹고 싶거든요.”
에르난은 아내의 발을 어루만졌다. 발끝에서부터 발목을 지나 다리 위까지, 손가락이 살결을 천천히 즐기며 올라갔다.
“발도 다리도 어쩌면 이렇게 예쁠 수가.”
“나는 당신 다리의 단단한 근육이 더 부러운걸요. 내 다리는 별로 튼튼하지 못해서 오래 서 있으면 많이 힘들거든요.”
“그 근육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압니까?”
레이테는 발로 남편을 밀어내는 방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허벅지까지 닿았던 손이 도로 아래로 미끄러졌다.
마침내 에르난은 포기하고 손을 치웠다. 그는 아내의 옆에 누워 이불을 함께 덮었다. 레이테는 자신을 감아 오는 남편의 다리까지 막지는 않았다.
“육체 단련이야 이것저것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검술에 관심이 많아서 그에 도움이 될 만한 훈련에 특히 집중했지요. 달리기, 무거운 바위 들기…….”
“아까 교사들에게 시달렸다고 말할 때도 느꼈는데, 당신은 어렸을 때 배운 것이 많네요.”
“그야 왕위 계승자가 다 그렇듯이 체계적이다 못해 끔찍할 만큼 빡빡하게…….”
아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에르난의 손짓이 멈췄다.
‘다 그렇다고?’
과연 레이테도 그럴까? 그녀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았을까?
남편의 의문을 눈치챈 레이테가 답했다.
“저는 교사를 들이는 데에 제약이 많았어요. 외국어 선생 정도만 따로 있었지요. 그래서 비교적 자유롭게 만날 수 있던 시스로네스를 통해 역사, 철학, 신학 등등 온갖 것을 얕게 공부했답니다. 나머지는 그냥 실전으로……, 그러니까 망신당하면서 배웠어요.
아, 그렇게 미안한 표정 짓지 말아요. 당신이 잘 교육받았다고 해서 내가 받아야 했을 몫을 뺏어간 것도 아니잖아요? 망신이라 말했지만, 실수를 해도 적당히 웃거나 훌쩍훌쩍 울면 그럭저럭 다 넘어갔어요. 여자는 그게 편하죠.”
평온하게 시작했던 이야기가 냉소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안고 있는 배우자는 따뜻하지만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에르난, 우리의 후계자는 어떻게 될까요?”
결혼 계약서는 이제 나라 사이의 합의문이 되었다. 합의문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왕국의 별도 상속이었다. 이는 두 나라가 통합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없었다.
부부는 아직 젊었고 상속은 지나치게 먼 미래다. 어떻게 상황이 변할지 모른다. 온갖 경우를 상정하여 대처 방안을 일일이 합의문에 적어 넣기도 우스운 일이다.
“후계자는 빨리 태어날수록 왕국의 안정에 도움이 되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반을 잡기에도 바쁜데, 벌써 더 멀리 생각하라니 사실 피곤해요.”
“동감합니다. 우리가 결혼한 지 일 년도 지나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들으면 웃을 것 같은 말이긴 한데……, 신께서 때가 되면 알아서 주시겠거니 생각하며 신경 쓰지 맙시다.”
과연 레이테는 쿡쿡거리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은 신을 별로 믿지도 않으면서 신을 들먹이는 그럴듯한 말을 은근히 잘한다. 믿음과 무관하게 신학 교육은 철저히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휴가 잘 보냈으면서 분위기 깨는 이야기를 해 버렸나요?”
“아닙니다. 미래 설계는 언제나 중요하니까.”
“당장 급한 미래 설계는 삼국 회담 같은데요.”
회담이라는 말이 나오자 부부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 회의 같은 일은 앞으로도 계속 겪겠지요. 세상의 법도는 나를 부정하는 것 같으니까.”
법으로 따지자면 레이테가 여왕이라는 사실만큼이나 합법적인 일도 없다. 사크틸라의 왕위계승법은 여성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에 따라 레이테는 티끌 하나 없이 정당하게 여왕이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에르난은 차마 아내의 말을 단호히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현장을 직접 보았다. 본의가 아니었다지만 공범과 다름없기도 했다.
“아무도 당신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지 못할 겁니다.”
그는 두루뭉술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을 염려하지는 않아요. 그런 일을 방지하려고 당신과 결혼했는걸요?”
에르난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남편을 향한 신뢰가 담긴 말이 좋았다.
‘내가 이제는 당신의 적이 아니듯이, 언젠가 이 세상도 당신의 적이 아닐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존재하는 한 아내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자신감이 들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도우면 되겠습니까?”
“일단 이곳을 나가 식당으로 내려가는 게 좋겠어요. 현실로 돌아가야지요.”
에르난은 소리 내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074
부부는 밖으로 나와 아래층으로 이동했다. 레이테는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난간에 달라붙어 중정을 구경했다. 그늘진 쪽에 눈사람이 옹기종기 많이도 모여 있었다.
“에르난, 저것 좀 봐요. 혹시 우리인가?”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는 나란히 선 눈사람 둘이 있었다.
굵은 금색 끈을 머리에 돌돌 감아 왕관을 대신하고, 왼쪽 눈사람에는 붉은색 단추, 오른쪽 눈사람에는 보라색 단추로 눈을 붙여 놓았다.
“검은 눈이 아니라 빨간 눈이라. 이 집 사람들은 정말로 당신을 잘 아는군요.”
가만히 보니 눈덩이의 크기도 높이도 똑같았다.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분 폐하.”
카테리나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레이테가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
“오랜만이에요. 집에 와 있었군요.”
“여왕 폐하를 모시라고 세스크…… 아, 리세우 공작의 연락을 받았어요.”
“카테리나 양, 그냥 편히 말해요. 어차피 세스크인 줄 뻔히 아는데. 아, 이제 레이테는 세스크가 얼마나 막되어 먹은 녀석인지도 알 만큼 압니다.”
레이테는 자신이 공작에 대해 알기는 뭘 알며 호칭과는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려다 관두었다.
‘그 덕택에 저에게 이런저런 어른의 세계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이것 하나면 충분하므로.
“식사 시간이 다 되어도 두 분 폐하께서 소식이 없으시기에 하인을 보내려다가……, 으음, 혹시나 싶어 제가 직접 온 거예요.”
“혹시나?”
카테리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레이테는 그녀의 반응을 곧바로 이해했다.
부부의 사이가 얼마나 좋은지, 카테리나는 잘 안다. 마지막까지 몸을 불사른다거나 뭐 그런 것을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이쪽으로 오세요.”
물론 그녀의 예측은 옳았다.
* * *
리세우 공작 저택의 식당은 침실과 마찬가지로 깔끔하며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반갑습니다, 두 분 폐하. 저는 리세우 공작과 카테리나의 어머니 되는 사람입니다.”
제대로 마주한 공작부인은 조금 수척하지만 기품이 넘치는 귀부인이었다.
우아한 인상은 레이테의 것처럼 잘 연마된 무기의 느낌과 달랐다. 성정과 삶 자체가 여유롭게 품위를 지켜 온 듯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인. 저번에는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에르난은 대단히 정중하게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며 인사했다. 법적으로만 어머니인 블랑슈 왕비를 대할 때보다 훨씬 더 진심이 느껴졌다.
“폐하의 그런 모습을 볼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인 모양입니다.”
“어, 그게……, 음…….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송구합니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침실을 차지했던 에르난이었지만, 지금은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맸다. 프란세스크가 키득거렸다.
“괜찮아요. 평소에 방을 정리해 둔 보람이 있어서 좋았답니다. 두 분만의 화목한 시간도 좋지만, 오셨으니 제대로 된 식사라도 하고 가셔야죠. 이쪽으로 오시지요.”
부부는 공작부인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넓은 식탁은 중앙의 수려한 꽃 장식이 인상적이었다. 화려하기보다는 청초하다. 공작부인의 취향 같았다.
공작부인은 음식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에르난은 잘 아는 요리지만 레이테는 처음 보는 것도 있었다.
“이쪽은 대륙 방식으로 조리한 닭고기 스튜입니다. 선대 왕비 폐하의 고향에서 생산한 포도주를 넣고 푹 익혔답니다.”
원래 이런 국물 요리는 국왕을 대접하기에 격이 떨어지는 메뉴다. 하지만 그 국물을 대륙에서도 최고급으로 알려진 포도주로 만들었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넉넉한 양으로 보아 족히 서너 병은 사용한 듯했다.
“이건 바르시나 남부에서 즐겨 먹는 쌀 요리입니다. 여왕 폐하께서는 처음 보실까요? 아라고에서는 해산물을 넣는데, 제 고향이기도 한 남부의 정통 조리법은 토끼고기를 사용하지요.”
넓은 냄비에 토끼고기, 콩, 양파 등이 가득했다. 샛노랗게 물든 밥에서는 사프란의 향이 강하게 났다.
공작부인은 부부의 잔에 술을 직접 따라 주었다.
“대륙에서 겨울에 즐기는 음료입니다. 바르시나에서도 인기가 좋지요.”
과일이 들어 있는 따뜻한 포도주에서는 계피 향이 났다. 재료를 섞어 마시는 음료에 쓰기 아까울 만큼 포도주의 맛이 깊었다.
생선, 새우, 홍합 등이 아낌없이 들어간 해산물 요리도 있었다. 곁들여진 견과류 소스를 찍어 먹으니 고소한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아라고가 항구인 만큼, 부드럽게 익힌 해산물의 신선함은 말할 것도 없다.
빛깔이 고운 과일도 곳곳에 놓여 꽃과 함께 화사함을 더했다. 즉, 얼핏 보기에만 소박할 뿐 하나같이 고급 재료를 사용해 대단히 세심하고 꾸린 식탁이었다.
레이테는 감탄했다. 이들은 사치를 더 부리지 못해 안달이던 바르시나의 흔한 부자와는 달랐다.
리세우 공작가는 바르시나 건국 초부터 왕실과 함께한 유서 깊고 풍족한 집안이었다. 부유함이 너무나 당연하기에, 애써 뽐내야 할 필요 자체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레이테를 가장 감탄하게 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세스크, 봐. 여왕 폐하께서도 이렇게 드시잖아.”
디저트를 먹을 때였다. 카테리나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레이테는 커스터드 크림을 덮은 설탕 결정을 스푼으로 깨고 있었다.
“문제가 있나요?”
“아, 별것은 아니고. 일전에 카테리나가 편식을 하기에 한마디 했더니 여왕 폐하를 방패로 내세우더군요. 폐하께서는 카테리나가 상냥한 아이로만 보이시겠지만, 실은 이렇습니다. 통제가 안 돼요.”
프란세스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카테리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뭐가 어쩌고 어째?”
“폐하, 제가 알려 드렸던 멀미 퇴치법 기억하십니까? 여왕 폐하께 실례가 되지 않도록 카테리나를 통해 전해 드렸더니, 나중에 카테리나가 저를 불러서 등을 사정없이 후려치지 뭡니까.”
“오빠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생각해 봐!”
“엄청나게 아팠습니다. 아버지께도 어머니께도 국왕 폐하께도 맞은 적이 없었는데……!”
프란세스크가 훌쩍이는 척했다. 대놓고 어설픈 연기였다.
에르난이 아내에게 속삭였다.
“그야 내가 세스크한테 맞았으니까요. 대련할 때는 왕자를 때려도 처벌받지 않다 보니, 참으로 가차 없었습니다.”
레이테는 남매를 지켜보면서부터 참던 웃음을 기어이 터뜨리고 말았다.
“얘들아, 왕께서 두 분이나 계시는데 그게 뭐니. 제발 얌전히 식사하려무나. 내가 이 소리를 너희가 몇 살 때까지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남매의 다툼은 공작부인의 개입으로 종결되었다.
크림을 떠먹던 수저를 오빠에게 던질 기세였던 카테리나가 화들짝 놀라며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에르난과 레이테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자리에 앉았다.
여왕이 웃자 카테리나는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레이테는 즐거웠다. 카테리나에게 보기보다 왈가닥 기질이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에르난, 당신도 카테리나 양의 평소 모습을 알고 있었어요?”
레이테의 물음에 에르난은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프란세스크의 눈치를 슬쩍 보다가 답했다.
“세스크가 정말 간절하게 청했습니다. 되도록 모르는 척해 달라고요. 여왕 폐하는 제가 지금까지 본 여성 중 우아하기로는 어머니와 함께 쌍벽을 이루니, 카테리나가 여왕을 모시면 얌전한 아가씨가 될 것이다……, 뭐 이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남매가 동시에 얼굴을 붉혔다. 레이테는 중얼거렸다. 세상에.
문득 레이테는 세르지를 상대로 쩔쩔매던 카테리나가 떠올랐다. 그건 대체 뭐였을까?
“그렇지만 이십여 년을 한집에서 살았으면 알 것 아닌가. 타고난 성격인데 이만 인정하지 그래?”
에르난이 프란세스크에게 말했다. 프란세스크는 이제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여왕 폐하를 모실 때는 꽤 숙녀다워 보이더군요. 그만하면 됐습니다.”
“나는 카테리나 양이 어떤 성격이든 상관없이 좋아요. 아, 그래요. 봄에 사크틸라로 떠날 때 함께 가 주겠어요? 공작부인께는 죄송한 권유가 되겠지만…….”
레이테의 말에 남은 커스터드 크림을 떠먹던 카테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왕을 바라보았다.
카테리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입 안의 크림을 꿀꺽 삼켰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레이테의 앞에 다가가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었다.
“저도 폐하를 계속 따르고 싶었어요. 정말 영광이고,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식탁에서의 모습과는 단숨에 달라진, 여왕을 수행하는 시녀의 모습이다. 레이테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여기는 당신 집이잖아요. 여기서는 편하게 지내요.”
“네!”
카테리나가 방긋 웃었다.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는 맑은 웃음이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던 카테리나는 프란세스크와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프란세스크의 눈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다가 곧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풀렸다.
레이테는 에르난의 빈 잔에 포도주를 채우며 말했다.
“당신이 왜 이곳을 좋아하는지 알겠어요.”
에르난의 진짜 가족 관계는 삭막하고 비틀려 있었지만, 그는 이곳에서 가족의 사랑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레이테 또한 마찬가지다.
한없이 편안하고 즐겁다. 이 저택 자체가 그런 공간일지도 모른다.
며칠 동안 남편과 보냈던 달콤한 시간만큼이나 지금의 식사 자리도 행복한 꿈 같았다.
* * *
부부가 식사를 하는 동안 그들이 타고 갈 말이 준비되었다. 마차를 타기에는 아직 길이 엉망이었다.
국왕 부부, 프란세스크와 카테리나 남매, 왕의 호위기사와 시종 등 열 명가량 되는 일행이 왕궁으로 출발했다.
저택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늘이 져 녹지 않은 눈밭에서 뒹굴며 노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들은 부부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화려한 차림의 일행이 지나가자 손을 흔들었다. 부부는 손을 마주 흔들어 주었다.
그런데 레이테의 표정이 난감하게 굳었다. 그녀는 카테리나를 불러 말했다.
“일부러 챙겨 준 공작부인께는 미안하지만, 아까 받은 목도리와 망토를 저 아이들에게 나눠 줬으면 해요. 에르난, 당신도 괜찮겠지요?”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들이 건넨 옷을 받은 아이들은 처음 만져 보는 보드랍고 따뜻한 옷감이 신기한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아라고가 따뜻하다지만 저 아이들의 옷은 너무 얇아 보이더군요. 잘 주었습니다.”
“사크틸라는 겨울마다 동사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저를 수행하던 시스로네스조차 수시로 성 근처 마을을 찾아가야 했어요. 장례식을 집행할 사제가 부족했던지라.”
레이테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크틸라는 올겨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스로네스 이야기를 하니까 생각나는데요. 당신은 그의 추기경 임명이 지금도 마땅치 않나요?”
에르난은 멈칫하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심히 물었다.
“그때 그 서한, 보냈습니까?”
“아뇨, 아직. 어지간해서는 당신 서명을 받아 보내고 싶어요.”
에르난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서명을 해 줄 마음이 있느냐고 하면……, 모르겠다.
“그 서한은 우리 두 왕의 이름으로 성좌에 처음 보내는 공식 문서예요. 우리는 동등하다.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함께 통치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널리 알리고 인정받아야 하잖아요.
더군다나 바르시나는 대륙에서의 평판에 민감하지 않던가요? 교황께서 우리를 인정해 주시는 것만큼 효과적인 상징도 드물겠지요.”
“……그런 식으로 말하면 거절할 수가 없잖습니까.”
돌아가면 시스로네스 이름이 떡하니 적힌 문서에 서명부터 하게 생겼다. 에르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는 뒤를 따라오는 프란세스크를 돌아보았다. 왕의 눈짓을 받은 프란세스크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일행을 벗어났다.?
#075
왕궁은 단순히 왕의 거주지가 아니다. 국정의 중심지다. 수많은 귀족과 관리와 시종으로 가득한 왕궁은 늘 요란하고 정신없는 곳이다.
따라서 썰렁하기까지 한 아라고 왕궁의 현 상태는 부부를 대단히 당황하게 했다.
왕궁에 남은 사람은 궁에 상주하는 집사와 시종, 레이테를 따라 왔던 사크틸라인 정도였다.
바르시나인 귀족도 있기는 했다. 북쪽 국경 지역 출신의 백작이었다. 만년설로 유명한 곳이니 이 정도 눈은 시련조차 아닌 듯했다.
“당신은 조금 더 쉬어도 되겠네요. 사람이 있어야 일을 하지.”
레이테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네. 바르시나는 조금 더 쉬어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할 사크틸라의 일이 있지요.”
“어라? 의외네요. 내가 다시 재촉할 때까지 최대한 모르는 체하다가 싫다며 버틸 줄 알았더니.”
“이미 비슷한 일을 한 번 해 봐서 말입니다. 그때와 같은 기분으로 하면 되겠지요.”
부부는 함께 레이테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제 막 난롯불을 켰는지 방안은 바깥보다 서늘했다. 시녀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녀들 또한 자택에 갇힌 모양이다.
레이테는 책상 서랍을 열고 추기경 임명을 요청하는 서한을 꺼냈다.
“비슷한 일을 언제 해 봤는데요?”
“결혼계약서 서명할 때.”
에르난은 자신의 손을 저주하고 싶을 만큼 멋들어지게 서명했다. 예전처럼 어리숙하게 잉크 방울을 흘리지도 않았다.
‘동의하기 싫은 일에는 꼭 이렇게 잘 써지는군.’
“솔직히 묻지요. 그 계약서가 공정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대 아니죠.”
아내가 뻔뻔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여자라는 사실을 이제는 충분히 알고 있다. 그래도 이럴 때마다 에르난은 머리를 한 대쯤 맞은 기분이 들었다.
“에르난 왕자를 떠받드는 척하면서 억누르다가도 완전히 밟으면 곤란해지므로 적당히 띄워 주지만 역시 결론은 견제하기 위해, 나와 시스로네스와 다른 이들이 머리를 싸매고 얼마나 고민했는데요.”
지금껏 레이테에게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 적나라한, 공격 아닌 공격이었다. 에르난은 눈을 멍하니 껌뻑이기만 했다.
“균형이란 그만큼 섬세하게 무게를 조율해야 하죠. 저울의 눈금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평형은 망가지고 말아요.”
“그 말은 맞군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에르난이 레이테의 옆에 서는 순간 그녀의 존재가 사라질 것이다.
지금은 그것을 더 섬세하게 다듬은 새로운 합의가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레이테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려는 시도가 일어나지 않았나?
여왕의 존재를 지우는 것이야말로, 여왕의 적이 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치명적인 전략이다.
“아무튼 고마워요. 당신에게 부담을 주어 미안하지만, 결국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 선택이라고 믿어요. 나는 싫었지만 아내가 강요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새 추기경의 진가를 깨닫기 전까지는 얼마든지 투정하세요. 적당히 들어 드리겠어요.”
레이테는 비서에게 편지를 넘겼다. 바다는 얼어붙지 않았다. 서한은 오늘 당장 대륙으로 향하는 배에 실릴 것이다.
“투정을 들어주겠다? 내 여왕께서 언제 이렇게 너그러운 분이 되셨습니까?”
“당신의 양보가 고마워서 그래요.”
“쉴 새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투정할 수 있는데. 지금 해도 됩니까?”
에르난은 아내의 뺨에 입을 맞추려 했다. 그러나 레이테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여 피했다.
“그래요. 고마운 게 전부일 리가 없지. 바르시나 왕이 사크틸라와 협력은 해도 마냥 끌려다닐 마음은 없음을 어필해서 양국의 분위기를 적당히 긴장시켜 달라?”
레이테는 뺨을 다시 남편 쪽으로 내밀었다. 정답.
입맞춤은 가볍게 끝나지 않았다. 에르난은 아내가 완전히 자신을 마주 보게 하고 진한 키스를 시도했다. 레이테는 집무실에서 무슨 짓이냐는 눈치를 주려다가 이내 그를 받아들였다.
‘추운데 몸 좀 데우는 거지 뭐.’
서로를 꼭 안고서 나누는 온기가 좋았다.
“이렇게 된 이상, 시스로네스가 더 넓고 높은 세상으로 가기를 기원하며 오늘부터 기도라도 해야겠습니다.”
에르난은 또 다른 투정을 시작했다.
“무슨 뜻이지요?”
“성직자 출세 코스의 정점까지 가 버리라지요. 추기경은 물론이고 교황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르시나가 가진 것은 돈뿐이니 뇌물이 필요하다면 적극 지원할 의사도 있습니다.
교황이 되면 반도를 떠나 대륙으로 가겠지요. 남편도 아닌 주제에 여왕의 사실에 출입하던 삶은 끝나고, 죽을 때까지 호화로운 교황궁의 발코니에 서서 가련한 양들에게 축복이나 내리며 사는 겁니다. 후후후…….”
자신의 상상이 무척 만족스러운 듯 에르난은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뇌물이라니, 성좌를 모독하지 말아요. 그것보다 당신 희망을 깨서 미안한데, 반도 시골 출신 추기경은 교황으로 안 뽑혀요.”
실은 레이테의 말이 맞다. 교황은 언제나 교황령 출신의 성직자 중에서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제 성좌에서도 시스로네스가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지 알아봐서 천 년 만에 관례를 깨고 그를 교황으로……. 음, 역시 지금보다 천 년은 더 흘러야 가능하려나. 하지만 시스로네스가 그런 야심을 가졌을 수는 있습니다.”
“뭐……, 꿈이야 꿀 수 있겠죠. 그분께는 일단 건강관리가 우선 같지만요.”
하지만 세상의 어떤 왕관보다 높은, 교황만이 쓸 수 있는 삼중관을 향한 추기경의 욕망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에르난이 읽었던 역사서에는 다 죽어 가는 늙은이가 교황이 되어 고작 삼 주를 버틴 사례도 기록되어 있었다.
‘시스로네스라고 그런 꿈을 꾸지 말라는 법은 없지.’
마지못해 동의했지만 그에게 힘을 더 실어 주어도 괜찮을지 에르난은 자신할 수 없었다.
* * *
레이테와의 일을 마친 에르난은 자신의 집무실로 왔다. 그곳에서는 코른 후작이 에르난을 기다리고 있었다.
“폐하.”
후작의 구두와 옷자락에는 눈이 튄 흔적이 지저분했다. 하지만 그는 대단히 의기양양한 기세였다.
“궁으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왔습니다.”
“경의 저택은 여기에서 제법 멀다고 들었는데,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소.”
코른은 왕과 정치적 견해의 방향이 다르다. 바르시나 귀족 특유의, 겁 없이 왕에게 대드는 태도로는 일인자 수준이다. 그러나 코른은 열성적으로 국정에 참여하는 유능한 이였다. 다른 귀족들의 신뢰 또한 높다.
이런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을까? 에르난에게는 아직 깜깜하기만 한 일이었다.
대륙주의자인 그의 머릿속에서 에르난은 분명 마땅찮은 왕이다. 그래도 왕이기에 섬긴다. 일단 이만하면 되었다. 그는 반역자는 아니니까.
“지시하신 일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가 무슨 일로 왕을 찾아왔는지는 뻔했다. 헤젤 사절단에 대한 항의다.
“날씨가 궂었는데도 영빈관에 다녀왔던 건가?”
“저는 아예 자택에 돌아가지 않고, 그날 이후 오늘까지 쭉 영빈관에 있었습니다.”
오호? 호의와 적의가 반씩 섞인 왕의 시선이 코른을 향했다.
“며칠 동안 반강제적으로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거짓말로도 신뢰라고 말하기 어려운 왕의 시선이지만, 코른은 그에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만만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왕과 같이 호의와 적의가 반쯤 섞인 채로.
에르난은 코른이 왕의 명을 어떤 식으로 충실히 수행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 * *
회담을 준비하면서 헤젤이 가장 경계한 이는 여왕의 최측근인 시스로네스 대주교였다.
그는 이십여 년 동안 여왕과 숙부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조율했다. 그러다가 바르시나를 개입시키는 모험을 저지르더니, 기어이 여왕을 승리로 이끌었다.
따라서 아라고에 도착했을 때, 대주교가 요양을 위해 왕궁을 떠난 상태임을 안 사절단은 대단히 안심했다. 큰 짐을 덜었다. 사크틸라인은 많지 않았고, 바르시나인은 헤젤을 잘 모른다.
사절단의 대표인 브라간사는 부부를 만난 일이 있다. 반역자를 물리치고, 자신들을 공동 군주라고 선포하고, 그런 승리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어색한 부부를 보았다.
에르난은 의욕이 넘치지만 바르시나인이 과연 반도에서 얼마나 힘을 키울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아내의 신뢰도 받지 못한다.
레이테는 여태까지 생존했다는 사실 자체에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여자다. 할 줄 아는 것도 없이 생존에만 집착해 남편을 적대시한다.
그들의 동맹은 살얼음판 위에 있으며, 균열이 가기 시작하면 깨질 것이다.
가장 최근에 부부를 만난 엔히크는 그들의 사이가 무척 좋았다고 말했다. 브라간사는 멋대로 가출했다가 사고나 친 한심한 왕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부부의 연기력은 제법 좋고, 엔히크는 그런 것을 구분할 머리가 없지.’
방심한 브라간사는 회의에 직접 쫓아온 여왕을 보고 경악했다.
겉으로는 어떻게든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빠르게 자리를 떴다. 무례한 행위지만 일단은 후퇴해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정신이 없는 중에도 논점을 흐려 회의장을 뒤흔들고 나왔으니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브라간사는 한 가지 더 방심했다.
“당신들은 비겁자요.”
별 볼 일 없는 존재인 줄 알았던 바르시나의 귀족이 얼마나 집요하고 여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직설적인지, 브라간사를 비롯한 헤젤인들은 전혀 몰랐다.
“브라간사 공, 공께서는 헤젤 최고의 군인이라고 들었습니다. 부디 병영으로 돌아가시기를 권유합니다. 아무래도 거기가 공께서 가장 빛을 발하실 곳인 것 같군요.”
사절단을 쫓아온 코른 후작은 거침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제 왕을 모독하고서 기선제압을 했다고 자화자찬할 생각이셨나 본데, 그런 헛짓거리 할 거면 하루빨리 돌아가셔서 하던 일에나 충실하시라 이 얘깁니다.”
상스럽기까지 한 말에 브라간사의 낯빛이 얼어붙었다. 그의 주변에 선 다른 헤젤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두 분의 국왕 폐하, 그리고 각하를 비롯한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귀족들께서 느끼셨을 유감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희가 잘못했으니…….”
“잘못인 줄 알면 지금 당장 왕궁까지 무릎으로 기어가심은 어떻습니까? 여왕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엎드려 사죄하면 딱 맞겠는데.”
“……예?”
코른은 뜬금없이 바르시나어로 말했다. 바르시나어가 서투른 브라간사는 한발 늦게 그 말이 사실상 욕설임을 깨달았다.
“각하,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아니, 아닙니다. 저희가 무례했던 탓입니다. 송구합니다.”
브라간사는 주먹 쥔 손을 떨면서 화를 눌러 담으려 애썼다.
현 상황은 전적으로 헤젤 측의 실책이다. 술수를 들킨 데에 당황하여 일단 후퇴하기에만 바빴으니.
따라서 항의를 받을 수밖에 없다. 항의가 다소 거칠더라도 차분히 받아넘겨야 했다.
“일단 후작께서는 흥분을 가라앉히셔야 할 것 같습니다. 차라도 한잔 하면서…….”
코른은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대놓고 모욕을 주는데도 참다니, 브라간사는 인내심이 굉장한 자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일부러 퍼부은 것은 아니다. 어디서 감히 바르시나를 만만하게 보고.
“당신네 나라에서는 이럴 때도 점잔 뺍니까? 아직도 문제가 뭔지 파악을 못 한 모양인데, 설마 제게 사과하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아무리 공께서 초보자라 하셔도 말입니다.”
초보자라는 말에 브라간사는 눈썹을 치켜떴다. 그에게는 사실상 이번이 처음 오르는 외교 무대였다.
지난날 리리우를 수행한 일은 있었으나, 그때는 최대한 몸을 사리고 사크틸라와 여왕을 관찰하는 데에 집중했다.
이번은 달랐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은 이미 꼬일 대로 꼬여 버렸다.
“바르시나의 귀족으로서 이런 말씀을 드리자니 영 민망하지만, 초보자인 공이 무척 걱정되는 마음에……, 지금부터 조금 대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표현이 거칠어도 양해해 주십시오.”
이미 거칠기 짝이 없거늘 얼마나 더 거칠어진다는 말인가? 헤젤인들은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제가 아까 말한 것처럼 여왕의 옷자락이라도 붙잡지 않는 한 왕께서는 당신들의 목만 헤젤로 돌려보낼 거요.”
헉. 헤젤인 몇 명이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076
“저의 왕이신 돈 에르난께서는 완전히, 지독하게, 끔찍하게, 그걸 매일매일 봐야 하는 제 눈을 솔직히 파 버리고 싶을 만큼 사크틸라 은여우에게 홀라당 빠져 있습니다. 탐브레의 머리통을 날리고 숨을 끊어놓은 이가 누굽니까? 제 왕이십니다.
그러니 당신들의 목, 혹은 비슷한 것을 잘라낼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귀나 팔, 그도 아니면 내장…… 아, 이건 헤젤에 도착하기 전에 너무 썩어 영 못 봐 줄 꼴이 되겠군요.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깔끔하게 보낼 수 있는 눈이나 손발톱도 있습니다.”
코른이 쏟아내는 말에, 헤젤인들은 입을 떡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브라간사는 입은 다문 채였으나, 파들파들 떨리는 눈은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었다. 왕자의 말이 맞았다니.
“코른 후작 각하. 염려의 말씀은 감사드리지만……”
보다 못한 다른 헤젤인이 입을 열었다. 브라간사는 살기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몸을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마치 브라간사 외에는 누구에게도 발언권이 없는 듯한 모습이다. 코른은 그 광경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브라간사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코른에게 정중히 말했다.
“각하, 저희는 왕의 명을 받고 온 사자입니다. 조금만 더 격식을 갖추고 대화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격식? 아, 물론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공께서는 역시 초보자시군요. 그 격식이란 것을 조금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진정성을 증명해서 실리를 취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영빈관으로 퇴각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전원 무릎으로 기어야 하셨다니까요. 격식이 좀 떨어진다 해도, 초보자의 서툴지만 확실한 진심이 두 분 폐하를 감동시켰을지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공께서는 여왕 폐하의 친척이지 않습니까? 혈육에게는 너그러워지는 법이지요.”
코른은 자꾸만 초보자라는 말을 반복하며 브라간사의 신경을 긁어 댔다. 그는 점점 평정을 잃어 가며 붉어지는 브라간사의 얼굴을 감상하다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덧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이런, 아라고는 눈이 잘 안 오는 곳인데. 공작 각하, 실례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하루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폐하께서는 틀림없이 초보자에게 관대하실 테니, 사죄가 하루쯤 늦는다고 공의 목을 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하루는 눈이 쌓이고 길이 막히면서 이틀을 지나고 사흘도 지나며 길어지기만 했다.
* * *
“……강경한 항의를 멈추지 않았고 사절단 대표인 브라간사 공작의 사과를 받아냈습니다. 조만간 격식을 제대로 갖춰 두 분 폐하, 특히 여왕께 직접 사죄하겠다고 합니다. 확실하게 약속받았으니 곧 올 겁니다.”
대단히 많은 내용이 생략된 듯한 보고다. 에르난은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의회에 출석한 양 악랄하게 입을 털었겠지.’
바르시나 귀족은 그랬다. 예술을 즐기는 세련된 취향과 정반대로, 할 말이 있다면 그 상대가 왕족이든 외국의 사절이든 가리지 않았다.
에르난이 알기로, 그나마 왕 앞에서는 자제하는 편이다. 귀족들끼리 모이는 위원회의에서는 거의 난투극에 가까운 상황이 터지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들의 화살이 아직 적대국에 가까운 쪽으로 향했을 때의 파괴력 또한 제법인 모양이다.
‘회담 참석자는 헤젤을 상대한 경험이 많은 사크틸라인 위주로 꾸릴까 싶었는데 생각을 조금 바꿔야겠는걸.’
“폐하?”
“아,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버렸군. 수고 많았소. 그리고 그대 또한 회담에 참여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거절하겠습니다.”
의외의 답이었다. 왕이 자신을 챙겨 주니 영광이라고 해도 부족할 지경이거늘. 물론 코른이 그럴 인물이 아니기는 했다.
“어째서인가? 자네가 그들을 꽤 잘 상대한 것 같은데?”
“브라간사의 멱살을 잡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
에르난은 자신이 레이테도 시스로네스도 아닌 코른의 말에 황당해져서 입을 다물게 될 줄은 몰랐다.
“브라간사는 이런 방면으로 초보인지라 허술한 면이 적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이성을 붙잡으려고 애는 쓰는데 표정도 다 감추지 못하지요.”
꼭 브라간사가 아니더라도, 코른의 앞에서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에르난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초보적인 약점 따위는 금방 극복하고 바르시나를 위협할 겁니다. 제가 머무는 동안, 사절단 내에서 브라간사에게 우두머리 자격이 있는지 문제 제기가 있었습니다. 브라간사는 기어이 그들을 휘어잡더군요. 누가 보아도 그의 실책이 분명한데 말입니다.”
“그러면 더욱 자네가 참석해야 하지 않나? 공작을 상대해 봤으니까.”
“송구하지만 브라간사는……. 으흠, 흠.”
코른은 괜히 헛기침을 반복했다.
에르난은 코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왜 어울리지 않게 왕의 눈치를 살피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송구한 줄 알면 그냥 하지 않는 편이 낫겠소.”
“아니요, 하겠습니다.”
“잠깐, 하지 말란…….”
후작은 왕을 무시하고 기어이 할 말을 했다.
“여왕 폐하만큼이나 오만합니다.”
브라간사는 지금 없으니 모르겠고, 당장 눈앞에 있는 코른의 멱살을 잡고 싶다. 정말 그럴 마음으로 에르난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군주에게 적당한 거만함은 권위를 돋보이게 하는 미덕이라 봅니다. 하지만 브라간사는 왕이 아니잖습니까?
그의 성정은 위험한 구석이 있고, 저는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사람 앞에서 별로 참을성이 없습니다. 중요한 회담을 망칠 수는 없지요.”
에르난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좋아. 그런데 꼭 내 아내를 엮어서 말해야 하나?”
“한 가족이지 않습니까.”
코른은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에르난은 불쾌해졌다. 마치 아내를 브라간사에게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레이테의 가족은 나야.’
“아, 바르시나의 두 번째 왕께서는 제 개인적인 호오와 별개로 군주다운 위엄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후작의 취향까지 간섭하지는 않겠소. 하지만 틀린 표현은 내 친히 고쳐줄 테니 다시는 실수하지 마시오. 두 번째 왕이 아니라, 그냥 공동왕이오. 알겠는가?”
에르난은 차분히 타일렀지만, 그의 속은 끓고 있었다.
두 번째 왕? 실언일 리가 없다. 틀림없이 일부러 한 표현이다. 왕은 왕이되 에르난보다 열등한 왕.
에르난은 고생하고 온 코른과 충돌하기 싫어 참을 뿐이었다.
“……주의하겠습니다, 폐하.”
그리고 코른의 대답은 실수하지 않겠다는 말도 아니고 고작 ‘주의’였다.
“폐하, 모셔왔습니다.”
그때, 밖에서 문이 열렸다. 프란세스크의 목소리다. 에르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왕은 친구 대신 함께 들어온 두꺼운 외투 차림의 남자를 와락 안았다. 우와. 프란세스크가 감탄했다.
“오랜만입니다, 대주교 각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에르난은 마치 친척이라도 만난 양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억지로 끌려왔는데 잘 지냈을 것 같습니까?”
외투의 후드를 젖힌 시스로네스는 눈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억지라니요, 각하. 제가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데 그런 음해를 하시면 곤란합니다.”
프란세스크가 싱글싱글 웃었다. 시스로네스는 그를 노려보았다가 천진난만하기까지 한 웃음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대단하기도 하지.’
왕궁으로 출발하기 전, 에르난은 프란세스크를 불러 명했다. 시스로네스의 소재지를 알아내서, 죽기 직전의 상태가 아닌 한 무조건 데려올 것.
프란세스크는 부부와 함께 왕궁으로 돌아오는 척하다가 따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불과 몇 시간 만에 대주교를 찾아 데려왔다.
“후작, 아까 이야기는 보고서로 올리게.”
“알겠습니다, 폐하.”
코른은 에르난과 프란세스크와 시스로네스라는 조합이 영 신기한 모양이었다. 나가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에르난은 대주교의 어깨를 안고 친히 난롯가로 이끌어 의자에 앉혔다.
“난로에 불을 붙인 지 오래되지는 않아서 아직 조금 쌀쌀합니다. 양해해 주시지요.”
“배려하는 척 하셔 봤자 안 어울리니 빨리 본론이나 말씀하십시오.”
레이테도 아니고 에르난이 베푸는 친절은 대주교의 얼굴을 황당함으로 일그러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에르난은 시종에게서 담요까지 건네받아 시스로네스의 등에 덮어 주었다.
“추기경께 잘 좀 보이고 싶어서요.”
“추기경이라니.”
“모르는 체 안 하셔도 됩니다. 레이테가 각하를 추기경으로 임명해 달라고 성좌에 추천했습니다. 아시지요? 그리고 아내는 갖은 협박과 회유와 애교를 동원하며 제게도 서명을 부탁했습니다. 저는 각하의 빛나는 미래를 기원하며 기꺼이 동참했고요.”
그제야 에르난을 바라보는 시스로네스의 얼굴에 놀라움이 피어났다. 반응을 보아하니, 설마 에르난이 동의하리라고 예상조차 하지 않은 듯했다.
“너무하십니다. 어떻게 저를 그렇게 불신하실 수가.”
“기도와 침묵과 명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평범한 수도사를 납치해서 속세로 질질 끌고 나온 자와 그것을 명령한 이가 누구인데, 폐하께서 제 일에 동의해 주시리라 믿겠습니까?”
“잠깐만요, 각하. 평범한 수도사가 어디 있답니까? 염치도 없으십니다?”
벽에 기대 있던 프란세스크가 팔을 휘저었다. 시스로네스는 코웃음을 쳤다.
“반백 년 넘게 살면서, 이토록 거칠게 대접받기는 처음입니다. 아, 문득 예전 일이 떠오르는군요. 폐하께서 여왕을 구출하시어 부르고에 도착했던 날 밤, 저는 여왕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미래의 남편이 마음에 드시느냐고 물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호오, 레이테가 뭐라고 했습니까?”
에르난은 대주교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검은 눈이 호기심에 반짝반짝 빛났다.
“난폭하고 무례한 사람이라고.”
“…….”
주교의 반지에 막 입을 맞추려던 에르난의 움직임이 멈췄다.
푸하하하! 썰렁해진 집무실에 프란세스크의 웃음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난폭하고 무례해? 에르난은 아내에게 진짜 난폭함과 무례함을 반드시 알려 주리라 결심했다.
‘당장 오늘 밤에 알려 주고 말 테다.’
일단은 눈앞의 일을 먼저 처리하고.
“……미래의 추기경 예하.”
“저는 주교입니다, 폐하.”
“그래요. 대주교 각하. 오랜만에 만나니 참 반갑습니다. 역시 각하께서는 속세에 계셔야 잘 어울리는 것 같군요. 그동안은 잘 지내셨습니까?”
“누운 채로 하루하루를 보낸 탓에 창밖으로 눈 내리는 모습만 보았지요. 겨우내 눈에 파묻히는 제 고향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과연 사크틸라.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세스크가 대주교의 맞은편에 의자를 놓았다. 에르난은 그곳에 앉아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세스크가 금방 모셔온 걸 보니 시내에 계셨겠군요. 다 들으셨지요?”
“무얼 말입니까? 아, 혈기왕성한 젊은 국왕 부처께서 사랑을 속삭이는 소리라면 잘 들었습니다.”
“뭐?”
경악한 에르난이 벌떡 일어나려 하자 프란세스크가 왕의 어깨를 붙잡아 앉혔다. 그가 설명했다.
“제 저택 근처의 광장, 그곳에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이 있더군요. 대주교께서는 거기 계셨습니다.”
수선화가 수줍게 피어 있던 조그마한 광장. 그곳에서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부부는 다시금 사랑을 확인했다.
참을 수 없이 차오르는 열정을 터뜨리고자 바로 옆에 있는 리세우 공작가의 저택을 찾아갔다. 하지만 광장을 둘러싼 다른 건물의 정체 따위, 생각할 겨를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폐하, 담요가 참 따뜻하군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왕 폐하와도 이렇게 따뜻한 시간을 보내셨겠지요? 두 분의 혼사를 주선한 보람을 느낍니다.”
시스로네스는 푸근한 웃음을 내보였다. 노골적인 이죽거림보다 배로 가증스러웠다.
환자든 미래의 추기경이든 상관없으니 당장 저 입을 꿰매고 싶다…….
“부부의 사생활에 관심 두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헤젤의 사절단이 무슨 짓을 했는지 들었느냐는 말이었습니다.”
대주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병원에 있을 때는 의도적으로 외부 소식을 듣지 않았습니다. 급한 일이 생기면 연락할 테니 그전까지는 치료에만 집중하라는 여왕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레이테는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겠지요.”
“그렇습니다. 리세우 공작께서 저를 끌고…… 오면서 사정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저기요, 각하. 저희는 그냥 평범하게 말을 함께 타고 온 것 아니었습니까?”
프란세스크가 투덜거렸다. 시스로네스는 그것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개자식들.”?
#077
난롯불이 꺼졌나? 에르난은 난로를 쳐다보았다. 불은 잘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오한을 느꼈다.
살기등등한 사크틸라어 욕설은 시스로네스의 것이었다.
“폐하께서 곧바로 사람을 보내 항의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을 향한 질문은 더없이 살벌했다.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다면 에르난부터 가만두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다행히도 대처라면 대주교를 실망하게 할 수준은 아니다.
“아까 나간 코른 후작이 며칠 동안 영빈관에 머물면서 그 작자들 혼을 쏙 빼놓고 왔습니다. 바르시나 의회에서도 알아주는……, 알아주는 수완가이니 걱정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코른이 고약한 싸움꾼으로 유명하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시스로네스는 그의 말뜻을 이해한 듯 차게 웃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왕 폐하를 만나 뵈어야겠습니다.”
“몸 좀 녹이고 가시지요.”
“그 개자식들 생각하니 몸이 녹다 못해 아예 열이 끓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에르난이 말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프란세스크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헤젤 사절단이 다시 찾아올 텐데, 만나는 자리에 동석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지금은 싫습니다.”
“어째서?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해야 하다니 한심하지만, 그들을 상대할 때 당신이 있으면 꽤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도움은커녕 일만 더 복잡해질 겁니다.”
무슨 뜻이지? 의문으로 눈을 깜박이는 에르난을 향해 시스로네스는 오싹한 미소를 지었다.
“브라간사를 보자마자 그 멱살을 잡아 바닥에 던져 버릴 테니까.”
에르난과 프란세스크가 뭐라 대꾸도 못 하는 사이, 그는 왕에게 꾸벅 인사하고서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도톰한 옷을 몇 겹이나 껴입은 대주교의 걸음걸이는 힘이 넘쳤다.
“세스크.”
“예?”
“코른도 시스로네스도 헤젤 일행을 보지 않겠다는데 그 이유가 똑같군.”
“후작도 비슷한 소리를 한 겁니까? 멱살을 잡아…… 이하생략?”
에르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세스크가 웃음을 터뜨렸다.
“재수 없는 사크틸라 여자니 뭐니 말하고 다닌다던데, 후작도 도냐 레이테를 바르시나의 왕으로 보기는 하는군요.”
“결국 그때의 사태가 바르시나까지 모독하는 짓이었기 때문일 테지.”
에르난은 쓰게 웃었다.
* * *
레이테는 잔에 남은 포도주를 한 번에 다 마셨다. 자꾸만 목이 말랐다.
에르난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는 아내가 결정을 마칠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랬더니 자꾸 술만 마신다.
레이테가 빈 잔을 살짝 흔들며 근처에 선 카테리나를 바라보았다. 카테리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칫. 더 마시기를 포기한 레이테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떤 대처가 가장 효과적일지 모르겠어요.”
한참 만에 한 말이 고작 이런 것이라니, 레이테는 남편을 보기에 민망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에르난의 모습은 그 대답을 예상한 듯했다.
답이 있다면 술만 마실 것이 아니라 진작 말했을 테니.
책상에는 손으로 쥐기도 아까울 만큼 사치스럽게 장식한 편지가 놓여 있었다.
브라간사를 비롯한 헤젤 사절단 전원이 두 왕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할 테니 시간을 내달라는 청이었다. 대단히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이번 일의 가장 큰 피해자는 당신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합시다.”
“가짜일 게 뻔한 사과나 받자고 그들을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아요. 음, 이 기회를 어떻게든 이용하고 싶기는 한데…….”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레이테는 빈 잔만 노려보았다.
투명한 잔 너머로, 금색 펜던트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한참 동안 펜던트를 응시하던 레이테는 갑자기 그것을 확 잡아당겼다.
“윽!”
에르난의 상반신이 아내 쪽으로 끌려갔다. 술잔이 그의 몸에 부딪히면서 탁자 위에서 빙그르 돌았다. 에르난은 아래로 떨어지려는 잔을 황급히 붙잡았다.
“이것.”
반쯤 잠긴 레이테의 목소리에는 취기가 역력했다.
“그 사람들이 올 때 이걸 주도록 해요.”
“예? 그자들에게 왜 목걸이를…… 아.”
레이테가 손에 쥔 펜던트를 놓았다. 금도금을 한 양 장식이었다.
황금 양모.
왕의 사람을 모을 기사단.
“그들에게 보여 주라는 뜻이로군요. 맞습니까?”
레이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사절단의 사과는 조금 느긋하게 받읍시다. 실컷 기다리며 초조해하라고 놔둬 볼까요? 그동안 우리는 황금 양모가 누구에게 어울릴지 고민이나 해 봅시다.”
레이테는 씩 웃더니 남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춰 왔다. 단숨에 미끄러져 들어오는 혀끝에서는 포도주 맛이 났다. 그녀는 남편의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그의 몸을 더듬거렸다. 에르난은 몸을 흠칫했다.
“잠깐……. 집무실에서 이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저를 죽일 것처럼 협박하지 않았습니까?”
“흐응, 그건 당신 집무실에 해당하는 얘기고요. 여기는 내 집무실인데요?”
“그게 무슨 논리입니까? 우리는 늘 동등하게…….”
“아, 몰라요.”
두 사람 사이에 책상이 놓인 탓에, 레이테의 손길이 멀리까지 갈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남편의 목덜미를 간지럽힐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에르난의 긴장을 부추기는 데에는 충분했다. 에르난은 의자에서 일어나 아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급히 일어난 탓에 의자가 뒤로 쓰러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에르난은 뒤를 돌아보았다. 쓰러진 의자, 그리고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시녀들이 있었다.
‘이런.’
지금 일은 소문이 퍼질 것이다. 레이테는 소문에 민감했다.
‘데리고 나가는 편이 나으려나?’
그때, 레이테가 놀랍도록 맑고 또렷한 목소리로 시녀들에게 말했다.
“뭘 봐요. 돌아가세요.”
에르난은 깨달았다. 그녀는 대놓고 남편을 유혹하는 모습을 보이며, 관심에 기죽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시위하고 싶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냥 저지르기는 부끄러우니 술의 힘을 빌리려고 한 모양이지만.
“자, 그러면 지금은 당장 급한 일을 할까요?”
집무실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에르난은 아내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레이테의 팔도 곧바로 그를 감았다. 두 사람은 다시 입술을 포갰다.
* * *
2월 12일은 아라고의 수호 성녀, 에우랄리아의 대축일이다. 살두비아 사람들이 일 년에 딱 한 번 기둥의 성녀를 기념하며 성당을 찾듯이, 아라고의 시민들도 이날만큼은 경건한 하루를 보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오후 늦은 시각, 대성당에서는 신성하면서도 불경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국왕 에르난이 만든 종교기사단의 창단식이었다.
그 고결한 기사단의 이름이 문제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옷을 치렁치렁하게 입은 에르난이 제단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천천히 몸을 굽혀 바닥에 엎드렸다.
왕의 위엄이 훼손되지 않도록, 예식을 돕는 시종들이 다가와 구겨진 옷자락을 보기 좋게 펼쳐 주었다.
추기경은 에르난에게 성수를 흩뿌리며 축문을 읊었다.
“신의 미천한 종 에르난은 형제들과 함께 육신과 영혼을 신에게 봉헌하며…….”
에르난은 이 의식이 싫었다.
엎드리는 행위는 신 아래에서 인간을 겸손하게 낮춘다는 의미다. 겸손? 좋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신에게 일생을 바쳐야 하는 사제만 하면 안 될까.
이런 생각이나 하는 주제에 종교기사단을 만들다니 우스운 노릇이기는 했다. 물론 사크틸라인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택한 전략일 따름이다.
그렇지만 굴욕적일 정도로 신 앞에 완전히 몸을 조아리고 있으니 에르난도 신에게 민망해졌다. 진심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미리 확인했던 예식서에 따르면, 에르난은 꽤 오랫동안 엎드려야 했다. 추기경을 비롯하여 의식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해야 한다.
“성 조르디.”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성녀 에우랄리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이런 기도를 느릿느릿한 합창으로 수십 번 반복한다. 가장 격이 높은 성인과 천사들을 시작으로 바르시나, 두 명의 국왕, 아라고, 그리고 기사단원 전원의 수호성인을 일일이 호명하며 신에게 은혜를 청해 달라고 빈다. 시간이 한참 걸릴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엎드려야 하지.’
일어날 때는 시종들이 왕을 돕기로 되어 있다. 그러니 에르난은 지루하게 반복되는 기도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도 상관없었다.
문제는 졸리다는 점이었다.
‘레이테의 충고를 들었어야 했어. 괜히 힘쓰지 말고 일찍 잘걸…….’
어젯밤, 창단식 예식서를 살펴본 레이테가 말했다.
‘당신이 아니라 나라도 틀림없이 중간에 꾸벅꾸벅 졸 만큼 길군요. 그러니까 일찍 자는 걸 진지하게 권유, 명령, 협박하겠어요.’
에르난은 아내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수마와 싸우는 중이다. 시종이 알아서 잘 일으켜 주리라 믿으며 그냥 눈을 붙일까? 하지만 그러다 무슨 망신을 살지 모른다.
바르시나인은 이런 일에 관심이 없다. 종교 예식을 잘 모르는 이가 태반이니, 그들도 아마 눈이 절반쯤 풀렸을 것이다.
사크틸라인이라면 왕의 모습에 당황할 것이다. 레이테의 말을 생각해 보면 그들이라고 딱히 멀쩡할 것 같지는 않지만.
하지만 에르난은 어떤 실수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리숙한 모습을 절대 보이고 싶지 않은 이들이 성당에 왔다. 그들은 왼쪽 신자석의 가장 앞에 앉아 있었다. 에르난이 무척 잘 보이는 자리였다.
브라간사 공작을 위시한 헤젤의 사절단이었다.
* * *
“또 이런 말 하기 민망하지만, 여왕께서는 여전히 여러분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군. 정말 미안하네.”
“폐하, 제발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저희에게 직접 용서를 빌 기회를 주십시오.”
“레이테가 싫다는데 어쩌겠나……. 진심으로 용서를 받아들일 마음이 들 때까지, 한참은 더 밤새 기도하며 분노를 다스려야 할 것 같다더군.”
실은 기도 대신 남편과 살을 섞느라 바쁜 밤이지만. 에르난은 속으로 빈정거렸다.
헤젤 측이 부부에게 사죄를 요청한 지 곧 3주가 되어 간다. 이들은 안달이 나다 못해 거의 미칠 지경인 모양이었다.
돌처럼 굳어 버린 사절의 얼굴을 보니 틀림없었다. 그는 매일 왕궁에 찾아와 같은 요청을 반복했다.
사실 사절단이 부부를 찾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무례한 태도로 문제가 생긴 만큼, 헤젤은 철저하게 격식을 갖춰야만 했다.
따라서 정식으로 약속을 잡으려 했을 뿐인데, 그조차 못하고 있었다. 매번 왕이 친히 사절을 만나 미안하다고 말하니 차마 대들 수도 없다.
“저, 그러면 여왕 폐하께 서신이라도……. 브라간사 공이 썼습니다.”
‘애쓰는군. 어차피 편지는 읽지도 않고 난롯불에 던질 텐데.’
“공작의 정성이 대단하군. 아내에게 꼭 전해 주겠네. 하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편이 좋겠어.”
왕은 아쉬움이 가득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단호한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시간을 내줄 수 없다는 의지가 또렷했다.
접견실을 나가는 사절의 어깨가 불쌍할 만큼 축 쳐져 있었다. 그 뒷모습을 향해 에르난을 비롯한 바르시나인들은 안타까움과 비웃음이 반반씩 섞인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매번 같은 사절이 와서 통사정하니, 인간적으로는 딱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브라간사가 그의 뺨을 벌써 다섯 번은 때렸다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는 바르시나와 사크틸라 측의 전략이었다.
부부는 자신들이 사과받을 자리를 최대한 뒤로 미뤄 그들을 미치게 만들기로 했다.
“내 화가 풀리지 않아 왕궁에 들일 수 없다는 핑계니까, 아예 끝까지 갈까요? 절대로 왕궁에 들이지 않는 거예요.”
“사과하기 전에는 헤젤로 돌아가지 않을 텐데요.”
“밖에서 만나면 되죠. 기사단 결성식 때.”
두 왕과의 만남 자체는 이뤄질 것이다. 단 왕궁 밖,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동맹이 더욱 강화될 행사장에서다.
레이테는 철저했다. 헤젤의 그 어떤 접촉 시도도 완벽하게 무시했다.
에르난은 화가 풀리지 않았다는 그녀의 말이 단순히 시간 끌기용 핑계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078
기사단 창단식에 등장한 헤젤 사절단의 겉모습은 회개하는 죄인 그 자체였다.
그들의 자리는 제단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바르시나와 사크틸라가 동맹을 강화하는 현장을 아주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실수는 없어야 한다. 에르난은 필사적으로 졸음을 참고 있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신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 끝났다.’
시종들이 다가와 에르난을 일으켜 세우고 옷을 정리해 주었다.
“국왕 폐하께서 황금 양모 기사단의 발족을 선언하겠습니다.”
선언문은 길기도 길었다. 더군다나 바르시나어와 사크틸라어로 각각 한 번씩, 같은 내용을 두 번이나 읽어야 한다.
“……두 나라의 영원한 동맹과 금빛 미래를 기원하며, 황금 양모 기사단의 창단을 선언합니다.”
선언을 마치자 추기경이 에르난에게 다가왔다. 에르난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사단은 형식상 이 대성당에 소속된 종교 기사단이다. 따라서 성직자가 단장인 에르난에게 상징물을 수여한다.
도금한 사슬을 엮어 만든 목걸이에는 기사단의 이름에 걸맞게 털이 황금색인 양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특별히 에르난의 것은 펜던트 위에 루비도 박았다.
완성된 목걸이를 먼저 본 여왕은 종교 기사단답게 최소한의 청빈을 지키는 척이라도 해 달라고 항의했다. 하지만 그녀도 금방 이 상징을 받아들였다.
이런저런 명분을 붙였지만, 결국 이 집단은 왕이 기용할 사람을 모은 것이다. 왕을 위해서 기사단은 더 빛나야 한다.
고위 성직자가 왕의 목에 직접 걸어 주는 이교도 신화의 상징이라니, 엉망진창인 조합이긴 했다. 바르시나인은 신경 쓰지 않았고, 사크틸라인은 무시했으며, 헤젤인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이제 회중이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단장인 국왕이 기사를 임명할 차례다.
새 기사는 먼저 신과 왕과 기사단장에게 바치는 충성 서약을 왼다. 물론 왕과 기사단장은 동일인물이다.
서약을 마치면 왕이 예식용 검을 들어 기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그리고 황금 양모가 달린 목걸이를 직접 수여한다. 마지막으로 사제의 축복을 받으면 기사 임명이 끝난다.
지난 한 달 동안, 국왕 부부는 왕의 기사가 되고 싶은 귀족들의 아우성을 즐겁게 구경했다. 왕에게 반항적이기로 유명한 바르시나인도 실은 왕에게 아부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귀족들의 기대가 큰 만큼, 에르난은 신중하게 기사단원을 택했다.
명문가 출신을 뽑는 일부터 만만치 않았다. 명문이 괜히 명문은 아닌지, 대단한 인재가 많았다.
“돈 프란세스크 아레니스 데 리세우.”
가장 먼저 호명되어 왕의 앞에 무릎 꿇은 이는 당연히 왕의 최측근인 프란세스크였다.
에르난은 프란세스크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적인 믿음의 표시였다.
“돈 세르지 피로시.”
충성 서약을 외는 세르지의 목소리는 덜덜 떨렸다. 황금 양모의 목걸이가 걸렸을 때, 그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거창한 예식을 치를 일이 거의 없던, 한미한 가문 출신의 기사들은 세르지보다 더 긴장해 있었다. 묵묵하게 왕을 호위하던 이가 지금은 발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사크틸라 기사들은 비교적 의연했다. 모두 외국으로 파견 나올 수준의 인물인 만큼 이런 일에도 익숙한 듯했다.
사크틸라인 중에는 거리상의 문제로 창단식에 참석하지 못한 이도 있었다. 헤젤과의 회담을 위해 왕이 사크틸라에 들를 때 그들도 기사로 정식 임명될 것이다.
서른 명의 기사 임명을 마치고, 에르난은 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헤젤의 손님께서 특별히 이 자리에 함께해 주었습니다. 봄이 오면, 삼국은 평화의 결실을 맺을 테지요. 그때는 모든 이를 존중하는 진정한 화합의 장을 만듭시다.”
듣기에 그럴듯한 말은 하지만, 브라간사를 향하는 에르난의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영광의 주인인 기사들이여. 경들은 신과 왕에게 충성하고자 기사가 되었소. 모두 알다시피, 여러분의 왕은 둘이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왕의 말을 경청하는 기사들의 얼굴이 일순간 굳었다. 성당 안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른쪽 신자석 가장 앞자리, 그곳에 앉아 있던 여왕이 일어나 제단 앞으로 나왔다. 여왕은 남편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옷을 입었다. 마치 일부러 맞춰 입은 것처럼 보였다.
“나의 여왕. 오늘의 모든 맹세와 영광을 나와 한 몸이자 동등한 당신에게 드립니다. 왕인 당신께서는 모든 기사의 충성을 받아 마땅합니다.”
에르난은 레이테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아내가 손가락에 낀 여왕의 반지에 입을 맞췄다. 레이테는 수줍은 듯 옅게 웃었다.
다시 일어난 에르난은 뒤를 돌아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는 또렷했다.
설마 여왕에게 충성을 서약하라고 이런 일을 꾸몄나?
당황한 이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여왕을 향해 걸어 나왔다. 프란세스크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여왕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에르난에게 바쳤던 충성 서약을 반복했다.
프란세스크의 뒤를 이어 사크틸라인들이 앞으로 나와 서약했다.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일어난 바르시나인들이 그 뒤를 이었다.
모든 바르시나인이 레이테를 미워하지는 않는다. 다만 주도적인 여론이 여왕에게 호의적이지 않기에 표현을 주저할 따름이었다.
여왕을 진정으로 섬기는가? 이것은 에르난이 몰래 탐색하던 중요한 기사 선발 조건이었다.
조건에 적합한 이는 적었다. 하지만 그들이 떳떳하게 여왕을 섬긴다면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여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마침 코른 후작가의 세르지가 여왕의 앞에 무릎 꿇었다. 그는 무척 어색해하면서도 여왕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
에르난은 이 모습을 헤젤인에게도 보여 주고 싶었다. 얼어붙은 브라간사의 표정을 확인한 에르난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 * *
대성당 동편 회랑의 정원은 거위 울음소리로 시끄러웠다. 헤젤 사절단 일행은 거위들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한참 요리조리 피하면서 정원 중앙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바르시나 왕이자 사크틸라 왕인 부부가 있었다. 부부의 앞에 선 사절단은 브라간사를 시작으로 차례차례 무릎을 꿇었다.
“여왕 폐…….”
“오늘은 에우랄리아 성녀의 축일이에요.”
여왕은 브라간사의 말을 잘라 버렸다. 그녀는 사절단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몸을 굽혀 자신에게 다가온 거위를 쓰다듬었다.
“거위 농장에서 살았던 성녀는 바른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끔찍한 고문을 받다가 겨우 열세 살의 나이에 죽었지요.”
헤젤인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을 서로 교환했다. 여왕은 어떤 반응을 바라는 것이지?
“여왕 폐하.”
브라간사가 다시 말했다. 이제 자신들을 그만 무시하라는 듯 매서운 목소리였다.
여왕은 그 목소리를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대신 여왕의 손길을 즐기던 거위가 브라간사를 향해 꽥 소리 지르고 다른 거위들에게 가 버렸다.
“그 옛날에도 거위는 집 지키는 경비 역할을 했다더군요. 그렇지만 가련한 소녀를 지킬 수는 없었나 봐요. 지금 이 정원에도 거위가 무려 열세 마리나 있는데 여러분을 막지 못했잖아요.”
사절단은 왕실의 초대를 받아 이곳에 왔다. 불청객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왕은 손님을 환영하지 않는다.
“여왕 폐하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저희의 무례함을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사과가 지나치게 늦은 것 또한 송구합니다.”
물론 사과가 늦은 이유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말만 반복하며 만남을 계속 거절한 여왕의 탓이다.
“리리우 공주가 생각나네요. 이 정원은 어린 순교자를 기리는 곳이니까, 천진난만한 공주와 잘 어울리겠죠?”
사과에 대한 답변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왕이 공주를 언급하자 헤젤인들은 바짝 긴장했다.
“에르난, 공주가 바르시나에 온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봄에 공주를 만나면 바르시나에 초대하고 싶어요. 괜찮죠?”
“물론입니다.”
“고마워요. 아무래도 바르시나와 관련된 일은 나 혼자 결정하기 어려워서.”
레이테는 남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쪽 하는 소리가 컸다.
“브라간사 공.”
“예, 폐하.”
“회담 때 정식으로 요청하겠지만, 공주에게 미리 말을 전해 주세요. 바르시나에 한번 오라고요.”
“알겠습니다, 폐하.”
여왕은 사과를 받을 마음이 없나? 사절단은 이 문제를 확실히 정리해야만 했다.
브라간사가 다시 말하려는데, 에르난이 먼저 그에게 물었다.
“공작, 엔히크 왕자에게도 우리가 왕자와의 재회를 무척 기다린다는 말을 전해 주게.”
“예.”
“그러면 돌아가는 길 무사하기를 빌겠네. 다른 분들도 지금까지 수고 많으셨소.”
돌아가? 브라간사는 눈을 치켜뜨고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가 붙잡을 새도 없이, 부부는 팔짱을 끼고 유유히 정원 밖으로 나갔다.
거위는 그들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았다.
“폐……!”
“공작.”
브라간사가 부부를 쫓아가려는데, 프란세스크가 헤젤어로 그를 부르며 다가왔다.
“귀환 길의 안전을 각별히 챙기라고 왕께서 지시하셨습니다. 창단식을 하는 동안 짐을 배로 옮겨 두었으니, 여러분께서는 곧바로 항구로 가시면 됩니다. 이것도 받으시지요. 주요 논의사항을 정리한 글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라고의 풍광을 즐기실 수 있도록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3주를 기다린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인가?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쫓아낸다? 브라간사의 낯빛이 차가워졌다.
“두 분 폐하를 다시 뵙고 싶습니다.”
“그건 곤란합니다. 기사단 첫 회합에 가셨거든요. 기사단은 이름이 좀 그렇고 그렇지만 그래도 종교 기사단인지라 꽤 긴 미사를 올릴 겁니다. 거기 끼어들기는 조금…….”
난처하다는 듯 브라간사의 눈길을 슬쩍 피하는 프란세스크의 모습은 대단히 연극적이었다. 브라간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각하……, 여왕 폐하만이라도 안 되겠습니까?”
“아, 물론 여왕께서도 회합에 가셨지요. 아까 충성 서약 받으시는 것 보셨잖습니까. 여왕 폐하는 기사단원이 아니시지만, 기사단의 주인이시지요.”
“…….”
‘왕궁에 억지로 들어가는 ‘진정성’이라도 보였어야 했나?’
사절단 내에서도 그렇게 하느냐 마느냐로 한참 갑론을박을 벌였다. 브라간사는 기다림을 택했다. 코른의 도발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더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부부는 브라간사의 사과는 거부하지만 리리우와 엔히크를 그리워하며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완전히 졌어.’
이대로 돌아가야만 하나? 그때, 프란세스크의 가슴에서 반짝이는 황금 양모 목걸이가 브라간사의 눈에 들어왔다.
“공께서도 기사단원 아니십니까? 회합은 어찌하시고…….”
“아, 저는 향냄새를 맡으면 몸에 두드러기가 나거든요. 그래서 왕께서는 제 불참을 허락하는 대신 여러분의 환송을 명하셨습니다. 직접 배웅하지 못해 죄송하시답니다.”
“죄송…… 할 것까지야.”
향을 맡으면 두드러기가 난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노골적인 핑계였지만 달리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사절단은 프란세스크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항구는 얄미울 만큼 성당과 가까웠다. 그들이 탈 배는 출항 준비도 완벽하게 마친 상태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봄에 만납시다!”
배에 올라탄 사절단을 향해, 프란세스크는 환히 웃으며 팔을 힘차게 흔들었다.
* * *
에르난은 그의 옆에 누운 아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조금 전까지 탐하던 아내의 살과는 다른 부드러운 감촉이 좋았다.
“창단식 때 입어 달라며 당신이 보낸 드레스는 정말 아름다웠지만, 내가 행사의 주인공도 아닌데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그런데 애초에 이럴 생각이었나요?”
레이테는 해가 질 무렵에 열렸던 기사단의 첫 회합 풍경을 떠올렸다.
그녀는 단장인 에르난과 나란히 상석에 앉았다. 레이테는 기사단원이 아니다. 하지만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단의 규율에 어긋남이 없는 참석이었다.
적잖은 바르시나인 기사들은 왕에게 속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내가 왜 굳이 기사단을 만들었겠습니까? 당신을 향한 기사단의 충성 서약. 애초에 그걸 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쓸 사람도 찾고.”
에르난은 아내의 목덜미를 할짝거렸다. 레이테의 몸이 살짝 떨렸다. 머리카락도 좋지만, 자극을 주면 금방 반응이 오는 쪽이 확실히 더 재밌기는 하다.
더 맛보고 싶다. 에르난은 아내의 옷을 조금 끌어내렸다. 그의 손이 슬그머니 가슴으로 향했다.
내내 남편과 살을 섞던 레이테는 방금 막 옷을 도로 입었다. 그런데 또 몸을 탐하면 화내려나? 이런 걱정을 하면서도, 에르난의 손놀림은 멈추지 않았다.
뜻밖에도 레이테는 남편의 손에 가만히 몸을 맡겼다.
“부인, 다시 당신 옷을 벗기고 싶은데요.”
“하세요.”
“벗기고 나면 그냥 못 넘어갈 텐데요.”
“그러세요.”
“아침에 눈 못 뜰지도…….”
“괜찮네요. 아니, 좀 그렇게 해 주면 안 될까요? 당신에게 안겨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뭐? 에르난은 신이 나서 당장 아내의 슈미즈를 끌어내리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뭔가 수상했다.
짧은 침묵 끝에 레이테가 중얼거렸다.
“……무시하는 방법이 최선이었을까요.”
“당신은 여전히 그들에게 화가 났습니까?”
헤젤은 레이테를 무시하려 했다. 그래서 철저한 무시로 갚아 주었다. 이는 레이테가 택한 방법이었다.
먼저 저지른 일이 있다 보니 사절단은 제대로 항의도 못 했다. 최소한의 대화는 나눴지만, 오히려 그것이 사절단에게는 더 큰 굴욕이 되었을 것이다.
“뭐, 어떻게 대응하든 결국은 그들을 무시했겠지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하지만 아내는 사실 다른 방식으로 그들을 상대하고 싶었던 것일까. 훨씬 더 적극적으로.
“정말로 분한데, 그걸 어떻게 터뜨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레이테는 주먹 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들겼다. 쿵쿵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에르난은 자신의 가슴도 두들겨지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