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에 비친 왕관-9화 (9/15)

2부 5장 : 아내의 권리

#058

살두비아 교외의 왕실 수도원은 을씨년스러운 침묵에 가라앉아 있었다.

대축일 미사 때에나 맡던 냄새가 에르난의 코를 자꾸 찔렀다. 귀인의 죽음을 준비하는 듯, 수도승들은 곳곳에서 향을 태웠다.

에르난이 눈살을 찌푸리자 왕의 비서가 우물쭈물 말했다.

“왕께서 향냄새를 찾으셔서…….”

에르난은 실소했다.

대다수 바르시나인과 마찬가지로, 그의 아버지 역시 신앙심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극히 종교적인 냄새를 요구한다니. 사람이 결국 이렇게 변하나?

에르난은 왼손에 힘을 주었다. 아내와 맞잡은 손이었다.

두 사람 다 장갑을 착용했기에 맨손끼리 닿지는 않는다. 그래도 아내의 존재를 의식하면 에르난은 기분이 안정되었다.

부부는 자우메 왕의 건강에 대한 연락을 받은 바로 다음 날, 미노리카 섬을 출발했다.

반도 땅을 다시 밟고 살두비아까지 돌아오는 데에는 열흘가량 걸렸다. 그들은 왕궁에 짐도 풀지 않고 곧바로 자우메를 만나러 왔다.

왕이 머무는 곳은 수도원 경내의 별채였다. 자우메는 커다란 쿠션을 받친 의자에 앉아 독서 중이었다.

“어서 오거라. 여왕도 잘 오셨소.”

자우메의 목소리는 힘없이 쉬었고, 눈은 푹 가라앉아 그 빛이 흐릿했다.

“일어나 맞이하지 못해 미안하오, 여왕. 그래도 오늘은 조금 상태가 좋아서 이렇게 의자에 앉을 수도 있었다오. 내내 누워만 있어서, 그대로 관으로 갈 줄 알았소. 한데 아무래도 가기 전에 두 사람을 만나야겠는지 몸이 일어나지더군.”

자우메는 담요를 덮은 무릎에 책을 내려놓았다. 성서였다.

에르난은 흠칫 놀랐다. 이런 책이 아버지의 무릎 위에 놓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신기한 게냐?”

장난스럽게 놀리는 말이지만 기운이 다 빠진 목소리는 대단히 서글프게 들렸다.

“너도 죽을 때가 닥치면 이렇게 될 거다……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나는 죽을 때가 되니 이렇게 변하더구나.”

시종이 들어와 에르난과 레이테가 앉을 의자를 놓고 나갔다. 부부는 자리에 앉았다.

에르난은 아버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대신, 사선으로 몸을 두고 고개만 슬쩍 돌아보았다.

“현세의 허무함과 고독을 알아 버렸으니, 붙잡을 다른 끈이 필요해지는 거란다.”

“그렇군요……. 이해합니다. 당신께는 붙잡을 사람이 없으니까.”

따뜻한 기색이라고는 전혀 담기지 않은 말이지만, 적대감 또한 없었다. 에르난이 아버지에게 날을 세울 이유는 없었다. 그와 싸우려 해 봤자 부질없다.

“저는 있습니다. 이 사람이지요.”

대신, 에르난은 아내의 팔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레이테는 조금 놀라다가도, 남편을 향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께서는 끝끝내 붙잡을 수 없었던 현세의 끈, 진짜 동반자입니다. 저와 레이테는 서로를 사랑으로 감싸 안아 현세가 끝날 때까지, 또 그 후로도 언제나 함께할 겁니다.”

협박도 반항도 아니었다.

담담하지만 단호하게 자신의 길을 밝힐 생각으로 에르난은 이곳에 왔다. 가망이 없으리라는 보고를 들은 직후의 결심이었다.

한 나라의 주인인 왕에게 가정에서의 실패란 대수롭지 않은 오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명과 합리화의 대상이었던 사람에게 그 흠은 결코 작은 일일 수 없다.

내가 이룰 가정은 당신과 다르다.

에르난은 반드시 이를 떳떳하게 증명해 아버지를 비웃을 생각이었다. 복수라 부를 필요는 없지만, 울분은 해소하고 싶었다.

“좋은 생각이구나. 여왕, 내 아들이 부족한 점은 많으나 그대를 향한 마음만은 진심 같으니 힘들더라도 잘 포용해 주시길 바라오.”

“물론이에요, 폐하.”

자우메는 패배에 떨지 않았다. 그는 흐리지만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에르난은 부왕의 반응이 자신의 기대와 다르다고 하여 화가 나지는 않았다.

‘애초에 기대랄 것이 있나. 결국 당신이 이기적이었다는 사실을 끝끝내 모를 텐데.’

다만 아버지의 웃음에는 아들의 미래가 퍽 괜찮으리라는 확신이 보였다. 자신과는 다른 가정을 꾸리고 다른 왕이 되리라는 확신. 그것만 알아준다면 에르난에게는 충분했다.

왕은 안심하고 눈을 감을 것이다.

* * *

이튿날 새벽, 바르시나의 국왕 자우메 3세는 부인과 아들 부부와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했다.

왕은 꾸준히 병을 앓아 왔고, 죽음은 착실히 준비되었다. 그래서 그가 눈을 감은 날부터 장례식까지, 왕을 잃은 바르시나는 고요하고 덤덤했다.

장례 미사는 살두비아 시내의 대성당에서 열렸다. 지난날 축제가 열렸던, 성녀가 강림한 기둥이 있는 성당과는 다른 곳이다. 예부터 왕실의 공식 행사를 치르는 성당은 따로 있었다.

제단 앞에 놓인 왕의 관을 바라보는 에르난의 무덤덤한 표정에서 슬픔이나 연민을 읽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정말로 아무 마음이 없는 냉혈한처럼 보일 정도도 아니었다.

에르난은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격렬하게 증오하지도 못했다.

‘부모를 잃는 감정이란 무엇일까?’

레이테는 그것을 몰랐다. 그녀는 사실상 부모 없이 세상에 태어난 셈이었으므로.

남편의 분위기는 계모인 블랑슈 왕비와도 비슷했다. 차분하게 장례 절차에 임하는 품위 있는 미망인에게는 딱 왕비가 보여야 할 만큼의 절제된 슬픔만 드러날 따름이었다.

왕비의 슬픔은 무엇을 향한 슬픔일까? 레이테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피가 섞이지 않은 모자의 태도는 닮은 데가 있었다.

“국왕 폐하.”

에르난은 이미 사크틸라의 왕이었기에 왕의 칭호로 불렸다. 그러나 왕비는 그의 아들을 다른 의미로, 바르시나의 새 국왕으로 부르며 무릎을 꿇고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왕의 죽음이란 다음 왕의 등장을 뜻한다. 에르난은 이제 바르시나의 진짜 왕이 된다.

검은 휘장이 드리워진 대성당은 곧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새 왕을 맞이할 것이다.

레이테는 자신이 여왕이 되던 순간을 기억하지 못했다.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던 유아기에,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왕좌에 앉혀졌다.

사크틸라는 이미 내분으로 갈라졌다. 상황 판단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어린 새 여왕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시작이 그랬더니 자라서도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지금은 해방되었다. 심지어 바르시나에 와서는 자신도 여왕다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마저 갖게 되었다.

그것도 남편과 함께.

에르난은 달랐다. 그는 부족한 것 없이 평탄하게 자랐다.

상처가 없지는 않다. 그래도 풍족한 관심과 교육을 받으며 차곡차곡 왕으로의 완성을 준비해 왔다.

굴욕을 감수하며 레이테의 손을 잡았지만, 이제 그마저 서로가 진심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관계가 되었다.

이렇게 되리라고는 레이테도 예상하지 못했다.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에게 사랑받을 줄은 몰랐다.

다만 남편을 향한 사랑과 별개로, 상대적으로 평탄한 그의 완성은 부러웠다.

* * *

“유언장을 개봉하겠습니다.”

장례 절차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왕의 비서와 성직자와 법관이 모인 가운데 유언장이 개봉되었다.

바르시나의 국왕이며 발란시아, 마이오르, 미노리카의 국왕, 아라고의 백작인 돈 자우메는 존엄하신 신과 천상 궁정의 모든 영광스러운 천사와 성인의 이름으로 아래 유언을 남긴다.

나의 아들이자 사크틸라의 국왕이며 바르시나의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인 지로나 대공 에르난 조르디에게 바르시나 왕국의 땅과 바다 전체, 또한 나의 모든 소유지를 상속한다. 에르난은 바르시나 왕국의 정당한 상속자이며 모든 바르시나인은 그를 왕으로 섬겨야 한다.

또한 에르난의 합법적인 배우자이며 사크틸라의 여왕인 도냐 레이테는 그녀의 남편을 따라 바르시나의 여왕이 되어야 한다.

바르시나의 두 왕은 서로 동등한 관계이며 권력 행사에도 차등을 두지 않는다.

왕위 계승과 상속에 대한 부부의 계약은 이미 마련되어 있으니, 필요 시 양국의 의견을 구해 추가·수정할 수 있다.

부부는 서로의 손을 꽉 붙잡았다. 왕이 유언으로 단호하게 남긴 이상, 레이테의 여왕 즉위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노리카에 다녀왔던 일을 통해 레이테와 사크틸라에 대한 신뢰감도 어느 정도 쌓아 두었다.

그러나 진통을 예견하듯 ‘의견을 구한다’는 말이 차가웠다.

나의 아내, 블랑슈 왕비에게는 살두비아 외곽의 별궁과 주변의 영토를 내린다. 또한 평생 연금을 지급하며, 운신의 자유를 허락한다.

바르시나에서의 정착도, 고국으로의 귀환도, 재혼도 모두 왕비가 원하는 대로 가능하다. 그 외의 다른 선택도 모두 허용하며 새 왕은 왕비의 어떤 활동도 막아서는 안 된다.

자우메는 왕비와 사이가 좋고 나쁘기보다는 아예 서로 관심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최대한의 배려를 해 두었다.

왕과 결혼한 탓에 무미건조함으로 스스로를 무장해야 했던 여자에 대한 마지막 연민일지도 모른다.

이어지는 내용은 새 국왕 에르난에게 보내는 조언에 가까웠다.

바르시나는 세 자치영역의 연합체이다.

새 왕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하며, 지역 자치에 대한 존중은 모든 정책에서 우선되어야 한다. 지역의 자유가 보장될 때 왕국은 번영을 누릴 것이다.

동시에 바르시나와 사크틸라가 서로 같은 두 군주를 섬기는 상황에 알맞은 고려도 필요하다.

부부가 사랑으로 맺어진 동반자이듯, 두 나라 또한 호의와 존중으로 협력해야만 한다. 상대방을 존중하며 자주 의견을 교환하되, 각자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두 나라는 본디 한 제국의 몸통이었다. 그러나 서로 각자의 길을 걸은 지 너무 긴 세월이 지났기에 예전과 같은 한 모습이 될 수는 없다.

새 왕은 두 나라의 다양성을 평등하게 존중해야만 한다.

축제를 여는 연설 때, 왕은 여러 차례 왕국의 연합을 강조했다.

마지막에 아들을 섭정으로 발표하면서 난리가 나는 바람에 앞서 했던 말은 모두 잊힌 것만 같지만, 레이테는 그것을 또렷이 기억했다.

하지만 유언의 내용은 그때와 반대였다. 새 왕에게 남기는 현실적인 권고는 바르시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레이테는 남편을 보았다.

에르난에게는 별다른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더없이 깊고 진지했다. 유언을 흘려듣고 있지는 않다.

레이테의 가슴도 긴장으로 떨렸다.

이제 곧, 처음 그와 결혼하고 계약할 때 의도했던 체제가 완성된다. 왕과 왕의 결합이다.

하지만 약속한 관계가 의도대로 진정한 동등함을 이룰 수 있을지, 레이테는 자꾸만 불안했다.

에르난이 사크틸라 왕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힘은 제한적이었다. 왕위는 형식적일 뿐, 그는 사실상 왕자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를 터다. 에르난도 한 나라의 왕으로서의 권위를 갖게 된다.

과연 사랑은 어디까지 힘을 미칠 수 있을까?

남편을 사랑한다 하여 결혼 계약이 무의미해지지는 않는다. 계약은 여전히 중요했다.

‘당신은 믿어.’

레이테는 남편을 붙잡은 손에 힘을 꼭 주며 그에게 몸을 살짝 기댔다.

아내의 접촉에 에르난은 곧바로 반응했다. 그 또한 레이테에게 몸을 기댔다. 손가락으로는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무척 신중한 움직임이었다.

남편의 큰 손은 단단하면서도 따뜻했다. 안온하게 쏙 감기면 기분 좋은 손이다.

이대로 모조리 기대면, 불안이 사라지고 편안해질 수 있을까?

레이테는 화들짝 놀라며 그의 손을 놓고 말았다.

“레이테?”

에르난이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탓에. 미안해요.”

레이테는 다시 남편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당신밖에 믿을 수 없어.’

여왕의 대체제가 완성되면 세상은 레이테에게 무엇을 요구할까? 그녀는 답을 잘 알았다.

여왕은 필요가 없어진다. 남편의 품 안에서 보호받으라고, 온 세상이 외칠 것이다.

‘그러면 내게 남는 힘이 있기나 할까?’?

#059

에르난은 이미 국왕을 대신해 업무를 수행해 왔기에, 인수인계라고 부를 만한 복잡한 과정은 없었다. 다만 대관식을 준비하면서 신경 쓸 일은 적지 않았다.

여왕이 찾는다는 연락을 받은 에르난은 검토하던 대관식 관련 서류를 내려놓고 아내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아내 대신 다른 인물이 에르난을 맞이했다.

“……어?”

“늦으셨군요.”

시스로네스가 그를 향해 몸을 깊게 굽혔다. 깍듯하고 공손하기 그지없는 인사는 에르난에게 무척 낯설었다.

“당신이 왜 여기에…….”

“그야 여왕 폐하께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만.”

자우메 왕의 서거 직후, 시스로네스를 대표로 하여 사크틸라의 사절단이 바르시나에 왔다. 왕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은 새 왕의 대관식까지 지켜본 다음 귀국할 것이다.

아니면 훨씬 오래 머물지도 모른다. 그들의 여왕이 바르시나에 있으므로.

두어 달 만에 만나는 시스로네스는 격무에 지쳤는지 이전보다 더욱 수척해졌다. 보는 사람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하긴, 에르난은 부왕보다 그가 세상을 훨씬 먼저 떠날 줄 알았다.

‘어쨌거나 대주교가 바르시나에 오자마자, 부인께서는 곧바로 남편보다 저자를 먼저 찾는단 말이지?’

에르난은 울컥하는 기분을 억누르고 태연한 척 의자에 앉았다.

“폐하, 여왕께서는 당신을 무척 총애하시더군요.”

“……어?”

시스로네스가 싱긋 웃었다. 사위라도 대하듯 흐뭇한 표정이지만 그 안에 담긴 날카로운 기색을 에르난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에르난을 졸도시킬 것 같은 말이 이어졌다.

“어떻게 꼬드겼습니까?”

“뭐……, 뭐요?”

“부부 사이가 좋더라는 보고야 받았습니다만, 바르시나에 와서 실제로 살펴보고 진심으로 놀랐습니다. 여왕께서 당신을 대하는 태도가 예사롭지 않더군요. 정말로 어떻게 하신 겁니까?”

에르난은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꼬드겼냐니!

만나자마자 일단 몸부터 갖고 보려던 첫 만남 때의 만용이 효과적이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에르난 자신은, 비록 원하는 바를 끝까지 이루지 못했지만 그 일에 상당히 만족했었다.

막 결혼할 때에는 어떻게든 그녀에게 붙어 있고자 기를 썼던 것 같다. 그러나 출정으로 금방 떨어져 지내야만 했다.

탐브레의 죽음으로 부부 사이는 소원해졌다. 그러나 바르시나에 와 서로 손을 잡을 필요성을 느끼면서 서먹함은 점차 풀어졌으며, 미노리카에 가서는…….

‘아니, 내가 왜 저자의 말에 휘둘려서 이런 생각을 해야 하나?’

에르난은 눈을 찌푸렸다.

“왕의 개인사니 당신이 관여할 일은 아닐 텐데.”

“그러십니까? 아무튼 다행입니다. 여왕께서 당신을 아끼시니 저 또한 폐하를 극진히 모실 것입니다.”

“……무슨 조건부 충성 서약처럼 들립니다만.”

“맞습니다.”

거침없이 뻔뻔한 답에, 에르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당신께서 사크틸라의 충성을 받을 수 있느냐는 어디까지나 여왕 폐하께 달려 있습니다. 여왕을 속이고 혼자서 무언가 할 생각일랑 하지 마십시오.

사크틸라의 주인은 도냐 레이테입니다. 돈 에르난, 당신은 어디까지나 결혼을 전제로 한 계약의 힘과 여왕의 너그러운 호의로 사크틸라의 왕관을 쓴 겁니다.

그러니 그분의 총애를 잃지 않도록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시어 당신의 가치를 유지하시지요.”

“뭐, 이런…… 이…….”

에르난은 더듬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물론 에르난도 알았다. 시스로네스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처음부터 그에게 상품 가치 운운하지 않았던가?

“걱정 마시지요, 각하. 에르난은 제게 정말로 총애받거든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어 가느다란 손가락이 에르난의 어깨 위에 살포시 놓였다. 긴 머리카락이 그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에르난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아내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어디부터 들었지?’

에르난은 당황해 얼굴을 붉혔다. 시스로네스에게 완전히 휘둘리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민망했다.

레이테는 남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의 옆에 앉았다.

“내일 낮에 계약서의 보충을 논의하기로 되어 있지만, 먼저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에르난은 옛일을 떠올렸다. 결혼식 다음 날, 부부는 늦은 밤까지 단둘이서 계약서를 다시 꼼꼼히 살폈다.

부부의 일인데 부부끼리 대화하지 않았다는 명분이다. 아내는 자신의 불안감을 해소하려 했다.

“그렇다면 우리끼리 이야기하는 편이 옳겠습니다만, 어째서…….”

에르난은 힐끗 대주교를 바라보았다.

“아, 낮에 대주교께서 상당히 괜찮은 제안을 하셨거든요. 그걸 당신과 함께 의논하고 싶어요.”

“제안?”

시스로네스는 접은 종이를 옷 안에서 꺼내어 부부의 앞에 펼쳐 보였다.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두 분 폐하의 공동 문장을 제작하신다고요. 단순히 부부의 문장을 합하는 정도만으로 끝내지 말고, 상징을 더 추가하면 좋겠습니다.”

문장의 기본 틀인 방패 양옆에 기둥이 하나씩 놓였다. 두 기둥은 끈에 묶여 연결되었다.

“에라클레스의 기둥은 당연히 아시겠지요?”

시스로네스는 에르난을 보며 물었다.

“물론입니다. 이베로 반도 최남단에 그 기둥이 있었다지요.”

에라클레스는 옛 제국 시절 이교 신화 속 영웅이다. 이교신의 아들인 그는 괴력으로 땅을 갈라, 세상의 서쪽 끝에 커다란 기둥을 두 개 세웠다고 한다.

“맞습니다, 폐하. 이 기둥은 세상 끝까지 미치는 두 분 폐하의 힘을 드러낼 것입니다.”

“오호.”

에르난의 입가가 만족스러운 듯 호선을 그렸다. 마음에 드는 발상이다. 단숨에 온 세상이 제 것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기둥이 정말로 서쪽 끝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사크틸라 서쪽에는 헤젤이 있다. 그러나 시스로네스는 헤젤의 존재를 깔끔히 무시했으며, 부부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기둥을 끈으로 연결하여 두 분 폐하의 결합을 강조하였습니다.”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대주교 각하께서 하필 이교 신화를 말씀하시다니 어쩐지 좀…….”

에르난은 시스로네스의 자색 옷과 십자가 목걸이를 흘겨보며 말끝을 흐렸다. 사실상 빈정거림이나 다름없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쓸모만 있다면 어떤 상징이든 이용해야지요. 더군다나 문제의 이교는 제국과 함께 멸망했습니다. 그 덕택에 이교 신화는 이제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로만 취급받지요. 특히 바르시나인이 좋아하잖습니까?”

대주교의 말이 옳다. 에르난은 피식 웃었다.

옛 제국의 문예는 대륙 본토, 그리고 대륙의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바르시나에서 가히 제국의 부활이라 부를 수준으로 유행 중이다.

따라서 옛 신화에 나오는 기둥은 대단히 바르시나 취향에 맞는 상징인 셈이다. 기둥이 있었다던 반도 최남단은 사크틸라의 영토지만.

아마 시스로네스는 그 부분까지 계산하여 기둥을 택했을 터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에르난의 머릿속에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하나 더 추가합시다.”

에르난은 종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펜을 쥔 에르난은 거침없이 손을 움직였다.

그림을 완성한 그는 의기양양하게 아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에르난의 예상과 달리, 레이테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기, 에르난. 이게 뭐죠……?”

에르난은 당황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대주교 또한 비슷한 표정이었다.

“아니, 설마 이걸 모르는 겁니까?”

침묵이 흘렀다. 에르난의 불안한 시선은 레이테와 대주교 사이를 떠돌았다.

‘이런. 에라클레스의 기둥만큼이나 유명한 신화니 사크틸라인이라도 충분히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에르난은 아내의 손을 잡고 유리 공예품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부인, 당신을 무시하려는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이건…….”

“그 뜻이 아니라,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리십시오.”

점점 기어들어 가는 에르난의 말을 시스로네스가 단칼에 끊었다.

에르난의 움직임이 멈췄다.

레이테는 남편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난은 고장 난 시계처럼 얼어붙었다.

“저야말로 당신을 무시하려는 마음은 없어요. 다만 설명을 해 주셔야겠어요. 무슨 그림인지 전혀 모르겠네요…….”

아내의 상냥한 목소리는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조롱 따위는 전혀 담기지 않았다.

에르난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게 무슨 망신인가.

그는 차마 맞은편을 바라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시스로네스가 얼마나 노골적으로 얼굴을 비틀며 그를 비웃을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뻔뻔해지는 수밖에 없다. 에르난은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에르난의 손가락이 아내의 가슴 사이를 콕 눌렀다. 레이테가 놀라 몸을 흠칫거렸다.

“화살 다발입니다.”

“아, 저는 머리빗인 줄 알았어요. 아니면 빗자루라거나…….”

레이테가 미소 지었다. 에르난은 오랜만에 아내의 아름다운 억지웃음을 보았다.

“화가도 아닌데 뭐 어떻습니까. 여왕 폐하, 원래 평범한 사람의 그림 실력은 다 이 수준입니다. 제가 유독 볼만하게 그려낼 뿐이지요. 그러니 돈 에르난께서도 상심하지 마십시오.”

대주교는 끔찍하게 공손한 어조로 빈정거렸다. 위로를 빙자한 자랑도 덧붙였다.

에르난은 생각했다. 수치스러워 죽고 싶다…….

“어떤 화살인가요?”

남편의 손등을 쓰다듬는 레이테의 손길이 애처로웠다.

“그, 그러니까……. 후우……. 옛 이교에서 사랑의 신이라는 쿠피도의 황금 화살입니다.”

“아, 맞으면 사랑에 빠진다는 무기로군요.”

레이테의 목소리가 단숨에 감탄으로 바뀌었다. 에르난은 아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모욕 따위 다 잊어버린 듯, 그는 당당하게 시스로네스를 주시했다.

“끈으로 기둥만 연결하지 말고 이 화살 다발 또한 묶는 겁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우리를 제대로 상징하도록. 어떻습니까?”

레이테를 끌어안은 그대로, 에르난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남편의 입술이 닿은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편이 단단한 결속을 강조하기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시스로네스는 꽤 흡족한 미소를 띠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챙겨 들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내일 뵙지요.”

깊숙이 허리를 굽혀 인사한 대주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확실히 눈치 하나는 좋은 자다. 에르난은 아내를 안아 들고 침실로 향했다.

그를 껴안아 오는 레이테는 화살을 묶은 매듭이라도 된 것 같았다.

* * *

바르시나 전 지역의 대표가 한 장소에 모이는 연합 신분의회가 십수 년 만에 소집되었다.

의회는 살두비아 외곽의 왕립 수도원에서 개최되었다. 자우메 왕이 삶의 마지막을 보냈던 곳이다.

치렁치렁한 예복을 갖춰 입은 대표들과 참관인이 수도원 성당을 빼곡히 채웠다. 워낙 자리가 꽉 찬지라 한겨울이면서도 성당은 텁텁한 열기로 가득했다.

참관인 중에는 사크틸라에서 온 대표단도 있었다. 바르시나의 새 왕은 그들의 왕이다. 또한 그들의 여왕은 이제 바르시나의 여왕이 될 것이다.

오늘 의회는 새 왕의 즉위를 승인하기 위해 열린다. 하지만 실질적인 논의는 왕보다는 여왕에게 집중될 터다.

검은 상복 차림의 에르난과 레이테가 나타났다. 소란하던 성당은 고요해졌다. 사람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부를 맞았다.

중앙 제단 옆에 설치된 붉은 캐노피 아래에 새 국왕 부부의 자리가 있었다. 부부가 착석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자리에 앉았다.

에르난과 가까운 자리에 앉은 노령의 귀족이 다시 일어났다. 신분의회의 의장이었다.

“돈 에르난을 바르시나의 새 왕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모두 동의하십니까?”

조용한 성당에 그의 목소리만 울렸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코른 후작이 일어나 말했다.

“저를 비롯하여 이곳에 모인 성직자와 귀족과 시민 대표 모두 돈 에르난을 우리의 새 왕으로 모시는 데에 찬성할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 당신을 왕으로 맞아들이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질문에 답해 주십시오.”

에르난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 옆의 레이테는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려 표정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폐하, 바르시나와 사크틸라는 각각 독립된 국가입니까?”

“그렇소.”

“그런데 왜 부부라는 이유로 나라의 통치까지 공유해야 합니까?”?

#060

에르난의 얼굴이 굳었다. 코른의 당돌한 말에 당황해서는 아니었다. 웃음을 참기 위해서였다.

‘통치권을 왜 공유해야 하느냐고? 부인께서 내게 그걸 넘길 마음이 없는 걸 어떡하나.’

진심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참아야 했다.

바로 옆의 남편에게만 들릴 정도로, 레이테가 작게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남편과 함께 바르시나의 왕권을 공유하여 동등한 권한을 행사한다.

바르시나는 계약서의 이 문구에 가장 예민했다. 코른의 태도를 보면, 삭제라도 하지 않는 한 의회는 에르난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을 기세다.

물론 양보할 마음은 없다. 에르난은 코른이 아니라 의원 전체를 향해 말했다.

“선왕 폐하께서는 모든 정책에서 지역 자치의 보장을 우선하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저는 당연히 그것을 따를 겁니다.”

그리고 선왕의 유언은 에르난에게 왕위를 상속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저희가 모실 왕은 바르시나의 자유와 법률을 지켜야 하니까요. 그리고 바르시나는 도냐 레이테를 왕의 반려로서 섬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에르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겼다.

‘오늘만 어떻게든 넘기면 일단 안심이겠군.’

코른의 태도는 꽤 살벌하지만, 공동 통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만 반복한다. 레이테 자체를 강경하게 거부하지는 못했다.

사크틸라와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유지해야만 하니까.

미노리카 섬에서의 일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개인적인 호불호와 무관하게, 협력은 명백히 필요하다. 지금 상황에서 바르시나는 사크틸라를 버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크틸라는 공동 통치를 포기할 마음이 절대로 없다.

“폐하, 그리고 바르시나의 대표 여러분. 간단하게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참관인석에 앉은 시스로네스가 일어났다. 그는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는 것처럼 말했으나, 그냥 자기 할 말을 할 뿐이었다.

“모두 아시다시피, 결혼이란 ‘신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는 성자의 말씀을 따르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계약입니다.”

“각하, 지금……! 아니,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하오나 이 자리는 바르시나의 의회입니다. 외국에서 오신 참관인께서는 되도록 발언을 자제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발끈해 무언가를 외치려던 코른이 화를 억누르며 차분한 척 말하고 의자에 앉았다. 시스로네스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후작 각하, 저는 사크틸라인이기에 앞서 신에게 인생을 바친 그분의 종입니다. 세속의 경계와 이권에 좌우되지 않고, 같은 신의 품에 안긴 모든 양 떼에게 평화를 전하는 일꾼이지요.

바르시나와 새 국왕 폐하의 평화와 번성, 그리고 각별히 후작 각하의 평화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시스로네스는 참관인석이 아니라 설교대에 선 것만 같았다. 신과 성서를 들먹이니 더 그랬다.

에르난은 분노에 주먹을 파르르 떠는 코른을 즐겁게 감상했다. 생각지도 않은 볼거리였다.

“바르시나는 자치권을 가진 여러 지역이 한 왕을 섬기는 연합 국가이지 않습니까?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두 나라는 같은 군주를 섬길 뿐 각자의 독립을 유지합니다. 서로의 우열 또한 없습니다. 두 분 폐하의 계약에서 일관되게 강조된 동등함은 자유의 기반이지요.”

각자의 독립이 아니라 사크틸라의 독립이다. 그리고 동등하다고 말하지만, 세부 사항은 결코 동등하지 않다.

그저 남편의 권한을 조금이라도 더 억누르려는 계약일 뿐이었다. 하지만 에르난은 반박하지 않았다.

오늘 의회에서 에르난과 시스로네스는 한편이다. 물론 레이테도 마찬가지다.

성당에 들어오기 전, 부부는 약속했다.

에르난의 국왕 즉위를 확정하기 전까지, 누구도 성당 밖으로 내보내지 말 것.

이는 부부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귀족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이 아니었다. 부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길게 끌지 않고 반드시 끝장을 보려는 의지였다.

“지금 우리는 두 분의 왕을 공동으로 섬기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손으로 직접 새 시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자께서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씀하셨지요.

따라서 양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필요한 내용을 두 분 폐하의 신성한 계약에 ‘더한’ 새 합의문 작성을 제안합니다.”

어쨌거나 결론은 기존 계약 내용을 삭제하지 않겠다는 소리다.

자우메의 유언에서도 계약의 수정과 추가만 언급했지 삭제에 대한 말은 없었다. 이를 이용해 에르난은 삭제 요청을 막을 생각이었지만, 굳이 말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에르난이 가볍게 손을 까딱이자 비서가 그에게 종이를 건넸다. 에르난은 그것을 펼쳐 보였다.

“여기 계신 많은 분들께서 이것을 읽어 보셨겠지요. 나와 내 아내가 서명했고, 리세우 공작과 시스로네스 대주교가 증인으로 입회한 결혼 계약서요. 자, 여기에 무엇을 더해야 하나?”

의장이 일어나 말했다.

“새 합의문은 개인을 넘어 국가 사이의 약속인 셈입니다. 따라서 두 나라의 독립을 유지한 상태에서 동일한 군주를 섬긴다는 문구를 가장 앞에 추가해야 합니다.”

기존 계약서는 레이테가 에르난을 배우자로 맞아들이겠다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별것 아닌 말처럼 보이지만, 동등함을 지향한다는 주제에 사크틸라의 입장만 표현한 구절이다.

“물론입니다. 왕실만 한 가족이 되었을 뿐이지요. 사크틸라와 바르시나는 각자의 길을 갑니다.”

시스로네스가 답하자 긴장으로 굳은 의장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다른 귀족들도 비슷했다.

바르시나가 가장 걱정하는 부분은 사크틸라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흡수당하는 상황이다.

물론 국가 사이에 영원한 약속은 없다. 그래도 일단 문서에 명시해 놓으면 걱정거리를 덜게 된다.

“당연한 원칙이오. 추가하지.”

에르난은 태연하게 답하면서 시스로네스를 힐끗 쳐다보았다.

어차피 사크틸라는 바르시나에 관심이 없으므로, 바르시나의 요구를 거절할 이유가 없다. 대주교의 단호한 긍정에는 다른 속내가 있을 것이다.

‘두 나라를 완전히 갖고 싶은 누군가에게 하는 경고라든가.’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시스로네스는 에르난을 향해 기분 나쁠 만큼 인자하게 웃음 지었다.

괜히 봤군. 에르난은 눈을 조금 찌푸렸다.

“의전상의 규칙도 정확히 정해야 합니다.”

의장이 자리에 앉자, 다시 코른이 일어나 말했다.

“계약서에서는 두 분 폐하께서 동등한 관계라고 분명하게 언급합니다. 그런 탓에 두 분을 모시는 예법에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오?”

“‘군주의 모든 행위는 두 사람의 이름으로 시행한다.’라는 문구가 기존에 있잖습니까? 그런데 저희는 어느 분을 먼저 불러야 합니까? 공문서에 들어갈 두 분 폐하의 서명은 어떤 규칙으로 배치됩니까?”

에르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규칙 같은 것은 없다.

“물론 원칙적으로 두 분 폐하께서는 동등하십니다만, 불가피하게 서열이나 순위를 정해야 할 경우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이때에는 하늘과 땅의 보편적인 법도를 따르는 편이 옳겠지요. 성서에도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고 말하잖습니까? 머리는 몸통 위에 있으니, 돈 에르난을 우선해야 마땅하겠습니다.”

악질적인 표현이다. 바르시나인답지 않은 성서 인용이 누구를 겨냥하는지는 뻔했다.

“결코 두 분 폐하를 차별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공동 군주이신 두 분을 극진히 모시기 위해서니 여왕 폐하의 양해를 구합니다.”

차라리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이야기였다. 아니, 애초에 일부러 한 말이다.

명백한 조롱이지만 달리 거부할 방법이 없다. 규칙은 필요하고, 누군가는 앞에 설 수밖에 없으니.

레이테가 남편과 맞잡은 손을 꽉 쥐었다.

여왕은 새 왕의 즉위 전까지 계속 상복을 입겠노라고 말했다. 에르난은 아내의 행동이 바르시나인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겸손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도 아내에게 맞춰 검은 옷을 입었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이런 상황에서 동요를 감추려던 걸까?’

“저도 제안하지요. 아, 자꾸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바르시나만의 합의는 아니잖습니까?”

침묵하는 여왕을 대신하여 시스로네스가 말했다.

“두 분 폐하의 동등한 관계와 권력의 공유는 이미 계약한 사항입니다. 그러니 두 분의 위대한 업적 또한 공유되어야겠지요? 이 부분 또한 확실히 표기하고, 연대기 작가에게도 특별히 유의하도록 지시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사실상 남편의 공을 아내가 가로채겠다는 뜻 아니냐며 쑥덕대는 소리가 에르난의 귀에도 닿았다.

‘글쎄, 오히려 반대 아닐까?’

신경 써서 기록하지 않으면 여왕의 힘으로 일군 일도 남편의 것이 될지 모른다.

부부 개개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모든 공적과 칭송은 남편에게만 향할 것이다. 빼앗기는 쪽은 남편이 아니라 아내다.

술렁거림은 길었다. 하지만 일어나 직접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사크틸라 측을 더 불편하게 만들면 곤란하다는 계산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를 더 요청하겠습니다.”

떠드는 소리가 잦아들자 코른이 말했다.

“세금 징수와 사용은 반드시 해당 지역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문장을 더해야 합니다.”

“……당연한 내용을 굳이 적어야 하나?”

“물론입니다. 중요한 사항은 정확히 표기해야지요. 두 분 폐하의 동등한 업적처럼 말입니다.”

에르난은 조그맣게 한숨 쉬었다. 질릴 만큼 바르시나다웠다.

* * *

“상복을 입을 때는 입더라도, 베일은 쓰지 말아야겠어요.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군요.”

처소로 돌아온 레이테는 시녀의 손을 빌리기도 전에 자신의 손으로 직접 베일을 벗어 던졌다.

“저와 눈을 직접 마주하지 않으니 아예 없는 사람인 줄 아나 보죠? 그러면서도 사크틸라는 못 놓겠으니 눈치 보는 꼴도 우습고.

아무튼 어떤 요구를 할까 대충은 짐작했지만 설마하니 이름 표기순서까지 걸고넘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답니다.”

대단히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에르난은 탁자에 준비된 포도주를 마시며 목을 축였다. 그는 아내에게도 술을 따라 건넸다.

단숨에 술을 마신 레이테는 곧바로 잔을 남편에게 내밀었다.

에르난이 다시 술을 따르자 마찬가지로 그녀는 순식간에 잔을 비웠다. 그리고 또 잔을 내밀었다.

같은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에르난이 말했다.

“부인, 너무 많이 마시는 것 아닙니까?”

“아무렴 어때요.”

남편이 술을 주지 않자, 레이테는 병을 들고 스스로 따라 마시려 했다. 에르난이 그녀의 팔을 붙잡고 손에서 술병을 떼어내 탁자 멀리 놓았다.

“어, 어어…….”

레이테는 휘청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고 남편의 어깨를 양팔로 붙잡았다.

그녀는 쓰러지듯 남편에게 안겼다. 에르난이 붙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나는 당신이 좋아요.”

남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레이테가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이테.”

에르난은 아내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당신이 내 남편이라 기쁘고, 내가 당신의 아내라서 기뻐요. 정말이에요.”

레이테는 헤실헤실 웃으며 에르난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을 남편의 손등에 비비적거렸다.

에르난의 악문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내의 몸이 닿기만 해도 쉽게 내뱉던 흥분과는 달랐다. 분노 같기도 했고, 죄책감이나 슬픔 같기도 했다.

레이테는 다시 남편에게 몸을 기대 왔다. 그리고 잠시 후, 쌔근쌔근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에르난이 내려다보니, 아내의 눈은 이미 감겨 있었다.

에르난은 아내를 들어 침대로 옮겨 눕혔다. 그는 레이테의 옆에서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시스로네스는 레이테의 총애라는 기반이 있을 때만 그가 사크틸라 왕일 수 있다며 분수를 지키라고 경고했다.

원래 에르난은 그 총애를 배신할 각오로 결혼을 결정했다. 물론 지금은 그럴 마음이 없으나, 시작은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레이테는 어떨까?’

그녀가 남편을 진정으로 짓눌러 없앨 수 있나? 아니, 남편 없이 살아남을 수 있나?

그렇지 않았다. 물론 목숨이야 어떻게든 유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왕으로서는 다시 불완전해지고 만다. 새 남편을 맞이하지 않는 한.

그녀야말로, 남편의 총애에 기대야만 살아남을 수 있지 않나??

#061

새 왕의 대관식 날, 살두비아 시내는 아침부터 열기에 차올랐다.

대관식 참석을 위해 상경한 각 지방의 대표단이 사람들의 흥분을 고조시켰다. 그들은 지역색이 또렷한 모습으로 치장하여 자신들이 오늘의 주인인 양 거리를 행진했다.

시내의 왕궁에서도 창밖으로 그 모습이 잘 보였다. 아니, 애초에 지역의 영향력을 왕궁에 과시하려고 일부러 저러는 것이 뻔했다.

그래도 분위기를 즐겁게 띄워 주니 나쁘지는 않다. 비슷한 듯 서로 다른 예복과 음악 연주가 신기했다.

한숨 쉬는 남편과 달리, 레이테는 꽤 흥미로운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따라오십시오.”

경박함 따위는 조금도 없이 말끔하게 차려입고 바짝 긴장한 세르지가 말했다. 에르난의 시종인 그는 대관식을 거행하는 대성당까지 국왕 부부를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부부는 스스로 걷기가 힘들 만큼 무거운 옷을 입었다.

레이테가 입은 드레스에는 개수를 다 세기조차 어려울 만큼 많은 보석이 박혔다. 허리를 묵직하게 감싼 벨트는 아예 금과 보석만을 엮어서 만든 물건이다. 결혼 선물로 받았던 호화로운 목걸이도 빠지지 않았다.

흰 털을 덧댄 예식용 망토는 길고 무거웠다. 시녀 여럿이 망토를 들어 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머리에 쓴 흰 베일 또한 바닥에 끌릴 만큼 길었다.

거추장스러운 옷차림은 에르난도 만만치 않았다.

섬세한 황금빛 자수가 붉은 옷을 거의 덮었다. 벨트 또한 레이테 못지않게 화려했고, 큼직한 보석이 줄줄이 박힌 금 사슬 목걸이를 두 겹으로 걸어 사치의 방점을 찍었다.

오늘의 진짜 주인공답게, 위압감 넘치는 붉은 망토는 아내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무거웠다. 당연히 시종들이 뒤에서 망토를 잡아 주어야 했다.

왕궁 밖으로 나온 부부는 화려하게 꾸민 말에 올랐다.

기수가 행렬의 선두에서 거대한 깃발을 흔들었다. 깃발에는 부부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문장이 수놓아져 있었다.

“펄럭이는 모습을 보니 훨씬 마음에 드네요.”

레이테가 말하자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수많은 상징이 들어간 문장은 거만함이 하늘을 찌를 만큼 화려했다.

왕관을 쓴 방패 형태의 바탕을 4등분 하여 사크틸라와 바르시나 왕실의 문장을 넣었다.

검은 독수리가 그 뒤에서 날개를 크게 펼치고 다리로 방패를 붙잡았다. 머리에 후광이 그려진 독수리는 신의 사도를 상징한다.

방패의 양옆에는 시스로네스가 제안했던 에라클레스의 기둥이 있다. 두 기둥에서 끈이 뻗어 나와 방패 아래 중앙에 그려진 쿠피도의 화살을 단단히 묶었다.

특히 끈은 화살의 양옆에서 글자를 그리며 꼬였다. 왼편에는 H, 오른편에는 L. 에르난과 레이테다.

또한 좌우 기둥의 중앙에는 띠를 둘러 두 왕의 표어를 적었다.

TANTO MONTA

동등하다는 뜻의 옛 제국어 문구다. 문장 제작이 다 끝나갈 때쯤 에르난의 제안으로 추가했다.

“국왕 폐하 만세!”

“여왕 폐하 만세!”

부부는 팔을 흔들며 시민들의 환호에 답하기 바빴다. 사크틸라 여왕을 향한 거부감도 오늘만은 분위기에 압도되어 사라진 모양이다.

* * *

“……모든 이의 주인이신 하늘의 왕이시여, 친히 당신의 아들 에르난을 바르시나 땅과 바다의 주인으로 세우셨으니, 그를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축복하소서.”

긴 축문의 낭독이 끝났다. 신분의회의 의장이 왕관을 올린 받침대를 들고 제단 앞으로 나왔다. 대관식을 집전하는 추기경은 왕관을 받아 들어 에르난의 머리에 씌웠다.

추기경보다 훨씬 키가 큰 에르난은 살짝 몸을 굽혔다. 그러나 성직자 앞에서 자신을 낮춘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왕관과 같은 방식으로 왕홀까지 받아 든 새 왕이 돌아서서 청중을 바라보았다. 흥분 어린 술렁임이 성당 안을 가득 채웠다.

남편을 바라보는 레이테는 자신이 왕으로 즉위하던 순간을 떠올려보았다. 물론 불가능했다. 너무 어린 시절이었으니까.

대신, 처음 왕관을 쓰던 날의 치욕이 다시 떠올랐다. 부끄러워 떨던 소녀와 음험한 숙부. 레이테는 이를 악물었다.

남편은 달랐다. 그에게 구차함 따위는 없었다.

온갖 화려한 것을 모조리 착용한 상태에서도, 에르난의 존재는 결코 그에 파묻히지 않았다. 관도 홀도 거창한 옷과 사치스러운 보석도 모두 새 왕을 위해 빛났다.

“국왕 폐하 만세!”

“만세!”

“바르시나 만세!”

“만세!”

의장의 선창을 시작으로 환호성이 성당 안에 가득 찼다.

“부인.”

익숙한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엄숙하게 레이테의 귀에 꽂혔다.

제단 옆에 앉아 있던 레이테가 일어나 왕에게 다가갔다. 왕홀을 의전관에게 넘긴 에르난은 아내에게 씌울 왕관을 받아 손에 들었다.

“도냐 레이테. 바르시나 국왕의 배우자인 당신을 바르시나의 여왕으로 받아들입니다.”

에르난은 조심스레 레이테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주었다.

묵직함이 레이테를 짓눌렀다. 보석이 많으니 사크틸라의 것보다 무거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치욕과는 달리, 왕관은 머리에서 미끄러지지 않았다.

왕이 여왕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부는 나란히 추기경의 축복을 받고 인파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귀족들은 아슬아슬한 수준으로 두 왕보다 덜 화려하게 치장했다. 레이테는 피식 웃었다.

‘역시 바르시나는 바르시나네.’

전통에 따라 성당에서 의식을 치르고 성직자가 왕에게 관을 씌운다. 하지만 경건함은 딱 거기까지다. 마침 연주되는 오르간의 소리는 과할 만큼 웅장하고 기교적이었다.

* * *

길고 긴 야외 행진까지 끝내고 왕궁으로 돌아온 레이테는 드디어 망토를 벗을 수 있었다. 날아갈 듯 몸이 홀가분해졌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대관식 예복이 거추장스러운 건 당연하다 생각했던지라 무겁다는 말을 듣고도 별생각 없었는데, 이 지경일 줄은 몰랐습니다.”

여전히 화려하지만 대관식보다는 한결 가벼운 차림으로 갈아입은 에르난이 투덜거렸다. 그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갑옷도 입잖아요? 갑옷이 더 무겁지 않나요?”

“적어도 움직임은 대관식 의상보다 훨씬 편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부부는 나란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중앙에 긴 탁자가 놓였고, 양옆으로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귀족들이 빼곡하게 섰다. 부부는 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시스로네스가 깊게 허리를 굽혀 두 왕에게 인사한 후 커다란 종이를 펼쳤다.

“양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합의문을 읽겠습니다.”

합의문은 바르시나어로 낭독되었다. 끝까지 읽고 나면 사크틸라어로도 반복할 것이다. 이렇게 ‘순서’를 따져야 할 때에는 남편을 우선한다는 조항이 나올 때, 레이테는 쓴웃음을 지었다.

낭독을 마친 대주교가 탁자에 합의문을 내려놓았다.

“이제 두 왕께서 서명해 주십시오.”

거침없이 서명한 레이테는 옆을 보았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태껏 에르난이라는 이름으로 서명했던 남편이다. 그는 무심코 예전처럼 이름을 적으려다가 h 한 자를 쓰고서 실수를 깨달은 듯했다.

“아, 버릇이…….”

종일 위엄 넘치던 새 왕에게도 어수룩한 데가 있다. 에르난은 멋쩍게 웃더니 ‘국왕’이라고 빠르게 적었다.

‘나야 언제나 여왕이라고 써 왔으니. 이런 실수는 생각도 못 했네.’

증인들의 서명이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부부는 인장을 찍었다. 귀족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연회 같은 일정이 남았지만, 일단 예식이라 부를 만한 것은 다 끝났다.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의 공유였다.

* * *

대관식이 끝난 뒤에도 두 왕의 연말은 분주했다. 살두비아를 떠나기 전 정리할 일이 많았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날, 부부는 난방을 잔뜩 한 방 안에서 서로의 손을 가볍게 잡고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서 화가 피에르가 거침없이 손을 놀리며 그들을 스케치했다.

“여왕 폐하, 웃음을 풀어 주십시오.”

“웃음을 풀라니?”

“제왕의 초상화는 차갑고 엄숙하게 왕의 권위를 보여야 합니다. 그러니 감정을 지워 주십시오.”

“……아.”

에르난은 눈만 슬쩍 옆으로 돌려 아내를 보았다.

레이테는 무표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같았다. 웃음을 거두라 했더니만 입꼬리만 내린 모습이 어색했다.

웃지 않는 레이테는 대단히 차가운 인상의 여자다. 에르난은 아내의 그런 모습을 몇 차례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에 따른 우발적인 모습이었다. 레이테는 늘 의식적으로 상냥하게 웃었다.

“으음, 당신 숙부가 눈앞에 있다고 상상하면 어떻겠습니까?”

“무리예요. 그 사람 앞에서야말로 최고로 멍청하게 웃어야 했으니까.”

하긴. 그 웃음은 적을 안심시키기 위한 아내의 생존 수단이었다.

에르난은 고민했다. 어떡하면 그녀의 표정이 바뀔까?

“그러면, 당신 남편에게 숨겨 둔 애인과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가정…….”

“당신을 포함해 전부 죽여 버릴 거예요.”

“……없습니다.”

레이테는 단숨에 웃음을 싹 거두고 매서운 눈초리로 남편을 노려보았다. 화가가 요구하는 차가운 표정과는 많이 다른 유형 같지만, 아무튼 웃음이 사라지기는 했다.

“거짓말로도 그런 이야기 하지 말아요.”

“물론이에요. 미안합니다.”

왕은 아내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지금 초상화 모델이 문제가 아니다. 에르난은 자세를 무너뜨리며 레이테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딱딱하게 굳었던 레이테의 얼굴에 순식간에 혈기가 돌았다.

“이 정도로 무마하려 들다니, 염치도 없군요.”

말투는 날카롭지만 얼굴은 이미 웃고 있다.

에르난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랑스러운 여자를 옆에 두고 어떻게 무표정을 유지할 수 있나.

“두 분 폐하, 표정을 근엄하게 하시라 말씀드렸습니다만.”

화가의 지적에 부부는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아차,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에르난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우고 조금 노려보듯 정면을 바라보았다.

전장 한가운데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간단한 일이었다. 화가가 원하는 왕의 모습도 딱 그런 종류일 것이다.

레이테도 어떻게든 얼굴을 굳히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 * *

며칠 뒤, 화가는 밑 색만 간단하게 칠한 그림을 챙겨 부부를 찾아왔다.

묘사가 꽤 진행된 두 왕의 얼굴은 위엄 넘치는 권력자 그 자체였다. 그런데 스케치할 때, 레이테는 화가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가 만족할 만한 표정을 짓지 못했다.

‘그냥 상상해서 그렸나?’

고개를 갸웃하며 그림을 보던 레이테는 불현듯 깨달았다.

그림 속 자신은 남편과 완벽하게 똑같은 표정이다. 즉, 근엄함은 레이테의 것이 아니었다.

여왕의 반응을 포착한 화가가 곧바로 설명했다.

“두 분 폐하께서는 완벽하게 동등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진정으로 열린 공동왕의 시대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두 분 폐하께서는 남자와 여자로 성별만 다를 뿐, 나머지는 동일하시지요.”

화가의 말대로였다. 동일한 것은 표정뿐만이 아니었다. 손을 마주 잡은 동작도 완벽한 대칭 구조였다.

심지어 키도 똑같았다. 실제로는 에르난이 레이테보다 훨씬 키가 크다. 인물의 키 차이는 우열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옷만 다르게 입은 그림인 셈이다.

‘새 왕의 기념주화 도안도 마찬가지였지.’

제작을 지휘하는 코른 후작은 조폐소 관리들이 질려 버릴 만큼 까다롭게 완벽한 대칭형을 요구했다는 후문이다.

“마음에 드는군요.”

여왕이 말했다. 피에르는 단순히 붓질만 하는 기술자가 아니었다. 그림에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안목의 소유자다.

그러나 에르난은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만한 실력이면 다른 것을 그릴 수도 있었을 텐데…….”

왕의 불만에도 화가는 기가 죽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씩 웃음 짓더니 다른 스케치를 꺼내 부부에게 보였다.

“이것은 두 분 폐하에 대한 저의 순수한 호의로 가볍게 그린 덤입니다.”

상대방이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부부의 모습이었다.

“덤이라니, 그렇게 대충 넘길 수는 없지. 이것도 채색해서 완성해 주시오. 대금은 두 배로 지급하겠소. 내 집무실에 걸어 둬야겠어.”

비로소 에르난의 얼굴이 밝아졌다.?

#062

화가와의 면담을 마친 레이테는 사크틸라 사절단을 만나러 갔다. 시스로네스를 비롯한 사크틸라 국정의 핵심 인물 상당수가 바르시나에 왔다. 여왕은 이참에 직접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지시를 내릴 생각이었다.

에르난은 다른 일정이 있었다. 영 어색해서 차일피일 미뤘으나 더는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살두비아 외곽에 머무는 선왕의 왕비를 만나러 갔다.

“후우…….”

뻣뻣한 자세로 앉은 에르난은 응접실의 벽을 가득 채운 온갖 그림에 시선을 두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대륙 방식으로 향신료를 넣고 따끈하게 데운 포도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어색함에 어쩔 줄을 모르는 왕을, 블랑슈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어색했다.

대관식이 끝나자, 블랑슈는 조용히 짐을 꾸려 남편이 그녀에게 남긴 별궁으로 왔다.

살두비아에서 먼 것은 아니지만, 새 왕이 이곳까지 찾아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이런 일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블랑슈는 왕을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그녀는 새 왕에게 별달리 할 말도 없었다.

“어머니.”

시간이 꽤 흐르고서야 왕이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무심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수년 동안 익숙하게 보았던 에르난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독 낯설었다. 몸을 흠칫거리는 그도 마찬가지일까.

법적으로 모자지간이라지만 그들의 나이 차이는 고작 열 살 남짓이었다. 왕족의 결혼이야 원래 이런 식이거늘, 블랑슈는 자신이 의붓아들을 낯설어하는 이유를 뒤늦게 깨달았다.

어머니라 부르고, 그 말을 들을 일 자체가 거의 없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자우메의 유언 이야기다.

새 아내가 시끄러운 일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지내자 자우메는 흡족해하며 그녀에게 관대해졌다. 왕은 수시로 애인을 갈아치우는 자유마저도 아내에게 허락했다. 블랑슈는 그런 자유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렇기에 블랑슈는 자신에게 남겨진 남편의 대단히 너그러운 유언에 놀라지 않았다.

자우메는 자신이 아내를 어떻게 대했는지 너무나 잘 알았으니까. 결국은 그가 살았을 때 베풀던 처우의 연장선이다.

남편은 새 아내를 모독하지 않는 것으로 남편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자였다.

“제 거취에 대해 물으신다면, 이곳은 별장용 궁인지라 확실히 오래 머물 곳은 못 되더군요. 고향으로 돌아갈까 싶은 생각은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험한 산맥 너머의 고향이 그립기는 했다. 왕제(王弟)인 아버지에게 연락했더니, 언제든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답변을 받았다.

환영의 뜻이건만, 그녀는 오히려 귀환이 내키지 않아졌다.

“돌아가시면 아마 재혼이 기다릴 겁니다.”

“삼십 대의 신부를 누가 찾겠어요.”

“하지만 당신의 가문을 찾을 이는 많지 않겠습니까.”

“…….”

블랑슈는 에르난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바로 그 이유로 고향으로 귀환하지 않았으니까.

아버지는 이미 딸의 두 번째 남편감을 물색 중일지도 모르겠다.

“가시겠다면 막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이 그러했고, 저 또한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제게 무언가 제안하실 일이 있을 듯하군요. 괜찮으니 그냥 말씀하시지요.”

“……제가 부재중일 때, 어머니께서 섭정을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시종일관 무심함을 유지하던 블랑슈의 표정이 놀람에 흐트러졌다.

재혼은 하지 말고 차라리 수도원으로 가는 편이 어떻겠냐는 권유나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들에게서 나온 말은 전혀 의외의 이야기였다.

“저는 정치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만.”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바르시나 귀족의 신뢰도가 높습니다. 섭정이 당신이라면, 그들은 당신을 도와 정성껏 국정을 운영할 겁니다.”

“아……, 좋아요. 그렇게 하지요.”

블랑슈는 웃었다. 왕이 놀라 얼굴을 굳혔다.

그 반응이 퍽 유쾌했다. 블랑슈는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으니까.

에르난의 말대로 바르시나 궁정에서 블랑슈는 꽤 신뢰받는 인물이었다. 이는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덕택이었다.

새 왕비의 일은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왕위 계승자가 건강히 자라고 있으니 후계자 생산에 열을 올릴 필요마저 없었다.

그러면서도 무시 받지 않는 이유는 순전히 그녀의 예술적 안목에 감화된 이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 블랑슈 스스로 택한 길이었다.

하지만 지금 블랑슈의 머리에는 어느 여자가 떠올라 있었다. 왕의 여자지만 그녀와는 다른 삶을 살 사람.

“여왕은 저와 완전히 다를 테지요.”

갑자기 레이테 이야기가 나오자 왕은 잠시 놀라는 눈치였으나, 곧 웃음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얼마나 집요하게 권력을 탐하는지, 못 말립니다. 양보도 없고, 지지도 않고…….”

저 간단한 반응만으로도 블랑슈는 그가 아내에게 푹 빠져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사랑 같은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난처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이면서도 사랑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여왕이 에르난을 택해 결혼한 이유는 뻔했다. 동등함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던, 이제는 양국의 공동 합의문이 된 부부의 결혼 계약서를 보면 그 의도가 더욱 또렷했다.

이를 갈면서 남편에게 기대야만 하는 현실을 받아들였을 여왕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눈앞에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여왕은 블랑슈의 예상과 달랐다.

‘에르난과 저를 분리하라니. 그렇게 하면 저는 대체 어떻게 살 수 있죠?’

블랑슈에게 그것은 정략 대신 감정이 담긴 반발 같아 보였다. 여왕은 블랑슈보다 더 오랜 세월 동안 감정을 죽이고 살았을 텐데도 그랬다.

반신반의하던 생각은 결국 옳았다. 아들 부부에게는 그녀가 결코 가져 보지 못한 유대감이 있다.

그런다 한들, 사랑만으로 모든 일을 해낼 수는 없다.

“당신들은 왕이에요. 세상을 바꿀 힘을 가졌지요. 두 분 모두 그럴 의욕이 가득한 것 같고. 하지만 전부를 바꿀 수는 없을 겁니다. 신이라도 그렇게는 못 하시겠지요.

그래도 내 아들딸이 세상에 어떤 변화를 몰고 올지, 솔직히 기대되는군요.”

에르난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블랑슈가 사석에서 그를 아들이라 불러본 일이 여태 있기나 했나?

하지만 비로소 블랑슈는 눈앞의 에르난이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에게 자신의 바람을 투영하는 부모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올바른 태도인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하던 아들은 아무래도 성공할 듯싶다.

무엇보다 여왕의 의욕이 부럽다. 그녀의 내일이 궁금하다.

“폐하께서 반도를 호령하실 동안, 이곳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따라서 바르시나의 주인, 새 왕인 아들에게 그녀는 충성을 바쳐야 했다.

블랑슈는 무릎을 꿇었다. 망설이며 손을 내미는 왕의 모습은 그답지 않게 어설펐다. 블랑슈는 바르시나 왕의 반지에 입을 맞췄다.

* * *

성탄 대축일이 지나고, 국왕 부부와 그를 따르는 궁정인들은 살두비아를 떠났다. 왕실은 올겨울, 내륙의 추위를 피해 따뜻한 항구 도시인 아라고에서 겨울을 보내기로 했다.

아라고에 도착한 지 이틀째. 여왕의 처소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카테리나는 아라고 시내의 저택에서 머무는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바르시나의 대다수 귀족들은 두 왕과 마찬가지로 따뜻한 아라고에서 보내는 겨울을 선호했다. 카테리나의 가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테리나는 아무렇게나 다리를 뻗으며 긴 의자에 반쯤 드러누워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 선대 리세우 공작부인과 회포를 나눴다.

궁정에서와 달리 예의 차릴 필요가 없으니 편했다. 어머니는 여왕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고 카테리나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풀었다.

세르지에게 붙들릴 뻔한 자신을 여왕이 구해 준 이야기를 하던 차에, 뜻밖의 인물이 나타났다.

“어머나, 아들! 네가 집에도 오다니 별일이구나.”

공작부인이 과장된 어조로 놀리듯 말했다. 그만큼 프란세스크가 가족을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아들을 껴안았다.

“카테리나가 저택에 쉬러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식사나 할까 싶어서요.”

“그래, 정말 오랜만이네! 왕께서 겨우내 이곳에 머무르시니 앞으로 자주 볼 수 있겠지?”

“뭐, 그건 또 모를 일이지만…….”

머리를 긁적이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프란세스크가 집에 다시 들르기는 힘들 것 같았다.

세 가족이 오랜만에 모여 신이 난 공작부인은 식료품 창고를 몽땅 털 기세로 호화로운 식사 준비를 지시했다. 곧, 겨울의 식탁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화려한 식사가 차려졌다.

푸짐한 식사를 마치고 후식을 즐길 때였다.

카테리나는 조그만 그릇의 한가운데를 수저로 툭툭 두들겼다. 얇은 설탕 막이 툭 깨졌다. 그것을 가장자리로 살살 밀어낸 카테리나는 안에 담긴 커스터드 크림만 쏙 퍼내어 입에 넣었다.

“너는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렇게 먹어?”

“오빠, 혹시 그거 알아? 여왕 폐하도 이렇게 드셔. 설탕 막이 입천장에 끈적끈적 달라붙는 것이 싫다 하셨어. 폐하께서는 단것을 좋아하시지만 무조건은 아니거든. 크림의 부드러운 식감만 즐기기에도 충분하댔어.”

“…….”

여왕을 들먹이니 프란세스크는 할 말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흥, 남이 무엇을 어떻게 먹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카테리나는 크림만 다 먹고 수저를 놓았다.

“으음, 어머니도 세스크도 모였으니까 드릴 말이 있어요.”

동생과는 달리 작은 그릇을 싹싹 긁으며 마지막 설탕 결정까지 즐기던 프란세스크가 단숨에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눈을 찌푸리며 동생을 바라보았다.

“무조건 안 돼.”

“일단 사람 말 좀 듣지 그래?”

“뻔하지. 또 수도원이나 들어가겠다는 소리 아니야? 여왕을 수행하면 좀 변할 줄 알았더니.”

짜증 섞인 프란세스크의 반응에 카테리나는 괜히 약이 올랐다. 그녀는 수상한 웃음을 히죽 지었다.

“여왕께서 좋은 곳을 소개해 줄 수 있다고는 하셨어. 사크틸라에는 정말 다양한 수도원이 있더라?”

“……잘못 보냈군.”

“그런데, 그 이야기 아니거든?”

뿌루퉁한 목소리에 프란세스크의 눈빛이 단번에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그러면 혹시 남자야?”

“어머나.”

잠자코 남매를 지켜보던 공작부인의 감탄사가 이어졌다.

“아니거든요. 두 사람 다 일단 좀 들으면 안 돼?”

남자라니, 고약한 소리를.

하필 카테리나의 머릿속에는 경박한 옷을 나풀거리는 코른의 조카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끔찍하다.

“그래. 미안하구나, 딸. 이야기해 보렴.”

“나는 여왕 폐하가 좋아. 아름답고 멋진 분이셔. 수도원 이야기를 장난처럼 꺼내기는 했지만, 정말 그런 쪽으로도 나와 잘 맞는걸. 바르시나 사람 중에 신앙을 주제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아무튼 세스크, 분명히 내게 일거리를 던져 줘서 다른 데에 못 가게 하려는 속셈이었겠지? 그래도 폐하를 소개해 줘서 정말 고마워.”

프란세스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오빠가 왕을 돕는 것처럼, 나도 여왕을 돕고 싶어.”

카테리나의 두 눈이 단호하게 빛났다. 남매는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러니까 나 좀 도와줘.”

동생의 진지한 목소리에 프란세스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계속 바쁜 탓에 이야기할 틈을 자꾸 놓쳤는데,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

“무슨 뜻이야, 그게?”

“여왕 폐하는 믿어. 하지만 그 주변의 사크틸라인은 믿을 수 없어.”

카테리나는 미노리카에서 자신이 들었던 것을 설명했다.

“바르시나에 뭔가를 숨기겠다고 사크틸라인이 말했어. 그날, 헤젤의 왕자와 대화할 만한 신분의 사크틸라 사람이라고는 여왕 폐하를 수행하러 온 형제뿐이었고. 둘 중 누구인지는 모르겠어.”

“둘 다 그런 음험한 말이나 할 사람은 아니었는데……. 뭐, 사크틸라인을 믿을 수 없다는 네 말에는 동의해. 좀 알아봐야겠군.”

프란세스크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곧, 공작부인의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둘이 똑같네. 카테리나도 왕궁에 가더니 네 오빠를 닮아가는구나.”

남매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똑같이 생긴 진녹색 눈이 깜박이며 어리둥절했다. 프란세스크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 같은 사람은 주군 주변의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 법이거든요.”?

외전 : 뱃멀미를 퇴치하는 은밀한 방법

#063

자우메 왕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자마자, 에르난은 출항 준비를 지시했다.

출항은 바로 다음 날로 정해졌다. 레이테도 섬을 떠날 준비에 분주했다.

시녀가 사물함에 카놀리가 든 상자를 넣었다. 그 모습을 본 레이테는 남편의 뱃멀미가 떠올랐다. 거의 시체처럼 늘어졌던 남편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여기 오면서 그렇게 난리였는데, 돌아갈 때는 괜찮을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마음도 심란할 텐데…….’

하아. 레이테가 한숨 쉬었다.

그때 레이테의 뒤에서 팔이 슥 다가오더니 그녀를 안았다. 레이테가 뒤를 돌아보자마자 에르난의 입술이 그녀를 덮쳤다.

짧지만 깊은 키스를 나누고, 에르난이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당신이 걱정되어서요. 폐하께서 위독하시니 아무래도 불안할 텐데, 돌아가는 바닷길에 고생이라도 덜 하려면 어떡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어요.”

“아버지라면 뭐, 어느 정도 예상하던 일입니다. 생각보다 빨리 닥쳐 놀랐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멀미는 모르겠습니다. 죽지는 않겠지요.”

에르난의 목소리는 별로 무겁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은 살짝 굳어 있었다.

“갑자기 돌아가는 바람에 할 일이 많습니다. 멀리 온 김에 살피려던 것이 한둘이 아니었건만……. 당장은 이것이 제일 힘들군요. 밤을 새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다시 아내에게 키스했다. 이번에는 떼어내기 아쉽다는 듯 길게.

* * *

레이테는 남편 없이 홀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 자리에도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에르난은 정말로 밤을 새웠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직도 일에 붙들린 모양이었다.

바르시나 영토의 행정 업무이니 아내와 분담할 수도 없다. 레이테의 걱정은 커졌다. 피곤한 상태에서 멀미까지 오면 정말 괴로울 텐데.

고민하던 여왕은 프란세스크를 불러 물었다. 그는 잡다하게 아는 것이 많아 보였으니까.

“뱃멀미는 답이 없습니다. 그냥 버텨야 합니다.”

프란세스크의 답은 깔끔하게 그녀의 기대를 배신했다. 여왕이 눈에 띄게 실망하자, 프란세스크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몇 가지 소문이 있기는 합니다만…….”

“말씀하세요.”

“일단 배는 아니고 마차 멀미에 대처하는 방법이라고 들은 것입니다. 멀미는 멀미니까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요.”

그는 레이테에게 검고 기다란 천을 내밀었다.

“이것을 눈에 둘러 시각을 차단하면 신기할 만큼 멀미가 줄어든다는군요.”

미심쩍지만 없는 것보다야 낫다. 레이테는 천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프란세스크는 대답 대신 여왕의 뒤에 선 그의 동생을 불렀다. 그가 동생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카테리나가 화들짝 놀라더니 긴 한숨을 쉬고 여왕에게 다가왔다.

“저어, 폐하. 그게…….”

카테리나가 레이테의 귀에 속삭였다.

* * *

배는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출항했다.

“괜찮아요?”

“네, 너무 졸려서 멀미 따위 느낄 틈이 없습니다…….”

멀미가 문제가 아니었다. 에르난은 선실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다. 그는 아내를 향해 힘없이 팔을 뻗어 흔들었다. 와 달라는 뜻이다.

레이테가 침대에 가서 앉자, 에르난이 그녀를 끌어당겨 안았다.

“왜요?”

“같이 자 주세요…….”

그녀는 피식 웃으며 남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 * *

너무 일찍 침대에 누운 탓에 레이테는 한밤중에 몇 번이고 일어났다. 그때마다 에르난은 더 자고 싶다며 아내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이 밝아도 마찬가지였다.

‘배고프단 말이야……!’

레이테는 여전히 잠에 취한 남편의 품에서 억지로 빠져나와 탁자 위에 놓인 빵과 과일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레이테는 갑판으로 나왔다. 프란세스크와 카테리나 남매가 다가와 그녀에게 인사했다.

“간밤 잘 보내셨습니까, 폐하?”

프란세스크가 물었다.

“뭘 보낼 것도 없이, 계속 잠만 잤어요. 에르난이 완전히 지쳐서.”

“아, 실망입니다. 두 분의 사이가 얼마나 좋은지 선실에서 나오지도 않고 식사도 안 하더라며 선원들의 관심이 엄청났거든요. 그런데 에르난은 설마 아직도?”

“네. 아직도 자는 중이에요. 일어나기 싫고, 계속 잠이 온대요. 밤샘이 많이 피곤했나 봐요.”

“계속 졸리는 현상도 멀미라고 들었습니다.”

이런.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출항 사흘째. 드디어 정신을 차린 에르난에게는 새로운 시련이 찾아왔다.

“에르난, 괜찮아요?”

레이테는 선실 문을 똑똑 두들겼다.

잠시 후, 문이 살짝 열리더니 그 틈으로 프란세스크가 쑥 나타났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괜찮습니다.”

“들어가서 좀 도와주고 싶은데요.”

“안 됩니다. 이런 모습을 아내에게 보일 바에는 바다에 빠져 죽어 버리겠다 하셨습니다.”

프란세스크는 가차 없이 문을 닫았다.

에르난은 끊임없이 몰려오는 구토감과 싸우는 중이었다. 차라리 시원하게 쏟아 버리면 좋을 텐데, 그렇지도 않다는 듯했다. 메스꺼움만 계속되는 탓에, 언제 토할지 몰라 아내를 못 만나겠다는 상황이었다.

그날 밤, 에르난은 수척해진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솔직히 지금도 별로 안심은 안 됩니다. 자는 사이 당신께 실수하지 않을까 불안하군요…….”

“……뭐든 좋으니 죽지만 말아 주세요…….”

레이테는 남편의 등을 토닥였다. 에르난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부인, 그렇게 자극하면 혹시라도…….”

“아, 그런가요? 미안해요. 잘 자요.”

레이테는 에르난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 그런데 에르난이 고개를 쑥 뒤로 뺐다. 레이테는 당황했다.

“안 됩니다.”

“네?”

“제가 무슨 실수를 할지 몰라요.”

“…….”

설마하니 키스하는 데에 일이 터지겠느냐며 나무라고 싶었지만, 에르난의 표정은 진지했다. 레이테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할 것 같다. 레이테는 검은 천을 떠올렸다. 그리고 또 하나.

‘솔직히 내키지 않지만…….’

* * *

나흘째 아침이 밝았다. 날씨가 맑고 쾌적해 에르난의 상태는 퍽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늦은 오후가 되자 에르난은 다시 프란세스크와 선실에 틀어박혔다. 레이테는 또 갑판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후우……, 이제는 어쩔 수 없어.’

레이테는 손에 든 검은 천을 꽉 쥐었다.

선실 문을 두들기자, 역시나 프란세스크가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테는 말없이 손을 들어 보였다.

아. 프란세스크가 짧게 탄식했다. 이윽고 선실 문이 활짝 열렸다.

“힘내십시오, 폐하.”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선실 밖으로 나갔다.

선실로 들어간 레이테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의자에 앉은 남편의 뒤로 다가갔다.

“에르난, 멀미에 특효라고 제가 들은 방법이 하나 있는데요.”

“그게 뭡니까?”

에르난이 상반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에르난의 눈에 검은 천이 씌워졌다.

“부인?”

“시야를 차단하면 멀미가 나아진대요.”

레이테는 남편의 머리 뒤에서 천을 묶으며 말했다.

“그 정도라면 눈을 감아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게 웬…….”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한대요. 그리고……, 후우.”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레이테는 머뭇거리며 남편에게서 멀어졌다. 침대에 앉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먼저 약속해 주세요. 절대 일어나서 움직이지 않겠다고. 앞이 안 보이니까 잘못하면 넘어져 다칠 수 있어요. 앉은 채로 잠자코 듣기만 하세요.”

“네.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에르난은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살짝 돌아앉았다.

남편의 눈을 가려서 다행이다. 그는 아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게……. 하, 하……, 하고 싶어요. 당신이랑…….”

“네? 무슨…….”

에르난이 아내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던 그의 움직임이 별안간 멈췄다.

“부인, 방금 설마…….”

“네, 생각하시는 그거 맞는데요. 아, 움직이지 말아요. 그러기로 했지요?”

“……예.”

막 몸을 일으키려던 에르난이 도로 의자에 앉았다.

“음, 그러니까……, 어…….”

레이테는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하지? 레이테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야한 생각이나…… 행동을 하면 멀미가 완벽하게 사라진대요…….’

카테리나가 레이테에게 속삭여 준 이야기였다. 프란세스크가 직접 전달하지 못할 만도 했다.

에르난의 체력은 완전히 소진되었다. 그를 무리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레이테는 말로만 그를 자극하기로 결심했다.

시야를 차단하는 방법도 함께 사용하기로 했다. 이 지경까지 온 이상, 두 가지 수를 함께 사용해서라도 반드시 멀미를 없애고 싶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나요? 그때 목욕…….”

“……?”

“다시…… 하고 싶…….”

말을 마칠 수 없었다. 레이테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듯이 붙잡았다.

첫 만남으로부터 8개월가량의 시간이 지났다. 이제 부부는 육체관계에 아무 거리낌이 없다.

‘그렇지만! 하지만!’

비언어적 활동을 언어로 표현하려니, 민망해 미칠 노릇이었다.

“……음, 제가 당신께 목욕을 권유 드렸죠.”

“예.”

“그때 당신은 굉장히 당황했었답니다.”

“……아, 그게.”

에르난의 얼굴이 단숨에 붉어졌다.

어라? 레이테는 어쩐지 유쾌해졌다. 남편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멀찍이서 보니 제법 귀엽다.

“다른 생각, 했죠?”

에르난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쩜 사람이 그렇게 음흉할 수가. 저는 순수한 호의로 당신께 목욕을 권했는데 당신은 이상한 생각이나 했군요. 하긴, 결국은 같이 했지요. 당신이 원하는 것.”

완전히 말문이 막혔는지, 살짝 끄덕이는 그의 고갯짓이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뭘 했는지 생각해 볼까요?”

에르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앉아요!”

레이테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눈도 가렸는데 위험하잖아!

하지만 그보다, 남편의 움직임에서 다급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떤 다급함일지 뻔했다.

“잠깐. 끈도 풀지 말아요!”

머리 뒤에 손을 대던 에르난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팔은 파르르 떨며 아래로 내려왔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자리에 앉은 에르난이 말했다.

“부인, 멀미 사라진 지 오래니까 좀 어떻게 안 됩니까?”

‘효과가 있잖아?’

“아, 안 돼요. 괜히 체력을 낭비하면 곤란해요.”

“그러면 이런 식으로 듣기만 하라는 말씀입니까?”

“……네.”

레이테는 앉은 몸을 일으켜 선실 문 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나가면 끈 풀어요.”

후다닥 밖으로 나온 레이테는 문을 쾅 닫았다. 그녀는 문에 기대어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으으…….”

남편의 눈을 가리길 잘 했다. 멀미를 제대로 퇴치하려는 의도였으나, 그와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에르난이 제대로 보았다면…….

‘절대로 거절 못 해.’

음욕에 젖은 검은 눈이 떠올랐다. 레이테는 거세게 머리를 휘저으며 환영을 지워 버렸다.

* * *

에르난이 멀미를 느낄 때마다, 레이테는 효과가 빠른 그 방법을 다시 사용했다.

“한때 당신은 무조건 짝수 횟수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기억하나요?”

“당신이 제 귀를 으음, 그러니까 깨문다거나 핥……는다거나, 그러면 좋더라고요.”

“저도 당신이 고파요. 하지만 참고 있어요.”

“그냥 안 참으면 안 됩니까, 레이테?”

“안 참으면 바르시나에 도착할 때까지 선실 밖으로 쫓아내겠어요.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갑판에서 지내세요.”

“…….”

“당신 손가락……, 으읏. 더는 말 못 하겠어요. 알아서 상상하세요.”

긴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몇 마디만 던지면 에르난은 곧바로 몸을 비틀며 괴로워했다.

그러다 크게 한숨을 내쉰다. 멀미 따위 잊어버렸다는 신호다.

‘또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매일매일 레이테는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했다.

동시에 그녀는 묘하게 이 상황을 즐기기도 했다. 곤란함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남편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 * *

순식간에 사흘이 흐르고 배는 바르시나에 도착했다. 에르난은 다른 의미에서 초췌해져 있었다.

“부인, 당신 진짜로…….”

레이테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급한 귀환은 결코 좋은 일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잠시나마 남편이 마음의 짐을 덜어낸 듯하여 기뻤다.

물론 레이테 개인적으로 재미있기도 했지만.

옮겨 탄 보트가 뭍에 닿았다. 레이테는 조심히 땅에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레이테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윽!”

비틀거리는 아내를 에르난이 받쳐 들었다.

“부인!”

“아……, 으읏.”

레이테는 신음했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며 눈앞이 흐릿했다.

“괜찮아요? 어디 아픕니까?”

“그게……, 어지러워요.”

발에 닿는 땅은 바다 위의 배와 같은 흔들림이 없다. 어색했다.

‘잠깐, 설마…….’

레이테는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

남편의 팔이 그녀의 머리를 휘감더니, 레이테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레이테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레이테, 그건 속칭 땅멀미라고 합니다.”

에르난이 아내에게 속삭였다. 그는 레이테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귀를 깨물어 주면 좋다고 하셨지요.”

“읏……!”

“이제 제가 당신의 멀미를 풀어 드리겠습니다. 자, 일단 궁으로 돌아갈까요?”

레이테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에르난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안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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