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에 비친 왕관-8화 (8/15)

4장 : 우리의 바다(下)

#048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눈을 감아도, 떠도 마찬가지다. 내장이 위아래를 모르고 죄다 뒤섞인 듯했다.

상의를 거의 다 풀어헤친 채로, 에르난은 시체처럼 누워 기운 빠진 신음을 흘렸다.

“으……, 으으윽.”

찬물에 적신 천이 그의 이마에 얹어졌다. 에르난은 눈을 멍하니 뜨고 힘겹게 손을 들었다. 그는 수건을 얹은 아내의 팔을 붙잡았다.

“레이테…….”

“계속 안 좋나요?”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조금만 움직여도 속의 울렁거림이 심해지고 만다.

레이테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아, 예쁘다. 에르난은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아내가 얄미웠다.

출항 일주일째, 레이테는 전혀 멀미를 하지 않고 멀쩡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오기는 처음이라는데도.

반면 에르난은 날로 몸이 지쳐 갔다. 레이테는 놀란 기색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에르난은 배를 타 본 경험이 있는 수준을 넘어, 해전을 지휘하기까지 했으므로.

에르난은 변명처럼 말했다.

“사실 드러내놓지 않을 뿐이지, 선원 중에서도 뱃멀미에 시달리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그냥 참으며 배를 타는 겁니다. 돈이 되니까요.”

그도 마찬가지였다. 구토감이 올라오며 머리가 어지러워도 버틸 만했다. 선상 생활에 큰 지장은 없었다.

여태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아내와 함께 배를 탄 때에 이 꼴이 되었나.

* * *

바르시나의 군함이 상선을 공격한 헤젤의 선박을 나포하여 바르시나령 섬인 미노리카의 항구에 억류했다. 왕궁으로 올라온 첫 보고였다.

궁정에 긴장이 도는 가운데, 이틀 후 추가 보고를 받은 에르난과 귀족들은 실망했다.

문제의 선박은 ‘그냥 보내 달라’는 주장만 반복하며 바르시나의 조사를 완강히 거부한다. 그들은 다른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고 배에 틀어박혔다.

보고는 이것이 전부였다.

헤젤 측에서 조사를 거부하니 사태가 교착 상태에 빠진 셈이다. 결국 에르난은 자신이 직접 미노리카에 가기로 결심했다.

다시 열린 대표위원회는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에서 시작했다.

“준비를 마치는 대로 우리가 직접 미노리카 섬으로 가 사태를 해결하겠습니다.”

“폐하, 우리라 하셨습니까? 하오면 누가 폐하를 수행합니까?”

“코른, 그대는 아직도 눈치가 없나? 그야 당연히 내 아내와 동행하지요.”

“…….”

회의장은 다시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이미 지난 회의에서 신경전을 겪은 탓인지, 귀족들도 에르난도 거침이 없었다.

“공과 사를 구분하시지요, 폐하! 당신은 국왕의 대리입니다!”

“그대가 사크틸라보다 헤젤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풍부하다면 그 충고를 깊이 생각해 보겠소.”

“사크틸라의 도움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왕 폐하께서 헤젤 일을 잘 아실 것 같지는 않…….”

“그만하시지, 내가 아내와 가겠다면 가는 거요!”

에르난이 버럭 외쳤다. 코른은 입을 딱 다물었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부부를 쏘아보았다.

부부는 이제 똑같이 생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다.

레이테는 꼬박꼬박 위원회에 참석해 남편의 옆을 지켰다. 발언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테는 사크틸라의 여왕으로서 대단히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헤젤을 상대하기 위해서 사크틸라와 협력해야 한다. 여왕은 이 명분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또한 사크틸라 남부의 밀무역 조사도 지시했다.

여왕은 매일매일 숨 가쁘게 사크틸라와 연락을 주고받았고, 이는 한밤중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의 열성적인 도움은 고맙습니다만…….”

에르난은 레이테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의 손이 이불 안으로 쓱 들어갔다. 아내의 몸을 더듬던 손이 부드러운 가슴을 만지려는 순간, 레이테는 남편의 손을 탁 쳐냈다. 에르난은 울컥했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도움이 지나치면 방해가 되기도 한다고요. 저기, 부인. 듣고 계십니까?”

“아니요, 안 들려요.”

편지를 다 읽은 레이테는 간단하게 답장을 썼다. 사흘 뒤 아라고 항(港)으로 출발하니, 사절은 그쪽으로 보낼 것.

레이테는 팔을 쭉 내뻗어 편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호출용 종을 흔들었다.

침실 문이 열리고 카테리나가 들어와 편지를 가지고 나갔다. 그녀는 방을 나갈 때까지 고개를 푹 숙이며 부부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방해라니, 섭섭하네요. 저는 당신과 함께 일한다고 생각해서 꽤 기뻤는데.”

레이테는 몸을 돌려 남편을 바라보았다.

“부인,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제가 무조건 좋아할 거라 생각하시는군요.”

“네. 아닌가요?”

레이테는 남편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무릎을 끼워 넣었다. 에르난은 이불을 확 걷으며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

이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부부가 미노리카로 향하는 배에 탄 날은 첫 보고일로부터 보름가량 지나서였다.

에르난은 배에 처음 발을 얹은 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멀미는 예전에도 있었으니 상관없다. 땅과는 다른 배의 흔들림에 신기해하는 레이테를 바라보며 그는 즐겁게 웃을 뿐이었다.

그런데 첫날 밤부터 날씨가 좋지 않았다. 본격적인 풍랑은 아니었지만 파도가 상당히 험했다.

멀미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은 들은 적 없다. 나랏일이 먼저지. 에르난은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렇게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다음의 다음 날도, 날씨가 좋아져도 에르난의 멀미는 나아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한가한 여행이 아니었다. 심각한 문제로 미노리카에 가는 길이다.

배는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선원들은 잡담 하나 없이 철두철미하게 일했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무장한 군사들이 돌아가며 갑판을 지켰다.

에르난도 갑판으로 나갈 때만은 어지러움을 억누르고 근엄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선실로 돌아오고서는 어림없었다.

“자, 하나 더 먹어요.”

레이테가 손가락으로 그의 입을 살짝 벌려 사탕을 넣어 주었다.

배 안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아내를 위해 에르난은 그녀가 좋아하는 달콤한 간식을 챙겼다.

하지만 단것이 멀미 진정에 도움이 된다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레이테는 사탕을 전부 에르난에게 주었다.

에르난은 사탕을 받아먹으며 그녀의 손가락도 함께 쪽 빨았다.

“손가락이랑 사탕은 구분하세요.”

“당신이 사탕보다 더 달아요.”

“……하아.”

레이테는 어이가 없는지 웃었다. 하지만 손가락은 바로 빼지 않고 남편이 갖고 놀라는 듯이 잠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사탕을 집었던 손가락이라 그런지 정말로 달기는 했다.

“후우……, 이리 와요, 레이테.”

에르난은 팔을 뻗어 아내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졌다.

파도를 따라 몸이 다시 붕 떴다 가라앉았다. 그러나 어지러움 속에서도 혀에 얽힌 달콤함만은 강렬했다.

* * *

에르난이 잠든 뒤에야 레이테는 갑판으로 나왔다. 그녀는 멀미를 느끼지 않지만, 역시 선실 밖으로 나와야 숨이 트이고 좋았다.

정말로 멀리 왔다. 지도를 보았더니, 하룻밤 머물고 출발한 아라고에서 목적지인 미노리카 섬까지의 거리가 사크틸라 북서쪽 끝인 탐브레에서 아라고까지의 거리보다 훨씬 더 멀었다. 사크틸라 밖으로 나오기도 처음이었건만, 이베로 반도를 벗어나기도 처음이다.

어느 방향을 보아도 바다뿐이다. 신기하면서도 살짝 오싹한 풍광이었다.

세상은 넓고 끝이 없다는 생각에 살짝 현기증이 일었다. 여왕인 그녀 또한 세상의 작은 점일 뿐이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감상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팀파노와 심발로가 다가왔다.

사크틸라에서는 형제를 사절로 바르시나에 보냈다. 에르난은 부부의 결혼식은 물론, 반역자 토벌에도 함께했던 그들을 무척 반겼다.

형제가 머무르는 선실은 레이테와 에르난이 머무르는 곳보다 더 작고 어두웠다. 그러나 그곳도 귀빈용 선실이므로, 일반 선실보다는 훨씬 쾌적할 것이다.

“사크틸라에서 진행한 조사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붙임성 좋은 형제는 바르시나인 선원과도 잘 지내며 순탄한 선상 생활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평소와 달리 무척 진지했다.

출항하던 날부터, 레이테는 형제가 여왕에게만 따로 말을 전하고 싶어 하는 기색을 눈치챘다. 하지만 셋만 따로 모이기는 쉽지 않았다.

바르시나인은 여왕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그들에게 수상한 모습을 보이면 곤란했다. 무엇보다, 레이테가 줄곧 남편에게 붙어 그를 간호하느라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

“먼저 헤젤의 동향입니다. 왕위 계승자인 엔히크가 행방불명되어 왕실이 발칵 뒤집혔다고 합니다. 엔히크는 전염병으로 형이 죽자 충격을 받아 수도원에서 은둔한다고 알려져 있었지요.”

“엔히크의 조카인 리리우 공주만 그 사실을 먼저 알았고……, 아니, 엔히크와 애초에 공모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만 이 부분은 확실히 알 수 없었습니다. 어쨌거나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왕은 손녀를 강하게 추궁했다더군요.”

레이테의 눈이 조금 커졌다. 리리우라니. 꽃밭에서만 사는 어린애인 줄 알았는데 복잡한 일에 휘말린 듯하다. 영 상상이 되지 않지만.

“저희는 왕자가 아예 헤젤 국외로 나갔다고 생각합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반역자는 사크틸라 남부에 무관심했습니다. 그곳 일부를 다스리는 자로서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영지를 보전하기에도 벅차 바다까지 감시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심발로가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레이테도 부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남부의 방치는 숙부 탓이었다지만, 레이테 역시 숙부의 동향에만 신경 쓰느라 방치에 동조한 셈이었다.

“헤젤 선박은 잘도 사크틸라 앞바다를 누비더군요. 눈앞에 뻔히 헤젤의 깃발을 단 배가 지나가는데, 아무 조치도 취할 수 없어 바라보기만 했던 기억도 납니다.”

여왕은 뒤늦게 왕실 대리관을 곳곳에 파견했다. 하지만 황폐해진 그곳이 복구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경들께 민망할 뿐이네요. 여왕이 변변치 못해서.”

“폐하의 탓이 아닙니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폐하.”

여왕을 위로하는 형제의 모습은 대단히 진지했다.

“……고마워요.”

레이테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한동안 그녀에게 적대감 가득한 바르시나 귀족만 만난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엔히크도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갔으리라는 추측인가요?”

“네. 그렇게 가정하고 이리저리 수소문하던 중, 대륙 본토에서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에게 신경 쓰이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이베로 반도 출신 유학생 사이에서 수상하기로 유명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반도 사람 같기는 한데 아무도 정체를 모른다더군요. 의과 대학의 해부학 수업에서부터 조선소와 대장간에까지, 온갖 곳에 출몰한답니다. 이러니 학생은 위장 신분이고 사실 첩자라는 소문마저 돌고요.”

“즉, 그 수상한 자가 엔히크일지도 모른다는 뜻인가요?”

“일단 그렇습니다.”

대륙으로 유학 간 왕자라니 조금 뜬금없지만, 아주 이해 못 할 상황도 아니었다.

헤젤은 반도에서도 가장 낙후된 지역이다. 엔히크는 왕위 계승자로서 대륙의 선진 문물을 배우려 했을 수도 있다.

‘왜 왕에게까지 숨기고 떠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르시나는 대륙과 활발하게 교류하는 만큼 그곳 동향에도 민감하다. 헤젤의 왕자가 대륙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는 어딘가 쓸모가 있을 듯했다.

“그리고 탐브레의 대포 문제입니다. 폐하께서 명하신 대로, 밀수로 유명한 지역 여러 곳을 조사했습니다. 무기 거래가 꽤 성행했다는 정황은 여럿 있었습니다만…….”

“정확히 어디에서 어떻게 헤젤로 들어갔는지, 도저히 추적할 수 없었습니다. 지나치게 치밀하게 감춰져서, 아예 헤젤 왕실의 비호가 있지 않았나 의심됩니다.”

역시 가능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보고는 여기까지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내용을 오로지 여왕 폐하께만 전달하라는 시스로네스 대주교의 명이 있었습니다.”?

#049

여왕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녀는 비로소 형제가 자신과 따로 자리를 만들려 애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에르난에게 숨길 필요는 없는 내용 같은데……, 아.’

시스로네스가 보았던 부부 사이는, 서먹하고 딱딱한 모습일 터였다. 벌써 한 달이 넘은 일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레이테는 남편과의 악수를 또렷이 기억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레이테는 에르난을 믿고 싶었고, 믿기로 했다.

“대주교는 이 일을 내게 전달만 하라던가요?”

“예, 폐하.”

정보 자체는 독점했으나, 시스로네스는 정보를 어떻게 활용할지 여왕에게 조언도 부탁도 하지 않았다.

‘이용은 나더러 알아서 하라는 뜻일까?’

“여왕 폐하!”

선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세르지가 나타났다.

그는 형인 조안의 간청으로 에르난의 시종이 되어 부부를 따라왔다. 자신은 오로지 에르난의 수행원일 뿐이라고 강조하듯, 레이테를 볼 때마다 그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부군께서 찾으십니다.”

레이테는 갑판으로 나왔다.

“부인, 이쪽으로 오세요.”

에르난은 밝은 미소와 함께 그녀의 허리를 감고 선수 쪽으로 이끌었다. 아무것도 없던 수평선에, 섬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멀미에서 해방되겠네요. 축하해요.”

“당신이 처음으로 대륙 땅을 밟아 보는 일을 더 축하해야지요.”

아. 남편의 말에 레이테는 눈을 크게 떴다. 미노리카는 바르시나령 섬이지만, 대륙 본토와 배로 반나절이면 닿는 거리라고 들었다. 사실상 대륙 본토에 온 셈이다.

반도 땅을 떠난 지 일주일째, 레이테는 다른 세상에 도착했다.

* * *

섬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레이테는 탄성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계단처럼 층층이 깎인 절벽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뱃사람들은 저 절벽을 해적의 계단이라고 부릅니다. 오가는 배는 많은데, 해안선이 복잡해 적당히 숨어 있기에도 좋아 해적이 자주 출몰하거든요. 아름다운 경치에 넋을 잃다가 공격당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설명하는 에르난의 목소리가 퍽 경쾌했다.

“당신이 총독으로 재임했다던 섬이 이곳이죠? 역시 잘 아시네요.”

“네. 오랜만에 오니 반갑군요. 문제의 헤젤 선박이 바르시나 상선과 마주친 곳도 이 근방입니다.”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하던 레이테는 에르난의 설명에 표정을 살짝 굳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가 이 먼 곳까지 온 목적은 유람이 아니었다.

“당신도 갑옷을 하나 맞출까요?”

남편의 뜬금없는 물음에 레이테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 저는 싸우는 방법을 모르는걸요?”

에르난은 흉갑을 착용하고 외투를 덧입은 차림새였다. 전투가 일어날 가능성은 적지만 만약을 대비한 간단한 무장이었다.

“꼭 싸우기 위해서만 갑옷을 입지는 않습니다. 당신도 함께 헤젤 배를 보러 갈 텐데 저만 방어구를 입은 모습도 좀 우습고.”

부부는 항구에 도착하는 즉시 문제의 배로 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부부가 나란히 갑옷 차림이라면, 훨씬 든든하고 또 어울려 보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요.”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화려한 갑옷은 그 자체로도 힘과 권위의 상징이다.

“좋네요. 다만 그 무거운 것을 제가 입고 제대로 설 수나 있을지 모르겠어요.”

“생각처럼 아주 무겁지는 않습니다. 익숙해지면 움직이는 데에 무리 없어요. 힘들다면 지금 저처럼 일부만 갖춰 입는 방법도 있고.”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역시 자신의 갑옷 차림은 영 어색할 것 같다.

부부가 잡담을 나누는 사이, 절벽을 지나친 배는 섬을 따라 한참 돌았다. 멀리 다른 육지가 어렴풋이 보이기도 했다. 레이테가 물으니 에르난은 대륙 본토의 끄트머리라 답했다.

“정말 멀리까지 왔네요.”

“그래도 이 바다는 바르시나의 영역이지요.”

“바다가 땅처럼 정확하게 영역이 구분되지는 않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사실상 우리 바다입니다. 미노리카는 바르시나의 섬이고, 이 근해는 바르시나의 배가 가장 활발히 누비지요.”

“흐음, 방금 이야기가 당신이 전에 말했던 대륙주의자의 방식인가요? 닮은 것 같아서.”

에르난은 씩 웃었다.

그는 레이테와의 결혼으로 인해, 대륙주의자와 거리를 둔 상태다.

하지만 그는 바다에 대한 자부심을 당연하게 내보인다. 역시 바르시나인은 바르시나인이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태연하게 저런 말을 하면서도 나와 결혼해 반도 내부로 진출할 생각까지 하다니, 욕심도 많지.’

배우자도 동료도 좋다. 하지만 남편의 욕심에 대해서는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상징적으로 배우자의 나라에서도 왕관을 쓴다 한들, 그것이 완벽한 협력 관계를 보장할 수는 없으므로.

‘그래서 대주교는 내게만 보고하라고 했던 걸까?’

엔히크도, 대포도 일부러 숨길 내용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공유하는 편이 낫다. 하지만 레이테는 괜히 망설여졌다.

남편이 바르시나인이듯, 그녀는 사크틸라인이다. 지금은 부부가 같은 목표와 의견을 지녔지만, 언제라도 달라질 수 있다. 혹은 레이테와 에르난이라는 개인이 통제 불가능한 형태로 대립할 수도 있다.

‘……피곤해.’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레이테는 머리가 아팠다.

불가피하게 생길 수 있는 상황이지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다. 떨어지기 싫고, 믿고 싶을 뿐인데 무슨 계산을 더 해야 하지?

물론 이유는 안다. 두 사람은 왕이니까.

그래도 답답했다. 레이테는 괜히 손으로 머리카락 빗기를 반복했다.

섬의 항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부부는 뭍 가까이 들어가는 작은 보트에 옮겨 탔다.

항구 근처는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먼 곳에 제법 높은 산이 있고, 산등성이를 따라서도 건물이 적지 않았다. 산 윗부분은 연기 같은 것에 가려져 흐릿하게 보였다.

“저 산, 설마 화산인가요?”

레이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책으로만 읽은 것을 실제로 만날 줄은 몰랐다. 에르난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아내를 일으켜 세웠다.

“내립시다.”

레이테는 남편의 손을 잡으며 뭍으로 올라섰다.

한껏 차려입은 귀족과 상인, 그리고 적잖은 수의 병사가 부부를 맞이했다.

여왕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초리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레이테는 우습게도 자신이 그런 시선에 무척 익숙해졌음을 깨달았다.

“미노리카에 잘 오셨습니다, 폐하.”

둘이 아니라 한 명만 환영하는 인사라니. 레이테는 이제 기분이 나빠지지도 않았다. 에르난은 눈살을 확 찌푸렸지만.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네, 총독. 이번에는 아내와 함께 왔소.”

“……여왕 폐하, 대륙은 처음 오셨지요?”

에르난이 ‘아내’를 강조하고서야 총독은 레이테에게 인사하며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의혹의 눈길을 차마 다 감추지 못한 채.

“네, 미노리카는 무척 아름다운 섬이네요. 어서 이곳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이 섬은 상업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인지라 늘 노리는 세력이 많거든요.”

은근히 여왕을 꾸짖는 듯한 반응이다.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로 넘겨 버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낯선 풍광에 놀라기 바빴던 레이테가 정신을 가다듬고 주변을 살피니, 항구의 분위기는 상당히 살벌했다. 부부가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를 생각하면 당연할 수밖에 없다.

“문제의 선박은?”

“저쪽입니다, 폐하.”

에르난이 묻자 총독이 먼 곳을 가리켰다. 크고 작은 배가 어지럽게 모여 있어 어느 배를 가리키는지 구분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테는 곧 그것들이 배 한 척을 둘러싸고 있음을 깨달았다.

“혹시라도 도망치는 일이 없도록, 아예 다른 배를 모아 막아 두었습니다.”

“헤젤 사람들을 바로 만나고 싶은데, 가능하겠나?”

“보내 달라는 말만 하지, 제대로 된 대화를 아예 안 하려 합니다. 그래도 폐하께서 역시 살펴보시길 원하실 듯하여 병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적잖은 수의 병사가 다가와 에르난 일행을 단숨에 감쌌다. 창칼을 든 기사, 궁수, 그리고 레이테는 그림으로만 보았던 화승총을 든 병사까지 있었다.

아무리 왕족의 호위라지만 과한 면이 있다. 아마 병사들은 호위보다 헤젤을 위협할 목적이 더 강할 것이다.

일행은 다시 작은 보트에 타 헤젤의 배에 가까이 다가갔다. 특징 없이 평범해 보이는 범선이었다.

갑판에 나와 있던 선원들이 불안한 눈초리로 에르난 일행을 살폈다. 잠시 후, 초로의 남자가 갑판 위에 나타났다.

“선장! 이분은 바르시나의 왕위 계승자이자 사크틸라의 왕이신 돈 에르난이오!”

총독이 사크틸라어로 외쳤다. 레이테는 잠시 놀랐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긴, 바르시나인이 헤젤어를 알 턱이 없고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반도의 실질적인 공용어는 사크틸라어다. 바르시나인이 아무리 사크틸라와 반도를 무시해도, 그들의 터전은 반도였다.

대륙과 거래하는 무역상도, 외국 문물에 심취한 대륙주의자도 사크틸라어를 익히지 않을 수 없었다. 레이테의 입가에 가벼운 조소가 걸렸다.

무언가 더 말하려던 총독을 제치고, 에르난이 앞으로 나아갔다.

“헤젤과 바르시나 사이에서 일어난 유감스러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왔다. 대화에 충실히 임한다면 해를 입히지는 않을 것이다.”

에르난은 헤젤어로 말했다. 상당히 투박하지만 의미 전달에는 문제가 없다.

바르시나인이 헤젤어를 사용할 줄은 몰랐는지, 배 위의 선장은 놀란 눈치였다.

잠시 후, 선장의 옆에 수척해 보이는 젊은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선장과 짧게 대화를 나누고 다시 모습을 감췄다.

“어라, 동 페드루?”

조안과 함께 보트에 탑승한 세르지가 중얼거렸다. 레이테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는 사람인가?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 돌려만 보내주시오!”

선장의 외침에 레이테의 시선은 다시 배 위로 향했다.

“자꾸 거부하면 강제로 진입해 조사할 수밖에 없다. 왜 대화를 거부하는가!”

“조사도 대화도 원치 않소!”

대화는 자꾸 평행선만을 걸을 뿐이었다. 레이테는 아예 몸을 확 돌려 세르지를 바라보았다.

“돈 세르지, 혹시 저 배에 아는 사람이 있나요?”

“……예. 낯익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답조차 하지 않을 기세였던 세르지는 그를 노려보는 여왕의 눈빛에 움찔하며 마지못해 답했다.

“누구였죠? 아까 선장 옆에 잠깐 나타났던 남자 같은데.”

“맞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지요? 당신과의 관계는?”

눈살을 찌푸린 세르지는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레이테는 짜증이 났다. 세르지가 사크틸라 여왕을 싫어하는 줄은 충분히 잘 알겠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런 감정을 따지나?

“세르지, 여왕께 무슨 무례야. 어서 대답하거라!”

보다 못한 조안이 호통치고서야, 세르지는 입을 열었다.

“폐하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한 피에르는 그림 외에도 다방면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의 공방에 갔다가 만난 사람입니다. 피에르가 화약을 만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더군요. 통성명만 했을 뿐입니다.”

“다른 바르시나인 유학생들도 그 남자를 알고 있나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기에만 바빠, 우스갯소리로 얼뜨기 첩자라는 별명을 붙여 부르던데요.”

‘설마……?’

레이테는 팀파노와 심발로에게 보고받은 내용을 떠올렸다. 어쩌면 몰래 대륙으로 떠난 헤젤의 왕자가 저 배에 있을지도 모른다.

엔히크와 페드루,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그 정도야 가명을 사용하면 그만이다. 왕자는 비밀리에 움직였고,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조사를 거부했다고 따지면 말이 맞다.

‘어떡하지?’

바르시나는 엔히크의 행방불명 사태를 모르는 것 같다. 레이테는 수차례 참석했던 회의에서 그의 이름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물론 만일을 대비해 자신만이 아는 정보는 많을수록 좋았다. 하지만 역시, 숨겨야 할 이유도 없지 않나?

“이야기 잘 들었어요. 고마워요.”

고민은 길지 않았다. 레이테는 세르지에게 간단히 인사하고 남편에게 다가갔다.

?

#050

“에르난.”

레이테가 다가가자 그는 팔을 뻗어 아내를 가로막았다.

“부인, 뒤에 가 계시지요. 혹시 저쪽에서 공격이라도 한다면 큰일 납니다.”

“그렇게 된다면 나 이전에 당신부터 큰일을 당하겠네요.”

남편의 팔을 뿌리친 레이테가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나는 사크틸라의 여왕이다!”

카랑카랑한 외침에 선장을 비롯하여 다른 선원들의 표정이 변했다. 에르난도 당황하여 아내를 바라보았다.

“당신들의 이웃인 나를 배로 들여보내 주지 않겠나? 선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레이테!”

에르난은 아내를 꽉 붙잡았다.

“왜 이러십니까? 무슨 일을 당하려고!”

“그건…….”

레이테는 망설였다.

보고를 받은 뒤, 한가하게 미노리카 섬의 풍경만 감상할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바로 말할걸.’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왕자의 이야기를 섣불리 공개했다가는 난감한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

‘신중하자. 에르난에게는 조금만 있다가 말하자.’

정작 레이테가 택한 행동은 신중함과 거리가 멀었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제가 대화해 보겠어요. 오랫동안 이곳에 억류된 탓인지 바르시나를 과하게 경계하네요.”

“헤젤과 사크틸라야말로 사이가 나쁘지 않습니까?”

“맞아요. 그래서 지긋지긋하게 싸운 만큼 대화도 많이 했답니다. 오전에 죽도록 칼부림을 벌였다가 오후에 악수하는 일이 허다했다지요.”

레이테는 겪어 보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양국의 역사가 그런 식이었다.

“여왕 혼자 올라오시오!”

“그럴 수 없다!”

선장이 외치자 에르난이 곧바로 반박했다.

“나 또한 사크틸라의 왕이다! 또한 여왕의 남편이야! 남편이 아내를 호위하는 것까지 막을 셈인가! 여인에게 호위 하나 허락하지 않는 짓은 비겁하고 무례해!”

에르난의 목소리는 점점 격해졌다. 그는 아내를 절대 혼자 보내지 않으려고 레이테의 팔을 꽉 붙잡았다.

한참 망설이던 선장이 말했다.

“……좋습니다. 두 분만 올라오십시오. 두 분의 신변은 제 명예를 걸고 보장하겠습니다.”

* * *

일정 시간이 지나도 부부가 갑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강제로 배에 진입할 것. 이런 명령을 내려놓고 부부는 헤젤의 배에 올랐다.

그들은 선장실로 안내받았다. 선장은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미안해요.”

두 사람만 남자, 레이테가 조그맣게 말했다.

“조금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그래요. 당신에게 설명할 여유가 없어 경솔한 행동을 했어요.”

“일단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은 다행이지만, 괜히 당신이 위험해지면 곤란합니다.”

에르난은 아내를 타이름과 동시에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부드럽고 따뜻해서 안심이 되는 손짓이었다.

‘믿겠다더니. 동료라더니 이게 뭐야.’

레이테는 자신의 한심함에 화가 났다. 괜한 망설임과 경계가 자신의 무모한 짓을 불러온 셈이다. 그것도 자신뿐만 아니라 남편마저 위험에 빠뜨리는 쪽으로.

“시간이 없으니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어요. 아마도…….”

문이 열리는 바람에 레이테의 말은 끊겼다. 선장이 들어와 정중한 자세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벌써 한 달째 이곳에 갇히다 보니 저희는 바르시나를 경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부터 그대들이 대화와 조사에 응했으면 될 일일 텐데.”

에르난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건…….”

선장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레이테는 대답을 더 기다리지 않았다.

“일부러 이곳까지 올라온 이유는 하나예요. 선장, 당신이 아니라 동 페드루, 아니 엔히크 왕자와 대화하고 싶습니다. 이 배에 계시지요?”

에르난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선장은 숨이 멎을 듯 당황한 낯빛이 되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선장실의 문이 열리고 안색이 파리한 남자가 들어왔다.

“……전하.”

선장이 앓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이군요. 반갑습니다, 두 분 폐하. 제가 헤젤의 왕위 계승자인 엔히크입니다.”

왕자는 대단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는 레이테의 손에 입을 맞추며 인사했고 에르난에게도 악수를 청했다.

“차라리 정체를 밝히셨으면 별 탈 없었을 겁니다. 일국의 왕자를 함부로 대할 만큼 바르시나인이 무도하지는 않습니다.”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나포되었을 때는 이미 포격을 주고받은 뒤였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바르시나인은 저희를 모조리 바다에 빠뜨려 죽일 기세였습니다.”

에르난은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만 쉬었다. 레이테 또한 별말을 할 수 없었다. 어쩐지 바르시나인이라면 배에 왕자가 아니라 왕이 탔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일 것 같다…….

“오해가 있으면 풀고, 계산할 일은 계산해야겠지요. 일단 밖으로 나갑시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밖에 대기하는 병사들이 오해할 수 있어서요. 시간이 흘러도 저희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냥 공격하라 명해 두었습니다.”

에르난이 앉은 몸을 일으켰다.

“배에서 내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편이 복잡해지지 않겠지요. 사태의 조사에는 협력하겠습니다만, 안전은 확실히 보장해 주셔야 합니다.”

“좋습니다. 왕자 전하를 포함하여, 이 배와 선원 전체의 안전을 바르시나 왕실과 저희 부부가 보장하지요. 일단 갑판에는 함께 나갑시다.”

부부와 엔히크가 갑판으로 나와 보니 바깥 분위기는 살벌했다. 바르시나 병사들은 배를 향해 활과 총을 겨누고 있었다.

에르난이 나타나자 총독은 일단 무기를 거두라고 지시했다. 에르난이 그에게 물었다.

“원래 이 배를 감시하던 병력이 있겠지?”

“그렇습니다, 폐하.”

“우선 바르시나 쪽 당사자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다시 이곳으로 찾아올 거요. 그러니 헤젤의 왕자께 어떤 불상사도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배를 지키도록.”

“예……? 아, 알겠습니다.”

왕자라는 말에 총독은 당황한 눈치였으나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 * *

뭍으로 다시 올라온 부부는 거래소에서 상인들을 만났다. 헤젤의 배와 직접 충돌했던 이들은 물론이고, 미노리카 섬에 머무는 다른 상인들 또한 헤젤에 향한 강한 적개심을 내보였다.

에르난은 신변을 염려한 왕자의 처사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다고 설명했지만, 그들을 납득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심지어 살두비아 왕궁에 올라왔던 보고와 달리, 바르시나 상선 쪽이 간발의 차로 먼저 공격했다는 말에 부부는 아연실색했다. 모조리 죽일 기세였다는 엔히크의 말은 맞았다.

‘이래서야 왕자의 말대로 정체를 밝혀 봤자 좋았을 일은 없겠네.’

레이테는 뜻밖의 이익을 누렸다. 헤젤을 미워하기에 바쁜지, 여왕에게 늘 향하던 바르시나인의 적대감 어린 시선이 없다. 우스운 상황이었다.

피해 선박의 선주인 조안은 비교적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두 배가 해적의 계단 인근에서 만났다지. 장소가 장소인 만큼, 상대방을 해적으로 오해하기 충분하고도 남을 거야.”

그가 동생에게 말했다. 세르지는 곧바로 퉁명스러운 말투로 반박했다.

“맞는 말이야, 형. 하지만 애초에 헤젤 선박이 그런 곳을 함부로 지나다니면 안 됐어. 이 일대가 다 바르시나 것인 줄 뻔히 알면서 들어온 쪽이 잘못이지.”

“두 사람 모두 일리가 있네. 내일 당사자들과 함께 확실히 이야기해 봐야겠지.”

형제의 대화를 들은 에르난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제법 지쳐 있었다.

* * *

골칫덩어리 헤젤을 제대로 정리해 달라는 호소를 한참 듣고 나서야 부부는 비로소 쉴 수 있었다.

그들이 머물 총독궁은 바다가 훤히 보이는 산등성이에 있었다. 저물어 가는 태양이 수평선에 걸려 빨갛게 물든 모습은 볼만했다.

식사를 마치고, 부부는 거의 기절하듯 침대 위로 쓰러졌다.

아내를 안은 에르난의 팔에는 힘이 없었다. 그의 몸은 피로에 축 늘어져 있었다.

“이제야 사람처럼 잘 수 있겠네요…….”

아, 뱃멀미. 레이테는 남편의 피곤함을 이해했다. 장장 일주일을 시달렸으니 지칠 수밖에 없다.

“에르난, 실은 할 말이 있는데…….”

아내를 바라보는 에르난의 눈은 졸음에 거의 점령당한 듯했다.

“아녜요. 일단 쉬어요. 잘 자요.”

남편의 검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기던 레이테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에르난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가다가 천천히 풀어졌다. 그는 순식간에 잠든 모양이다.

‘고작 이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나?’

첫 만남에서 당신의 주인이 되겠다며 패기만만하던 남자는 어느덧 이렇게 변해 있었다. 신기한 일이다.

레이테는 다시 남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입술 끝에 느껴지는 그의 온기가 좋았다. 레이테는 저도 모르게 에르난의 코에도, 뺨에도 부드럽게 입 맞추기를 반복했다.

곧 그의 입술이 레이테에게 닿았다. 레이테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이미 수도 없이 섞은, 익숙하기 짝이 없는 것임에도 그녀의 가슴이 바짝 조여들었다.

이유가 뭘까? 이미 잠든 사람의 입술을 일방적으로 탐해서?

두근.

심장이 큰 소리로 뛰었다. 레이테 자신의 울림이면서, 동시에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편안히 잠들라는 뜻으로 건넨 가벼운 입맞춤은 어느덧 레이테 자신의 욕망이 되어 있었다.

‘피곤한 사람을 두고 뭐 하는 짓이람…….’

남편은 아내의 것이다.

이미 제 것이거늘, 레이테는 무언가 허전했다.

부족해. 알 수 없는 욕망이 자꾸 커지고 목이 말랐다.

레이테는 그녀를 안은 남편의 팔을 조심히 풀어 몸을 일으켰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천천히 에르난의 위에 올라탔다.

단단하고 듬직한 몸이 편안히 이완되어 있다. 안기면 따뜻할 것 같고, 실제로도 그랬다.

천천히 몸을 숙인 레이테는 에르난과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살짝 마른 그의 입술을 자신이 촉촉이 적셔 줄 수 있어서 기뻤다. 별것 아닌데도, 부드러워진 그의 입술은 레이테에게 크나큰 충족감을 주었다.

살짝 벌어진 에르난의 이와 이 사이로 레이테는 혀를 스르륵 밀어 넣었다.

격렬하게 엉켜오기 바빴던 남편의 혀는 입안에 다소곳이 누워 있다. 레이테는 그것을 핥고, 감아올리고, 빨아들였다.

“하아, 후우……, 에르난.”

한참 남편의 입 안을 탐하던 레이테는 몸을 일으키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없다. 레이테는 가쁜 숨을 몰아쉬다 다시 몸을 숙였다. 이번에는 입술을 가볍게 스칠 뿐이다. 대신 레이테는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따뜻한 살결이 그녀를 자극했다.

레이테는 남편의 살을 더 느끼고 싶었다.

자는 사람을 어디까지 희롱할 거냐며, 머리가 자꾸 레이테를 꾸짖었다. 그러나 욕망에 점령당한 그녀는 꾸짖음을 무시했다.

레이테는 남편의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려 했다.

쿵쿵거리며 뛰는 에르난의 심장을 느끼지 않았다면.

“에르……, 아.”

손이 먼저 멈추고, 남편을 부르던 입이 살짝 늦게 멈췄다. 레이테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설마 자지 않았던 거야?’

레이테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당황한 몸은 움직이질 않았다.

본능이 레이테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남편이 모르게 하는 행위였어야 했다.

왜? 왜 몰라야 하지? 그녀의 머리 한구석에서 의문이 차올랐다. 그러나 급한 일은 따로 있었다.

“에르난……?”

레이테는 조심스럽게 남편을 불렀다. 짧은 침묵 동안 바짝 긴장한 그녀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에르난은 어떤 답도 하지 않았다.

‘자는 걸까? 그러면 쿵쿵 뛰는 소리는 뭐였지? 자면서도 심장이 그렇게 뛸 수 있나? 아니면 내 착각인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숱한 의문은 레이테의 밖으로 넘쳐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면 아예 에르난을 깨워 버릴지도 모른다. 레이테는 허둥지둥 그의 위에서 내려와 옆에 누웠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난…….’

자야지. 자야겠다. 레이테는 남편을 꼭 끌어안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가슴이 요동쳤다. 제발 진정하라며 레이테는 마음속으로 외쳤지만. 쿵쿵거리는 떨림은 쉬이 잦아들지 못했다.

이를 악물고, 머릿속으로 온갖 기도문을 외우는 짓까지 하고서야 그녀는 비로소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에르난의 팔이 아내를 감싸 안았다.

“레이테…….”

눈을 뜬 에르난은 곤히 잠든 아내를 바라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051

대륙에서 맞는 아침이라고 이전과 다른 점은 없었다.

짹짹 지저귀는 새소리에 멀리서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섞여들었다. 겨울이 다가오는 새벽의 공기는 상당히 쌀쌀해, 자연스레 따뜻한 곳으로 몸을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배우자의 몸 같은.

찬바람을 막고자 커튼을 친 침대 안은 바깥과 다른 짙은 열기에 가득 차 있었다.

평소보다 일찍 눈을 뜬 침대의 두 주인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몸을 얽었다. 이른 새벽부터 부드러운 살이 맞부딪치고 체액이 끈적하게 뒤섞였다.

쪽. 에르난이 아내의 다리를 잡아 들고 입을 맞췄다.

허벅지 뒤쪽에 닿는 간질간질한 자극에 레이테는 발끝을 부르르 떨었다. 에르난이 피식 웃으며, 부드러운 살을 살짝 깨물었다.

“앗!”

레이테가 짧게 소리 질렀다. 에르난은 아내의 다리를 더 들고, 손을 안쪽으로 미끄러뜨렸다.

“당신을 좀 더 허락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으음, 해가 뜰 것 같은데요.”

“이 섬은 반도보다 해 뜨는 시각이 빠릅니다. 동쪽이잖아요. 그러니 시간은 많이 남았습니다.”

“아하…….”

아내의 반응을 긍정이라 판단했는지, 에르난은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려 했다. 그러나 레이테는 다리를 오므리며 팔로 그를 밀어냈다.

“시간이 남았다니 다행이에요. 할 이야기가 있어요.”

“이야기라니? 아, 어제 자기 전에도 그런 말을 했지요.”

에르난은 아내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놓고 위에서 몸을 포개며 덮쳐 왔다.

“네. 저어, 그런데 에르난. 저기……, 저기요? 이런 상태에서 말해도 되나요?”

“네, 이대로 이야기하십시오.”

“너무 가깝지 않나요…….”

아내가 난감해하자 에르난은 그대로 고개를 숙여 진하게 키스하고 태연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가깝네요.”

나른하게 풀린 그의 까만 눈이 깊었다. 레이테는 손을 들어 코앞에 다가온 남편의 눈가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검은색이 이렇게 따스해 보일 수도 있구나.’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에 부담스러운 거리다. 하지만 그녀는 시선을 피하거나 몸을 떨어뜨리고 싶지 않아졌다.

“어제 일에 대해서예요.”

레이테는 자신이 어떻게 엔히크 왕자의 정체를 파악했는지 설명했다.

“……이게 제가 아는 전부예요. 그리고 대주교는 팀파노와 심발로에게, 여왕에게‘만’ 보고하라 명했죠.”

“뭐, 대단히 시스로네스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에르난이 한숨 쉬었다. 작게 내쉰 숨이었지만 레이테는 숨결이 자신의 뺨에 닿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제게 밝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보아하니, 시스로네스는 당신이 헤젤에 대한 정보를 독점해야 저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고 여기나 본데.”

“그는 내게 보고만 하라 했지, 그다음을 말하지는 않았어요. 시스로네스는 내 조언자예요. 그는 내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할 수 없어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흥. 에르난은 긍정의 뜻으로 가볍게 코웃음 쳤다.

“대주교는 저에게 정보를 제공할 뿐, 판단은 ‘여왕’인 제가 해요.”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나의 여왕.”

에르난은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젖은 두 입술은 서로를 잠시 탐하다 다시 떨어졌다.

“당신은 제 동료고, 저는 당신을 믿기로 했죠. 그러니 우리의 공통 목적과 관련 있는 이 정보를 숨길 이유는 없었어요. 하지만……, 숨기고 말았네요.”

레이테는 끝내 눈을 감고 남편의 시선을 피했다. 도저히 그를 바라보며 말할 수 없었다.

막상 말을 꺼내니 생각 이상으로 부끄러웠다. 지난밤의 욕망,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홀린 듯 남편에게 안긴 자신이 한심했다. 당장 사과부터 했어야 옳았는데.

“미안해요. 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망설였어요. 항구에 도착하고, 그 뒤로는 뭐라 이야기할 틈도 없었지요. 결국 당신을 난감하게, 또 위험에 처하게 했어요…….”

한심해. 레이테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어째서인지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곧 레이테의 눈가에 에르난의 입술이 살포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가 말했다.

“부인, 언제부터 그렇게 소심해지셨습니까?”

“네?”

레이테는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시도 때도 없이 뻔뻔하게 계약서를 들이밀고, 할 말 다 하고, 당신 주장 밀어붙이고……, 뭐 이런 분 아니었습니까?”

에르난은 억울한 듯 투덜댔다. 눈물이 일렁이던 레이테의 눈이 흔들림을 딱 멈추었다.

“저를 얼마나 무례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거죠…….”

“무례하다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당신은 처음부터 제 상황 같은 것은 배려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입장이 언제나 먼저였던지라, 지금 모습은 조금…… 어색하달까, 새롭달까.”

레이테는 할 말을 잃었다. 남편에게 사과하려고 말을 걸었는데,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버렸다.

‘이럴 때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어색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아내에게 에르난은 싱글싱글 웃어 보였다.

미움받지 않는구나. 레이테는 기뻤다.

‘다행……, 어?’

이상했다. 자신이 언제부터 남편의 반응을 이렇게 신경 썼나? 레이테의 기분을 예민하게 살피던 남편과 같지 않나.

에르난이 깊게 키스해 왔다. 레이테는 그를 안으며 받아들였다.

그녀는 변해 있었다. 진득하게 엉킨 혀가 달콤하고 짜릿했다. 하지만 지금 기분은, 육체가 느끼는 쾌감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안 되겠습니다. 당신을 더 안고 싶어요.”

에르난이 아내를 꽉 껴안았다.

“왜요?”

“왜긴 왭니까. 내 아내가 나를 이만큼 믿고 솔직하게 말해 준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 참을 수가 없어서요.”

“제가 그렇게 불신의 상징이었던가요…….”

“음, 그런 뜻은 아니고.”

레이테의 다리를 붙잡은 에르난이 그것을 천천히 벌리며 말했다.

“당신의 몸이야 처음부터 내게 솔직했는데, 이제 당신 마음도 마찬가지이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어 행복합니다.”

“네, 네……?”

레이테가 말을 더듬거렸다. 그러나 남편의 말을 다시 곱씹을 겨를은 없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파고들어 오는 것에 순식간에 정신을 빼앗겼다.

* * *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쾌적했다. 에메랄드빛을 연상시키는 바닷물은 맑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미노리카 항구는 어제보다 더 긴장이 고조되었다.

긴장의 정점은 헤젤의 선박이었다.

갑판에 커다란 탁자가 놓였다. 한쪽에는 바르시나의 섭정 에르난, 그의 아내이자 사크틸라의 여왕 레이테가 앉았다. 부부의 옆으로 미노리카의 총독, 그리고 사건과 관련된 배의 선장들이 자리 잡았다.

그들의 뒤에는 무장한 바르시나 병사가 줄지어 대기했다. 사크틸라의 두 귀족은 탁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반대편에는 헤젤의 왕자 엔히크와 선장, 그리고 선원 몇이 더 있었다.

“왕자,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디 이 자리로 인해 지난했던 교착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협조해 주시지요.”

“물론입니다.”

에르난이 먼저 말하고 엔히크가 답했다.

“먼저, 바르시나의 배와 엮이게 된 경위를 직접 듣고 싶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헤젤 측의 선장이 나섰다.

“저희의 목적은 최대한 빨리 헤젤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최단 거리의 항로로 움직였습니다. 미노리카 섬 서쪽, 해적의 계단이라 불리는 절벽 근방을 지나갈 때 다른 배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그 배가 해적이 아닐까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만약을 생각해 전투 준비를 지시했습니다.”

“상대를 해적으로 인식하기는 우리 또한 마찬가지였지. 어제 증언을 들었소.”

에르난의 말에 바르시나 상선의 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배는 바르시나의 깃발을 올린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 배는 아무 표식이 없었으니, 우리야말로 당신들을 해적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먼저 공격한 쪽은……!”

“예, 제가 먼저 포격을 지시했습니다. 그렇지요. 솔직히 왜 바르시나 기를 보고 해적으로 인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데, 그렇게 판단했으면, 도망치면 될 일 아닙니까? 괜히 교전하다가 왕자께서 봉변을 당하면 안 될 테니까요. 더군다나 이 배는 상선이 아니라서 저희 배보다 훨씬 작고 빠릅니다.”

헤젤의 선장은 이를 악물 뿐, 답을 하지 못했다. 그를 지켜보던 엔히크가 입을 열었다.

“내가 선장에게 귀환을 재촉하는 바람에 일정을 보름 가까이 앞당겼소. 선장은 유능하지만, 급히 구한 대륙인 선원 대다수는 서쪽으로 향하는 뱃길 자체가 처음이라 하오.”

“전하……, 제가 마저 말하겠습니다. 수로 안내인마저 당황해 허둥지둥하는 사이 당신들의 배가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희 측의 공격은 정당방위입니다.”

선장은 부끄러움에 낯빛을 붉히면서도 정당방위라는 말을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강조했다.

“이 주변은 해적의 출몰이 잦은지라 바르시나 함선이 꾸준히 주변을 순찰하는데, 몰랐소?”

총독이 비꼬았다. 헤젤 측이 말을 잇지 못하자, 다른 이가 나섰다. 헤젤의 배를 나포한 순찰선의 함장이었다.

“각하의 말씀대로입니다. 저희는 현장을 발견했을 때 당연히 상선과 해적의 교전으로 판단해 빠르게 공격 태세에 들어갔습니다. 포격을 몇 번 주고받다가 바로 항복 받았기에 유혈 사태는 없었습니다. 사망자 또한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것만은 반드시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해였다 해도 왕족이 탄 배를 공격해 나포해 버렸으니, 함장에게는 상당히 부담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거듭 죽은 사람이 없음을 강조했다.

에르난을 제외한 바르시나인들이 공격적으로 따지는 사이, 레이테는 계속 그들의 말을 듣기만 했다. 사크틸라는 당사자가 아니니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을 지켜본 끝에, 그녀는 자신의 역할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공격 자체는 오해였다. 사태를 빠르게 파악했다면 한 달 가까이 시간을 끌면서 적대감만 높아질 필요도 없었다.

이미 감정이 지나치게 쌓인 탓일까? 바르시나 측은 이성적인 대화를 나누기에 상당히 무리가 있어 보였다.

따라서 바르시나인이 아닌 레이테가 둘의 사이를 조절하는 데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왕자, 부왕에게까지 알리지 않고 대륙에 가신 이유가 뭔가요?”

레이테가 물었다. 엔히크는 얼굴을 굳혔다. 레이테는 그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 상황에서 비밀이니 답할 수 없다는 식의 답은 아무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왕자께서 정체를 숨겼기에 이 불편한 일이 생겼으니까요.”

“……공부를 하러 갔습니다. 대륙의 선진 문물을 직접 겪으며 배우고 싶었지요. 다른 목적은 없습니다.”

레이테가 받았던 정보에 따르면 엔히크는 단순한 학생치고 행동이 꽤 수상했다. 세르지의 증언과 조합해 볼 때, 왕자는 한가하게 신학이나 철학 따위를 공부하는 대신 실용 기술에 더 관심을 보였다.

‘실용 기술이라면 단연 무기지.’

레이테는 탁자 너머를 힐끗 응시했다. 대포가 몇 개 보였다. 사크틸라에서 보았던 문제의 물건은 아니지만, 반도에서 흔히 보는 것과는 눈에 띄게 생김새가 달랐다.

애초에 헤젤은 왜 대화를 거부하며 일을 키웠는가? 아마도 그 답은 엔히크 왕자에게 있을 터였다.

엔히크는 흠칫 놀라더니 슬그머니 여왕의 시선을 피했다.

“돈 세르지를 기억하시나요? 이 배에 오기 직전에 그가 더 알려주었는데, 몇 년은 더 공부하고 싶다 말씀하셨다고요.”

우습게도 이는 레이테가 외출 준비를 하면서 카테리나를 통해 들은 이야기였다.

세르지는 카테리나와 대화할 기회를 만들고 싶어 안달인지, 일부러 그녀를 통해 여왕에게 정보를 전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귀국을 택하셨나요? 항해 일정을 무리하게 잡을 만큼 급했는데, 오히려 이곳에 붙잡혀 시간을 더 버리는 셈이 되어 버렸잖아요.”

레이테는 엔히크가 정직하게 답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대신 왕자의 반응을 보며, 레이테는 그가 말하지 못할 이유를 확신할 수 있었다.

바로 레이테와 에르난 때문일 테니까.?

#052

이베로 반도의 서쪽 끝에 위치한 헤젤에서 동쪽 대륙까지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크틸라 앞바다를 지나쳐야 한다. 원래 사크틸라는 그 길을 상당히 철저하게 통제했으나, 탐브레는 이에 무관심했다.

그렇기에 엔히크는 몰래 대륙까지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크틸라의 정세가 바뀌었다. 반역자는 죽었고 여왕이 권력을 잡았다. 사크틸라 남부도 질서를 되찾기 시작하고, 바닷길의 감시도 재개될 기세였다.

더군다나 여왕의 남편은 바르시나 사람이다. 헤젤 입장에서는 동쪽 해로가 꽉 막혀 버리고 말았다.

이런 고립을 피하고자 헤젤은 늙은 왕의 재혼이라는 무리수까지 두었을 것이다. 물론 그 계획은 실패했다. 레이테는 절대로 그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귀국길이 완전히 막히기 전에 돌아가려던 거겠지.’

이런 사정을 엔히크가 직접 말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맥락을 유추하기에는 충분했다.

“……여왕 폐하의 말씀대로, 저는 시간을 더 낭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른 의도 없이 오로지 고국으로 돌아가려 했을 뿐인데 말이지요.”

질문에 맞는 답이 아니다. 여왕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엔히크는 이미 나온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리고 선장이 인정했듯이, 저희는 공격을 받은 피해자입니다.”

“전하, 빨리 해명하셨어야지요! 오해를 길게 끈 것에 정말로 아무 책임이 없습니까?”

“선장!”

상선의 선장이 발끈해 외치자 에르난이 호통쳤다.

상대는 왕족이다. 일개 상인이 함부로 대들 상대가 아니다. 에르난이 눈치를 주자 그는 마지못해 엔히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전하. 작은 일도 시간을 오래 끌면 묵은 때가 쌓이는 법입니다. 더군다나 헤젤은 전적이 있던지라 저희로서는 예민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 폐하께서도 직접 겪으셨던 일이지요. 지난날 미노리카의 총독으로서 직접 해적을 토벌하지 않으셨습니까?”

에르난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선장은 끝까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기어이 할 말을 다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쌓인 앙심에 기존에 존재했던 반 헤젤 정서가 더해지며 선장의 저런 태도를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은 먼저 공격한 바르시나의 책임이 될 가능성이 더 컸다. 상대가 왕족이니 더더욱.

‘경솔하네.’

레이테는 힐끔 상선의 선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서도 눈을 부릅떠 맞은편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에르난은 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화를 가라앉히는 모습이었다. 레이테는 탁자 밑으로 손을 뻗어 그의 등허리를 가볍게 토닥여 준 다음, 엔히크를 향해 말했다.

“이미 아시겠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 대화했더라면 가벼운 충돌 정도로 지나칠 수도 있었어요. 오히려 그편이 서로의 이해관계가 더 맞았을지도 모르지요.”

책임은 선제공격한 바르시나 쪽에 있다. 그러나 왕자가 정체를 숨기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대가로 협상할 수도 있었다. 간단한 보상만으로도 서로 모른 체하며 끝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서로 마주 보기까지 한 달이나 걸렸기에, 감정이 더 엉키게 된 거예요.”

당신의 판단 착오 때문에.

레이테는 이 말은 입 밖으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읽은 엔히크가 침울한 낯빛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왕자, 여전히 고국으로의 귀환 외 요구사항은 없습니까?”

에르난이 물었다. 공격에 대한 보상을 묻는 것이다.

“없습니다.”

“그렇군요. 확실히 왕자께서는 빨리 귀국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국왕께서 아드님을 많이 기다릴 겁니다. 오랫동안 이곳에 계셨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셔야겠지요.”

“폐하! 그냥 보내시겠다고요?”

에르난의 말에 상선의 선장이 외쳤다. 바르시나어였지만, 엔히크도 그 뉘앙스를 충분히 짐작하고 남을 만큼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 엔히크는 이를 악물며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길만 막지 말아 주십시오. 어제 두 분 폐하를 처음 뵈었을 때도 말씀드렸지요. 저는 돌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그 외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에르난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공격은 양측의 오해에 따른 불상사였습니다. 유감을 표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단호한 에르난의 목소리에는 이견을 원치 않는다는 뜻이 또렷했다.

엔히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장에서야 귀환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하지만 선제공격을 받고 억류까지 당했는데도 제대로 된 보상도 사과도 없이 돌아가야 한다니 굴욕적이기 짝이 없다.

“전하의 귀환에 저희가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사실상 감시지만, 엔히크는 달리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파리해진 안색으로 왕자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전하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제안 드리겠습니다. 저쪽에 서 계신 두 분은 팀파노 후작과 심발로 백작으로, 사크틸라 남부에 영지를 둔 귀족입니다. 돌아가는 길이 전하와 같으니 함께 가시면 어떻겠습니까?”

‘아……!’

레이테는 감탄했다. 생각지도 않은 좋은 방법이다.

엔히크는 에르난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사크틸라 귀족과 동행한다면 엔히크가 염려하던 사크틸라 앞바다의 통과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긴 항해 기간 동안 팀파노와 심발로 형제는 왕자를 관찰할 수 있다. 친분을 쌓아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사크틸라를 거쳐 헤젤로 들어가는 밀거래 경로라든가.

무엇보다 사건 해결에 사크틸라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확실히 부각할 수 있다.

여왕이 파악한 정보를 기반으로 대화를 이끌어 냈고, 마무리는 사크틸라 귀족의 힘을 빌린다. 바르시나에서 레이테의 입지를 강화할 좋은 명분이다.

레이테 개인으로서도 남편과 정말로 함께 일했다는 뿌듯함이 한가득 차올랐다. 이야말로 부부의 협력으로 만든 결과다.

툭툭. 에르난이 레이테의 무릎을 손으로 두들겼다. 레이테가 남편을 바라보자, 그는 아내를 향해 씩 웃었다.

‘아무리 기뻐도 속이 타는 당사자를 앞에 두고 이러지는 말라고요.’

레이테는 웃음을 참으며, 남편의 손을 꼭 쥐고 악수하듯 가볍게 흔들었다.

* * *

술잔 세 개가 경쾌하게 부딪쳤다.

레이테는 기분 좋게 포도주를 들이켰다. 떫은맛이 강해 그녀가 좋아하는 부류는 아니지만 훌륭한 술이었다. 미노리카 섬의 포도주는 고품질로 유명하다더니, 과연 정말이었다.

술을 깔끔하게 다 마신 레이테는 잔을 내려놓고 팀파노와 심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돌아가는 동안 경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까 들었으니 다 아시겠지요?”

여왕의 물음에 두 귀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왕자의 귀국이 급했다지만, 정말 몸만 돌아갈 생각은 아니었을 거예요. 그렇게나 기술에 관심을 보였던 사람이 맨손으로 귀환할 리가 없지요. 당장 갑판 위에 있던 대포만 하더라도, 급히 가려는 배치고 과한 무장으로 보였어요.”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설마 그런 물건을 버리고 헤젤로 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왕자는, 아니 적어도 그 선장 같은 자는 분명히 무언가 알고 있을 겁니다.”

“철저히 조사하세요.”

“예! 폐하.”

두 사람은 우렁차게 답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 폐하를 돕고자 이곳까지 왔습니다만, 이렇게까지 큰일을 맡을 줄은 몰랐습니다. 돈 에르난은 역시 대단하달까요.”

심발로가 말했다. 그는 에르난과 함께 반역자의 토벌에도 참가했다. 심발로의 환한 웃음에는 이 자리에 없는 에르난을 향한 신뢰와 존경으로 가득했다.

엔히크와의 대화를 마치고, 세 사람은 총독궁으로 돌아왔다. 에르난은 거래소에 다녀오겠다며 아내만 먼저 돌려보냈다.

남편은 확실한 보복을 원하는 바르시나인을 달래러 갔다.

* * *

“책임지겠다면 말리지는 않네. 다만 왕실이 도와줄 수는 없어. 배상금은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마련하도록.

헤젤까지 직접 가서 사과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러면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게 배에 깃발을 제대로 꽂고 다니라고 필히 간언해 주게나. 그 깃발쯤은 내 돈으로 마련해 줄 수도 있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강하게 빈정거리고 싶었다. 하지만 못마땅한 시선으로 에르난을 바라보는 이들은 모두 바르시나인이다. 그가 어떻게든 끌어안아야 하는 신민이었다.

가장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이는 상선의 선장이었다. 책임을 확실히 따지자면 그의 잘못이 명백한데도 저런 태도였다.

긴 시간 동안 미움이 쌓여 지쳐 버린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엔히크와의 협상 자리에서 그는 과했다.

헤젤을 짓밟고 싶은 마음뿐인 태도에 에르난은 솔직히 짜증이 났다.

“…….”

선장은 말이 없었다. 감정은 상할지언정, 아직 판단력은 남아 있는 듯했다.

에르난은 작게 한숨을 쉰 다음,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마음이야 아예 저 배에 불을 지르고 싶지. 하지만 어쩌겠나. 답답하겠지만 실리를 생각하게. 고작 이런 일로 자네를 헤젤에게 먹이로 던져줄 수는 없어.”

선장은 고개를 떨궜다.

“배를 몰고, 장사를 하다 보면 별별 일을 다 겪는다지 않나. 지나가는 일의 하나로 생각하게나. 자네의 실수는 만사에 철저했기에 나왔을 뿐이야.”

“송구하옵니다, 폐하. 내내 무례하기 짝이 없었음에도 격려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기운 빠진 목소리로 선장이 말했다. 그래도 표정은 한결 편해 보였다.

“일을 더 키우지 않는 편이 낫네. 괜히 왕자를 오래 붙잡아 두었다가 헤젤이 사태를 파악하면 어떤 트집을 잡을지 몰라. 이쯤에서 보내 주는 편이 옳아. 상대는 왕자이지 않나. 잘못 건드렸다가는 그야말로 전쟁인데, 자네는 평화로운 바다를 오가며 장사하고 싶겠지?”

“그렇습니다, 폐하.”

“나 또한 우리의 바다가 평화롭기를 바란다네.”

선장은 고개를 들고 에르난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감격한 듯 일렁였다.

“그리고 여러분이 명심해야 하는 점이 있소.”

에르난은 몸을 돌려 거래소의 회의실 전체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사크틸라의 정보를 토대로 엔히크 왕자의 정체를 밝혔습니다. 덕택에 바르시나가 우위에 서서 별 탈 없이 사태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지요. 사실상 나는 아내가 만들어 준 판에 말만 올린 셈인데, 여러분도 직접 봤으니 설마 부정하지는 않겠지요?”

* * *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에 모였다. 창칼로 무장한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헤젤의 왕자 엔히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엔히크 왕자, 잘 오셨습니다.”

에르난이 그를 맞이했다. 화려한 문양에 모피를 덧댄 외투를 입고 커다란 사슬 목걸이를 찬 에르난은 세련미 넘치면서도 위풍당당했다.

“아내와 함께 마중 나오고 싶었는데, 준비가 영 늦더군요. 저만 나와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여왕께서 얼마나 아름다우실지 기대되는군요.”

“얼마든지 기대하셔도 됩니다. 무조건 그 이상일 테니.”

엔히크의 귀환은 결정되었으나, 실제 출발은 며칠 뒤다. 그래서 에르난은 왕자를 총독궁에서 열리는 만찬회에 초대했다.

“배에만 계시느라 많이 답답하셨지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복잡한 일을 피하고자 배에 머물렀던 엔히크지만, 에르난의 초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약 한 달 만에 내키지 않는 육지로의 걸음을 하게 되었다.

“만찬까지 시간이 꽤 넉넉히 남았으니, 잠시 산책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총독궁 바로 뒤에 경치가 빼어난 곳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에르난이 앞장서고, 엔히크가 살짝 뒤에서 그를 따랐다. 다른 호위는 없었다.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자 반쯤 무너진 석조 극장이 나타났다.

“이 섬에도 옛 제국의 유적이 있을 줄이야. 놀랍군요.”

“이쪽으로 오시지요.”

에르난은 무너진 벽 쪽으로 엔히크를 안내했다. 바로 아래에 총독궁이, 그리고 멀리 항구와 바다가 훤히 보였다.

“굉장한 절경이지요? 떠나시기 전에 이 모습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냥 갔으면 아쉬울 뻔했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던 항구도 멀리에서 보니 아름답기만 했다. 수평선에 걸린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엔히크, 혹시 두어 달 전 당신의 조카인 리리우 공주가 사크틸라에 다녀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053

“리리우가? 몰랐습니다. 그때면 한창…….”

“한창 반역자를 토벌하던 때지요. 아, 공주는 어떤 불상사도 없이 무사히 헤젤로 돌아갔습니다.”

걱정으로 얼굴을 굳히는 엔히크를 보며 에르난이 말했다. 무사하다마다, 아주 해맑게 돌아갔다.

“공주께서는 저와 아내가 헤젤에 한 번 와 주기를 바라더군요. 이참에 아예 두 나라의 정상이 직접 만나 평화를 논의하면 어떻겠습니까? 이번 일 같은 소모전이 더는 일어나지 않도록, 상생의 길을 모색해 봅시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산책을 제안했던 모양이다. 엔히크는 고개를 돌려 에르난을 바라보았다.

석양 탓일까? 그의 눈이 붉어 보였다. 눈은 오싹할 만큼 자신만만하게 번득였다.

“잠깐. 폐하, 두 나라라고 하셨습니까?”

“부부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입니다.”

“……그렇군요.”

하나가 될 것이다. 에르난은 레이테와 결혼을 결심했을 때부터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마찬가지다.

아내를 대하는 그의 마음가짐만 변했을 뿐이다.

처음에는 그녀의 것을 모조리 빼앗을 셈이었으나 지금은 다르다. 그녀와 완벽하게 하나가 될 기대에 에르난은 부풀어 있었다. 몸도, 영토도, 그리고 마음도.

곧바로 원하는 합일을 이룰 수는 없겠지. 그러나 에르난은 이번 일로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레이테는 점점 자신을 받아들인다. 두 사람은 꽤 그럴듯하게 협동하기까지 했다. 계기를 제공한 엔히크에게 고마울 정도다.

마침 언덕 바로 아래에 아내가 보였다.

화려한 드레스 뒤로 은발이 부드럽게 드리워졌다. 에르난의 얼굴에 웃음이 절로 그려졌다.

“폐하.”

엔히크가 그의 정신을 깨웠다.

“수년 전, 폐하께서는 제 형님을 만나셨지요?”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은 장난 수준일 만큼, 당시 분위기는 험악했다.

헤젤 선박은 진짜 해적이나 마찬가지였고, 에르난이 지휘하는 바르시나 해군이 그들을 토벌했다.

잔당을 쫓으며 무려 헤젤 근처까지 갔던 에르난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근처의 헤젤령 섬에서 당시 왕위 계승자와 만났다. 리리우 공주도 그때 처음 보았다.

“당시 폐하와 리리우 사이에 혼담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말은 나왔으나, 실질적인 논의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에르난의 목소리가 조금 경직되었다. 지난 일, 그것도 하필 결혼 문제를 말하니 썩 유쾌하지 않았다.

“다른 분과 결혼했다고 책망하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폐하께서 헤젤과 바르시나 사이의 평화에 관심을 보이시니 잠깐 떠올랐습니다. 아무래도 결혼 동맹이 정공법이지 않습니까.”

“지나간 일입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훨씬 쉽고 단순한 길을 놓쳐 살짝 아쉬울 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과거 일이라 해도, 다른 사람과 결혼했으면 좋았겠더라는 소리를 부인께서 계실 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잘 아시는군요.”

에르난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실례가 되었군요. 죄송합니다.”

“제 아내는 레이테입니다. 그 선택은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또한 엄밀히 따지자면 제가 아내를 택한 것이 아니라, 아내가 저를 택했지요. 저는 그녀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실에 무척 만족합니다.”

엔히크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하는 에르난의 눈이 새까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동시에 분노하듯 타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아까 보았던 붉은 것처럼. 엔히크는 저도 모르게 긴장해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바르시나가 저와 헤젤의 결합을 용납했겠습니까? 지난 한 달간 보셔서 잘 아시겠지요.”

사크틸라를 향한 바르시나인의 감정이 막연한 두려움이라면, 헤젤을 향한 감정은 더 직접적인 적대감이다. 에르난은 차게 웃었다.

“그렇다고 사크틸라와의 결혼은 순순히 받아들였습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엔히크의 말에 에르난의 얼굴이 굳었다.

“솔직히, 폐하로서는 제 아버지이신 헤젤의 왕보다 사크틸라의 여왕이 훨씬 더 다루기 쉽지 않습니까? 잡아먹히지 않을, 지배하기 쉬운 상대.”

* * *

대륙에서 유행한다는 드레스는 끈으로 묶을 곳이 무척이나 많았다. 레이테는 초조해졌다.

“조금 늦은 것 같은데…….”

“폐하, 조금만 더요.”

카테리나가 쩔쩔맸다. 하긴, 엔히크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단장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남편도 엔히크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레이테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돈 세르지, 에르난이 어디에 갔는지 아시나요?”

답은 없었다. 세르지는 여왕의 뒤에 선 카테리나를 홀린 듯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돈 세르지!”

레이테가 날카롭게 외치고서야 세르지는 흠칫 놀랐다가 여왕에게 답했다.

“아, 폐하께서는 그……, 총독궁 바로 뒤편에 야외극장 유적이 있는데 그곳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알겠어요. 카테리나, 저와 함께 유적지를 보러 갈까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레이테는 카테리나의 손을 휙 잡고 빠르게 걸었다. 궁 밖으로 나온 뒤에야 레이테는 멈춰 서고 카테리나의 손을 놓았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거칠었나요?”

“아녜요, 전혀! 오히려 폐하께서 저를 데리고 나와주셔서 감사해요.”

카테리나는 난처한 듯 말했으나 그녀의 얼굴에는 다행이라는 기색이 감출 수 없이 떠 있었다.

“이쪽으로 올라가면 바로 극장 유적이 나온다고 들었어요. 마침 이 길이 가장 올라가기도 편하다고 해요.”

카테리나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도 바로 보이시죠? 잘 다녀오세요!”

카테리나가 빙긋 웃으며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여왕은 수행원과 함께 다녀야 한다. 하지만 카테리나는 빠르게 레이테의 마음을 파악한 모양이다.

레이테는 에르난을 만나고 싶었다. 단둘이.

‘칭찬해 줘야지.’

엔히크를 돌려보내기로 결정한 에르난은 사크틸라 귀족을 동행시키기로 했다. 멋진 고안이었다.

남편은 어서 자기를 칭찬해 달라며 아내를 툭툭 건드렸지만, 공석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레이테는 내내 참았다.

‘귀여웠단 말이야.’

레이테는 피식피식 웃었다.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남편이지만, 어떻게든 손을 쭉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줘야겠다. 그리고 키스해 줘야지.

에르난은 레이테의 입맞춤이라면 그야말로 무조건 좋아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사실도 귀여웠다. 그가 좋아하는 것을 듬뿍 해 줘야겠다.

‘칭찬치고는 과한가?’

작은 의문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지금 그녀의 감정을 칭찬으로 표출하는 것이 적절한지도 의문이 들었다. 어쩐지 자신이 지나치게 들뜬 것 같았다.

지난밤의 욕망도, 아침의 안심도. 레이테가 자연스럽게 느낀 감정은 따져보면 모두 이상할 만큼 과했다.

‘……뭐 어때, 좋으면 좋은 거지.’

기쁨은 기쁨이다. 실질적인 이득을 따져 보아도, 개인적인 만족을 생각해도 최고로 기분이 좋았다.

카테리나의 말대로, 유적은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자락을 올려 잡고 레이테는 경쾌하게 걸었다. 남편에게 무슨 말을 좋을지 생각하다 보니 전혀 힘들지 않았다. 애초에 길 자체도 험하지 않다.

에르난은 혼자가 아니었다. 엔히크로 보이는 마른 남자가 그의 옆에 있었다.

칭찬은 아무래도 나중에 해 줘야 하나 보다. 아쉬워라. 레이테는 작게 한숨을 쉬고 두 사람에게 다가가려 했다.

“솔직히, 폐하로서는 제 아버지이신 헤젤의 왕보다 사크틸라의 여왕이 훨씬 더 다루기 쉽지 않습니까? 잡아먹히지 않을, 지배하기 쉬운 상대.”

비음이 도드라지는 헤젤식 억양의 사크틸라어가 레이테의 귀에 꽂혔다.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

“그 말씀이야말로 실례입니다만.”

살기등등한 에르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 판단을 마음대로 분석하지 마십시오. 레이테는 제 아내입니다. 제 가장 믿음직한 조력자이자 동료란 말입니다.”

에르난의 분노는 멀리서도 잘 들렸다.

그는 엔히크의 말을 철저하게 부정했다. 아내를 향한 확실한 긍정과 신뢰를 말했다.

그런데도 레이테의 들뜬 가슴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으, 으흑…….”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건만 입 밖으로 무언가가 나오려 했다. 레이테는 황급히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인기척을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비틀비틀 언덕을 걸어 내려왔다. 발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윽!”

레이테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나무를 붙잡아 쓰러지는 것만은 면할 수 있었다.

주저앉고 싶었다. 그러나 레이테는 간신히 다리에 힘을 주며 버티고,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온몸이 떨렸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어째서? 왜? 엔히크의 말이 진실이라서?

새삼스러운 말도 아니었다. 에르난은 당연히 레이테가 가장 쓸모 있기에 그녀와의 결혼을 결정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동등해지자며 남편을 압박하는 그 굴욕과도 같던 계약을 어떻게 받아들였겠는가?

“계약……. 맞아, 계약.”

레이테는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계약을 대하는 남편의 태도는 변했다. 계약이 있어서 기쁘다는 말까지 했다. 레이테는 당황했지만 그 변화를 금방 받아들였다.

아내. 조력자. 동료……, 동료.

레이테 자신의 입으로 했던 말이었다. 부부는 이제 서로를 그렇게 칭할 수 있다. 그녀는 진심으로 기뻤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왜 이러지? 왜 이상하지?’

이유를 알 수 없으면서도 알 것 같았다. 에르난은 레이테의 동료가 맞았다. 하지만 단순히 동료일 뿐만은 아니었다.

무언가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오려 했다. 레이테는 주먹 쥔 손으로 가슴을 치며 그것을 억눌렀다. 하지만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차라리 목이라도 졸라 틀어막고 싶다. 레이테는 다른 손으로 자신의 목을 붙잡으려 했다.

손에 목걸이가 닿았다. 에르난이 결혼을 약속하는 선물로 그녀에게 보냈던 목걸이였다.

이 목걸이를 받았을 때, 레이테는 지나치게 화려한 모습에 기가 질렸다. 또 그것을 보낸 주인을 의심했다.

동시에 그녀의 가슴은 순수한 설렘에 사로잡혔다.

잠깐이었을 뿐이지만, 솔직한 감정은 그랬다.

‘맞아. 내가 왜 감정을 참아야 하지?’

레이테는 자신을 속박하던 손을 놓았다. 막던 것이 사라지자 감정은 단숨에 바깥으로 터져 나왔다.

“에르난…….”

그녀의 손은 다시 가슴을 움켜쥐어야 했다. 아까와는 다른 이유였다. 가슴이 아팠다. 쓰리고 찢어질 듯 아팠다.

레이테는 여왕이 되기 위해 태어났고 여왕으로 살아왔다. 어떤 처지에서도 그녀는 여왕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굴욕과 핍박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고 지금에 이르렀다.

작은 생활습관부터 사고방식과 인간관계까지, 레이테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단 한 가지를 위해 단단히 짜여 있다. 여왕.

에르난이 선택할 수 있던 신붓감 중, 레이테가 가장 다루기 쉬운 상대는 아니었을 터다. 오히려 까다로운 축에 속했으리라.

하지만 다른 요소와 함께 계산해 보았을 때, 가장 가치 있는 존재였을 것이다. 여왕이니까.

여왕이기에 그를 선택했고 그에게 선택받았을 뿐이다. 여왕이기에 손을 잡고 힘을 합쳤을 뿐이다.

모든 관계의 이유는 오로지 ‘여왕’에 있다.

‘그게 전부야? 우리는 부부잖아. 부부는……, 아.’

레이테는 자신이 남편에게 해 주려던 칭찬을 비롯한 과하게 넘쳐나는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녀는 사랑을 주고 싶었다.

“윽……, 흐윽.”

여왕은 결국 주저앉았다.

한번 깨닫는 순간, 견고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은 그녀의 머리를 지배했다.

그를 사랑해.

그에게 사랑받고 싶어.

레이테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섬세한 드레스가 흙이 묻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치맛단 끝이 조금 찢어지기까지 했다.

이런 식으로 옷을 망가뜨리기는 처음이라, 레이테는 자신의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추하다. 여왕은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레이테가 여왕이 아니라면 그녀의 존재 이유가 없다. 또한 에르난의 곁에 있을 필요마저 사라지고 만다.

에르난과 부부로 지내기 위해서라도 레이테는 여왕이어야만 한다.?

#054

여왕은 억지로 걸었다. 어서 처소로 돌아가 다시 옷을 갖춰 입어야 한다. 그런 다음 제대로, 떳떳한 여왕이자 아내로 남편을 만나자.

하지만 채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레이테의 다리는 힘이 풀렸다.

“윽!”

“폐하!”

발목이 삐끗하며 다시 쓰러지려는 레이테를 옆에서 나타난 손이 붙잡았다.

레이테는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카테리나였다. 그녀는 여왕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레이테는 그녀에게 몸을 기대었다. 그러지 않으면 서 있을 수 없었다.

“카테리나? 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나요……?”

“내려오실 때까지 폐하를 기다리려 했어요. 뭔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 이상해서 찾아와 보니 세상에……, 괜찮으세요?”

“돌아가야 해요. 옷이 엉망이 되었으니 다시 준비해야겠어요.”

기다려 주었다니, 카테리나의 배려가 고마웠다. 레이테는 그녀를 붙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카테리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폐하.”

“카테리나?”

“마음이 아프신 거죠? 울고 계시잖아요.”

뭐? 레이테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그녀는 자신이 우는 줄도 몰랐다.

카테리나는 처음부터 여왕의 눈치를 잘 살폈다. 남편을 만나러 간다던 여왕이 울면서 몸을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며, 대강 상황을 파악했나 보다.

“그, 그건…….”

카테리나는 레이테의 어깨를 안고 천천히 그녀가 선 방향을 바꾸었다. 총독궁이 아니라 에르난이 있는 언덕 쪽이었다.

“저는 두 분 사이의 자세한 일은 몰라요. 하지만 마음이 아프다면, 피하지 말고 직접 말해야 아픔이 나을 거예요. 부부시잖아요. 마음에 담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잖아요.”

시녀와 이런 대화를 나눠도 괜찮나? 레이테의 마음 한편에 의문이 들었다.

그래도 어쩐지 카테리나는 괜찮을 것 같았다. 단순히 여왕을 수행하는 시녀라고만 칭하기에, 그녀는 레이테에게 훨씬 더 편하고 가까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레이테는 문득 떠올렸다. 에르난에게 프란세스크가 있듯, 자신에게 카테리나가 있다면 어떨까?

에르난은 군주라는 그의 입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프란세스크와 사이좋은 친구였다. 레이테는 둘의 관계를 부러워했다.

‘나는 왜 그럴 수 없었을까?’

여왕으로서 살아남는 데에만 너무 오랜 시간을 바쳐 온 탓이다. 자신을 꽉 끌어안고 주변을 경계해야만 했다.

하지만 여왕도 친구를 사귈 수 있다. 여왕도 사랑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있었다.

레이테는 에르난이 자신에게 내밀었던 손을 기억했다. 레이테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

여왕은 손을 잡을 줄 아는 사람이다.

“맞아요. 아파요. 아프니까…… 그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자신의 아픔은 그를 향한 사랑이다. 깨달아 버린 이상, 그 마음을 잃고 싶지 않았다. 에르난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다.

레이테도, 여왕도 그러기를 원했다.

“좋아요. 그러면 올라가는 길을 도와드릴게요.”

경쾌한 목소리로 카테리나가 말했다. 여왕의 기분을 북돋워 주려 일부러 그런 것일 테다.

“고마워요, 카테리나. 위쪽까지 나를 안내해 줘요.”

레이테는 카테리나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넘어질 뻔할 때 발이 놀랐나 보다. 걸음걸이가 영 불편했다.

극장이 다시 나타났다. 에르난은 아까와 같은 곳에 여전히 엔히크와 함께 있었다.

“고마워요.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가겠어요.”

레이테는 비틀비틀 걸으며 극장으로 들어갔다. 눈앞에 남편이 보이는데, 그에게 다가가는 자신의 움직임은 더뎠다.

차라리 그를 부르자. 답답함을 견디다 못한 레이테는 걸음을 멈추었다.

“에르난!”

그녀는 있는 힘껏 외쳤다. 쩌렁쩌렁하게 그녀의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지나치게 큰 울림에 레이테는 당황했다.

‘아 참, 여기 극장이었지.’

옛사람의 기술은 대단했다. 반쯤 허물어졌는데도 음향이 이렇게 좋을 수 있다니.

뒤를 돌아본 에르난과 엔히크가 깜짝 놀라는 얼굴이 되었다. 레이테의 찢어진 드레스 때문일 것이다.

에르난이 다급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레이테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남편을 향해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발목이 시큰거렸지만 무시했다.

“레이테! 넘어진 겁니까?”

마침내 부부는 마주 섰다. 에르난은 걱정스러운 눈길이었다. 레이테는 남편에게서 눈을 떼고 싶지 않았다.

남편의 옆으로 엔히크가 다가왔다. 지금 그는 방해꾼이다. 레이테는 일단 엔히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왕자 전하, 남편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자리를 비켜 주시겠어요? 제 시녀가 총독궁으로 돌아가는 길을 안내해 드릴 테니 먼저 들어가 계세요.”

숱하게 연마했던 상냥한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말 자체는 무례할 만큼 직설적이었다.

엔히크가 살짝 얼굴을 굳혔다. 레이테는 그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엔히크를 향해 싱긋 웃었다.

당장 사라져 주세요.

그 뜻을 이해했는지, 엔히크는 가볍게 묵례하고 자리를 떠났다. 카테리나가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길을 안내했다. 완전히 사라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레이테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었는데.”

“조금 전이라니요? 제가 보였나요?”

레이테는 화들짝 놀랐다.

“네. 무대 벽이 무너진 저쪽에서 엔히크 왕자와 바다를 바라보며 이야기 중이었습니다만, 고개를 내려 보니 이리 올라오려는 당신이 보이더군요.”

설마 넘어지고 울었던 모습까지 보였을까? 레이테는 당황해 에르난이 눈짓으로 가리킨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윽……!”

“레이테?”

“흣, 발목이…….”

“다쳤습니까? 어서 돌아갑시다.”

“안 돼요!”

레이테가 카랑카랑하게 외쳤다. 레이테를 안아 들려던 에르난이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테는 절뚝거리는 발을 끌며 무대 벽을 향해 다가가 섰다.

레이테는 눈앞 넓게 펼쳐진 붉은 바다에 잠시 넋을 잃었다. 그러나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엔히크와 카테리나가 총독궁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그녀가 넘어졌던 길은 보이지 않았다. 휴우, 레이테는 한숨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레이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당장 돌아가서 치료해야지요.”

에르난은 영문도 모른 채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까만 눈이 살짝 일렁였다.

‘좋아해. 저 눈을 가진 내 남편을 좋아해.’

참을 수 없다. 불안함을 견딜 수 없다. 당장 확인하고 싶다. 레이테는 그의 양팔을 붙잡고 토해내듯 말했다.

“당신, 나 좋아해요?”

묻고야 말았다. 말하고 나니, 이 질문이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에서 던졌던 물음과 동일함을 깨달았다. 그때 남편의 답은, 무섭도록 깔끔한 ‘아니요’였다.

그 일이 떠오르자 레이테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실은 귀도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도로 뜰 수밖에 없었다.

“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남편이 답했기 때문이었다.

“어, 어……, 그렇군요. 아, 네…….”

지나치게 명료한 답은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레이테는 말을 더듬었다. 바보 같은 반응인 줄은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상황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방금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했어?’

그녀가 얼빠진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이번에는 에르난이 그녀의 양팔을 붙잡았다.

“그러면 당신은?”

레이테와 다르게, 에르난은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음절 하나하나 확실하게 레이테의 귀에 닿도록.

“대답해 주십시오. 당신도 나를 사랑합니까?”

레이테는 숨을 쉬다 말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에르난은 분명히 ‘당신도’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표현이 따라왔다. 레이테는 자신의 눈가가 촉촉해져 감을 느꼈다.

‘대답…… 대답해야 해.’

실언이었다며 그가 말을 바꿔 버릴지도 모른다. 어서 말해 버려야 했다. 지금이 기회였다. ‘네.’라고 단 한마디만 하면 된다.

그러나 레이테는 숨을 헐떡일 뿐이었다. 가슴이 지나치게 두근거리는 바람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은 떨리고, 고개를 끄덕이려 해도 목이 굳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레이테, 내 사랑.”

목을 쥐어짜서라도 답하려던 레이테의 숨이 턱 막혔다. 아내를 붙잡은 에르난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부탁합니다.”

에르난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그의 검은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마치 피를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노을 탓일까? 아니면 그의 눈이 붉게 보일 때도 있음을, 그 순간이 진심의 상징과도 같음을 레이테가 이미 잘 알기 때문일까?

“나를 사랑해 줘요.”

손뿐만 아니라 팔 전체, 어깨까지 파르르 경련하면서도 에르난은 아내를 향한 시선만은 거두지 않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흐느껴 울 듯 애처로웠다.

레이테는 에르난의 팔을 거의 꼬집을 기세로 자신의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막힌 목이 트였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처음 에르난을 부를 때보다 훨씬 더 우렁찬 목소리가 반사되어 퍼졌다. 하필 극장의 무대에 서 있던 탓이다.

레이테는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우아함만은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았는데, 중요한 말을 할 때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레이테가 때때로 무례하다며 입을 삐죽이던 에르난은 정작 진중하기 짝이 없는데.

부끄러움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도 레이테는 눈을 감지도 않았고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눈물이 차오르는 바람에 시야가 흐릿했지만, 그녀는 남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랑해요, 에르난. 당신을 사랑해. 이제야 알았어요. 내 마음을 알고 나니 참을 수가 없었어요. 사랑해요.”

울먹이는 탓에 또렷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알아듣지 못하면 어떡하지? 갑자기 공포가 밀려왔다.

안 돼. 놓칠 수는 없었다. 레이테는 남편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팔이 에르난의 몸을 꽉 조였다.

에르난은 아내에게 안긴 채로,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동시에 눈물에 촉촉이 젖은 그의 속눈썹이 깜박이며 레이테의 뺨을 간지럽혔다.

“저 또한 참지 않을 겁니다.”

속삭임은 또렷했다.

“사랑합니다, 레이테.”

에르난은 아내에게 파묻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레이테의 눈물을 닦아냈다. 레이테도 그의 눈물을 닦아 주려 했다. 그러나 남편의 입술이 먼저 그녀에게 다가왔다.

레이테는 곧바로 입술을 포개어 에르난에게 녹아들었다.

* * *

결국 레이테는 남편에게 업혀서 언덕을 내려가야만 했다. 무리해서 걸은 탓에 발의 욱신거림이 심해진 탓이다.

“미안해요. 당신 옷도 더러워질 텐데.”

“옷이야 갈아입으면 그만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아예 연회를 취소하고 싶습니다만.”

“취소라니요?”

“더러워진 옷을 벗고, 새 옷은 입지 않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솔직히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고, 그저 당신을 안고 싶을 뿐입니다.”

남편을 붙잡은 레이테의 팔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녀는 남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신음했다.

“으으…….”

실은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답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게만 말하면, 에르난은 만사를 제치고 당장 아내와 함께 침실로 향할 것이다.

“쳇, 엔히크만 없었더라면 그랬을 텐데.”

에르난이 투덜거렸다.

바로 그 이유 탓에 레이테도 치솟는 욕구를 억눌러야만 했다. 타국 왕족을 초대해 놓고서 연회를 취소하는 무례를 저지를 수는 없다.

“당신이 초대한 거예요. 아시죠?”

레이테가 입을 삐죽였다. 실은 괜한 투정이다. 만약 에르난이 왕자를 초대하지 않았더라면, 레이테가 초대할 작정이었으므로.

타국 왕족과의 관계는 많이 맺어 둘수록 좋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으니 빨리 끝내겠습니다. 당신이 다쳤으니 쉬어야 한다고.”

“정말요? 저를 쉬게 할 셈인가요?”

“어……? 아, 아니지요.”

레이테는 고개를 빼꼼 앞으로 내밀며 에르난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남편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레이테는 방긋 웃고서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055

“레이테, 자. 당신이 좋아하는 달콤한 과자입니다.”

기다란 과자가 레이테의 입 앞에 쓱 다가왔다. 잠시 망설이던 레이테는 과자를 입에 물었다.

카놀리라는 이름의 과자는 미노리카의 특산물이었다. 얇은 반죽을 말아 튀긴 다음 치즈를 안에 넣은 과자는 분명히 레이테의 취향에 잘 맞았다.

“부스러기가 너무 많이 떨어지잖아요…….”

레이테가 과자를 다 먹자 에르난은 또 아내에게 과자를 주려 했다.

“괜찮습니다. 과자 조금 떨어진다고 당신 아름다움이 망가지지도 않는걸요. 이만한 맛이면 번거로움을 감수할 만하지 않습니까?”

저절로 머리를 끄덕일 뻔하던 레이테는 정신을 차리고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 그녀는 자신에게 내밀어진 카놀리를 뺏어 단숨에 남편의 입에 넣어 주었다.

“당신이야말로 많이 드세요.”

카놀리를 우물우물 씹어 삼키는 에르난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한가득했다. 그 모습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레이테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가 일순간 고개를 확 숙였다.

‘부끄러워…….’

그랬다. 부끄러웠다. 새삼스럽지도 않은데, 레이테는 부끄러움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이곳은 침실이 아니라 연회장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또 남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부부가 대표위원회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살두비아에서 한참 떨어진 미노리카 섬 사람들도 이제 다 알게 되었다.

‘폐하께서 여왕을 품에 안아 들고 회의했다더니, 저런 거였어?’ 같은 수군거림을 레이테는 분명히 들었다.

하지만 부끄러움이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 번 해 봤다고, 황당해하는 시선을 비교적 태연하게 받아넘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화목한 부부 사이는 그 자체가 견고한 동맹의 상징이다. 따라서 두 사람은 보는 이가 많은 곳일수록 더 의식적으로 상대에게 환하게 웃음 짓고, 껴안고, 입을 맞췄다.

즉, 모든 행위는 연출이었다. 감정과는 무관했다. 아니, 무관한 줄 알았다.

“당신이 준 과자라 훨씬 달콤하군요. 물론 내 사랑, 당신만큼 달콤하지는 않지만.”

내 사랑.

레이테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에르난 또한, 평소 능청거리던 모습과 달리 귀가 빨개져 있었다.

그런 상태로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

“…….”

“……에르난, 제가 내려갈까요?”

침묵 끝에 레이테가 입을 열었다. 에르난은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아내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침묵. 레이테는 미칠 노릇이었다. 태연하게 사이좋은 척하던 행위에 진짜 감정이 담기니 부끄러움을 견디기 힘들었다.

‘대체 과거의 나는 뭐였을까…….’

에르난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레이테는 민망해하며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다가, 엔히크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레이테는 남편의 목을 끌어안아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헉.”

멀지 않은 곳에서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테는 그 정체가 세르지 피로시라고 짐작했다. 비교적 부부와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까. 에르난이 그에게 작은 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가 놀라거나 말거나, 레이테는 방실 웃으며 에르난에게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눈으로는 엔히크를 흘겨보며.

그러잖아도 뻣뻣했던 엔히크의 표정은 부부의 과감한 애정행각을 보더니 더 굳어졌다. 흥, 레이테는 입을 작게 삐죽였다.

유치한 줄은 알지만, 왕자를 사소하게 괴롭히고 싶었다. 정확히는, 당신이 했던 말은 부질없으며 우리는 이렇게 사이가 좋다고 시위하는 데에 더 가까웠다.

레이테는 마지막으로 에르난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사랑해요.”

내밀한 속삭임치고는 조금, 실은 옆에서도 잘 들리도록 또렷한 목소리였다. 에르난의 귀가 더 붉어졌다.

“이제 눈 말고 귀가 빨갛게 되는 건가요?”

이번에는 에르난만 들을 수 있도록 조그맣게 말하며, 레이테는 키득키득 웃었다.

귀여워. 사랑스러워. 레이테는 기분이 좋아져 괜히 남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러다 문득 자신들에게 꽂힌 시선을 느끼고 손길을 멈췄다.

이곳은 침실이 아니라 연회장이다. 레이테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때, 에르난이 휙 고개를 돌리더니 아내의 입술을 덮쳐 왔다.

가벼운 입맞춤 따위와는 달랐다. 레이테의 입 안으로 남편의 혀가 단숨에 비집고 들어오더니 농밀하게 안쪽을 핥아 댔다.

여기 연회장이야! 레이테는 눈앞이 하얘졌다.

하지만 남편의 혀는 달콤하기 그지없어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조금 전까지 과자를 먹은 탓일까?

레이테는 잠시 망설이더니 그에게 진하게 엉켜 들었다.

“흐응…….”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레이테는 남편을 더 깊게 끌어안기 위해 몸을 들썩였다.

그녀의 팔꿈치에 무언가 닿았다. 술잔이었다. 레이테가 그것을 의식했을 때는, 잔이 이미 레이테의 드레스로 술을 쏟아 낸 후였다.

레이테는 다급하게 입술을 떼어 내고, 또다시 엉망이 된 자신의 옷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세상에…….”

아무래도 오늘의 운은, 에르난과 사랑을 속삭일 수 있게 된 것에 모조리 쏠렸는지도 모른다.

“하아……,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그냥 저랑 같이 갈까요?”

“우리가 벌써 사라지면 어떡해요.”

“글쎄, 지금 우리 모습을 본 사람들은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 같은데.”

“됐고요. 놔 주세요.”

레이테는 남편의 팔을 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단호하게 거절하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같이 가요’라고 말할 것 같았으므로.

* * *

에르난은 카테리나의 도움을 받으며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훈훈하게 지켜보았다.

진심으로 따라가고 싶었지만, 아내가 옳다. 참아야지.

그는 얼굴에 한껏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돌려 엔히크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엔히크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뭍에서의 식사가 간만이실 테니 각별히 정성껏 준비하라 일러뒀습니다.”

“예……, 굉장히 맛이 좋군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에르난은 술잔을 들어 엔히크에게 내밀었다. 엔히크는 어설픈 손짓으로 자신의 잔을 맞부딪쳤다.

미노리카의 포도주는 정말 맛이 좋았다. 하지만 엔히크는 지금 저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터다.

에르난이 손님으로 초대했기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지만 못할 뿐, 엔히크를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한 대 치고 싶다는 눈치를 대놓고 보내는 이도 많았다.

‘하여튼 자제할 줄을 몰라서…….’

그들을 본 에르난은 혀를 끌끌 찼다.

사실 유치하기로는 에르난 또한 지지 않았다. 유적에서의 대화 탓이다.

엔히크는 부부 사이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에르난은 무척 화가 났다. 그런데 하필 그 직후, 부부는 진솔한 마음을 교환했다.

한껏 기분이 고조된 에르난은 엔히크에게 보란 듯이 부부 사이가 진심임을 자랑하고 싶었다.

엔히크의 난처해 하는 모습이 조금 통쾌하면서도 미안했다. 작은 복수심이야 있지만, 원래는 그와 친분을 쌓으려고 연회에 초대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지나치게 싸늘하다. 사크틸라인인 심발로가 간간히 그와 대화하면서 분위기를 전환하려 애쓰지만 무리 같다. 이대로 술이 더 들어갔다가는 아예 왕자에게 망언하는 이도 나타날지 모르겠다.

에르난은 작게 한숨을 쉬고, 엔히크에게 말했다.

“전하,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아, 그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라고 불렀는데 힘들게 할 수는 없지요. 이보게, 왕자께 처소를 안내해 드리게. 전하, 오랜만에 푹신한 침대에서 편히 쉬십시오.”

에르난은 근처에 대기하던 시종을 불렀다.

“감사합니다, 폐하.”

엔히크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의 얼굴빛이 한결 밝아 보였다.

* * *

카테리나는 여왕의 머리에 헤어네트를 씌웠다. 레이테가 오늘만 세 번째로 입는 연회용 드레스에 잘 어울리는 장식이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폐하께서 기뻐하시니 다행이에요.”

사실,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았다.

카테리나는 극장에서 울리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그녀의 귀가 제대로 들었다면, 사랑한다는 외침 같았다.

이후 연회장에서 부부가 유난하다 못해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민망할 만큼 사이좋은 모습을 보였으니 틀림없다.

콜록콜록. 방긋 웃으며 보석이 달린 핀을 여왕의 머리에 고정하다 말고 카테리나는 기침을 했다.

“아, 죄송합니다.”

“카테리나, 감기 걸렸어요? 아픈 줄도 모르고 계속 무리시켰네요. 이만 쉬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폐하.”

여왕의 말투가 유난히 따뜻했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여왕은 다른 시녀와 함께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카테리나는 약을 먹고 자신의 방에서 일찍 잘 생각이었다.

‘약을 받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더라?’

카테리나가 잠시 망설이는데, 영 반갑지 않은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세르지였다.

“카테리나 양, 여기 계셨군요!”

그는 안에 입은 옷이 보이도록 일부러 겉옷을 세로로 쭉쭉 찢은 경박한 차림새였다. 색을 무려 네 가지나 사용한 타이츠는 가관이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눈앞이 빙글 돌 것만 같은 카테리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의 상태를 눈치챌 법도 한데, 세르지는 마냥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아, 오늘은 정말 기쁜 날입니다. 카테리나 양, 엔히크 왕자의 정체를 밝혀낸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당신이지요.”

모를 수가 없다. 그는 엔히크에 대한 정보를 여왕에게 전해 달라는 핑계로 오늘 아침에도 카테리나를 찾아왔으니까.

“예, 바로 접니다. 그리하여 바르시나의 왕위 계승자이며 사크틸라의 국왕이신 우리 폐하께서, 이 모든 일이 저의 덕이었다며 크게 칭찬해 주셨답니다.”

“그런가요. 축하드려요.”

세르지는 레이테를 싫어한다. 그래서 레이테에게 매달려 어쩔 줄을 모르는 에르난도 썩 못마땅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하지만 지금 태도는 평소와 달랐다.

“혹시 폐하께서 상을 내리셨나요?”

“아, 상 말입니까? 흠흠, 상이라기보다는, 그…….”

‘자랑하러 왔구나.’

카테리나의 머리가 더욱더 지끈거렸다.

“폐하께서는 유능한 젊은이를 직접 모아 기사단을 새로 만들고 싶으시답니다. 그때 저도 함께해 달라지 뭡니까.”

“어머.”

이 말에는 카테리나도 놀랐다.

명문가의 일원이라 해도 장남이 아닌 세르지는 귀족다운 특권이 거의 없다. 따라서 에르난이 기사 작위를 수여한다면, 그에게는 굉장한 영광이 될 것이다.

“축하드려요.”

카테리나는 간단하게 말했다. 세르지는 이 말을 듣고 싶어 그녀를 찾아왔을 게 뻔하다.

“감사합니다, 카테리나 양. 제가 기사로 임명되면, 당신을 제 마음의 주인으로…….”

“제, 제가 지금 바쁘거든요? 다음에 이야기해요.”

세르지는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굽히고 카테리나의 손에 입을 맞추려 했다. 카테리나는 황급히 손을 치우고 허둥지둥 자리를 벗어났다. 세르지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는 무시했다.

지나가던 하인을 붙잡고 약을 얻을 수 있는 곳을 물은 카테리나는 계단을 내려가 회랑을 쭉 지나쳤다.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차라리 세르지에게 도와달라고 할 걸 그랬나?

기둥을 붙잡고 잠시 숨을 고르던 카테리나의 귀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 다른 이들은 모르는 편이 낫겠습니다.”

뭐지? 카테리나는 무심코 드레스 자락을 끌어당겨 기둥 뒤로 숨었다.

“기껏 또 붙잡히면 전하께서도 곤란하시겠지요.”

두 남자가 카테리나가 있는 쪽으로 점점 다가왔다. 카테리나는 숨을 참으며 떨었다. 아무것도 못 들은 체하고 그냥 지나쳤어야 했는데, 괜히 숨어서 난감해졌다.

다행히 그들은 카테리나를 못 보았는지, 기둥 옆을 쓱 지나 문밖으로 향했다.

카테리나는 살짝 눈을 돌려 두 사람의 뒷모습을 확인했다.

왼쪽은 엔히크 왕자 같았다. 어차피 이곳에 전하라고 불릴 사람은 그밖에 없다.

“걱정하지 마시고 쉬십시오. 바르시나 쪽에는 잘 숨겨 드릴 테니.”

하지만 오른쪽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사크틸라인일 것이다. 말의 내용으로도, 어색함 없는 사크틸라어 발음으로도 확실했다.

카테리나가 아는 한, 연회에 참석한 사크틸라인 남자는 단 두 명뿐이었다.?

#056

엔히크가 연회장을 떠나자마자, 바르시나인의 성토가 에르난에게 쏟아졌다.

“막힌 일을 풀어 주셔서 폐하께 대단히 감사드립니다만, 정말 이대로 보내시렵니까?”

“지난 한 달 동안, 미노리카 섬의 모든 사람이 헤젤의 배를 보며 분노를 태웠습니다.”

“내 결정에 불복하겠다는 뜻인가?”

에르난이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공격을 시작했는데도 그냥 넘어가게 되었으니 다행으로 알아야 하지 않나? 혹시라도 헤젤의 배가 격침되었더라면? 엔히크가 사망했다면? 그대들은 혹시 전쟁을 바라는가?”

대답은 없었다. 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저들 또한 이성적으로는 결과를 받아들였다. 다만 해소하지 못한 너저분한 감정이 문제일 뿐이다.

특히, 에르난 부부가 등장해 사태가 해결되었다는 데에 미노리카 사람들은 만족하면서도 불만을 가졌다.

자신들이 대화를 요청할 때에는 칼같이 무시하던 헤젤은 하필 사크틸라 여왕의 요구를 곧바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속 좁은 작자들 같으니라고…….’

군주가 모두를 안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최대한 품고 가야만 한다.

사태의 원흉이나 다름없는 상선의 선장을 너그러이 포용했다. 시종일관 못마땅한 눈치를 보이던 세르지에게 작은 이유를 들어 상을 베풀었다.

그래도 바르시나인의 태도는 여전했다. 불평하며 자기 자존심을 챙기는 데만 급급할 뿐이다.

엔히크도 돌아갔으니, 차라리 그냥 레이테나 보러 갈까. 에르난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 순간, 부드러운 손이 에르난의 어깨에 얹어졌다.

“제가 말씀드려도 될까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아내, 사크틸라의 여왕이다.

레이테는 남편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의 화를 가라앉히고 옆자리에 앉았다.

“후련하지 않더라도, 이 정도 선에서 헤젤과의 일을 마무리해야 할 이유를요.”

역시 답은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레이테를 향해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시선을 보냈다.

여왕은 잠시 그들을 둘러본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헤젤은 땅이 척박해 자급자족이 용이하지 않아요. 그래서 꽤 필사적으로 사크틸라의 영토를 노렸는데, 한동안은 그럴 필요가 없었지요. 사크틸라가 암묵적으로 바닷길을 열어 주고, 또 내부 밀수를 눈감아……, 아니 사실상 지원해 줬으니까.”

눈을 찌푸리거나 코웃음 치며 비웃는 청중이 적지 않았다. 레이테는 부끄러웠다.

숙부의 허수아비였던 그녀의 과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쨌든 레이테가 사크틸라의 주인이었다. 레이테는 늦게나마 자신의 나라를 바로잡고 싶었다.

“사크틸라는 헤젤이 강제로 사크틸라 땅을 뺏거나 불법적인 수단을 이용하지 않아도 공존할 방법을 모색하고자 해요. 따라서 밀무역의 단속 강화와 동시에, 왕실이 관리하는 건전한 교역을 구축하려 합니다.

이는 사크틸라뿐만 아니라 바르시나에게도 큰 이득이 되리라 믿어요. 헤젤이 안정되면, 그들은 바르시나가 쌓은 바다의 질서를 깨뜨리면서 무리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바르시나는 넓은 바다를 누비는 활기찬 나라 같지만, 레이테는 사람들을 만날수록 이들의 이중성을 느꼈다. 바르시나인에게는 자부심과 자기방어가 각각 비대하게 존재했다.

반도가 제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헤젤을 지도에서 지워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사크틸라와 바르시나는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즉, 이베로 반도의 세 나라가 합심해 평화를 논의해야 해요. 어느 한 곳이 빠져서는 진짜 평화가 불가능해요.”

신기했다. 레이테도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하필 대륙에 와서 할 줄은 몰랐다.

“오늘 일로 우리는 세 나라의 공생을 위한 창구를 만들기 시작한 셈이에요. 왕자는 우리에게 빚을 지고 돌아갑니다. 바르시나가 선제공격을 했든 어쨌든, 저와 에르난의 도움으로 귀환하게 되었으니까.”

‘저와 에르난’이라니, 진지한 분위기임을 알면서도 에르난은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가 막 사크틸라 왕이 되었을 때는 철저하게 남편을 무시했던 레이테였다. 하지만 이제 당연하게 ‘우리’라며 함께 부른다. 기쁘고 뿌듯하다.

“사크틸라의 왕은 바르시나의 왕이 될 사람이기도 합니다. 두 나라가 같은 군주를 가질 지금이야말로, 평화를 위해 진일보할 최고의 기회예요.”

레이테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또렷하게 빛나는 눈에는 단단한 신뢰가 가득했다. 그녀를 마주 보는 에르난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신뢰는 부부 사이에서만 머물지 않고, 그들의 두 나라 전체가 공유하는 신뢰가 되어야 한다.

“저와 에르난은 결혼이라는 영원한 계약을 신 앞에서 맹세했습니다. 우리의 결혼은 종속이 아니라 공존의 계약이에요. 사크틸라는 바르시나의 동료예요. 언제나 바르시나를 존중하고 함께 걸어갈 겁니다.”

이어지는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여왕의 말을 음미하기 위한 여운의 시간일 뿐이었으므로.

곧, 누가 먼저인지도 알 수 없게 박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숨에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 * *

아침이 밝나 보다. 이제 그만 침대 밖으로 벗어나라고 시위라도 하는 듯, 새 지저귀는 소리가 요란했다.

날짐승 주제에 왕의 시간을 방해한다고? 고얀 것들.

“읏, 흐앗……, 앗, 으응! 흐윽! 에르난! 흣, 흐앗! 아흣!”

몸과 몸이 질펀하게 부딪쳤다. 새 소리를 덮을 기세로 날카로운 신음이 끊임없이 터졌다.

“그래, 새 따위에게 질 수는 없지. 더 울어요, 레이테.”

“앗, 흐앗, 읏……! 앗, 아, 앗, 하응, 흐앗!”

에르난의 말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몰라도, 어쨌건 레이테는 남편에게 매달려 흥분으로 몸부림쳤다. 에르난은 짜릿한 기쁨과 함께 자신의 흔적을 그녀의 안으로 쏟아부었다.

“흐으읏…….”

아내는 꿀렁꿀렁하게 분출되는 감각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흐응, 에르난……, 하아.”

에르난이 허리를 살짝 들썩이자 레이테의 팔다리가 다시 그를 꽉 안아 왔다.

“왜요, 더?”

레이테는 눈을 나른하게 뜬 채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있잖아요, 당신.”

땀에 흠뻑 젖은 에르난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며 옆으로 누웠다.

“나 좋아해요?”

“네.”

“너무 대답이 빨라서 진정성을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벌써 몇 번째 묻는 겁니까. 침실에 오자마자 그 질문부터 했습니다.”

에르난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아내는 집요한 데가 있었다. 그녀는 수시로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벌써 반년 전, 무심코 던진 질문에 남편이 태연하게 아니라고 답했던 일이 꽤나 상처였다는 듯이.

물론 에르난은 얼마든지 답해 줄 수 있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이렇게라도 그녀를 달래 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좋아한다는 답은 아무리 반복해도 질리지 않는다.

“하지만 매일매일 물어봐도 괜찮습니다. 좋아해요, 레이테.”

에르난은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내를 더 안고 싶다.

“어느새 아침이네요…….”

레이테가 멍하니 말했다. 어두웠던 침실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부부는 한시라도 빨리 단둘이 있고 싶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레이테의 발언은 연회 참석자들에게 상당한 감명을 주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에르난이 살두비아에서 상인 총회에 참석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밤새 술 마시기.

말 몇 마디로 사크틸라의 여왕을 향한 경계심이 사라질 수는 없다. 하지만 지난밤, 그들은 적어도 여왕을 인정했다.

그 반응이 기뻐 부부는 오랫동안 연회장에 남았다.

졸음을 버틸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침실로 돌아왔다. 시계를 확인하니 두 시가 넘었다. 일단 두 사람은 잠시 잠들었다. 아니, 기절했다.

몽롱한 눈을 떴을 때, 부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엉켜 몸을 섞었다.

그리고 단숨에 아침. 벌써 아침이다. 에르난이 투덜거렸다.

“우리는 왕입니다.”

“그래서요?”

“아직 아침이 아니라고 왕이 명령하면 아침이 아닌 겁니다.”

레이테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런 게 어딨어요. 우린 신이 아니라고요.”

“모르십니까? 옛 제국의 황제는 진지하게 이런 말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네, 몰랐어요. 저는 교양 없는 사크틸라 사람이라.”

레이테는 입을 삐죽였지만, 딱히 불쾌한 기색은 아니었다. 주먹 쥔 손으로 에르난의 이마를 콩 쥐어박았을 뿐이었다.

“주먹 말고 입술을 주시지.”

“계속 줬거든요? 그리고 아내가 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벌써부터 편식하면 어떡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이테는 남편의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쪽 소리를 내며 여러 번.

격한 들썩임으로 완전히 지쳐 버린 몸에 다시 긴장이 감돈다. 에르난은 몸을 일으켜 아내의 위로 올라타려 했다.

“잠깐만요. 무리예요, 정말로!”

레이테는 손사래를 치며 남편을 밀어냈다. 확실히 그녀의 팔다리에는 거의 힘이 없었다. 에르난은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쫓겨나려나?

“벌써 저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겁니까?”

에르난이 투덜거렸다.

“누가 그렇대요? 몸을 못 움직이겠어요. 당신은 아닌가요?”

“움직이기 힘들다면 그냥 계십시오. 제가 기분 좋게 해 드릴 테니.”

올라타면 싫어할 테니, 다른 쪽으로 얼마든지 즐겁게 해 줄 수 있다. 에르난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러니까 당신은 괜찮……, 읏, 흐읏.”

난감해하는 레이테의 목소리는 곧 신음이 덮였다.

그녀의 다리를 잡고 벌린 에르난이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새벽부터 열심히 일한 허리 대신 얼굴이 다가오더니 훅 하고 숨을 불어넣었다. 레이테는 몸을 움찔거렸다.

“흣……! 당신 뭘 하려고…….”

“당신이 기분 좋아지는 일요. 정말로 가만히 계셔도 됩니다.”

남편이 말할 때마다 뜨거운 숨결 탓에 다리 사이가 간지럽다. 레이테는 당황했다. 다리를 오므리자니 이미 그가 확실히 자리를 잡아 버렸다.

이윽고 그의 혀가 은밀한 곳을 핥았다.

“흐읏……, 에르난, 앗, 흐응…….”

밤새 남편과 살을 부딪친 곳은 여전히 예민했다. 미세한 자극에도 금방 떨어 버리고 만다. 심지어 단 한 번도 이런 곳에 닿지 않았던 남편의 혀가 간지럽히니 참을 수 없었다.

“이런 곳에…… 왜, 흐응, 응……! 으응!”

“왜라니요. 당신이 좋아하니까.”

능청스럽게 답한 에르난이 다시 민감한 곳을 건드렸다. 바깥을 살살 건드리던 혀는 슬쩍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레이테는 끙끙거리는 신음과 함께 허리를 움찔거릴 뿐이었다.

“으응, 에르난……, 그런 소리 일부러 내지 말아요……, 읏.”

할짝대는 소리가 꽤 컸다. 물이 튀는 듯한 마찰음이 음란하기 그지없었다. 에르난은 입을 살짝 떼고 말했다.

“일부러? 아닙니다.”

“진짜라기에는 너무 적나라해서…….”

“아하. 당신이 적나라하게 기뻐한다는 뜻이지요. 아십니까? 이곳은 지금도 기분이 좋아 울고 있어요.”

에르난은 혀끝으로 입구를 살살 핥았다. 그때야 레이테는 자신의 다리 사이가 푹 젖어 있음을 느꼈다. 침대 시트마저 적신 것 같았다.

“아, 잠깐. 당신이 입으로 그러니까!”

“물론 제 탓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여기가 촉촉해진 이유는 기본적으로 당신이 쏟아낸 것 때문입니다.”

“으으으…….”

레이테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남편이 자꾸 자극하니 흘러나왔을 뿐이다.

얼마큼 쏟아지더라도, 에르난은 즐거워하면 즐거워했지 아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일단 레이테 자신이 부끄러웠다.

“흐음, 지금은 보고만 있습니다만. 마를 줄을 모르는군요.”

정말이었다. 어느덧 에르난은 머리를 조금 떨어뜨리고 아내의 반응을 관찰만 하고 있었다.

레이테는 느꼈다. 지금 이 순간도, 자신의 다리 사이는 흥분에 어쩔 줄을 모르며 반응 중이다.

“신기합니다. 왜 자꾸 젖을까요?”

에르난의 혀 대신 손가락이 다가오더니 촉촉해진 부위를 만지작거렸다.

“아읏, 흐앗! 아……아흣!”

남편의 손가락으로 자극받는 일은 결코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던 날부터 이 손가락에 녹아내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손길은 부수적일 뿐, 그는 아내의 관찰에 집중했다. 레이테의 좁은 틈 사이로 쾌감의 흔적이 자꾸만 흘러나왔다.

“마……, 만지지 않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흣, 손대지 말아요!”

“그렇습니까?”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췄다. 레이테는 흥분으로 가빠진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 진정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손을 치우라 하니 바로 치워 버리는 에르난의 반응은 수상하다.

슬그머니 아래를 내려다본 레이테의 숨이 그대로 멈췄다. 까만 눈이 음욕에 사로잡혀 깊은 곳을 보고 있었다.

아내의 시선을 느꼈는지 에르난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테는 울컥했다. 아, 분명히 남편이 놀리던 그곳에서는 방금 무언가를 내보냈을 터다. 아니나 다를까, 에르난은 재밌다는 투로 말했다.

“얼마나 괜찮아질지 지켜볼 생각이었는데, 가망 없어 보입니다.”

에르난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손이 레이테의 허리를 붙들었다.

“이 유혹은 너무 강하잖습니까. 이러시면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요. 아니, 실은 못 참겠습니다.”

단숨에 기둥이 파고들고, 에르난은 거세게 허리를 흔들었다.?

#057

“한 번만 더 하면…….”

끙끙거리는 레이테의 목소리는 하나도 힘이 없었지만, 표정만은 대단히 살벌했다. 쓰러지다시피 잠들었다 눈을 뜨니, 남편이 또 그녀의 위에 올라와 있었다.

“당장 이 방에서 쫓아내 섬 앞바다에 수장해 버릴 거예요…….”

“그러면 전쟁이 일어날 텐데…….”

에르난은 슬금슬금 내려와 아내의 왼편에 누웠다. 레이테는 오른쪽으로 돌아누워 그에게 등을 보였다. 에르난은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잘 잤어요?”

“제가 잔 것처럼 보이나요? 기절한 줄 알았는데. 아무튼 당신은 대단하네요. 설마 안 잤어요?”

“그럴 리가. 저도 사람입니다. 다만 당신보다 조금 먼저 일어났을 뿐이지요. 좋은 아침입니다, 부인.”

“아까는 아침더러 아침이지 말라고 명령하는 신인 척하더니만…….”

계속 신인 척할 것을 그랬나. 에르난은 피식 웃었다.

“아 참, 그 이야기 말이죠. 옛 제국의 황제. 바르시나 사람은 제국에 관심이 많나요? 살두비아에서 갔던 왕비 폐하의 모임에서도 제국의 이교 신화를 다룬 그림이 많았잖아요.”

“취향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인 관심도가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아무래도 교양의 척도가 되다 보니.”

‘역시 나는 교양도 없고……’와 같은 말을 하며 투덜거릴 줄 알았는데, 레이테는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게 참 재밌어요. 신이나 다름없던 황제의 통치라니, 바르시나인은 절대 용납 안 할 거잖아요? 그래도 한없이 제국을 동경하네요.”

에르난은 작게 한숨 쉬었다. 맞다.

“뭐, 재미있는 옛날이야기 같은 존재지요. 그리고 대륙에서 유행한다는 점도 무시 못 합니다. 마지막으로, 신의 통치? 다른 바르시나인은 몰라도 당신은 제게 신이 맞습니다.”

“안 돼요. 신은 하늘에 계신 한 분뿐이니 그분을 섬기도록 하세요.”

정색한 목소리로 칼같이 돌아오는 답변에 에르난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당신이 좋단 말입니다. 그는 아내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레이테도 남편의 뜻을 이해했는지,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종교가 엮이는 농담은 아내에게 먹히지 않나 보다. 에르난은 아내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었다. 그가 밤새 움켜쥐어 엉망이 되었을 텐데도, 여전히 부드러웠다.

“당신은 황제가 되고 싶나요?”

아내의 머리카락을 빗던 에르난의 손이 멈추었다.

“……뭐, 어렸을 때야 그런 꿈을 꿔 보기도 하잖습니까.”

에르난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지난밤 한껏 동맹의 정당성을 말하며 환호받았는데, 뒤늦게 유치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니 영 멋쩍었다.

“에르난, 나보다 옛 제국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지 않았어요? 제국은 너무 넓은 영토를 감당 못 하고 분열된 거라고요.”

“이런 데에서 진지해지지 맙시다, 좀…….”

에르난은 투덜거리면서도 아내에게 키스했다. 아내의 이런 비꼼은 정말로 귀엽다.

“……당신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진지하지 않을 수 있죠?”

레이테가 수줍어하며 말했다. 에르난은 다시 입을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 * *

며칠이 흘렀다. 미노리카 항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섬을 긴장에 빠뜨렸던 헤젤의 배가 드디어 출발한다. 바르시나 국적의 배 한 척이 동행한다. 심발로가 헤젤의 배에 타 엔히크와 함께 헤젤까지 가고, 팀파노는 바르시나 선박을 지휘해 호위를 담당한다.

항구 거래소의 귀빈실에서 레이테는 엔히크를 맞았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여왕의 목소리는 상당히 밝았다. 엔히크가 헤젤에 안전하게 도착해야 완전히 끝날 일이겠지만, 일단 무사히 보낼 수 있다는 데에 그녀는 무척이나 안심했다.

레이테 개인으로서는 왕자의 억류 생활에 대한 연민이 들기도 했다. 그녀 또한 긴 시간 구속당하며 살았으므로.

“사크틸라는 내부 혼란을 빠르게 정리해 가고 있어요. 귀국과 바르시나 사이의 일에 사크틸라가 유의미한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감사합니다, 폐하.”

“으음, 에르난이 늦네요. 배를 직접 살펴보고 오겠다더니.”

레이테는 복도를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문 쪽에 선 카테리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왕은 다시 엔히크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사크틸라와 헤젤 사이의 고질적인 문제도 해결해야겠지요.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만나 평화를 의논하고 싶어요.”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심발로가 헤젤까지 가서 왕께 회담을 요청할 테니 그에게 힘을 좀 실어 주세요.”

엔히크, 그리고 심발로가 헤젤에 도착하면 겨울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 회담은 빨라도 내년 봄이 되어야 열릴 수 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때, 성큼성큼 투박한 구두 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레이테와 엔히크가 깜짝 놀라며 바라보니, 눈살을 찌푸린 에르난이었다.

“아……, 왕자. 벌써 와 계셨군요.”

에르난은 민망한지 얼굴을 굳혔다. 레이테는 허둥지둥 뒤따라 들어온 비서에게 눈치를 주었다. 비서는 조심히 문을 닫았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에르난?”

“아, 별일은 아니고……. 웬 남자가 귀찮게 치근덕대기에.”

뜬금없는 말에 레이테는 어리둥절했다.

“사실 이 섬에는 별별 사람이 다 옵니다. 방금은 어느 대륙 남자가, 이베로 반도보다 서쪽에 있는 세계에서 돈을 벌어올 테니 항해 자금을 좀 지원해 달라지 뭡니까.”

“혹시 콜롬보인가 하던 사람 말씀하십니까?”

뜻밖에도 엔히크가 아는 체를 했다.

“어라, 그를 아십니까?”

“예. 제가 배에서 벗어난 이후, 거의 매일같이 저를 찾아와 비슷한 요청을 했습니다. 자금만 지원해 준다면 서쪽 바다 끝의 섬에 숨겨진 금을 산더미같이 가져오겠다고 하더군요. 금이 있으면 헤젤 왕실의 돈을 탐내지 말고 그냥 금으로 잘 먹고 잘살라 했습니다. 이후 발길이 끊겼는데, 폐하께 가다니…….”

엔히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 쉬었다. 그도 많이 시달린 듯했다.

“이런, 그렇게 서쪽으로 가고 싶으면 헤젤로 떠나는 배가 있으니 거기 타지 그러냐며 떼어놓고 왔는데.”

순간, 방안에 침묵이 찾아왔다. 레이테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헤젤 쪽으로 가는 배는 둘이잖아요. 왕자께서 계신 배 말고 팀파노가 탄 배로 보내면 괜찮지 않을까요. 아니, 그런데 에르난. 어째서 모험가인지 사기꾼인지 모를 사람을 배에 타라고 한 거죠?”

레이테의 날카로운 물음에 에르난은 난감한 듯 웅얼웅얼 답했다.

“……하도 끈덕지게 달라붙어서…….”

“그 사람은 그러고도 남습니다. 이해합니다, 폐하.”

엔히크가 맞장구를 쳐 주었다. 하아, 에르난은 한숨을 내쉬며 뒤에 선 비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돌돌 만 종이를 탁자 위에 펼쳤다.

“헤젤의 왕께 보내는 저희의 친서입니다.”

편지는 부부가 밤새 상의해서 작성했다. 거의 누더기가 되어 버린 초안을 바탕으로, 부부 중 훨씬 필체가 좋은 에르난이 편지를 완성했다.

에르난의 글씨는 세련되면서도 깔끔했다. 레이테도 그에게 편지를 받아 보기는 했었다. ‘당신을 구하러 가겠습니다.’와 같은 짤막한 것부터, 반역자 토벌 때 쓴 것까지.

필체는 그때에도 좋았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한 자 한 자 신경 써 멋들인 눈앞의 편지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세 나라의 평화를 의논할 자리를 꼭 마련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에르난이 설명하는 동안, 레이테는 펜을 꺼내 들었다. 에르난의 서명은 이미 되어 있었다. 레이테는 그 오른편에 서명했다.

우아한 여왕이라며 칭송받는 레이테지만, 글씨만은 섬세하기보다 시원시원하게 휘날리는 편이었다.

여왕이 서명을 마치자 비서가 편지를 접고 인장을 찍기 위해 녹인 밀랍을 나란히 두 개 부었다.

레이테는 손에 낀 사크틸라 여왕의 반지를 빼 인장을 찍었다. 에르난도 마찬가지였다.

“두 개나 찍으려니 영 불편하네요. 큰 편지도 아니거늘 난잡해 보입니다.”

에르난이 투덜거렸다.

“부부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문장을 만드시면 어떨까요?”

엔히크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었다. 아니, 오히려 왜 반년 동안 그럴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신기할 정도였다. 큼직하게 터지는 이런저런 일에 정신이 없던 탓이다.

“살두비아로 돌아가는 즉시 의전관을 불러 준비시켜야겠군. 고맙습니다, 왕자.”

“별말씀을요.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분께서는 정말로 하나 같으셔서.”

“왕자, 실례되는 말인가 싶습니다만……. 며칠 전 제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셨잖습니까?”

레이테는 남편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여왕을 택한 이유는 만만해서가 아니냐던 물음. 무례한 언사였다. 하지만 덕택에 서로의 진심을 알 수 있어 고맙기도 했다. 조금 약 오르는 고마움이지만.

“제 판단 착오였습니다. 며칠 더 보니 두 분은 단순히 사이만 좋은 수준이 아니라 진정한 동반자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시더군요. 두 분께서 오래도록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저희 부부의 평화는 반도 전체의 평화가 될 겁니다.”

에르난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회담은 반드시 성사시킬 테니, 봄에 다시 만납시다.”

엔히크가 에르난을 향해 손을 내밀자 두 사람은 악수했다. 이윽고 엔히크는 레이테에게도 인사하고자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테는 손등을 들어 보이는 대신, 엔히크가 남편에게 했던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엔히크는 당황한 듯 멈칫거리다 그 손을 마주 잡고 어설프게 흔들며 악수했다.

* * *

배는 정오가 다 되어 출발했다.

부둣가에 선 레이테와 에르난이 나란히 그 모습을 바라보자, 눈치 빠른 항만 관리가 재빨리 의자를 준비해 놓아 주었다.

생김새도 크기도 완전히 똑같은 의자였다. 부부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고 자리에 앉았다.

서로 크기가 다른 범선 둘이 항구에서 점점 멀어졌다. 작은 배에는 엔히크와 심발로가, 큰 배에는 팀파노가 탔다.

두 배는 서쪽으로 쭉 나아가 사크틸라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헤젤과의 국경 근처에서 팀파노의 배는 사크틸라로 돌아가고, 심발로는 엔히크를 따라 헤젤 궁정까지 동행한다.

그는 왕에게 부부의 친서를 전달하고 회담 개최 여부의 답을 받아올 것이다.

“겨울은 조용히 보낼 수 있으려나요.”

“봄이 바빠질 테니?”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스로네스에게서 사크틸라로 돌아오라는 말이 있었습니까?”

“아직 없었어요.”

“그러면 이곳에 올 때 출발했던 아라고에서 겨울을 보냅시다. 살두비아의 겨울 날씨는 사크틸라랑 별 차이가 없어요. 춥다는 이야깁니다.”

에르난의 팔이 아내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아직은 11월 초였고, 추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남편의 단단하고 따뜻한 팔이 좋아 레이테는 그에게 기대었다. 두 사람은 대화 없이 한참 가만히 바다만 바라보았다.

“엔히크는 저보다 악수를 못 하더군요.”

침묵 끝에, 에르난이 느닷없이 레이테의 손을 잡았다.

“여자와 하는 악수가 처음이었겠지요.”

“부인 말이 맞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불만입니다. 엔히크도 당신 동료입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그와 악수합니까?”

남편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운 데가 있었다. 레이테는 그를 보았다가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눈썹이 축 처지고 입이 삐죽 나온 표정이 말하는 바는 뻔했다.

“당신, 설마 제가 다른 남자랑 손을 잡았다고 구차하게 그런 말 하는 건 아니지요?”

“당연히 맞습니다.”

하아. 레이테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식이라면 손등에 입 맞추는 인사는 뭔데? 하지만 남편의 맥락은 파악할 수 있었다.

레이테가 악수한 사람은 여태껏 에르난뿐이었다. 그에 대한 독점욕이겠지.

“당신은 그와 악수했잖아요. 나는 당신과 동등한 짝이고 동료라고, 눈에 보이는 형태로 증명해 보고 싶었어요. 증명이라기보다는 자랑일까…….”

그녀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엔히크에게 개인적인 유감은 없으나, 자꾸 그 사람에게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만다.

부부의 결혼에 담긴 정략적 계산을 부정할 수는 없고, 그럴 마음도 없다. 하지만 계산이 전부인 관계는 아니라고 자꾸만 드러내고 싶었다.

이왕이면 헤젤로 돌아간 엔히크가 부부 사이에 대해 실컷 떠들어 주면 좋겠다. 시끄러운 성격은 아닌 것 같지만. 왕은 배가 아플 테고, 리리우 공주는 재미있어할 것이다.

“내일은 해변에 가 볼까요? 아직은 물이 많이 차갑지 않아 괜찮을 겁니다.”

남편의 말에 레이테는 방실 웃으며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다급한 외침만 들리지 않았더라면.

“폐하!”

들을 리 없는 목소리에 부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프란세스크가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세스크! 자네 살두비아에 남지 않았나? 어떻게 여기까지…….”

“당장 살두비아로 돌아가셔야겠습니다.”

프란세스크의 딱딱한 말투에 부부는 긴장으로 얼굴을 굳혔다. 그들이 수도로 긴급히 돌아가야 할 일이라면…….

“국왕 폐하께서 위독하십니다.”

에르난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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