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남편의 권리
#018
전사가 갑옷을 입는 모습은 처음 본다.
종아리와 넓적다리, 가슴과 배, 그리고 팔까지 금속판이 하나하나 남편의 몸에 딱 맞춰지는 과정을 레이테는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투구를 제외한 갑옷의 착용이 모두 끝나자 레이테가 손을 가볍게 내뻗었다. 시종이 커다란 목걸이를 여왕에게 건네주었다. 레이테는 목걸이를 에르난에게 직접 걸어 주었다. 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굵은 사슬이 느슨하게 드리워지자 차가운 갑옷은 금세 화려한 인상을 풍겼다.
“오늘 당장 전투를 치르지도 않는데, 왜 벌써 갑옷을 입나요? 요즘 낮은 햇빛이 너무 강해 갑옷 차림으로는 많이 더울 텐데요.”
손을 쥐었다 펴며 장갑을 손가락에 맞추던 에르난이 빙그레 웃었다.
마치 무지함을 지적하는 듯해서 레이테는 조금 부끄러워졌지만, 궁금증은 어쩔 수 없었다.
“웃지만 말고 대답을 하세요.”
레이테의 목소리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멋있으니까요.”
“……아.”
“설명이 더 필요합니까?”
“아뇨, 충분해요. 이해했어요.”
뜬금없는 대답에 잠깐 머뭇거렸지만 레이테는 금방 말의 의미를 파악했다. 남편은 자신을 위풍당당한 지휘관으로 연출할 생각이다.
결혼식으로부터 어느덧 한 달이 더 지났다. 6월 24일인 오늘, 반역자 토벌을 위한 군대가 출정한다.
여왕을 섬기는 귀족들은 여왕의 남편에게도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외국인이 총지휘를 맡는 데에 반발심이 없지는 않다. 에르난은 그들을 휘어잡고 사기를 돋우어야 했다.
바르시나에서는 왕자의 자문을 담당할 귀족과 호위 인원을 보내 왔다.
본격적인 군사는 없었다. 의논 끝에 부부는 사크틸라의 병력만으로 일을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즉, 바르시나의 왕자는 사크틸라의 군대에 복무하는 셈이 된다.
에르난을 수행하는 바르시나인들은 여왕이 자기네 왕자를 부려먹는다며 불평했다. 레이테는 무시했다. 맞으니까.
그들은 왕자가 사용할 물건도 함께 가지고 왔다. 방금 에르난이 다 입은 갑옷도 그중 하나였다.
바르시나인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기로 유명했다. 따라서 남편의 갑옷은 장식이 가득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밋밋했다. 물론 평범한 기사의 갑옷과 비교하면 충분히 호화롭지만.
더군다나 살짝 낡기까지 했다. 왕족의 물건 같아 보이지 않는다.
‘저 갑옷은 장식품이 아니야.’
주인과 함께 전장을 누비며 칼과 활을 막고 적의 피가 튀었던 갑옷임이 틀림없다. 에르난은 위엄뿐만 아니라 살기마저 함께 두른 듯했다.
출정을 준비하는 동안 에르난은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그 의지는 갑옷에서도 느껴졌다.
에르난은 여왕을 대신하는 상징으로만 만족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태까지 레이테가 지켜본 바로는 확실했다.
‘의욕은 좋지만, 그래서 불안한걸.’
남편은 누구를 위해서 싸울까? 아내일까, 자신일까?
* * *
준비를 마친 부부는 연병장으로 나왔다. 연병장은 대열을 갖춘 병사들과 구경하려 몰려든 도시 주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장교인 귀족부터 일반 병사, 멀리 있는 구경꾼까지,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에르난에게 향했다.
햇빛을 받은 에르난의 갑옷은 찬란하게 빛났다. 바로 옆에 선 여왕은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눈부셨다. 에르난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었다.
“에르난, 내게 반드시 승리를 가져오세요.”
붉게 빛나는 남편의 눈이 레이테를 바라보았다. 레이테는 눈을 감아 그 모습을 외면하고 남편에게 키스했다.
의례적인 입맞춤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에르난이 레이테를 끌어안고 입술을 깊게 맞춰 왔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달그락거리는 갑옷의 소리는 차갑지만, 아내를 진하게 탐하는 입술은 뜨거웠다.
부부의 진한 키스를 본 군중들이 환호했다.
* * *
결혼식 직후부터 숨 가쁘게 준비한 군대가 떠나자 성안은 썰렁해졌다.
에르난이 떠났고, 그를 수행하는 바르시나인이 따라갔다. 사크틸라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시스로네스조차 군에 참가했다. 성직자가 함께한다는 사실에 에르난은 노골적으로 불쾌해했지만, 레이테는 양보하지 않았다.
‘군종 사제는 어느 군대에나 있잖아요. 바르시나에는 없나요?’
‘바르시나의 군인도 당연히 죽기 전 종부성사를 받습니다. 하지만 시스로네스가 고작 그런 이유로 따라가지는 않을 텐데요.’
‘거룩한 성사를 고작이라 말씀하시다니.’
‘…….’
어차피 에르난은 대주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외국인 지휘관을 보좌할 참모가 필요하니까.
참전하는 귀족이 한둘이 아니건만 왜 하필 대주교냐는 에르난의 항변은 묵살되었다. 합리적으로 따져도 시스로네스가 적임자다.
물론, 남편을 향한 레이테의 작은 복수이기도 했다.
“하아. 드디어 자유구나.”
잡다한 업무를 본 레이테는 밤이 되자 침실로 향했다. 그녀는 침대에 풀썩 누웠다. 넓고 푹신푹신해 좋았다. 얼마 만에 침대를 혼자 쓰는지.
20년 동안 그녀를 얽매던 숙부와의 대결이다. 좀 더 긴장해야 한다. 하지만 당장 느끼는 해방감은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 최근 침대에서의 남편은 지독했다.
‘짝수는 무슨 짝수. 내가 미쳤지.’
잠자리 횟수는 반드시 짝수로. 그 웃기지도 않는 말을 꺼낸 사람은 레이테였다. 남편의 뻔뻔함이 황당해서 아무렇게나 했던 말이었다. 뜻밖에도 에르난은 정직하게 그 말을 받아들였고, 아주 착실하게 지켰다.
다음 따위는 없을 것처럼 깊게 살을 섞고 나면 레이테는 완전히 지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에르난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남편은 성욕이 넘쳤고, 체력도 넘쳤고, 마침 짝수 따위의 적절한 핑계도 있다. 그는 아내를 꼬드겨 실컷 즐겼다.
어젯밤은 이런 식이었다.
“미쳤어요, 당신? 내일, 아니 오늘이 출전인데 졸면서 말을 탈 생각이에요?”
“별수 없잖습니까. 당분간 못 만나는 아쉬움을 이렇게라도 달래야…… 으읍!”
지금이 몇 번째지? 알 수 없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의식조차 남지 않았다. 하지만 허벅지 사이로 또 들어오려는 것을 향한 본능적인 적대감은 레이테의 정신을 번뜩 들게 했다.
그녀는 베개를 집어 들어 남편의 얼굴을 짓눌렀다.
“흡……! 숨, 숨은…… 으윽! 레이…… 욱!”
어찌나 강하게 힘주어 눌렀는지 에르난이 몸을 바둥거렸다. 너무 오래 숨을 막았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다. 잠시 후 레이테는 베개를 치웠다.
이만하면 싫다는 뜻을 알아들었겠지.
“후우……. 이제 살 것 같군요. 제법 신선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
“긴장감이 상당했는데, 이대로 당신이 위로 올라온다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 잠깐만요, 잠깐! 레이테! 미안합니다!”
에르난은 레이테가 침대 밖으로 자신을 밀치려 하자 당황하며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다시 쫓겨나고 싶으시다면야 보내드릴 수 있는데요.”
“절대 아닙니다. 미안해요, 레이테. 내 욕심이 너무 과했지요? 더는 당신을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쪽쪽 소리가 끊임없이 울리는 사이사이, 나른한 속삭임도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부인.”
하아, 레이테는 한숨 쉬었다. 비슷한 상황이 이미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가벼우면서도 집요한 입맞춤이 계속되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만다.
그래, 에르난은 원래 이런 인간이구나.
마지막도 한 번도 거짓말이다. 하지만 오늘 밤도 그냥 모른 척 넘어가 주고 싶어진다. 남편의 말마따나, 한동안 못 볼 테니.
레이테는 대답 없이 몸을 돌려 그에게 등을 보이고 이불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자신의 이런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에르난도 안으로 들어와 뒤에서 아내를 껴안았다.
“저는 많이 허전할 것 같은데, 당신은 아닙니까……?”
에르난은 아쉽다는 듯이 자꾸 아내를 만지작거렸으나 레이테는 반응하지 않았다. 엉덩이에 닿는 무언가가 무척 거슬렸지만, 남편의 온기 자체는 그녀를 무서울 만큼 단숨에 잠으로 이끌었다.
‘……이랬는데 개운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허전하기는 무슨.’
남편과의 밤이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피곤은 별개의 문제다. 밤새 몇 번, 물론 짝수로 엎치락뒤치락하고 나면, 낮 동안의 정신은 허공을 부유하다시피 했다.
레이테는 낮잠을 한가롭게 즐길 수 있는 귀부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여왕이다.
밤의 남편이 낮의 아내에게 끼치는 막대한 악영향을 눈치라도 챘는지, 시스로네스는 여왕을 대신해 낮의 에르난을 적극적으로 괴롭혔다. 괴롭힘은 전장에서도 이어질 예정이다.
‘그리고 에르난은 대주교를 좀 더 믿어야 해. 하다못해 그의 능력을 이용이라도 해야 할 텐데.’
남편이 없다고 기뻐해 놓고 도로 남편 생각이라니. 레이테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곧 그녀는 편안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 * *
부르고 성에는 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 남았다. 성 자체도 탄탄할뿐더러, 탐브레에게는 이곳까지 군사를 보낼 여유가 없다.
레이테의 결혼으로 탐브레에게는 섭정이라는 명분마저 사라졌다. 따라서 그와 이해관계가 단단히 얽힌 소수 집단을 제외한 대다수의 귀족은 그에게 비협조적이었다.
원래부터 여왕을 따르던 귀족은 토벌군에 참가했다.
토벌군과의 연락, 그리고 참전하지 않은 나머지 귀족과의 교섭이 후방의 여왕과 참모들의 주 업무였다.
비교적 적극적인 태도로 늦게나마 여왕을 도우려는 귀족이 적지 않았다. 자금 지원이 대다수였고, 탐브레의 도움 요청을 모른 체하기도 했다.
‘결혼이 뭐라고 이렇게 쉽게 바뀔까.’
그들의 판단 기준은 여왕의 결혼이었다. 숙부와 조카의 결혼을 대비해 여태까지 탐브레의 눈치를 본 것이다.
권력의 실세는 여왕의 남편일 테니까.
‘그렇게 되도록 가만히 둘 줄 알아?’
레이테는 코웃음 쳤다. 여왕의 것은 여왕이 가지고 사용해야 한다.
늘 여왕을 돕던 시스로네스는 전장으로 떠났다. 레이테는 대주교의 도움 없이 일해야 했다.
긴장은 되지만 어렵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그에게 의존해 모든 일을 해결할 수는 없다. 자문을 구할 귀족도 남아 있다. 대주교와도 수시로 서신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완전히 레이테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이를테면, 헤젤의 사절맞이 같은 것이다.
사절단의 우두머리는 놀랍게도 아직 어려 보이는 소녀였다. 동글동글한 얼굴과 붉은빛이 살짝 도는 풍성한 금발이 인형같이 생겼다.
“처음 뵙겠습니다, 여왕 폐하. 저는 리리우. 헤젤 왕국의 국왕 폐하께서 제 할아버지랍니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공주는 부담스러울 만큼 초롱초롱한 눈으로 왕좌에 앉은 여왕을 보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공주.”
여왕은 어색하게 웃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오랫동안 헤젤 측과 결혼을 진행하는 척했기에, 언젠가는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공주를 사절로 보내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더군다나 결혼식을 앞두고 사절을 보내겠다는 연락을 받지 않았던가? 하객이 될 줄 알았던 사절은 오히려 생각보다 늦게 왔다. 시스로네스는 헤젤의 항의에 자신이 대응한다 했지만, 정작 그는 전장으로 떠나고 없다.
“사크틸라의 여왕 폐하를 뵙습니다. 저는 헤젤 국왕 폐하의 종, 브라간사 공작입니다.”
공주의 뒤에 있던 남자가 살짝 앞으로 나와 인사했다.
갈색에 가까운 짙고 탁한 금발을 말끔하게 뒤로 빗어 넘긴 공작은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키는 에르난과 비슷한 것 같지만 몸집이 더 단단한 느낌이다.
호기심에 파란 눈을 잔뜩 반짝이는 공주와 달리 공작은 침착하게 여왕을 응시했다. 보랏빛 눈은 여왕과 닮아 보이면서도 섬뜩할 정도로 어두웠다.
‘공주의 호위일까? 아니, 공작이니 저쪽이 사절단의 실세겠지.’
레이테는 묘하게 오싹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호위로서의 경계치고는 조금 과한 느낌도 든다.
알현실의 좌우에 도열한 귀족들도 당황한 눈치로 헤젤 일행을 쳐다보았다. 특히 에르난이 아내를 위해 부르고에 남겨둔 프란세스크는 거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경악했다.
“폐하께서는 소문대로 정말 아름다운 분이셔요! 제 할머니가 되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어머니도 아니고 할머니라니. 레이테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새삼스레 에르난과 결혼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서 그를 택하지는 않았으나, 역시 손녀딸이 있는 노인과의 결혼보다는 낫다.
레이테는 어이가 없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리리우는 계속 목소리를 높였다.
“어째서 폐하께서는 다른 남자를 택하셨지요? 그것도 제 약혼자였던 에르난 왕자님을!”
여왕은 왕좌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019
알현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왕좌의 손잡이를 붙든 레이테의 손이 떨렸다. 그녀는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숨을 가다듬었다.
여왕은 프란세스크를 쏘아보았다.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프란세스크는 이 자리의 유일한 바르시나인이며 에르난의 최측근이다.
리리우가 프란세스크를 발견하더니 활짝 웃었다. 공주와 눈이 마주친 프란세스크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와, 프란세스크 공이잖아? 마침 잘 됐어. 나와 왕자님의 약혼을 경이 증명해 주…… 시지요…….”
신나게 재잘거리던 공주는 뒤늦게 자신이 여왕을 알현 중임을 깨달았는지 말투를 바꾸었다.
“폐하, 공주께서는 외국 방문이 처음이십니다. 아는 분을 만나 기분이 들뜨신 것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민망함에 얼굴이 새빨개져 어쩔 줄을 모르는 공주를 대신해, 브라간사 공작이 나섰다.
“죄송해요, 폐하. 너무 반가워서…….”
“괜찮답니다. 오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내 남편이 지휘하는 군대가 떠나고 영 적적하던 차에 잘 오셨어요. 구면인 분도 계시다니 다행이에요. 리세우 공께서 공주를 많이 도와주세요.”
외국의 어린 왕족에게 유치하게 발끈할 수는 없다. 하지만 레이테는 ‘내 남편’이라는 말에 실리는 힘을 조절할 수 없었다.
“피곤하실 텐데 우선 쉬시지요. 시종장이 거처를 안내해 줄 거예요.”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 * *
리리우 일행이 알현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프란세스크는 여왕의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십수 개의 살벌한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송구합니다, 폐하. 공주의 말은 오해로서…….”
“당연히 오해여야지요. 남편의 과거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왕족의 결혼은 국가 사이의 거래다. 질질 끌기는 기본이며 파혼도 잦다.
레이테도 마찬가지였다. 지루한 계산 끝에 에르난을 택했다.
그와 결혼하기로 결정하기까지 숱한 남자의 값을 따졌다. 가끔은 진지하게 혼담이 오가거나 그런 척을 했다.
헤젤의 왕도 거래 상대 중 하나였다. 물론 레이테는 차라리 독신으로 살지언정 그와 결혼할 마음은 절대 없었다.
에르난 또한 마찬가지였으리라. 하지만 레이테가 아는 한, 그는 다른 여성과 결혼을 약속한 일이 아예 없었다.
“일단 말씀하시지요.”
“아시겠지만, 바르시나와 헤젤의 해상권 다툼이 최근 몇 년 사이 잦아졌습니다.”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젤 선박과 장사꾼은 바르시나가 구축한 바다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무법자였지요. 그때 폐하의 남편께서는 바르시나령 섬의 총독이셨습니다.”
여왕에게 말하는데 장사꾼이라니. 프란세스크가 얼마나 헤젤을 싫어하는지 알겠다.
“헤젤의 횡포가 심해지자 폐하께서는 직접 토벌에 나섰습니다.”
“아, 에르난이 꽤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지요? 헤젤 왕족과 직접 만나 협상도 했고요.”
“네. 당시 헤젤의 왕위 계승자였던 주앙 왕자를 만났습니다. 리리우 공주는 그의 딸이지요.”
“협상 때 공주와 연이 닿아 결혼을 약속했나요?”
레이테의 눈이 가늘어졌다.
“주앙은 원래 가족과 휴가를 즐기고 있었는데, 사태를 전해 듣고 급히 바르시나에 협상을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왕자의 가족을 만났습니다.”
“평화를 위한 결혼 제안쯤이야 당연하게 나왔겠네요. 괜찮아요. 다 그런걸요, 뭐.”
“실은……, 리리우 공주의 동생, 주앙의 막내딸과 이야기가 오갈 뻔했습니다. 네 살이었지요.”
‘헤젤은 왜 죄다 저런 식이야?’
기가 막혔다. 육십이 넘은 국왕은 레이테에게 청혼했고, 겨우 네 살짜리 어린아이는 에르난에게 보내려 했다. 아무리 왕족의 결혼은 정략이 최우선이라지만 지나쳤다.
“너무 어리다. 차라리 큰딸이면 모를까. 에르난은 이런 식으로 반응했겠네요.”
“네. 그때 리리우 공주는 열 살이었습니다.”
“그 나이면 결혼 이야기가 나올 만은 하네요. 왕족이니까.”
레이테가 빈정거렸다.
“이후 의례적으로 몇 번 이야기가 오갔습니다만, 주앙 부부가 전염병으로 사망하면서 흐지부지되었지요. 약혼 같은 일은 절대로 없었습니다.”
프란세스크는 ‘절대로’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러면 공주는 왜 에르난을 약혼자라 말하나요?”
“보셨다시피 아직도 한참 어립니다. 제멋대로에 몽상가적인 기질도 있는지라, 의례적인 일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모양입니다.”
공주의 치기 어린 행동이라는 뜻이다. 사크틸라의 귀족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이유도 없이 저런 말을 합니까? 대체 바르시나의 왕자께서는 어떻게 처신하셨던 겁니까?”
“의도가 어떻든 대단한 실례요!”
“뭘 숨겼습니까?”
당황한 얼굴로 귀족들을 살피던 프란세스크는 소란이 잦아들고서야 간신히 말했다.
“송구합니다. 하지만 돈 에르난께서는 당시 일을 기억도 못 하실 겁니다. 리리우 공주의 성향도 모르고요. 두 분은 가족과 참모들이 모두 모인 곳에서 딱 한 번 만났을 뿐입니다.”
“공께서는 공주와 잘 아는 사이인가 봐요?”
“……그렇습니다.”
프란세스크는 잠시 망설이다가 순순히 시인했다.
“돈 에르난을 대신해 제가 공주를 여러 차례 만났습니다. 폐하께서는 여성과 얽히는 일을 기피하시는지라……. 그래서 중요한 일이 아니면 제가 대신 상대하기 마련이었습니다. 아, 여성과의 연애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폐하께서는 연애에 관심 없으셨지요.”
여왕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녀를 비롯한 모두가 에르난의 과거를 의심하기 바쁜데, 그는 혐의가 없다 못해 기억조차 못 할 일이라니.
더군다나 연애에 관심 없다는 말은 놀라웠다. 남편은 레이테를 만나자마자 그녀를 탐했고, 늘 안지 못해 안달이었으니까.
문득 결혼식 날 밤, 지조를 말하던 남편이 떠올랐다.
‘진짜였나 보네?’
잡생각에 빠지기도 잠깐, 여왕은 질문을 계속했다.
“공주와 구면이라면, 혹시 브라간사 공작과도 만나 보았나요?”
방금 처음 본 사람이지만 영 불길한 쪽으로 신경 쓰였다.
“예, 공작도 협상에 참여했습니다.”
“어떤 사람인가요? 아무래도 공주보다는 그쪽이 상대하기 까다로워 보이는데.”
“문제의 혼담을 제안했던 사람이 브라간사입니다.”
이런 불길함이었나.
“헤젤에서 유명한 용병대장입니다. 왕의 조카고 주앙과도 친해 보였습니다.”
인상이 강하다 싶었더니 왕족이었다. 확실히 그가 사절단의 실질적인 대표 역할일 것이다.
그때, 작은 목소리가 레이테의 귀를 건드렸다.
“용병대장? 혹시…….”
머리가 하얗게 센 원로 귀족, 오켈리스 공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요?”
“브라간사의 인상이 낯익어서 계속 생각했습니다만, 용병대장이라는 말을 들으니 돈 하이메……, 선왕 폐하의 사촌이 떠오르는군요.”
처음 듣는 이야기다. 레이테는 다시 불길함에 사로잡혔다.
“그분도 용병대장이었는데, 헤젤의 왕족과 결혼 후 군인 생활을 관두고 헤젤의 시골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더군다나 선왕께서 승하하셨을 때와 비슷한 시기에 작고하였던지라 왕실에서 신경 쓸 여유도 없었고요. 오래전 일이라 기억하는 이도 드물 겁니다.”
귀족 몇이 수군거렸다. 모두 나이 든 이들이었다.
“그러면 공께서는 브라간사가 사크틸라 왕실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습니다만, 추측일 뿐입니다, 폐하.”
생각지도 않던 친척의 존재라니, 레이테는 신기하면서도 불안했다.
그녀가 알던 유일한 친척, 숙부는 여왕의 적이다. 그는 레이테만 없다면 자신이 왕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브라간사가 왕실 혈통이라면, 그도 설마 비슷한 생각을 할까? 모를 노릇이다.
“공주 때문에 당황한 바람에 제대로 대화도 못 나눴네요. 다시 만나면 이야기해 봐야겠어요. 친척이 왔다면 반가운 일이니까요.”
여왕은 화사하게 웃었다. 꺼림칙한 감정을 억지로 지운 그녀는 다시 프란세스크를 바라보았다.
“리세우 공, 공께서 공주 일행을 책임지고 돌려보내세요.”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여왕이 단호하게 명했으나, 프란세스크는 즉답을 망설이는 눈치였다.
‘나한테는 명령할 권한이 없다는 뜻인가?’
그는 에르난과 바르시나를 섬긴다. 레이테와 사크틸라를 섬기는 이가 아니다. 심지어 부부는 아직 상대방 나라의 왕이 되지도 않았다.
“에르난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같은 명령을 할 것 같은데요, 바르시나의 손님.”
여왕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답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 *
토벌군의 보고는 끊임없이 부르고로 들어왔다.
레히오의 점령도, 북서쪽 퇴각로를 막는 아르파 공작의 작전도 모두 계획대로 성공했다.
그러나 우려하던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탐브레는 에르난 측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자신의 거점을 포기하고 산악 지대로 도망쳐 버렸다.
후방인 부르고는 평화로웠다.
‘여왕이 수상한 일을 한다거나, 부르고에 변고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아. 그래도 동향은 살펴야겠지. 무엇보다 자네가 레이테를 호위한다면 안심이야.’
에르난은 이런 이유로 프란세스크를 부르고에 남겨 두었다.
여왕의 일상은 분주하고도 규칙적이었다. 에르난만큼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을 그녀는 부족한 경험을 만회하려는 듯 무척 성실했다.
프란세스크는 할 일이 없었다. 에르난이 자신에게 휴가를 주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딱 어제까지만.
“프란세스크 공이 있어서 다행이야. 실은 사크틸라어가 아직도 어렵거든.”
여왕은 바르시나인에게 무시당했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프란세스크가 그녀의 명령이 내키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리리우 공주. 5년 사이, 그녀는 오로지 키만 자란 것 같았다.
“여왕님이 헤젤에 와 주시면 좋았을 텐데. 왕궁에 여자가 적어서 좀 외롭거든. 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참, 두 분을 꼭 함께 만나 뵙고 싶어. 무지 잘 어울리실 것 같…… 저기, 듣고 있니?”
“예……, 굉장히 잘 어울리십니다…….”
프란세스크는 자신의 외국어 능력에 절망했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귀에 쏙쏙 잘도 들어왔다.
“아름다운 여왕님에 비해, 이곳은 너무 삭막해 보여서 아쉬워.”
“여기는 요새입니다, 전하. 사크틸라는 내전 중이고요.”
공주의 말투도 거슬렸다. 여왕마저 대귀족인 프란세스크를 존중해 경어로 말하는데, 이 공주는 예의를 모른다.
에르난을 대신해 조금 어울려 주었더니 자신을 완전히 친구, 아니 종자 취급한다.
하지만 불청객이라 해도 외국의 사절, 더군다나 왕족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전하, 저는 여왕 폐하를 수행해야 합니다. 이전처럼 온종일 전하와 함께할 수는 없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괜찮아, 괜찮아. 바쁜 일도 없는걸.”
‘바쁘지 않다?’
헤젤에서 사절을 보낸 명분은 일단 결혼에 대한 항의였다.
‘그 터무니없는 말이 항의의 전부였을 줄은 몰랐지만…….’
모두를 경악시켰던 ‘항의’ 이후, 리리우는 오히려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여왕 부부에 대한 흥미만을 드러냈다.
어차피 실제 목표는 사크틸라의 정세 파악일 것이다.
“이곳도 공격받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전하께도 화가 닥칠 수 있으니 되도록 빨리 귀국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별 탈 없이 금방 끝날 거랬어.”
“어느 분께서 말씀하셨는데요?”
프란세스크는 공주와 대화하면서 수시로 브라간사를 살폈다. 그는 차분하게 공주의 옆을 따를 뿐이었지만, 프란세스크가 질문할 때에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할아버님께서. 그러니까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될까? 응?”
리리우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떠들기만 바빴다. 프란세스크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여왕의 시녀가 보였다.
여왕은 친척일지도 모르는 자에 대한 궁금증을 바로 해결할 모양이다.
“브라간사 공작 각하, 여왕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브라간사만 부른다는 말에 리리우가 의아한 듯 눈을 깜박였다. 프란세스크가 잽싸게 나섰다.
“전하, 어차피 실무는 브라간사 공의 담당이지 않습니까?”
리리우는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대놓고 그래 보여?”
“당연하지요…….”
어느 누가 이 어린 공주를 외교관으로 상대하려 할까.
“공작께서 폐하를 뵙는 동안, 요새 아래의 부르고 시가지를 구경하러 갈까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리리우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020
“폐하, 브라간사 공작이 왔습니다.”
웃음소리를 내며 남편의 편지를 읽던 레이테는 그것을 책상에 내려놓고 일어났다.
집무실에 들어온 브라간사가 여왕의 손등에 입 맞춰 인사했다. 절도 있는 동작이 과연 군인다워 보였다.
시종이 여왕의 맞은편에 의자를 놓고 나갔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네요.”
“송구합니다, 폐하.”
“괜찮아요. 공주께서는 무얼 하고 계시나요?”
“리세우 공작의 안내로 시내를 구경하러 가셨습니다.”
남편의 친구는 눈치가 좋았다. 공주가 불쑥 끼어드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아예 데리고 나가다니, 탁월한 기지다.
“부르고는 아름다운 곳이지요. 여유 있을 때 공께서도 둘러보고 오세요. 특히 대성당은 반드시 보셔야 해요. 천국을 엿보는 기분이 들 만큼 환상적이랍니다.”
“예, 꼭 방문하겠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면 국왕 폐하께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저도 에르난과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답니다.”
레이테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어지는 말은 도저히 상대를 마주 보며 할 자신이 없었다.
“에르난과 만난 순간, 뭐랄까……, 그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슴이 너무 뜨겁게 불타올라 견딜 수 없었어요. 저도 제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답니다. 지금도 에르난이 너무 보고 싶고…….”
말끝을 흐린 여왕은 고개를 더 숙이고 수줍은 모습을 보였다. 손가락은 눈가를 살짝 훑어서 있지도 않은 눈물을 닦는 척했다.
정말로 수줍기는 했다.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니까.
‘젊은이 둘이 만나 서로 눈에 불꽃이 튀었다는데 늙은이가 어떻게 말립니까?’
헤젤이 항의하면 대주교는 이런 식으로 둘러대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없다. 결국 레이테가 대신 사용하게 되었다.
아무렇게나 말했지만 꽤 그럴듯했다. 그래서 더 민망했다. 남편 없이 혼자서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에르난과 함께라면 훨씬 어색하지 않을 텐데. 레이테는 그가 간절히 보고 싶어졌다.
“이해합니다. 저도 겪어 봤으니까요.”
브라간사의 반응은 의외였다. 저런 남자가? 레이테는 눈을 치켜떠 그를 바라보았다.
반듯하게 앉은 공작의 침착한 얼굴에서는 감정을 읽기 힘들었다. 차분한 분위기는 금욕적이기보다는 감정에 아예 관심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부인을 무척 좋아하시는군요.”
“아닙니다. 예전에 교제하던 아가씨와의 일입니다. 저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아…….”
브라간사는 무덤덤하게 답했지만, 레이테는 분명히 살짝 떨리는 그의 눈을 보았다. 그의 짙은 눈은 심연을 보는 듯했다. 빠져나오지 못해 결국은 질식하고 말 늪.
무언가 어색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아 참, 제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숨 막힌다. 레이테는 책상 한쪽에 준비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물은 미지근해서 썩 개운하지 못했다.
“혹시 공의 부친은 사크틸라 왕가 출신인가요?”
뜬금없이, 영 세련되지 않게 말을 꺼내고 말았다. 레이테는 자신이 긴장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의 존재 따위 솔직히 반갑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 레이테에게 가족이란 고통일 뿐이었다.
따라서 최근에 맞이한 ‘새 가족’ 또한 안심할 수는 없다. 잠시 남편을 그리워하던 마음이 천천히 식어 갔다.
“네. 선친께서는 알레한드로 2세 폐하의 사촌 동생입니다.”
레이테의 눈이 커졌다. 알레한드로 2세는 여왕의 아버지였다.
“공과 저는 꽤 가까운 사이였네요.”
아니다. 아버지 사촌의 아들이라면 썩 가까운 친척은 아니었다. 하지만 알레한드로라는 이름을 들으니 브라간사와의 거리는 멀면서도 가까운, 이상한 느낌이 되었다.
“선왕 폐하를 직접 뵌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잠시 과거를 떠올리는 듯, 브라간사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선왕 폐하와 선친께서는 친형제처럼 막역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선친께서 헤젤에 정착하고서도, 폐하께서는 사촌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여러 기념일마다 그분의 선물과 편지를 받았지요. 어린 시절 가장 즐거웠던 기억입니다. 선왕께서는 먼 친척인 저조차 살뜰히 챙겨 주셨습니다. 여왕 폐하께는 더 다정다감하셨겠지요.”
“어, 그건…….”
여왕에게는 부모와의 추억이 전혀 없었다.
시스로네스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딸을 무척 사랑했다. 하지만 한두 살 때의 일을 떠올리기는 무리였다. 심지어 어머니는 산욕열로 사망했기에 기억 자체가 없다.
“저를 아끼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하지만 자세한 기억은……, 아시다시피 워낙 제가 어릴 때 떠나셔서…….”
레이테는 말끝을 흐렸다.
낯선 인물에게 혈육의 낯선 이야기를 듣는 기분은 생경했다. 선왕은 레이테의 아버지지만, 그녀보다 브라간사가 아버지와 훨씬 가까운 사이처럼 느껴졌다.
‘더 가깝다……?’
묘한 불쾌함과 함께, 레이테는 어느덧 바뀐 브라간사의 태도가 신경 쓰였다. 추억을 그리며 미소를 품은 얼굴 아래, 반듯했던 군인의 자세는 흐트러져 있었다.
여왕의 앞에서 보일 태도는 아니었다. 그는 조금 건방져 보일 만큼 등을 의자에 편히 기댔다. 여유롭게 꼰 다리는 거만해 보였다. 왼손은 칼자루 끝에 얹었고 검지를 까딱까딱 움직였다.
레이테의 눈이 그곳에 고정되었다.
‘어째서 칼을 가지고 들어왔지?’
군주를 만날 때 칼을 패용할 수 있는 이는 극히 제한된다. 레이테의 기준은 특히 더 엄격했다. 헤젤의 왕족도, 여왕의 친척도 상관없다. 모두 불가능했다.
상념에 잠겨 있던 브라간사는 뒤늦게 여왕의 시선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그는 칼에서 손을 떼고 허리를 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죄송합니다, 폐하. 옛이야기를 하다 보니 긴장이 풀린 바람에…….”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지요. 저는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라서 재미있었답니다.”
여왕은 부드럽게 웃으며 사과하려는 그를 만류했다. 아무것도 보지 않은 체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참, 혹시 공께서는 이 사실이 알려지면 불편한가요? 그렇다면 가족끼리의 비밀로 해 두겠어요. 여태 사크틸라에 공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니, 신기하네요.”
“아닙니다. 상관없습니다. 다만 부모님의 가문을 강조하며 거들먹거리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또한 저는 사크틸라 왕실의 피를 받았다고 해도 헤젤에서 태어나 헤젤인으로 자랐습니다.”
“……그렇군요. 사크틸라에서 좋은 시간 보내고 돌아가시기를.”
여왕이 대화를 마치려는 기색을 내보이자 브라간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깔끔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모습에서 조금 전의 꺼림칙함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 * *
프란세스크는 해가 다 지기 직전에야 간신히 공주를 데리고 성으로 돌아왔다.
거대한 시가지와 화려한 건물에 감탄한 리리우는 쉴 새 없이 떠들었고, 프란세스크는 일일이 대답해 줘야만 했다.
완전히 지친 그는 처소로 들어가 쓰러지고 싶었다. 하지만 헤젤의 손님을 위한 만찬회에 참석해야 한다. 공주를 또 만난다니,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연회에 앞서 프란세스크는 여왕을 찾아갔다. 공주는 여왕의 결혼 문제를 더 따지지 않았으며, 헤젤의 왕은 내전의 속결을 예측한다는 이야기를 전해야 했다.
“생각보다 헤젤은 뒤끝이 없네요. 이미 결혼했으니 뭘 더 어쩌겠냐는 식인가요? 그리고 내 남편의 승리는 당연해요.”
레이테가 빈정거렸다. 프란세스크는 ‘헤젤스럽다’라는 사크틸라어 단어를 떠올렸다. 구질구질하다, 끈질기다, 지독하다는 뜻으로, 사실상 비속어다. 국경을 맞대고 끊임없이 싸워 온 두 나라 사이 감정의 골이 느껴지는 표현이었다.
여왕 대에 들어서는 아직 전쟁이 없었다. 그럼에도 사크틸라인 사이에 퍼진 당연한 인식을 여왕도 가진 모양이다.
“아무튼 공주 일행은 그저 오래 붙어 있으며 사크틸라를 살피려는 수작 같습니다.”
프란세스크의 말투는 조금 거칠었다. 리리우에게 내내 시달렸더니 도저히 곱게 말할 수가 없었다.
“좋아요. 급하게 쫓아낼 필요 없이 푹 쉬다 가라고 하지요. 그쪽에서 원하는 대로, 에르난이 사크틸라의 공동왕으로 선포되는 모습을 반드시 보여 준 다음 고국으로 돌려보내겠어요. 어린 공주에게 적국의 감시를 맡긴다니, 도대체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왕입니다. 에르난과 결혼하길 정말 잘했어요.”
프란세스크는 지금의 여왕이야말로 ‘헤젤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척해도 약혼자 운운하는 리리우의 말에 많이 놀랐던 탓일까.
“헤젤의 왕마저 에르난의 승리를 장담하는군요. 공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왕의 판단이 옳습니다. 돈 에르난은 당연히 반역자의 목을 폐하께 바치실 겁니다.”
“글쎄, 목보다는 생포가 좋은데요. 청산해야 할 일이 많은지라. 아무튼 에르난이 빨리 돌아오면 좋겠어요. 공주가 우리 부부를 궁금해하니, 어서 보여 주고 싶네요.”
헤젤스럽다. 헤젤의 적대국의 여왕이야말로 헤젤스럽다.
동시에 미심쩍은 면도 있었다. 프란세스크가 지켜본 여왕은 감정을 무의미하게 낭비하지 않으려 애쓰는 여자였다.
그가 공주를 상대하는 동안, 여왕은 브라간사를 만났을 것이다. 무언가 일이 있었나? 그녀가 보이는 다소 과장된 반응은 마치 무언가를 숨기거나 잊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아, 이것을 읽어 볼래요? 오늘 받은 에르난의 편지예요. 꽤 귀여운 내용이라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네요.”
에르난은 프란세스크에게도 간간이 편지를 보냈다. 보통 ‘궁지에 몰린 탐브레가 여왕에게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라’는 정도의 간략한 글이었다.
아내에게 보낸 글은 어떨까? 그는 여왕이 건넨 편지를 받아들었다. 곧, 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써야만 했다.
나의 부인, 레이테 여왕 폐하께
잘 지내고 계십니까? 빠른 답장이 무척 기뻤습니다.
햇볕 아래의 갑옷이 덥지 않으냐던 출정하던 날의 질문, 혹시 기억하십니까? 다행히 햇볕 문제는 없습니다. 이곳 하늘은 늘 흐리거든요.
대신 습기라는 새 적을 만났습니다. 수증기로 꽉 찬 거대한 목욕실 안에 갇힌 기분입니다.
진짜 목욕실이라면 갑옷을 벗고 제대로 목욕이라도 한번 하고 싶습니다만,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군이나 적군이나 치고 빠지는 식으로 작은 싸움을 반복하니 쉴 틈이 없습니다.
몸은 고단하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안전을 염려하여 붙여 주신 훌륭한 참모 덕택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분께서는 제가 전쟁에 처음 참여하는 초보자인 줄로 착각하는 일이 잦습니다만……, 기본은 언제나 중요하니까요.
어린 시절, 제 고해 사제는 교리서를 달달 외우기 전까지 절대 저를 잠재우지 않았지요. 그 일이 떠오를 만큼 감동적인 가르침입니다.
병법을 성직자에게 배운다니 뭔가 이상하지만, 당신에게 승리를 안겨드리기 위해서라면 그쯤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저, 배움의 감동이 아닌 재회의 감동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당신의 남편, 에르난으로부터
화려한 수식어로 그리움을 호소하는 편지일 줄 알았더니, 그런 표현은 기대보다 담백했다.
편지의 주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시스로네스에 대한 불만이다.
“혹시 공에게는 좋은 생각이 있을까요? 그동안 열심히 대주교를 관찰해 왔잖아요.”
레이테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물었지만 프란세스크는 긴장했다.
그가 누구를 감시했는지 여왕은 안다. 사실 모른다면 더 이상할 일이지만, 직접 지적당할 줄은 몰랐다.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대주교는 폐하의 배우자이신 분을 대단히…… 업신여깁니다.”
직설적인 표현이지만 레이테는 불쾌한 낯을 보이지 않았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 시스로네스 대주교는 사크틸라에 큰 도움이 될 유능한 사람입니다.”
‘관찰’을 통한 판단이다. 그 뜻을 알아차렸는지 레이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서 두 사람이 전장에서 함께하는 편이 서로를 알고 신뢰를 쌓기에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에르난은 조금, 아니 많이 괴로워하는 것 같지만요.”
여왕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021
새벽부터 흩뿌리기 시작한 비는 정오가 넘자 폭우가 되었다. 숲 너머에서 기회만 노리던 반란군은 결국 철수했다. 에르난도 한숨을 내쉬며 퇴각을 지시했다.
이런 날씨 속의 전투는 누구에게도 반갑지 않다. 더군다나 탐브레는 병력이 부족하니 더 신중히 아낄 필요도 있을 테고.
투구의 좁은 구멍으로 빗물이 자꾸 흘러들어 온다. 에르난은 눈을 계속 깜박였다.
말을 빠르게 달려 진영으로 먼저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피곤했다. 하지만 뒤따르는 보병과 속도를 맞춰야 한다.
“각하.”
가만히 있으면 졸 것 같다. 에르난은 그의 옆에서 말을 모는 시스로네스를 불렀다.
비와 추위에 지쳤을 텐데도 대주교의 꼿꼿하게 세운 허리와 날카로운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십자가가 달린 사슬 목걸이만 짤랑거릴 뿐이었다.
그는 에르난을 슬쩍 흘겨보았다. 무례한 반응이지만 에르난은 화내기도 귀찮았다.
“여왕은 참전 경험이 있습니까?”
대주교의 보랏빛 망토와 둥근 모자가 비에 완전히 젖어 갑옷과 머리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갑옷 입은 성직자라니. 에르난을 비롯한 바르시나인은 대단히 놀랐다. 하지만 사크틸라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사실 시스로네스에게 대단히 잘 어울리기도 했다.
“꽤 가혹하십니다, 폐하. 아무리 이 나라에 전쟁이 잦았다지만 어린 소녀를 무작정 전장에 끌고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래야 할 정도로 큰 충돌도 없었고요.”
“레이테는 성인이 된 지 오래입니다. 이제는 결혼까지 했고.”
“운신이 비교적 자유롭던 시절의 폐하께서는 너무 어리셨습니다. 물론 그때도 간혹 감금생활은 있었습니다만……. 성년이 되시고는 탐브레의 감시가 워낙 심해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폐하와의 결혼도 2년이 걸렸잖습니까?”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시스로네스의 답은 일견 타당했다. 하지만 에르난은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빗물이 계속 들어오는 눈을 자꾸만 찌푸렸다.
* * *
자신의 막사로 돌아온 에르난은 시종이 다가오기도 전에 투구부터 벗어 던졌다. 이제야 숨이 트인다.
갑옷의 틈새로 스며든 빗물과 땀이 섞여 온몸이 엉망이었다. 말을 탔기에 땅을 직접 밟을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발치에 흙탕물이 적잖게 튀었다.
갑옷의 탈의를 마치자 시종이 재빨리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고 두꺼운 외투를 덮어 주었다. 다른 시종이 에르난에게 따뜻하게 데운 포도주를 건네며 말했다.
“여왕 폐하의 전령이 기다립니다.”
에르난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그가 손을 까딱이자 전령관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전령의 외투에는 여왕의 문장이 수 놓여 있다. 결혼했으니 남편의 문장이 함께 놓여야 하지만, 이런 데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는 듯했다.
사크틸라 왕실에서 에르난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증거 같아서, 에르난은 전령을 볼 때마다 썩 유쾌하지 않았다.
“사크틸라 왕국의 여왕, 톨도스, 레히오, 갈리사, 이스팔리스, 코르두바의 여왕, 바다호스의 여공작, 요르헤와 다림의 영주이시며 이베로 반도의 주인이신 도냐 레이테 여왕 폐하께서 부군인 지로나 대공, 몽트블랑 공작, 세르베라 백작…….”
“피곤하니 용건만 간단히 말하게.”
에르난은 전령의 말을 잘랐다. 주렁주렁 달린 칭호를 듣고 있자니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그는 당장 한숨 자고픈 심정이었다.
“……여왕 폐하의 서신입니다.”
편지를 읽으면서, 에르난의 지친 눈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편지에는 헤젤의 공주, 리리우가 찾아온 일이 적혀 있었다. 에르난이 자신의 약혼자였다고 주장했으나 프란세스크의 해명으로 그것이 공주의 일방적인 오해였음이 증명되었다는 짤막한 설명이었다.
‘리리우, 리리우가 누구였더라.’
에르난은 잠시 옛일을 떠올렸다.
마냥 가족에게 예쁨 받던, 전쟁 따위는 전혀 모르는 어린 소녀가 흐릿하게 머릿속을 스쳤다. 정확한 생김새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반면, 차게 웃으며 에르난을 노려볼 아내는 보지 않아도 선명히 눈앞에 그려졌다.
피부는 창백해지고 은빛 머리카락이 칼날처럼 살기등등한 기운을 내뿜는다. 목소리만은 부드러울 테니, 균형이 전혀 맞지 않아 더 음산한데도 아름답겠지. 그녀는 매몰차게 남편을 추궁하다가 결국 또 침실 밖으로 쫓아낼…….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에르난은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너무 멀리 나갔다.
글 자체는 행간에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어 무미건조했다.
무감정 또한 하나의 감정 표시라 할 수 있다. 레이테가 직접 쓴 편지는 그 내용이 좋든 나쁘든 글만은 늘 상냥했으니까.
면목이 없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마저 읽던 에르난의 눈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시종을 불러 명했다.
“대주교를 모셔오너라.”
* * *
백발이 머리를 제법 덮어 가는 성직자는 일단 대놓고 에르난을 조롱했다.
“상식도 예의도 생각도 없는 헤젤을 상대하느라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폐하.”
대주교는 편지를 읽다 말고 에르난을 쏘아보았다. 민망해진 에르난은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에르난이 레이테와 떨어진 지, 그러니까 대주교와 함께한 지도 한 달이 넘었다. 에르난은 그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군사에 대한 관심도 식견도 상당하다. 반백 년을 넘게 살았지만 실제보다 열 살은 더 젊어 보이는 기백을 내뿜는다.
그러나 건강 상태는 열 살 더 늙은 듯 엉망이다. 지금도 추위에 몸이 꽤 고단한지, 도톰한 외투를 겹겹이 두른 채였다.
또한 여왕이 없는 곳에서는 언어 표현에 거침이 없었다. 주로 부정적인 면에서.
“하마터면 이 땅의 왕관을 불량품에게 씌워 줄 뻔했군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만.”
“그렇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불량품이 될 뻔했지 진짜 불량품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언제 어디서 하자가 생길지…….”
차라리 오늘은 쉬고 내일 상대할걸. 에르난은 잠시 후회했다.
“어쨌거나.”
“어쨌거나 같은 식으로 대충 넘길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여왕의 반려시여.”
대주교는 탁 소리가 크게 나도록 편지를 탁자에 내려놓고 눈을 부릅떴다.
“헤젤과 결혼이라! 그대로 실현만 되었다면 좌우에서 사크틸라를 압박할 수 있으니, 폐하께서는 이 나라를 집어삼키는 패왕이 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다음은 별로 밝은 전망을 내릴 수 없어 유감이로군요. 음험한 헤젤의 왕이 폐하의 목을 언제 칠지 모르니, 불면증에 시달리실 겁니다.”
에르난은 이를 악물었다. 대주교의 판단은 정확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에르난은 헤젤과의 혼사를 흐지부지 넘겼다.
사크틸라의 여왕이라면 자신의 힘으로 제어할 자신이 있었다. 젊고, 경험이 부족하고, 약하고, 무엇보다 궁지에 몰린 여자니까.
그러나 헤젤의 늙고 교활한 왕은 무리다.
“그래요, 말씀이 다 옳습니다. 내 처신이 확실치 않아 생긴 문제니 사과해야 할 텐데, 사과는 당신이 아니라 내 아내에게 해야겠지요. 그러니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가 아니라, 현실적인 미래를 이야기합시다.”
“아, ‘어쨌거나’라고 하시던 그겁니까. 말씀하시지요.”
여전히 추운지, 외투의 여밈을 조이는 시스로네스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러나 빈정거리는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일단 편지를 마저 읽으십시오.”
곧, 에르난은 핏기가 빠르게 사라지는 대주교의 얼굴을 보았다.
“여왕의 가족이 탐브레 한 사람만 남은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봅니다?”
브라간사 공작을 만난 이야기였다. 헤젤 왕의 조카인 공작은 사크틸라 왕실의 방계 혈통이다. 그의 아버지는 선왕의 사촌이다.
“…….”
시스로네스는 다 읽은 편지를 내려놓고도 한참 말이 없었다.
“우리는 레이테의 유일한 줄 알았던 가족을 없애려고 이 고생 중입니다만, 혹시 브라간사에게도 왕위계승권이 있습니까?”
레이테는 리리우만큼이나 브라간사도 간결하게 설명했다. 사실, 간결함이 지나쳐 보였다.
건조하고 간결한 편지. 아내는 불안해한다.
탐브레를 없애면 끝날 줄 알았는데, 어쩌면 다음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왕위계승권자가 왕에게 반기를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브라간사는 용병대장, 자신이 훈련한 병사를 가진 사람이다. 군사적 역량이 형편없는 탐브레와 달랐다.
“두 분 폐하 사이 아직 자녀가 탄생하지 않았으니, 없다고 말할 수는 없…… 아니, 있습니다.”
에르난을 사납게 몰아붙이던 기백은 어디로 갔는지, 시스로네스는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에르난은 그에게 단순히 조언을 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주교는 무언가 복잡한 마음인 듯했다.
“저는 물론이고 레이테도 몰랐으며, 심지어 대다수의 귀족도 몰랐던 일 같은데, 각하께서는 어쩐지 뭔가 아는 기색입니다?”
“……저는 선왕 폐하를 섬기기 위해 수도원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때는 이미 브라간사의 부친이 헤젤로 떠난 후입니다만, 선왕 폐하께서는 꾸준히 그분을 챙기셨습니다.”
아직 말할 거리가 남아 보이는데, 시스로네스는 입을 다물었다. 에르난은 그를 추궁해야 할지, 가만히 기다릴지 고민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서 쉬고 싶었다.
“피곤하실 테니 빨리 쉬게 어서 말씀을 마치고…….”
“탐브레는 폐하께서 직접 보았던 그……, 입에 담기도 싫은 소행 같은 짓만 한 게 아닙니다. 조카와의 결혼을 허락하는 교황의 특별 사면장을 얻기 위해 오랫동안 기를 썼지요.”
에르난은 작게 감탄했다. 레이테가 어떤 형태로 시스로네스를 통해 보호받았는지 짐작이 갔다.
대주교인 그는 사면장을 미끼로 탐브레와 적당히 협상하면서 조카와 숙부 사이의 거리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했을 것이다.
“그 일이 브라간사와 무슨 관련입니까?”
“브라간사도 여왕 폐하의 청혼자 중 하나입니다.”
“잠깐, 헤젤에서는 왕이 청혼했다 하지 않았습니까? 하긴, 늙은이보다 브라간사 쪽이 훨씬 현실적이기는 합니다.”
“공작은 외숙부인 왕 몰래 여왕께 청혼했습니다. 그리고 여왕과 공작은 친척이라 하나 그 관계가 멀어 근친혼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에르난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대주교의 말뜻을 금방 이해했다. 브라간사도 충분히 여왕과 결혼할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 어느 용병대장도 겁 없이 청혼했다더구나.’
대수롭지 않게 들었던 부왕의 말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여왕 폐하께서는 모르는 일이십니다. 폐하께 알리지 않고, 제 선에서 거절했습니다.”
어째서? 에르난은 묻고 싶었다. 그러나 피로에 쳐져 흐릿하면서도 단호하게 번뜩이는 눈이 질문 자체를 거부했다. 물어도 답하지 않을 것이다.
‘레이테를 다시 만나면 이야기해 봐야겠군.’
시스로네스는 그의 말을 곧잘 무시했지만, 여왕에게는 극진했다. 레이테가 강하게 요구하면 결국 입을 열 것이다.
“폐하, 브라간사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아니, 한 번 만났던 일이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헤젤 궁정의 소문은 모르시겠군요.”
에르난은 감탄했다. 여왕을 보좌하고, 탐브레와 줄다리기하느라 바빴을 텐데 헤젤에도 첩자를 심어 두었다니.
“소문이 뭡니까?”
후우, 시스로네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공작은 어떤 여자와의 결혼에 실패한 후, 서른이 넘은 지금도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약혼하거나 결혼한, 다른 이의 여자만 건드려 빼앗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소문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궁정에서는 유명하더군요.”
“뭐…….”
에르난은 당황했다. 그가 기억하는 브라간사는 모범적인 인상에 가까운 군인이었다.
여왕에게 청혼했던 공작은 부르고에 있다. 그곳에는 남편을 전장으로 보낸 여왕이 홀로 남았다. 에르난의 눈이 떨렸다.
“그 정도로 놀라면 곤란하십니다, 폐하. 정말 중요한 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탐브레가 사라지면, 또 만약 여왕 폐하께도 변고가 생기면 사크틸라의 왕위는 브라간사에게 갑니다. 그의 부친이 사크틸라에서 잊힌 존재이기에 여태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에르난의 낯빛이 굳었다.?
#022
여왕은 팔꿈치를 괴고 보고서를 읽는 데 집중했다. 큰 피해는 없으나 지지부진한 전황, 보고서의 악필, 여름의 끝이 보이지 않는 더위까지. 앉아만 있어도 힘들다.
풍성하게 펼쳐진 드레스를 벗어 버리고 싶었다. 아니면 슈미즈 같은 얇은 옷만 입고 싶다. 머리에 썼던 베일은 벗어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산간에서 반역자를 붙잡기는 무리였습니다. 따라서 아군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자 그를 동쪽으로 계속 몰아붙여 평지로 쫓아내려 합니다.
탐브레는 북부로 더 깊숙이 들어가거나 아예 국경까지 도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탐브레에게는 안타깝게도, 그곳 귀족은 이제 여왕 폐하의 편입니다.
산지를 빠져나오면 부르고 북서쪽 고원입니다. 근처 귀족의 지원과 함께 그곳에서 승부를 내려 합니다.
부르고와 멀지 않은 곳이니, 요새의 방비를 강화해 주십시오.
에르난이 출병한 지도 두어 달이 되어간다. 이미 승패는 갈렸다. 누가 보아도 승리는 시간문제였다.
답장을 적으려던 여왕의 손이 멈췄다.
툭. 이마에 맺힌 땀이 방울이 되어 떨어져 종이를 적셨다. 레이테는 책상 한쪽에 놓인 종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문이 열리고 조아나가 들어왔다. 그녀는 차가운 물수건으로 레이테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잠깐이나마 시원해서 좋았다.
“창문을 닫을까요, 폐하?”
“글쎄, 바람이라도 통하게…… 아니, 닫는 편이 낫겠어요.”
몇 시간째 집무실에 있지만, 바람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정오가 가까워지니 햇빛만 더 강해진다.
빛을 차단하는 나무 창문을 닫자 실내가 어둑해졌다. 조아나가 초에 불을 붙여 주고 나갔다. 여왕은 비로소 다음 보고서를 읽을 수 있었다.
깔끔하고 유려한 필적, 시스로네스였다. 보낸 날짜는 앞의 보고서에서 이틀이 지났다.
반란군을 밀어붙이며 작은 공격도 몇 차례 성공했습니다. 탐브레는 도망쳤으나, 애초에 지금 붙잡을 계획은 없습니다.
그는 남은 병력이 매우 적습니다. 곧 산지를 벗어나니, 감히 끝이 눈에 보인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제안 드리건대, 폐하께서 이곳에 오시면 어떻겠습니까? 탐브레는 여왕께 반역을 저지른 자입니다. 폐하께서 직접 그를 심판한다면, 대단히 상징적인 행위가 될 것입니다.
사크틸라의 승리는 사크틸라의 진짜 주인이신 여왕 폐하의 것이어야 합니다.
생각지도 않은 권유였다.
‘얌체 같기는 한걸.’
남편의 공을 낚아채는 행동이다. 괜찮을까.
사크틸라의 진짜 주인이 누구든, 실제로 전투를 지휘한 사람은 남편이다. 그는 북부의 습하고 변덕스러운 날씨와 거친 산세에 고생이 많다고 했다.
레이테가 여름용 드레스로도 더위에 시달리는 동안, 그는 비를 많이 맞아 고열 감기에 고생하기도 했다.
대주교의 염려가 무엇인지는 안다.
에르난은 여왕을 대신해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면 그는 레이테와 공동왕이 된다. 아무리 그의 권한을 제한하려 애써도, 자칫하면 정국의 주도권을 에르난이 완전히 장악할 수도 있다.
개선장군, 승리의 영웅은 레이테가 아니라 에르난이니까.
사크틸라는 유독 전쟁 영웅에게 열광한다. 전쟁으로 점철된 역사가 축적된 탓이다.
“……우욱.”
그 사실을 떠올리니 갑자기 속이 울렁였다.
펜을 쥔 오른팔이 찢어질 듯 아팠다. 레이테는 재빨리 펜을 손에서 놓고 팔을 거칠게 털어냈다.
통증은 가짜다. 왼손이 오른팔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상처는 어디에도 없다.
눈앞에서 흔들거리기 시작한 흐릿한 그림자도 거짓이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레이테는 한참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간신히 움켜쥔 손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닫았던 창문을 쾅 열었다.
숨이 트이고, 동시에 강한 햇빛이 그녀에게 내리꽂혔다. 레이테는 쏟아지는 빛에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가 또렷해지기도 전에,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먼저 그녀의 의식을 깨웠다.
서늘한 칼날이 여왕의 눈에 들어왔다.
* * *
프란세스크는 한 손으로 칼날을 받쳐 공격을 막았다. 그는 곧바로 검을 비틀어 상대를 넘어뜨렸다.
“와!”
리리우는 감탄하며 박수를 보냈다. 맨손으로 칼날을 쥔 프란세스크가 신기했다. 손이 칼에 베이지 않을까?
그는 멀쩡했다. 무언가 비법이 있는 모양이다.
“검술 대련이 재미있나요?”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은 리리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여왕 폐하!”
공주는 황급히 옷매무새를 추슬렀다. 옷 안으로 바람이 통하도록, 발목이 드러날 정도까지 드레스 자락을 올려 뒀기 때문이다. 레이테는 그 모습을 못 본 척하고 공주의 옆에 앉았다.
여왕이 등장하자 프란세스크와 병사들이 그녀에게 인사했다. 레이테는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뜻으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병사들은 다시 짝을 지어 검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프란세스크는 자신의 상대를 다른 이와 이어 주고 여왕과 공주에게 다가왔다.
“폐하.”
“집무실에서 창밖을 보니 병사들이 훈련하더군요. 재미있어 보여서 내려와 봤어요. 날도 더운데 열심이네요.”
“훈련을 게을리할 수는 없으니까요. 에르난도 성실히 연습했지요.”
“그는 검을 잘 쓰나요?”
레이테는 남편과 처음 만나 성을 탈출할 때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주의 깊게 관찰할 여유는 없었다.
프란세스크의 입가에 웃음이 크게 걸렸다.
“물론입니다. 제가 가르쳤는데 실력이 좋을 수밖에요.”
“우와! 검술 선생인 거야?”
리리우가 들뜬 목소리로 호들갑 떨었다. 원래는 공주 응대를 귀찮아할 프란세스크지만, 그는 공주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정식 사범은 따로 있었지만, 실질적인 스승은 저였다고 자부합니다.”
“나도 가르쳐 줘!”
“전하, 제발 좀……!”
그러나 뿌듯함은 순식간에 짜증이 되었다.
마음대로 내쫓을 수도 없는 타국의 공주는 이런 식으로 프란세스크를 자주 곤란에 빠뜨렸다. 검을 다루고 싶다면 자기 나라 사람에게 배우란 말이다!
“브라간사 공께 배움을 청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는 뛰어난 군인인 데다 전하의 친척이잖습니까.”
“으으, 그 사람은 좀 어려워서……, 아!”
답을 망설이던 리리우가 화들짝 놀랐다. 연습용 검을 손에 쥔 브라간사가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전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 아냐. 그냥…….”
공주가 머뭇거리자 프란세스크가 대신 말했다.
“전하께서 검술에 관심이 있으시더군요. 고국에 돌아가시면 좋은 사범을 구해 주십시오. 공께서는 잘 아실 것 같군요.”
브라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우는 투덜거렸다.
“흥, 그러면 한참 기다려야 하잖아.”
이제 공주는 늦게 돌아갈 계획을 숨기지도 않았다. 프란세스크는 그녀의 빠른 귀국을 부탁하고픈 마음에 여왕을 바라보았다.
여왕의 얼굴에 엷고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 있었다. 하지만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 있었다.
고개는 프란세스크와 리리우를 향했으나 시선은 멍하니 허공에 흩어졌을 뿐이었다. 목걸이의 보석에 지지 않고 빛나던 동공이 흐릿했다.
“폐하?”
브라간사가 부르자 레이테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어느덧 자신의 앞에 나타난 공작에게 습관처럼 팔을 내밀었다. 공작이 여왕의 손에 입 맞추어 인사했다.
“무슨 일이지요?”
레이테가 물었다. 평소와 비슷한 부드러운 목소리지만 살짝 떨렸다.
“공주께서 연병장에 계신다기에 왔습니다.”
“그렇군요. 공께서는 군인으로서 사크틸라 병사들이 어때 보이나요?”
브라간사는 대련에 바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가 답했다.
“교본에 충실하군요.”
칭찬인지 아닌지 애매했다.
“폐하, 마침 브라간사 공도 왔으니 말씀드립니다. 공주의 귀국 날짜를 논의하고 싶습니다.”
프란세스크가 말했다. 레이테는 ‘남편을 보여 주고 말 테다’라고 말했지만, 시달림에 지친 그는 하루빨리 공주 일행을 헤젤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에르난에게 받은 밀명 때문에라도 더더욱.
“돌아간다는 소리는 안 했어!”
“전하, 진정하십시오.”
브라간사는 차분하게 공주를 타일렀다.
‘저 멀쩡하고 엄격하게 생긴 낯짝의 취미가 남의 여자 가로채기라니.’
브라간사가 여왕을 건들지 않게 감시할 것. 설마 이런 명령을 받을 줄은 몰랐다.
리리우는 브라간사를 상대하는 대신 레이테에게 말했다.
“여왕 폐하께서 허락해 주세요. 프란세스크 공에게 검술을 배우면 안 되나요?”
프란세스크는 뒷목을 붙잡았다. 그에게 멋대로 굴 때야 차라리 자신만 참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여왕에게 저런 태도라니. 분별력도 없는 어린아이를 헤젤은 왜 사절이랍시고 보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공주께서는 제게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으신데요. 또 저는 리세우 공작에게 명령할 사람이 아니랍니다.”
“어? 왜요? 프란세스크 공은 에르난 왕자님의 신하가 아닌가요?”
“그렇지요. 하지만 저는 사크틸라의 여왕이지, 아직 바르시나의 여왕이 아니랍니다. 그러니 바르시나인인 리세우 공작은 공주와 마찬가지로 제게 손님이에요.”
“왕자님과 결혼하셨잖아요.”
“네. 에르난은 그저 제 남편일 뿐이에요. 아직은.”
리리우는 레이테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프란세스크는 조그맣게 한숨 쉬었다.
공주는 중요한 이야기를 듣고도 그 중요성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다. 대신 브라간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사절단의 진짜 목적일 정찰은 그가 하는 모양이다.
“그냥……, 프란세스크 공도 폐하의 부탁이라면 들어주지 않을까요…….”
차분하게 타이르는 여왕의 태도에 리리우는 기가 죽었는지 우물쭈물했다.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괜찮죠. 리세우 공, 방금 들으셨지요? 공주께서 수줍어하시니 제가 대신 부탁드릴게요.”
“거절하겠습니다.”
프란세스크가 단칼에 거부하자 레이테는 조금 놀란 눈치였고, 리리우의 얼굴은 금세 실망으로 변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제가 이곳에 남은 이유는 여왕 폐하의 일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폐하의 ‘부탁’으로 공주를 수행합니다만, 제 본분에서 더 멀어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호위라면 사크틸라의 기사만으로도 문제없어요. 손님에게까지 짐을 지우고 싶지 않답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요.”
“…….”
프란세스크는 더 하고 싶은 말을 참아야 했다. 브라간사를 주시하되 여왕은 공작의 사정도, 프란세스크의 감시도 몰라야 한다는 지시 때문이었다.
레이테는 잔뜩 움츠린 리리우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실망하셨나요?”
“네에…….”
“검은 잘못 사용하면 무척 위험하답니다.”
“폐하께서도 검술을 배워 보셨나요?”
리리우는 호기심에 눈을 반짝였다. 솔직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레이테는 쓴웃음을 지었다.
“음……, 아니에요. 하지만 위험성은 잘 안답니다. 그러니까 직접 검을 들지 말고, 검이 되어 줄 사람을 구하세요.”
잠시 생각하던 공주는 손뼉을 짝 치며 외쳤다.
“에르난 왕자님을 말씀하시는군요!”
“네. 제 남편이지요.”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리리우를 향해, 레이테는 남편이라는 단어에 강하게 힘을 주어 말했다. 그를 약혼자로 생각하던 사람이 그에게 보이는 관심이 썩 달갑지 않았다.
사실 공주의 관심은 레이테가 생각했던 방향과 조금 다르다. 알면서도 그녀는 자꾸 남편을 강조하고 만다.
“와, 로맨틱해. 폐하, 너무 멋져요! 제게도 멋진 남편이 생기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으음, 폐하처럼 기품을 갖춰야 하나……?”
잔뜩 들뜬 목소리였다가 금방 풀이 죽는다. 레이테는 소리 내어 웃었다. 확실히 공주의 관심은 에르난이 아니라 부부라는 관계 자체에 있다.
“괜찮아요. 공주께서도 멋진 분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햇빛이 강하니 이만 안으로 들어갈까요? 리세우 공께서 수련하도록, 우리가 귀찮게 하지 말아야지요.”
여왕은 일어나 리리우를 안내했다.
프란세스크는 히죽 웃음 지으며 여왕에게 몸을 굽혀 인사했다. 해방에 대한 감사 표시였다.
“리세우 공작 각하, 괜찮으시다면 저와 대련하지 않겠습니까?”
“좋습니다. 저야말로 부탁드리고 싶었거든요.”
프란세스크는 기쁘게 답했다. 자신이 붙잡아 두면 브라간사는 여왕에게 접근하지 못한다. 뛰어난 무장이라는 그의 실력도 궁금했다.?
#023
“여왕이 오겠다……, 그것도 오늘? 날짜 선정 한번 참 탁월하군요. 당신 작품입니까, 대주교 각하?”
시스로네스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난은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으나 대주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거의 깜박이지 않고 에르난을 노려보는 것으로 맞섰다.
동석한 귀족들의 태도는 무덤덤했다. 이미 익숙해진 일이었다. 또 저러다 말겠지.
두 사람은 걸핏하면 충돌했으나, 갈등이 심각해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결국 언제나 에르난이 자신보다 나이도 경험도 인망도 더 많은 사크틸라의 성직자를 따르는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미리 언질이라도 줬어야지요. 내 아내 일을 이제야 알다니, 불쾌합니다.”
“아시다시피 지난 열흘은 탐브레를 몰아붙이느라 모두 정신이 없었잖습니까. 폐하께 드릴 보고를 누락해 버리고 말았군요. 송구합니다.”
산지에서는 결판을 낼 수 없다. 한 달가량의 지겨운 추격전 끝에 토벌군이 내린 결론이었다.
답이 없기는 탐브레도 마찬가지다. 지친 병사는 그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들이 경험상 유리했던 산간지대도 곧 끝난다.
토벌군은 작전을 바꿔 탐브레를 붙잡을 듯 말 듯 하며 그를 빠르게 동쪽으로 몰아냈다.
뒤늦게 여왕의 편으로 참전한 귀족의 군대는 탐브레의 도주로를 차단했다. 골짜기와 강을 건너는 다리가 수없이 끊어졌다.
“후우, 나이가 들다 보니 자주 깜박하는군요.”
시스로네스는 지독할 정도로 철저하게 이 과정을 감독했다. 모두가 그 모습을 아는데, 늙어서 기억력이 떨어진다고 해 봐야 전혀 설득력이 없다.
“레이테는……, 당신의 여왕일 뿐만 아니라 내 여왕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 아내입니다.”
꿈에서라도 저 작자를 한 대 치고 싶다. 에르난의 주먹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애초에 에르난도 레이테를 전장으로 데려올까 고민 중이었다. 물론 두 사람의 의도는 달랐다.
에르난은 승리의 현장에서 아내와 함께 모습을 보여 그녀와 동등한 왕이 될 자신을 떳떳하게 내보이고 싶었다. 사실 그냥 아내를 보고 싶기도 했다. 두 달 가까이 못 만났다.
반대로 시스로네스는 에르난의 공을 여왕에게 넘길 수작이다.
‘여왕 폐하께 반역자의 목을 바치니 어쩌니 거창하게 말하면서, 마지막으로 등장한 레이테를 전장의 주인공으로 세우겠지.’
대주교는 그런 부류의 여론몰이에 능숙했다. 에르난을 용을 무찌른 성인으로 비유했듯이.
속셈이야 어쨌든, 일단 같은 생각을 했다고 말하면 시스로네스는 더 의기양양할 것이다.
“나는 내 아내에게 굉장히 관심이 많거든.”
결국 이런 식으로 으르렁거리며 분을 삭일 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대주교는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마치 진짜로 보고를 잊은 척. 진심으로 미안한 척.
화를 더 내 봤자 자신만 바보가 될 것 같다. 에르난은 그와의 대화를 관두고, 다른 귀족들에게 말했다.
“여러분께서도 어서 가족과 만나고 싶으시겠지요. 저만 앞서나가서 미안합니다.”
에르난의 능청에 지휘관들은 폭소했다. 진심으로 웃은 사람과 분위기를 위해 웃은 사람이 반반 정도다.
여왕의 남편이자 곧 왕이 될 지휘관이라는 사람이 성직자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이면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에르난은 걱정했다.
기우에 불과했다. 오히려 에르난이 대주교를 억지로 이기려 하지 않기에 귀족들은 에르난에게 만족하는 듯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에게 에르난은 아직 외국인이다.
“자, 우리의 여왕을 불편한 막사가 아니라 편안한 성에서 모셔야지요. 상황을 빨리 정리합시다. 아무리 우리가 도주로를 잘 막아 갈 곳이 없어진 탐브레라지만, 하필 이곳으로 들어갈 줄이야.”
에르난은 탁자 위의 지도를 손으로 짚었다.
“지난번에 사용했던 물건인데, 이렇게 또 쓸 줄은 몰랐습니다. 보시다시피 이곳의 방어력은 형편없습니다. 내부 구조도 비교적 단순하고. 애초에 휴양 용도에 가깝게 지어졌으니까요.”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습하기 짝이 없던 산지를 벗어나니 건조한 땅이 토벌군을 맞았다. 9월을 하루 앞둔 날의 이른 아침은 가을을 맞이하는 듯 쌀쌀했다. 삭막한 바람이 작은 성을 휘감았다.
토벌군은 여왕이 갇혀 지냈으며 에르난이 그녀를 처음 만났던 조그마한 성, 암보스를 포위 중이었다.
* * *
공성전이라고 거창하게 부를 필요조차 없는 싸움이다. 하지만 잠긴 성문을 뚫을 장비는 갖춰야 했다. 길지 않을 준비 시간은 반역자의 마지막 휴식이 될 것이다.
에르난은 문이 격파되는 즉시 성내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병영을 돌며 병사들을 격려한 그는 무장을 갖추고자 자신의 막사로 들어왔다.
뜻밖에도 시스로네스가 와 있었다. 의자에 앉은 그는 등이 살짝 굽어 보여 지친 기색이었다.
“의논할 거리가 더 있습니까?”
“아니, 아침 회의대로 진행하면 됩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폐하.”
거짓말로도 자상하다고 할 수 없는 말투였다. 그러나 아주 조금, 칭찬처럼 들리기도 했다. 언쟁할 때의 날카로운 느낌이 없어서일까?
“사크틸라의 낯선 지형과 별것 아닌데도 끈질긴 적의 치졸한 싸움 방식. 지루하셨지요?”
지휘관들은 갑옷을 입지만, 일반 병사의 대다수는 무장이 가벼웠다. 그래야 빠르게 치고 빠지는 전투가 가능했다.
출전 직후 레히오를 점령하며 느낀 승리감은 짧았다. 탐브레를 쫓아 산을 들쑤신 나머지 기간은 지긋지긋했다.
호르헤 성인의 가호가 어울릴 호쾌한 전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투와 휴식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낭만 대신 악착같은 치열함만 쌓였다.
답답함 속에서 에르난은 만용의 유혹을 견디고, 대주교의 독설을 견디고,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견뎠다.
아내. 레이테. 에르난의 본능은 이렇게 오래 떨어져 지낼 줄 알고서 출정 전날 밤까지 아내를 괴롭혔나 보다.
“지루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요. 하지만 원래 전투를 재미로 하지는 않잖습니까.”
“확실히 폐하의 참을성만큼은 합격점입니다. 여태 따분함을 버틴 것만도 놀랍지요.”
에르난의 눈이 커졌다.
긴장 탓에 헛소리를 들었나? 칭찬이 분명한 말이 대주교의 입에서 나오니 어색했다. 심지어 비꼬는 어조도 아니었다. 에르난은 고개를 좌우로 털며 눈을 깜박였다.
“제가 구박만 하려고 폐하를 수행한 줄 아십니까?”
대주교가 빈정거렸다. 익숙하고 얄미운, 에르난이 잘 아는 그의 모습이었다.
“안 하던 소리를 갑자기 하시니 수상합니다.”
“허, 사실을 말씀드려도 믿지 못하시는군요. 저는 할 말 다 했으니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자, 그러면…….”
의자에서 일어나는 대주교의 몸짓은 조금 힘겨워 보였다. 똑바로 선 대주교는 다시 에르난을 바라보았다.
그는 예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지요. 돈 에르난, 당신은 여왕 폐하께서 임명한 지휘관입니다. 당신은 아직 ‘왕’이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곧 왕이 되시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여왕과 권력을 공유하는 공동왕. 에르난이 아내와 맺은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탄생할 특수한 존재다.
‘이제 여왕이 오니까 분수를 지키라는 소리인가.’
대주교를 노려보는 에르난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떠올랐다. 협박에 가까운 그의 모습에서 초조함을 읽기는 어렵지 않았다.
레이테와 시스로네스는 필사적으로 에르난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려 할 것이다. 예상하던 바다.
“각하의 도움으로 나는 레이테와 결혼했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당신의 경험과 지혜를 존중합니다. 그런데 나를 당신 손아귀의 체스 말 정도로 여긴다면 곤란합니다.”
에르난은 거침없이 말했다. 막사에는 두 사람뿐이다. 주변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나를 마음대로 다뤄도 되는 사람은 단 한 명, 나와 동등한 내 아내뿐이지요.”
그리고 레이테를 마음대로 다룰 사람도 그녀의 남편뿐이다. 에르난의 눈이 붉게 번뜩였다.
* * *
맑은 하늘에서 환한 햇살이 쏟아졌다.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었다. 9월이 가까워졌지만 아직 낮은 한여름과 별 차이가 없었다. 오늘이 드물게 상쾌한 날이었다.
하지만 깨끗한 하늘 아래 놓인 땅은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눈에 보이기에 앞서 펑펑 터지는 대포 소리가 먼저 레이테를 맞이했다. 레이테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시선을 멀리 향했으나 화약의 연기만 얼핏 보일 뿐이었다.
“전투 중인 모양이군요. 병영이 멀지 않을 테니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여왕을 호위하는 기사 중 하나가 말했다. 레이테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말을 몰아 빠르게 달려갔다.
오래지 않아 기사는 다른 일행과 함께 돌아왔다. 가장 앞에 시스로네스가 있었다. 대주교는 말에서 내려 레이테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곧 성문을 돌파할 기세입니다. 적당한 때에 잘 오셨습니다, 폐하.”
레이테는 시스로네스의 안내를 받아 병영으로 들어섰다. 병영 너머로 암보스의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병사들의 움직임은 분주했다. 사다리를 이고 성으로 향하는 병사와 들것에 실려 돌아오는 부상병이 동시에 보였다.
“전투가 한창이라 정신이 없습니다. 예를 갖추지 못함을 양해해 주십시오.”
“괜찮아요.”
레이테에게는 하나같이 낯선 풍경이었다. 그러나 작은 기시감도 느꼈다. 전장에 직접 방문하기는 처음이지만, 말과 글로 충분히 들었던 풍경이었다.
두려움과 흥분이 한 번에 몰려들며 그녀를 헤집었다. 레이테는 겉으로라도 차분히 보이기 위해 애썼다.
“여왕 폐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레이테는 놀라 몸을 돌렸다.
상반신에 갑옷, 하반신에는 여기저기 붕대를 두른 남자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여왕에게 다가왔다.
“심발로!”
여왕의 결혼식에 찾아와 유쾌한 입담으로 손님들을 즐겁게 했던 심발로 백작이었다.
“성 쪽에서 쏘는 대포에 말이 놀라는 바람에 떨어졌습니다.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하필 적군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합지졸에게 당한 꼴을 여왕께 보이다니 영 민망하군요.”
심발로는 통증이 심한 듯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지만 목소리는 꽤 밝았다. 레이테는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많이 아파 보이는데요.”
“괜찮습니다. 돈 에르난께서 곧장 도와주신 덕택에 무사히 병영으로 돌아와 여왕 폐하를 그분보다 먼저 뵙게 되는군요.”
남편의 이름을 들은 레이테가 주변을 살폈다. 에르난은 보이지 않았다. 여왕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눈치챈 심발로와 시스로네스가 말했다.
“폐하께서는 앞장서 성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정리가 되면 여왕께서도 입성하시지요. 당장은 위험하지만 저녁쯤이면 내부도 정리될 겁니다. 바르시나인 지휘관은 아내를 성에서 모시겠다던 약속을 지키겠군요.”
레이테의 시선이 성벽을 향했다.
맑은 하늘 아래 우뚝 선 돌벽은 고요했다. 하지만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아래, 전투가 한창일 곳은 막사 등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저곳에 그 남자, 막연하게 언제 다시 볼까 생각했던 남편이 있다. 두어 달 만에 그를 다시 만난다.
초조함이 레이테를 휘감아 뒤흔들었다. 숨이 막혔다. 보고 싶다. 당장에라도 눈앞에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다.
레이테는 저도 모르게 성 쪽을 향해 발을 떼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부군께서는 용맹한 분이십니다. 무사하실 겁니다.”
심발로의 자상한 격려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내가 에르난을 걱정했다고?’
레이테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을 뻣뻣하게 굳혔다.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의 감정은 걱정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
남편이 자신의 시야에서,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두려울 뿐이기 때문이었다. 앞으로의 남편을 통제할 수 없을까 봐 불안할 따름이다.
아내에게 승리를 주기 위해 에르난은 전장에 뛰어들었지만, 그가 가지고 올 승리도 과연 아내의 것일까??
#024
“고마워요. 안심이 되는군요. 백작의 빠른 쾌유도 기도하겠어요.”
여왕은 있는 힘껏 얼굴 근육을 움직여 과할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갈무리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원래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일인걸요. 의연하게 견디려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군의 승리를 믿으십시오.”
심발로는 여왕의 과하게 작위적인 미소를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고마워요. 이런 곳이 처음이라서…….”
다른 부상자가 고통에 울부짖으며 여왕의 등 뒤로 지나갔다.
이곳은 전쟁터다. 편안히 앉아 서류만 들춰 보던, 안전한 요새와는 달랐다. 심발로 같은 사람이야 운이 좋아 부상만으로 끝났다. 하지만 언제든지, 누구나 죽을 수 있는 곳이 전장이다.
그 한가운데에 남편이 있다.
잘 알면서도 에르난의 생사에 앞서 그를 통제해야 할 미래부터 먼저 걱정하다니. 자신의 냉정함, 아니 그 이상의 비겁함에 레이테는 소름이 끼쳤다.
‘내가 이런 인간이었나?’
레이테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역설적이게도, 다른 이들의 눈에는 이 모습조차 남편을 향한 염려로 보일 것이다.
“되도록 빨리 성으로 들어가고 싶으니 준비해 주세요.”
레이테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적대감이든 걱정이든 상관없다. 일단 당장 에르난을 보고 싶었다.
* * *
매섭게 휘둘러지는 검을 받아친 에르난은 몸을 틀었다. 그의 겨드랑이를 노리던 상대의 칼날이 빗나가 갑옷을 타고 그대로 미끄러졌다.
에르난은 어깨에 가해지는 둔탁한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적을 발로 밀쳐 넘어뜨린 에르난은 그의 갑옷 틈 안으로 가차 없이 검을 찔러 넣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갑옷 안에 덧댄 사슬을 헤집고 들어가 몸을 찔렀다. 상대는 비명을 지르며 발악했으나 에르난이 더 깊숙이 검을 후벼 쑤시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후우.”
에르난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갑옷을 제법 잘 갖춰 입은 모양새가 귀족인 것 같다. 탐브레 파의 귀족은 이름만 들었을 뿐, 아는 이는 없었다.
성안으로 들어온 아군에 맞서는 저항은 꽤 거셌다. 더 이상 도망칠 길이 없는 탐브레 휘하의 군사들은 필사적이었다.
에르난은 성의 계단을 올랐다. 레이테를 데리고 도망칠 때, 그녀의 시녀 조아나가 화병과 벽돌을 집어 던졌던 곳이다.
“너희들은 저쪽을 살펴보거라.”
병사 일부를 반대 방향으로 보내고 에르난은 남은 병사와 함께 수색을 시작했다.
몇 군데의 빈방을 확인하고, 작은 창고의 문을 병사가 열었다. 그곳에는 하인으로 보이는 남녀 여럿이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떨고 있었다.
“우, 우리는 여왕 폐하를 모셨습니다!”
“백작은 아마 왼쪽 방 끝…… 거, 거기에 있을 거예요! 비밀 통로가 있다는 소문이…….”
절박한 외침이었다. 에르난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공포와 적대감이 떠올라 있었다.
“……고맙소.”
에르난은 짤막하게 답하고 창고를 나왔다. 점점 발걸음이 빨라지던 그는 결국 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혼자 이동하면 위험하다. 하지만 에르난은 다급해졌다. 탐브레가 비밀 통로로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함께, 하인들의 적의 어린 시선이 자꾸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왼쪽이라더니 결국 또 통로가 나뉘어 있다. 에르난은 잠깐 고민하다가 가장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복도로 나온 그는 다른 문을 쾅 쳐서 열었다.
작은 창문으로 석양볕이 들어와 만든 그림자 아래, 검을 든 남자가 벽에 기대 있었다. 탐브레 백작이었다.
에르난은 검을 앞으로 내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뵙는군. 오랜만이야.”
주변을 살펴보니 방 안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가구도 없고 창도 조그맣게 난 살풍경한 방이었다.
“비밀 통로를 찾고 있었나? 이 방은 아닌데. 딱하게 됐군.”
사실 에르난도 탈출구의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했다. 그가 본 지도에는 이 근방에 비밀 통로 표시가 없었다.
다만 힐끔힐끔 벽을 더듬는 탐브레의 손을 보고, 그 또한 에르난처럼 헤맸음을 확신할 뿐이었다.
예상이 맞았는지 백작은 몸을 움찔거렸다. 시선을 여기저기 옮기며 망설이던 그는 이윽고 손에 쥔 검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항복하시려고?”
“……그렇다.”
“하긴, 목숨은 보전해야겠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에르난은 탐브레의 검을 발로 차 멀리 던졌다. 그리고 그를 바닥에 억지로 꿇어 앉혀 벽을 보게 했다.
에르난은 탐브레의 등 뒤에 앉아 그의 검집이 묶인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백작의 검집은 허리 오른쪽에 있었다.
“왼손잡이였나? 아쉬운걸. 당연히 오른손을 쓰는 줄 알고 열심히 밟았는데.”
“그럴 리가. 네놈이 제대로 망가트려 준 덕택이지.”
탐브레가 오른손을 까딱거렸다. 쥐었다 펴는 동작이 뻣뻣했다.
허리띠로 백작의 손목을 감아 등 뒤에 고정시킨 에르난은 그의 장갑을 벗겼다. 오른손이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레이테를 데리고 탈출할 때, 에르난은 깨진 유리병 조각 위에 쓰러진 그의 손을 인정사정없이 짓뭉갰다. 조카에게 못된 짓을 하려던 손에 대한 충동적인 응징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여파가 남은 듯했다.
“몇 달 전인데 아직도?”
“나이가 들수록 회복력이 더뎌지는 법이거든.”
탐브레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회복뿐만 아니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급히 도망치느라 제대로 치료할 시기를 놓친 탓이 클 것이다.
“그러니까, 나이 들어서 품위를 지킬 생각은 안 하고 조카 것이나 탐내면 안 된다는 소리지. 몸도 이렇게 잘 아는데, 머리만 몰랐나?”
에르난이 띠를 세게 잡아당겨 탐브레의 손목을 조였다. 백작은 짧게 신음하며 에르난을 노려보았다. 충혈된 눈이 분노를 뿜어냈지만 에르난에게는 가소로울 뿐이었다.
“고작 이런 인간에게 레이테가 20여 년을 매여 살았다니.”
여왕을 꼭두각시로 만들었다는 그녀의 숙부는 에르난의 생각보다 훨씬 더 형편없는 인간이었다.
신기했다. 이 나라는 그토록 군공을 중요시하면서, 군사적 재능이라고는 별 볼 일 없는 탐브레가 어떻게 장기집권을 했을까? 유별나게 탁월한 다른 능력도 없어 보이거늘, 오로지 왕족이라서?
호르헤 성인의 전설에 나오는 용도 이렇게 단순한 악역이었을까?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나?”
탐브레가 빈정거렸다.
“여왕이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다.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여왕을 섬긴다는 이들도 마찬가지지. 법적으로 하자가 없으니 인정할 뿐이다. 네놈의 바르시나나 헤젤 같은 나라는 아예 여성의 왕위계승을 막아 놓지 않았나?”
과연. 탐브레는 자신이 버티기 위해서라도 여왕의 불완전성을 강조하며 공포를 조성했을 것이다. 불안한 왕조를 유지하려면 여왕과 가장 가까운 혈통인 탐브레 백작을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그는 능력으로 권력을 쟁취하지 않았다. 레이테가 타고난 ‘문제’를 이용했을 뿐이다.
홀로 남은 소녀란 누군가에게는 손쉬운 먹잇감이고, 누군가에게는 항구적인 동정의 대상이었다. 어느 쪽에서도 진정한 왕으로 여기지 않는다.
“여왕의 지지자들은, 나를 대신해 안심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냈지.”
레이테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그 누군가에, 에르난 자신도 포함될까? 매듭을 마무리하려던 에르난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휘말려 들어서는 안 된다.
에르난은 대꾸하지 않고 매듭을 마저 묶었다. 그러나,
“에르난 국왕 폐하라……? 말은 좋지만 어차피 네놈도 나와 같아. 너도 결국은…… 으헉!”
에르난은 백작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그의 뒤통수를 붙잡고 사정없이 벽에 쾅 박았다. 성의 내벽은 돌로 이뤄졌다.
“내가 너와 같다고?”
“크악!”
고통스러워하는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에르난은 그를 옆으로 집어 던지듯이 쓰러뜨렸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탐브레는 돌바닥에 다시 머리를 부딪쳤다.
백작은 정신을 잃었다. 에르난은 그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아니야……, 달라.”
에르난은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리고 그를 다시 바닥으로 거칠게 내던졌다.
“나는 여왕의 남편이다. 네가 끝까지 갖지 못한 가장 합법적인 지위가 내게는 있어. 나는 너 같은 놈을 대신하지 않아…….”
의식이 없는 탐브레에게 에르난의 말은 닿지 않는다. 잘 알면서도 에르난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필사적으로 덮고 싶어서.
“그러니 달라! 나는 너와 달라……!”
탐브레의 말대로다. 에르난은 목적도, 앞으로 하려는 일도 사실은 그와 다르지 않았다. 여왕을 손에 쥐고, 궁극적으로는 그녀의 것을 약탈하기 위해 결혼하지 않았나?
멍청하게도 여태 몰랐을 뿐이다. 자신이 가진 그 원대하다??
#025
짤막한 재회 인사 후, 부부는 상황 정리에 분주했다. 마지막까지 탐브레를 따르던 추종자는 많지 않았다. 대다수는 교전 중 죽었고 일부는 항복했다.
사망한 기사들은 값진 무구가 많아 좋다며 낄낄거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울렸다. 적의 칼과 갑옷 등은 어디서나 병사들의 부수입 거리인 모양이었다.
에르난은 갑옷을 벗었다. 피와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엉망진창이 된 갑옷은 두 달 넘게 그와 함께하면서 많이 낡아 버렸다. 간단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임시 회의실이 된 식당으로 향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에르난.”
그를 부르는 아내의 목소리가 고왔다. 에르난은 레이테의 옆에 앉았다.
“항복한 이들은 탐브레의 비밀을 아는 대로 다 털어놓겠다며 서로 난리입니다. 살길을 찾아야겠지요. 도주자가 일부 있으나 워낙 적은 탓에 재기 가능성은 없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탐브레는…….”
팀파노 후작이 상황을 보고했다. 그는 잠시 에르난을 바라보았다가 말을 이었다.
“여전히 의식이 없는데, 언제 정신 차릴지는 어떤 의사도 장담 못 하더군요.”
보고를 마친 그가 자리에 앉자 시스로네스가 먼저 나섰다.
“여왕 폐하, 탐브레의 처벌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반역자는 사형에 처해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다른 귀족들도 저마다의 의견을 냈다. 대체적으로는 사형에 맞춰지는 분위기였다.
“에르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잠자코 듣기만 하던 레이테가 물었다.
“사형은 마땅합니다만, 당장은 안 됩니다. 일단 유폐하고, 시간을 들여서라도 그가 약탈했던 여왕의 소유물과 권한을 철저히 되찾아 와야 합니다. 어차피 저같이 무모한 사람이라도 나타나지 않는 한, 위험을 감수하고 그를 탈출시킬 지지 세력도 없습니다. 탈출시킬 이유도 없지요.”
예상과 다른 남편의 반응에 레이테는 놀란 눈치였다. 성을 탈출하던 당시 에르난은 탐브레를 죽이려 했고, 레이테는 에르난을 말렸다.
마침 그 일이 바로 이 식당에서 일어났다. 전투를 치르며 접견실이 난장판이 된 탓에 식당에 대신 모였다. 얄궂기도 하지.
“한 손은 제대로 못 쓰고, 머리의 부상은 워낙 심해 의식이 돌아오기나 할지 의심스럽다던데, 폐하의 작품 아니었습니까? 다 죽여 놓고서 일단 살려 두자니 잔인하시군요.”
시스로네스가 이죽거렸다. 여왕의 앞이었으나 그는 에르난을 도발하는 데에 주저 없었다.
“왕족의 목을 함부로 치면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왕족이기 이전에 반역자이지요. 반역자를 살려 두는 나라가 어디에 있답니까?”
“누가 완전히 살려 주자고 했습니까? 그리고……, 최소한 모자라도 벗고 그런 말 하면 안 되겠습니까?”
에르난은 시스로네스가 쓴 성직자용 둥근 모자를 흘겨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레이테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그녀는 남편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어 웃음을 참아야 했다.
참모의 평범한 조언이지만, 그 참모가 성직자라면 사형을 입에 담기 영 껄끄럽긴 하다.
“폐하께서 느끼는 어색함은 잘 알겠습니다. 왕족의 처벌은 신중해야 합니다. 왕가에 무슨 변고가 생길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폐하께서도 사크틸라에서 이십 년 정도 살아 보시면 생각이 바뀔 테지요.”
“사정도 모르는 외국인은 입 다물라는 소리였군.”
“굳이 그렇게 삐딱하게 받아들이고 싶으시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여왕이 있든가 말든가 서로를 조롱하기 바쁘다. 아무래도 시스로네스에 대한 남편의 투정은 여전하겠다.
그러나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은 묘하게 합이 맞았다. 그 모습이 레이테는 신기하고도 어색했다.
다른 귀족들은 지금 상황이 익숙한 듯했다. 늙은 귀족 몇 명만이 초조한 눈치로 레이테와 두 사람을 번갈아 힐끗거릴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왕 앞에서 보일 행동은 아니라는 식으로.
“아무튼 탐브레는 여왕께 반역을 저지른 자이므로, 여왕께서 결정하셔야 합니다. 바르시나의 왕자께서는 할 만큼 다 하셨으니 이제는 가만히 좀 계십시오.”
적나라하게 무시하는 표현은 레이테가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레이테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시스로네스, 에르난 덕택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데, 너무 과한 표현 아닐까요?”
에르난이 아내를 돌아보았다. 레이테는 그가 놀라거나 재미있어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였다.
남편의 저런 반응은 처음이다. 그런데도 낯설지 않았다. 레이테는 금방 이유를 깨달았다.
경계. 레이테가 남편에게 수시로 보였던 것. 과연, 새까만 눈이 그녀를 집요하게 관찰했다.
강한 경계심 앞에서 레이테는 유쾌할 수가 없었다. 이 불편함에서 벗어나고 싶다. 때때로 부담될 만큼 과장하여 말하는 남편의 능청맞음이 보고 싶었다.
‘맙소사. 그런 것이 그립다고?’
기가 막힌다. 확실히 그녀는 지금 상황이 거북했다. 에르난의 낯선 경계도, 모두가 익숙한데 홀로 어색한 상황도 싫었다.
하지만 여왕은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싫지만 이제는 해야 할 일이다.
“에르난, 당신이 제게 승리를 선물했으니, 저도 당신에게 선물을 주려 해요.”
여왕은 남편의 양손을 감싸 쥐었다. 레이테는 불안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방긋 웃음 지었다.
“내일 부르고로 돌아가면, 당신은 사크틸라의 왕이 되어 저와 동등한 왕관을 공유하게 될 거예요. 우리는 내일부터 사크틸라의 공동왕이에요.”
레이테가 쥔 에르난의 손이 흠칫 떨렸다. 그녀를 보던 까만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 안에 붉은빛이 잠시 스칠 때, 레이테는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졸속으로 치를까 봐 의심하나요?”
“아, 아닙니다. 다만 생각보다…… 빠르군요.”
에르난이 말했다. 빠르다니, 그가 이 문제를 어떻게 여겼는지 알 만했다.
“혹시 제가 약속을 어길 거라 생각하셨나요?”
“아, 그럴 리가요. 빠를수록 저야 좋습니다. 당신과의 일치야말로 제 간절한 소망입니다. 참, 제가 쓸 관은 당신의 것과 똑같은 모양입니까? 그러면 좋겠는데요.”
잠시 당황한 기색이던 에르난이 이윽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레이테는 남편의 부풀린 말씨에 안심하는 자신을 무시하려 애썼다.
* * *
에르난은 자정이 한참 넘어서야 침실에 들어왔다. 급하게 정리한 침실은 어수선했다. 레이테와 함께 지냈던 부르고의 궁과 비교하면 모든 것이 낡았다. 창문은 잠겨 있으나 틈 사이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레이테는 이미 자는지 벽을 향하여 옆으로 누워 있었다. 에르난은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레이테는 깨지 않고 쌔근쌔근 숨을 쉴 뿐이었다. 아내의 몸은 부드럽고 따끈했다.
‘다시 안고 싶었어.’
나른함이 에르난을 감쌌다. 그러나 답답함은 가시질 않았다.
레이테는 남편이 아니라 승리를 환영했다. 그녀의 마음을 잘 알기에, 대주교와의 언쟁에서 남편의 편을 들 때에 에르난은 굉장히 놀랐다.
날이 밝으면 에르난은 사크틸라의 주인이 된다. 바라마지않던 왕위였다.
왕이 되면 달라지기는 할까? 실제로는 여러 제약이 있다 해도 일단 아내와 완전히 동등한 입장이 된다면 괜찮아질까? 과연?
공동왕이 되고, 그 관계를 강조하며 부부가 동등해질수록, 두 사람의 목적은 충돌한다. 서로 자신은 내어주지 않고 상대방에게서 필요한 것만 취하려 할 테니.
에르난은 아내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 넘기고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분주한 중에도 목욕은 했는지 살결이 보송하고 매끈했다.
‘미래에도 지금처럼 당신을 기분 좋게 안을 수 있을까?’
그는 한참 몸을 뒤척이다가 간신히 잠들었다.
“……후우.”
몸을 뒤적이며 아내를 만지작거리던 남편의 손길이 점점 잦아들었다. 레이테의 목덜미에 규칙적인 숨소리가 닿고서야 그녀는 눈을 떴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정신을 잃을 것처럼 졸렸다. 하지만 잠이 들지 않았다. 목욕을 마치고 침실에 왔을 때부터 계속.
공동왕이 되는 계약. 자신이 요구했지만 되도록 외면하고 싶었다. 공유는커녕 아무것도 뺏기기 싫으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화약통을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 물론 탐브레를 붙잡았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레이테가 먼저 나서서 놀랐을 뿐, 어차피 에르난도 왕위를 요구해 왔을 것이다.
레이테는 최대한 태연하게 남편을 상대했다. 다시 만난 남편이 반가웠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낯설었다.
단순히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수개월 동안 전장을 누빈 자의 모습을 보니, 남편과 자신이 얼마나 다른 삶을 사는지 자각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더 미안해. 이래도 괜찮을까.’
전쟁의 승리는 공동왕의 업적이 되어야만 한다. 결국 아내가 남편의 공을 빼앗는 셈이다. 레이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비열해지자고 단단히 결심하고 왔지만, 막상 지친 에르난을 보니 마음이 약해진다.
레이테는 남편과 단둘이 있을 때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결국, 자는 척하며 일단 피하는 길을 택했다.
남편은 원래 아내가 자는지 아닌지 신기할 만큼 잘 알아차렸다. 하지만 오늘은 많이 피곤한가 보다. 레이테가 깨어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오랜만에 남편에게 안기니 편안하고 좋았다. 그래서 더 심란했다.
‘차라리 성당에 가서 기도라도 할까?’
에르난의 품 안이 따뜻해서 움직이기 싫지만.
그러나 곧 레이테는 침대 밖으로 나와야 했다. 에르난과 함께.
* * *
아직 해도 제대로 뜨지 않은 새벽, 침실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부부는 벌떡 일어났다. 탐브레가 눈을 뜨면 곧바로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뒀기 때문이다.
레이테는 결국 한숨도 자지 못했다. 눈꺼풀은 자꾸 내려앉고, 시야가 흐리멍덩했다.
반대로 머릿속은 찬물을 끼얹은 듯 아찔했다. 아예 그 물이 얼어붙을 정도로 레이테는 긴장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는 사람을 깨우다니…….”
에르난이 투덜댔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말과 달리 무서울 만큼 굳었다. 에르난의 팔이 아내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접견실을 정리해 두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당장 쓰러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지친 기색이 역력한 시스로네스가 부부를 맞았다. 아예 밤을 새운 모양이다. 그는 저녁때 보았던 옷차림 그대로였다.
접견실 단상에는 급히 마련한 의자 두 개가 놓였다. 좌우 벽을 따라, 역시 급히 잠자리에서 깬 귀족들이 섰다.
그리고 탐브레는 왕좌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꿇어앉아 있었다.
에르난은 탐브레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왕좌를 향해 성큼성큼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아내를 먼저 자리에 앉히고 남은 의자에 자리 잡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탐브레의 몰골은 보잘것없었다.
잔뜩 굽은 등과 축 처진 어깨는 초췌함에 절어 있었다. 죽지 않더라도,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해 보였다.
여왕은 말이 없었다. 막상 이런 상황이 오니, 그녀는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사람에게 오랫동안 짓눌려 살아왔다니, 레이테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차피 용서 불가능한 반역자인데, 심문한다면서 시간을 끌 필요가 있을까?’
그저 하루빨리 자신의 세상에서 이 자를 지워 버리고 싶다. 더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빼앗긴 20년을 조금이라도 보상받아야 한다. 당장 죽이지 말고 유폐하자는 남편의 의견이 워낙 의외였기에 레이테는 그를 경계했지만, 그의 생각에 동의했다.
“여왕 폐하…….”
탐브레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그는 오른팔만을 힘겹게 들어 여왕에게 내밀었다. 붕대를 감은 손이 어색하게 움직였다.
“이 손 보이십니까? 정상인의 손이라 우길 수는 없게 되었지요. 치료 시기를 놓쳐 버린 탓입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지 폐하는 잘 아시겠지요.”
레이테는 남편을 힐끔 돌아보았다. 탐브레를 노려보는 에르난은 눈도 거의 깜박이지 않았다.
“내가 실패한 일을, 당신의 남편은 해내고야 말았소.”
탐브레가 고개를 들어 여왕을 마주 보았다.
주름에 파묻힌 그의 탁한 눈에, 겁에 질려 떠는 어린 소녀가 비쳤다.?
#026
아홉 살의 여왕은 불만이 많았다.
세상은 그녀에게 ‘하지 말라’는 말만 했다. 경박하게 소리 지르지 마라. 허겁지겁 걷지 마라.
특히 숙부에게 대들지 마라.
그리고 레이테의 금지목록에 방금 막 새로운 항목이 추가되었다.
“검술을 배워야겠어.”
“안 됩니다.”
“왜!”
“그렇게 소리 지르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왜…….”
여왕의 고해사제인 시스로네스 주교는 가차 없었다. 레이테는 풀이 죽었다.
반항은 소용없다. 반복된 경험을 통해 소녀는 그것을 잘 알았다.
“검은 여성이 들 물건이 아닙니다.”
“하지만 훌륭한 왕은 모두 전사였어. 나도 왕인걸?”
레이테의 눈길이 독서대로 향했다. <성 미겔 찬가>. 신의 군대를 이끄는 대천사 미겔을 제목으로 삼은 책답게, 전쟁에서 승리한 왕을 칭송하는 시가 가득했다.
레이테는 이것을 일주일 전부터 읽기 시작해 방금 막 끝을 보았다.
“폐하, 이 책은 옛날이야기입니다. 이교도나 헤젤과의 싸움이 일상이던 때라, 왕은 전사가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과는 달라요.”
레이테도 잘 알았다. 시스로네스에게 역사를 배웠으니까. 또한 함께 주의받은 내용도 기억했다.
“헤젤은 기회만 된다면 다시 이 나라를 탐할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나한테 그렇게 가르쳐 줬지.”
“예. 잘 기억하시는군요. 훌륭하십니다.”
주교 또한 여왕에게 사사건건 ‘안 된다’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이들과의 차이가 하나 있었다.
그는 칭찬에 인색하지 않았다. 작은 칭찬 거리도 그냥 지나가지 않고 꼭 짚어 준다.
“너무 안심하지 말라는 뜻으로 드린 말씀이었지요. 폐하께서 검을 들라는 뜻이 아닙니다.”
레이테는 입을 삐죽거렸다.
“숙부님은 평화가 아니라 자기 목숨만 구걸할 뿐이라고 했잖아. 다 기억한다고.”
“폐하!”
시스로네스가 버럭 소리 질렀다. 레이테는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숙부님 얘기는 하지 말랬지.”
시스로네스는 무릎을 꿇고 여왕의 앞에 앉았다. 여왕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간절했다.
“폐하, 다른 것은 모두 지키지 않아도 좋습니다. 탐브레 백작에 대한 언급만은 제발, 제발 조심해 주십시오.”
“으, 응…….”
숙부는 부모 없이 홀로 남은 레이테의 후견인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앞장서 레이테의 모든 행동을 금지했다.
레이테는 요즘 반항심이 슬슬 생겼다. 지금도 그랬다.
“다른 것은 지키지 않아도 좋다? 그러면 ‘검술을 배울 수 없다’를 안 지키면 되겠네.”
흥. 레이테는 의기양양하게 고해사제를 쏘아보았다.
시스로네스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폐하. 검은 무기입니다. 무기는 사람을 해치는 도구이고, 해치는 대상에는 무기의 주인도 포함합니다. 무기를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레이테는 그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원하시니 사범을 구해 오겠습니다만……, 아시지요? 그분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숙부님은 내가 뭘 해도 다 안 좋아하시잖아.”
“폐하!”
시스로네스가 다시 호통쳤다.
아차, 숙부라는 말을 하지 않기로 방금 전에 지적받았었는데. 레이테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 * *
한 달이 넘도록 선생도 검도 보이지 않았다. 레이테는 계속 시스로네스를 독촉했다.
“시스로네스 주교 각하가 싫어집니다.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꾸 무시당하니까 미움이 커집니다. 제 죄를 용서해 주세요…….”
여왕은 고해사제에게 이렇게 고해했다. 시스로네스는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후우……, 신중히 알아보느라 늦어졌을 뿐입니다. 다음 주 목요일, 제가 수도회 총회에 가기 전에는 올 겁니다.”
“정말?”
갑갑한 생활에 드디어 활력소가 생긴다. 레이테는 신이 나서 시스로네스가 허탈한 목소리로 읊는 사죄경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여왕은 산간의 낡은 성에서 반년째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며 살고 있었다.
* * *
들뜬 마음으로 주말을 보낸 레이테는 점점 초조해졌다.
사범의 소식이 없다. 다시 시스로네스를 재촉했다. 그도 당황한 눈치였다.
목요일. 하늘이 불길하게 흐렸다.
선생을 만나지 못하고 떠나기 불안한지, 시스로네스는 자꾸 출발에 뜸을 들였다. 일행인 다른 수도사가 재촉하자 그는 내키지 않는 듯 말에 올라탔다.
“오늘 돌아올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불안하군요.”
괜한 걱정은. 레이테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성 미겔 찬가>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 첫 번째 장을 다 읽었을 때, 기다리던 이가 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코보 코사라고 합니다. 여왕 폐하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락부락한 전사를 상상한 레이테는 조금 놀랐다. 사범은 평범하고 선량한 인상이었다.
“아침에 시스로네스가 성을 떠났는데, 오는 길에 마주쳤겠네. 당신을 무척 만나고 싶어 하더니, 다행이야.”
“네? 아……, 제가 너무 바쁘게 오느라 그냥 지나쳤나 봅니다.”
선생은 얼굴을 붉혔다.
“괜찮아. 금방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그보다 나는 당장 수업을 받고 싶은데 당신은 무척 피곤해 보이네. 일단 식사하고 오후부터 시작할까?”
그러나 식사자리에서 사범은 레이테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굳이 폐하께서 검술을 익힐 필요가 있을까요? 검은 멀리할수록 좋은, 위험한 도구입니다.”
이 사람마저. 레이테는 한숨이 나왔다.
“여왕 폐하를 지켜줄 기사는 많잖습니까.”
아니, 없다. 이 성에는 극소수의 시종만 있다. 호위병은 감시병에 가깝다.
레이테는 딸기를 먹고 남은 꼭지를 휙 던졌다. 시스로네스라면 교양 없는 행위라며 그녀를 나무랐을 것이다.
“폐하. 진심으로 검술을 배우고 싶으십니까?”
“진심으로 배우고 싶어서 그대를 불렀으니까 그만 물어, 사범님.”
여왕은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불안해졌다. 하코보는 자신에게 검술을 가르치기 싫은가? 그래서 늦게 왔나?
결국 레이테는 수업을 받을 수 없었다. 흐린 하늘이 기어이 비를 쏟아냈기 때문이다.
레이테는 실내 수련을 주장했으나, 사범은 야외 수업을 고집했다. 좁은 실내는 초보자에게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수업은 비가 그치면 시작하기로 했다. 비는 레이테가 잠자리에 누운 지금도 내린다.
“내일은 꼭 비가 그치게 해 주세요.”
이미 한참 기도했지만, 레이테는 누워서도 중얼거렸다. 곧 그녀는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침실의 문이 열렸다.
* * *
낡은 침대는 편히 잠들기 힘들었다. 레이테는 찌뿌둥한 몸을 옆으로 돌리려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레이테는 짜증스럽게 눈을 떴다.
“어……?”
무언가가 레이테를 위에서 짓누르고 있었다. 그녀의 팔다리는 침대 기둥에 묶여 있었다.
비 쏟아지는 소리가 여전했다. 흐린 하늘에 달조차 뜨지 않아 방 안은 깜깜했다.
뭐야? 레이테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 하자, 무언가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사람의 손이다.
레이테의 위로 사람이 올라타 있었다.
“누, 누구야!”
공포에 사로잡힌 레이테는 일어나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어린 소녀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괴한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가 레이테의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레이테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 마! 싫어!”
“뭘 하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제가 아무리 인간말종이어도 어린애를 범할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으니 안심하시지요.”
검술 선생인 하코보다. 레이테의 몸부림이 멎었다.
“폐하, 제가 계속 말씀드렸습니다. 정말로 검술을 배울 거냐고. 위험하다고. 당신은 검을 모르고 사는 편이 낫습니다. 이미 여왕이면서, 왜 욕심을 더 내서 그분의 심기를 건들지요?”
“무슨 말이야……? 이것 놔! 내려와서 이야기…… 꺅! 꺄아아아악!”
맥락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하던 레이테는, 맨살을 드러낸 자신의 손목에 차가운 것이 닿자 비명을 질렀다.
어둠 탓에 무엇이 닿았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 안 돼! 싫어어어! 죽기 싫어!”
검에 찔리거나 베이면 죽는다. 레이테도 그것은 알았다.
“걱정 마십시오. 여왕이 지금 죽으면 곤란하다더군요. 그냥 손 하나만 잘라내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께 죽기 싫습니다.”
칼날이 파고들었을까? 손목에 강한 통증이 찾아왔다.
“아…… 아아악! 싫어! 아파! 제발 도와줘!”
레이테는 공포에 사로잡혀 비명을 질러댔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제 충고를 받아들이셨다면, 그랬더라면……, 차라리 그냥 도망쳤을 텐데! 어디서 계집애가 세상 물정 모르고!”
레이테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아파! 죽이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아악! 아아악! 싫어어어어!”
처절한 울부짖음에 하코보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여왕의 손을 토막 낼 기세로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침실의 문이 열렸다.
“폐하!”
시스로네스의 외침을 끝으로 레이테는 의식을 잃었다.
* * *
여왕은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앉았다. 도저히 침실로 돌아갈 수 없어서 그곳보다 좁고 냄새나는 다른 방으로 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무서웠다. 밝힐 수 있는 등을 모조리 밝히고, 그것으로도 부족해 초에 잔뜩 불을 붙였다. 초가 수십 개쯤 되니 한밤중인데도 방 안은 환했다. 더위를 느낄 지경으로.
더위는 레이테의 몸 안에서 오기도 했다. 손목의 통증.
상처가 깊지만 중요한 곳은 빗겨나가 회복이 가능하다는 모양이다. 그래도 지금은 잘릴 뻔했던 그곳이 아팠다.
“폐하. 들어가겠습니다.”
시스로네스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의 수도복 자락이 펄럭이자 촛불 몇 개가 꺼졌다.
레이테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굳혔다.
“죄송합니다.”
그는 황급히 다른 초를 들어 불을 옮겨 붙였다. 레이테는 멍하니 불꽃을 바라보았다.
* * *
문제의 밤 이후, 오랫동안 레이테는 대낮처럼 불을 밝히지 않으면 잠들지 못했다.
검술을 배우려는 고집도 완전히 사라졌다. 시스로네스가 금지할 필요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날붙이를 보기만 해도 두려움에 떨었다.
여왕은 오른팔을 살짝 들었다. 그녀의 손목에 가느다란 흔적이 보였다.
“범인은 자살했지만,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는 뻔했지요.”
숙부의 계획은 실패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자 오히려 숙부가 비슷한 일을 당해 버렸다. 레이테는 실소했다.
“에르난, 저도 어릴 때는 검과 기사를 동경했어요. 하지만 숙부님께서는 조카를 너무 아끼셔서, 검술이나 전투같이 죽을 위험성이 있는 일을 절대 반대하셨답니다. 그런데도 제가 말을 듣지 않으니, 숙부님은 제가 아예 무기를 쥘 수 없도록 손을 잘라 버리려 했지요.”
에르난의 얼굴이 엉망으로 무너져 내렸다. 레이테는 남편을 보고 웃었다.
레이테는 그 과거를 극복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손은 무사했지만 검은 못 쓰게 되었죠. 무서우니까. 하지만 이제는 괜찮아요. 에르난이라는 검이 나를 대신해 주겠지요.”
남편의 눈이 울 것처럼 요동쳤다. 레이테는 그 반응이 신기했다. 아내의 과거에 저 정도로 충격받을 줄은 몰랐다.
정작 그녀는 말할수록 머리가 맑아졌다. 복잡하던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남편은 검이다. 그는 아내의 손아귀에서 아내가 원하는 대로만 움직이면 된다.
“푸하하하!”
그때, 탐브레가 크게 웃었다.
“검? 당신의 검이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여왕 폐하께서는 남을 부리는 일을 참으로 당연하게 여기는군요.
조카딸님은 내게서 벗어나고 싶으셨겠지! 하지만 틀렸습니다. 당신의 팔다리는 당신의 손으로 자르게 될 거요. 그에 쓸 칼을 직접 침대로 들였으니까!”
병사들이 그를 붙잡았다. 백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왜 그런 줄 아시오, 여왕? 실은 모든 사람이 나 같은 존재를 원하기 때문이오! 단지 내 편이 아니었을 뿐!”
“무슨…….”
레이테가 입을 달싹였다. 에르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를 악문 에르난이 탐브레의 앞에 다가가 섰다. 백작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외쳤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요! 여왕이시여, 나는 실패했지만 대신 에르……!”
그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에르난이 검을 뽑아 단숨에 그를 찔렀기에.
“으헉…… 우욱! 크아악!”
탐브레는 괴성과 함께 쓰러졌다.
그의 몸은 몇 번 부자연스럽게 경련하더니 굳었다. 눈과 입을 추하게 벌린 채로, 반역자의 숨은 끊어졌다.?
#027
“무슨 짓이야!”
레이테의 카랑카랑한 외침이 접견실 가득 울렸다.
벌떡 일어난 여왕은 비틀거리며 탐브레가 쓰러진 곳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숙부의 모습을 확인하려 몸을 숙이려던 레이테를 에르난의 팔이 거칠게 붙잡았다.
“다가오지 말아요, 부인.”
에르난은 아내를 뒤로 밀어냈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레이테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몸을 휘청거렸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지만, 레이테는 간신히 제대로 설 수 있었다.
아내가 멀어지자, 에르난은 죽은 이에게 꽂았던 검을 잡아당겼다.
경직된 몸에 꽂힌 것을 빼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발로 탐브레의 몸을 짓밟아 밀어내며 양손으로 힘껏 검을 뽑아 들었다. 찌걱거리는 불쾌한 소리가 접견실을 채웠다.
피가 후두둑 튀어 에르난의 발치를 적셨다.
“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레이테의 목소리가 떨렸다. 벌어진 틈새에서 피가 흘러나오는데, 숙부는 고통의 비명도 몸부림도 없었다.
“정말로 죽였나요……?”
“어차피 죽어야 하는 자입니다.”
레이테도 안다. 그의 미래는 죽음뿐이다.
반역자의 사형은 왕이 귀족에게 보내는 경고 역할을 한다. 또한 레이테 자신에게는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할 것이었다.
죽음 외의 다른 선택은 없다. 숙부는 레이테의 세상에서 당장에라도 사라져야 했다.
그러나 그 당장이, 이런 식은 아니다.
“내……, 내 왕국의 적, 나의 반역자예요. 이 자는 내 손으로……!”
에르난이 아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피가 흥건한 검을 든 그의 모습에 레이테는 무심코 뒷걸음질 칠 뻔했다.
그는 남편이다. 레이테를 죽이려는 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테는 몸을 떨었다. 방금 막 사람을 죽인 저 검이 이제는 그녀를 찌를 것 같았다. 지나치게 차분한 그의 태도가 오히려 공포심을 부채질했다.
에르난이 손을 들었다. 검을 쥐지 않은 쪽의 손이었다.
손은 레이테를 향해 다가왔다. 레이테는 몸을 움츠리고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먼 곳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이다. 그와 함께, 지금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온기가 레이테의 손에 닿았다. 그녀에게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바로 레이테 자신이 남편에게 숱하게 주었던, 겉만 정교하게 다듬고 속은 텅 빈 부드러움이었다.
“여왕 폐하, 당신은 몸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레이테 제 것인 양 상냥한 말씨가 에르난의 소리를 덧입어 그녀의 귀에 들어왔다.
모두 그녀와 같았다. 레이테는 힘겹게 눈을 떴다.
남편은 그녀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따뜻하게 아내를 움켜쥔 손은 정중하면서도 달콤했다. 레이테는 어떤 위협도 느낄 수 없었다.
당장에라도 뿌리칠 수 있는 손이다. 그러나 레이테는 그에게 끌려 올라가고 있었다.
레이테의 가슴에 살포시 닿은 부부의 손은 다른 이들에게도 잘 보였다.
“피가 튈 일은 나의 몫, 당신이 다치고 더럽혀질 일은 이제 없습니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당신은 많은 일을 이룰 겁니다.”
밝아 온 아침에 안기며 어둑했던 접견실이 점점 환해졌다.
그곳의 주인인 여왕만이 시간이 멈춘 듯 굳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자신과 닿지 않은 남편의 다른 쪽 손, 그것이 쥔 무기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검에는 피가 흥건했다. 그러나 붉은 액체는 레이테에게 단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
“우리는 동등하게 하나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러니 내가 당신을 대신해, 당신이 되어 드릴 겁니다.”
나지막하게 감미로운 목소리. 레이테는 뻣뻣하게 굳은 목을 겨우 들어 남편을 마주했다.
죽은 자의 검붉게 산화한 피를 대신할, 산 자의 숨 쉬는 피가 바로 그의 눈 안에 있었다.
레이테는 비로소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손에 전해지는 온기는 가짜다. 얄팍한 계약서로 통제한다는 생각 자체가 웃기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한 남자에게서 벗어나고자, 다른 남자에게 자신의 목을 조를 족쇄를 넘기고 검까지 쥐여 주고 말았다.
그 검은 에르난의 검일 뿐, 레이테의 검은 아니었다.
남편의 검은 모든 이의 인정을 밑바탕 삼아 아내의 손과 발을 잘라낼 테고, 그녀는 결국 세상에서 존재 자체가 지워질 것이다.
* * *
부르고 대성당의 높은 천장에는 별이 떠 있다. 섬세하게 반짝이는 별 장식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천국에서 오는 양 찬란했다.
천국을 엿보는 기분이다.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역시 천국은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다.
천장을 바라보던 브라간사는 눈을 감고 고개를 내렸다. 사치스러운 제단, 경건한 성상, 정교한 창살 문, 그리고 무엇보다 왕관을 보고 싶지 않다.
지상에 발을 디딘 인간의 눈높이에서 보이는 존재란 눈부시게…… 역겹다.
“굉장해, 멋있어…….”
하지만 청각을 차단할 수는 없다. 리리우 공주는 그의 옆에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아, 드디어……!”
공주의 짧은 말만으로도 브라간사는 무엇이 이어질지 바로 깨달았다.
여자가 자신의 남편인 바르시나 왕자의 머리에 사크틸라 왕의 관을 씌울 것이다. 여자는 남편을 일으키고, 대주교는 그들을 축복하고, 부부는 몸을 돌려 회중을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환호성.
“두 분 폐하 만세!”
“만세!”
“사크틸라 만세!”
“만세!”
브라간사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불쾌함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박수가 쏟아졌다. 공주는 열심히도 손뼉을 쳤다.
오르간 연주가 시작되었다. 거대한 성당을 채우는 소리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누구를 축복하기 위한 연주인지 뻔하다. 음악에 잠시 취할 뻔한 브라간사는 다시 불쾌해졌다.
더군다나 웅장한 소리가 박수를 덮어 버린 탓에, 브라간사는 의식이 다 끝났다는 착각을 하고 말았다.
눈을 더 감았어야 했다.
빛나는 두 왕관과 그것을 쓴 부부를 보고야 말았다. 그들은 하필 헤젤 사절단 일행의 자리 옆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뒷모습만 보였다.
여자가 우아하게 늘어뜨린 은빛 머리카락은 천국을 보여 주던 별만큼이나 눈부셨다.
“와아, 예쁘다…….”
리리우가 중얼거렸다. 브라간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공주의 말에 동의한다. 뒷모습만 보이는 여자의 아름다움은 그에게 지옥을 알려주었다. 자신의 자리가 없는 지옥.
* * *
여자는 친척을 거절했다. 예상하던 바였다. 브라간사는 단지 여자가 청혼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할 뿐이었다.
매정하게도, 반응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여자가 궁금했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왕좌를 차지했고, 버텼으며, 기어이 승리했는가?
‘……지금도 에르난이 너무 보고 싶고…….’
단순히 운만으로 20여 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온몸으로 애절함을 연출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니 틀림없었다.
영리하게도, 여자는 혈육의 청혼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대신 혈육 자체에 대한 호기심만 드러냈다.
‘……어린 시절 가장 즐거웠던 기억입니다.’
오랜만에 회상하는 옛일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여자의 아버지는 브라간사를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아들인 양 챙겨주었다.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나, 브라간사는 정말로 그를 좋아했다.
그리고 여자는 아버지를 몰랐다.
‘……아시다시피 워낙 제가 어릴 때 떠나셔서…….’
여자가 높은 곳에 앉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핏줄이다. 하지만 여자는 핏줄의 연결을 실감하지 못한다.
그 사실이 브라간사를 흥분시켰다. 짜릿하면서도 진득한 우월감에 그는 도취되었다.
그의 손이 칼자루를 쥐었다. 흥분으로 손이 떨렸다. 무기를 가지고 들어올 수 있던 이유는 시종의 실수 탓이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우연은 브라간사에게 속삭였다.
‘저 여자를 죽이자.’
마침 여자의 눈이 검에 닿았다. 태연한 척하는 여자가 기특해 보여서, 정말로 죽이고 싶었다.
브라간사는 자신의 핏줄을 거들먹거리고 싶지 않았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랑거리가 아니니까.
말이 좋아서 양가가 모두 왕실 혈통이지, 그 위치는 하나같이 애매했다. 한 곳은 멀고, 한 곳에서는 의심받는다.
그나마 사크틸라의 왕관은 브라간사에게도 작은 가능성을 남겨주었다.
‘나는 그 가능성을 갖고 싶나?’
모른다. 다만 아름답기 짝이 없는 저 여자가 그것을 쓴 모습을 떠올리면 살의가 끓어올랐다.
* * *
대성당 앞 광장은 발 디딜 곳도 없이 사람으로 꽉 찼다. 광장은 그들이 내뿜는 열기로 가득했다.
뎅 뎅 뎅, 저녁을 알리는 세 번의 종소리가 울렸다.
“창조주의 천사가 모후께 아뢰니…….”
비좁은 가운데에서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올리는 기도는 경건했다. 기도가 끝나고도 사람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끼이익. 얼마 지나지 않아 성당의 정문이 열렸다. 건물 안에서 연주하는 오르간의 신비로운 울림이 먼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사크틸라 왕국의 두 왕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부부는 모두 금색 자수가 빼곡한 옷을 입고 붉은 망토를 덮었다. 그들은 똑같이 생긴 왕관을 머리에 썼다.
저녁 종은 울렸지만 사크틸라의 해는 늦게 진다. 아직 밝은 햇빛을 받은 두 왕의 왕관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창조주와 천상 모후께서 수호하시는, 지극히 높고 강력하신 도냐 레이테 여왕과 그녀의 남편 돈 에르난 왕을 위하여! 사크틸라 만세!”
“와아아아!”
“만세!”
“사크틸라! 사크틸라!”
왕을 뒤따라 나온 귀족의 장황한 외침을 시작으로, 함성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성직자, 귀족, 평민 모두가 환호했다. 성당 안에서 나온 귀빈들도 합류했다. 두 왕이 손을 들어 환호에 답하자 흥분은 더 짙어졌다.
한 왕은 모인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동정의 대상이었다.
아름답게 빛나는 여왕을 보며 사람들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의 행복을 빌며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자도 많았다.
다른 왕은 성인의 전설에 비견할 만한 용맹한 기사였다.
왕은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져 불행한 아내를 구했고, 아내에게 평화를 안겨 주었다. 그는 이제 사크틸라를 번성의 길로 견인할 것이다.
한참 손을 흔들던 두 명의 왕은 몸을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부부는 입을 맞췄다. 두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상대방의 입술은 차디찼다.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같이 완벽한 연출에 성공했다. 열렬한 환호성이 두 사람의 얼어 버린 입술마저 집어삼킬 듯 울려 퍼졌다.
두 왕의 위로 장미꽃잎이 팔랑팔랑 쏟아져 내렸다. 성당 정면의 지붕에서 뿌리는 꽃비는 하늘의 축복을 연상시켰다.
작은 꽃잎이 레이테의 콧등에 내려앉았다. 에르난이 손을 들어 그것을 집었다.
레이테가 에르난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의 왕이신 폐하.”
그녀는 남편인 왕의 손을 움직여 자신의 뺨을 감쌌다.
새틴 장갑의 부드러운 감촉과 은은한 장미 향이 느껴졌다. 레이테는 눈을 감고 잠시 그 향을 음미했다.
쏟아지는 진짜 장미보다 훨씬 더 향이 짙은 인공 향유였다. 레이테가 착용한 장갑의 향을 완전히 가릴 만큼 남편의 향은 짙었다.
레이테는 눈을 뜨고, 남편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언제나 함께하며, 어떠한 비밀도 없이 모든 것을 공유하고, 완벽하게 일치한 존재여야 합니다.”
매끈하게 한 자 한 자 또렷이 울리는 목소리에 감정은 없었다.
여왕의 눈은 어느 때보다 서늘한 빛을 내뿜으며 남편을 응시했다. 에르난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아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레이테는 마지막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거짓같이 달콤하게 말했다.
“우리에게 갈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두 왕의 결혼 계약서는 부부의 절대적인 동등함이 원칙이다. 그것을 잊지 않아야 그들은 부부일 수 있다.
아내를 바라보는 에르난의 얼굴에도 감정은 없었다. 그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맹세합니다.”
밝은 햇빛을 정면으로 받아도 그의 눈은 새까맣기만 했다.?
외전 : 758일째
#028
에르난 왕자는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가슴의 두근거림 탓이었다.
심장이 벌떡벌떡 뛰었다. 그는 가슴을 붙잡고 심호흡했다. 초조한 기분이 도통 가시질 않았다.
창가로 다가간 에르난은 닫힌 창문을 열었다. 새벽 공기가 추웠다. 그는 몸을 떨며 가운을 걸쳤다.
찬 공기에 이어 물을 한 잔 마시자 들뜬 호흡이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새 지저귀는 소리가 좋았다.
에르난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돌아섰다. 그는 잔을 내려놓고, 창 반대쪽 벽을 향하는 의자에 앉았다.
커다란 그림이 의자를 마주 보고 세워져 있었다. 에르난은 그것을 향해 말했다.
“당신이 나를 일찍 깨웠습니까?”
우아하게 반짝이는 은발과 보라색 눈을 지닌 여자의 초상화였다.
머리에 쓴 황금 왕관은 섬세한 문양과 보석으로 치장해 화려한 위엄을 내뿜었다. 그러나 여자의 고상함은 그에 지지 않고 맑게 빛났다.
그림 속의 여자가 지은 미소는 신비로웠다. 볼 때마다 매번 미묘하게 다른 느낌을 에르난에게 안겨 주었다.
오늘의 미소는 알쏭달쏭하다. 어째 에르난을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여전하다. 그러니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조금 놀랐지만……, 그래도 오늘은 무언가 느낌이 좋아요.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습니다.”
* * *
에르난의 기대는 박살 났다. 눈뜨자마자 느꼈던 두근거림은 분노의 전조였으며, 그림이 보인 정체불명의 미소는 결국 비웃음이 맞았다.
파견한 지 두어 달 만에 돌아온 사절의 보고는 간단했다.
“‘때가 되면 연락할 테니 기다리시오.’, 이상입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에르난은 손에 쥔 잔을 놓을 뻔했다.
이런, 새 옷에 술을 쏟을 수는 없지. 탁자에 얌전히 잔을 내려놓은 에르난은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물었다.
“대주교가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나?”
“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대주교는 대단히 짜증을 냈으며 면담은 5분여 만에 끝이 났습니다.”
머리에 피가 몰리는 듯했다. 에르난은 분노에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고 심호흡했다.
“……그 낯짝을 보려고 한 달을 기다렸는데 말이지.”
“송구합니다, 전하…….”
“먼 길 다녀오느라 고생 많았네. 이만 쉬도록 하게.”
“예, 전하.”
사절이 물러가자마자, 에르난은 손에 닿는 것을 집어 던지려다 간신히 도로 내려놓았다.
아직 술이 남은 유리잔이다. 깨트리고 난장판을 만들어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결혼을 할 마음이 있기는 한 거야?’
왕자는 약 2년 전, 이웃 나라 사크틸라의 여왕과 결혼을 약속했다.
결혼식을 치러 정식으로 부부가 될 때까지, 약혼 사실은 가능한 한 숨기기로 했다.
신부가 될 여왕의 안전 때문이었다. 여왕을 휘어잡고 전횡을 휘두르는 그녀의 숙부는 이 결혼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협상은 최대한 비밀리에 이뤄졌다. 결혼을 결정한 뒤로도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렴. 기다려야지.
여왕이 감금당했다는 흉흉한 소문만 퍼지는 가운데, 그녀와의 연락도 점점 뜸해졌다. 정확히는 그녀의 대리인인 시스로네스 대주교와의 연락이다.
인내는 결국 바닥을 보였다.
에르난은 사절을 파견했다. 결과는 이 모양이다. 기다리시오.
“대주교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사절과의 만남을 무려 한 달 가까이 미뤘다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나머지, 사절은 시스로네스가 주교관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암살이라도 할 기세로 덤벼 간신히 면담했다고 합니다. 내용이 심하게 허무하지만.”
프란세스크가 에르난의 손에서 유리잔을 빼 먼 곳에 놓았다. 사절은 프란세스크가 부리는 사람 중 하나였기에, 자세한 사정을 전달받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여왕이 감금당했다는 소문은 사실이라 합니다. 어쨌거나 잘 참으셨습니다. 솔직히 저는 술잔이고 뭐고 다 집어 던질 줄 알았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아니야.”
“아니, 이건 국왕 폐하가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뭐든 던지고 싶을 겁니다.”
“……후우.”
에르난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다녀올 걸 그랬나 봅니다.”
프란세스크는 에르난의 최측근인 데다 외국에서도 무례하게 대접하기 힘든 고위 귀족이었다. 공작인 그가 갔더라면 대주교도 한 달씩이나 만남을 미루지는 못했을 것이다.
에르난도 원래는 그를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프란세스크는 동생과 한판 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다. 그는 세속을 버리고 수도원으로 떠나겠다는 동생을 막아야 했다.
“요새는 좀 어떤가?”
“여전합니다. 제가 방에 들어가기만 해도 베개부터 과일 깎는 나이프까지 오만 물건을 다 던지며 쫓아냅니다.”
“카테리나 양이? 설마.”
“저한테는 가감 없이 폭력적이라서.”
나이프를 던진다니, 자칫하면 큰 사고가 날 텐데. 하지만 프란세스크라면 그 정도쯤은 간단히 피할 것이다.
“어지간하면 이제 화해하지 그러나? 아, 주말에 셋이서 점심을 같이하는 건 어떨까? 남매의 평화를 위해 오랜만에 동생과 성당에 갔다가, 낮에는 함께 왕궁에 들어와 식사하게.”
“감사합니다, 전하.”
프란세스크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별일 아닌 척해도 고충이 심했던 모양이다.
* * *
사절의 보고는 왕에게도 올라갔을 것이다. 에르난은 아버지와 결혼 문제를 의논하고 싶었다.
“폐하께서 바쁘시니, 나중에 다시 와 주십시오, 전하.”
시종은 무례하게도 왕자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에르난은 불쾌하지 않았다. 숱한 경험으로, 그 말의 속뜻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또?”
“……송구합니다.”
에르난은 코웃음 쳤다. 막아서는 이유는 뻔했다.
기가 막힌 부분은, 에르난은 부왕의 침실이 아니라 집무실에 찾아왔다는 점이다.
달칵.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어딘가 단정치 못한 차림의 여자가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본 순간 에르난은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여자는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일은 다 마친 모양이다. 에르난은 짜증을 억누르며 집무실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에르난은 곧바로 멈춰 서고 말았다. 의자에 앉은 왕의 위로 다른 여자가 올라타 있었다.
왕자는 ‘쾅’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아 버렸다.
“전하?”
“폐하께서 일이 아직 바쁘신 모양이네.”
“아, 이런…….”
에르난은 이를 갈며 자리를 떠났다.
* * *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에르난은 곧바로 편지를 썼다. 분노와 짜증이 섞여 글씨가 자꾸만 흔들렸다.
아내가 될 여자가 작은 성에 감금당했다고 들었다. 그녀의 남편이 될 내가 직접 아내를 구출하겠다.
에르난은 프란세스크를 불렀다. 왕자의 계획을 들은 그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진심이십니까?”
“그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르난, 당신 미쳤어요?”
과격한 표현을 듣고도 에르난은 화를 내는 대신 차게 웃기만 했다.
“여기서 기다리느라 미칠 바에야 뭐라도 저지르고 미치는 쪽이 낫겠지. 2년 28일째. 758일이나 기다렸어.”
“아직도 날짜를 일일이 세고 계셨습니까?”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바보 같고 한심했다. 왜 이러는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는 결혼을 약속했던 날부터 정말로 하루하루 날짜를 세어 왔다.
“당신은 처음에 이 결혼을 내키지 않아 했습니다. 언제 이렇게 생각이 바뀐 겁니까?”
“기다리느라 지쳤다니까.”
에르난의 목소리에도 기운이 다 빠져 있었다.
“아무리 당장 떠나고 싶으셔도, 준비는 필요합니다. 일단 며칠만이라도 참으십시오. 어차피 군사를 끌고 사크틸라를 치겠다는 의미는 아닐 테고, 여왕만 성에서 빼 오려 하시지요?”
“맞아. 몸만 가면 될 일이지.”
“안 됩니다.”
단호한 거절에 놀란 에르난은 의아한 눈으로 프란세스크를 바라보았다.
“전하는 결혼하러 가시지요?”
“그렇지.”
“신부에게 빈손으로 찾아가는 신랑이 어디 있답니까? 아무리 바빠도 갖출 것은 갖춰야 합니다. 최소한의 예물 정도는 챙기시지요. 나머지는 바르시나에서 천천히 보내면 됩니다.”
아,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당장 여왕을 빼내어 결혼식을 올릴 마음뿐이었다. 나머지 세부사항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역시 자네는 여자를 잘 아는걸?”
“전하의 무심함이 문제라고는 왜 생각 못 하십니까?”
에르난의 농에 프란세스크도 지지 않고 맞섰다.
“동생과의 식사는 다음으로 미뤄야겠군. 자네가 나와 동행하면 좋겠어.”
* * *
왕자와 그 친구는 사크틸라행의 준비를 시작했다. 위장 신분을 만들고 국경을 넘는 외진 길을 수소문했다.
여왕이 지내는 성의 지도는 수월하게 입수했다. 지금은 탐브레의 소유지만, 그 성의 첫 주인이 바르시나인이기 때문이었다.
근처를 오가며 장사하던 상인이 그곳에 반해 세운 성이었다. 따라서 애초에 방어용 성이 아닌 고로 구조가 단순한 편이었다.
상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아들이 보관하는 유품 중에는 지도를 비롯해 성과 관련된 자료가 많았다.
에르난이 성의 지도를 외우기에 바쁠 때였다. 그에게 편지 두 통이 왔다.
첫 번째 편지에는 익숙한 인장이 찍혀 있었다.
전하, 어쩌자고 그렇게 부주의한 사절을 보내셨습니까? 아무리 바르시나 사람의 성질이 급하다지만 이 지경일 줄이야!
부르고에는 감시하는 눈이 많습니다. 당장 제 보좌주교가 탐브레 편이란 말입니다.
간신히 그를 다른 곳으로 발령했습니다. 그가 떠나면 전하의 사절을 제대로 만나려 했지요. 그런데 눈앞에서 대놓고 바르시나 왕자의 사절이라고 말하면서 덤비다니요!
하여간 잘하셨습니다. 멍청한 탐브레라도 이 정도면 눈치를 챕니다. 여왕 폐하께서 머물 새 거처를 알아보는 데에 바쁘다더군요.
일단 폐하의 탄신일은 암보스에서 보낼 수 있을 겁니다. 귀족이고 군사고 있는 대로 긁어모아 폐하의 탄신일을 축하하러 가야겠군요.
다음 일은 저도 모릅니다. 아직도 여왕과의 결혼을 원하신다면 부르고로 오십시오.
여태껏 에르난이 받았던 대주교의 어떤 편지보다 엉망인 글씨였다. 화려한 서명마저 대충 휘갈겼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이럴 수가…….”
같이 편지를 본 프란세스크도 아연실색했다.
에르난은 한숨을 쉬며 두 번째 편지를 개봉했다. 인장도 서명도 없는 편지는 간결하고도 처절했다.
저를 이 감옥에서 구해 주신다면 당신께 저를 드리겠습니다.
* * *
더 이상 지체할 틈은 없었다. 에르난과 프란세스크는 경로와 짐 등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날이 밝으면 바로 출발하기로 약속하고, 에르난은 침실로 돌아왔다. 그는 피곤한 몸을 가누며 침대에 그대로 쓰러지려 했다.
그러나 곧 생각을 바꾸고 그림 앞으로 향했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여자를 알아볼 걸 그랬나요?”
에르난은 그녀를 향해 물었다. 아니, 자신을 향한 혼잣말이었다.
답은 뻔했다. 그는 직접 여왕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더는 뒤로 무를 수 없다.
애초에 다른 여자를 알아볼 생각 자체도 들지 않았다.
“……그래요. 현실적으로 결혼만 한다면 당신만 한 조건이 제겐 없습니다.”
에르난은 굴욕을 견디기로 결심했다. 더 먼 미래의 꿈을 택했다.
그런 채로 2년을 기다렸더니, 부풀었던 기대는 빠지고 짜증이 그 자리를 채웠다.
짜증은 오기로 변했다. 그리고 이제는 아예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 상상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사크틸라의 여왕과 함께하는 미래가 너무나 당연해져 버렸다.
“당신과의 미래…….”
며칠 전 아침에는 그를 비웃던 웃음이 지금은 슬퍼 보였다. 여왕이 쓴 것이 틀림없는 편지를 보았기 때문일까.
이 여자는 에르난의 충실한 조력자가 되어 그의 미래를 탄탄히 받쳐 줄 것이다.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왕이 될 에르난의 옆에는 이 여자가 함께해야 했다.
에르난은 팔을 뻗어 그림 속 여자의 입술에 손을 대었다. 거친 캔버스의 감촉이 느껴졌다.
곧 진짜 당신을 만질 수 있겠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러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 레이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