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남편의 권리
#016
남편과 맞는 아침이라고 특별함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테는 평소와는 완전히 딴판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동이 트기 전 일어나 기도를 하거나 책을 읽으며 정신을 깨우고 미사에 참석한다. 레이테의 일반적인 아침 일과는 이랬다.
그러나 해는 다 뜨다 못해 눈부실 만큼 침실을 밝혔고, 레이테는 침대에서 일어날 마음이 없었다. 아니, 나가고 싶어도 불가능하다는 편이 맞다.
숙취로 짐작되는 두통. 그리고 그녀를 묵직하게 압박하는 남편 때문이었다.
레이테의 이마에 닿는 단단한 가슴팍이 고른 숨을 쉬었다. 나른하게 아내를 감은 팔은 지난밤 굉장한 힘으로 그녀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러니까 어젯밤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취기에 홀려 조금, 아니 꽤 열심이었던 것 같지만 거기까지.
불쾌한 기억은 없다. 일찌감치 잠들기도 했고.
레이테는 다시 잠을 청하고 싶었다. 아침 미사? 진작 끝났을 텐데 무슨……. 그녀가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는데, 에르난이 몸을 뒤척였다.
“흐음, 레이테…….”
그는 아내를 더 강하게 끌어안고 입을 맞춰 왔다. 눈은 떴는지, 아니 잠이 깨기는 했나 싶을 만큼 초점이 어긋난 움직임이었다.
이마 끄트머리, 눈썹 위, 코 옆 등등. 맨정신이라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을 듯한 곳에 남편은 자꾸 입을 맞춰 왔다.
에르난은 급기야 아내의 코끝을 살짝 깨물었다.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에르난은 도대체 아내의 코를 무어라 인식했는지, 혀끝으로 간질간질 핥더니 자국을 남기려는 듯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일어나요!”
레이테는 벌떡 일어나서 남편을 냅다 밀쳤다.
* * *
“부인, 자. 수프도 드세요. 부드럽고 맛있습니다.”
레이테의 앞으로 숟가락이 쑤욱 다가왔다.
“제가 손이 없어 이걸 못 먹겠나요? 먹고 싶지 않아요.”
단호한 거절에 숟가락은 옆으로 슬금슬금 사라졌다.
“몸이 안 좋습니까? 혹시 어제도 제가 너무 무리했습니까?”
아내를 바라보는 에르난의 표정에는 불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또 쫓겨날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 것 아니고요, 과음했는지 머리가 조금 아파요. 그래서 더 잘 생각이었는데 누가 가만히 두질 않아서.”
“……미안합니다.”
도대체 코를 무엇으로 판단했기에 그런 짓을 했느냐고는 차마 남사스러워 묻지도 못하겠다.
레이테가 어찌나 세게 밀쳤는지 에르난은 침대에서 거의 떨어질 뻔했다. 베개까지 집어 들어 던지려던 레이테는 황급히 그를 붙잡아야 했다.
침대의 높이는 상당했고, 아무리 카펫을 겹겹이 깔아 두었어도 침실 바닥은 돌이다. 넘어졌다가는 망신을 넘어 큰 사고가 될 뻔했다.
정오가 거의 다 된 시각, 부부는 침실에서 간단한 식사 중이었다.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물만 마시는 레이테와 달리, 에르난은 수프 그릇을 깔끔하게 비웠다. 수건으로 입가까지 닦은 그는 베개에 몸을 파묻으며 재밌다는 투로 말했다.
“식사를 가져오던 시녀들 눈빛이 굉장하던데. 부부가 서로에게 홀딱 반해서 낮이고 밤이고 침실에만 있더라는 소문이 돌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그러라고들 해요.”
에르난은 아내를 향해 팔을 뻗었으나 레이테는 그를 무시하고 등을 돌려 누웠다.
여전히 머리가 아팠다. 헤레스를 좋아하지만 어제는 너무 과했다. 두어 잔 맛만 보고 끝내야 했는데 분위기에 먼저 취하는 바람에 술까지 취하고 말았다.
“차라리 의사를 불러 진료를 받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됐어요. 술 가지고 무슨……. 조금 쉬면 그만이에요.”
“알겠습니다. 저도 지금 이런 시간이 꽤 마음에 듭니다. 어제 누리지 못했던 것까지, 이틀 치 아침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느낌이랄까?”
능청스러운 반응에 레이테는 어쩐지 약이 올랐다. 레이테는 입을 삐죽이며 몸을 일으켰다.
“나갈래요.”
“잠깐, 잠깐, 잠깐. 미안합니다. 무리하지 말고 쉬어야지요.”
에르난이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자신에게 매달리는 남편의 과장된 몸짓이 퍽 우스워 레이테는 가볍게 물었다.
“당신, 나 좋아해요?”
“아니요.”
망설임 없이 나온 답변은 깔끔했다.
“…….”
“…….”
어색한 침묵이 그들을 휘감았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부부는 슬그머니 상대방을 향하던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이미 서로 잘 아는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상했다.
고민하던 레이테는 이윽고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녀는 남편을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그러면 보는 사람 없는 자리에서까지 왜 자꾸 당신 아내를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하나요? 착각할 만한 일은 하지 않는 편이 좋겠는데요.”
“착각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왜 그렇게 행동하느냐 물은 거예요. 대답하세요.”
고압적인 명령과 어울리지 않는 아내의 상냥한 목소리에 에르난은 쓴웃음을 지었다.
말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말하는 편이 그녀의 오해를 해소할 것이다.
“부인과 잘 지내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어째서일까? 답하기가 영 내키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오래전부터 제 꿈이었습니다. 사이좋은 부부 말입니다.”
마지못해 답하는 자신이 꽤 궁상맞게 느껴졌다. 이렇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에르난은 당황하여 말을 덧붙였다.
“그냥 문자 그대로 어릴 적부터 품은 낭만이라는 얘깁니다. 당신이 오해하지 않도록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맹세하는데, 낭만 이상의 꿍꿍이는 없어요. 답변이 되었습니까?”
에르난은 자신이 무척 긴장했음을 깨달았다. 유치하지만 차마 버리지 못한 소망을 밝히니 부끄러워서? 그렇지는 않았다.
대체 무엇일까. 에르난은 손에 잡히는 이불을 꽉 쥐었다.
“네, 잘 알겠어요. 이상한 말로 분위기 흐려서 미안해요.”
상냥한 목소리에 에르난은 정신을 차렸다. 레이테의 보드라운 손이 남편의 주먹을 덮었다.
“저 역시나 부부의 평화를 무척 환영한답니다.”
레이테는 방긋 웃었다. 그녀는 남편의 의견을 이해……. 아니,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표정도, 몸짓도, 목소리도, 오로지 예쁘게만 연마된 반응에서 진심을 느끼기는 무리였다.
그림같이 연출한 아내의 상냥함. 에르난에게는 아내의 이런 모습이 편했다. 그가 원하는 화목한 부부상에도 알맞으며, 정략적으로도 참하고 부드러운 인상이 나았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왜 자신은 실망하는가.
에르난은 그를 덮은 레이테의 손을 가볍게 잡아 올려 입을 맞췄다.
입술은 아주 살짝, 의례적으로 손을 스칠 따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입맞춤은 확실히 아니었다.
“평화로운 휴식을 보장해 드려야지요. 저는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점심때 만납시다.”
에르난은 아내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 *
“드디어 두 분을 함께 뵙는군요!”
심발로 백작의 기운찬 외침을 시작으로, 오찬장은 휘파람과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에르난은 밝은 웃음으로 손님들에게 화답하고 그의 자리에 앉았다. 결혼식을 치르고 이틀이 지났다. 식탁은 아직도 호화롭고 귀족들 역시 빠짐없이 자리를 채웠다.
“어서 와요. 아침을 걸러서 그런지, 허기를 참느라 혼났답니다.”
먼저 도착한 레이테가 올리브를 쏙 집어 먹었다. 우물우물 열심히 씹는 모습이 에르난의 식욕을 돋웠다. 그도 올리브 하나를 입 안으로 넣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두통은 괜찮으신지?”
“네, 다 나았답니다. 그래서 시간을 들여 열심히 꾸며 보았답니다. 아무래도 이틀 만에 제대로 밖으로 나왔으니까요.”
레이테가 어깨를 으쓱였다. 느슨하게 땋은 머리카락이 드레스 위로 드리워진 모습이 아름다웠다.
“당신은 무얼 했나요?”
“세스크와 검 대련을 했습니다.”
“세스크? 아, 리세우 공작 프란세스크던가요? 당신과 함께 암보스에 왔던 분?”
“맞습니다. 검 다루는 실력이 탁월한 친구라서 제가 많이 배우지요.”
“아까 심발로 백작에게 들었는데, 바르시나 귀족의 체스 실력이 사람 같지 않다더군요. 리세우 공 이야기 같은데…….”
“맞습니다. 그런 부류의 잡기에 능하거든요.”
부부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잡담을 나누며 식사를 했다.
‘이럴 줄 알았어.’
방금 막 양고기구이 접시를 비운 에르난은 포도주로 목을 적시며 힐끗 아내를 바라보았다.
침실에서 나올 때만 하더라도 그는 꽤 심란했다. 뒤숭숭한 감정을 도통 정리할 수 없었기에 프란세스크를 불러 점심 직전까지 격렬하게 검을 들고 다퉜다. 몸을 움직이니 마음도 가뿐해져 가벼운 기분으로 아내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레이테는 역시나 그를 반갑게 맞았고,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함은 전혀 없었다.
아내의 우아한 모습 너머로 불쾌한 위화감은 있다. 그러나 에르난은 그것을 일부러 파헤칠 생각이 없었다. 어쩐지 알아서는 안 된다는 거부감이 들었다.
레이테는 고기보다 곁들여 나온 졸인 사과를 더 열심히 먹었다. 아내의 한결같은 취향을 보니 에르난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걸렸다.
에르난은 이런 식의 소소한 흐뭇함이 좋았다. 어쩌면 어색함 자체가 혼자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유리잔에 담긴 포도주가 디저트와 함께 나왔다. 짙은 색의 술에 과일과 얼음이 아낌없이 들어간 호화로운 구성이었다. 시원하고 달콤해서 레이테는 무척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저러다가 또 취하겠다. 첫 잔을 순식간에 비우고 새 잔을 받아 마시려는 아내의 팔을 에르난이 살짝 붙잡았다.
“맛있긴 하지만, 두통이 다시 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러네요. 고마워요.”
레이테는 순순히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아예 몸을 돌려 에르난을 바라보았다.
“에르난, 이 술의 이름을 아시나요?”
“과일을 넣은 시원한 적포도주? 아니, 이런 답이라면 묻지 않으시겠지요.”
“상그리아(Sangria)라고 불러요.”
“익숙한 느낌의 단어인데…….”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고민하는 남편의 모습을 레이테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보았다.
“아, 혹시 피(Sangre)와 관련이 있습니까? 적포도주니까요.”
“맞아요. 보통은 이보다 조금 더 투명한 편인데, 오늘 것은 색이 무척 짙네요. 뭘 넣었을까? 아무튼 이걸 상그리아 바르시네스(Sangria Barcines)라고 부르고 싶은데, 어떤가요?”
“바르시나의 상그리아? 혹시 저를 뜻합니까?”
“네, 맞아요!”
레이테는 활짝 웃으며 일어나 잔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자, 에르난. 지금 이 잔을 보세요. 한낮의 쨍쨍한 빛을 받으니까 검게 보일 만큼 진하던 포도주도 예쁜 붉은색을 보여 주죠?”
각자 담소를 나누기에 바빴던 사람들이 일제히 여왕을 주목했다.
레이테는 그들이 여왕에게 집중할 시간을 잠시 준 다음, 남편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당신 같아요.”
그녀는 남편을 향해 잔을 살짝 기울였다. 에르난도 잔을 들어 화답했다.
여왕은 손님들을 향해 한 번 더 잔을 들어 올렸다. 레이테의 가까이에 앉은 시스로네스 대주교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그를 시작으로 박수와 환호성이 쏟아지며 모두가 상그리아를 마셨다.
자리에 앉은 레이테는 그녀와 남편의 잔을 가볍게 부딪치고 시원하게 포도주를 마셨다.
‘술 조심하랬더니 잘도 마시는군.’
레이테가 절반 정도 비운 잔을 내려놓았다. 에르난이 그녀에게 몸을 기울여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부인. 저를 생각해 이름 지어 주셔서 영광이지만 어째 조금 무서운 표현 아닙니까? 제가 배운 사크틸라어가 맞다면, 바르시나인의 피를 뽑는다는 의미도 될 텐데요. 혹시 바르시나까지 넘보십니까?”
“내가 왜요? 당신 아내로 있으면 저절로 바르시나의 여왕이 될 텐데. 있잖아요, 당신. 침실에서 나가라면 나가라는 의미이듯이, 호의는 호의로 받아들이면 안 될까요? 분위기 깨게.”
“왜 하필 침실 일을 예시로 듭니까…….”
에르난은 투덜거리며 허리를 펴 앉았다. 분위기 좋다 싶었더니 역시나 그녀다웠다.
“그리고 에르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러면 그렇지. 호의는 호의라지만, 레이테가 이유 없는 호의를 보일 리가 없다.
#017
‘상그리아 운운도 분위기를 띄우려는 용도였군.’
“무엇이든 말씀하시지요, 부인.”
에르난은 이어질 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레이테가 부탁할 일은 하나뿐이다.
“당신의 아내를 위해, 탐브레 백작을 없애 주세요.”
생각 이상으로 직설적인 말이었다. 에르난이 잠시 대답할 말을 고르는 사이, 대주교가 조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우렁찬 소리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두 분께서 부부가 되셨으니 이제 다음 일을 논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를 주목했다. 시스로네스의 시선이 에르난에게 향했다. 다른 이들도 대주교를 따라 자연스럽게 에르난을 보았다.
‘아예 이러려고 작정을 했구나.’
유난히 호화로운 식탁. 결혼식 후 다른 행사가 없는데도 돌아가지 않는 귀족들. 미처 의식하지 못한 것들이 뒤늦게 에르난의 눈에 들어왔다.
수십의 눈이 에르난을 응시했다. 에르난은 최대한 태연하게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마침내 여왕에게 도달했다. 에르난은 아내의 손을 살짝 쥐었다.
가녀리고 하얀 손. 에르난은 이것을 하루빨리 제멋대로 쥐었다 펴고 싶었다.
“당신은 저와 사크틸라의 용사님. 저를 악에서 구해 주셨으니, 이제 그 악을 무찌를 일만 남았어요.”
그러나 실상은 아내에게 끌려가기만 한다.
노골적으로 치켜세우는 말이 어처구니없었다. 이런 중에도 에르난은 그를 향해 웃음 짓는 아내의 아름다움이 좋았다. 거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취하고 만다.
“폐하, 손님들이 돌아가기 전에 반역자의 토벌 문제를 논의하면 어떨까요?”
“마침 모두 모였군요. 여러분께서도 대주교의 의견에 동의하시지요?”
“물론입니다, 폐하.”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이어지는 흐름에 에르난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것들이 아주 짜고 치는군.’
이어서 단숨에 식탁이 정리되더니 커다란 지도가 놓였다.
“아르파 공, 에르난은 사크틸라에서의 전투 경험이 없으니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여왕의 말에 중년의 귀족이 앞으로 나섰다.
“탐브레의 군대는 부르고에서 서쪽으로 40레구아 정도 떨어진 에스토르가에 있습니다. 백작의 본거지인 북서부로 향하는 관문입니다.”
“자신의 알맹이만큼은 반드시 사수하겠다는 의미 같습니다만.”
에르난이 말했다. 애초에 탐브레의 군사는 여왕이 보낼 토벌군에 대한 방어용이다.
“그렇습니다. 아울러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도주하기도 쉽습니다. 북서쪽 탐브레로 빠르게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아니면……, 이쪽으로 도망칠 수도 있습니다.”
아르파의 손이 북쪽의 산악 지대를 넓게 쓸었다. 좁고 복잡한 골짜기가 어지러울 만큼 엉켜 있었다.
“이 지역으로 가면 제법 골치 아플 겁니다. 험한 산세에 기후마저 습해서 병사의 사기에 좋지 않습니다. 탐브레 쪽은 상대적으로 산악 지형을 잘 알기에 따라잡기도 힘들고요. 따라서 공격만큼이나 도주로의 차단이 중요합니다.”
“폐하, 이쪽을 보시겠습니까? 에스토르가 북동쪽의 레히오는 부르고만큼이나 크고 부유한 대도시입니다. 이곳은 여왕 폐하의 대리관이 통치합니다만, 그는 탐브레의 조력자지요.
하지만 부르고에서 이곳까지의 도로는 예부터 꽤 잘 닦여 있어서 아군의 이동이 매우 용이합니다. 따라서 본진을 치기 전에 이곳부터 점령하기를 제안 드립니다.”
아르파에 이어 말하는 시스로네스는 지도를 보면 바로 알 만한 부분까지 굳이 설명했다. 손가락으로 길을 그려 주는 성의까지 더해서.
에르난도 눈이 있다. 길도 도시도 잘만 보였다. 대주교의 배려가 이방인에 대한 과도한 친절함인지, 아니면 얕봄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대주교의 주장은 타당했다.
“그렇다면 북서쪽은 어떻게 막는 편이 좋겠습니까?”
“그쪽은 제가 맡아야지요. 논의를 마치는 대로 영지에 돌아갈 예정입니다.”
아르파가 답하며 손가락으로 에스토르가 남쪽을 가리켰다. Arpa라고 적힌 산악 지대 끄트머리였다. 그의 영지다.
“최전선에 계셨던 셈이군요. 고충이 많으셨겠습니다.”
“뭐, 그럭저럭 버틸 만합니다.”
아르파는 어깨를 으쓱였지만 썩 가뿐하지 않았다. 압박이 끈질겼을 테니 지친 모양이었다.
시스로네스가 계속 말했다.
“아르파 공의 군사는 잘 단련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레히오는 일이 잘 풀리면 대규모 전투를 치르지 않을 수도 있지요.”
“저희 쪽으로 회유하겠다는 말씀입니까? 가능할까요?”
“당연하지요. 적장이 탐브레잖습니까? 섭정이라는 직위 하나만으로 버텼으나, 능력도 인망도 턱없이 부족한 멍청이라서 무려 20년이라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별로 쌓은 힘이 없습니다. 수중의 조카만이 그의 밑천이었으나 여왕께서는 자유의 몸이 되어 결혼하셨지요.
사크틸라에 이제 탐브레는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치워 마땅한 암 덩어리지요. 이런 상황이니 레히오의 지배층이 바보가 아니라면 한창 고민 중일 겁니다. 탐브레의 편이라던 왕실 대리관마저도.”
무슨 성직자가 말을 저렇게 험악하게 하나. 에르난은 감탄했다. 하긴, 에르난을 상품 취급할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
대주교의 난폭하고 살벌한 표현에는, 탐브레를 향한 혐오감이 가득했다.
에르난이 알기로, 평범한 수도사였던 시스로네스는 레이테의 아버지인 선왕에게 발탁되었다. 그를 신임한 왕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시스로네스를 주교로 임명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의 수도사가 왕의 은혜를 입어 교회의 귀족이 되었다. 그래서 선왕의 정당한 후계자를 핍박하는 탐브레에 대한 증오가 큰 것일까.
“부르고가 공격받을 가능성은 있습니까? 레이테의 안전이 확실해야 합니다.”
여왕은 싸움에 참여하지 않고 부르고에 남는다.
“절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폐하. 설령 공격받는다 해도, 이곳의 방어는 으뜸입니다. 원군을 기다리며 버틸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되도록 빨리 끝내야겠습니다. 시간을 끌수록 전황도 복잡해질뿐더러 북부 지역이 황폐화될 겁니다.”
귀족들의 시선이 에르난을 향했다. 기대에 찬 눈이다. 그는 이런 흥분되는 부담감이 좋았다.
“에르난, 저와 같은 생각이시군요! 기뻐요.”
여왕은 조금 과장된 반응을 보였다.
눈을 반짝이며 남편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퍽 아름다웠기에, 에르난은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안아 주었다. 레이테는 당연하다는 듯이 남편에게 몸을 기대 왔다.
사크틸라는 바르시나의 군사적 조력이 필요하지 않다. 이 자리에 모인 귀족의 수와 그들의 기세, 준비 상황을 보니 확실했다.
하지만 그들을 통솔할 지휘관이 여태 없었다.
왕 아래 모인 이들이다. 왕은 마땅히 그들을 지휘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왕은 여성이었다.
여성이 전장에 나가지 말라는 법은 없다. 전쟁 영웅으로 유명한 성녀의 이야기도 있지 않나. 그러나 누구도 여왕의 참전을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레이테도 마찬가지였다.
에르난은 여왕과 처음 만난 날의 일을 떠올렸다. 위협하는 척하기 위해 목에 들이댔던 칼에 보인 레이테의 과민반응이 수상했다. 무언가 관련이 있을까?
“두 분의 의견 일치를 보니 뿌듯하군요. 역시 완벽하게 하나가 되실 운명입니다.”
대주교의 말에 에르난은 쓴웃음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아내는 남편에게 상반신만 기대었을 뿐, 몸을 완전히 맡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 *
회의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끝났다. 에르난은 지친 몸으로 처소에 돌아왔다. 저녁 식사가 간단히 준비되어 있었다.
“에르난? 왜 혼자 식사하십니까? 여왕 폐하는요?”
스튜의 남은 소스를 빵에 발라 먹는데 프란세스크가 나타났다.
“금요일 저녁이니 금육재(禁肉齋)를 지키기 위해서 물과 빵만 간단히 드시겠다는군. 다른 귀족들도 비슷한 모양이야. 아니면 여왕이 저러는 데 차마 거창한 식사를 할 수는 없으니 나처럼 개별적으로 해결할지도.”
“……금육은 사순절에만 하는 것 아닙니까?”
“교리에 따르면 매주 금요일이라던데. 자네는 알고 있었나?”
“처음 들으니까 여쭌 거지요. 아무튼, 아르파 공작에게 받아 온 자료입니다. 식사 마치고 검토하십시오.”
프란세스크가 서류 꾸러미를 탁자에 놓았다.
에르난은 마지막 빵조각까지 전부 삼켰다. 부드럽게 익힌 고기 스튜는 소박한 생김새에 비해 풍미가 깊어서 남은 소스까지도 맛이 좋았다.
“이렇게 맛있는데 레이테는 거르다니 안타까워. 아, 금육재를 지킨다면 당연히 술도 안 마시겠지?”
그는 포도주가 든 술잔을 쥐고 까딱까딱 흔들었다.
별생각 없이 한 말이지만, 어쩌면 아내에게 지금은 조금 고통스러운 시간일지도 모른다. 술을 꽤 좋아했으니까. 좋아. 아내 몫까지 마셔 줄 테다.
“글쎄, 제 얘기를 들으면 별로 여왕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실 겁니다.”
“말해 보게.”
“여왕은 대주교와 함께 밤 기도에 참여한다던데요. 식사조차 건너뛰었을 줄은 생각지 못했지만.”
술잔을 흔드는 손이 멈췄다.
“지긋지긋한 시스로네스. 레이테가 있으면 꼭 그자가 따라붙어.”
에르난은 단숨에 포도주를 들이마셨다. 느긋하게 음미할 기분이 아니다. 프란세스크는 쓰게 웃으며 빈 잔에 포도주를 채워 주었다.
“여왕과 대주교는 꽤 잘 맞는 사이 같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20년 대 20일, 여왕이 누구를 믿겠습니까.”
답은 알지만 말하고 싶지 않았다. 프란세스크가 술잔을 건네주자, 에르난은 또 한 번에 술을 마셔 버렸다.
“어차피 우리는 장기전입니다. 일단 눈앞의 전망은 나쁘지 않아 보이고요. 오늘 회의 분위기 꽤 좋았잖습니까? 폐하께 거는 기대가 커 보였습니다. 저에게도 이것저것 묻길래 열심히 답해 줬지요.”
“자네도 바람몰이에 일조했군.”
“귀찮은 혹은 빨리 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아. 그렇지만 어째 계속 떠밀리기만 하는 느낌이라 썩 유쾌하지 않아.”
에르난은 다시 채워 달라는 듯이 술잔을 툭툭 두들겼다. 프란세스크는 술을 따르는 대신 말했다.
“누구에게 떠밀린다는 말씀이십니까. 여왕? 아니면 대주교?”
“……둘 다려나.”
“대주교야 언젠가 배제해야 할지 모르지만, 일단 그 사람만큼 유능한 조언자도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대주교 문제에 지나치게 초조해하시는군요.”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췄다.
프란세스크는 자신의 주군에 대해서 꽤 예민한 감각을 지녔다. 에르난은 그가 자신의 뜻을 알아줄 때면 꽤 즐거워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속내를 들켜 부끄러웠다.
“그냥 사적으로도 꼴 보기가 싫어. 그는 나를 깔보고 있어.”
에르난은 프란세스크의 시선을 피하며 변명하듯 내뱉었다. 하지만 어색함만 더 늘었다. 그는 아예 직접 잔을 채울 생각으로 술병으로 손을 뻗었다.
“시스로네스가 성직자라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무슨 말인가? 나는 그 사람에게 갑옷이라도 선물할 생각도 해 봤는데. 그쪽이 더 어울리겠더라고. 군사 회의에서 어찌나 적극적이던지…….”
“성직자가 아니었더라면, 폐하께서는 시스로네스를 여왕의 애인이라고 의심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물론 애인을 둔 성직자야 세상에 넘쳐나지만, 설마 자식뻘의 여왕과 그런 관계는 아닐 거라 믿고 싶군요.”
에르난은 잠시 멍하니 프란세스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세스크, 정말이지 나니까 그러려니 하고 듣네만 다른 곳에서 그런 말은 하지 마.”
“당연히 당신 앞이니까 하는 얘깁니다.”
“말만으로도 끔찍하군. 물론 나는 대주교가 애인이나 자식을 숨겨 뒀다고 해도 놀라지 않겠어. 하지만 레이테는 성직자와 사통할 사람이 아니야. 이건 확실해.”
에르난은 지나칠 만큼 세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왕을 의심하십니까?”
“아니라고 했잖아. 듣기만 해도 기분 나빠지는 이야기야.”
프란세스크는 싫지 않지만, 조금 전 그의 이야기를 들은 자신의 귀는 씻어 버리고 싶다. 귀 대신 목이라도 씻을 기세로, 에르난은 잔에 포도주를 가득 따랐다.
“그걸 질투라고 부릅니다.”
에르난의 움직임이 멈췄다. 주륵, 잔에서 포도주가 넘쳐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