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에 비친 왕관-7화 (7/15)

2부 3장 : 우리의 바다(上)

#040

딱딱한 구둣발 소리가 왕궁 복도에 가득 울렸다. 소음이 들려오는 쪽을 돌아본 사람들의 숨이 일제히 멈췄다.

“폐하.”

사람들은 황급히 몸을 굽혀 인사했다.

머리카락만큼이나 새까만 옷에 장검을 찬 에르난이 그들의 옆을 지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누구도 허리를 펼 생각 따위 하지 못했다.

대표위원회에서 일어난 사건의 소문은 순식간에 궁정 전체에 퍼졌다.

많은 바르시나인은 사크틸라 여왕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어제 같은 수준의 사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바르시나는 사크틸라에 비하면 왕실의 힘이 약했다. 그래도 왕은 왕이다. 어지간한 사람은 왕에게 정면으로 도전할 생각을 품지 못한다.

대표위원회에 참석하는 최고위 귀족과 지방 특별위원회의 대표들은 왕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한 권세가 없는 대다수 궁정 귀족과 관료는 숨을 죽이고 에르난의 눈치만 보았다. 유부남이 된 왕자를 아쉬운 눈길로 훔쳐보던 귀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에르난은 궁정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중정으로 나왔다.

호화로운 가마 주변에서 기사들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왕자를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자우메 왕이 중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홀로 겨울을 먼저 맞이했는지, 왕은 도톰한 옷을 잔뜩 껴입었다. 그는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가마에 올라탔다.

아들을 섭정으로 임명한 왕은 요양을 위해 교외의 수도원으로 떠난다.

“에르난, 네가 알아서 잘하리라 믿으마.”

에르난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그는 말에 오르려고 등자에 디딘 발을 도로 땅으로 내린 다음 부왕에게 다가갔다.

“편히 쉬십시오.”

건조한 인사를 마친 에르난은 복도로 들어가 버렸다.

아들이 사라진 쪽을 잠시 바라본 왕은 출발을 지시했다. 가마와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왕 일행이 떠난 중정에는 원래 에르난이 탔어야 할 말만 덩그러니 남았다.

* * *

집무실에 들어온 에르난은 장갑을 벗어 책상에 내팽개쳤다. 망토도 거칠게 풀어 구석으로 던졌다.

그는 의자를 뒤로 빼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의자 다리에 검이 걸리면서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어 버렸다.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고, 에르난은 허리띠에서 검을 풀었다. 손의 움직임이 자꾸만 꼬였다.

겨우 검을 풀어낸 에르난은 그것을 바닥에 집어 던지려다 참고 책상 한쪽에 쾅 소리가 나도록 올려놓았다.

삐딱한 자세로 앉은 에르난이 코웃음 쳤다.

‘믿기는 무슨…….’

왕궁 전체가 어제 일로 들썩이는데, 부왕은 그에 대해 아들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는 아들을 믿기 때문이 아니었다.

부왕에게 남을 믿는다는 표현이란 ‘신경 쓰기 싫다’라는 뜻일 뿐이다. 늘 그런 식이었다.

‘벌써 왕의 의무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생각하나?’

아버지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에르난은 기가 막혔다.

정말로 해방을 원한다면 양위하는 편이 낫다. 실제로 그런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고.

물론 에르난은 아버지가 양위에 앞서 섭정을 택한 이유를 잘 알았다. 국정 혼란을 최소화하려는 배려 따위는 아니었다.

양위는 절차가 복잡하다. 그러니 왕은 일단 아들을 섭정으로 임명해 빠르게 의무를 떠넘겼을 뿐이다.

에르난은 왕의 대행자지, 왕은 아니었다. 왕과 완벽하게 동일한 권력을 행사하기는 무리다.

‘그러니 어제 같은 일이 터져도 적극적으로 수습할 수가 없지.’

제대로 된 왕이었더라면 코른 후작같이 정도가 지나친 자의 왕궁 출입을 아예 금지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아직 왕이 아닌 자가, 지방 특별위원회의 대표를 함부로 내쫓았다가는 일이 지나치게 복잡해진다.

‘왕실이 지방의 자유를 탄압하네 어쩌네 하면서 들고 일어나겠지…….’

그때 문이 열리고 비서관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처리할 일이 있으면 가지고 오게.”

“예.”

비서가 가져온 일은 별것 없었다. 산재한 과제는 많으나, 대다수는 대표위원회에서 의논해야 했다. 에르난이 바로 결정할 만한 일은 적었다.

서류를 이것저것 뒤적이던 에르난은 불법 약품 단속 결과 보고서를 읽었다. 대다수 약은 미신적인 주술사가 만들어 사랑의 묘약 같은 이름을 달아 팔았다.

불현듯 에르난은 레이테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숙부가 조카에게 하려던 역겨운 짓이 생각났다.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군. 어떻게 레이테를…….’

레이테. 에르난은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달싹거리며 아내를 불러 보았다.

그녀의 이름은 부드러우면서도 그 끝이 살짝 거세게 끝난다. 아내에게 잘 어울린다.

한 번 부를 때마다 달콤함이 혀끝을 먹먹하게 감돌았다.

레이테. 레이테. 레이테.

아버지의 한결같은 뻔뻔함에 짜증이 났던 에르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집무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듣고서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웃을 때가 아닌데.’

에르난은 무심한 척 펜을 들고 답신을 적었다. 유해한 약품은 모조리 그 씨를 말려 버릴 것.

“폐하, 클라베시 공작이 뵙기를 청합니다.”

비서의 말에 에르난은 고개를 들었다. 공작이 들어와 인사하자마자 에르난은 말했다.

“어제 일로 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폐하. 국정 정상화를 위한 방안을 논의하고자 합니다.”

“간단합니다. 국왕 폐하께 정식으로 통치권을 위임받은 나를 인정하면 됩니다.”

공작이 난처한 표정을 보였다.

그는 왕의 권력 남용을 감시하는 고위 감찰관이었다. 원래 클라베시의 직책은 왕실과 유대가 깊은 리세우 공작이 세습해 왔으나, 현 공작인 프란세스크는 그 자리를 거부했다.

왕을 감시하기보다, 왕을 위해 감시하는 쪽이 더 좋다는 이유였다. 결국 그는 친척인 클라베시에게 관직을 떠넘겨 버렸다.

‘세스크가 현명했지. 한직인 줄 알았는데, 완전히 늙어 버렸잖아.’

에르난이 기억하기에 그는 삼십 대 후반의 나이였다. 하지만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저희는 당연히 폐하를 인정합니다. 바르시나의 자치권만 명백히 해 주시면 회의를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뿐입니다.”

“자치권을 자꾸 말씀하시는데, 국왕께서 나를 섭정으로 임명하겠다고 발표하셨던 날, 그 문제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이미 언급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릴까요? 사크틸라의 간섭은 없습니다. 기억나지 않는다면 결혼 계약서라도 다시 읽어 보십시오.”

프란세스크가 자기 대신으로 삼을 정도로, 클라베시는 궁정의 주요 인사 중 비교적 왕실에 잘 협조하며 온건한 성향을 지녔다. 그래서 위원회의 대표로 에르난과 대화하러 온 듯했다.

코른 같은 독설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하지만 에르난은 위원회에 틈을 내주고 싶지 않았다.

“레이테는 사크틸라의 여왕이 아니라 바르시나 섭정의 아내로서 내 옆을 지켜야 합니다. 아내를 인정하지 않으면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왕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알겠소.”

“저기, 폐하…….”

“다음 주에 정상적으로 회의를 개최할 겁니다. 그때 어떻게 나오는지 두고 보도록 하지요.”

말을 마친 에르난은 입을 굳게 다물고 공작을 응시했다. 더 이상의 논쟁은 거부하겠다는 의사가 또렷했다.

“……알겠습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폐하.”

“내 아내도 함께.”

공작은 대답 대신 깊게 몸을 숙여 인사했다. 그가 집무실에서 나가자 비서가 에르난에게 다가왔다.

“폐하, 모임 초대장이 몇 개 와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지?”

“우선 당장 오늘 밤, 왕비 폐하의 모임입니다. 지난번에 참석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는 원래 왕을 배웅하여 수도원까지 함께 가실 예정이셨으니, 일정이 맞지 않는다고 일찌감치 거절해 두었습니다. 혹시 참석을 원하신다면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아니, 괜찮네.”

잘 되었다. 시간이 있더라도 가고 싶지 않았다.

최신 예술의 감상과 교류는 기대 이상으로 즐거웠다. 하지만 모임 성격상 그곳은 대륙주의자의 소굴과도 같다. 당분간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투성이다.

“다음은 무역상 총회입니다. 대륙과 거래하는 해상 무역상이 주로 모이는지라, 본래 항구에서 열리는 모임입니다. 다만 올해는 축제도 즐길 겸 살두비아에서 한다는군요. 오늘 밤 개회식부터 나흘 동안 열리며, 폐회식에 폐하를 정식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초대는…….”

“잠깐. 오늘이 개회식이라고?”

“예, 폐하.”

에르난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오늘 참석할 테니 그쪽에 연락해 두게.”

무역상 총회 역시 대륙 문물에 심취한 자가 득실거릴 자리다. 그러나 다음 주에 다시 열릴 대표위원회까지, 에르난은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보낼 마음이 없었다.

대화가 통할 자를 찾아 자신의 지지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 확실한 협력자가 아니어도 좋았다. 적어도 에르난의 의견을 경청하고 숙고할 만한 수준이면 된다.

상인은 철저하게 이익을 좇는 부류이다. 따라서 이득이 될 방향만 제시한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에르난을 도울 것이다.

* * *

해가 질 무렵 에르난은 처소로 돌아왔다. 레이테는 거울 앞에 앉아 시녀들에게 몸단장을 받고 있었다.

에르난은 크게 심호흡한 다음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들이 먼저 에르난의 등장을 알아차리고 인사했다. 이어서 레이테도 그를 보았다.

“어서 와요, 에르난.”

레이테가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아직 드레스를 입기 전인지, 아내는 하늘거리는 하얀 슈미즈 위에 가벼운 가운만 걸쳤다. 청초한 모습이다.

환히 웃으며 다가오는 남편에게 레이테가 물었다.

“좋은 일 있어요?”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다만 당신이 너무 아름다워서.”

에르난은 아내의 이마에 키스했다.

“아직 단장도 덜 끝냈는걸요……?”

아내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도 같았다. 진짜인지, 노을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시녀들이 레이테의 양옆에 서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각자 나누어 쥐고 땋았다.

‘머리카락 만지고 싶었는데…….’

아쉬움을 달래고자, 에르난은 하얗게 드러난 아내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따뜻했다.

레이테가 미세하게 몸을 움찔거렸다. 에르난은 아주 약하게 살결을 빨아들였다가 금방 놓아주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며 눈을 동그랗게 뜬 레이테가 꽤 귀엽다.

시녀 중 하나는 에르난의 모습에 놀랐는지 손에 쥔 여왕의 머리카락을 놔 버렸다.

“죄송합니다, 폐하……!”

“아,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하던 일을 마저 하시지요.”

에르난은 몇 걸음 뒤로 물러서 아내를 관찰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거울 앞에 앉아 있다. 에르난은 거울에 비친 아내의 표정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얼굴이 확실하게 붉어져 있다. 노을빛이 아니었다.

왜? 부끄러운가? 기쁜가? 남편을 어떻게 생각할까? 희망이 있을까?

숱한 궁금증이 떠오르지만 물을 수는 없었다. 에르난은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 정말로 아무 일 없는 거예요?”

뜻밖에도 레이테가 먼저 물어 왔다. 그녀 역시 거울을 통해 남편의 표정을 관찰했을까?

“아닙니다, 조금 피곤할 뿐입니다. 그런데 부인, 이 시간에 머리를 땋다니 외출 일정이라도 있습니까?”

“왕비께서 초대하셨는데요, 당신은 모르나요?”

에르난은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는 잠시 주변 분위기를 살폈다.

시녀는 사크틸라인과 바르시나인이 섞여 있다. 이런 대화를 해도 괜찮을까. 에르난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곳에는 가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 저는 다른 모임에 가야 합니다. 당신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당신 홀로 보낼 수는 없어요. 가 봤자 서로 불편할 뿐입니다.”

에르난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타일렀다.

“싫어요.”

쌀쌀맞은 목소리 또한 아내의 매력이라 생각하지만, 그에 젖어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정말로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이테는 단호했다.

“당신 생각은 이해하지만, 저는 바르시나 사람을 더 만날 거예요. 그편이 당신과 제게 도움 될 길이라 생각하고. 만나지 않고 대화하지 않으면 가까워질 수 없어요.”

에르난은 풋 웃었다.

웃을 때가 아닌데. 말려야 하는데. 알면서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내도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한다. 대화. 어쩌면 당연한 방법인데도 에르난은 그저 기뻤다.

“카테리나 양과 동행하겠어요. 이러면 되었나요?”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041

왕비의 모임 장소는 이틀 전과 다르게 왕궁 내였다.

레이테는 자신이 입은 옷을 힐끔거렸다. 네크라인이 깊게 파인 붉은색 드레스는 슈미즈로 가리지도 않아 가슴골이 보일 정도였다. 땋은 머리를 돌돌 말아 올렸기에 목덜미도 훤히 드러났다.

“괜찮아요, 폐하. 신경 쓰면 오히려 더 이상하게 보여요.”

카테리나가 속삭였다.

불안 반, 체념 반. 레이테는 마지못해 끄덕였다.

카테리나도 바르시나인이 맞나 보다. 더 정숙한 복장을 선호할 줄 알았던 그녀는 최신 유행 스타일대로 입어야 한다며 레이테를 부추겼다.

정작 카테리나 본인은 얌전한 차림새가 맞다. 여왕보다 화려해서는 안 된다는 고집이었다.

연회장 출입구의 경비병이 여왕을 보더니 입을 떡 벌렸다. 당황하며 금방 자세를 고치는 모양새가, 일부러 보인 반응은 아니다.

경비병은 시작일 뿐이었다. 연회장 내 거의 모든 사람이 레이테를 보고 경악했다. 너무 놀라서 넋이 나간 표정이 한결같았다. 누구도 여왕의 참가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왕은 주눅 들지 않고 태연하게 블랑슈를 향해 다가갔다. 왕비는 여왕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폐하, 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테는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어서 와요, 여왕. 카테리나 양도 잘 왔어요.”

바르시나인을 만나고 싶다. 레이테는 남편에게 그렇게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레이테는 어느 누구보다 왕비를 만나 이야기하고 싶었다.

* * *

에르난이 프란세스크와 함께 향한 무역상 총회는 시내 한복판에 새로 지은 거래소에서 열렸다.

비교적 단순해 보이는 외관은 사실 대륙에서 유행하는 최신 양식이다. 반면 실내의 둥근 천장과 기둥 등은 전통적인 바르시나풍이었다.

흥미로운 대비다. 바르시나인은 외래 문물에 열광하면서, 제 것에 대한 집념에 가까운 자부심도 놓지 않는다.

오늘 밤 에르난이 만날 사람 또한 이 건물과 비슷할 것이다.

“반갑습니다. 바르시나의 진짜 실세들이 여기 다 모여 있었군.”

이곳은 귀족만의 모임이 아니다. 하지만 신분과 무관하게, 이들 한 명 한 명이 주무르는 돈의 액수는 엄청나다.

“여러분은 나를 폐회식에 초대했지요. 하지만 여러분을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픈 마음에 조금 일찍 왔습니다.

바르시나는 여러분의 노고로 부유해지고 있지요. 왕실은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여러분의 자유롭고 안전한 상거래를 보장할 겁니다. 총회 개최를 축하드리며, 좋은 논의가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에르난이 말을 마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국왕 만세!’ 같은 외침도 들렸다.

‘아직 왕은 아닌데.’

물론 에르난은 사크틸라의 왕이지만, 저들이 외치는 국왕이 외국 왕을 가리키지는 않을 것이다.

에르난은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가볍게 들어 답했다. 좋은 시작이다.

* * *

상인들은 일부러 일찍 찾아온 에르난을 환영했다.

그들 역시 대표위원회에서 터진 사건을 잘 알 터다. 하지만 누구도 그 일을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모른 체하는 쪽이 맞겠지만.

안면이 있던 대부호와 대화를 마친 에르난에게 프란세스크가 다가왔다. 두 사람은 발코니 쪽으로 이동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금 들어보았습니다만.”

목소리를 낮춘 프란세스크가 말했다.

“직접적인 의견 표출은 역시 자제하는 분위기입니다. 여기 참석자들은 어디까지나 상인이니까요. 그래도 대강 보니, 폐하의 대처가 지나쳤다는 반응과 모욕당했으니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반응이 반반쯤입니다.”

“적당히 대화가 통할 만하고, 대표위원회에 참석할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정계와 인연이 깊을 인사가 누가 있을까? 귀족이 드물 거라고 생각했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더군.”

바르시나는 귀족의 전통적인 역할을 강요하지 않는 편이었다. 대를 잇는 장남만 아니라면 거리낌 없이 상업에 뛰어들었다.

“그렇다면 저자는 어떨까요?”

프란세스크는 한 남자를 손가락으로 슬쩍 가리켰다.

“누구지? 모르는 사람이지만 묘하게 눈에 익은데.”

“코른 후작가의 사람입니다.”

“잠깐.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상대 아냐?”

그러나 프란세스크가 괜한 사람을 추천할 리는 없다.

“뭐, 한 집안이라고 후작과 똑같으리라는 법은 없으니.”

에르난은 거침없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좋은 밤입니다.”

“전하! 아, 이런……. 송구합니다, 폐하.”

남자는 허둥지둥하며 말을 고쳤다.

실수일까, 고의일까?

대표위원회에서 코른 후작은 에르난을 일부러 전하라고 칭했다. 사크틸라를 완전히 무시한 셈이다. 다시 생각해도 괘씸했다.

에르난은 실수에 개의치 않는 듯 웃음 지었다.

“혹시 우리 어딘가에서 만나지 않았던가?”

“네? 저는 거의 십 년 만에 본국에 돌아……, 아. 저는 조안 피로시라고 합니다. 소개가 늦어 죄송합니다, 폐하.”

“피로시? 코른 후작과 어떤 관계인가?”

“아……, 후작께서 제 백부이십니다.”

조안은 에르난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연히 어제 일 탓이겠지. 에르난은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딱히 후작과 닮은 줄은 모르겠는데. 아, 자네가 훨씬 더 잘생겼다는 뜻일세. 물론 코른은 바르시나의 귀중한 인재지만, 솔직히 미남과는 거리가 있잖은가?”

“예, 사실 폐하의 말씀이 맞……, 아니 그러니까…….”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지경으로 조안은 말을 더듬었다. 노련한 상인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인다.

“……송구합니다, 폐하. 실은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정신이 없습니다.”

“이해하네.”

“선친의 일을 물려받은 지 아직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터라……. 여태 대륙 본토의 대학에서 공부만 했거든요.”

과연, 그는 학생에 더 어울리게 생겼다. 갑자기 장사에 뛰어들어 고충이 많은지, 얼굴 자체가 피로에 가득 차 보였다.

“차차 익숙해질 걸세. 그런데 후작의 조카라면 혹시 세르지 피로시와는 어떤 관계인가?”

“제 동생입니다만……. 아, 폐하를 모시러 사크틸라에 다녀왔다더니.”

“맞아. 왕비의 모임에서도 본 기억이 나네. 따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당시 에르난은 여러 사람과 대화했으나, 세르지에게는 아예 말조차 걸지 않았다. 과시욕 가득한 태도가 너무나 바르시나인다웠던 전령은 그곳에서 아내를 무시했다. 괘씸했다.

“동생은 예술에 관심이 많아서요. 아마 오늘도 그곳에 갔을 겁니다.”

에르난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

‘레이테……, 별일 없어야 할 텐데.’

* * *

“카테리나 양!”

귀에 익은 목소리에 레이테는 뒤를 돌아보았다. 지난 모임에서도 보았던 세르지였다.

세르지는 카테리나의 손을 덥석 쥐더니 입을 맞췄다. 그녀가 뭐라 반응할 틈조차 없었다.

“아, 저기…….”

“무슨 일인가요?”

카테리나가 당황해 말을 더듬자, 레이테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여왕은 세르지를 향해 태연하게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세르지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기세가 꽤 험악했다.

‘코른 후작의 조카라고 했지. 이런 모임에도 참석하니, 역시 대륙주의자일까?’

하지만 아무리 대륙주의자가 사크틸라 여왕을 싫어한다고 해도, 그의 반응은 과했다.

세르지는 카테리나의 손을 놓고 여왕의 손등에 건성으로 입을 맞춰 인사했다.

“……여왕 폐하.”

“만나서 반가워요. 세르지 피로시였지요?”

“예.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폐하.”

억지로 쥐어짜 낸 말에는 기쁨도 공경도 없었다.

인사를 마치자마자 도로 카테리나를 향한 세르지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가 대륙이며 사크틸라며 여기저기 다녀오는 사이 더 아름다워지셨군요!”

“네에……, 먼 길 다녀오느라 고생하셨겠네요…….”

“이곳에서 아가씨를 만날 줄 알았더라면 치장에 더 신경 썼을 텐데. 단출한 행색을 양해해 주십시오.”

“아니, 괜찮은데요…….”

단출하기는커녕, 세르지의 옷은 요란하기 그지없었다. 레이테가 축제에서 보고 기겁했던 그 스타일이었다.

안에 입은 슈미즈가 튀어나오도록 일부러 곳곳을 길게 찢은 겉옷은 어깨도 엄청나게 부풀렸다. 타이츠는 좌우의 색과 문양이 달라서 어지러웠다.

‘더 화려해지면 카테리나가 도망갈걸.’

경박하다 못해 퇴폐적이다. 여왕에게 노출도가 강한 드레스를 태연하게 권하던 카테리나마저도 기가 질렸는지 얼굴을 굳혔다.

“아아, 아가씨. 정말로 아름다우십니다. 우아하고 정숙하신 자태에 감동의 눈물이…….”

“잠깐만요, 설마 진짜 우시는 건 아니죠?”

“정말 자상하시군요. 아리따운 아가씨 앞에서 사내가 눈물을 보이다니, 추하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눈물은 마음으로 삼키겠습니다.”

“다행이네요…….”

카테리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대단히 지쳐 보였다.

상기된 얼굴과 울먹울먹 반짝이는 눈. 에르난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만큼 부담스러운 태도. 레이테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설마 저 사람, 카테리나를 좋아하나?’

절대 안 어울린다. 더군다나 수도원에 들어가겠다던 카테리나다. 결혼도 남자도 관심 없을 터다.

무엇보다, 정말 카테리나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일단 조신해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여왕은 카테리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카테리나, 오늘 당신의 동행을 요청한 이유는 함께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예요.”

“그런 말씀은 없으셨는데…….”

맞다. 없다. 카테리나의 동행은 순전히 에르난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난처해 어쩔 줄을 모르는 그녀를 레이테는 차마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아까는 준비에 바빠 말을 못 했네요. 지난번 모임에 남편과 참석했을 때 만난 화가가 있답니다. 왕비께서 그에게 제 초상화를 맡겼는데, 당신 것도 부탁하고 싶어요.”

“네? 마사초 화백을 말씀하시나요?”

“나를 수행하느라 고생이 많으니, 선물을 하나 주고 싶군요. 설마 그가 여왕의 주문을 거절하겠어요? 아, 혹시 초상화가 부담된다면, 다른 그림도 괜찮아요. 저번에 보니 종교화를 무척 잘 그리더라고요.”

“영광이에요, 폐하! 마사초의 그림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카테리나가 환히 웃었다.

‘이렇게 천진난만하게 기뻐하는 아이를 어디서 퇴폐 귀족 따위가.’

레이테는 카테리나의 손을 꽉 붙잡고 자리를 뜨려 했다.

“마사초는 오늘 불참했습니다, 폐하.”

하지만 세르지의 말이 두 사람을 붙잡았다.

“아내가 아파 오늘은 쉰다고 했거든요. 제가 그 사람과 조금 친합니다.”

“……그런가요?”

친하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이런 모임에 출석하는 사람이니 화가와 친분이 있을 법도 하다.

“카테리나 양에게 어울릴 다른 화가를 추천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좋아요, 부탁해요.”

아무래도 세르지는 어떻게든 카테리나의 환심을 사고 싶은 모양이었다.

“데리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세르지는 꾸벅 인사하고 사라졌다. 인사하는 내내 그의 눈은 여왕이 아닌 카테리나를 향했다.

“이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되는데. 죄송합니다, 폐하.”

카테리나가 쩔쩔맸다.

“저 남자, 카테리나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는데요.”

“후우, 맞아요. 저에게 청혼할 거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녔어요.”

“……최악이네요.”

“참다못한 오빠가 그분을 따로 불렀지요. 변변찮은 관직도 학식도 없이, 집안에 기대어 놀고먹는 쓰레기 주제에 어디서 내 동생을 넘보고……, 앗, 죄송합니다!”

“아니……, 계속 얘기하세요.”

레이테는 귀를 의심했다. 에이, 설마. 카테리나같이 참한 숙녀의 입에서 상스러운 말이 나올 리가.

“아, 아무튼 호통을 쳤더니 그 길로 대륙으로 떠나 버렸어요. 유학 간 형처럼 공부하겠다며. 돌아온 줄은 몰랐지만요.”

“유학은 잘 모르겠지만, 관직은 성공했나 보네요. 자우메 왕의 친서를 사크틸라로 들고 온 전령관이 돈 세르지였거든요.”

아니, 관직도 어쩌면 임시직일지 모르겠다.

“폐하, 죄송합니다. 괜히 제가 따라와서 민폐를 끼쳤어요.”

“아녜요, 오히려 내가 카테리나를 데려오는 바람에 난감하게 했네요. 그러니 미안해서라도 그림을 꼭 선물하고 싶어요.”

세르지는 금방 돌아왔다. 깐깐한 인상의 나이 든 남자와 함께였다.

“사크틸라의 여왕 폐하를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저는 피에르라고 합니다.”

화가는 놀랍도록 유창한 사크틸라어로 말했다.?

#042

레이테는 깜짝 놀랐다.

“어머, 사크틸라 분인가요?”

“아닙니다, 저는 대륙 출신입니다. 다만 수년 전, 사크틸라를 여행하고 그곳에 매료되었지요.

옛 제국의 수도교를 보았을 때 감동에 겨워 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군요. 그 충격이 너무나 커, 젊었을 때 관뒀던 건축 공부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여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첨할 수는 있다. 하지만 화가의 말은 진심 같았다.

“사크틸라어 실력이 뛰어나군요.”

“이베로 반도의 교양인이라면 모두 사크틸라어를 구사한다기에 조금 공부했습니다.”

화가의 사크틸라어는 사소한 문법 하나도 틀린 구석이 없었다. 결코 조금 공부해서 가능한 실력이 아니다.

“여, 역시 학구파다우시오.”

세르지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나이가 들어도 배움을 멈출 수는 없지요. 세상이 제게 주는 자극은 끝이 없으니까요. 아아, 반도 땅을 다시 밟자마자 사크틸라의 여왕 폐하를 뵐 줄이야!”

“저기, 그런데 여왕 폐하가 아니라 시녀인 카테리나 양의 초상화를 부탁드리려고…….”

“물론 그려야지요. 돈 세르지, 저를 반도로 초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물론 여왕과의 만남에 감사한다는 뜻이다. 세르지가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여왕 폐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폐하의 초상화도 그리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돈은 필요 없습니다. 사크틸라의 주인이신 폐하께 제 작품을 바치고 싶습니다.”

“허락하지요. 무척 기대되네요.”

아마 세르지는 카테리나에게 잘 보이려고 화가를 데려왔을 것이다. 하지만 일이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니 대단히 난처한 듯했다.

‘에르난은 내가 몰매라도 맞을 것처럼 걱정했지. 이 일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하려나?’

유쾌하게 웃음 짓던 레이테는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렸다.

“마에스트로, 조금 생각이 바뀌었는데요.”

“그러십니까? 얼마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남편과 함께한 모습을 그려 주지 않겠어요? 사크틸라의 주인은 나 혼자만이 아니거든요.”

깐깐한 인상과 정력적인 태도로 보아, 화가는 자신의 구상에 타인이 간섭하면 무척 싫어할 사람 같았다.

하지만 레이테는 반드시 그에게 부부 초상화를 맡기고 싶어졌다. 그의 호의에 감격했고, 조그마한 복수심도 함께했다.

“그렇고말고요! 폐하의 낭만적인 결혼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두 분의 영원한 결합과 사랑을 제 손으로 그릴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결국 사정없이 구겨져 버린 세르지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레이테는 밝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돈 세르지, 피에르 화백을 소개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식견이 좁은 제가 바르시나에 왔다가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또 선물도 받네요.”

세르지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레이테를 노려보았다.

“……폐하의 배움에 도움이 되어 기쁩니다. 부디 배움을 게을리하지 마시어 저희 왕자께 누가 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헉, 카테리나가 숨을 삼켰다. 세르지가 여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무리 뻔하다 해도, 지나치게 무례한 표현이었다.

정작 레이테는 별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않았다.

레이테는 자신이 딱히 너그러운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세르지가 사크틸라의 신민도 아닌데 그런 태도를 보일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를 통해 이뤄진 새 만남이 꽤 신기했기에, 그녀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좋은 인연을 소개해 주었으니 참작해 준다고 치자.’

잠시 머뭇거리던 카테리나가 심호흡한 다음 세르지에게 말했다.

“저기, 돈 세르지. 제게 대륙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다른 데로 가서…….”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씩씩대며 여왕을 노려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세르지는 입이 귀에 걸릴 듯 환히 웃으며 카테리나에게 눈을 반짝였다.

레이테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왕은 카테리나를 다시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안 돼요, 카테리나. 당신은 나를 수행하러 왔다고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야 해요. 돈 세르지와는 나중에 약속을 따로 잡으세요. 자, 어서 가죠. 마에스트로 피에르, 그림은 남편과 의논한 후 다시 연락하겠어요. 그럼 이만!”

레이테는 카테리나를 데리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한참을 걷고서야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저 때문에 괜히 불쾌한 일을 당하셨어요.”

“불쾌하기는 무슨, 재미있었답니다.”

진심이었다. 특이한 화가를 만나 신기했다. 또한 자신을 적대하는 세르지와 나눈 대화도 나쁘지 않았다. 이런 경험은 아마 처음 아닐까?

그 사실을 자각하자, 레이테는 문득 자신의 과거가 무척 멀게 느껴졌다.

옛 삶에서 가장 큰 위협은 단연 숙부였다.

레이테는 그와 대화하고 싶었다. 정확히는 자기 생각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왕은 언제나 숙부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 사람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레이테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조카의 원망과 분노와 심판의 말을 듣지 못하고 숙부는 가 버렸다.

그렇게 만든 사람이 남편, 에르난이다.

당시 느꼈던 절망과 공포를 뒤로하고, 일단 그와 손을 잡기는 했다. 어쨌거나 살아남고 버텨야 하니까.

다만 최근에는 남편과 꽤 친밀해지다 못해, 때때로 이상한 기분을 느낄 지경이 되었다. 가슴을 쿡 찌르거나 긁어내는, 또렷하게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불쾌함은 아니다.

‘뭘까.’

그의 반응에 자신이 점점 예민해지는 이유를 모르겠다. 특히 시도 때도 없이 제멋대로 달아오르는 얼굴은 대체 왜…….

“폐하, 어디 아프신가요……?”

카테리나의 부름에 레이테는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아, 미안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에르난은 뭐 하고 있으려나요.”

아까 상황에서 에르난이 곁에 있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어머, 두 분은 역시 사이가 좋으시네요!”

“그렇게 보이나요?”

“물론요. 부인을 향하는 폐하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고, 다른 시녀들도 난리인걸요.”

레이테는 살짝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꿀이라니, 어울리지 않는다. 그 까맣고 빨간 눈에서 꿀은 무슨 꿀이람.

하지만 레이테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맞는 말 같기도 했다. 정말 아닌데, 어울리기도 하다.

“카테리나, 왕비님을 이쪽으로 모셔와 주겠어요? 사실 저는 그분과 따로 만나고 싶어 이곳에 온 거예요.”

“네. 그리고 폐하, 이제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다니?”

“억지로 저와 친근한 모습 보이지 않으셔도…….”

카테리나가 머뭇머뭇 말했다.

레이테는 순간 멍해졌다. 억지?

마음에도 없는데 카테리나와 친한 척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르지가 얄미워서 조금 과장하는 면은 있었지만.

“억지라니요. 나는 카테리나가 좋아요. 그러니까 아까 상황을 가만히 볼 수가 없었고요. 그림을 선물하고픈 마음도 진짜예요. 아, 혹시 부담스러운가요?”

“아닙니다! 기뻐요…….”

카테리나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돈 세르지와 마주치지 않게 조심해요.”

카테리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경쾌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 * *

왕비는 카테리나와 함께 금방 나타났다.

레이테와 블랑슈는 연회장 근처의 빈방으로 들어갔다. 카테리나가 마실 거리를 간단히 준비해 놓고 나갔다.

“여왕께서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

“음……, 최근 일은 들으셨겠지요. 저와 남편은 그 갈등을 해결해야만 해요.”

블랑슈의 답은 없었다.

그러나 레이테는 알았다. 왕비는 모두 듣고, 또 생각도 할 것이다. 드러내지 않을 뿐.

실은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낫다. 하지만 알면서도 계속 생각하게 된다. 아예 미쳐 버리지 않는 한,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는 시간을 도저히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레이테가 그랬듯이.

“에르난은 오늘 밤, 이곳 대신 무역상 모임에 참석했어요. 그들의 지지를 얻을 생각이겠지요. 그리고 저는……, 바르시나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으나 바르시나인이 아닌 사람의 의견을 듣고 싶어요.”

블랑슈가 바르시나 왕의 두 번째 부인이 된 지는 7, 8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적지 않은 시간을 바르시나에서 보낸 셈이다.

하지만 레이테의 눈에, 왕비는 여전히 바르시나에 동화하지 못한 이방인이었다.

“폐하께서는 남편, 아들은 물론이고 바르시나와도 거리를 두시지요. 또 예술 취미는 철저하게 고향인 대륙 것만 찾고요.”

바르시나는 블랑슈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레이테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바르시나에서 살아남기 위한 폐하의 선택은 고립이었나요?”

너무 평온해 기괴하기까지 하던 왕비의 얼굴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찻잔에 닿은 손가락 끝도 떨렸다.

왕비의 푸른 눈은 무미건조했다. 레이테는 저 눈이 낯설지 않았다. 감정을 지웠을 뿐, 원래 감정이 없던 눈이 아닐 테니까. 과거 레이테가 두려움을 견디기 위해 억지로 보여야 했던 태연함과 흡사한 면이 있다.

“그런 말을 직접 들어보기는 처음이네요. 여왕께서는 보기보다 노골적으로 말씀하는 분이셨군요.”

왕비는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건조했던 눈에 도는 작은 생기를 흥미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가끔 그렇다는 소리를 들어요. 하지만 표현이 과했네요. 사과드립니다.”

“괜찮아요. 오히려 신기하군요. 답변을 드리자면 여왕의 생각이 옳아요. 제 경험을 듣고 싶어 오신 거로군요.”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제 가족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요. 물론 그들도 제게 기대하는 것이 없지요. 여왕께서는 제 아들의 아내가 되셨으니, 우리도 이제 서로 가족이군요. 당신은 가족이 된 제게 무언가를 기대하나요?”

당연히 기대했기에 왕비를 만나러 왔다. 조언이 필요했다. 하지만 레이테는 다시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기대하지 말고 분리하세요.”

뜻밖의 단호한 답은 이제 고독을 완전히 인정한 그녀의 삶을 흔들지 말아 달라는 외침처럼 들렸다.

“부부라는 관계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남편과 당신을 분리하세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바르시나와도 분리될 겁니다.”

분리.

순간 레이테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왕비는 분명히 레이테의 변화를 눈치챘을 텐데도, 전혀 보지 못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지금은 당신에게 저항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바르시나는 여왕의 존재를 잊을 겁니다. 눈앞에 있어도 보지 못할 만큼. 그렇게 되도록 당신의 세상과 남편의 세상을 분리하세요. 저는 그랬습니다.”

분리라는 말은 묵직하게 레이테를 압박했다. 동시에 레이테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저항감을 느꼈다.

이유를 모르겠다.

오랜 침묵이 흐른 끝에, 레이테가 입을 열었다.

“저와 에르난은 동등한 관계, 일치한 존재예요. 결혼할 때부터 철저하게 맹세했지요.”

결국 떠오른 것은 계약이었다. 왕비의 말은 계약과 대치된다.

처음에 에르난은 아내와의 결혼 계약을 분명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억지로 서명한 주제에 여유로운 척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또렷했다.

하지만 며칠 전, 에르난은 계약이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계약의 억압에 이를 갈던 그는, 이제 부부를 연결하는 억지력에 자신을 기댔다. 레이테는 남편의 생각이 왜 변했는지 몰랐다.

“분리라고요. 그렇게는 할 수 없어요. 계약이 있으니까……, 아니, 제가 하고 싶지 않아요.”

남편은 존재만 하면 된다. 그 이상의 역할은 필요 없다. 레이테에게 방해만 된다. 따라서 왕비가 말하는 분리와 무관심은 레이테에게도 유효한 처신이다.

“에르난과 저를 분리하라니. 그렇게 하면 저는 대체 어떻게 살 수 있죠?”

하지만 그녀는 이유조차도 모르는 남편의 태도에 동하는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

레이테에게 결혼 계약은 자기방어를 위한 불안한 수단이다. 하지만 계약에 기대면 안심할 수 있다. 남편과 자신을 분리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를 두려워했던 레이테는 이제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043

무심하게, 혹은 무심함을 가장하며 레이테를 바라보던 왕비가 눈을 감았다. 내려앉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입술은 몇 번 살짝 열렸다 닫히기만을 반복했다.

마침내 다시 뜬 왕비의 눈은 레이테가 줄곧 보았던 무미건조함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의 대화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다른 말을 꺼냈다.

“왜 바르시나는 바다로 진출해야 했을까요?”

“그야 영토가 넓지 않으니……, 아.”

왕비는 자신의 이야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에 반발하는 레이테의 이야기도 원하지 않는다.

결국 레이테 또한 아무렇지 않은 듯 답하려다 말을 멈췄다.

“이곳 이베로 반도의 대다수는 당신의 사크틸라 것이지요. 경쟁자는 서쪽의 헤젤이고.

바르시나는 아무리 가진 땅이 비옥하고 부유해도, 영토와 인구 자체가 워낙 보잘것없는 데다 그마저도 연합왕국을 이루는 세 지역 사이의 견제가 심해 반도의 세력 경쟁에 뛰어들 만한 힘이 없어요.”

“차라리 반도 동쪽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더 동쪽인 바다로 나간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아요. 그렇다면, 대륙 문물에 유독 바르시나가 개방적인 이유는 아시나요?”

“……단순히 교역이 활발하다는 이유 정도라면 일부러 묻지 않으시겠지요.”

“교역이 활발하고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이니, 바르시나는 대단히 개방적인 나라로 보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 나라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오히려 반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긴, 여왕께서는 이미 느끼셨겠지요.”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와서 보고 겪은 바르시나는 대륙주의자라는 말까지 따로 있을 정도로 이베로 반도에 소속감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대륙과 교류해도 그들의 본거지는 어차피 반도다. 그렇기에 바르시나는 사크틸라를 경계한다. 이 땅을 지키려고.

“자기방어를 위한 과시라는 말씀이신가요?”

“바로 등 뒤의 사크틸라에게는 언제라도 위협받을 가능성이 있지만, 대륙은 멀어요. 본토 입장에서는 애써 먼바다를 건너 바르시나를 침탈해 얻을 이익이 없습니다.

바르시나인은 바다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요. 좁지 않은 동쪽 바다를 자신들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니까요.

또, 바다 너머 대륙 본토와 가까운 곳에 바르시나가 소유한 섬이 있지요. 위치가 좋아 상업 면에서도 요지랍니다.”

“에르난이 바르시나령 섬의 총독을 지냈다고 아는데, 그곳인가요?”

“네. 그래서 대륙 본토에 닿았을 때, 넓은 바다와 섬 하나를 등에 업은 그들은 겁을 낼 필요가 없어집니다.”

바르시나는 사크틸라에 예속될까 봐 불안해한다. 여왕이 카테리나에게 들었던 이야기는 이 정도였다. 내정 간섭보다 더 큰 두려움.

하지만 레이테는 바르시나의 속내가 열등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도의 변두리. 결국 사크틸라가 바르시나의 바로 옆에 있는 한, 적대감은 어쩔 수 없다.

‘사크틸라 땅을 멀리 옮겨 버릴 수도 없고.’

그리고 에르난은 대다수 바르시나인의 생각과 반대로, 사크틸라와 손을 잡는 길을 택했다.

서로 반대 방향을 바라보는데, 에르난이 어떻게 그들을 설득한단 말인가?

* * *

“바다의 지배자인 바르시나 상인 여러분.”

에르난이 회장 전체에 들리도록 크고 또렷하게 말했다. 상인들은 각자 나누던 대화를 멈추고 그를 주목했다.

“대표위원회의 의제 중 여러분과 관련된 일이 하나 있는데 다들 아시다시피 상황이 좀 꼬이는 바람에 의논하지 못했습니다. 위원회야 다음 주에 다시 열리지만, 마침 이 자리에 왔으니 먼저 말하지요.

사크틸라 북서쪽에, 죽은 반역자가 세운 해안 요새가 있습니다. 그곳은 바르시나에서도 보기 힘든 대륙의 최신식 대포로 가득했지요. 헤젤의 상인에게 구입했다고 합니다.”

에르난이 더 말할 필요는 없었다. 곧바로 상황을 파악한 상인들의 얼굴이 굳었으니까.

대륙 본토에서 반도로 들여오는 물자는 바다를 장악한 바르시나가 독점했다. 더군다나 무기는 거래가 자유로운 다른 물품과 달리 당국의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 관계가 험악한 헤젤에게 무기를 팔 바르시나 상인은 없다.

에르난은 상인들의 반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떤 제정신이 아닌 놈이 헤젤에게 무기를 팔았답니까?”

“그냥 바르시나 상인에게 사지 않았을까요? 사크틸라와 거래하는 무기상은 몇 있으니…….”

“왜 저를 보며 말하시는지? 제가 폐하의 적과 거래했다고요? 그리고 폐하께서는 분명 헤젤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다른 회사는 몰라도 저는 헤젤은커녕 사크틸라에도 무기를 판 일이 없습니다.”

“저, 저도요.”

“다들 아니라고만 하는데, 그러면 헤젤이 대륙과 직거래라도 했다는 소리요?”

“폐하의 말씀을 듣기는 했습니까? 헤젤이라잖아요!”

“…….”

산만한 대화가 어느 정도 잦아들고 나서, 에르난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떤 경로로 대륙의 무기가 헤젤까지 갈 수 있었는지 아직은 모릅니다. 하지만 개회사에서도 말했듯이 왕실은 여러분의 자유와 안전을 위해 노력할 겁니다.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 우리의 바다를 지켜야지요.”

에르난은 일부러 옛 제국어 표현을 사용했다.

제국어는 지금은 교회 의식과 학문 연구에만 사용되는 언어다. 하지만 교양인 사이에 알려진 문구가 일부 있다. 마레 노스트룸도 그 중 하나였다.

광활했던 제국의 영토는 바다 자체를 빙 둘러쌌다. 옛 뱃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그 바다를 자신들의 바다라고 불렀다.

즉, 마레 노스트룸은 제국의 영광을 상징했다.

상인들의 얼굴빛이 단숨에 바뀌었다. 제국의 영광에 빗대어지는데, 가슴이 끓어오르지 않을 수 없다.

‘역시 예상대로야.’

그들을 바라보는 에르난의 눈이 승리감으로 번뜩였다.

대륙 가장자리에 위치한 이베로 반도는 제국의 식민지였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 바르시나는 그 가장자리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다.

하지만 바다는 다르다. 바다에서의 영향력만 보면, 변두리 중 변두리 같던 국가는 가히 옛 제국만 한 힘을 가졌노라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사크틸라와 땅을 맞대었기에 그들의 침탈을 염려하지. 하지만 정작 사크틸라와 그런 문제를 겪는 나라는 헤젤입니다.

헤젤 서쪽의 바다는, 우리의 풍요로운 바다와 완전히 반대입니다.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따라서 그들은 동쪽으로 뱃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바르시나는 예상조차 못 했지만, 헤젤이 우리 바다를 어지럽히는 일은 언젠가 터질 문제였던 셈입니다.”

상인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었다. 정말로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에르난이나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바르시나와 헤젤은 직접 영토를 맞대지 않았다. 바르시나가 서쪽으로 진출할 이유도 없었다.

즉, 바르시나인에게 헤젤은 존재하지 않는 국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급변했다. 바르시나에서는 거의 이름만 알려진 존재였던 헤젤이 이제는 바르시나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솔직히 인정합시다. 우리는 헤젤을 거의 모릅니다. 헤젤어 할 줄 아는 분? 나는 발음부터 영 혀가 꼬이던데.”

에르난은 힐끗 프란세스크를 바라보았다. 프란세스크가 피식 웃어 주었다.

아마 이곳에서 무난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할 수준의 헤젤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프란세스크뿐일 것이다. 사실 그의 실력은 무난한 수준을 넘어 뛰어나기까지 했다.

“우리는 교류든 대립이든 헤젤을 상대한 경험이 풍부한 세력과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에르난의 주장은 또렷했다. 사크틸라.

“우리의 바다를 침범하고 질서를 교란하는 세력은 사크틸라가 아니라 헤젤이오. 그들을 통제할 강력한 수단이 필요하고,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와 사크틸라의 이익은 완전히 일치합니다.

헤젤이 우리 바다까지 오려면 반드시 사크틸라 앞을 지나쳐야 하니까. 내전이 끝난 사크틸라도 이제 자신의 앞바다를 정비할 때가 되었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몇 보였다. 그러나 미심쩍은 눈길도 여전했다. 어느 쪽이든, 에르난의 말을 대단히 진지하게 경청하는 태도만은 동일했다.

“헤젤 문제의 완전 종식. 이것이 내가 바르시나인으로서, 여러분의 왕이 될 자로서 반드시 이루려는 목표입니다. 이를 위해 나는 사크틸라가 내민 손을 잡았지만, 내 진심을 오해하는 분들이 많아 답답합니다.”

정말로 헤젤 문제를 해결하려고 결혼했나? 에르난은 긍정할 수 없었다.

에르난은 대륙을 선망하는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 대상이 아주 살짝 현실적이었을 뿐이다.

여왕의 주인. 두 나라의 주인. 반도의 주인.

사실 대상만 현실적이지 품은 소망은 더 비현실적이었다.

남을 설득하려면 더 그럴듯한 구상이 필요하다. 에르난은 바다에 대한 바르시나인의 자존심을 자극하기로 결심했다.

첫 설득 대상으로 무역상은 적절했다. ‘우리의 바다’ 같은 제국어 표현까지 이용하면서 그들의 허영심을 자극했다.

또한, 상인들에게 헤젤은 분명히 눈앞에 닥친 현실 문제이기도 했다. 에르난은 상인들이 자신의 주장에 동조하리라 거의 확신했다.

“사크틸라의 여왕은 나와 여러분의 중요한 협력자요. 또한 이 협력 관계에서 우리는 결코 사크틸라에 가려지지 않을 겁니다. 그러려고 내가 사크틸라의 왕관을 썼으니까.”

뒤늦게 짜 맞춘 명분은 그럴듯했다. 하지만 책임감 없이 그냥 하는 말도 아니었다.

억지 계약을 만들고 남편을 들러리로 취급하면서까지 자신의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레이테는 그 권력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아내는 경험이 부족하지만 성실했다.

레이테가 숙부 밑에서 웅크리던 시절, 에르난은 3년 동안의 총독 생활로 이미 통치를 경험했다. 열심히 일했지만, 과연 자신은 얼마나 절박하고 진심이었을까?

‘헤젤 때문에 지긋지긋했지.’

크고 작게 헤젤과 부딪쳤던 경험을 떠올려보면, 역시 사크틸라와 협력하는 쪽이 적절하다. 3년의 임기 동안 끝내 해결하지 못했던 헤젤과의 갈등을 끝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어쩌면 예상보다 빨리 바르시나에 돌아와서 다행일지도 몰라. 더 일찍 현실과 맞닥뜨렸으니까.’

개인적이었던 선택에 공적인 정당성을 부여해야만 한다. 에르난은 왕이 되었고, 왕이 될 것이므로.

그리고 박수 소리가 침묵을 깨웠다.

놀랍게도 그것은 조안 피로시, 코른 후작의 조카가 시작했다.

조안을 시작으로 곧 회의장의 모든 사람이 박수를 쳤다.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바르시나 만세!”

‘바르시나 만세라니, 사크틸라에서나 들을 법한 환호성이잖아.’

지금은 한 왕을 섬기지만, 바르시나는 원래 반도 가장자리의 소왕국 셋이 연합해 만들어졌다. 그런 탓에 바르시나라는 국가보다 자기 지역에 소속감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대륙 문물을 선호하는 태도와는 모순된 폐쇄적 자부심이다.

무역상인은 그 정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이다. 그들의 이해관계는 바다와 그 건너 대륙과 훨씬 관계가 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애초에 그들은 지방 지배세력의 핵심에 들지 못했기에 장사를 택한 경우가 많았다.

에르난은 자리에 앉아 기분 좋게 술을 들이켰다. 기대 이상의 반응이 기쁘다. 진한 포도주가 어느 때보다 무척이나 상쾌하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회장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다음 왕은 우리 편이라는 기대감이 그들을 취하게 했다.

“폐하.”

조안이 다가와 에르난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사실 저는 선친의 사업을 갑자기 떠맡아 혼란스러웠습니다. 갑자기 가신 선친을 많이 원망하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폐하께 봉사하라는 뜻이었던 모양입니다.

우리 상인은 분명 위대합니다. 하지만 대륙에서 공부하다 보니, 바르시나가 얼마나 변방국인지 알겠더군요.”

그는 이미 얼큰하게 취한 채였다. 혀가 중간중간 꼬이기도 하고, 목소리가 멋대로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점점 바르시나가 하찮아 보였습니다. 억지로 돌아와서 보니 헤젤 문제 하나 제대로 해결 못 하면서 대륙의 문물만 즐기는 모습이 솔직히 한심하더군요.”

자네 동생이 그런 사람이야. 에르난은 마음속으로만 말했다.

“하지만 새 왕이 되실 폐하께서는 역시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가 봅니다. 대단히 감동했습니다. 저는 폐하와 바르시나를 위해 충성을 다할 겁니다.”

조안은 에르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몸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전후좌우로 흔들리는데도 기세만은 무척 진지했다. 검을 뽑아 기사 서임이라도 해 주어야 할 분위기다.

‘이런, 단단히 취한 모양이군.’

에르난은 검을 들어 그의 어깨에 대어 주는 대신, 조안을 몸소 일으켜 세웠다.

“나 또한 오늘 밤 그대에게 감동했소. 내가 예정보다 일찍 이곳에 온 이유는 그대를 만나기 위해서였을까?”

조안은 거의 울 것처럼 눈을 글썽댔다.

‘이자와는 되도록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어.’

에르난은 픽 쓰러지는 조안의 몸을 받쳐 들어 프란세스크에게 넘겼다.

“잘 돌봐주게. 자네의 귀중한 동료야.”

기사 작위라니. 상인에게는 필요가 없다. 하지만 주면 역시 좋아하려나? 에르난은 기분 좋은 고민을 시작했다.?

#044

처소에는 시녀들만 가득했다. 역시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휴우, 레이테는 한숨 쉬었다.

‘……잠깐, 이게 한숨 쉴 일인가?’

에르난은 시내에서 열리는 모임에 갔다. 왕궁과 시내의 거리는 멀다. 시간이 늦었으니 아예 그곳에서 하루 자고 올지도 모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대단히 꼼꼼하게 꾸몄기에, 레이테는 옷을 갈아입는 데에도 시간을 한참 써야 했다.

몸을 단단히 조인 매듭을 풀고, 머리핀이며 보석 등을 떼어내는 동안 레이테는 멍한 눈으로 서 있다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피로함을 애써 억누르며, 레이테는 왕비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남편과 당신을 분리하세요.’

왕비가 말한 분리란 공적인 관계만 유지하라는 뜻일 터다. 사적인 친밀감, 기대, 교류 따위는 하지 말 것.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논리였다. 레이테 자신도 남편을 그런 식으로 대했으니까. 에르난은 그녀의 남편이기만 하면 되었다. 아니, 그 이상의 존재가 되면 오히려 위험했다.

하지만 그 분리는 사크틸라에서나 가능했다.

‘지금은 달라야 해. 에르난을 옆에 두기만 해서는, 에르난의 옆에 있기만 해서는 안 돼.’

레이테는 이를 악물었다. 대표위원회에서 모욕당했던 날, 그녀는 남편에게 차라리 자신을 들러리로 세우라 말했다. 에르난은 그녀의 말에 대단히 분노했다.

그가 옳다. 부부가 손을 잡아야 한다면, 그래서는 안 된다.

돌파구를 찾고자 왕비를 찾아갔건만 과거로 돌아가라는 말이나 들었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 성과가 있었으나, 분리라는 말이 레이테를 먹먹하게 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이 거부감은 정략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뭘까. 레이테는 머릿속을 정리할 수 없었다.

“폐하, 팔을 들어 주십시오.”

시녀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레이테는 양팔을 조금 벌렸다. 가운 안에 받쳐 입은 슈미즈가 벗겨졌다. 시녀들이 젖은 수건으로 여왕의 몸을 꼼꼼히 닦았다.

잠옷용 슈미즈를 입고, 오랫동안 꽁꽁 묶어 둬서 엉킨 머리를 한참 빗은 뒤에야 레이테는 침실에 들 수 있었다.

에르난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레이테는 침대에 누웠다. 몸이 저절로 풀썩 쓰러졌다. 몸도 머리만큼이나 피곤한가 보다.

차라리 다행이다. 그러잖아도 최근 잠자리에서 남편의 치근덕거림이 꽤 집요해졌던 차다. 레이테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눈을 감았다.

“……안 오네.”

그러나 눈을 감은 지 한참이 흘러도 의식은 닫히지 않았고, 급기야 혼잣말까지 하고 말았다.

‘오래간만에 해방됐는데 평화를 누리지도 못하고……, 어?’

레이테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에르난이 반역자 토벌을 위해 출병했을 때였다. 당시 레이테는 분명히 혼자만의 편안한 잠자리에 기뻐했다. 남편이 좋고 싫은 감정과는 별개로, 순전히 몸의 피로 탓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레이테에게는 남편 없이 혼자 보내는 밤이 다행도, 해방도, 평화도 아니었다.

그녀는 피곤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외로웠다.

* * *

조안은 프란세스크에게 업혀 나갔다. 에르난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조안의 호의를 보니 자신감이 생겼다.

좀 더 과감해도 된다.

한동안 에르난은 위축되어 있었다. 사크틸라의 왕관을 쓰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억지로 바르시나에 와 섭정이 되기까지, 마음대로 풀리는 일이 드물었다.

지금은 마치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낙관이 그를 도로 휘감았다. 자신의 길이 막히지 않았다는 확신이 에르난을 도로 일으켜 세웠다.

그래서 에르난은 잠시 잊어버렸다. 자신감이 넘쳐나던 시절에, 그가 레이테를 어떤 존재로 여겼는지.

“어이쿠, 폐하. 일단 한 잔 받으시지요.”

몇 잔째인지 알 수 없지만, 에르난은 이번에도 기쁜 마음으로 단숨에 술을 마셨다.

“여기 모인 저와 친구들은 원래 향신료를 주로 다룹니다만, 최근에는 반쯤 취미 삼아 그림 거래도 시작했습지요. 좋은 작품을 많이 봤는데, 그 어느 것도 오늘 폐하께서 저희에게 보여 주신 대륙적인 그림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대륙적이라. 에르난은 피식 웃었다.

그가 오늘 했던 말은 사크틸라와의 연합과 반도로의 세력 확장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정반대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모양이다.

하긴, ‘우리의 바다’ 따위의 표현을 쓰며 어느 정도 착각을 유도하기도 했다. 모든 사람이 조안 같지는 않을 테니.

“과찬일세. 자네 말대로 내가 그림을 그렸다면, 너무 흐릿해 알아보기도 힘든 그림 아닐까? 그림을 제대로 완성하기 위해서라도, 그대들의 힘이 필요하다네.”

“하하하, 영광이옵니다!”

향신료상 네 명은 하나같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잔이 다시 가득 차고, 또 비워졌다. 에르난의 눈앞이 살짝 핑그르르 돌고 눈이 반쯤 감겼다. 이제 슬슬 그만 마셔야겠다. 또 채워지는 잔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네 사람은 에르난에게 자신의 사업을 자랑하기에 바빴다. 술기운이 계속 올라오는 바람에 그들의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대충 듣기에도 그들의 성과는 탁월했다.

에르난은 간혹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듣기만 했다. 조금 졸렸다.

“폐하께서는 여왕과 무척 사이가 좋아 보이셨죠. 오해해서 정말 송구하옵니다.”

그러나 여왕이라는 말이 귀에 꽂힌 순간 에르난은 눈을 부릅떴다.

“오해라니?”

“아무리 사랑이 부부의 미덕이라지만, 사실 저희 눈에는 폐하께서 좀 지나치게 여왕께 매달린달까…….”

“여왕을 모시는 시녀들의 증언도 퍼져 있잖습니까. 여왕은 가만히 있으면 꽤 차가운 인상인데, 남편을 대할 때만은 낯빛도 목소리도 달라진다더군요. 과연 폐하를 홀릴 만한 교활……, 아. 이 표현은 조금 과했군요. 죄송합니다.”

주절주절 떠들던 상인이 다급히 사과했다. 취기에 풀려 있던 에르난의 얼굴이 빠르게 굳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보게, 아무리 그래도 여왕께 그런 표현을 쓰면 어떡하나!”

“송구합니다, 폐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 친구가 술이 들어가면 말을 조금 막 하는 버릇이 있는데, 악의는 없습니다. 선처해 주십시오, 폐하.”

동료 상인들이 쩔쩔매며 상황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에르난의 표정은 점점 차가워지고, 숨이 멎을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무릎이라도 꿇고 사과할 기세로 상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에르난은 손을 들어 그를 멈춰 세웠다.

“괜찮네. 앉아 있게.”

“송구하옵니다, 폐하.”

어색한 공기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에르난은 잔을 들어 입 안으로 술을 털어 넣은 뒤 말했다.

“……자네들의 염려가 무엇인지 알겠는데, 걱정할 필요 없네. 레이테와 나는 더함도 모자람도 없이 동등한 관계거든. 계약서까지 써 뒀지.”

에르난은 상인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흐리멍덩하게 흔들렸다.

“아까 말했잖은가. 여왕은 바르시나에 쓸모 있다고. 이베로 반도에서뿐만 아니라, 멀리 우리 바다 전체에 도움 될 귀중한 보석이야. 그러니 자네들도 내 아내를 너무 밉게만 보지 말게.”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반려를 욕보이는 일은 곧 폐하를 욕보이는 일이거늘……!”

어쩔 줄을 모르며 연신 고개를 조아리던 상인이 일순간 몸을 흠칫 떨었다. 에르난의 눈이 벌겋게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놀란 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조심스레 에르난을 바라보았다. 에르난의 눈은 평소와 같은 새까만 색이었다.

착각이라 생각했는지, 상인은 조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 괜찮으니 좋은 시간 보내시오.”

자리에서 일어나는 에르난의 몸이 비틀거렸다. 상인들이 다급히 일어나 그를 받쳐 들었다.

* * *

쉴 곳을 마련해 두었으니 자고 가라는 상인들의 권유를 거절하고, 에르난은 왕궁으로 돌아왔다.

“하룻밤 사이 취객을 두 명이나 수습할 줄이야.”

에르난을 부축하던 프란세스크가 투덜거렸다. 키득키득 웃는 에르난의 어깨가 과하게 들썩였다.

“세스크, 들었지?”

“무엇을요?”

“어, 그러니까…….”

에르난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정확히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목구멍에 너무 많은 것이 엉켰다.

결혼은 당연히 이득을 위한 선택이었다. 레이테는 그에게, 또 바르시나에 도움이 될 존재가 맞다. 에르난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비겁한 선택을 했다. 자신이 아내에게 매달리는 것이 맞다고, 아내가 자신을 대할 때 진심이든 아니든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 주어 기쁘고 사랑스러워 미칠 지경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상인들의 말에 분노했지만 에르난은 참았다. 이유가 뭘까.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의 속내가 들통날까 무서워서? 레이테가 그의 마음을 알면 지금의 관계마저 사라질까 두려우니까?

“당신의 한심함을 말한다면, 전부 들었습니다. 잘하다가 그런 마무리라니. 이제부터 술 끊으십시오.”

“안 돼, 그러면 술 좋아하는 레이테가 외로워할 거야…….”

에르난은 다시 몸을 들썩이며 기괴한 웃음소리를 냈다. 자신이 말하고도 우스웠다. 비겁한 짓을 한 주제에, 아내가 외로워할 거라며 걱정하다니 뻔뻔하지 않나.

그리고 어차피 술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정신이 멀쩡했어도, 과연 자신은 아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대로 말했을까?

“한심……, 맞아. 한심해.”

“아시면 됐습니다.”

에르난은 프란세스크의 팔을 거두고 홀로 비틀비틀 걸어 처소로 들어갔다.

* * *

레이테는 잠들어 있었다. 에르난은 그녀가 깨지 않게, 최대한 조심히 그녀의 옆에 누웠다. 하지만 취한 탓에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흐응……, 에르난……?”

레이테가 몸을 뒤척이더니 에르난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반쯤 뜬 그녀의 몽롱한 눈이 신비로웠다.

“어서 와요…….”

레이테가 손을 들어 에르난의 뺨에 가져다 댔다.

아내의 손끝은 아주 잠깐 그의 뺨에 닿았다. 잠이 덜 깬 레이테의 손은 맥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에르난은 아내의 손을 쥐었다. 그의 손이 떨렸다.

“당신 이상해……, 떠는 거예요……?”

“아니 그냥,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 몸이 말을 잘 안 듣습니다.”

에르난은 평소대로 아내의 손에 입 맞출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부드러운 살결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당신은 아름다워요.”

에르난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아내의 답변은 없었다.

레이테를 만지는 에르난의 손이 조금씩 그녀의 팔을 타고 올라갔다. 마침내 어깨에 닿았을 때, 에르난은 아내를 끌어안고 입술을 포갰다.

품 안에 들어온 온기가 거짓말 같다. 레이테를 안을 수 있다는 자체가 환상일지도 모른다. 아니, 환상이 아니더라도 에르난은 자신이 나서서 아내를 거짓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당신의 아름다움을 숭배합니다.”

입술을 뗀 에르난이 속삭였다.

“네……?”

“나의 여왕.”

에르난은 아내의 곳곳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입술로 그녀를 느낄수록 더 목이 말랐다.

“내 반려. 나의……, 부인.”

그러나 더 말하지 못하는 망설임은 아내를 품에 넣고서도 마찬가지였다.

레이테의 옷을 끌어내리려던 에르난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결국 그는 또 참았다. 이유는 모임에서와 차이가 없었다. 아내가 자신의 마음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렵다.

“……당신, 무슨 일 있었나요?”

레이테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르난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아니야, 레이테. 그런 눈으로 나를 보면 안 돼.’

남편의 비겁함에 분노하거나 비웃거나, 차라리 그렇게 매몰차게 대해 주면 좋을 텐데.

에르난은 눈을 감고 그녀를 끌어안아 품 안에 완전히 가뒀다. 숨쉬기 답답한지 레이테가 몸을 조금 꿈틀거렸다. 에르난은 팔의 힘을 살짝 풀었다.

레이테는 자신의 안에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을 더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에르난은 억지로 눈을 감았다.?

#045

날이 완전히 밝았지만 부부는 여전히 침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베개를 등에 받치고 앉아 있었다. 에르난은 멍한 눈으로 넋이 나갔고, 레이테는 남편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남편의 음주량까지 통제할 마음은 없지만……, 지나쳤다는 사실은 스스로 잘 아시겠죠.”

에르난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어지러움을 견디기 힘든 그는 아내를 붙잡았다. 그대로 아내의 품에 안길 기세였다.

그러나 휘청거리는 몸이 풀썩 쓰러지기 직전, 에르난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몸을 눕히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뭐예요?”

레이테의 목소리가 제법 날카로웠다. 에르난은 끙끙거리며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술 냄새가 많이 나는 것 압니다. 민폐를 끼칠 수는 없지요…….”

“당신이 언제부터 민폐를 따지는 교양인이었다고.”

레이테는 자리에서 일어나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은빛 실이 아침 햇빛을 눈부시게 반사하며 출렁거렸다. 얇은 슈미즈 안의 굴곡진 몸이 햇빛을 받아 흐릿한 윤곽을 드러냈다.

엉킨 머리를 대충 손으로 정리하던 레이테는 남편의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불을 뒤집어썼던 에르난이 눈만 빼꼼히 내밀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눈이 잘도 깜빡이며 반짝거렸다.

“……하아.”

레이테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그녀는 휙 돌아서 한쪽에 걸어 놓은 자신의 가운을 집어 들어 걸쳤다. 레이테는 남편을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일요일이니 성당에 다녀올 거예요. 당신은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는 편이 좋겠네요. 다음 주에는 같이 가요.”

빠르게 말을 마치고 침실 밖으로 나가는 레이테의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 * *

에르난은 다시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눈이 저절로 감기고 고개가 힘없이 떨궈졌다.

대신 입만 히죽히죽 웃었다.

‘성당에 같이 가자고 했지.’

며칠 전 성녀 축일이 예외였을 뿐, 두 사람이 일요일의 종교생활을 함께 하는 일은 드물었다.

남편을 경계하는 레이테의 칼 같은 태도에 지친 에르난이 발길을 먼저 끊었다. 레이테는 자연스럽게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사실 그녀로서도 남편이 없는 쪽이 편했을 것이다.

‘하필 성당인가 싶은 생각은 들지만……, 아무렴 어때.’

어쨌든 레이테가 먼저 동행을 요청했다. 기뻤다.

다음 주말은 아예 시간을 더 내어 근교 나들이까지 다녀오는 편이 좋겠다. 멀리 다녀오기 번거롭다면 강가 산책 정도도 좋다.

한참 즐거운 생각에 빠져 있던 에르난은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상상한 대로 휴식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너부러져 있을 여유가 없다.

‘열심히 일을 해야……, 아.’

방바닥에 막 발을 내딛던 에르난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숙취에 시달리느라 잠시 잊었던 지난밤의 일이 모조리 떠올랐다.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뒀으나, 한심하게 끝냈던 시간.

후회를 안고 돌아온 자신은 무슨 행동을 했나?

아내를 안고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그녀를 좋아하니까. 하지만 그 마음이 전부였을까?

아니다. 미안해서 그랬다. 무엇보다, 에르난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위로였다. 그래서 레이테를 품에 안고 잠들었다.

에르난은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타인을 배려하는 척하지만 실은 자신만을 위한, 자신이 안심하고 죄책감을 덜기 위한 행동. 에르난은 그것을 오랫동안 보고 겪어 왔다.

그가 끔찍이도 싫어한 아버지의 방식이었다.

창밖에서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에르난은 천천히 일어나 섰다. 창가로 향하는 그의 걸음걸이에는 힘이 없었다. 벽에 기대선 에르난은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느리게 숨을 쉬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창밖을 보니 마차가 막 도착한 참이었다. 레이테는 저것을 타고 시내의 대성당으로 다녀올 듯하다.

이대로 가만히 밖을 내려다보면 청초한 차림새의 그녀를 볼 수 있겠지. 그래서 에르난의 눈은 창밖에 고정한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오래지 않아 레이테가 모습을 드러냈다. 녹색 드레스를 입은 아내는 단아하고 우아했다.

레이테는 침실 방향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는 곧바로 출발해 에르난의 시야를 벗어났다.

“레이테…….”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르난은 몸을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다시 입을 움직여 보았다. 혼자뿐인 방에서도 사랑하는 이의 이름은 목 밖으로 다시 나올 줄을 몰랐다.

* * *

레이테는 미사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왕궁으로 돌아왔다.

바르시나인은 확실히 종교에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괜히 서로 불편하지 않도록, 레이테는 홀로 성당에 다녀왔다.

하지만 오늘은 유독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남편을 두고 나와 꺼림칙했다.

에르난은 말끔한 모습으로 식당에 나타났다. 눈빛이 살짝 흐리멍덩하지만 상태가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레이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전주를 홀짝였다.

술의 여파를 걱정하다가 안심하자마자 술을 마시는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 더군다나 과음에 고생하는 추태를 먼저 보인 쪽은 레이테였다. 지나간 일이지만 민망해졌다.

“어제 모임은 어땠나요?”

“좋았습니다. 상인은 대표위원회에 참석하는 고위 귀족보다 훨씬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거든요.”

“잘 되었네요.”

“당신은 별일 없었습니까?”

“음, 저는…….”

레이테는 잠시 망설였다. 이야기할까 말까.

에르난은 식당 한쪽에 선 시종에게 눈짓했다. 시종은 들고 있던 주전자와 수건을 식탁에 내려놓고 인사 후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만이 남자 레이테가 말했다.

“왕비께 조언을 들었어요.”

“조언? 그분이?”

스튜의 콩을 쪼개던 에르난의 손이 멈췄다.

“그럴 분이 아닌데…….”

에르난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모자 관계를 알 만도 했다. 하긴, 레이테가 그동안 보았던 모습, 무엇보다 왕비가 했던 말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왕비께서는 나와 당신을 분리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과연, 그분답습니다.”

“그분답다니요?”

“당신도 아시잖습니까. 그분께서는 결벽 수준으로 타인의 일, 특히 가족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어머니를 싫어하시나요?”

묻기는 했으나, 레이테는 이미 답을 알 것 같았다.

에르난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분노나 냉소 따위와 달랐다. 그야말로 아무 감정이 없는, 그래서 조금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 울림이었다.

“싫어하지 않습니다.”

“아니면 서운하거나.”

“그렇지도 않아요.”

“왕비뿐만이 아니라 당신도 가족과 자신을 분리해 놓는군요.”

에르난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는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가 눈을 찌푸렸다. 술이 든 줄 알았더니 물이었다.

“술 때문에 앓았으면서 또 마시게 둘 것 같나요? 주방에 미리 지시해 두었답니다.”

“철저하시기는.”

에르난은 피식 웃으며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자랑할 거리는 아니지만, 딱히 숨길 일도 아니니 이야기를 드리자면…….”

에르난은 무덤덤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왕비께서 바르시나에 오기 전부터 그런 사람이었는지는 모릅니다. 딱히 알아보지도 않았고. 다만 이곳에서 그분의 태도는 아버지 탓이라 생각합니다.”

아버지를 말할 때, 에르난의 입가는 비틀렸고 눈은 음침하게 가라앉았다. 레이테는 남편이 부왕에 대해 늘 마땅찮은 반응을 보였음을 떠올렸다.

“당신은 국왕 폐하를 좋아하지 않더군요. 어째서?”

“바르시나 왕의 방탕함은 당신도 들어 보았겠지요. 부왕께서는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처음 결혼하던 때에는 아내를 존중하려 노력했다더군요. 특히 여자관계 면에서.

인내는 오래가지 못했지요. 저를 배고 있던 어머니께서는 여자 문제부터 시작해 아버지와 충돌이 잦아졌습니다. 두 분의 관계는 완전히 엉망이 되었지요.”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하시나요?”

레이테의 물음에 에르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망이라……, 원망할 수 있다면 차라리 편하겠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부부의 불화를 보며 자라야 했던 아들에게 늘 미안한 감정을 가지셨지요. 그래서 두 분의 사이가 험악해질수록, 역으로 저는 더 세심한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점점 두 분이 제게 보이는 미안함의 차이를 깨달았습니다. 어머니의 미안함은 자책으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미안함은 늘 자기연민이었지요.”

에르난은 차게 실소했다. 남편의 냉소에 레이테가 놀랄 지경이었다.

“도의적 책임을 느낄 정도의 양심은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미안한 감정을 가졌다는 자체만으로 안심해 버리는 겁니다.

난폭한 모욕도 거친 무례함도 모두 어머니를 향했거늘, 아들에게 미안해하며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지요. 아버지는 철저하게 자기 감정의 평화만이 중요한 사람입니다.”

감정이 복받치는지, 에르난은 잠시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허무하게도, 외출 길에 마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거의 반년 동안 삶의 의미를 잃은 듯 방황하시더군요. 그건 죄책감이지, 아내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이 아닙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관계로 힘들어하셨지만, 어머니의 죽음에는 아버지의 책임이 전혀 없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끝까지 자신의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에르난은 목이 말랐는지 다시 잔에 물을 채워 마셨다. 주전자를 들어 물을 따르고, 잔을 손에 들어 물을 마시는 동작 모두가 뻣뻣하고 어색했다.

“아버지는 진심으로 저를 아끼는데, 그럴수록 제게는 터뜨릴 명분 없는 역겨움만 쌓일 뿐입니다. 차라리 어머니의 죽음이 아버지 탓이었다면 마음 놓고 원망이라도 할 텐데, 이런 생각을 꽤 오래 했습니다.”

“아…….”

“지금 왕비께서는 이런 맥락을 아시기에, 남편과 당신을 철저히 분리한 겁니다. 죽을 수도 없고, 이혼할 수도 없으니 처음부터 기대도 실망도 할 필요 없는 관계를 만들었지요. 그리하여 남편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 그리고 바르시나 전체와 자신을 분리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처음에 어색해하셨으나, 아닌 척 좋아하시더군요. 갈등할 필요 없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으니까. 그래서 제 부모는 부부라는 법적 관계만 가졌을 뿐, 어떤 기대도 주고받지 않고 서로 분리되어 각자의 삶을 삽니다. 참 평화로운 가족입니다.”

말하는 중간중간 에르난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레이테는 웃을 수 없었다.

상대에게 기대하지 않고, 상대와 자신을 분리하면 평화롭다. 하지만 그 태도는 상대를 향한 존중이 아니다. 삭막한 자기방어일 뿐이다.

“에르난, 예전에……, 그러니까 결혼식 다음 날. 아니, 그다음 날이었던 것 같군요. 저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좋아하는 척하느냐는 질문을 당신에게 했는데, 혹시 기억하나요?”

에르난은 웃음을 싹 거두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눈을 크게 뜬 그의 안색이 창백했다.

레이테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놀라면서도 말을 이었다.

“당신은 화목한 부부가 오랜 꿈이었다고 제게 말했어요.”

“……기억합니다.”

에르난은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런 일 때문이었군요.”

레이테는 남편과 그 부모 사이의 오묘한 관계의 정체가 궁금했다. 하지만 막상 에르난에게 직접 사정을 들으니 그에게 미안해졌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에르난은 별것 아니라는 투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심상치 않았다. 그는 아내와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아픈 이야기 꺼내게 해서 미안해요. 당신을 괴롭힐 의도는 아니었어요.”

“아니! 그것이 아니라!”

레이테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에르난이 발끈했다. 거센 반응에 레이테는 화들짝 놀라 눈을 뜨고 남편을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소리쳐서 미안합니다.”

에르난은 완전히 아내로부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떤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지,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떨었다.?

#046

레이테는 일어나 남편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에르난이 먼저 벌떡 일어나더니 아내를 일으켜 끌어안았다.

“에, 에르난?”

“당신은 분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남편의 낮은 울림은 음산했다. 레이테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우리가 계속 사크틸라에 있었더라면, 우리 관계는 어땠을까요? 여전히 나는 당신의 옆자리만 지켰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분리가 아니라면 무엇이었습니까?”

남편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분노가 또렷했다.

“그, 그때와 지금은 달라요. 우리는 같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손을 잡아야 하잖아요.”

그를 붙잡고 싶다. 그와 분리되고 싶지 않다.

확실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레이테는 간절히 말했다.

“우리는 부부고,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당신에게 나는 아내가 아닌가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남편의 분노는 어느덧 동요로 바뀌었다. 그의 눈이 불안에 떨렸다. 레이테는 그 낯선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단 한 순간도, 당신이 남편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이것만은 자신할 수 있다. 어느 때라도, 심지어 그가 두려워 참을 수 없던 순간마저도 에르난은 그녀에게 남편이었다.

“당신이 없으면 나는 살 수 없어요.”

남편이란 레이테에게 생존 수단이었다. 그녀의 목을 조이는 숙부에게서 벗어나고, 이후로도 쭉 여왕으로 살기 위해 그와 함께해야 했다.

그러니 분리 따위 해서는 안 된다. 과거의 자신이 틀렸다.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과 분리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레이테는 괜히 사족 같은 말을 덧붙였다.

생존만으로는 도저히 그녀의 기분을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더 깊고 복잡한, 정체 모를 것이 마음속에 엉켜 있다.

“그 말……, 모두 무슨 뜻인지 압니다. 레이테 ‘여왕’에게는 내가 필요하니까. 나 또한 내 아내인 당신이 필요합니다.”

레이테는 자신을 끌어안고 입을 맞춰 오는 에르난에게 자연스럽게 응했다.

왜 입을 맞추는지 따지고 싶지 않았다. 안심이든 기쁨이든 상대를 놓치고 싶지 않은 불안감이든, 따뜻한 몸을 서로 맞댄 순간 자체만이 중요했다.

움직임은 차분했다. 아니, 신중했다.

부부는 서두르지 않고 상대의 존재를 느꼈다. 서두르다가는 놓쳐 버릴지도 모른다.

레이테의 손이 남편을 더듬었다. 양손에 그의 어깨가 잡히자 레이테는 안심하며 남편을 끌어당겼다.

에르난은 한 손으로는 레이테의 허리를 감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뒤통수를 받쳤다.

그는 천천히 아내의 몸을 벽에 기대었다. 등 뒤에 닿는 차갑고 딱딱한 감촉에 레이테는 잠시 몸을 움츠렸으나, 다시 남편에게 안겨 들었다.

끈적한 엉킴은 부드러우면서도 집요했다. 혹시나 상대를 놓칠까 불안해하는 떨림도 간헐적으로 있었다.

“……하아.”

입술이 떨어지고, 에르난은 깊은숨을 쉬었다. 그의 얼굴은 키스를 처음 해 본 사람처럼 잔뜩 붉어져 있었다.

에르난이 먼저 아내의 옷을 끌어내렸다. 바르시나풍으로 네크라인이 넉넉히 파인 드레스는 곧바로 레이테의 어깨를 드러내 주었다.

에르난은 아내의 드러난 살을 집요하게 빨아들였다. 그는 레이테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가, 턱선을 타고 내려오며 끊임없이 입을 맞췄다.

“잠깐, 그런 곳은 보일 거예요.”

“옷 갈아입으면 됩니다. 그 전에는 머리카락으로 가리세요.”

아내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가볍게 쓸어 넘기며, 에르난이 태연하게 답했다.

“고, 곤란하다니까요…….”

레이테는 쩔쩔매면서도 차마 그를 완전히 쳐내지는 못했다.

“이제 슬슬 추워질 텐데 목 끝까지 덮는 옷을 입으면 그만이지요. 없으면 주문해 드리겠습니다.”

아직 추위가 찾아오려면 멀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마음대로 실컷 입 맞춰 달라는 말을 참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실은 그가 흔적을 남겨 주면 좋겠다. 레이테는 남편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원했다.

남편의 깊은 눈과 나른한 미소가 지독하게 유혹적인 탓이다.

에르난의 젖은 입술은 레이테의 쇄골까지 내려와 주변을 훑었다.

드레스는 어깨만 쉽게 내어 주었을 뿐, 그 아래로는 허리를 꽉 조인 탓에 속살을 쉽게 보여 주지 않았다. 옷을 몇 번 만지작거리던 에르난은 완전히 벗기기를 포기했다.

그는 레이테의 가슴골 사이로 손을 넣었다. 가슴 한쪽이 그의 손안에 담겼다. 그대로 주무르자 레이테는 신음과 함께 몸을 비틀었다.

“흐응……, 읏.”

남편의 손에 이끌려 레이테의 가슴이 옷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곧 반대쪽도 마찬가지가 되었다.

드레스는 입은 채 가슴만 밖으로 튀어나온 모습이 외설적이었다. 에르난은 잠시 그것을 감상하다가, 솟아오른 한쪽 끝을 입에 물었다. 가벼운 통증에 레이테가 움찔했다.

곧, 그의 혀가 입에 머금은 유두를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입이 닿지 않은 쪽의 가슴은 손으로 움켜쥐었다.

“하응……, 읏, 흐응, 아…….”

민감한 곳에 닿는 서로 다른 자극을 레이테는 오래 버틸 수 없었다. 그녀의 팔다리에 힘이 풀렸다.

황급히 아내에게서 입과 손을 뗀 에르난은 주저앉을 뻔한 그녀를 붙잡았다.

에르난은 아내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받쳤다. 그리고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렸다.

옷을 다 벗지 않은 채로, 상체뿐만 아니라 하체까지 드러났다.

레이테는 부끄러워 눈을 감아 버렸다. 이런 식으로 남편에게 몸을 보이기는 처음이다.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다. 의아한 레이테가 다시 눈을 떴다.

에르난은 자기 허리춤의 매듭을 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한지 자꾸 헛손질만 반복한다. 레이테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재밌습니까?”

“뭔가 귀여워서.”

“귀엽다고요?”

“네. 곱고, 사랑스럽고……. 혹시 바르시나에서는 다른 뜻인가…… 어?”

우두둑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에르난은 허리를 고정한 끈을 아예 손으로 확 뜯어 버렸다.

“……당신은 거친 쪽을 좋아하나요?”

“부인의 말이라면 어느 쪽이라도 좋습니다.”

단단하게 선 성기를 꺼내 든 에르난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붉어진 얼굴의 거센 숨소리가 레이테에게도 들렸다.

“한 번 더 말해 줘요.”

애끓는 요청이 뜨거웠다.

“어떤 걸요?”

“……됐습니다.”

허리를 조금 굽힌 에르난은 아내의 다리 사이로 뜨거운 기둥을 밀어 넣었다.

“흣, 으응…….”

레이테는 그를 꽉 껴안았다. 에르난은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 다리를 완전히 들어 올렸다.

넘어질 것 같다. 레이테는 남편에게 힘껏 매달렸다. 다른 쪽 다리도 들어 에르난의 몸을 감았다.

레이테의 다리를 통해 느껴지는 빳빳하게 긴장한 하체와 달리, 그녀의 입술을 덮은 에르난의 키스는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레이테는 한 손으로 그의 뒤통수를 안고 끌어당겼다. 혀가 더 깊숙이 얽히며 상대방을 탐했다.

입술을 뗀 에르난이 말했다.

“레이테, 꽉 잡아요.”

레이테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남편을 강하게 붙들었다. 그는 무릎을 살짝 굽힌 채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응, 흐읏! 하응!”

남편에게 매달린 레이테는 그녀의 안쪽을 누비는 뜨거운 자극에 신음했다.

“레이테, 당신의 목소리를 더 들려줘요.”

“흣…… 아흣, 흐응, 다, 당신도.”

“물론. 여기 있습니다.”

제대로 말하기 힘들 만큼 신음이 흘러나오는 레이테와 달리 에르난은 비교적 또렷하게 말했다. 그러나 에르난의 호흡도 점점 거칠게 흐트러졌다.

“더, 나를 더…… 흐앗, 더…….”

레이테는 자신이 에르난을 원하는 만큼, 그도 자신을 원해 주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이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을 터다. 남편과 분리되지 않았다 안심하고 싶었다.

에르난을 안은 팔다리에 힘을 더 주고, 레이테는 엉덩이를 들썩였다. 움직임은 쉽지 않았다.

“레이테, 으흣, 레이테……. 더 붙잡아요.”

에르난은 손에 쥔 레이테의 엉덩이를 더 꽉 끌어당겼다. 부딪치는 움직임이 점차 과격해지며 더 깊숙한 곳을 공격했다.

팔다리에 힘을 주어 에르난을 붙잡아야 한다. 하지만 퍼부어지는 쾌락에 레이테는 자꾸만 몸에 힘이 빠질 것 같았다.

거세지는 자극에 그녀가 더는 견디기 힘들어질 때쯤, 기둥이 경련했다.

“흐으읏…… 흐응, 흣…….”

레이테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남편을 붙잡았다. 자신의 안쪽에 쏟아져 들어오는 뜨거운 것이 기분 좋았다.

두 사람은 깊게 입술을 겹쳤다. 흥분을 모두 쏟아낸 뒤에도, 입술은 잠깐 숨을 고르다가 다시 서로를 탐하며 엉켰다.

레이테는 결합이 필요했다. 배우자의 살아 있는 숨결과 체액을 원했다.

그를 확인하고, 자신을 확인받고 싶었다.

남편에게 몸을 다 맡긴 자세는 불편하고 힘들었다. 하지만 레이테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기뻤다.

분리되고 싶지 않아. 당신은 나를 원할까? 레이테는 에르난의 목을 깊이 끌어당겼다.

확인하고 싶다. 레이테는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속삭이려는 찰나,

“두 분 폐하.”

식당 문밖에서 들려온 말에 부부의 몸이 굳었다.

“급한 보고가 있습니다. 식사를 마치시면 들어갈 테니 알려주십시오.”

목소리의 주인공은 프란세스크였다. 식사라니. 진작 끝냈다. 아니, 중간에 관두었다. 부부는 민망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무래도 프란세스크는 식당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짐작했나 보다.

에르난은 아내를 꽉 껴안은 채로 천천히 무릎을 굽혀 몸을 내렸다. 레이테는 조심히 다리를 바닥에 내디뎠다.

그녀가 두 다리로 선 자세가 되고서야, 에르난은 허리를 뒤로 뺐다.

“흐아…….”

그녀의 안을 꽉 채웠던 기둥이 빠져나가는 감각에 레이테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뒤이어, 레이테의 다리 사이에서 무언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녀는 황급히 아래를 바라보았다. 탁한 액체가 허벅지에 난잡하게 묻어 있었다. 바닥에 조금 떨어지기도 했다.

에르난은 아내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키득거렸다.

“당신이 몇 번이고 받아 드셨던 겁니다. 새삼스레 놀랐습니까?”

“어, 어어…….”

레이테는 새빨개진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막연히 쏟아 부어지는 느낌만 알았다. 눈으로 직접 보니 음란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뿌려질 때마다 당신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방금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때 당신의 신음은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레이테의 눈이 커졌다. 뭐라고 했지, 방금?

그녀가 남편에게 되물으려는데, 에르난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손을 넣더니 민감한 곳을 살짝 꼬집었다.

“흐앗! ……이 사람이 진짜!”

레이테는 남편이 앉았던 의자의 쿠션을 집어 들어 그에게 던지려 했다. 하지만 에르난은 자연스럽게 쿠션을 뺏어 들고 레이테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이제 당신이 뭘 어떡할지 대충 알 것 같아서.”

그는 쿠션을 바닥에 툭 던져 정사의 흔적을 덮어 버렸다.

부부는 옷을 도로 입기 시작했다. 다 벗으려다 만 드레스를 다시 입는 일은 꽤 어색했다.

무엇보다 목덜미에 남편의 흔적이 너무 많다. 레이테는 머리카락을 있는 대로 앞으로 내려야 했다.

에르난은 허리의 끈을 아예 끊어 버린 탓에 옷이 흘러내릴까 걱정하는 모양새였다. 자업자득이다.

옷을 간신히 입은 부부는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단정한 모습이다.

“식사가 끝났네. 들어오게.”

에르난의 어조가 묘하게 거만했다. 레이테는 풋 웃음 지었다.

문이 열리고 프란세스크와 함께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레이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에르난을 향해서만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여왕을 무시하는 태도에 에르난은 얼굴을 노골적으로 굳혔다. 일단 한마디 해야겠다.

하지만 남자의 말이 먼저 나왔고, 그 말은 에르난의 입을 다물게 했다.

“대륙으로 향하던 바르시나 상선이 헤젤 국적의 선박에 공격받았습니다. 근해를 순찰하던 우리 함선이 헤젤의 배를 붙잡아 미노리카 항에 억류해 두었습니다.”

* * *

에르난은 긴급 대표위원회를 소집했다. 다음 주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귀족들의 출석을 명하면서, 에르난은 전령에게 살벌하게 말했다.

“지난번 같은 사태가 또 일어날 경우, 죄다 왕실 모독죄로 감옥에 처넣을 테니 알아서 처신하라 전하게.”

위원회는 노을이 질 때쯤 시작되었다.

에르난은 매듭을 끊어 버린 옷 대신 단단하게 몸을 꽉 조이는 복장으로 갈아입고 허리에 검을 찼다.

레이테는 바르시나풍으로 목이 깊게 파인 드레스 차림이기는 했지만, 슈미즈를 안에 입어 목을 가렸다.

아내를 보고 히죽 웃은 에르난은 그녀의 손을 잡고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귀족들이 일어나 부부를 맞이했다. 이미 사태를 전해 들은 그들의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에르난의 협박이 통했는지, 단상 위 의자는 두 개였다. 하지만 에르난의 안심은 잠깐이었다.

나란히 놓인 두 의자는 모양도 크기도 달랐다. 상식적으로 같은 것이 놓여야 한다.

추궁하면 갑작스러운 소집에 준비할 틈이 없었다는 변명을 할 것이 뻔했다. 물론 에르난은 고의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실랑이를 벌일 틈이 없다. 닥친 일이 급했다.

잠시 고민하던 에르난은 아내를 번쩍 안아 들었다.

“……!”

레이테는 놀라 비명을 지르려다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에르난은 그녀를 껴안은 채로 성큼성큼 단상 위로 올라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귀족들은 하나같이 충격에 빠진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 에르난은 그들을 둘러보며 한껏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회의를 시작하겠소.”?

#047

레이테는 남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을 도저히 보일 수 없었다.

이 남자가 제정신인가? 동시에, 남편의 곧은 목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린 레이테 자신도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레이테는 애초에 바르시나의 일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 참견 못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전……, 폐하. 공석에서는 체통을…….”

“헤젤 문제에 자꾸 미온적으로 대처하니까 기어이 이런 사태를 만든 거요.”

코른이 나섰지만 에르난은 그를 무시했다.

“폐하.”

“일단 오늘은…….”

“지금 대표위원회를 사적인 감정으로 모독…….”

“위기상황 앞에서 그런 말이나 계속할 거면 댁에 돌아가시지요, 후작.”

회의장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조용한 가운데, 쿵쿵거리는 에르난의 심장 박동만이 레이테의 귀에 닿았다.

남편은 긴장한 모양이다. 레이테는 자신의 손을 조심스레 그의 가슴에 얹어 천천히 쓰다듬었다. 벨벳의 부드러움과 옷 안의 단단한 감촉이 함께 느껴졌다.

긴장 풀어요. 그녀는 마음으로 속삭였다.

하지만 레이테의 바람과는 반대로, 그의 심장은 더 거세게 뛰었다.

민망해진 레이테는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에르난이 이유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우발적인 충돌일 테니 보상과 함께 재발 방지를 약속받아야 합니다.”

코른이 말했다. 화를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에르난의 지적에 답하지 않았다. 맞서지 않으나 사과도 없다.

“아직 추가 보고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판단하는지?”

“공격받은 배의 주인이 제 조카입니다. 향신료, 보석, 도자기 같은 바르시나인이 선호하는 사치품을 실은 배입니다. 헤젤이 관심 보일 이유가 없습니다.”

코른을 시작으로, 다른 귀족들도 말했다.

“그래도 상선을 공격할 이유는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바르시나를 공격한 겁니다. 대충 넘어가지 말고 본때를 보여 줘야 합니다.”

“진상을 파악하기도 전에 싸우자는 말부터 나옵니까? 대체 무슨 정신인 거요?”

레이테는 이런 분위기가 신기했다. 최고 회의답지 않은 거침없는 말이 오간다. 남편이 회의를 시작하며 꽤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는데도.

문득 자우메 왕의 편지가 떠올랐다. 왕자를 데려오라며 왕에게 윽박질렀다던 의원. 이런 풍조니까 가능한가 보다.

“코른, 조카라면 혹시 조안 피로시인가?”

잠자코 듣던 에르난이 물었다.

“그 아이를 아십니까?”

“어제 무역상 총회에서 만났소. 딱하게 되었군. 아, 여러분. 어제 상인들에게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래 저번에 경들과 의논하려 했는데……, 경들은 내 말을 들을 마음이 영 없었지요?”

주저 없이 말하기로는 에르난도 만만치 않았다.

“사크틸라 북서쪽 요새에서, 바르시나에서도 보기 힘든 대륙산 대포를 보았습니다. 헤젤 상인에게 구입했다더군요. 산을 넘었을 가능성은 없으니, 바다를 통해 헤젤까지 간 겁니다. 바다 말입니다, 바다. 우리가 사랑하는 그 바다.”

남편의 목소리는 냉소적이기 짝이 없었다.

레이테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에게 꽂히는 시선이 따가웠다.

“일단 코른의 말에 따르면, 공격받은 배는 헤젤이 평소에 탐낼 먹잇감은 아니군요. 하지만 귀국길에 다른 곳에 들러 팔면 되지 않습니까?”

사크틸라다. 레이테는 눈을 떴다.

바닷길을 이용해 헤젤로 간다면 사크틸라 남쪽 바다를 반드시 지나야 한다. 숙부는 그곳의 관리를 오랫동안 방치했다.

‘설마 고의로?’

원래 레이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지난번 일 때문에라도 바르시나인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레이테가 말하지 않으면 바르시나인은 모르고 지나칠 부분이다.

“에르난, 할 말이 있어요. 좀 놓아 주면 안 될까요?”

레이테가 속삭였다.

에르난이 아내를 내려다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녀를 안은 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놔 달라니까요. 설마 이런 자세로 발언하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맞습니다. 이대로 말씀하세요.”

주먹으로 남편의 가슴을 쿵쿵 치던 레이테의 움직임이 멈췄다.

“진심이에요? 안긴 상태에서 말하라고요?”

“혹시 너무 시끄러워 불편합니까? 바르시나의 정치판은 원래 이렇습니다. 뭐, 당신이 원하니 조용히 해 드리지요.”

“잠깐, 일단 일어나서…….”

“안 됩니다. 당신의 자리는 내 무릎 위거든요. 여러분!”

에르난이 갑자기 목소리를 키웠다. 레이테는 경악으로 몸을 굳혔다.

일순간 회의장이 조용해지고 모두의 시선이 에르난을 향했다.

“여기 제 품에 계신 사크틸라의 여왕께서 말씀하시겠답니다. 헤젤 문제라면 역시 사크틸라가 경험이 풍부하지요.”

레이테는 눈앞이 하얘질 것 같았다. 남편이 미친 것 같다. 그녀는 이를 악문 채 에르난에게서 억지로 벗어나 일어났다.

“윽!”

드레스 자락을 밟는 바람에 미끄러질 뻔했으나, 에르난이 붙잡아 주어 무사히 일어날 수 있었다. 레이테는 그를 쏘아보고 빈 의자에 앉았다.

확실히 의자는 작았다. 드레스를 입고 앉기에 불편했다. 바닥은 딱딱하고 다리는 흔들린다.

‘일부러 이런 의자를 놨겠지.’

그래도 이제야 왕의 시선에서 회의장을 살필 수 있다. 기가 막힌다는 듯 부부를 바라보는 시선뿐이지만.

이해한다. 그녀 자신도 기가 막혔다.

그래도 레이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했다.

“사크틸라 남부는 자주 전장이 되었습니다. 헤젤에서 침공하기에 가장 편한 위치니까요. 그리고 전쟁이 없을 때는, 밀무역이 성행했지요.”

여왕의 바르시나어 실력은 빼어난 편은 아니었다. 발음도 어색했다. 하지만 레이테는 주눅 들지 않았다.

“반역자는 남부 지역에 관심이 없었어요. 남부 귀족들이 그에게 협조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아예 남부를 방치했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의 말을 듣다 보니 고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귀족과의 관계 개선보다 밀수 쪽이 더 쉬우니까.”

“대포도 밀수를 이용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여왕께서는 본국의 질서 유지에나 힘을 기울이셔야겠습니다.”

코른이 노골적으로 빈정댔다. 레이테는 차분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래요. 사크틸라의 부끄러운 모습이지요. 하지만 사크틸라까지 오려면 일단 바르시나의 바다를 지나야 하지요. 애초에 그 바다가 뚫리지 않았다면 대포 같은 물건은 반도 안쪽까지 올 수 없어요.”

문제는 다시 바르시나의 바다로 돌아왔다. 코른은 레이테를 노려보면서도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그의 반응을 즐겁게 감상한 에르난이 아내의 말을 이었다.

“헤젤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서쪽은 망망대해, 동쪽은 영 사이가 좋지 않은 사크틸라에 막혀 있지요.”

에르난은 거침없이 말했다. 지난밤 했던 말의 반복이니 어렵지 않았다.

“그들도 살길을 찾아야지 않겠습니까? 적국과의 밀거래는 한계가 있지요. 그러니 사크틸라의 감시가 있든 없든, 언젠가는 동쪽 바다로 나와 우리랑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솔직하게 인정합시다. 우리는 헤젤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5년 전, 해적을 소탕하며 받아낸 사과가 전부 아닙니까? 이후 무엇이 변했습니까?”

귀족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경들 모두가 알다시피, 내가 그 토벌을 지휘했습니다. 그러니 흐지부지한 뒷수습에 제 책임도 있는 셈이지요. 따라서…….”

에르난은 아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테는 자연스레 그 손을 맞잡았다. 회의 참석자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에르난은 마주 잡은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내가 책임지고 바르시나의 바다를 지키기 위해, 이렇게 직접 사크틸라와 손을 잡은 겁니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귀족들을, 그리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남편의 눈이 붉게 빛났다. 그러나 레이테는 두렵지 않았다.

그의 눈은 피가 아니라 저녁노을을 머금었으니까. 따뜻한 눈이 자신을 칭찬해 달라며 장난스럽게 졸라 대는 것만 같다.

이런 남편에게 어떻게 거짓으로 답할 수 있을까? 레이테는 에르난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 * *

회의를 마치고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레이테는 팔짱을 끼고 남편을 쏘아보았다.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

“귀족들에게 지지 말아야 해요. 맞아요.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회의가 별 탈 없이 끝나서 신기하다고요. 하긴, 귀족들도 당신 행동이 너무 어이없어 아무 말 못 한 것 같지만.”

에르난은 싱글싱글 웃으며 아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연출이라지만 너무했잖아요.”

“연출?”

“‘나는 절대로 여왕을 버릴 마음이 없다. 우리는 부부다.’ 틀렸나요?”

“……아니, 맞습니다.”

에르난의 웃음은 어느덧 풀려 있었다. 그가 한숨을 깊게 쉬었다.

“피곤한가요, 에르난? 하긴, 고생 많았어요. 선배이자 동료로서 평가해 보자면, 꽤 잘했어요.”

레이테는 창가의 의자에 앉았다. 남편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선명하고 맑은 빛을 띠었다.

“급조치고는 무척 믿음직했어요.”

“왜 급조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그런 말을 여태 못 들었으니까요.”

“일부러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잖습니까?”

“말로 하지 않아도 분위기로 느낄 수 있지요. 헤젤을 상대하기 위해서 사크틸라와 협력해야 한다……, 멋져요. 하지만 당신이 과연 처음부터 그 협력을 위해 나를 찾아왔을까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에르난은 레이테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가 당신을 왜 택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잠깐, 틀렸어요.”

레이테가 단호하게 말했다. 에르난의 목울대가 떨렸다.

“제가 당신을 택했죠. 결혼 제안은 제가 먼저 했답니다?”

“아……, 하하.”

에르난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당신도 고생 많았습니다. 특히 제 가슴을 만지며 사심을 충족하는 부분이 탁월했지요.”

레이테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사심은 무슨 사심. 효과도 없었는데.’

에르난이 왕의 섭정으로서 제대로 처음 한 회의다. 아닌 척해도 긴장한 그를 가만히 지켜만 볼 수 없었다.

레이테는 자신이 언제 왕의 일을 처음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당연히 남편보다 훨씬 어렸을 때였고, 갖은 실수와 치욕으로 얼룩졌다.

그러니 남편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연민으로만 단정 짓기에는 석연찮은 면이 있지만.

“부인, 우리는 동료입니까?”

남편의 물음에 레이테는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선배이자 동료로서. 당신이 한 말입니다. 당신에게 저는 동료입니까?”

“그건…….”

레이테는 자신이 왜 그런 표현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저절로 나온 말이다. 다만 한가지만은 확실했다.

“적어도.”

사랑 고백도 아니건만, 레이테는 쑥스러움을 견딜 수 없었다.

“당신이 내 적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어색했다. 가공하지 않은 날것의 감정을 서투르게 내보여서는 안 된다. 그녀는 변명처럼 덧붙였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믿을 수 없다면 불안하잖아요? 그러니 남편인 당신은 제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세요.”

고압적인 명령 대신, 횡설수설만 튀어나온다. 레이테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뜻밖에도, 에르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통제할 수 없이 몸이 떨렸다. 레이테는 남편을 차마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을 믿고 싶어요.”

레이테는 두려웠다.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에 단호하게 아니라 답하던 남편의 기억이 생생했다.

마치 그때처럼, 망설임 없이 자신을 거부하고 칼을 꽂을까 봐 무섭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가끔 두려울 때가 있어요. 당신의 칼이 언젠가 나를 찌르지 않을까…….”

드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르난이 의자에서 일어났나 보다.

그리고 레이테의 눈앞에 남편의 오른손이 나타났다.

“저는 당신의 남편입니다.”

레이테는 놀란 눈으로 그가 내민 손을 보았다.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당신 또한 내 적이 아니고요.”

이것은 기사의 인사다. 손에 무기가 없으니 싸울 의사가 없음을 증명하는 행위다.

레이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의 떨리는 오른손을 마주 내밀어 그를 잡았다.

악수를 직접 해 보기는 처음이다. 여성의 인사가 아니니까.

남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레이테는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우리는 동료예요.”

여왕의 손짓은 어설펐다. 그러나 에르난이 숱하게 나눴던 어떤 악수보다 진지했다.

아내의 보랏빛 눈이 단호하게 빛나며 말했다. 당신을 믿겠어요.

에르난은 눈을 감으면 지금도 탐브레가 자신의 앞에 나타날 것 같았다. 그의 숨은 에르난이 끊었지만, 그는 여전히 에르난에 기생해 외쳐 댔다.

여왕을 짓밟아 그 위에 군림하라.

‘달라.’

이제는 부정할 수 있다. 탐브레는 이런 식으로 여왕의 손을 잡지 않았다. 동등한 인격으로 상대하지도 않았다.

에르난은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탐브레와 달랐다. 그는 레이테의 남편이고, 동료다.

또한 무엇보다, 레이테를 사랑한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살랑였다. 아련한 흩날림에 발맞추듯 옅은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피어났다. 한없이 투명하고 깨끗한 호의였다.

아내가 자신을 믿어 주어 진심으로 기쁘다. 하지만 믿음뿐이기에 에르난은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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