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 불청객을 위한 환영식
#031
바르시나는 이베로 반도의 동쪽에 위치한 나라다. 사크틸라에 비하면 영토는 턱없이 작다. 하지만 바다를 통한 교역이 발달해 부유하고 활기찬 곳이다.
레이테는 이렇게 배웠지만, 바르시나의 수도 살두비아는 적막했다.
왕자 일행의 귀환인데도 도시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 때이기는 했다. 해가 가장 뜨거운 한낮에 도착해 버렸기 때문이다. 점심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집에 틀어박혀 눈을 붙이며 쉴 시간이었다.
레이테는 가끔 인기척을 느끼기도 했다. 주로 건물의 창가에서 부부를 보는 시선이었다.
차라리 호기심을 대놓고 드러낸다면 무언가 반응해 줄 텐데, 몰래 힐끔힐끔 쳐다보니 오히려 난처했다.
고요하기는 왕궁도 마찬가지였다.
살두비아에는 왕궁이 두 개 있었다. 일행은 시가지에서 조금 떨어진 왕궁으로 향했다. 내부 장식은 화려했으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부부는 먼저 처소를 안내받았다.
“왕께서는 식사를 마치고 잠시 낮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들을 안내한 시종장이 말했다.
“원래 그런 분이 아니셨는데.”
“시의가 낮잠을 권한 이후로 꼬박꼬박 챙기십니다.”
“그래? 의외로군.”
에르난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레이테는 남편의 태도가 의아했다.
‘아버지 건강이 나빠졌다는 의미 같은데, 걱정도 안 하나?’
“주무시는 중에라도 두 분 폐하께서 도착하시면 깨워 달라 하셨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시종장이 나가고 방에는 부부만 남았다. 방은 따가운 햇볕 대신 미풍만 불어 들어왔다.
“그늘은 지낼 만하네요. 아, 고마워요.”
에르난은 아내가 앉을 의자를 빼 주었다. 레이테는 가볍게 감사 인사를 하고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벽에 살짝 몸을 기대어 들어오는 바람을 즐겼다.
“레이테.”
남편의 부름에 레이테는 고개만 살짝 돌려 그를 보았다. 남편은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깨문 채였다.
“무슨 일 있나요? 국왕 폐하의 건강 문제?”
“아, 아버지는 별로 상관없습니다. 다만 당신이 걱정됩니다.”
휴식을 누리며 나른하게 내려앉았던 레이테의 눈이 떠졌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에르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불안한 시선이 주위를 방황할 뿐이었다.
“에르난. 대답하세요.”
아내의 명령조에 에르난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싫어하겠지만……, 그래도 해야겠습니다. 바르시나인은 당신을 싫어할 겁니다.”
“……알아요.”
직설적인 표현에 당황하기도 잠시, 레이테는 차분히 답했다.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시스로네스를 비롯한 사크틸라인들도 바르시나의 여론을 걱정했으니까.
“두 분 폐하의 결혼을 환영할 사람은 자우메 왕 정도일 겁니다.”
직접 결혼 협상을 진행한 시스로네스는 아예 대놓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이유가 뭘까요?”
“폐하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여왕의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치다니 무척 건방진 행위지만, 시스로네스라면 가능했다.
레이테는 자신을 시험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전혀 개의치 않고 답했다.
“사크틸라의 일에 휘말릴까 봐 불안하겠지요. 바르시나는 반도의 세력 다툼을 무시해 왔으니까. 자우메 왕은 통합을 말했다지만, 사실 그건 몽상이죠.”
“정확히 보셨습니다.”
시스로네스의 얼굴에 흡족한 웃음이 걸렸다.
그의 얼굴은 하루하루 늙어 갔다. 그러나 레이테를 칭찬할 때의 따스함은 이전과 똑같았다.
“바르시나가 원하는 미래의 왕비는 후사의 생산을 위한 매개체, 그것뿐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여왕이십니다. 폐하의 앞날을 방해하던 자마저 이제 사라졌고요. 따라서 그들은 폐하를 두려워할 겁니다.”
두려움.
시스로네스와의 대화를 떠올린 레이테는 실소했다.
여왕은 오랫동안 숙부에게 멸시받으며 살았다. 그랬는데 몇 달 사이 상황이 완전히 뒤집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신기했다.
그녀를 이렇게 만들어준 사람은 남편이다.
반역자의 죽음을 보며, 레이테는 남편이야말로 두려운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남편을 피하고 무시했다.
그런데 지금 남편은 오히려 그녀의 반응이 두려운지 머뭇거리는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한다. 우스운 상황이었다.
“출발 전 충분히 주의받은 사항이에요. 그리고 당신, 잠깐 잊은 모양인데 저는 구박받는 데에는 도가 트여서 어지간한 증오에는 끄떡도 안 한답니다.”
마치 에르난 같은 말투로 레이테는 말했다.
아내의 눈치를 보는 에르난이 어색했다.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하든, 일단 겉으로는 아내의 압박을 묵묵히 받아 내기만 하던 에르난이었다.
하지만 남편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레이테다.
“걱정은 고맙지만, 사실 걱정 안 해도 될 일이에요. 충분히 각오하고 있으니. 그보다, 왜 제가 당신의 말을 싫어하리라 생각했죠? 불필요한 걱정이기는 해도 딱히 싫은 마음은 들지 않아요.”
어색함을 억지로 숨기려니 괜히 과장하게 되는구나. 레이테는 깨달았다.
남편도 같은 감정을 느꼈을까?
레이테의 쌀쌀맞은 답에 에르난은 무언가 말하려다 말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 안은 침묵에 휩싸였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오히려 어색함을 부채질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두 사람은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폐하께서 기침하셨습니다. 바로 두 분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문밖에서 시종장이 말했다. 에르난은 그대로 방을 뛰쳐나갈 기세로 움직이려다 멈췄다. 그는 아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부인.”
손짓은 정중하고, 검은 눈은 묘하게 처연한 빛을 띠며 옅게 떨렸다. 레이테는 잠깐 망설였다가 살포시 남편의 손을 쥐었다.
* * *
에르난은 설마 자신이 아버지의 앞에서 표정관리가 안 될 줄은 몰랐다. 아들의 당황한 기색을 부왕은 귀신같이 알아차릴 것이다.
그 증거로, 자우메 왕의 눈꼬리가 서글프게 축 처졌다.
아버지의 개인사에 심드렁한 아들마저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반년 사이 왕은 늙어 버렸다.
“어서 오너라, 에르난.”
자우메는 지팡이를 짚고 왕좌에서 일어나 아들에게 다가갔다. 에르난이 다가가 아버지를 부축했다.
“네가 이럴 때도 있다니, 별일이 다 있구나.”
부왕이 농담조로 말했다. 에르난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면 걸음이 불편한 사람을 그냥 뒀어야 하나?
“아니면, 아내 앞에서는 잘 보이고 싶은 것이냐?”
이런 식의 말은 에르난이 알던 부왕의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왕은 아들 옆의 여왕에게 다가갔다.
“레이테 여왕, 오랜만이오.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사크틸라에 갔다가 폐하를 한 번 뵈었소. 아직 아기였을 때였지요. 바르시나에 잘 오셨소이다.”
“처음 뵙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다시, 그것도 가족으로 만나서 기쁘답니다.”
사크틸라식의 살짝 억센 강세가 느껴지는 여왕의 바르시나어는 그녀의 우아한 목소리와 미묘한 불협화음을 이뤘다.
자우메가 레이테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에르난은 못마땅한 눈치로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며느리라지만 일국의 여왕이기도 하니 예의를 갖췄을 뿐이다. 알면서도 불쾌했다.
인사하며 살짝 숙였던 허리를 도로 펴면서 몸을 후들거리지만 않았더라면, 며느리에게 무슨 수작질이냐고 당장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며느리에게 수작질이라니. 에르난 자신이 떠올린 생각이지만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부왕의 원래 언행을 생각해 보면 딱히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라는 점이 더 끔찍했다.
“아 참. 여왕 폐하. 내 아내를 소개하겠소.”
자우메 왕의 말에 레이테의 시선이 정면의 왕좌를 향했다.
빈 의자는 자우메의 자리다. 그 옆에는 왕보다 한참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반갑습니다. 여왕. 에르난도 오랜만에 만나 반가워요.”
바르시나의 왕비 블랑슈. 에르난의 계모다.
왕비는 바르시나풍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으나 별다른 특징이 없는 무색무취한 인상이었다.
어머니에게 인사하는 에르난의 태도도 공손하지만 무미건조했다. 아들을 향하는 어머니의 눈길에도 아무 감정이 없어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폐하.”
레이테도 왕비를 향해 인사했다. 왕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인사는 그것이 전부였다.
“여왕, 오늘 밤부터 축제가 있소. 왕국의 수호 성녀 대축일을 맞아 1년 중 가장 화려하고 떠들썩한 시간을 보낸다오.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거요.”
왕은 어깨를 으쓱였다. 왕비는 다소곳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없었다.
일부러 남편을 경계하고 외면하는 레이테와는 달랐다. 바르시나 국왕 부처는 아예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색함을 느끼는 사람은 레이테뿐이었다. 자우메도, 블랑슈도, 그리고 에르난과 알현실의 다른 사람들도 그 불협화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기색이다.
“해가 지면 시내 왕궁의 발코니에서 개회사를 하고, 불꽃놀이가 이어진다오. 동방에서 수입한 진귀한 폭죽을 아낌없이 터뜨리니 여왕께도 분명 흥미로운 볼거리가 되리라 믿소.
올해는 특히 아들 부부의 결혼을 축하하는 뜻에서 각별히 성대하게 치르도록 명했으니 꼭 즐겨 주시오.”
“신경 써 주시니 감사합니다.”
레이테는 살짝 몸을 굽히며 감사를 표했다. 반면 에르난은 시큰둥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녁때 다시 만나자는 말과 함께 알현을 마치고, 처소로 돌아가는 동안도 내내 그런 식이었다.
“에르난, 무슨 문제 있나요?”
왕궁에 막 도착했을 때의 일을 생각하면 말을 건네기 어색하다. 하지만 보다 못한 레이테는 남편에게 물었다.
그는 잠시 놀란 눈을 뜨며 아내를 바라보았다가 답했다.
“문제라……, 아버지 병환은 사실 핑계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폐하의 평소 건강이 어떤지는 몰라도, 지금은 확실히 몸이 편치 않아 보이던걸요. 너무 냉정하지 않나요? 그래도 아버지인데.”
“아, 물론 지금은 아프시지요. 다만, 가족이라고 무조건 좋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는 건, 당신의 죽은 숙부로도 증명되지 않습니까?”
날이 선 대답을 끝으로 대화는 끊어졌다.
숙부를 들먹이니 레이테는 더 할 말이 사라지고 말았다.
레이테는 어쩐지 민망해졌다. 정작 그녀에게는 아버지가 없었으니까.
돌아가는 길은 멀기도 했다. 부부는 말없이 걷기만 했다.
이국적인 장식의 아치가 이어진 회랑 밖으로 보이는 중정이 아름다웠다. 레이테는 뜰의 오렌지 나무에 시선을 두며 어색함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처소에 다다르자 에르난이 말했다.
“해가 지려면 시간이 남았으니, 잠깐이라도 휴식을 취하시지요.”
“네, 고마워요. 당신도.”
그러나 레이테는 결국 쉬지 못했다. 축제 참가를 위한 몸단장 때문이었다.
여왕을 단장시킬 시녀들이 이미 처소에 와 있었다. 사크틸라에서부터 여왕을 수행한 이들 외에, 바르시나의 귀부인도 보였다.
색깔이 또렷하고 화려한 드레스와 풍성한 머리 모양은 사크틸라의 스타일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다. 훨씬 경쾌하고 생동감이 넘쳤다.
“쉬기는 글렀군. 이따 봅시다.”
에르난이 아내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레이테는 가만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놀란 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아마 바르시나인일 것이다. 사크틸라인은 부부의 사이좋아 보이는 모습에 이미 익숙하기 때문이다.
‘자기네 왕자가 이러는 모습이 신기한가?’
레이테는 괜히 울컥했다. 그녀는 남편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고 발꿈치를 들어 그의 반대쪽 뺨에 키스했다.
다시 곳곳에서 짧은 탄성이 터졌다.
“금방 다시 만나실 거면서 애틋도 하십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프란세스크였다.
“자네도 결혼해 봐.”
아내를 조심스레 떼어놓은 에르난이 친구를 향해 빈정거렸다.
레이테는 두 사람의 관계가 무척 신기했다. 그녀에게는 친밀한 농담을 나눌 만한 친구가 없다.
프란세스크는 그와 함께 온 여성을 소개했다.
“여왕 폐하, 이쪽은 제 동생인 카테리나입니다. 폐하께서 바르시나에서 지내시는 동안, 이 아이가 폐하를 수행할 겁니다.”
레이테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들어 본 기억이 있는 이름이었다.?
#032
“처음 뵙겠습니다. 여왕 폐하.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단정하게 인사하는 카테리나는 이제 갓 성인이 되었을 나이로 보였다. 화려함으로 유명한 바르시나 궁정보다는 수도원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소탈하고 선량한 인상이었다.
아, 레이테는 깨달았다.
이른바 첫날밤, 에르난이 시스로네스에게 모욕당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들은 이름이었다.
‘카테리나 양은 수녀의 삶을 원하는데, 집안의 반대가 심합니다. 하지만 이미 스스로를 신의 신부라고 여긴 지 오래입니다. 남의 여자를 탐내면 안 되고, 애초에 관심도 없습니다. 의심 안 하셔도 됩니다.’
여왕을 정복할 기세로 달려들었다가 민망한 과거사나 털어놔야 했던 남편의 황당하면서도 유쾌한, 그리고 뜨거웠던 기억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마치 꿈과 같을 정도다.
‘그 문제의 상대가 이 아이였구나.’
레이테는 어쩐지 반가운 기분이 들어 카테리나의 손을 잡고 직접 일으켜 세워 주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그러잖아도 저와 늘 동행하던 시녀는 곧 출산인 터라 바르시나에 올 수 없었답니다. 이곳에 있을 동안 잘 부탁해요. 카테리나 양, 그리고 다른 분들도.”
레이테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바르시나의 귀부인들은 줄곧 여왕을 흥미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딱히 적의라고 부를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만, 호의 또한 확실히 아니었다.
에르난도 단장을 위해 따로 나가고, 레이테는 시녀들이 안내하는 대로 거울 앞에 앉았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축제는 기둥의 성녀님을 기리는 행사예요. 혹시 기둥의 성녀님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묶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빗을 동안, 카테리나가 유려한 사크틸라어로 말을 걸어 왔다. 인상보다 활발한 목소리였다.
“죽은 성녀께서 강림했다는 성당의 기둥이지요? 전설의 기둥을 실제로 보고 싶네요.”
“물론 보실 수 있지요! 성녀님의 축일에는 새벽부터 그 기둥 앞에서 미사를 드리거든요. 이 도시의 1년 중 가장 경건한 날이랍니다.”
“그 미사에 저도 참석할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요. 그날만큼은 바르시나의 왕족과 귀족들도 빠짐없이 성당을 찾고, 성녀님께 예물도 봉헌한답니다. 여왕 폐하께서도 성녀님께 꽃을 바치고 소원을 빌어 보세요.”
카테리나는 진심으로 그날을 기다리는지, 즐거움에 겨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여왕은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거울을 통해 다른 부인들의 반응도 조금씩 살폈다.
아무 변화 없는 사람, 조금씩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그리고 카테리나를 향해 눈을 흘기는 사람 등이 보였다.
카테리나도 ‘그날만큼은’이라 표현했듯이, 바르시나인의 전반적인 신앙심은 형편없다. 그들을 상징하는 말은 세속과 환락이다.
바르시나의 기준으로는 카테리나의 반응이 유난일지도 모른다.
“카테리나 양도 저와 함께 가요.”
“네, 물론이지요!”
여왕은 활달한 카테리나가 마음에 들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신앙심은 사크틸라인인 레이테로서는 아무래도 익숙하고 편했다.
물론 레이테에게는 카테리나보다 더 가까운 바르시나인이 있다.
남편, 에르난.
그를 떠올리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폐하, 어디 불편하신가요?”
다른 시녀의 질문에 레이테는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여왕은 남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결코 버려서는 안 될 상대다. 하지만 그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낼 수 없었다.
피하고 싶으면서도 피하고 싶지 않다. 모순 속에서 애매하게 거리를 두며 눈치만 보는 상황이 답답했다.
* * *
준비를 마친 레이테가 축제장으로 향하러 밖으로 나오니, 에르난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아내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그의 몸짓은 보란 듯이 정중했다.
“아름다우십니다, 부인.”
부부는 푸른 바탕에 금빛 자수가 빼곡한 옷을 맞춰 입었다.
레이테는 머리카락을 말아 올리고 하얗고 긴 베일을 썼으며, 에르난은 붉은빛의 큼직한 외투를 덧입고 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커다란 사슬을 목에 걸었다.
두 사람의 손에서 똑같이 생긴 반지가 빛났다.
부부는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사치스러운 마차에 올라탔다.
붉은색과 검은색의 호화로운 장식이 이베로 반도의 물건 같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레이테는 마차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밖에서도 안이 잘 보이도록, 벽 대신 기둥과 장식이 화려한 덮개만 씌워진 형태였다.
대단히 아름답지만, 험한 도로를 달리면 무너져 내릴 것 같다.
“이런 마차는 처음 보지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소용없을 것 같았다. 에르난은 이미 아내의 반응을 살핀 뒤 말을 꺼냈을 것이므로.
“장식이 이국적이네요. 대륙 본토의 수입품인가요?”
“예. 보시다시피 지나치게 섬세한 물건이라, 시내 한복판의 잘 닦인 돌길이 아니면 타고 다니기 무리지요. 그래서 이런 축제 때나 사용합니다.”
마차의 양옆으로 말을 탄 호위 기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갑옷을 입고 창을 든 그들의 모습은 용맹하기보다는 세련미가 넘쳤다.
해가 저물어 가는 살두비아는 한낮에 보았던 삭막함과는 완전히 다른 도시가 되어 있었다.
한낮에는 썰렁했던 시내가 축제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꽉 찼다. 경비병들은 마차가 지나갈 공간을 확보하느라 바빴다.
화려한 건물이 곳곳에서 위엄을 뽐냈다. 벽면마다 호화로운 장식의 등이 달려 거리를 빛냈다. 빨갛고 노란 바르시나의 깃발도 휘날렸다.
레이테는 자신이 여왕인지 시골 소녀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렇게 터질 듯한 생동감은 처음 보았다.
“왕자가 오랜만에 왔는데 관심도 없군.”
에르난이 투덜거렸다.
그의 말대로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레이테를 향했다. 알록달록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외국인 여왕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팔 흔들고 그러지는 마요.”
“네?”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화답하려던 레이테는 에르난의 말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애매하게 비웃음 살 바에야 끝까지 근엄한 모습으로 보이는 편이 나을 겁니다. 어차피 저 사람들은 사크틸라인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거들먹거리는 콧수염이라고.”
에르난이 비아냥거렸다.
과연, 남편의 말대로 군중의 시선은 호기심이 가득했지만 호의는 아니었다. 관찰, 평가, 트집 잡기를 하기 위한 얼굴이었다.
레이테의 몸단장 때 함께했던 귀부인들의 모호한 시선보다 훨씬 노골적이다. 군중 속 개인은 익명이기 때문이겠지.
결국 이것이 본심일까.
레이테는 잠시 망설이다 손을 무릎으로 내렸다.
사크틸라인에게 가졌다는 편견을 깨 버리고 싶은 충동은 들었다. 그러나 일단 신중히 분위기를 살피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마차는 왕궁으로 향하는 대신, 시가지를 한 바퀴 돌았다.
대성당과 그곳을 둘러싼 여러 개의 우아한 탑. 나라의 젖줄이라는 강과 그 위를 아치로 수놓은 다리.
강가를 지나갈 때에는 불꽃놀이 준비로 분주한 모습도 보았다.
“폐하께서 연설을 마치고 돌아서 등을 보이시면, 그때 바로 발사를 시작하게. 폐하께서는 왕실 문장이 수놓아진 옷을 입으니 그것을 확인하면 되네.”
불꽃놀이의 감독으로 보이는 사람이 일꾼들에게 하는 말도 들렸다.
시내의 왕궁은 대성당 옆에 있었다. 규모는 낮에 머물렀던 궁보다 작다. 그러나 이국적인 문양으로 가득한 내부 장식이 무척 화려했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 폐하.”
호화롭고 세련되게 멋을 낸 귀족들이 부부를 맞았다.
부부를 향한 인사도 단순히 허리를 굽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다리까지 몸 전체가 멋진 곡선을 그리는 움직임이다. 탐브레까지 찾아왔던 바르시나인 사절이 보였던 번드르르한 예절이다.
상대방을 존중하기 위한 인사이기보다, 자신을 뽐내는 데에 더 집중하는 모습 같기도 했다.
바르시나의 국왕 부처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왕은 안색이 불편해 보였다. 그러나 바르시나의 깃발을 그대로 두른 듯 붉고 노란 옷만은 생기가 넘쳤다.
왕비는 보석을 촘촘히 박은 드레스를 입었다. 다른 귀부인들의 네크라인이 과감하게 파인 드레스와는 다른 스타일이었다.
“자, 이제 발코니로 나갑시다.”
왕은 여전히 지팡이에 의지해 걸었지만 목소리만은 제법 활기찼다. 국왕 부부가 앞장서고 레이테와 에르난이 그 뒤를 따랐다.
레이테는 문득 국왕 부부의 의상이 전혀 딴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옷차림은 모두 아름답다. 하지만 배우자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완전히 따로 논다.
발코니는 섬세한 장식의 울타리로 둘러싸였다. 자우메 왕이 그곳에 나타나자 군중의 환호성이 울렸다.
레이테와 에르난도 그 뒤에 섰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광장은 마차를 타고 지나갈 때 보았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레이테는 자신에게 꽂히는 수많은 시선을 느꼈다. 마차에 타 있을 때 받은 느낌과 같았다. 호기심과 불신.
왕이 연설을 시작했다.
“올해도 이곳에 서게 되어 기쁘오.”
사실 왕의 목소리는 발코니와 가까운 곳에서만 들린다. 다만 중요한 말은 사람들을 타고 멀리 전달되기도 했다.
앞에서 환호성이라도 나오면, 멀리서 떠들던 사람들은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고 함께 소리를 질렀다.
발코니를 장식한 커다란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며 자꾸 왕의 몸에 달라붙었다. 자우메는 불쾌한 기색 없이 그것을 걷어내며 연설을 계속했다.
신민들을 한꺼번에 만나서 기쁘다, 기둥의 성녀께서 영원히 바르시나를 지켜줄 것이다 등등의 내용이 계속되었다.
레이테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여러 차례 반복하는 연합에 대한 강조였다.
“올해 또다시 기념하는 대성당의 기둥에는 바르시나의 세 자치국이 하나로 연합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소.”
지방색이 강한 바르시나는 세 지역이 서로 협력하면서도 경쟁하고, 자치권을 목숨만큼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자치에 대한 왕실과 지방의 태도는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신앙심 없기로 유명한 바르시나에서 매년 꼬박꼬박 성녀를 기념한다니. 애초에 이것부터 인위적이잖아. 이 축제는 왕실을 위한 행사야.’
부정한 세금을 걷어간 관리를 발본색원하겠다는 말이 끝나자 광장이 떠나가도록 함성이 울렸다. 어느 나라나 이런 문제는 비슷했다.
“이제 중대한 결정을 발표하겠소.”
함성이 잦아들자 자우메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대한?’
갑자기 에르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뭐지? 레이테는 그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자우메가 먼저 아들을 자신의 옆으로 이끌었다.
“자, 에르난. 여기에 서거라. 여왕께서도 앞으로 나오시지요.”
에르난이 아내의 손을 덥석 쥐었다.
레이테는 놀라서 남편을 바라보았다. 정면을 향해 선 에르난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나의 아들, 그대들의 다음 주인인 에르난이 마침내 사크틸라의 아름다운 여왕 폐하와 부부가 되었소. 이미 소식을 들은 이들도 많지만, 여왕을 위해 용맹하게 반역자도 무찔렀지. 무척 자랑스럽고 믿음직하다오.”
왕은 아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부왕을 노려보는 에르난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에르난은 아무래도 왕의 의도를 짐작한 듯했다. 아내와 맞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늙고 병든 왕은 이제 슬슬 물러날 준비를 해야겠소. 새 시대를 준비하고자, 내 아들 에르난을 섭정으로 임명하여 모든 국정을 맡기겠소. 또한 양위 절차를 밟아, 에르난이 그대들의 새 왕이 될 것이오.”
광장이 적막에 휩싸였다.
아내를 쥔 에르난의 손에 힘이 풀리며 툭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완전히 일그러졌다.
주변 귀족들, 발코니 근처에서 왕의 목소리를 직접 들은 이들도 입이 벌어지고 넋이 나간 모습이 또렷했다.
레이테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들이 보고 싶다며 재촉하던 이유가 설마 이래서였나? 더군다나 사람들의 반응으로 보아,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다.
‘어떻게 이런 중대사를 독단적으로 진행할 수 있지?’
모두가 당황한 가운데 단 한 사람, 왕비만이 의연한 모습이었다. 무심한 눈길의 그녀는 지금 상황에 관심 자체가 없어 보였다.
“아버지, 이게 대체 무슨…….”
에르난이 몸을 돌려 왕을 바라보았다.
하필 그 순간, 바람이 멈추었다. 펄럭이던 바르시나의 깃발이 맥없이 축 처지며 에르난을 덮어 버렸다.
그 모습이 멀리서는 도대체 어떻게 보였는지,
펑! 펑펑!
폭죽이 터지며 불꽃이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033
광장은 넓다. 모든 이가 적막의 원인을 알 수는 없었다.
영문을 모르던 시민들은 불꽃을 보자 마냥 신이 나 함성을 터뜨렸다.
한번 쏘기 시작한 폭죽은 멈추지 않았다.
사정을 아는 발코니와 그 주변의 귀족들도 별수 없이 불꽃놀이를 감상해야만 했다. 레이테 역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성대하게 준비했다더니, 불꽃은 얄미울 만큼 예뻤다. 어처구니없는 중에도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이제 막 어두워진 하늘 위에 불꽃이 크게 원을 그리며 꽃을 피웠다. 펑펑! 펑! 가지각색의 폭죽이 수없이 터졌다.
긴 불꽃 아홉 개가 동시에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노랑과 빨강 줄무늬로 이뤄진 바르시나의 문장을 하늘에 그리며 불꽃놀이의 막이 내렸다.
너무 아름다워서 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
에르난은 몸을 휙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인사 따위는 없었다.
아들의 반응에 안색이 파리해진 국왕, 여전히 무심한 왕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귀족들을 두고, 레이테는 남편을 쫓아갔다.
* * *
“에르난, 잠깐만요!”
간신히 남편을 따라잡은 레이테는 그를 붙잡았다.
레이테는 바람이 들어오는 창가에 남편을 기대어 앉혔다. 그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창밖은 벌써 시끌벅적했다. 화려하게 꾸민 배를 강에 띄우고, 다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것을 구경했다.
저들은 왕의 선언 따위에는 관심도 없을 것이다.
“나는 다시 이곳에 갇힌 겁니다.”
에르난이 불쑥 말했다.
“갇히다니요?”
아내가 묻자 에르난의 미간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감출 수 없는 짜증이 눈앞의 아내를 향했다.
잠깐 놀란 레이테는 곧 그를 노려보았다.
“쉬러 온 줄 알았는데 갑자기 섭정하라니 혼란스럽겠지요. 이해해요. 그런데, 제가 뭘 잘못했나요?”
살두비아에 도착한 오늘, 남편의 태도는 줄곧 레이테를 의문에 빠트렸다.
그는 아내가 걱정된다는 뻔한 말을 굳이 했다. 이곳에 돌아오면 안 된다는 핑계를 뒤늦게나마 찾는 듯.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나?’
부왕의 편지를 받았을 때부터, 그는 어쩔 수 없이 귀국한다는 내색이기는 했다.
어쨌거나 레이테는 자세한 사정을 모른다. 그런데도 남편은 아내에게 짜증 낸다. 불쾌했다.
“……죄송합니다, 레이테. 당신 탓이 아닙니다. 아버지, 아버지와 이야기해 봐야겠습니다. 당신도 함께 갑시다.”
자신을 쏘아보는 아내의 시선에 정신을 차린 에르난이 그녀의 손을 쥐었다.
레이테는 그 손길을 뿌리쳤다.
“부인?”
당황하는 에르난에게, 레이테는 쌀쌀맞게 말했다.
“뭘 놀라나요? 우리 계약 잊으셨나요?
‘각 왕국의 합법적인 계승자 고유의 권한은 존중되어야 한다.’, ‘후계자와 재산의 상속 역시 두 왕실을 구분한다.’
바르시나의 왕위 계승 문제잖아요? 외국 여왕이 끼어들 주제가 아니군요. 계약 위반이니까요. 혼자 가요. 당신 일은 당신이 하세요.”
레이테의 보랏빛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살벌한 기세에 에르난은 할 말을 잃고 아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에르난은 갑자기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툭 쳤다.
“아, 계약. 계약이 있었지.”
그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에르난은 아내의 손을 그러쥐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저기, 에르난?”
“못난 모습을 보여 미안합니다. 우리 사이에 그런 약속이 있어 무척 기쁘군요.”
에르난은 말하는 사이사이 자꾸만 아내의 손등에 입 맞추기를 반복했다.
“네……, 다행이긴 한데요, 설명 좀 해 주시겠어요?”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거의 공황 상태였던 남편이 돌변한 이유를 모르겠다.
“이제 알겠습니다. 조금 먼 길로 돌아갈 뿐이군요. 나는 이 땅에 매몰되지 않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부인.”
목소리는 점점 들떴고, 손등의 입맞춤도 짙어졌다. 레이테는 얼굴을 붉혔다. 이 사람이 왜 이런담?
레이테는 맞는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 말은 솔직히……, 결코 따스한 위로가 아니었다.
남편이 실망하더라도 상관없다. 각 나라의 권한을 침범하지 않는 것만이 중요했다.
어차피 레이테는 바르시나의 왕권에 관심이 없다. 복잡한 계약은 자신의 것을 수호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당신을 반드시 이 나라의 여왕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철저하게 레이테를 위한 계약이거늘, 왜 그는 기뻐하는가.
손등에 닿는 숨결의 열기가 범상치 않았다. 에르난은 눈을 위로 올려 떠 아내를 바라보았다.
흐릿한 달빛만으로도 붉어진 그의 눈이 잘 보였다. 레이테의 얼굴마저 그를 따라 붉게 물들었다.
“다, 당연한 말씀을. 당신이 괜히 사크틸라의 왕이 된 줄 아시나요?”
레이테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뒤로 뺐다.
“어서 다녀와요. 어차피 거절은 불가능한 상황 아닌가요? 당신 말대로 제가 여왕이 되기 위해서라도 잘 해야 할 거예요. 저는 처소에 돌아가 쉬겠어요.”
빠르게 말을 마친 레이테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달아오른 얼굴이 진정되지 않았다.
레이테는 이제 남편의 목소리도, 눈도, 숨결도, 입술과 손의 감촉도 모조리 익숙했다. 더군다나 그녀가 쓸 바르시나의 왕관은 단순한 계약 사항일 뿐이다.
그런데도 레이테는 자신의 마음이 들뜨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 *
에르난은 부왕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아내가 도망치듯이 사라지자마자, 반대편에서 귀족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섭정과 양위라니! 국왕 폐하께 미리 언질을 받으셨습니까?”
“저희에게 상의 한마디도 없이 막무가내로……!”
그들은 에르난을 잡아먹을 기세였다.
“여러분, 복도에서 이러지 마시고 들어가서 의논합시다. 국왕 폐하도 그쪽으로 모셔오시고…….”
에르난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회의실로 떠밀었다.
“경들은 짐의 병환을 다 알잖소? 환자 부려먹을 생각 말고 젊고 건강한 내 아들을 따르시오.”
잠시 후 나타난 왕은 뻔뻔했다.
먼저 상황을 주도해 상대가 계산할 틈을 주지 않는다. 왕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부렸다.
에르난도 그 안에서 썩 자유로운 편은 아니었다.
“설마 에르난을 섭정으로 못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오?”
겨우 사크틸라의 왕관을 썼더니만, 거절할 틈도 없이 섭정이 될 판이다. 한동안은 바르시나에 붙잡힌 셈이다.
그러나 에르난에게는 아내가 있다.
계약으로 연결된 이상, 그녀는 자신이 여왕답게 활동하기 위해서라도 남편을 사크틸라에 도로 데려갈 것이다. 남편에게 옆자리를 지키는 인형 노릇만을 요구할지라도.
노예 계약이라고 자조했거늘, 이런 식으로 안심할 줄은 몰랐다.
‘레이테는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지. 돌아가면 제대로 설명해 줘야겠어. 당신과 결혼해서 기쁘다고.’
“줄곧 왕위 계승자인 분을 거부할 이유는 없잖습니까! 단지…….”
섭정과 양위가 작은 일은 아니다. 따라서 귀족들은 왕의 독단에 항의할 수 있다. 물론 바르시나의 귀족들은 그 수위가 지나치게 강하지만.
어차피 귀족들이 반발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에르난은 그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굳이 이 자리까지 왔다.
“사크틸라의 왕이신 돈 에르난 폐하.”
비꼬는 투가 역력한 목소리가 에르난의 귀를 신경질적으로 때렸다.
‘귀찮은 인물이 와 있었군.’
목소리만큼이나 신경질적인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대륙풍의 의상을 화려하게도 차려입었다.
에르난은 짐짓 여유로운 척하며 말했다.
“코른 후작, 너무 매정하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아내와 함께 사크틸라의 왕이 맞지만, 그에 앞서 바르시나인입니다.”
“물론 폐하께서는 바르시나인이십니다. 허나, 폐하의 배우자께서는 아닙니다만?”
“왕실의 결혼이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제 어머니도, 또 다른 어머니도 모두 외국인입니다.”
“하지만 군주인 분은 없었습니다.”
무릎 위에 놓인 에르난의 주먹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참자. 그는 끓어오른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꼬투리 그만 잡고 기탄없이 말씀하시지요. 들으려고 왔으니까.”
왕자의 말은 내용과 달리 협박조에 가까웠다. 회의실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왕의 걱정스러운 눈길이 아들을 향했다.
‘섭정하라며 일방적으로 떠넘길 때는 언제고 다시 염려하는 척이라니.’
불편한 시선이다. 에르난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코른이 다시 말했다.
“폐하, 사크틸라가 바르시나의 국정에 간섭하지 않으리라 안심할 수 있습니까?”
“그 문제는 결혼 계약서에 명시해 두었습니다. 분명히 바르시나로 사본을 보냈을 텐데, 경만 한 분께서 설마 그것을 읽어 보지 않은 겁니까?”
“왕국의 고유 권한, 특히 인사권과 상속의 독자성을 인정한다는 조항 말입니까?”
“잘 기억하시는군요. 공동 왕위는 사실상 명예직입니다. 여기 모인 경들과 마찬가지로, 사크틸라 또한 외세의 간섭을 경계하거든요.
지금 이 자리에 제 아내는 오지 않았습니다. 바르시나 내부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며 처소로 돌아갔지요. 타국의 간섭은 불가능하며,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한들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에르난은 이 말을 하려고 회의에 참석했다. 내정 간섭 문제 정도는 논파해야 바르시나는 레이테를 받아들일 것이다.
아내는 이 땅의 여왕이 되어야만 한다. 에르난을 위해서.
자우메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러나 안색은 밝지 않았다. 회의장 안의 다른 귀족들도 썩 개운한 표정은 아니었다.
“서류상으로 부부가 동일하다 해도 현실은 다릅니다, 폐하.”
코른이 말했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군.’
“코른 후작, 솔직히 말하라고 했지 무례한 훈계까지 허락한 기억은 없는데.”
에르난의 목소리가 음산하리만치 다시 낮아졌다. 그러나 코른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바르시나에서야 도냐 레이테를 형식적인 여왕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비록 바르시나의 역사와 법은 여왕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지만, 실권 없는 여왕이니 이 정도의 예외는 가능하겠지요. 허나 사크틸라는 다르지 않습니까? 여왕의 권한을 받아 나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 역할은 배우자가 해야겠지요.”
‘틀렸어. 여왕은 자기 권력을 넘길 마음이 전혀 없거든.’
에르난은 속으로 빈정거렸다. 권한을 받기는 무슨. 숨이 막히도록 짓눌리며 옆자리만 지켜야 했다.
그러나 코른의 말을 끊고 반박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효과가 없을 테니까.
저들은 권력을 직접 행사하는 여왕이라는 존재 자체를 이해 못 할 것이다. 동등이니 공유니 하는 단어를 분명히 계약서에서 보았을 텐데도.
“내가 사크틸라를 통치한다면 바르시나에도 좋은 일이 아닙니까? 헤젤의 위협이 날로 심해지니 반도의 안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사크틸라와 연합해야지요. 이는 반도 내에서 우리의 영향력을 키울 좋은 기회기도 합니다.”
“틀렸습니다, 폐하. 정확히 그 반대입니다. 현실을 보시지요. 폐하께서 사크틸라에 가 맨 처음 무엇을 했습니까? 용병 대장 노릇 아닙니까?
바르시나는 사크틸라에 부역하는 식민지가 될지도 모르지요. 왕자를 이미 빼앗겼습니다. 곧 군사와 경제가 흡수되고, 바다와 땅도 수탈당하다가, 결국 자유마저 내어 줄지도 모릅니다.”
예상보다 훨씬 독한 표현이 에르난을 사정없이 때렸다.
“그만, 그만! 코른, 너무 비관적이구려. 결혼은 인간이 함부로 끊을 수 없는 신성한 약속 아니오? 그러니 경 또한 현실을 인정하고 대책을 논의하는 편이 좋지 않겠소?”
살벌한 분위기를 진정시키고자 왕이 끼어들었다.
에르난은 슬슬 짜증이 났다. 코른의 집요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느 누구보다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를 하찮게 여기면서 신성함 운운이라니.’
부왕의 논리는 하필 그의 입에서 나왔기에 어처구니없지만, 동시에 옳았다. 에르난도 부왕과 똑같이 생각했다. 그 점이 불쾌했다.
“폐하의 말씀대로, 결혼은 이미 성사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무려 2년 전에 결정된 사항이지요. 경들은 여태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 와서 반발합니까?”
모른 척 따졌으나 에르난 역시 답은 알았다. 사크틸라에서 워낙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오래전, 헤젤 공주와의 혼담처럼.
하지만 에르난은 잊지 않았다. 하루하루 날짜를 세던 그는 다른 이들이 붙잡을 틈도 없이 프란세스크와 갑작스레 사크틸라로 떠났다.
“통보를 받았지 저희는 동의한 일이 없습니다!”
“왕실의 혼인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폐하!”
회의실은 다시 소란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동의? 언제부터 왕족의 결혼이 경들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습니까?”
에르난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폐하, 이곳은 사크틸라가 아닙니다.”
코른의 한마디가 어수선함을 끝냈다.
가장 불쾌하게 말하는 데에 도가 트였군. 에르난은 그를 노려보았다. 코른은 미래의 왕이 아니라 원수를 대하듯 에르난을 쏘아보며 말했다.
“여기는 바르시나입니다. 저희의 자유가 억압받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당신을 새 주군으로 믿고 따르겠습니까?”?
#034
창가에 모여 밖을 구경하던 시녀들은 여왕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처소의 정돈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여왕이 축제 첫날 밤을 한껏 누리고 돌아오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너무 빨리 돌아왔나요? 일찍 쉬고 싶은데.”
여왕이 말하자 시녀들은 허둥지둥 움직였다.
레이테는 안쪽의 침실로 들어갔다. 카테리나가 침실 창문을 급히 닫고 있었다.
창은 강가가 보이는 방향이다. 그녀도 축제를 구경했나 보다.
“카테리나 양.”
문을 닫은 카테리나가 침실에서 나가려 했다. 레이테는 그녀를 불렀다.
“잠시 시간을 내 줄래요?”
다른 시녀들의 의아한 눈을 뒤로하며 침실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말씀하세요, 폐하.”
하지만 여왕은 한참 말이 없었다.
‘에르난은 바르시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이유가 뭘까?’
레이테는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또 카테리나가 얼마나 답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사실 즉흥적으로 그녀를 불렀다. 시녀들 중 그래도 가장 편한 사람이니까.
결국, 레이테의 입에서는 에르난 대신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카테리나 양은 사크틸라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네? 저는 정치는 잘 모릅니다.”
카테리나는 잠깐 망설이더니 말을 덧붙였다.
“다만, 바르시나 귀족 여성 전반의 인식은 대강 말씀드릴 수 있어요.”
“좋네요. 얘기해 줘요.”
“여왕 폐하에 대한 호기심이 굉장해요. 하지만 바르시나인은 사크틸라인을 촌스럽……, 송구합니다!”
“괜찮아요. 계속 말하세요.”
그런 편견은 레이테도 들어 보았다. 심지어 틀리지도 않았다.
바르시나는 대륙 본토의 최신 문화를 빠르게 흡수한다. 그에 비하면 사크틸라는 고인 물이다.
“아, 폐하를 얕잡아 보지는 않아요. 오히려 왕자께서 여왕께 매달리시듯…….”
‘연출의 효과가 지나치게 좋았나.’
당연히 매달림 따위는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바르시나가 사크틸라에 예속될까 봐 걱정해요.”
이어지는 카테리나의 말은 의외였다.
“예속?”
“바르시나는 겉보기에 화려하지만, 사크틸라보다 훨씬 작은걸요. 크기도, 인구도, 자원도.”
“아…….”
레이테는 비로소 에르난의 ‘갇혔다’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바르시나는 후계자를 사크틸라에 뺏길까 두려워한다. 후계자를 시작으로, 하나하나 사크틸라에 말려들어 갈까 봐.
‘그래서 돌아와 달라 재촉했구나.’
결혼 후 남편의 행보를 생각해 보면, 바르시나의 과한 걱정도 무리는 아닐 듯했다.
에르난은 아내를 위해 군대를 지휘했다. 본심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아내를 위해 왕관을 쓰고 아내의 옆을 지켰다.
따라서 바르시나는 돌아온 왕자를 다시 내보내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좋은 이야기 고마워요. 이제 혼자 쉬겠어요.”
여왕은 다소 쌀쌀맞게 대화를 마쳤다.
‘기껏해야 내정 간섭을 염려하는 줄 알았는데.’
생각을 갈무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바르시나의 반발을 너무 단순하게 여겼다.
“폐하,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카테리나가 여왕을 부축했다. 레이테는 그때야 자신이 여태 서 있었음을 깨달았다.
카테리나의 도움으로 의자에 앉으니 현기증이 약하게 몰려왔다.
“고마워요.”
카테리나는 마음에 든다. 하지만 그녀도 바르시나인이다. 너무 많은 것, 특히 미숙함을 드러내면 위험할지도 모른다.
레이테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지긋지긋한 경계심 같으니라고.
“……당신의 오빠와 에르난은 사이가 무척 좋더군요.”
레이테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왜 이런 말을 하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네, 어릴 적부터 친했답니다. 폐하께서는 저희 집에도 자주 놀러 오셨어요. 부모님께서는 그분을 친아들처럼 살갑게 대해 주셨고요.”
“에르난에게는 부모님이 넷이나 되는 셈일까요? 국왕께서도 아들에게 지극해 보였는데, 남편은 행복하게 자랐군요.”
부모도 형제도 없는 레이테에게는 꽤 신기한 일이었다.
물론 레이테에게도 남편이라는 가족이 생겼다. 하지만 그는 계약으로 맺어진 경쟁자다.
레이테는 깨달았다. 느닷없이 남편과 그 친구에 대한 말이 나온 이유는 부러움 때문이다.
경계도 경쟁도 할 필요 없는 친구. 레이테에게는 그런 사람이 마땅히 없었다.
“이런 말을 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카테리나는 무언가 켕기는 구석이 있어 보였다.
“왕자께서는 부왕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으세요. 정확히는 왕자께서 국왕 폐하를 싫어할 거예요.”
레이테는 남편이 아버지를 향해 보였던 시큰둥한 태도를 떠올렸다.
과연. 그러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부족할 것 없이 보살핌 받아 왔을 텐데?
카테리나는 망설이며 말을 이었다.
“왕께서는 왕자님의 생모이셨던 전 왕비님과 사이가 무척 나빴어요. 두 분은 매일같이 이혼을 외치는 사이였다고 해요. 아마 그 때문일 거예요.”
* * *
살벌했던 회의는 결론 없이 끝났다.
아니, 결론은 애초에 정해져 있다. 여왕이 아무리 문제라 한들, 에르난은 바르시나의 섭정이 된다. 섭정 임명은 왕의 고유 권한이니.
회의실에는 왕과 그 아들만 남았다.
“에르난.”
왕이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에르난은 거세게 부왕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납득한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구나.”
“납득? 거부할 수 없으니 받아들일 뿐입니다.”
에르난은 실소를 터뜨렸다.
“역시 한결같으십니다. 당신 좋을 대로 참 편하게 해석하시는군요. 저는 여왕과 결혼했으니,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서라도 이곳에서 긴 세월을 썩히지는 않을 겁니다.”
아버지에게 분노를 터뜨리려 했는데, 아내가 등장하고 말았다. 어차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왕은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아들을 올려다보았다. 아들이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얼굴은 수척했다.
“바르시나를 버리려는 거냐.”
“아버지마저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저는 당신께 바르시나를 물려받을 후계자고, 당신의 유산을 내던질 마음이 없습니다.
애초에 여왕과 결혼해 사크틸라에서 명성을 쌓으라는 말을 하신 분이 누구였습니까? 적어도 몇 년은 그곳에서 기반을 닦아야 할 텐데!”
한바탕 쏟아붓고 나니 머리가 어지럽다. 체력이 한계에 몰린 듯했다.
“……미안하구나.”
“미안하시면 애초에 이러질 말아야 하셨습니다.”
“네가 얼마나 믿을지 모르겠다만, 이제는 정말로 일하기에 힘이 부쳐.”
솔직히 에르난은 아버지가 아프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늙고 쇠락한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직접 보고도 거짓말 같았다.
그는 한때 아버지를 난봉꾼이라고 생각했다. 왕은 말만 그럴듯하게 하지, 지방 귀족을 제대로 휘어잡지 않는 소극적인 정치를 했다. 반면, 그에 따른 보상심리라도 되는지, 사생활만은 완전히 마음대로였다.
자우메는 늘 그런 사람으로 에르난에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병약해진 그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게 남은 시간이 정말 바닥난 것 같아서 너를 불렀다. 이렇게 된 이상, 네가 최대한 안정적으로 왕위를 계승해야 해.
여왕 또한 바르시나에서 인정받아야 하고. 그래야 사크틸라에서 너의 지위도 견고해질 거다. 계약이 그렇지 않더냐.”
에르난의 원래 계획은 순서가 반대였다.
아직 왕자일 때 사크틸라에서 힘을 쌓는다. 그 경험과 힘을 바탕으로, 왕위를 계승하면 바르시나에서도 강력한 왕이 되고 싶었다.
제멋대로이면서도 왕으로서의 힘은 형편없는 아버지와 다르게.
‘여기는 바르시나입니다. 저희의 자유가 억압받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당신을 새 주군으로 믿고 따르겠습니까?’
코른의 말을 다시 떠올리니 도로 머리가 아파 왔다.
“아까 코른이 했던 말 기억하시지요. 의회가 새 국왕의 즉위를 승인하지 않을 수 있다는 협박입니다.”
“그러겠지.”
바르시나의 왕위는 세습되지만 즉위 시 의회의 승인을 받는다.
이런 절차 자체는 어느 나라에나 있다. 신민 전체가 새 군주를 섬기겠다는 상징적 행위였다.
하지만 바르시나에서는 좀 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 가깝다.
허락받고 즉위하는 왕이라니 우스꽝스럽다. 아내라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들아, 오늘 네 말이 진심이기를 바란다.”
“네?”
“안전을 위해 사크틸라와 연합해야 한다는 주장 말이다. 감탄했단다.”
에르난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아들의 진정성을 의심했다는 소리다.
“제가 거짓말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개인적인 야망 충족을 위한 핑계로 대충 둘러댔다고?”
아들이 격양된 반응에 왕은 시선을 내려뜨렸다.
오래전부터 에르난은 아버지가 그에게 보이는 처연한 태도가 익숙했다.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가, 뒤늦게 사과를 덧붙인다. 이 역시 제멋대로다.
사과는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자신의 죄책감을 더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그 비굴함이 에르난은 싫었다.
“…….”
더 나눌 말이 없다. 에르난은 아버지를 지나쳐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 * *
복도를 걷는 에르난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분노이며 수치심이었다.
격렬히 부정했으나, 부왕의 지적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에르난에게는 자신의 꿈과 욕망이 제일 중요했다. 왕관은 그를 빛내 줄 물건이다.
그는 아내가 떠올랐다. 반칙을 써서라도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여왕은 그 권력으로 왕의 임무에 대단히 성실하게 임했다.
‘나는 얼마나 책임감을 가졌지?’
에르난은 미칠 듯이 몰려오는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었다.
* * *
에르난은 침실로 돌아왔다. 그는 당장 쓰러져 몸도 마음도 죄다 놓아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레이테가 슈미즈 위에 얇은 가운을 덧입고 난롯가에 앉아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돌려 에르난을 바라보았다.
“이제 오는군요. 고생 많았어요.”
에르난은 살짝 놀랐다. 부부가 침실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한 가지뿐이었으니.
“카테리나 양이 빌려준 책을 읽는데 재밌더라고요.”
레이테가 책을 들어 보였다. 기둥의 성녀에 대한 전기였다.
시종이 들어와 여왕의 옆에 의자를 놓고 나갔다. 에르난은 그 의자를 다시 들어 아내의 옆에 바짝 붙이고 앉았다.
두 사람의 팔이 맞닿았다. 레이테는 미세하게 몸을 움츠렸으나 남편을 피하지는 않았다.
“과연, 잘 맞는 조합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당신과 카테리나 양 얘깁니다. 동생이 여왕을 모시게 해 달라고 세스크가 제게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여전히 수도원에 들어가겠다고 난리라서, 일거리를 던져줘야 안심이 되나 봅니다.”
“아, 수도원. 잘 어울리겠던데요.”
“본인에게 그런 말 하면 큰일 납니다…….”
꽤 간절한 반응에 레이테는 풋 웃었다.
“섭정 건은 어떻게 되었나요?”
에르난은 난로의 장작불이 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설명했다. 특히 바르시나 측의 염려에 대하여.
“……물론 이 문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바르시나를 안심시켜야 해요. 다만 더 제대로 준비를 갖추고 싶었는데……. 아까는 갑자기 닥친 상황에 화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에르난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준비? 당신의 사크틸라 정복?”
“……아.”
직설적인 표현이 살랑살랑 부드러운 목소리를 타고 에르난을 건드렸다.
그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난롯불의 열기 때문만은 아님이 분명했다.
“우리 이미 서로 다 잘 알잖아요?”
레이테가 싱긋 웃었다.
“바르시나가 가진 두려움 말이에요. 저도 아까 카테리나 양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계속 생각했어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역시 우리의 계약이 실마리라고 생각해요.”
에르난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계약과 현실은 다르다는 질책을 들었으니까.
아내는 동등함에 집착한다. 계약을 제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그녀가 어떻게 변해 버릴지 몰랐다.
최근 그녀가 보인 경계가 바로 계약에 대한 불안이었을까?
“가만히 당신의 도움만 받을 마음은 없어요. 물론 당신의 협조는 필요해요. 나는 이 나라에서도 여왕이 되어야 하니까.”
레이테는 바르시나의 여왕이 되어야만 한다.
바르시나를 탐내기 때문은 아니다. 오로지 남편과 동등한 위치에 서기 위해서다.
그러나 에르난은 불쾌하지 않았다. 숨이 막히지도 않았다. 그는 아내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좋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제게 기대요. 저야 뭐 결혼, 아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당신께 봉사해 왔잖습니까. 군역 봉사, 잠자리 봉사……. 아, 옆자리 지키기 봉사도.”
레이테는 황당해하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틀렸습니까? 어차피 우리 서로 잘 알잖습니까? 당신이 조금 전 말했던 대로.”
“나 참…….”
레이테는 어이가 없는 듯 연신 헛웃음을 흘렸다.
끌어안은 아내는 따뜻하다. 에르난은 곧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조금씩 아내 쪽으로 기울었다. 이윽고 머리가 레이테의 어깨 위로 풀썩 쓰러졌다.
“나더러 기대라고 하더니 자기가 나한테 기대네.”
레이테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남편의 베개가 되어 주었다.?
#035
“저 여자가 사크틸라 여왕이래.”
“와, 예쁘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레이테는 자신에게 꽂히는 수많은 시선을 느꼈다.
“별로 무섭게 생기지는 않았는데?”
수군대는 중에도 꼭 이런 말만 그녀의 귀에 또렷하게 박혔다.
‘무섭다? 나를 어떻게 보는지 알 만한걸.’
씁쓸한 기분과 반대로 레이테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활기와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 볕이 한풀 꺾이면 사람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레이테 또한 수행원들과 함께 강변으로 나왔다.
여왕은 동방의 보석같이 밝은 청록색 바탕에 화려한 금빛 문양이 수 놓인 드레스를 입었다.
은빛 머리카락은 느슨하게 땋아 올리고, 은은하게 빛나는 진주를 목걸이처럼 길게 엮어 머리에 감았다.
앞가슴에 단 브로치는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틀 가운데에 장밋빛 보석을 박았다. 허리에 두른 보석 벨트도 호화찬란했다.
카테리나를 비롯한 시녀들이 악착같이 들러붙은 결과다. 축제장에 가니 무조건 화려해야 한다면서.
‘공식 석상이나 연회도 아니고, 단순 외출치고 과하지 않나……?’
그러나 여왕의 나들이를 수행하러 등장한 귀부인들을 보자 레이테의 걱정은 쏙 들어갔다.
눈이 어지러울 만큼 사치스러운 차림새다. 열심히 꾸미지 않았으면 여왕이 오히려 그녀들의 화려함에 가려질 뻔했다.
다른 사람들도 만만치 않았다. 귀족도 일반 시민도, 모두 화려한 배색의 옷으로 한껏 자신을 뽐냈다.
여왕 일행은 아치가 아름다운 돌다리 위, 강과 대성당이 잘 보이는 곳에 쉴 자리를 잡았다.
난간에 기댄 레이테는 경치를 감상했다. 맑은 하늘과 부드러운 바람이 좋았다.
꽃과 리본으로 꾸며 축제 분위기를 한껏 내는 나룻배들이 넓은 강에 떠다녔다. 배에는 술기운을 빌려 꽤 낯 뜨거운 스킨십을 나누는 남녀도 있었다.
레이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성당으로 시선을 돌렸다.
겉옷 이곳저곳을 절개한 기괴한 차림새의 청년들이 보였다. 대성당 벽에 기대선 그들은 맥주잔을 손에 쥐고 떠드는 데에 바빴다.
‘사크틸라에서 저러면 사제들에게 혼쭐이 날 텐데.’
성당의 신성함 따위, 이곳 사람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나 보다. 성당과 탑 사이 구석에서는 눈 맞은 이들이 밀회를 즐길지도 모른다.
“내일은 분위기가 싹 바뀐답니다.”
카테리나가 말했다.
“성녀의 축일이니까?”
“네. 새벽부터 미사를 드리고, 모든 사람이 성녀님께 꽃을 바치는데 무척 경건하답니다.”
프란세스크와 마찬가지로, 카테리나도 눈치가 빨랐다. 여왕이 무엇을 원하고, 어떤 기분인지 착착 알아채 적절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확실히 레이테와 성향이 잘 맞았다. 더 친해지고 싶다.
“마침 궁금했는데, 알려 줘서 고마워요. 기대되네요.”
그래서 레이테는 밝게 웃음 지었다.
사소한 것부터 챙겨야 신뢰가 생긴다. 레이테는 시스로네스에게 그렇게 배웠다.
물론 대주교가 직접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여왕이 잘한 일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칭찬해 주었다. 여왕의 작은 친절에도 역시 꼬박꼬박 감사를 표했다.
얼마나 고맙고 기뻤던가. 레이테도 그렇게 베풀고 싶었다.
시스로네스는 여왕의 섭정이 되어 사크틸라에 남아 있다. 레이테는 오전에 그가 쓴 편지를 받았다. 정기적으로 받는 보고서였다.
사크틸라에는 큰 사건이 없으며, 헤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겠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편지는 여왕의 건강에 대한 걱정, 그리고 남편과 화목하게 지내기를 바란다는 말로 끝나곤 했다. 레이테는 그것을 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뭐, 얼렁뚱땅 긴장이 풀린 느낌이기는 해.’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 때문에라도 레이테는 남편을 향한 경계의 수위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에르난은 멀지 않아 왕이 될 것이다. 레이테는 그의 옆에서 같은 왕관을 써야만 했다. 하지만 바르시나의 반발은 만만치 않아 보인다.
묵은 감정이 어떻든 동일한 목표 아래서는 상대의 손을 단단히 잡아야 했다.
“에르난도 함께 나오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레이테가 중얼거렸다. 딱히 대답을 바라지 않는 혼잣말이었다.
물론 부부에게 관심이 지대한 수행원들은 흥미로운 시선을 서로 교환하느라 바쁠 테지만.
* * *
에르난도 축제를 즐기고 싶었다. 아내와 외출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다.
“헤젤의 전반적인 움직임은 폐하께서 미노리카의 총독으로 계실 때와 많이 달라졌습니다. 해적질보다는 지능적인 밀수가 늘었습니다.”
“밀수 자체야 이전부터 꾸준했으니, 해적질이 줄어든 셈이군. 약탈은 애초에 사크틸라가 무정부 상태에 가까워서 가능했었지. 그 앞을 지나가도 아무 제재가 없었으니까.
사크틸라가 안정을 찾을 기세니까 해적부터 바로 줄어들었소. 그러니, 이 사례만 보아도 사크틸라와의 협력이 얼마나 우리에게 이득인지 알 수 있지 않나?”
“…….”
에르난을 마주 보고 선 귀족은 대답하지 않았다. 에르난은 그 침묵의 뜻을 잘 알았다.
맞는 말이지만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음.
“아무튼 자세한 대책 논의는 대표위원회 때 하지. 수고 많았소.”
그가 집무실을 나가자마자 비서가 들어와 두꺼운 서류 뭉치를 에르난의 앞에 내려놓았다.
“각 지역의 지난해 세입·세출 보고서입니다, 폐하.”
보고서는 끔찍하게 두꺼웠다. 하지만 에르난에게는 꼼꼼하게 살필 여유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전반적인 현황만 파악하면 된다. 오히려 ‘지역’의 일에 왕실이 관심을 많이 보이면 곤란해진다.
에르난은 보고서를 빠르게 훑었다.
부왕을 도와 크고 작은 일은 경험했다. 섬 하나를 수년 동안 통치하기도 했다. 하지만 섭정은 처음이다.
더군다나 그는 반년 가까이 나라를 비웠다. 따라서 업무를 시작하기 전, 바르시나의 현황 파악이 급했다.
‘1년 중 가장 열심히 논다는 축제 때 이게 뭐하는 짓인지…….’
심지어 그는 어제 열린 마상시합도 구경만 해야 했다. 이는 부왕의 명령 때문이기도 했지만.
* * *
왕은 아들에게 자신의 병명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에르난이 시의를 불러 물으니, 그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술술 답했다.
‘통풍이 꽤 심하십니다. 밤중에 발작이 일어나 침대에서 낙상하신 뒤로 걸음이 불편해지셨고요.’
새벽에 발작이 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에르난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부왕을 찾아갔다.
“발가락이고 발목이고 모조리 난리구나. 점점 걷기도 더 힘들어지고. 아예 다리를 잘라 버리면 통증이라도 덜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끔찍한 소리 마시지요.”
“가만히 쉬면 좀 괜찮단다. 아 참, 오늘 마상시합이 있다지? 네 참가는 금지다. 괜히 사고라도 생길까 염려되니, 아내와 구경만 하려무나.”
에르난은 생각했다. 투구를 쓰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몰래 참가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면서도 필사적인 부왕의 얼굴이 자꾸 신경 쓰였다.
정말로 그에게 삶의 끝이 다가오는 것일까.
“……예.”
어쩔 수 없다. 에르난은 경기 참석을 포기했다.
물론 아내와의 경기 관람도 나쁘지는 않았다.
“바르시나의 마상 시합장은 신기하네요.”
에르난의 왼편에 앉은 레이테가 경기장을 길게 가른 울타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가운데에 벽만 추가해도 말끼리 부딪칠 확률이 낮아져 상당히 안전한 경기가 됩니다. 대륙에서 들여온 방식이지요.”
레이테의 고고하고 우아한 외모는 차갑고 무심한 인상을 풍기는 면이 없잖아 있다.
하지만 아내는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경계뿐만이 아니라, 호기심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아내는 바르시나의 온갖 것에 호기심을 보였다.
에르난의 오른편에 앉은 블랑슈 왕비는 이런 면에서 레이테와 많이 다른 여자였다. 그녀는 인상만이 아니라 정말로 만사에 무심한 사람이므로.
“에르난.”
그런데 왕비가 에르난을 불렀다.
공식 석상이 아니면 대화 자체가 거의 없던 모자간이었다. 대륙 본토 출신의 계모는 의붓아들과의 나이 차이가 겨우 열 살이었다. 그러니 어머니로 대하기도 민망하다.
“예, 말씀하십시오.”
“이틀 뒤 저녁에, 예술을 아끼고 후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어요. 여왕과 함께 모임에 와 주실래요?”
에르난은 놀란 기색을 너무 내비치지 않으려 애썼다.
예술가와의 교류는 왕비가 즐기는 하나뿐인 유희거리였다. 왕은 새 아내의 취미 생활에 관심이 없었고, 에르난도 마찬가지였다.
“꼭 가겠습니다. 초대 감사합니다, 폐하.”
그런데 왜 지금 와서 부를까? 에르난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오랜만에 본 마상시합은 재미있었다. 하지만 역시 관람만 하니 아쉬움이 컸다.
최종 승리자는 프란세스크였다. 에르난도 예상하던 바였다. 그는 이런 일에서 지는 법이 없었다.
프란세스크는 말을 탄 채로 경기장을 한 바퀴 빙 돌며 관객들의 환호성을 받았다. 승리의 기쁨을 한껏 누린 그는 이윽고 에르난 부부의 앞에 멈춰 섰다.
“폐하, 오늘의 명예를 당신의 부인께 바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하지. 레이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요.”
하지만 에르난의 머릿속 사정은 조금 달랐다.
‘역시 내가 참여했어야 했나. 세스크는 남의 아내한테 무슨 수작이야?’
이런 부류의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레이테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간까지 다가간 그녀가 팔을 가볍게 내밀었다.
프란세스크는 여왕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췄다.
“골칫덩어리 동생을 맡아주신 데에 감사드리며, 여왕 폐하께 오늘의 영광과 저의 충심을 바칩니다.”
“저야말로 카테리나 양을 소개해 주어 고마워요. 그리고 공작의 용맹함, 무척 인상적이었답니다.”
여왕이 부드럽게 웃었다.
‘연출로서는 최고점이군.’
바르시나 귀족이 사크틸라 여왕에게 공경을 표한다. 이는 바르시나가 여왕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중요한 상징이 될 것이다.
프란세스크는 그런 의도로 레이테에게 경의를 표했다. 물론 동생 운운도 진심 같지만.
그러나 에르난은 역시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어쨌거나 지금 아내는 남편이 아닌 남자에게 웃어 주니까.
여왕은 남편의 옆자리로 돌아왔다. 프란세스크는 말을 돌렸다.
에르난은 아내의 손을 잡아들어 입을 맞췄다. 레이테는 자신의 손등에 키스하는 남편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곧 그녀의 얼굴은 어쩔 줄을 모르며 붉게 달아올랐다.
“저기, 에르난……, 이제 손 좀 놓아 주면 안 될까요?”
잠깐 입만 맞추고 끝났어야 할 행위가 어째서인지 한참 계속되었다.
관객석의 사람들은 물론, 말에서 내리려던 프란세스크마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친구의 반응을 확인한 에르난은 오히려 그녀를 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놓, 놓으……, 놓으라고요…….”
아내가 당황하자 에르난은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손은 여전히 꼭 잡은 채였다.
“오늘은 비록 이렇게 끝내지만, 여유가 생기는 대로 제가 직접 토너먼트의 승자가 되어 그 영광을 당신께 바치지요.”
에르난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레이테는 손을 뒤로 빼려 했다. 하지만 에르난은 여전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요, 아…… 알았으니까.”
그녀는 말을 더듬거리다가, 다른 팔로 남편을 자신에게 확 끌어당겨 안았다. 어머머 하는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에르난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아내의 과격한 스킨십도 놀랍지만,
“손 놓으라는 말 안 들어요? ‘강요는 인정할 수 없다’고 했던 것 기억 못 해요?”
그의 귀에 달라붙은 아내의 살벌한 속삭임 때문이었다.
지독하게 차가우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에르난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내가 그를 안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답변을 재촉하는 신호에 에르난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대하겠어요. 꼭 제게 승리를 주세요.”
레이테는 언제 협박했냐는 듯이, 남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달콤하고 촉촉한 입술이 에르난을 가볍게 스쳤다.
‘사람을 이렇게 놀라게 하고 고작 이 정도로 끝내겠다?’
에르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는 남편에게서 몸을 떼어 내려던 아내를 붙잡고 깊게 입술을 포갰다.?
#036
보고서 검토를 마친 에르난은 잠시 눈을 감았다. 어제의 일을 떠올리니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상시합에 참가하지 못해 분했던 마음이 싹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유치하게 그게 뭡니까?”
무언가를 탁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에르난을 깨웠다. 눈을 뜨니 프란세스크가 그의 앞에 와 있었다.
“유치하다니, 무엇이?”
“어제 일 말입니다.”
“마침 그 일을 생각 중이었는데, 어떻게 딱 알고 오는군.”
어깨를 으쓱인 에르난은 비서에게 눈짓했다. 나가 달라는 의미다.
비서가 나가고, 집무실에는 에르난과 프란세스크 두 사람만 남았다.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프란세스크가 투덜거렸다.
“엄청나게 속 좁아 보였습니다.”
“괜찮아, 자네 혼자만 그렇게 생각할 거야. 다들 어머, 우와, 난리였잖은가.”
“기껏 생각해서 챙겨 드렸건만, ‘감히 내 아내를 탐하다니!’ 뭐 이런 반응이나 보이고. 돕는 보람이 없어요.”
“자네는 역시 눈치가 좋다니까. 알았으면 남의 아내 넘보지 말게.”
에르난의 목소리는 꽤 진지했다. 프란세스크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적 없습니다만?”
“귀부인을 사모하는 기사야말로 연애시의 기본 구도 아닌가?”
“아직도 그런 책 읽으십니까? 그만두고 이거나 보십시오.”
책상 위에는 새로운 서류 뭉치가 쏟아져 있었다. 에르난이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명하셨던 무기상의 거래 내역을 일단 쭉 살펴봤습니다만, 별 문제 없어 보입니다. 무기가 헤젤까지 가는 데에 바르시나 상인이 개입했을 확률은 낮아 보입니다. 급하게 며칠 뒤진 것만으로는 확신하기 이르지만.”
프란세스크의 말대로 눈길을 사로잡는 내용은 없었다. 에르난은 한숨을 쉬며 서류를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수고 많았네. 기껏 축제 기간에 돌아왔는데 제대로 즐기지도 못해서 불만이 많지?”
“어제 마상시합 참가했잖습니까. 그만하면 됐지요. 더군다나 좋은 구경도 했으니.”
“또 그 이야기인가? 그게 그렇게 재밌던가?”
“물론이지요. 전에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는 여왕과 가까운 남성에게 질투를 느낀다고.”
에르난의 머릿속에 과거의 일이 기억 날 듯 말 듯 아른아른했다.
“기억 못 하십니까? 하긴, 그때 과음하셨죠.”
“아니, 잠깐만. 생각났어. 시스로네스가 성직자가 아니었으면 그를 여왕의 애인이라고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뭐 이런 말 아니었나? 너무 끔찍한 이야기라 그냥 잊어버렸지.”
“제 생각이 맞나 봅니다. 폐하께서 얼마나 부인에 대한 마음이 지극하신지, 지켜보는 사람의 몸에 소름이 으스스…….”
“……글쎄.”
키득키득 웃으며 왕자를 놀리던 프란세스크는, 에르난의 심드렁한 반응에 얼굴을 굳혔다.
에르난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한숨을 쉬었다. 초점이 흐릿해진 눈에 그늘이 졌다.
“나도 레이테도 딱히 해소한 감정이 없어.”
프란세스크는 에르난이 무엇을 말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여왕의 동의 없이 에르난이 반역자를 죽인 일이다.
여왕은 그 일을 자신을 향한 남편의 위협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이후 남편을 대하는 여왕의 냉정한 태도를 보면 틀림없다.
“요즘 두 분 사이가 꽤 좋은 줄 알았는데, 그냥 겉보기에만 그랬습니까?”
“굳이 말하자면 최근에는 그럭저럭 좋아지기야 했지. 다만 그건, 뭉쳐야 살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랄까……. 내가 이럴 정도인데, 나보다 예민한 레이테는 오죽할까.”
에르난은 담담히 말하려 애썼다.
반역자는 에르난과 자신이 다를 바 없다는 저주 같은 말을 남기고 죽었다. 에르난은 여전히 그 저주에 반박할 수 없었다.
다만, 사크틸라를 떠났더니 환경도 상황도 달라졌다. 그래서 반역자의 그림자와 마주칠 일이 없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바르시나에 오기 잘했을지도.’
피곤한 일투성이지만, 더 그럴듯해진 부부 사이만큼은 기뻐할 만하다.
“뭐……, 편하신 대로 생각하십시오.”
프란세스크는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에르난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 *
밤에 다시 만난 부부는 난롯가에 나란히 앉았다.
레이테는 축제장에 가지 못한 남편을 위해 자신이 보았던 풍경을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바르시나에 대륙의 문물이 빨리, 많이 들어오는 현상은 좋아요. 하지만 좀 가려서 들였어야지, 그렇게 민망한 옷은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기괴한 옷차림 이야기에 이르자 레이테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에르난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아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것 같다.
“바르시나의 자유로운 풍조는 존중해요. 하지만 지나친 풍기문란을 방관하면……, 왜 자꾸 웃죠? 제 말이 가소롭나요?”
“옷 가지고 뭐라 하지 맙시다. 더한 유행도 들어올 모양이던데.”
“네? 더하다니 무슨……, 아니, 잠깐만요. 얘기하지 마세요. 별로 듣고 싶지 않네요. 들으면 기분 나쁠 것 같아요.”
레이테는 허둥지둥 손을 뻗어 남편의 입을 틀어막았다. 에르난이 짓궂은 웃음과 함께 무언가를 말하려던 참이었다.
입이 막힌 에르난은 대신 혀를 살짝 내밀어 아내의 손을 핥았다.
흠칫 놀란 레이테가 남편의 입을 가볍게 찰싹 때렸다. 에르난의 손이 재빨리 그것을 붙잡았다.
“어디서 감히 함부로.”
레이테는 제법 엄격하게 말하며 남편을 쏘아보았으나, 딱히 눈빛이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우리 부부뿐인데 여기서 안 됩니까?”
“절대로 안 되니까…….”
레이테는 남편의 손을 탁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슨하게 걸쳤던 가운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황급히 옷을 고쳐 입었다.
“……침실로 가요.”
어차피 벗을 텐데 옷은 왜 도로 입나. 에르난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싱글싱글했다.
“아 참, 대축일 미사는 새벽 네 시 반부터입니다. 아십니까?”
“네, 들었어요.”
“지금 자면 아예 못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요?”
레이테가 눈을 흘겼다. 남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붙들었다.
“차라리 밤을 새웁시다.”
* * *
성녀가 강림했다는 기둥은 명성에 비해 소박하게 생겼다. 하지만 기둥 옆에 세워진 성녀상과 주변 장식은 호화로웠다.
성당 안은 사람으로 꽉 찼다. 아직 해가 뜨기에 한참 일렀기에, 제단 쪽을 제외하고는 어둑어둑했다.
따라서 레이테는 자신에게 몸을 밀착한 남편이 과연 멀쩡하게 미사에 참여하는지, 아니면 자는 중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머리에 하얀 베일을 썼기에 더욱 에르난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무반주 합창이 경건했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찬미가는 순수하고 성스러웠다.
하지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지친 육체는 경건함에 지지 않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댔다.
‘눈…… 감으면 안 되는데…….’
사실 레이테도 졸음에 시달리고 있었다.
몸단장을 위해 시녀들이 침실 문을 두들길 때까지, 레이테는 옆에 앉은 남자와 경건하지도 성스럽지도 않은 행위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미사가 끝나자 전통에 따라 기도문을 외며 성당을 도는 행진이 이어졌다.
‘너무 무리했나…….’
반쯤 졸다가 깬 레이테는 뻐근한 허리가 괴로웠다. 에르난은 아예 아내의 팔을 붙잡고 걸어야만 했다.
“졸리죠? 흥, 역시나.”
레이테가 속삭였다.
“그래요……. 자고 싶어 미칠 지경입니다.”
남편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하긴, 그의 피로는 밤샘만이 전부가 아니다.
섭정 준비에 바쁜 그는 매일 무리하고 있다. 그런데 아내는 축제나 구경 다녔으니, 레이테는 어쩐지 남편에게 미안해졌다.
그때, 에르난이 아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당신과 같이 자고 싶어요. 밤이 짧아 덜 한 것을 마저……, 윽!”
에르난은 말을 다 마칠 수 없었다. 레이테가 남편의 발을 꾹 밟은 탓이다.
“이러면 정신이 들지요? 자지 않아도 되겠네요.”
* * *
결국 잠을 잔 쪽은 레이테였다. 다만 남편과 함께는 아니었다.
축제에서 가장 유명한 행사는 대축일 정오의 꽃 봉헌이었다. 왕족과 귀족, 시민들이 꽃을 준비해 성녀에게 봉헌하는 탑을 쌓는다고 했다.
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레이테는 다시 단장을 받았다.
치장을 위해 가만히 앉아 있으니 도저히 졸음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양해를 구하고 잠시 눈을 붙였다.
꿀 같은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카테리나가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레이테는 비몽사몽 상태에서 남은 화장을 하고, 머리를 다듬고, 옷을 입었다.
어떻게 움직였는지도 모르는 사이, 정신을 차리니 그녀는 대성당 앞 광장에 있었다. 심지어 남편이 그녀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순순히 사과하는 남편의 모양새로 보아, 아무래도 레이테의 상태가 눈에 띄게 엉망인 모양이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지만 금방 눈앞이 흐릿해졌다. 도로 의식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어느새 커다란 꽃바구니를 한 아름 안고 있었다.
바구니는 주로 빨갛고 하얀 색조의 꽃으로 가득 찼다. 장미, 국화, 수국, 코스모스 등. 레이테가 처음 보는 꽃도 있었다. 아마도 대륙 수입 꽃일 것이다.
에르난도 비슷한 바구니를 들었다.
“꽃도 꽤 잘 어울리시네요. 미남은 다르네.”
레이테가 농담을 건넸다. 에르난은 그녀의 말에 웃음으로 답했다. 그의 얼굴이 묘하게 붉게 물든 것 같아 보였다.
봉헌 행렬의 선두는 에르난과 레이테가 맡았다. 국왕 부부는 아예 참석하지 않았다. 아들 부부를 밀어주기 위한 의도적인 불참이다.
연한 장밋빛 드레스를 입은 레이테는 전신을 거의 다 덮는 긴 베일을 썼다. 화려하기보다는 우아함을 극대화한 차림새다. 사크틸라 풍에 가까워 종교행사에 잘 어울렸다.
에르난은 아내의 옷보다 살짝 진한 색조의 외투를 입었다. 행사의 종교성에 별 신경 쓰지 않은, 과감하고 화사한 분위기였다.
꽃을 봉헌하러 가는 길의 양옆은 빨간 꽃과 노란 꽃을 번갈아 길게 심어 바르시나의 문장을 만들어 놓았다.
부부의 꽃은 탑 꼭대기, 성녀상의 바로 발밑을 장식했다.
성녀상은 바르시나답지 않게 꽤 소박한 생김새였다. 꽃을 두자 비로소 화사하게 빛나 보기 좋았다. 레이테는 짧게 기도를 올렸다.
“두 분 폐하께서는 이쪽에 앉으십시오.”
행사를 진행하는 관리가 부부를 관람석으로 안내했다. 레이테가 그를 따라가려는데, 에르난이 갑자기 아내를 붙잡았다.
남편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린 레이테는 발꿈치를 살짝 들었다. 레이테는 남편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의 품에 반쯤 몸을 기댔다.
에르난의 손이 레이테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다른 손은 치렁치렁한 베일 사이를 파고들어 아내의 뒤통수를 잡았다.
행사장을 꽉 채운 군중 앞에서 부부는 거침없이 키스를 나눴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지만, 부부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깊게 얽은 입술은 단순히 보여 주기 위한 것치고는 진하고 뜨거웠다. 상대방을 붙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두 사람은 숨을 참기 힘들어질 때까지 입을 맞췄다.
“꽃의 탑이 다 완성된 후에 나와서 할걸. 너무 빨랐나요?”
“또 하면 되죠.”
부부는 가볍게 대화하며 귀빈용 관람석으로 이동했다.
레이테는 직접 꽃을 바칠 때보다 다른 이들의 행렬을 구경하는 쪽이 더 재미있었다. 꽃의 기세에 억눌리지 않으려는 확고한 의지로 가득한 현란한 옷차림이 볼만했다.
귀족이 꽃을 바칠 때마다, 에르난은 아내에게 그 사람을 설명했다.
“코른 후작. 바르시나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인 아라고의 대표 중 한 명입니다. 아주 완고한 대륙주의자지요.”
“대륙주의자?”
“바르시나를 대륙 본토 소속의 국가처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가 밟은 땅은 틀림없이 이베로 반도인데도.”
훗. 냉소적인 웃음이 뒤따랐다. 레이테가 진지하게 물었다.
“반도 밖에서 소속감을 느끼는 이유가 뭔가요? 교류가 활발해서?”
“그 이유도 맞고, 반도 내에서 바르시나가 별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반도는 당신의 사크틸라와 헤젤이 경쟁하는 무대니까요.”
에르난이 자조적으로 답하자 레이테가 그의 손을 꽉 쥐었다.
“틀렸어요. 내 사크틸라가 아니죠. 우리의 사크틸라예요. 바르시나가 우리의 것이 될 예정이듯이.”
레이테의 보랏빛 눈이 단호하게 빛났다. 에르난은 아내의 손을 꽉 마주 잡았다.?
#037
축제의 정점이었던 성녀 대축일의 다음 날 저녁, 부부는 꽤 긴장한 상태였다.
왕비가 초대하는 예술 애호가 모임.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레이테는 어리둥절했다. 남편과 그의 계모는 서로에게 무관심해 보였기에.
영문을 모르기로는 에르난도 마찬가지였다. 왕비의 의도를 전혀 파악할 수 없다.
모임 장소는 부유하기로 유명한 어느 귀족의 저택이었다.
“어서 와요, 여왕. 그리고 에르난도.”
폭이 넓은 소매가 바닥까지 끌리는 드레스를 입은 블랑슈 왕비가 부부를 맞이했다.
에르난은 주변을 둘러보며 참석자를 파악하는 눈치였다. 물론 레이테는 아는 얼굴이 없었다.
아니, 눈에 익은 남자가 하나 있기는 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속삭였다.
“저쪽, 사크틸라에 왔던 전령 아닌가요?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세르지 피로시. 코른 후작의 조카입니다.”
“아…….”
세르지는 왕실의 전령이 입는 정복 대신, 파란색과 하얀색의 배합이 꽤 요란한 옷을 입었다. 레이테가 축제장에서 보았던 기괴한 차림새에 가까웠다.
여왕과 세르지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다가와 인사하기는커녕 대충 묵례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레이테는 머쓱해졌다. 세르지의 태도를 본 에르난은 눈살을 찌푸렸다.
왕비는 아들 내외를 참석자들과 인사시켜 주었다. 참석자 중 귀족의 비율은 레이테의 생각보다 낮았다.
대신 축제를 즐기러 지방에서 올라온 도시의 부유한 시민이 많았다. 무척 세련된 옷을 입은 그들은 예술에 대한 안목도 높아 보였다.
참석자들은 왕비가 의붓아들과 외국 여왕인 며느리를 초대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면서도 수시로 부부를 훔쳐보았다.
레이테는 그 눈길이 거슬렸지만 전혀 모른 체했다.
에르난이 어느 그림 앞에 멈추더니 눈을 떼지 못하고 그것을 보았다. 레이테는 남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가 화들짝 놀랐다.
여왕의 반응을 보았는지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나왔다. 레이테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모르며 남편에게 속삭였다.
“무슨 이런 그림을 봐요!”
그림 중앙에 여자가 서 있었다. 손과 머리카락으로 살짝 가린 부분을 빼고는 완전히 알몸이었다.
여자의 오른쪽에는 화사한 옷을 입은 다른 여자가 천을 들고 섰으며, 왼쪽에는 남자가 공중에 떠 공기를 내뿜었다.
“옛 이교도 신화에 나오는 미의 여신이라는데, 어떻습니까?”
화사한 색감이 묘하게 이국적인 느낌을 풍겨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민망한데도 자꾸 눈길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아내가 아닌 여자의 맨몸을 감상하니 어때요? 마음에 드는 모양이죠?”
“그냥 그림이잖습니까. 당신이 훨씬 나아요.”
흥. 레이테는 가볍게 입을 삐죽였다.
남편의 말대로 고작 그림일 뿐이므로 질투가 나지는 않았다.
다만 그림 속 인물은 살아 숨 쉬는 진짜 인간 같았다. 레이테가 여태까지 보았던 어떤 그림보다도.
레이테는 자신에게 달라붙는 시선을 느꼈다. 아마도 비웃음일 것이다.
‘어차피 저들에게 사크틸라인이란 무식하고 촌스럽고 교양도 없는 야만인이겠지. 말 타고 창칼만 휘두른다고 생각할 거야.’
물론 말 타고 창칼을 휘두르는 일은 레이테도 하지 않지만.
레이테는 그림을 비롯한 예술에 대한 소양이 썩 깊은 편은 아니었다. 여왕 개인도, 사크틸라라는 나라 자체도 예술을 느긋하게 향유할 환경이 아니었다.
반면에 에르난은 미의 여신 외에 다른 그림에도 상당한 호기심을 보였다. 남편은 그림에 관심도 많고, 식견도 얕지 않은 듯했다.
모임 참석을 아내보다 더 내키지 않아 했던 에르난은 어느새 적극적으로 그림을 보면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레이테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륙주의라…….’
그녀는 문득 에르난이 코른 후작을 설명할 때 말했던 표현이 떠올랐다.
이곳의 그림 대다수는 대륙 화가의 작품 같았다.
바르시나는 바다에 접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대륙 본토와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화려한 문화는 무역에서 획득한 부의 산물이다.
‘분명히 이웃 나라인데,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아.’
사크틸라에서는 성인의 축일을 대단히 엄숙하고 경건하게 보낸다. 하지만 바르시나는 성녀를 기념한답시고 열린 축제 주제에 새벽 미사를 제외하고는 향락적이기 짝이 없다.
내정 간섭 같은 정치 문제까지 갈 필요도 없다. 정서 자체가 레이테와 사크틸라를 거부할 수밖에 없어 보였다.
“부인, 당신이 좋아할 만한 그림도 있군요.”
에르난의 목소리에 레이테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남편이 바라보는 그림에는 레이테의 눈에도 익숙한 대상이 그려져 있었다.
“미겔 대천사네요……!”
레이테는 감탄했다. 천사를 그린 그림은 흔하지만, 이 그림은 무언가 달랐다.
“으음, 뭔가 굉장히 마음에 드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천사께서 내 앞에 정말로 나타난 느낌? 신기해라.”
에르난은 그림의 근처에 선 남자를 가리켰다.
“이 화가의 작품입니다.”
“영광입니다, 여왕 폐하.”
화가가 허리를 깊게 굽혀 인사했다.
“이렇게 생생한 천사는 처음 봐요. 좋은 그림 잘 보았어요.”
“여왕 폐하, 마사초와 이야기 중이셨군요.”
블랑슈 왕비가 다가왔다. 그녀의 조용한 목소리는 조금 신이 난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마사초는 유능한 화가지요. 아, 마사초, 여왕 폐하의 초상화를 하나 그려 드리지 않겠는가?”
“물론입니다.”
순식간에 초상화 제작까지 결정되었다. 레이테는 조금 얼떨떨했지만, 곧바로 왕비에게 감사를 표했다.
“신경 써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폐하.”
“먼 길을 오셨으니 기념품 하나쯤은 있는 편이 좋겠지요.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왕비는 다시 원래 대화를 나누던 무리로 돌아갔다.
옛 제국의 연극을 재연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의논하는 것 같았다. 레이테에게는 그림보다 더 미지의 영역이다.
왕비가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기까지, 대화를 듣기만 하던 에르난이 불쑥 말했다.
“부인, 조금 걸을까요?”
아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에르난은 그녀를 밖으로 이끌었다.
* * *
정원으로 나온 부부는 한동안 말없이 주변을 거닐었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류트 가락이 나른했다. 곡 하나가 끝나자 에르난이 입을 열었다.
“왕비께서 당신이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예술은 좋아하시지만, 기본적으로 타인과 교류하는 분이 아니어서. 왕비의 그런 호의는 처음 봅니다.”
레이테가 생각하기에는 유별난 호의라 부를 수준은 아니었다. 외국의 귀빈에게 적당하게 베푸는 정성일 뿐이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에르난에게는 무척 낯선 모양이다.
“당신은 어머니와 별로 친하지 않나 봐요?”
“어머니라는 실감은 아무래도 안 납니다.”
레이테야 물론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를 생각해 볼 일이 없었다. 그녀를 낳자마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존재했으나 전혀 모르는 존재.
레이테에게 부모는 그런 사람이었다.
갑자기 레이테는 아버지에 대해 브라간사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깊은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떠올릴수록 불편한 기억이다.
“노는 것만으로도 꽤 지치네요.”
그녀는 아예 화제를 돌려 버렸다.
“후우, 맞습니다.”
에르난은 작게 한숨을 쉬며 아내에게 몸을 살짝 기댔다.
레이테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에르난.”
“무엇이?”
“저는 솔직히 그림을 몰라요. 인정하기 싫지만, 바르시나 사람이 생각하는 무식한 사크틸라인의 전형이죠. 그래서 이런 모임에 제대로 어울릴 수가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도와주었지요.”
그림은 잘 몰라도 종교라면 이야기할 수 있다. 덕택에 어색함을 면했다.
그녀는 남편의 배려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무식이 언제부터 예술 취향에 한정하는 말이었습니까? 당신은 내가 본 어느 여자보다 유식한 사람입니다. 너무 영리해서, 남편을 장식품으로 세워 놓고도 국사를 잘만 진행하는 엄청난 여자 아닙니까.”
“……이보세요.”
레이테는 입을 삐죽였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숨도 못 쉴 것처럼 아내의 눈치만 보던 에르난이, 이제는 장난처럼 말을 건네기까지 한다. 마치 그의 친구와 대화하듯이.
“말 나온 김에 이야기 드리지요. 당신, 그리고 시스로네스 같은 자의 염려가 무엇인지 잘 압니다. 복잡하게 말하자면 끝도 없겠으나……, 요약하자면 외국인의 국정 간섭이지요. 바르시나도 같은 걱정을 합니다.”
에르난은 여전히 아내에게 몸을 기울인 채였다. 평온한 어조지만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래서 당신의 행동을 이해하려 노력했습니다만, 솔직히 자존심은…… 상합니다. 우리는 공동 군주 아니었습니까? 당신이 내게 경전처럼 읊던 계약서의 내용이지요.”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레이테가 마른침을 삼키듯이.
아내의 반응이 없자, 에르난은 그녀에게 기댄 몸을 일으켜 반듯하게 섰다. 남편의 단호한 표정이 레이테의 시야를 잠식했다.
“그 계약, 이제는 제대로 지켜 봅시다. 일단 바르시나에 왔으니, 제가 먼저 증명해 드리지요.”
레이테는 느꼈다. 오늘 달빛이 참 환하구나. 그래서 한밤중인데도 남편이 잘 보이는 모양이다.
불안하게 흐릿하지 않은, 선명하고 또렷한 반려의 모습.
“……어떻게?”
레이테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떨었다. 공포 때문은 아니었다. 기대에 가까운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을 벅차오르게 했다.
에르난은 레이테의 손을 잡았다.
“내일 대표위원회의에 당신도 동행합시다.”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당연히 그러겠지만, 처음부터 입장을 확실히 밝혀야 합니다. 더군다나 공식 석상에 군주의 배우자가 동행하는 일이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했다. 레이테도 늘 남편과 동행했다.
남편은 여왕의 옆을 지켜야만 했다. 그래야 레이테라는 불완전한 군주가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당신은 나와 함께 바르시나의 왕이 될 존재입니다. 소외당하게 두지 않을 겁니다.”
동등한 공동왕 따위는 억지다.
이 억지라도 부리지 않으면 레이테는 모든 것을 남편에게 빼앗기고 만다. 따라서 그녀는 어떻게든 남편을 억눌러야만 했다.
남편은 레이테만큼 절박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동등함을 무시해야 그에게 유리할 것이다.
에르난 역시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잘 알 텐데도,
“그러니까 당신도 나를 피하지 말아 줘요.”
왜 이런 식으로 말할까?
레이테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는 남편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우, 우리, 요즘은 잘 지내지 않나요? 아무튼 고마워요. 앞으로도 많이 도와주세요.”
부끄러움 때문이다.
점점 빨라지는 말도, 빠르게 뛰는 심장도 모두 부끄러워서다.
* * *
모임이 열리는 사교장으로 부부가 돌아오자, 이상한 시선이 그들에게 꽂혔다. 아니, 정확히는 레이테를 향했다.
에르난은 속이 쓰렸다. 물론 저들이 레이테에게 적대적이라는 정도는 안다. 하지만 이른바 교양인이 모인 자리에서 저렇게 노골적인 눈빛이라니.
따끔하게 혼이라도 내고픈 심정이었지만, 역효과일 것이 뻔했다.
‘그만 돌아가야겠군.’
어차피 에르난은 이곳에 오래 있을 생각이 없었다.
내일은 그가 섭정으로서 일을 시작하는 날이다. 따라서 무리하지 말고 쉬어야 했다. 그는 아내를 돌아보았다.
“레이테, 일찌감치 돌아갑…….”
에르난은 말을 다 마칠 수 없었다.
“그……, 네, 네에. 그러지요. 돌아가자는 말씀이시지요? 피곤, 정말 피곤하네요. 쉬고 싶네요. 네, 쉬어야…….”
레이테는 정신없이 말을 더듬었다. 더군다나 얼굴 전체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에르난은 사람들의 오묘한 시선을 이해했다.
단둘이서 정원에 나갔다가 돌아왔는데 여자가 부끄러워한다.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상황은……, 하나뿐이었다.
레이테는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 남편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휘이 하고 휘파람 비슷한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렸다.?
#038
왕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레이테는 끈질기게 에르난의 시선을 피했다.
‘괜한 말을 했나?’
작은 배려에 고마워하는 아내가 귀여웠다. 그래서 마음이 들떴고, 그동안 아내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까지 해 버렸다.
‘그러니까 당신도 나를 피하지 말아 줘요.’
부부 사이의 벽은 은근슬쩍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냥 뒀더라면 자연스레 사라졌을까?
어쨌거나 모임의 참석자들이 오해하는 상황은 없었다.
하지만 아내는 왜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였을까? 가령…….
“반했다거나.”
“네?”
이런, 에르난은 황급히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레이테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마차의 문을 열려 했다.
“잠깐, 레이테! 움직이는 마차에서 내리면 다쳐요!”
“아, 그러네요.”
에르난이 아내의 팔을 붙잡았다. 레이테는 다시 화들짝 놀라다가 엉거주춤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 그건 그렇고, 모임에 대륙주의자가 꽤 많이 보였는데…….”
이제는 에르난도 아내를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우리가 그들 앞에 당당한 모습을 보여야……. 어……, 좋겠지요……?”
에르난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시죠.’라고 다그치는 아내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만 울렸다.
* * *
처소에 돌아온 부부는 얼굴만 멀쩡했다.
레이테는 커다란 거울을 놔두고 난롯가에 앉아 머리를 빗었다. 이미 시녀들이 한참 빗겨 준 머리카락이었다.
괜히 창밖만 바라보던 에르난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아내의 뒤로 다가갔다.
그의 손이 아내가 든 빗을 쥐었다. 자연스럽게 빗을 뺏은 그는 아내의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에르난은 레이테의 투명하고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이 좋았다.
이미 그는 수도 없이 이 머리카락을 만지고, 휘감고, 헝클어뜨렸다. 하지만 빗어 보기는 처음이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엉킴 하나 없이 스르륵 빗살을 통과했다.
“……하아.”
에르난이 감탄하자 레이테가 어깨를 흠칫했다. 에르난의 손도 함께 놀라 움찔거렸다. 빗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이런.”
빗을 떨어뜨린 사람은 에르난인데, 레이테가 허둥지둥하며 몸을 굽혔다.
막 빗을 집어 들던 그녀의 손은 에르난에게 붙잡혔다.
“당신을 안고 싶어요.”
뭐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에르난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왜요?”
침묵 끝에 레이테가 물었다. 에르난은 레이테가 쥔 빗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방해물이 없어진 그녀의 손을 들어 올린 에르난은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어 가볍게 키스한 후 말했다.
“그야 당신이…….”
에르난은 말문이 막혔다. 당신이 뭐지?
답을 찾고자 그는 정원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빠르게 복기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차분한 생각 자체가 무리다.
에르난은 몸을 기울여 레이테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아무튼 안고 싶습니다.”
한심하지만 가장 솔직한 답이었다.
“이보세요……, 그게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나요.”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레이테의 몸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우리는 부부입니다. 다른 이유는 필요 없어요.”
에르난은 아무렇게나 말했다. 다른 이유가 필요 없다는 말이 중요했다.
아무튼 그는, 당장 아내를 안고 싶었다.
에르난은 아내의 얼굴을 천천히 자신 쪽으로 돌려 입을 맞췄다.
짧은 망설임 후, 아내의 입술은 그에게 부드럽게 감겼다. 평소보다 더 부드럽고 촉촉했다. 순식간에 혀가 진득하게 얽혔다.
레이테가 에르난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에르난의 손은 얇은 슈미즈에 덮인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쥐었다.
“흐응…….”
살짝 벌어진 레이테의 입술에서 뜨거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을 먹어 버리듯 에르난은 그녀의 입술을 거세게 덮쳤다. 과격한 움직임이지만 빠르지는 않았다.
입술의 틈 사이로 타액이 뚝 흘러 떨어졌다.
놀란 레이테가 입술을 떨어뜨렸다. 에르난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왜요, 좋은데. 더 먹으면 안 됩니까?”
“……그, 그래요.”
새빨개진 레이테의 얼굴이 도로 에르난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다시 겹친 입술 사이로 적나라하게 타액이 흘러나왔다.
에르난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아내의 슈미즈를 밑에서 들어 올리며 안으로 손을 넣었다.
깊은 곳으로 향하면서, 그의 손은 아내의 매끈한 다리를 한껏 느꼈다.
“괜찮지요? 허락해 주십시오.”
“안 하겠다면요?”
“거절할 리 없을 것 같아서 묻는 건데.”
“……일찍 자야 해요. 짝수는 용납하지 않겠어요.”
에르난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것을 따지지 않은 지는 제법 오래되었다.
반역자의 죽음 이후, 두 사람의 밤은 오로지 절정을 터뜨리기에만 바빴다. 횟수며 위아래를 따질 여유는 없었다.
“딱 한 번이라…….”
아내의 허벅지를 쓸던 손이 그녀의 허리 뒤, 의자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레이테가 몸을 움찔거렸다.
에르난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으로 그녀의 양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섰다.
슈미즈를 완전히 걷어 올린 그의 손이 레이테의 속옷에 닿았다. 레이테가 몸을 굳혔다.
“왜 놀랍니까.”
“이, 이런 적은 없었으니까.”
“하긴, 늘 벗고 준비한 채였으니.”
에르난의 손가락이 레이테의 속옷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은밀한 곳 주변을 맴도는 손가락이 간지러운 레이테가 허리를 비틀었다.
처음에는 의자에 똑바로 앉았던 그녀의 몸이 점점 앞으로 미끄러졌다. 넓지 않은 의자에서 떨어질 지경이 되자, 레이테는 몸을 일으켜 다시 제대로 앉으려 했다. 에르난은 그녀를 붙잡아 아예 바닥에 앉혀 버렸다.
걸리적거리는 의자를 멀리 툭 쳐 버린 그는 자신의 도톰한 가운을 벗어 바닥에 펼치고 아내를 그 위에 눕혔다.
“잠깐만요, 여기서?”
“못 참겠어요.”
레이테의 허리 아래에 손을 받친 에르난은 그녀의 속옷을 끌어내렸다.
“제발 침실, 침실로 가요.”
“으음, 싫습니다. 조금도 기다릴 수 없어요. 당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에르난은 빳빳하게 선 것을 아내의 입구에 대고 문질렀다. 미끄러운 액이 흘러나오며 그를 졸라 댔다.
기둥은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깊은 곳까지 한 번에 꽂아 버려도 고통을 느끼지 못할 만큼 안은 매끄럽게 그를 압박했다.
“읏, 흐응…….”
“맛있어요? 얼마든지 빨아들여요.”
에르난은 당장 이성을 놓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정신을 조금 더 오래 붙잡아 아내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흐으응……, 여기 말고 침대…….”
“아직도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그냥 내가 물려 주는 것만 집어삼키세요. 후우……, 그래. 잘 드시는군요.”
“다, 당신이…… 흣, 제발, 가자……고, 흐응, 읏.”
“부인, 자극에 많이 약하십니다. 침대에서 벗어났을 뿐인데 이렇게 흥분한 겁니까?”
에르난은 기둥을 거의 끝까지 뺐다가 도로 쑤욱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매끈한 속살을 구석구석 맛볼 때마다 온몸에 짜릿한 기분이 돌았다.
“아앙, 아으읏……!”
비교적 느긋한 남편의 움직임에 따라 레이테의 몸도 천천히 흔들렸다.
살끼리 질척이는 농밀한 소리가 두 사람의 흥분을 더 부채질했다.
“말해 줘요. 왜 자꾸 울어요? 왜 그렇게 좋아합니까?”
“마, 말할 때는 움직이지…… 말고, 흑, 집중이…… 아아, 흐응!”
비교적 차분했던 에르난의 목소리는 점점 들떠 갔다. 레이테는 울먹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에르난의 손이 그녀의 촉촉한 눈가를 쓸었다.
위도 아래도 물기에 젖어 어쩔 줄을 모르는 아내는 대단히……,
……대단히 뭐지?
“내가 그걸, 흐읏, 어떻게 알아요……, 하읏, 그냥 좋아서…….”
“……아, 좋으시다. 저도 그렇습니다. 기쁘군요.”
맞다. 그녀의 반응이, 자신이 느끼는 쾌감이 좋았다.
띄엄띄엄 말을 잇던 에르난은 몸을 엎드려 아내의 몸을 완전히 덮었다. 움직이기는 조금 불편하지만, 온몸을 겹치는 기쁨은 불편함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진득한 입맞춤이 다시 이어졌다.
몸의 위아래에서 이뤄지는 끈적한 교접은 점점 두 사람의 이성을 앗아갔다. 일부러 과격하게 몸을 들썩일 필요조차 없었다.
한참 뒤에 입술이 떨어졌다. 에르난은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레이테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기쁘면 더……, 더 줘요. 더.”
에르난의 눈이 번뜩 뜨였다. 그는 레이테를 꼭 안았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다시 말해 봐요. 더 듣고 싶어요.”
“더……, 당신을 더 주세요.”
레이테의 간절한 애원과 반대로, 에르난의 움직임은 오히려 멈추었다.
침묵 속에서 에르난의 속삭임만이 레이테의 귀를 휘감았다.
“왜? 왜 저를 더 원하십니까?”
레이테는 어깨를 움츠리고 부르르 떨었다. 남편의 목소리마저 그녀를 자극했다.
그녀는 에르난을 감은 팔다리에 힘을 주어 그를 깊이 끌어당겼다.
“……좋아서.”
에르난은 가슴이 턱 막히는 듯했다. 어째서?
생각에 앞서 몸이 먼저 답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힌 것을 뚫어야, 아니 분출해야 했다.
아내를 꽉 붙잡은 에르난은 격렬하게 몸을 흔들었다.
“흐읏, 앗, 아흣…… 흐앗! 아, 아앗! 에르난!”
레이테는 갑자기 과격해진 기둥의 움직임에 맞추어 허리를 들썩였다.
“좋아요. 그러니까, 부딪……치는 게, 좋아. 좋아요.”
정신없는 중에 레이테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녀가 말할 때마다 에르난은 자신을 더 깊게 찔러 넣었다.
“으흣, 하아, 좋아…… 흣, 아흥, 흐응……!”
내뱉는 숨마저 갖고 싶다. 에르난은 아내에게 키스했다.
세심하게 입술과 혀를 녹일 여유는 없었다. 허리의 움직임만큼 탐욕스러운 얽힘만이 이어졌다.
레이테의 몸이 순간 굳더니 부르르 발끝을 떨었다. 으스러지도록 그녀를 끌어안은 에르난은 깊숙한 곳에 절정을 터뜨렸다.
* * *
에르난은 다시 아내의 머리카락을 즐겼다. 이번에는 빗 대신 손으로 직접 부드러움을 느꼈다.
실은 처음만큼 부드럽지는 않다. 에르난이 워낙 앞뒤 살피지 않고 끌어안으며 헝클어뜨렸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에는 이런 식으로 정사의 흔적이 남았다.
부부는 침대로 가지 않았다.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 버린 옷자락 위에서 여전히 몸을 얽었다.
레이테는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남편의 살덩이를 받아들인 곳은 여전히 촉촉했다.
에르난은 이따금 허리를 천천히 움직이며 그 안을 다시 느꼈다.
잠든 레이테는 쌔근쌔근 숨을 쉬었다. 에르난은 아내를 다시 탐하고픈 충동에 사로잡혔다.
“당신, 일어날 생각 없어요?”
에르난이 속삭였다. 아내는 반응이 없었다.
“얼마든지……, 나를 더 바칠 수 있는데. 바치게 해 줘요.”
그의 허리가 슬금슬금 들썩였다. 그의 욕망은 아내의 안에서 어쩔 줄을 모르며 딱딱해졌다.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던 손이 레이테의 어깨를 붙잡았다.
젠장.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그냥 가지면 된다. 몸을 부딪치고 흔들어 그녀의 욕망을 도로 깨우고, 정욕을 쏟아부어 정복하면 된다.
“으읏, 윽…….”
생각만으로도 이미 눈앞이 하얗게 날아가는 듯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후우…….”
터질 듯한 긴장 끝에, 에르난의 몸이 털썩 쓰러졌다.
갖고 싶다. 더 갖고 싶다.
에르난은 애써 마음을 눌러 담으며 아내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아직 부족했다. 아내를 더 정복하고 싶었다.
‘정복이라……. 처음에는 내 몸부터 바쳐서라도 이 여자를 정복할 생각밖에 없었지.’
아내는 그의 포로가 된다.
그는 아내의 정복자가 된다.
이러면 여왕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도 아내는 그에게 정복의 대상인가?
에르난은 슬금슬금 허리를 움직여 여태 레이테의 안에 있던 성기를 빼냈다.
기둥과 함께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액이 주르륵 흘러나와 옷을 적셨다.
그 모습을 눈으로 보았더라면 정복했다고 생각할까.
‘아니……, 틀렸어. 정복은 아니야.’
에르난은 일어나 아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레이테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준 에르난은 깊이 잠든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쓸었다.
보드랍고 촉촉한 감촉이 손끝에서부터 온 신경을 자극했다. 겨우 갈무리한 몸에 도로 열이 찰 것 같다.
에르난은 황급히 손을 떼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정복이 이제는 거북했다. 그런 표현으로 레이테를 정의해서는 안 된다.
에르난의 몸과 마음이 모두, 정복이라 말하기를 거부했다.
그렇다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눈이 스르르 감기는 중에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에르난은 더 생각하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 * *
최근의 어떤 밤보다 만족스러웠기에 에르난은 대단히 기분이 좋았다.
유별나게 흡족한 마음이 아니었더라면, 에르난은 분명히 회의실을 엎어 버렸을 것이다.
“에르난 왕자 ‘전하’, 어서 들어오시지요.”
얄미울 만큼 정중한 목소리가 에르난의 살의를 깨웠다. 칼자루를 쥔 손이 분노로 떨렸다. 반대로 아내와 맞잡은 손은 차마 떨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지금 뭐 하자는 짓이지?”
“전하께서 주최하시는 첫 대표위원회입니다만.”
코른이 태연하게 답했다.
에르난은 그를 쏘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분노에 타는 눈은 회의실 가장 안쪽의 단상에 고정되었다.
“오늘 이곳에서는 바르시나 연합 왕국의 국정을 논의합니다. 송구하오나, 사크틸라의 여왕 폐하께서 참석하실 자리는 아닌 줄 압니다.”
단상에는 군주와 그 배우자의 의자가 놓여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의자는 하나뿐이었다.?
#039
여왕이 앉을 자리 따위는 없다.
할 말을 잃은 레이테는 당황한 자신을 어떻게든 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창백해진 얼굴만큼이나 머릿속도 새하얘졌다.
‘이, 이 정도일 줄이야…….’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레이테도 자신이 정상적으로 회의에 참석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적극적으로 참여할 마음 자체가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자리만 지킬 각오였다. 가만히 듣기만 할 생각이었다. 남편이 사크틸라에서 그랬듯이.
남편은 그 상황에 불만이 많았다. 자존심이 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레이테는 스스로 그것을 택하려 했다. 무리하지 않고 일단 지켜보려 했다.
사크틸라의 여왕이 못마땅해 참을 수 없을 정도라면, 정말로 용납할 수 없다면, 차라리 회의를 연기하더라도 레이테의 참석 문제를 제대로 합의해야 했다.
그조차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불참으로 항의하는 편이 낫다. 불참 또한 부부에게 큰 모욕이 되겠지만, 이 정도로 사람을 수치스럽게 하는 방식보다는 점잖다.
물러날 준비를 해야겠다. 자우메 왕은 분명히 양위를 말했다.
섭정이 된 에르난은 아직 정식으로 왕관만 쓰지 않았을 뿐, 이제 그 역할은 왕이나 다름없다.
아내인 레이테의 동반은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상식 속에서, 아내의 동행은 원래 격식을 차리기 위한 동석 외의 의미가 없다.
‘설마 동행을 예상치 못했다 해도……, 아니. 예상 못 했을 리가 없어.’
하나뿐인 상석은 의도적인 시위다. 이미 한 나라의 왕이기도 한 에르난을 전하라고 부르며 일부러 바르시나의 왕자로만 취급하는 태도 또한 마찬가지다.
코른의 말은 그 의도에 폭력적으로 쐐기를 박았다.
왕의 대리인과 그 배우자를 이런 식으로 면전에서 모독할 줄이야. 레이테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갑시다.”
에르난이 아내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레이테가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 그는 가차 없이 몸을 돌려 회의장 밖으로 걸어나갔다.
“전하!”
남편에게 붙들려 거의 끌려나가던 레이테는 에르난을 부르는 다급한 외침이 들리자 회의장 안을 돌아보았다.
경악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는 사람, 어쩔 줄을 모르며 두리번두리번 눈치를 살피는 사람, 그리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사늘하게 부부를 노려볼 뿐인 사람이 보였다.
그러나 에르난은 뒤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 * *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당신이 대표위원회를 파행시키다니요, 어쩔 작정이죠!”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레이테가 남편의 손을 거세게 뿌리치고 외쳤다.
“애초에 정상적인 회의는 못 했을 겁니다. 그 작자들은 나를 존중할 마음 자체가 없어요.”
“버텨야지요! 첫 공무부터 이런 식으로 도망쳐서 어떻게 해결해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에르난의 귀에 따갑게 꽂혔다.
“그러면, 저들이 원하는 대로 당신을 내쫓고 나 혼자 진행합니까? 내 아내가 치욕을 당하도록 그냥 놔두라고?”
“고작 아내를 모독한다고 국사를 내던지는 군주가 어딨어요!”
에르난은 짜증이 났다.
레이테는 무슨 굴욕이든 수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오랫동안 숙부에게 핍박받으며 살아야 했던 그녀의 과거에서나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아내는 여전히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군주의 아내니까 ‘고작’ 아내가 아닌 겁니다! 왕을 섬길 자세 자체가 안 되어 있어요! 당신의 나라, 사크틸라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당신이 보기에도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그건……, 맞아요. 당연하죠. 하지만! 그래서 바르시나의 왕이 될 당신은 이 나라를 버리기라도 할 건가요? 주인이 자기 것을 마음대로 내팽개쳐요? 왜 우리가 도망치듯 나와야 하죠? 당신은 저들의 왕이 될 사람이에요! 무슨 상황에서라도 위엄을 보였어야 해요!”
“……이런 상황에서마저 의연한 여왕 폐하의 책임감은 굉장하십니다.”
매섭게 쏟아지는 질책에 에르난은 저도 모르게 빈정거렸다.
‘아차, 잠깐……!’
직접적인 모욕을 당한 사람은 레이테다. 그녀는 자신의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내를 다그칠 때가 아니다. 위로해야 하는데.
에르난은 일단 아내를 다독여 주려 했다. 그리고 차분하게 이야기하려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레이테의 말에 그의 얼굴이 사늘하게 식었다.
“아내의 동행이 필요하다면 그냥 당신의 옆자리에 나를 세워 두세요. 위원회의 귀족들이야 물론 저를 무시하겠죠. 아니면 저를 더 욕보일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어떻게든 버텨야 해요.”
에르난은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듯했다.
그는 몇 번 입을 들썩거리기만 하며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을 그냥 두라고? 부인, 당신은 자존심도 없습니까? 아니, 이 일은 자존심 이상의 문제입니다. 단순히 외국인 여왕을 인정치 않겠다는 뜻으로 보입니까? 아직도? 당신 말대로 나는 이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고, 방금 일은 왕권 자체에 대한 도전입니다! 아니면…….”
에르난이 레이테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화들짝 놀란 레이테가 몸을 움츠렸다. 그녀는 남편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를 악물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어질 말을 예상하듯 그녀의 턱이 덜덜 떨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에르난의 눈에 반쯤 울먹이는 레이테의 얼굴이 비쳤다.
‘그래, 모를 수가 없지.’
에르난의 입가가 비틀렸다.
“당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굴욕을 허락하는 이유는, 역시 당신이 남편에게 그렇게 대했기 때문입니까? 배우자란, 더 큰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시하고 짓밟아도 되는 존재니까?”
“그, 그렇게까지는 아니…….”
레이테는 말을 더듬을 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흔들리는 눈만으로도 답은 충분했다.
에르난의 손이 떨렸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지난밤, 에르난은 잠들기 직전까지 고민했다.
아내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냐고. 그녀를 어떤 존재로 정의해야 하느냐고.
그리고 하필 이럴 때, 에르난은 깨닫고 말았다.
레이테에게 자신은 여전히 도구이고 수단일 뿐이었음이 드러난 지금. 가장 비참한 순간에.
‘나는 이 여자를 사랑해.’
이 사랑은 부부 사이의 의무적인 미덕과는 다르다. 정략적 이익을 위한 피상적인 연출도 아니다.
물론 정복 따위는 절대로 아니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에르난은 간절하게 레이테의 전부를 원했다.
또한 레이테가 자신을 원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가차 없이 자신을 짓밟으라고 말한다.
레이테가 원하는 에르난이란 남편, 사크틸라의 왕, 바르시나의 왕자, 그리고 자신을 돕되 해치지 않는 검……. 모두 그의 기능일 뿐이었다. 에르난이라는 사람은 원하지 않는다.
좋다. 원래 이렇게 시작한 관계였다.
그런데 간밤에, 그리고 여태껏 쌓아 온 교감에 녹아내리고 변화한 사람은 자신뿐인가?
그녀는 정말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나?
“어떻……, 어떻게.”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기에,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드는 일도 주저하지 않느냐 묻고 싶었다.
“……어젯밤, 저는 당신에게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물을 수 없다.
“당신을 소외당하게 두지 않겠다고. 계약을 제대로 이행해 보겠다고. 동등함과 균형이 가능함을 보이겠노라고.”
지금 이 순간, 레이테의 목소리로 계약이니 하는 말을 들었다가는 자신이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우리가 서로 자주 했던 말 있잖습니까. 동등함. 균형. 공유.”
그러니 어차피 가슴을 찔러 피를 내야 한다면, 차라리 자신이 먼저 나서는 편이 낫다.
“허투루 한 맹세가 아닙니다. 저는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당신 손을 잡고 갈 겁니다. 당신이 그토록 원하는 이 나라의 여왕 자리를 위해서라도, 당신은 스스로를 치욕에 던져서는 안 됩니다.”
여왕은 본질적으로 위태로운 존재다. 에르난과 같은 한없이 경계해야 하는 배우자를 필요로 하는 현실이 가장 큰 증거다.
따라서 레이테라는 여자가 여왕으로 살기 위해서는, 아무리 남편을 짓밟고 무시하고 외면한다 해도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계약 상대일 뿐인 자신이 비참하지만, 그 계약만이라도 붙잡아야 한다.
적어도 그녀에게 버림받지 않으려면.
“저는 당신과 함께 바르시나의 주인이 될 사람입니다. 결코 내 나라를 버리지 않습니다. 내가 주인의 의무를 회피한다면……, 당신이 내 아내일 이유도 없을 테니까.”
어젯밤의 수줍음이,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달콤하게 달라붙던 감정이 모두 거짓말 같았다.
그것들은 다 무엇이었을까. 바르시나에 온 이상 남편과 손을 잡아야 하는 부부의 당연한 처지를 자신이 멋대로 착각했을 뿐일까?
“당신의 약속을 믿어요.”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아내의 손이 자신에게 닿았다. 에르난은 온몸이 쭈뼛 서는 듯했다.
레이테는 자신의 어깨를 쥔 남편의 손을 천천히 내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남편을 짓밟아도 되는 존재라고 생각……, 지금은. 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과 나는 서로를 도와야 하니까.”
에르난의 팔이 아래로 털썩 떨어졌다.
참으로 아내다운 말이었다.
레이테는 남편을 이끌어 의자에 앉혔다. 그녀가 탁자 옆의 호출용 끈을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문이 열리고 카테리나가 들어왔다.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위원회에서 터진 일은 이미 궁정에 다 알려졌을 것이다. 시녀로서 처소에 대기하는 카테리나라면, 부부의 말다툼까지 어렴풋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레이테는 따뜻한 차를 부탁했다. 카테리나는 라벤더 차를 곧바로 준비해 가져왔다. 에르난은 차를 따르는 카테리나의 떨리는 손을 보았다.
부부가 겪은 일은 부부만의 일이 아니다. 그들은 왕이니까.
에르난은 이를 악물었다. 비참함 가운데에서도, 당장 해야 할 일은 있다.
카테리나가 나가자마자, 에르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차를 마시던 레이테의 움직임이 아주 잠깐 멈췄다.
“사실 오늘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당신입니다. 당신을 욕보인 행동이 문제였으니까. 많이 당황하셨겠지요. 남편으로서 위로는 못 할망정 큰소리만 쳤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감정을 진득하게 끌 여유가 없다.
비록 자신을 응시하는 아내의 눈과 마주치기만 해도 가슴이 요동하지만.
“조속히 위원회를 다시 소집해서 상황을 진정시켜야 해요. 제가 지금 드릴 말은 이뿐이네요.”
레이테는 차분하게 말했다.
에르난은 차를 한 모금 가득 마셨다. 찻잔을 쥔 손이 조금 떨렸지만 아내가 눈치를 챌 정도는 아닐 듯하다.
라벤더 향은 심신의 안정에 도움을 준다고 들었다. 효과가 있으면 좋겠다.
“조금 전 같은 상황에서 어떤 행동이 가장 옳은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미안해요.”
“모르는 쪽은 저도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제 생각은 여전히 어제와 같습니다. 내 일을 위해서 당신을 희생시킬 마음은 결코 없습니다.”
없고말고. 어떻게 이 여자가 진흙탕에 구르도록 방치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당신은…….”
에르난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손이 여전히 찻잔을 쥔 레이테의 손을 살포시 덮었다.
찻잔의 온기 때문인지 그녀의 손도 따뜻했다. 부드럽고 포근한 손은 라벤더 향보다 훨씬 더 에르난을 안심시켰다. 동시에 그의 가슴은 전율했다.
“당신은 제 반려자니까요. 결코 도구가 아니에요.”
하지만 언제까지 이 수준에만 만족해야 할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없었다.
이미 깨달아 버렸으니까. 그의 감정은 더 이상 타협이 불가능해졌다.
‘레이테, 당신을 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