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에 비친 왕관-5화 (5/15)

2부 1장 : 추분

#029

탐브레는 사크틸라 북서부 벌판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다. 하지만 비가 자주 내리고 하늘이 흐려 그 진면목을 보기는 어려웠다.

프란세스크가 탐브레에 도착한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언덕을 오르던 그는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보았다. 안개가 자욱해 언덕 아래 시가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성당의 탑만이 안개를 뚫고 높이 솟아있었다.

탑을 보니 그는 문득 고향이 떠올랐다. 성당은 좋아하지 않지만, 그곳을 둘러싼 탑은 아름다워 좋아했다.

고향. 가족들은 잘 지낼까?

프란세스크는 에르난의 명령을 수행하느라 집을 비우는 일이 원래 잦았다. 그러나 이렇게 오랫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기는 처음이었다.

‘내내 어린애에게 시달렸더니 나조차 애 같은 생각을 하나.’

그는 획 돌아서 감상을 털어내고 다시 움직였다. 목적지인 저택이 나타났다. 붉은 벽이 기괴한 화려함을 과시했다.

도시의 옛 주인, 반역자의 보금자리였던 저곳에 며칠 전부터 국왕 부처가 머문다.

프란세스크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는 사치스러운 태피스트리가 가득했다.

“폐하를 모셔 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가 도착한 곳은 저택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비해 소박하게 생긴 방이었다. 벽을 장식한 타일만 화려하고, 사크틸라답게 벽에 십자가가 걸렸을 뿐이다.

가구는 책상과 의자, 물품을 보관하는 상자 두어 개가 전부였다. 금방 떠날 사람의 방다웠다.

“세스크!”

문이 벌컥 열리고 에르난이 들어왔다.

“폐하.”

“공주는 잘 배웅해 드렸나?”

“뭐, 아시잖습니까?”

프란세스크는 질렸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내전이 끝났다. 왕의 일행은 서쪽으로 이동하며 민심의 안정에 힘을 쏟았다. 일주일 사이에도 몇 번이나 잠자리가 바뀔 만큼 강행군이었다.

빠듯한 일정을 이유로, 프란세스크는 앞장서서 리리우의 귀환을 추진했다. 한 달가량 공주에게 시달렸던 그는 반쯤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사절단의 배웅은 리세우 공께서 맡아 우리의 성의를 보이면 좋겠습니다.’

시스로네스가 주장했다. 여왕은 물론, 에르난마저 찬성했다.

거부할 방도가 없던 프란세스크는 결국 공주를 일주일이나 더 상대해야 했다. 배웅을 마친 그는 국왕 일행을 쫓아 탐브레로 왔다.

“별말 없던가?”

“두 분 폐하께서도 헤젤을 방문해 주시라던데요.”

“자살하고 싶을 때 가면 되겠군.”

“말 그대로 놀러 오라는 뜻입니다. 공주가 사크틸라에서 놀다 갔듯이.”

“알아. 하지만 그 할아비는 생각이 다를걸? 어쨌든 그동안 고생 많았네.”

왕은 책상 서랍을 열어 서류를 꺼내 그에게 넘겼다.

“그건 그렇고 이걸 보게. 근친혼은 불법이라 결혼하려면 교황의 특별 사면장이 필요하잖나. 그게 필요해서 애가 타는 반역자에게, 어떤 정치꾼이 거래를 제안했지 뭔가.”

“추기경 임명을 도와주신다면 적극적으로 힘을 써 사면장을 받아오겠습니다……, 많이 눈에 익은 서명이네요.”

“그래? 너무 복잡해서 나는 겨우 알아봤는데. 바르시나에서도 이 정도로 거창하게 서명하는 사람은 드물지 않나? 성직자라는 사람이 대단도 하지.”

겨우 알아봤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왕은 이 서명을 수십 번은 보았을 테니.

“시스로네스는 이런 식으로 반역자와 거래하며 여왕을 보호했겠지. 그런데 왜 내 눈에는 그 이상의 욕심이 보일까?”

“추기경 말씀하십니까? 폐하의 표현을 감히 빌리자면, 세상의 모든 정치꾼 성직자는 추기경 자리를 꿈꿉니다. 뭐, 그 이상도 있겠지만.”

“……그를 못 믿겠어.”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골몰하던 에르난이 입을 열었다.

“압니다.”

“내 감정 문제가 아니야. 여왕은 대주교를 전적으로 신뢰하는데, 그는 여왕에게 자신이 가진 패를 다 드러내지 않아.”

“브라간사 말씀이시군요.”

에르난이 프란세스크에게 헤젤 일행의 배웅을 명한 이유였다. 브라간사 공작의 감시.

“그는 어떻던가?”

“수상한 점 따위 없이 아주 깔끔해서 더 수상하지요. 아 참, 방탕한 행동은 없던데요.”

지난 한 달 동안, 프란세스크는 공작이 여왕은커녕 어떤 여자에게도 집적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의 감시가 철저했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에르난은 여전히 꺼림칙한 듯했다.

“시스로네스는 브라간사의 존재를 숨겼어. 여왕은 그의 존재를 몰랐고, 또 그에게 청혼받았다는 사실은 지금도 모르지.”

“대주교가 폐하께는 알려 주었잖습니까?”

“일부일 뿐이야. 분명히 뭔가 더 있는데, 입을 안 열어.”

“알아보지요. 저야 원래 그 사람을 계속 감시했잖습니까.”

왕은 웃음과 함께 친구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아무튼 자네가 일찍 와서 다행이야. 하마터면 못 만나고 출발할 뻔했어.”

에르난은 움직이기 편한 상·하의와 화려한 문양의 외투 차림이었다. 검을 착용했는지 외투 뒷자락이 튀어나왔다.

“어디로 가십니까?”

“해안 요새. 엊그제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저택을 수색했는데, 기막힌 것을 발견해서 확인하러 가. 느지막하게 돌아올 테니, 오늘은 푹 쉬게. 아, 그 서류는 자네가 보관해 줘.”

프란세스크는 서류를 적당히 접어 옷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막 밖으로 나가려던 왕을 붙잡았다.

“그런데요, 에르난.”

이어질 말을 예상한 듯, 왕은 프란세스크를 뿌리치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를 붙잡은 손은 단단했다.

“대주교와 마찬가지로, 당신 역시 사실을 감췄습니다. 왜 여왕에게 브라간사에 대한 정보를 알리지 않지요?”

에르난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프란세스크의 시선을 피해 더듬더듬 말했다.

“……그녀가 다른 남자…… 라는 선택지를 안다면……. 아니, 이만 나가 봐야겠어. 아내가 기다릴 거야.”

결국 왕은 친구의 손을 내치고 그를 피해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부인. 늦어서 미안합니다.”

이미 말에 탄 여왕은 서류를 읽고 있었다. 남편의 인사에 대한 답은 없었다. 잠깐 고개를 들어 그를 힐끗 볼 뿐이었다.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내일 오전에 오라고 하세요.”

“예, 폐하.”

비서에게 서류를 넘긴 여왕이 손을 가볍게 들어 출발을 지시했다.

일행은 순식간에 탐브레의 성곽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계속 움직였다.

여왕은 요새로 향하는 내내 일행들과 대화했다. 에르난은 그녀의 바로 옆에서 말을 몰았다. 따라서 아내의 모든 말이 잘 들렸다.

그러나 왕은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다. 여왕도 그를 찾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을 거부했다.

* * *

요새를 관리하는 자작은 원래 반역자의 일파였다. 그러나 전황이 여왕의 승리 쪽으로 기울자, 그는 반역자의 도움 요청을 무시하고 요새에만 틀어박혔다.

따라서 그는 왕실의 눈치를 대단히 봐야만 했다.

“두 분 폐하께서 이런 곳까지 방문해 주시니 영광이옵니다.”

자작은 연신 허리를 굽히고 실실 웃으며 두 왕을 맞이했다. 그는 아예 허리를 펼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여왕 폐하! 폐하의 눈부신 아름다움이 이곳의 흐린 하늘마저 밝히는군요! 그리고 사크틸라의 용맹한 새 왕이시여! 부디 이 나라를 평화와 번영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자작은 연설이라도 할 기세로 장황하게 외쳤다.

“특히 폐하께서는 바르시나 해군을 지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자, 시장하실 텐데 일단 준비된 식사를 하시면서 소신과 바다의 일에 대한 의논을…….”

“만나서 반갑소, 자작. 요새부터 둘러보고 식사하지.”

“아! 그러십시오.”

왕은 자작의 말을 끊고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고마워요. 적절히 끊어 주셨네요.”

에르난이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레이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순식간에 남편을 앞질러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후우.”

그는 한숨을 쉬고 아내를 따라갔다.

* * *

가파른 절벽 위에 쌓인 요새는 해상 감시를 위해 구축했다지만, 핑계였다.

반역자는 탐브레와 가까운 이 요새를 유사시 피난처로 쓸 생각이었다. 그런 탓에 전폭적인 투자가 이뤄졌다. 두 왕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왔다.

“대포가 참 든든합니다.”

에르난은 아내에게 말을 건넸다. 여왕 대신, 뒤에서 따라오는 자작이 반응했다.

“폐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해안 요새의 포대는 바다에 뜬 배의 대포보다 수 배의 위력…….”

“알고 있소.”

알고말고. 이런 요새는 바르시나에도 있다. 에르난이 3년 동안 총독으로 일한 섬의 핵심 시설이었다.

그래서 왕의 눈에는 보였다.

위압적인 대포는 대륙 본토에서 들여온 물건이다. 또, 지금은 바다를 향해 줄지어졌지만, 실은 육상 전투를 위한 장비였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자작의 쓸모없는 반응에 대꾸할 필요는 없다.

에르난이 포대가 늘어진 성벽을 내려가려던 차였다.

성벽 너머로 펼쳐진 넓은 바다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청회색 빛깔이 음울하고, 수평선 끝까지 육지의 흔적은 없다. 세상의 끝이라는 바다다웠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흐릿했다. 실제로도 이 지역은 비가 자주 내린다.

희망과 활력이 가득한, 에르난이 익숙한 바르시나의 바다와는 완전히 달랐다.

‘사크틸라에도 바다는 있다고요.’

아내의 투정이 떠올랐다. 그때의 레이테는 무척 귀여웠다.

‘그 바다가 볼수록 울적해질 것 같은 이런 바다일 줄이야.’

에르난은 아내에게 자신의 바다를 더욱 보여 주고 싶어졌다.

말이라도 건네 볼까? 에르난은 몸을 틀어 아내를 찾으려 했다. 뜻밖에도, 레이테는 에르난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에르난이 놀랄 틈도 없이 레이테는 순식간에 시선을 돌려 버렸다.

“자작. 음식을 들면서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을까?”

“예, 폐하, 이쪽으로 오십시오!”

식당까지 가는 동안. 레이테는 단 한 번도 남편을 보지 않았고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 * *

식탁에는 게와 문어, 가리비, 맛조개 등 먹음직스러운 해산물이 푸짐했다. 그러나 식당 안은 터질 듯 답답한 공기로 가득했다.

자작은 긴장을 얼굴에 써 붙인 모습이었다. 여왕은 말없이 식사만 했다.

음식 맛은 좋지만, 에르난은 체할 것 같았다.

그는 아내와 함께하는 식사자리가 불편했다. 어차피 아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술은 달콤하니 맛이 참 좋네요. 오늘 식사에서 가장 인상적이에요.”

빈 잔을 내려놓으며, 마침내 여왕이 입을 열었다.

“남편에 비하면 저는 군사에 대해 잘 몰라요. 그래도 성벽의 대포는 대단해 보이더군요. 다른 곳에도 두면 좋을 텐데, 어떻게 입수했지요?”

자작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 * *

탐브레로 귀환하자마자 두 왕은 시스로네스를 비롯한 주요 측근을 소집했다.

“20년 ‘평화’의 비법이 무기 나눠 먹기였다니…….”

먼저 대주교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다른 귀족들도 허탈한 표정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사크틸라와 헤젤은 예부터 전쟁이 잦았다. 하지만 여왕의 숙부가 정권을 잡던 시절에는 싸움이 없었다.

반역자가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은 아니다. 전쟁이 터지면 그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외교력이 썩 탁월하지도 않던 반역자는 헤젤과의 충돌을 어떤 방법으로 피했나? 국왕 일행은 반역자의 저택을 조사하면서 그 답을 알게 되었다.

“사크틸라를 종단하면 그에게 적대적인 귀족들에게 꼬투리가 잡혔을 겁니다. 그러니 아예 헤젤로 우회해서 무기를 들였군요. 통행료 삼아 무기도 좀 나눠 주고. 그자치고는 머리를 제법 썼습니다?”

대주교는 자꾸 터져 나오는 실소를 참기 힘든 모양이었다.

“헤젤인 무기상에게 구입했다, 요새 지휘관은 그 이상 아는 사실이 없어 보였고, 아마 맞을 겁니다. 반역자도 눈치가 있다면 그런 소인배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겠지요.”

국왕 일행과 함께 다녀온 귀족이 말했다. 에르난은 그가 낮에도 여왕과 활발히 토론하던 모습을 기억했다.

“어쨌거나 문제는…….”

탁자 위에 가득한 무기 거래 장부를 노려보던 여왕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남편에게 향했다.

“헤젤은 어떻게 그 많은 물건을 판매했을까요? 문제의 무기가 헤젤 생산품은 아닐 텐데요…….”

여왕은 말끝을 흐렸으나, 의도는 또렷했다. 남편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대포는 이베로 반도 바깥, 대륙 본토의 발명품이다. 반도 자체 생산품은 아직 질이 낮았다.

반도에서 대륙 본토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험난하기로 악명 높은 피리네우스 산맥을 넘거나, 아니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거나.

“……본국에 조사를 명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닷길은, 바르시나 연합 왕국이 장악한 곳이었다.

“설마 바르시나의 바다가 뚫렸으리라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시스로네스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에르난은 그 안에서 자신을 향한 조롱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조롱은 무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는 여왕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다. 에르난은 자신을 향하는 다른 이들의 따가운 시선 또한 견뎌야 했다.

왕의 현실은 이랬다.

에르난이 사크틸라의 왕이 된 이후, 정확히는 반역자를 그가 죽여 버린 후, 레이테는 전보다 더 남편에게 냉랭해졌다. 에르난의 충동적인 행위에 노발대발하는 대신, 남편이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벽을 세워 버렸다.

그리고 그 벽은 오로지 하루를 마친 밤에만 무너져 내렸다.?

#030

부딪쳐 오는 힘이 사나웠다. 몸의 덜컹거림이 지나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레이테는 남편에게 힘껏 매달려 몸을 튕겨 올렸다.

더, 더 깊게. 레이테의 입이 옴짝달싹했다.

말 대신 깊은 곳에서부터 터지는 신음이 그를 대신했다.

“하읏! 아……, 흐응……, 흐읏! 하응!”

사실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기둥은 탐욕스럽게 레이테의 안을 누볐다. 철썩철썩 부딪치는 소리는 그녀의 의식을 흐트러뜨렸다.

레이테를 위에서 덮던 에르난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레이테의 다리를 잡아 올려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 아래를 향해 허리를 내리꽂았다.

레이테는 엉덩이가 허공으로 뜬 불안정한 상태에서 그에게 붙들려 이리저리 흔들렸다. 격렬한 자극이 위에서 쏟아졌다.

“아…… 읏, 흐아앗……! 하응, 흐읏!”

“후우……, 읏.”

아내의 허벅지를 붙잡은 에르난은 안쪽으로 쐐기를 박으며 헐떡였다. 그의 눈에 쾌감을 쫓는 데에 여념 없는 레이테의 모습이 들어왔다.

얼굴이 먹음직스럽게 붉어졌고, 질끈 감은 눈은 파르르 떤다. 부푼 가슴이 출렁이고, 남편을 받아내기에 바쁠 허리도 쾌락에 취해 들썩였다. 벌어진 입에서는 신음이 끊이지 않았다.

“앗, 흐응…… 하아, 흐앗! 아흣!”

아내는 남편의 욕망을 끝없이 부채질했다. 에르난은 더 거세게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의 엉덩이와 허벅지가 팽팽하게 땅겨졌다. 광포한 몸부림의 끝에서 그는 정욕을 분출했다.

레이테는 자신의 몸 안에 꿈틀거리며 뿜어지는 것을 느꼈다. 앓는 신음이 끙끙 흘러나왔다.

“으으응…….”

남편의 팔을 붙잡은 레이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에르난은 쓰러지듯 그녀를 품에 안고 뜨거운 한숨을 터뜨렸다.

“후우…….”

레이테의 뺨이 남편의 가슴에 닿았다. 아직 긴장이 사그라지지 않아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들렸다.

노곤한 열기를 품은 살끼리 느긋하게 몸을 겹치면, 따뜻하고 부드러운 촉감 자체가 편안함을 주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아무 걱정 할 필요 없는 안온함에 휩싸인다.

침대 위에서의 몸부림은 이것을 위한 행위가 아닐까. 억눌린 숨을 잠시나마 틔워 주는 짧은 휴식.

에르난이 몸을 살짝 일으켰다. 자신의 안을 채웠던 기둥이 주르륵 빠져나갈 때 레이테는 몸을 떨었다.

그의 손이 레이테의 다리 사이로 향했다. 갖은 체액이 뒤섞인 곳에 에르난의 손가락이 닿았다. 미끄러운 표면을 집요하게 자극하자 레이테가 다리를 오므렸다 펴며 경련했다.

에르난은 아내의 귀를 살짝 깨물어 그녀의 의식을 깨웠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또 필요해요?”

레이테는 몸을 움찔거렸다.

그럴 만도 했다. 부부가 침실에서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가 무엇이었는지, 또 그것이 언제쯤이었는지 슬슬 잊던 차였다.

오랜만에 몸을 맞댄 채 듣는 에르난의 낮은 목소리는 살을 섞을 때의 신음보다 더 퇴폐적으로 들렸다.

또 필요하냐고? 부딪칠수록 좋았다. 더 깊숙이 살을 겹쳐 녹아내리고 싶다.

그 어떤 경계도 벽도 없이 온몸을 섞어 버리고 싶다.

레이테는 남편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타액이 질척이는 동안 그녀의 허리가 들썩였다. 에르난이 그녀의 가슴을 쥐고 부드럽게 쓸었다.

“흐응, 아…….”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리며 그녀는 남편에게 매달렸다. 부부는 서로에게 엉겨 붙었다.

입술을 뗀 에르난이 말했다.

“말로 해 줘요.”

“……무슨 말?”

에르난은 질문에 답하는 대신 아내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부드러운 살결을 쪽쪽 빨아들이자 레이테는 신음했다. 그녀의 허리가 떨렸다.

“나는 당신의 목을 탐하는데, 당신은 목 대신 허리가 반응하는 이유.”

에르난이 고개를 들어 레이테를 바라보았다.

레이테는 남편의 눈에 맺힌 질척한 핏덩어리와 마주쳤다. 그것은 레이테에게 어떤 감정도 주지 않았다. 두려움도, 불길함도, 열정도, 물론 사랑도 느낄 수 없었다.

대신, 이 밤에 필요한 단 하나만이 떠올라 있었다.

레이테는 자신의 눈에 비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말했다.

“당신을 원해요.”

감정은 필요하지 않다. 몸의 욕구를 따르기만 하면 될 일이다.

안으로 파고들어 오는 것에 전율하며, 레이테는 남은 의식을 던져 버렸다.

“하아, 흣……! 앗, 흐응, 아앗!”

에르난의 움직임은 더 난폭해졌다. 레이테도 마찬가지였다.

몸을 들썩일수록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끊임없이 밀려오는 쾌감은 피로를 쓸어 버렸다.

몸 안을 넘치도록 채우는 욕망, 떨어질 생각이 없이 달라붙는 뜨거운 살이 좋았다. 레이테의 팔이 에르난의 등을 힘껏 안았다.

교접은 더 버틸 수 없는 몸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모든 벽을 강제로 허물고, 허물어진 잔해가 뒤섞이고, 완전히 녹아 버리도록 두 사람은 몸을 얽었다.

날이 밝으면 모두 없는 일이 될 것을 알지만, 침대 위에서만은 누구도 내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 * *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벽을 만난다.

“…….”

“…….”

공교롭게도 오늘 아침은 상대방마저 뜬 눈으로 마주쳤다.

아직 침대에 누운 그대로였다.

두 사람의 눈은 배우자를 정면으로 응시하지도 못하고 도망치지도 못한 채 불안하게 흔들거렸다.

먼저 움직인 쪽은 에르난이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나왔다.

바닥에 벗어 던졌던 슈미즈와 가운을 집어 걸치고 나가려는데, 아내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에르난.”

레이테는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은색 머리카락이 아침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였다.

아내를 응시하는 에르난은 무표정했다.

반면에 그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침실 같은 사적 공간에서, 아내는 그에게 말을 걸지 않은 지 한참 되었으니까.

“좋은 아침이에요.”

무미건조한 인사였다. 평소에 잘만 만들어 보이던 웃음조차 없었다.

감정 없는 인사는, 그러나 차갑지 않았다.

벽은 에르난뿐만 아니라 레이테 또한 막는다. 질식할 듯한 답답함은 남편만의 괴로움이 아니다.

‘이런 느낌마저 동등하게 공유할 줄이야.’

우습지만 에르난은 그 깨달음이 대단히 기뻤다.

“좋은 아침입니다, 부인.”

툭 던지듯 무심한 답이었다.

에르난은 과장 없이 무덤덤한 자신의 반응에 안도했다. 기쁨이 겉으로 드러날까 걱정한 그는 후다닥 침실 밖으로 나와 버렸다.

방 밖의 공기는 평소보다 쌀쌀했다. 이제 완전히 가을이다. 에르난은 가운을 끌어안았다.

그는 오랜만에 개운한 아침을 맞이했다.

아내와 동등하다는 기만 쪽이 아내의 적을 대신하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 * *

부부는 오전부터 바빴다.

“반역자가 이곳의 겉치장만 신경 쓸 동안, 그대들이 도시의 살림을 실질적으로 꾸렸지요. 고생이 많았습니다.”

“영광이옵니다, 폐하.”

“레시아 백작을 왕실 대리관으로 임명할 테니 이제 그의 지시를 따르세요.”

백작은 어제 여왕과 유독 오래 이야기를 나누던 중년 귀족이었다. 그가 여왕의 앞에 무릎 꿇자, 레이테는 임명장을 주었다.

에르난은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외부인이 뜬금없이 도시를 지배한다는데 불만이 없을까?’

바르시나에서 왕이 지방 장관을 임명한다면, 그 지역은 자치권을 수호하겠다며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에르난의 상식은 이랬다.

사크틸라는 달랐다. 여왕은 몇 번이고 대리관을 임명했다. 반란 소식은 물론 없다.

두 나라의 권력 구도가 다르다는 것쯤은 이미 안다. 하지만 왕실 대리관 임명은 볼 때마다 어색했다.

정말 괜찮나? 차마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대주교에게 은근히 물었다.

‘일만 잘하면 상관없습니다. 대리관이 제구실을 해야 왕실과 소통이 원활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일도 모르면서 왕이 되었느냐, 대주교의 답변은 이런 비웃음 같았다. 에르난은 부아가 끓어올랐으나 참았다.

실은 부러웠다.

“에르난, 당신도 하실 말이 있나요?”

남편을 부르는 여왕의 말투는 상냥했다. 하지만 에르난은 속지 않았다.

당연하다. 여왕에게 그는 가슴에 품을 대상이 아니니까.

“없습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있다 해도 말할 수 없었다.

알현을 마칠 때 부부가 나누는 이 대화는 그들이 공동왕임을 드러내는 짧고 작위적인 의식일 뿐이었다.

에르난은 왕이지만, 전장이 아닌 곳에서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되었다.

평소와 같은 씁쓸한 마무리지만, 침실에서 나눴던 짤막한 대화를 떠올리면 기분은 덜 나빴다. 이 상황도 언젠가는 변할 것이다.

왕은 일어나서 나가려 했다. 그때, 알현실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대포 문제를 조사하고자 에르난이 바르시나로 보낸 전령이었다.

“자네 아직도 안 떠났나?”

급한 일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건만 늦장이라니. 그럭저럭 괜찮던 기분이 단숨에 짜증으로 바뀌었다.

“아닙니다, 폐하. 그가 출발하자마자 저와 마주치는 바람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른 남자가 들어오며 말했다.

바르시나의 문장인 빨간색과 노란색의 줄무늬 외투를 입은 전령이었다. 외투 아래 타이츠의 무늬가 요란했다. 멋 내기를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그는 부부에게 다가와 무릎 꿇고 인사했다.

다소 과장된 우아함이 풍기는 몸짓에, 에르난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과장된 예법으로 자신을 뽐내는 태도는 고국에서 흔히 보던 귀족의 모습이었다.

“사크틸라의 왕이시며 바르시나의 왕위 계승자이신 돈 에르난과 사크틸라의 여왕 도냐 레이테께 인사 올립니다. 저는 바르시나 국왕 폐하의 전령인 세르지 피로시입니다.”

세르지는 예의 바르게 말했으나, 조금 높은 어조 탓인지 은근히 경박한 인상이다. 더군다나 피로시 가문은 에르난에게 썩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세르지의 딱 한 가지만은 마음에 들었다. 과장된 태도로 보아 부부의 길고 긴 칭호를 장황하게 나열할 줄 알았건만, 상당히 깔끔하게 압축했다.

“사크틸라에 잘 왔어요. 자우메 왕께서 무슨 일이실까요?”

여왕이 먼저 말했다.

“국왕 폐하를 비롯한 바르시나 연합 전체가, 왕국의 다음 주인이실 에르난 왕자의 귀환을 요청합니다. 폐하께서는 고국을 떠나신 지 반년이 다 되어 갑니다. 국왕 폐하께서 친서를 보내셨으니 읽어 주십시오.”

에르난은 편지를 받아들었다.

사랑하는 아들 에르난에게

아들아, 네가 사크틸라의 반역자를 무찔렀다는 소식을 받고 무척 기뻤단다. 일단 큰 걱정은 덜었구나. 고생이 많았다.

여왕과는 잘 지내느냐? 부부의 금실이 좋다는 소문은 있던데, 지금은 어쩌려나 모르겠구나. 혹시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은 없더냐? 물론 결혼한 지 아직 반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성급한 기대겠지.

성급한 쪽은 네 아비의 몸 상태다. 하루하루 새로운 병이 더해지는 것만 같다. 그래도 살 만큼 살았으니, 이제 당장 천국으로 떠난대도 이상하지는 않겠지.

이렇게 되어 보니 네가 많이 보고 싶단다. 너는 사크틸라의 왕이지만, 바르시나의 왕위 계승자이기도 하다. 너의 고향도 찾아 주렴.

나뿐만 아니라 너의 귀환을 원하는 사람이 많단다. 지난주에 열린 신분의회에 참석했다가 왕자를 데려오라며 윽박지르는 소리마저 들어야 했단다.

물론, 아내와 함께 와도 된단다. 여왕의 자유를 속박하는 자도 사라졌으니, 여행 삼아 오면 어떨까? 마침 바르시나는 축제가 다가오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다.

며느리가 어떤 사람일지도 궁금하단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 부부의 모습을 보고 싶구나.

너를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에르난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그는 사크틸라에서 몇 년은 머물며 기반을 닦을 생각이었다. 이제야 왕이 되었다. 그런데 다시 와 달라니.

한숨을 쉰 에르난은 편지를 아내에게 넘겨주었다.

편지는 바르시나어였으므로, 레이테는 느릿느릿한 속도로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여왕의 눈이 한순간 찌푸려졌다. 에르난은 그녀가 어느 부분을 읽는 중인지 짐작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의회에서 왕에게 모욕을 준다니 상상도 못 하겠지.’

레이테는 죽은 숙부에게 갖은 수모를 당해 왔지만, 대부분은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형태로 이뤄졌다. 에르난이 시종으로 변장했을 때 보았던 모습 같은 식이다. 왕권을 노골적으로 위협하면 반발이 크기 때문이다.

편지를 다 읽은 레이테가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은가요?”

“무시……, 아니, 안 가면 불효자가 될 판인 데다 의회에서도 난리이니 한 번 돌아가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부인,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저는 당신의 의견을 물었어요.”

에르난의 의견은 무의미했다.

아버지의 편지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는 한숨 쉬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인, 저와 함께 바르시나에 다녀올까요?”

레이테는 곧 한껏 웃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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