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에 비친 왕관-2화 (2/15)

2장 : 화약고에 차린 신방

#010

한참 말없이 서류를 읽던 레이테는 깊은 한숨과 함께 종이를 내려놓았다. 결혼 계약서였다.

“남편은 아내가 상속받은 권리를 대행? 맡길 생각 없는데요. 공동 군주라는 말만 쓰면 안 되나요?”

“송구하오나, 결혼 서류에는 반드시 들어가는 내용입니다. 법이 그러니까요. 폐하, 실질적인 이익을 생각하십시오. 대신 부부의 일치와 동등을 강조하는 교회법 조항을 권리 대행보다 앞에 두었습니다.”

불만에 찬 여왕을 달래는 이는 시스로네스 대주교다.

“대체 누구를 위한 법이죠? 적어도 여왕인 나는 아닌 게 확실하군요. 하긴, 20년이 넘도록 나를 왕 취급하지 않는 사크틸라니.”

레이테는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쏘아붙였다. 전에 없던 날카로운 반응에 대주교도 난감한지 말을 흐렸다.

“폐하, 그것은…….”

“됐어요. 이런 얘기 할 때마다 대주교께서 난감하신 건 알아요.”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레이테도 잘 알았다. 그저 모든 일에 꼬투리를 잡을 만큼 자신이 예민해졌을 뿐이다.

대주교는 다른 종이를 여왕에게 건넸다.

“헤젤 국왕의 이름으로 온 서신입니다. 미사여구는 제쳐 놓고 이쪽을 바로 보시지요.”

시스로네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양국의 결합을 위해 더 진지하고 실질적인 의논을 원합니다. 탐브레 등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헤젤은 여왕 폐하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겠습니다. 사절을 보내려 하니 가능한 일정을 반드시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레이테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가볍게 툭 쳤다. 헤젤을 잊을 뻔했다.

나이가 지긋한 홀아비인 헤젤의 왕은 젊은 시절 사크틸라와 무려 세 차례나 전쟁을 벌였던 호전적인 자다. 그리고 이제는 뻔뻔하게도 미혼인 아들 대신 자신이 직접 여왕에게 청혼했다.

“어차피 헤젤 측도 협상의 진전은 기대하지 않을 겁니다. 폐하의 동향을 감시하고 싶을 뿐이겠지요. 늑장 부리다가 지금 연락하다니, 왕자의 소문을 확인하기 위한 수작일 겁니다.”

“사절은 협상가가 아니라 하객이 되겠네요.”

레이테가 빈정거렸다.

애초부터 그녀는 헤젤 왕과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단호히 거절할 수도 없었는데, 대외적으로 탐브레가 주선하는 혼담이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일이지만.

“이번에도 적당히 핑계를 만들어 물리겠습니다.

‘여왕께서는 거주 환경의 변화로 건강이 상하셔서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추후 신중히 이야기합시다…….’

결혼 발표 후 항의가 들어온다면,

‘젊은이 둘이 만나 서로 눈에 불꽃이 튀었다는데 늙은이가 어떻게 말립니까?’

정도로 둘러대지요.”

여왕의 짜증을 풀어 주려는지 시스로네스가 익살스레 말했다. 레이테는 풋 웃었지만, 마음 한쪽이 바늘로 찔리는 듯했다.

‘설마 뭔가 알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레이테와 에르난은 만나자마자 분위기에 휩쓸려 정말로 일을 저질러 버렸으니까. 그녀는 고개를 슬쩍 숙여 서류에 집중하는 척했다.

“으흠, 빨리 검토하고 보내겠어요.”

“알겠습니다. 폐하, 오늘 중으로 서명까지 마치면 좋겠습니다.”

대주교가 나가고, 집무실로 사용하는 방에는 레이테 홀로 남았다. 레이테는 머리를 쥐어뜯을 듯이 움켜쥐었다.

계약서는 결혼식 때 사제 앞에서 할 혼인서약과 별개로, 철저하게 정략적인 내용으로만 가득했다. 여왕의 목표를 위해 있는 힘껏 다듬은 글이다.

목표. 통치하는 여왕.

까마득했다. 에르난을 볼수록 그 길이 멀어 보였다.

에르난의 청혼으로부터 열흘이 지났다. 결혼식이 다가올수록 설렘보다는 짜증과 불안만 커졌다.

반면에 에르난은 여유가 넘쳐 보였다. 본래 성격이 그러한지, 그런 척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숙부, 탐브레 백작은 조카의 탈환을 포기하고 군사를 모으기에 바빴다. 백작의 영향력이 강한 북부 지역에서 그런 정황이 계속 포착되었다.

레이테가 결혼하면 탐브레는 더 이상 여왕을 조종할 수 없다. 그러니 차라리 무력을 써 여왕을 쫓아내려는 속셈인 듯했다. 그는 진짜 반역자가 되었다.

시스로네스도 백작에게 맞설 군대를 정비하느라 바빴다. 결혼식 준비나 신경 쓰지 성직자가 웬 군인 같은 행동을 하냐며 기겁하던 에르난이 떠올랐다. 사크틸라에서는 원래 이렇다는 타박만 들어야 했지만.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하는 부분도 있었다.

“백작은 반드시 살려서 데려와야 합니다. 목숨만 붙어 있다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 않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만들어야지요.”

그들은 살벌한 대화를 나누면서 탐브레에 대한 적의를 불태웠다. 대주교야 그렇다 쳐도, 에르난이 이렇게 된 데에는 아무래도 숙부가 조카를 겁탈하려 한 정황을 직접 목격한 탓이 커 보였다.

정작 레이테 본인은 그때의 일이 실감 나지 않았다.

에르난이 막아 주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날 하루 자체가 모두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일까? 숙부가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게 여길 만큼 그에 대한 기대가 없는 탓도 있겠다.

두려움에 떨 만한 기억 따위는 어차피 따로 있다. 레이테는 순식간에 오한을 느꼈다.

‘일이나 하자.’

여왕은 계약서를 다시 집어 들었다.

다시 읽는다고 변하는 것은 없다. 그래도 레이테의 손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확인하고 싶었다.

‘전체적인 내용은 확실히 내게 유리해 보이니, 에르난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꽤 상할 테지.’

자존심이 상하기는 레이테도 마찬가지였다. 노골적으로 에르난을 구속하는 이유는, 그만큼 통제에서 벗어난 남편이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이니까.

* * *

저녁 무렵, 성의 회의실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그들의 시선은 중앙의 레이테와 에르난에게 향했다.

“결혼식에 앞서, 두 분 사이의 여러 문제를 정리하는 계약을 맺겠습니다.”

계약서를 손에 든 대주교가 천천히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사크틸라의 여왕 도냐 레이테는 바르시나의 왕위 계승자 돈 에르난을 배우자로 맞아들인다.

부부는 완벽하게 일치한 단일존재이며 서로 동등한 관계다.

사크틸라의 법전에 근거하여, 남편은 사크틸라의 여왕인 아내가 상속받은 권리를 대행할 수 있다.

에르난은 작게 코웃음 쳤다.

이 계약서의 주도자는 아내다. 남편은 아내의 요구를 따르는 존재일 뿐이었다.

남편은 아내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 옛 제국의 법에서 시작한 관습에서, 재산의 의미는 점점 확대되어 금전뿐만 아니라 사회적 권리까지 포함했다.

그런데 그 권리만 애매모호하게 말할 뿐, 은근슬쩍 재산이라는 표현이 사라졌다. 틀림없이 일부러 뺐을 것이다.

‘남편에게 돈 한 푼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참으로 결연하군.’

일치와 동등을 말하는 교회법 조항도 속임수다. 이 계약은 평등하지 않다.

당연했다. 원래 남편이 다 가져야 마땅한 것을 아내와 공유하게 되니 사실상 불평등이다.

부부는 사크틸라의 왕권을 공유하여 공동왕으로서 왕국을 함께 통치한다.

군주의 모든 행위는 두 사람의 이름으로 시행한다. 서로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둘 중 누구든 공식 문서의 서명이 가능하나, 역시 두 사람이 함께 동의한 것으로 간주한다.

수입원과 사법권 또한 함께 관장하며 세금의 수입은 상호 합의에 따라 사용한다.

이제는 한숨이 터져 나오려 했다. 에르난은 힘겹게 그것을 참았다.

‘기어이 이렇게 대놓고 적을 줄이야.’

공동왕 체제의 의도야 일찌감치 파악했다. 함께 통치한다는 말도 기만이다. 에르난은 확신했다. 여왕은 남편에게 자신의 어떤 권리도 공유하지 않을 것이다.

공유는 거짓이다. 이런저런 경제권을 상호 합의한다지만, 물론 에르난의 몫은 없을 것이다.

‘탐욕스러운 놈들.’

위 사항은 돈 에르난이 바르시나의 왕위를 계승할 때에도 동일하게 적용한다. 아내는 남편과 함께 바르시나의 왕권을 공유하여 동등한 권한을 행사한다.

여왕은 이 부분에도 공동 통치라는 표현을 넣으려 했다. 하지만 아내가 남편의 권리를 갖는 사례는 존재하지 않았다. 남편의 나라를 함께 통치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지나치게 말도 안 되는 조항은 바르시나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에르난은 힘겹게 여왕을 설득했다. 아니, 마지막까지 우겨서 간신히 문제의 표현을 삭제했다.

각 왕국의 합법적인 계승자 고유의 권한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교 추천권을 포함한 인사권은 왕국의 계승자가 독점한다.

에르난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인사권 없는 권력이 권력이야?’

그는 강력히 반발했다. 하지만 여왕 측은 끄떡없었다. 오히려 주교 추천권이라는 표현을 굳이 더하기까지 했다. 교회에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니, 시스로네스의 입김이 틀림없다.

왕위와 재산의 상속 역시 별도로 이뤄져야 한다. 두 군주 중 어느 한쪽이 먼저 사망해도 남은 배우자는 두 왕국의 단일 통치자가 될 수 없으며 공유 받았던 권한을 모두 상실한다.

왕위는 사망한 왕의 혈통만이 계승 가능하다. 재산의 상속 또한 동일하다.

따라서 왕권의 공유는 배우자가 살아 있는 기간에 한정한다.

이제야 결혼법을 정상적으로 따르는 내용이 등장했다. 아내 사후의 상속 문제. 유일하게 아내를 위한, 아니 아내의 집안을 위한 내용이다.

그마저 에르난의 눈에는 악질적으로 비쳤다. 여왕 사후에 남편은 완전히 버려질 것이다.

위 사항을 결혼의 신성함에 걸고 맹세한다.

1469년 5월 3일, 성 십자가 축일, 사크틸라 왕국의 부르고에서

“이의 사항이 있으십니까?”

대주교가 낭독을 마쳤다. 에르난은 침묵했다. 일방적으로 그에게 불리한 계약이지만 인정, 아니 포기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화려하게 사고를 치며 이곳까지 왔다. 무조건 결혼하는 수밖에 없다. 여왕 측은 에르난의 사정을 잘 알기에, 이런 뻔뻔한 계약서를 그에게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왕자 전하께 양해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왕국의 질서를 위해서라도 반란분자의 제거가 최우선입니다. 잘 아시지요?”

“예. 그러니 공동왕의 정식 선포는……, 탐브레를 소탕한 뒤에 합시다.”

에르난은 쥐어짜듯이 답했다.

현실적으로는 대주교의 말이 옳았다.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 어느 정도 예상하던 바였다. 하지만 이래서야 결혼 계약서가 아예 용병 계약서로 느껴질 정도다. 보수는 왕관.

“상황을 이해해 주세요. 당신은 반드시 이 나라의 왕이 될 거예요.”

레이테의 고운 손이 에르난의 팔에 살포시 닿았다. 차분히 타이르는 목소리는 그의 귀에 달콤하게 감겨들었다.

‘속으면 안 돼.’

에르난은 이를 악물었다. 여왕의 상냥함은 우위에 선 이의 여유일 뿐이다.

물론 여왕도 에르난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에르난의 권위를 세워야만 부부의 동등함을 이유로 그녀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해합니다, 폐하.”

에르난의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여왕은 방긋 웃었다.

“폐하, 전하. 이제 서명해 주십시오.”

대주교가 계약서를 그들에게 건넸다.

에르난은 침착하게 서명했다. 손이 살짝 떨리면서 잉크가 방울져 떨어지기는 했으나 들끓는 속에 비하면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레이테도 서명을 마쳤다. 에르난이 그녀에게 말했다.

“후우, 레이테. 적어도 결혼식을 치를 때까지는 잠시 계약은 잊읍시다. 일단은 결혼이라는 상황을 즐겨요.”

그의 손이 레이테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처음 만날 때보다 얼굴이 더 야윈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신이 행복한 신부이기를 바랍니다.”

레이테는 눈을 살짝 깜박일 뿐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에르난을 달래던 때와 달리 무미건조한 모습이었다.

에르난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결혼은 정해졌다. 그녀나 자신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차피 하는 결혼, 잠깐이라도 복잡한 계산에서 멀어져 결혼 자체에 취하고픈 낭만은 자신만의 꿈일까.

“왕자께서 옳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폐하, 앞으로 복잡한 일이 쏟아질 겁니다. 하지만 결혼이란 인생에서 둘도 없이 중요한 일 중 하나입니다. 기쁘게 맞이하십시오.”

시스로네스가 맞장구쳤다. 그의 의견은 에르난과 같았다. 하지만 자신이 말할 때와 그의 말을 들을 때의 기분은 상당히 달랐다.

한가한 생각이다.

대주교는 에르난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은 에르난을 향한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 파악 하라는 꾸짖음처럼 들렸다.?

계약서에 서명한 다음에는 예식 절차에 대한 간단한 의논이 이어졌다. 결혼식은 이미 준비 중이므로 이런저런 사항을 확인하는 절차에 가까웠다.

두 사람이 완벽하게 정식 부부가 되기 전까지 결혼식은 되도록 비밀을 유지한다. 탐브레 백작과 그 세력, 헤젤의 국왕 같은 여왕의 다른 청혼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더군다나 신랑과 신부 모두 돈을 이곳저곳에서 빌릴 정도로 넉넉지 못하기에, 규모는 작고 절차는 간소히 한다.

이야기를 마친 레이테는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성 십자가의 행렬을 보러 간다는 이유였다.

에르난은 처소에 돌아오자마자 털썩 의자에 주저앉으며, 뒤따라온 프란세스크에게 말했다.

“이곳에 온 이후 여왕과 이야기를 나눠 본 일이 손에 꼽을 지경이야. 그녀에게 소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은 알겠어. 더군다나 여왕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르는 시스로네스가 자꾸 거슬리는군. 십자가 행렬? 결국 종교 행사잖아.”

“동의합니다, 에르난. 그렇지만 너무 성급해할 필요는 없어요. 아무리 지금까지 대주교가 여왕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한들, 여왕과 가장 가까운 관계가 될 사람은 당신입니다. 부부잖아요. 전하답지 않게 자신감 없는 모습입니다?”

“자신감의 문제가 아니야. 초조할 뿐이지.”

왜 그럴까? 시스로네스는 자신이 에르난의 머리 위에서 놀고 있음을 무척이나 잘 알았다. 그 태도가 거슬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레이테의 무심함을 마주할 때마다 화가 난다. 그녀는 결혼을 앞두고도 정말로 아무 감정을 느끼지 않나?

“……하아.”

에르난은 크게 한숨 쉬었다. 아무래도 결혼을 앞두고 불안한 사람은 레이테가 아니라 자신인가 보다.

* * *

레이테는 의자에 앉아 머리를 손질 받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차가운 색만큼이나 살풍경하게 아래로 쭉 뻗은 직모다. 머릿결은 좋지만, 지나치게 날카롭고 딱딱해 보이기 일쑤라 세심하게 다듬어주어야 했다.

그래서 시녀 둘이 레이테의 양쪽에 서서 열심히 머리를 꼬고 땋아 올렸다.

마주한 거울에 보이는 자신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 화장 탓일까?

머리를 만지기 전, 레이테의 은발에는 새하얀 피부가 어울린다며 조아나가 열심히 분을 발라 주었다. 지나치게 열심히.

‘이게 어디 오늘 결혼하는 사람 얼굴이람.’

화장만 탓하기에는 지나치게 생기 없는 안색이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레이테는 거울을 보고 살짝 웃음 지었다. 장밋빛으로 곱게 물들인 입술이 보기 좋은 형태로 말려 올라갔다. 두 눈도 그에 호응하여 곡선을 그렸다. 복숭앗빛 뺨과 말아 올린 풍성한 속눈썹이 화사함을 더했다.

‘이만하면 괜찮을까.’

숱하게 연습해 온 웃음이었다.

인상이 차가우니 의식적으로 상냥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 무해함을 증명해야 한다. 레이테의 생존법은 그런 식이었다.

“어머나, 폐하.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하긴, 오늘 드디어 왕자님과 결혼하는데!”

“악당에게서 여왕 폐하를 구출한 백마 탄 왕자님의 이야기로 부르고 전체가 들썩였답니다.”

레이테의 표정 연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시녀들의 목소리는 신부 본인보다 더 흥분에 들떠 있었다.

비밀 결혼이라지만, 실상 그것은 안전한 부르고 내부에서만 실컷 요란을 떤다는 의미가 되어 있었다.

공주를 구하는 기사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에르난의 이야기가 퍼진 탓이다. 마침 그가 레이테와 탔던 말은 하얀 털을 지녔다. 전설 속 호르헤 성인이 탄 백마처럼.

레이테가 비웃었던 이야기의 주인공이, 이제 그녀의 남편이 된다.

그렇기에 레이테는 즐겁게 웃을 수 없었다. 에르난이 자신을 구한 데에 기사도 따위는 당연히 관련이 없다.

하지만 여론이 그렇게 믿는다면 전설이 된다. 애초에 전설에는 사실 여부가 중요하지 않으니까.

전설을 이용해 자신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에르난의 노림수일 뿐이다.

여론몰이 자체는 시스로네스 대주교가 먼저 시작했다. 외국인 왕에게 가질 수밖에 없는 거부감을 없애고자 인기가 많은 성인인 호르헤를 이용했다.

의도 자체에는 레이테도 동감했다. 그렇기에 입이 썼다. 위험한 줄 뻔히 알면서도 두 팔 벌려 있는 힘껏 환영해야 하는 현실이 싫었다.

“즐거운 줄은 알겠지만, 더 서두르세요.”

한쪽에 선 조아나가 눈치 없이 신이 난 어린 시녀들을 꾸짖었다. 조아나는 오래전부터 레이테를 시중들었다. 여왕의 웃음이 진심이 아님을 눈치챘을 터였다.

레이테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미소를 지었다. 조아나를 향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머리를 완성한 다음에는 결혼식 드레스를 입었다. 새하얀 드레스에는 레이테의 머리카락 색과 흡사한 은색 실로 섬세한 수가 놓여 은은하게 반짝였다. 드레스 위로 금빛 테두리가 호화로운 가운을 한 겹 더 입었다.

목에서 빛나는 사치스러운 보석은 2년 전, 서면으로 결혼을 약속했을 때 에르난이 보냈던 선물이다.

바닥에 끌리는 긴 베일을 머리에 쓰고, 마지막으로 왕관을 얹었다.

금으로 만든 왕관은 묵직하게 레이테의 머리를 짓눌렀다.

왕관을 썼을 때에는 고개를 똑바로 세우도록 의식해야 한다. 긴장을 놓으면 금방 목을 앞으로 뺀 보기 흉한 자세가 되고 만다.

이 왕관에는 레이테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 중 하나가 서려 있었다.

* * *

레이테는 열한 살 때 신앙의 성숙을 증명하는 의식에서 처음으로 왕관을 썼다. 너무 어렸을 때는 왕관이 머리보다 컸기 때문이다.

열한 살도 아직 어린아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신 아래 겸손해야 할 자리에서 왕관의 착용이 올바른지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왕관 착용을 주장한 이는 시스로네스였다. 어려도 이제 충분히 사리분별이 가능한 나이므로 여왕다운 위엄을 보여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는 의식을 집전할 추기경을 설득하고, 섭정인 탐브레를 설득했다.

레이테는 왕관이 신기했다. 어린 여왕에게 그것은 여전히 크고 무거웠다. 그녀는 왕관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목을 뻣뻣하게 굳혀야 했다.

하지만 추기경이 레이테의 이마에 성유(聖油)를 바를 때,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다.

레이테가 고개를 살짝 든 순간, 무게중심이 곧바로 머리 뒤로 쏠렸다. 왕관은 단숨에 벗겨져 머리 뒤로 넘어갔다.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질 뻔한 왕관은 탐브레 백작이 받아 냈다. 그는 여왕의 대부로서 의식이 진행될 동안 레이테의 바로 뒤에 서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당황해 눈물을 글썽이던 레이테에게 숙부는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어 보이고서 조카의 머리에 다시 왕관을 씌워 주었다.

아주 천천히, 느릿느릿하게.

그것은 왕관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던 욕망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 * *

부끄러운 기억에 숙부가 함께했으며, 또 그 과거가 하필 결혼 직전인 지금 떠오른다는 사실에 레이테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탐브레 백작.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을 강제로 지배한 남자.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레이테는 에르난과의 결혼을 택했다.

하지만 새로운 가족, 남편으로 맞아들이는 에르난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이름만 다를 뿐, 탐브레와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까?

레이테는 두려웠다. 그래서 신부는 진심으로 웃을 수 없다.

준비를 마친 레이테는 결혼식이 열릴 대성당으로 이동했다. 문 앞에서 에르난이 레이테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일이 눈앞을 가로막아서 또렷이 보이지는 않으나, 그는 금색과 붉은색 조합의 호화로운 차림새였다.

“레이테.”

여왕을 부르는 에르난의 목소리는 지극히 상냥하고 감미로웠다.

여왕이 그러하듯이, 그의 부드러움 또한 가짜일 것이다.

에르난이 레이테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테는 자신의 손을 그 위에 포갰다. 에르난은 신부의 손을 살포시 쥐었다.

정중한 동작이었으나, 에르난의 손에서는 레이테를 결코 놓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힘이 느껴졌다. 천천히 한 걸음씩 옮기며 두 사람은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 * *

결혼식은 시스로네스 대주교의 주례로 진행되었다.

하객의 수는 여왕의 결혼식치고는 적었다. 여왕을 확실하게 지지하는 이만 엄격하게 골라 초대했기 때문이다.

결혼식 자금은 이곳저곳에서 빌려 힘겹게 마련했다. 하지만 빈궁한 기색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성당이 원체 화려한 탓이다.

금으로 장식한 화려한 제단화는 하객은 물론이요,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 신부마저 압도했다.

바르시나의 성당에도 저렇게까지 화려한 장식은 없다. 에르난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긴 축문을 다 읊은 대주교가 예식서에서 눈을 떼었다. 그는 에르난을 똑바로 바라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

“남편은 아내를 마땅히 존경하고 대등한 반려자로 여기며, 영원한 생명의 은혜도 함께 누릴 것으로 믿고 성자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

축복의 단어로 가득한 말은 사실상 경고다. 에르난은 실소를 터뜨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부부는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에르난은 레이테의 얼굴을 가린 베일을 천천히 뒤로 넘겼다.

신부는 새하얀 피부를 살짝 붉힌 수줍은 모습으로 신랑을 맞이했다. 자수정처럼 빛나는 보랏빛 눈은 우아함을 한껏 머금었다.

레이테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웃음은 순백의 신부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에르난 또한 자연스럽게 같은 웃음으로 답했다. 그의 눈이 뜨겁게 일렁였다.

부부는 서로를 끌어안고 입술을 포갰다.

입맞춤은 깊었다. 그러나 결혼식의 품위를 훼손할 만큼 격렬하지는 않았다.

맞닿는 얼굴의 각도도, 살포시 감은 눈도, 적당하게 껴안은 팔도, 살짝 비튼 상체까지도 모두 그림처럼 완벽한 모습이었다.

* * *

탁자 위에는 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십자가가 있었다. 작은 불꽃이 켜진 초는 수수하지만, 금으로 세공한 호화로운 촛대에 꽂혀 있다.

레이테는 그 앞에 꿇어앉아 두 손을 꼭 모으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기도에 집중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애초에 심란함을 다스리고 싶어 억지로 눈을 감았을 뿐이다.

얇은 슈미즈 사이로 스며드는 찬바람이 슬슬 견디기 힘들어질 때쯤, 문이 열리고 저벅저벅 걷는 소리가 레이테의 등 뒤로 다가왔다.

“신방에까지 십자가라니……. 사크틸라의 신심은 대단하군요.”

“어지간한 곳에는 다 있지 않나요? 사크틸라만 이러나?”

“으음……, 성물과 한곳에서 이것저것 하려는데 어째 불경죄를 짓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의외네요. 그런 것을 염려할 만큼 종교적 감수성이 예민한 분은 아닌 줄 알았는데.”

레이테는 감은 눈을 뜨고 모은 손을 풀었다. 에르난이 다가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손이 레이테의 길게 풀어헤친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로 넘겼다. 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에르난은 그곳에 입을 맞추며 레이테의 슈미즈를 끌어내렸다. 네크라인이 깊게 파인 부드러운 옷은 손쉽게 어깨를 드러냈다.

“자, 잠깐만요. 여기서 하지 말고…….”

“혹시 신 앞에서의 혼인 서약이 아직 부족하다는 뜻인 줄 알았지요.”

에르난은 쿡쿡 웃으며 레이테의 귀에 속삭였다. 훅훅 불어넣는 숨이 간지러워 레이테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귓바퀴를 따라 뜨겁고 말캉한 것이 닿았다. 레이테의 입에서 들뜬 소리가 새어 나왔다.

“흐응…….”

레이테는 붕 뜨려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으며 에르난의 손을 꽉 쥐었다.

“여기서는 싫다니까요……!”

카랑카랑한 외침이었으나 묘하게 힘이 없다.

“그래, 알겠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보이는 취미는 없습니다. 다만 오로지 우리 둘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을 뿐입니다.”

에르난은 레이테의 목덜미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녀가 붙잡지 않은 다른 쪽의 팔로 아내의 허리를 감았다.

“가실까요, 부인.”?

에르난은 아내를 침대로 이끌었다. 무릎을 침대 위에 걸친 그는 레이테를 껴안으며 키스했다. 입술과 입술, 혀와 혀가 엉키고 뜨거운 숨결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흐읏…….”

애달픈 재촉이 포갠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아내를 품에 안은 채, 에르난은 아내를 조심히 눕히고 그 위로 올라탔다.

에르난은 혀를 얽으며 마지막으로 깊게 레이테를 맛봤다. 길었던 입맞춤이 끝나자 두 사람은 달아오른 얼굴로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요.”

에르난의 말에는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나 있었다. 그의 눈은 승리를 기뻐하며 붉게 번뜩였다.

그것을 본 레이테는 흠칫 몸을 떨었다.

슈미즈를 벗는 짧은 시간 동안, 에르난은 아내를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그는 조금 전까지 보았던 레이테의 달아오른 얼굴과 봉긋 솟은 가슴의 오르내림을 떠올렸다.

하지만 맨몸의 에르난이 아내를 내려다보자, 방금 전까지 뜨거운 키스를 나누던 여자의 얼굴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당황했다.

“잠깐만요.”

레이테는 몸을 일으켜 자신에게 올라탄 남편을 밀쳤다. 단호한 팔에 맞서지 못하고, 에르난은 얼떨결에 그녀의 위에서 내려왔다.

“레, 레이테……?”

달콤한 첫날밤에 이런 얼빠진 목소리라니, 에르난은 자신이 잠깐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당황이 더 컸다.

아내는 열기가 싹 사라진 창백한 얼굴과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은색 머리카락은 칼날같이 살기 어린 빛을 띠었다.

“에르난. 내 남편.”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움 따위는 조금도 느낄 수 없이 쌀쌀맞았다.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혐오스러운 양.

“그래요, 내 사랑.”

에르난은 답하자마자 후회했다.

얼어붙은 분위기를 녹여 보고자 한 말이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말은 두 사람 중 누구에게도 스며들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사랑은 허공을 떠돌며 침대 위의 냉기만을 더했다.

“전에도 느꼈는데, 당신은 사랑이라는 말을 참 쉽게 하네요.”

레이테가 빈정거렸다.

“사랑을 말하는 이유는 나를 속이기 위해서인가요, 당신 스스로 속고 싶어서인가요?”

이런 이야기를 꼭 지금 해야 하나? 이때, 이 자리에서만큼은 불신과 적의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짜증과 분노, 그리고 약간의 서운함이 에르난을 감쌌다.

“우리는 서로의 결합 목적이 또렷한 사이잖아요? 믿을 수도 없는 부담스러운 망상은 쓸모없어요.”

무엇을 기대했기에 자신은 서운해하나. 에르난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그려지려다 말았다.

“우리는……, 그래. 좋아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부부의 의무를 다하면 되지요.”

“그러려 했는데 당신이 막았잖습니까.”

에르난이 불평하자 레이테는 코가 닿을 만큼 남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곧 입을 맞출 거리다.

그녀는 입술을 포개는 대신, 남편의 눈을 찌를 기세로 노려보았다.

“다른 꿍꿍이는 허락하지 않아요. 내가 모를 것 같나요? 드디어 여왕을 정복한다 생각하니, 기뻐서 참기 힘들지요?”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의 그 눈. 무척 솔직하더군요.”

각도나 빛에 따라 붉은 기운이 감도는 눈은 아무래도 지나치게 속내를 드러낸 모양이다. 한창 예민한 레이테가 그 불길함을 놓쳤을 리는 없다.

“정복? 좋아요. 원하면 하세요. 다만 믿지도 않을 사랑 같은 껍데기는 쓰지 말고요.”

레이테가 몸을 일으키더니 자신의 슈미즈를 끌어내렸다. 맨살이 모두 드러나자 그녀는 어깨를 잠깐 움츠렸지만, 이내 꼿꼿하게 가슴을 폈다.

갖고 싶은 여자의 몸을 비로소 정면으로 마주했다. 에르난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다소 앙상하게 느껴질 만큼 도드라진 쇄골의 날카로운 인상은, 봉긋한 젖가슴의 부드러운 탄력에 파묻히고 만다. 유연하게 굽이치는 허리의 곡선과 적당히 가느다란 팔 또한 완벽했다.

하지만 그는 손조차 뻗을 수 없었다.

“아무리 정복한들, 당신은 내 남편이죠. 그 이상은 기대하지 말아요.”

첫 만남 때 말했던 주인을 가리키나?

레이테를 갖고 싶다. 그 욕망에 튀어나왔던 말이었다.

에르난은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부부는 완벽하게 일치한 존재이며 서로 동등한 관계라고 했습니다.”

결혼 계약서의 내용이다. 레이테의 눈이 단숨에 동요했다.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요. 우리는 하나가 될 겁니다.”

에르난의 손이 레이테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아내의 입술을 가볍게 쓸었다. 에르난의 손끝에는 아주 엷은 온기와 미세한 요동이 전해졌다.

“어떻게 믿죠?”

“그야 계약서에 서명했잖습니까. 오늘은 신 앞에서 혼인 서약도 했고요.”

에르난은 어째 서러움이 복받쳐 왔다. 신방에 들어온 지가 언제인데 다 벗고 여태 뭐 하는 짓이지? 답답함에 에르난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증명이 얼마나 더 필요합니까? 부인께서는 어땠을지 몰라도 저는 2년 56일을 기다리며…….”

그때 레이테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습니까?”

“네, 재밌어요. 결혼을 약속하고, 오늘 실제로 식을 올리기까지 며칠이나 걸렸는지 정확히 셀 정도로 저를 기다렸나요?”

“물론입니다. 대주교는 당장 결혼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혼사를 밀어붙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786일을 질질 끌었잖습니까? 그동안 저는 당신 초상화만 봐야 했고……, 후우. 설마 당신조차 내 지조를 의심합니까?”

“지조?”

실수했다. 에르난은 어색하게 목청을 가다듬으며 화제를 돌리려 애썼다.

“아, 흐흠……. 뭐,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고…….”

“뭔가 사연이 있나 보네요. 일치를 위한 우리의 첫 번째 노력은, 과거의 기억 공유가 어떨까요?”

적대감도 동요도 온데간데없이, 레이테는 어느덧 호기심에 가득한 눈만을 빛냈다.

“좋은 말씀 하셨습니다만, 첫 번째는 좀 더 인상적인 편이 좋지 않을까요?”

에르난의 손이 슬그머니 레이테의 몸을 더듬었다. 침착함을 유지하며 태연한 척. 이상한 이야기로 흐르지 말고 부부의 의무를 행하자.

그러나 레이테는 가차 없었다. 그녀는 단호하게 남편의 손을 뿌리쳤다.

“앞으로 질리도록 할 텐데, 첫 번째까지 꼭 이럴 필요 있나요? 자, 딴청 부리지 말고 당신의 지조에 대해서나 이야기하세요.”

목소리만 상냥할 뿐 고압적이기 짝이 없는 명령이었다. 에르난은 울컥했다.

“이러다 밤 다 새겠습니다! 부인, 당신께는 첫날밤의 낭만도 없습니까?”

레이테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첫날밤은 무슨 첫날밤이래요! 우리가 만나자마자 뭘 했는지 잊었어요?”

“그때야 손만 댔지 제대로 하지도 않았잖습니까!”

“그러니까, 남편께서 가진 그 잘난 것을 꽂아 씨를 뿌려 넣어야 비로소 했노라 말할 수 있다?”

“…….”

노골적인 표현에 에르난은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남편의 입을 다물게 한 데에 만족한 레이테가 다시 몰아붙였다.

“당신이 말했죠. 겁탈은 아니고……, 뭐더라. 상호 합의에 따른 육체적 즐거움의 공유? 이게 성교가 아니면 대체 뭐죠?”

“성교란 후손을 얻기 위한 생산 활동으로서…… 부인, 제가 들어올 때까지 기도하던 분이 맞으십니까…….”

에르난은 맥 빠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이야기나 하고 있나. 에르난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상에 기도 안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나요? 그래서 다들 신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교접하나 보네요. 생명의 생산이 목적은 아닌 것 같지만. 참, 그런 쪽으로 당신 집안의 명성이 꽤 자자하지요?”

“저는 아닙니다!”

반쯤 넋이 나가 있던 에르난이 곧바로 발끈하여 말했다.

“진짜로요……?”

사크틸라 여왕의 친족은 숙부뿐으로, 없느니만 못한 존재다. 반면, 바르시나의 왕자에게는 형제도 친척도 많았다. 다만 대다수는 합법적이지 않은 관계로 세상에 태어났다.

특히 에르난의 아버지, 바르시나의 국왕이 여자에 탐닉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편이었다.

“아……, 이런, 당신 집안을 모독했군요. 실례를 저질렀어요. 미안해요.”

매끈하게 잘 꾸민 목소리에 비해 사과는 깔끔했다. 변명 없이 정직한 표현이었다.

“괜찮습니다. 솔직히 사실이니까. 하지만 저는 난잡하게 살지 않으려고 정말로 애썼단 말입니다. 친구의 여동생과 잠깐 대화만 나눠도 문란한 망나니가 되지 말라며 꼬투리를 잡혀 서러웠는데, 이제는 아내까지……. 대체 제 정조를 뭐라고 보는 겁니까!”

에르난은 억울했다. 아버지의 사생활 때문에 아들인 자신이 오해를 산다. 하필 아내와의 첫날밤에 이런 상황이 펼쳐졌다는 사실도 모두 울분이 터졌다.

“어라, 혹시 아까 얘기했던 지조가 그 이야기인가요? 더 말씀해 보세요.”

신방을 얼리던 냉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레이테는 커다랗고 푹신한 베개에 몸을 파묻고서 남편을 재촉했다. 나긋나긋한 명령조가 유혹적이었다.

한숨을 크게 쉰 다음, 에르난은 결혼을 약속하던 당시의 일을 털어놓았다.

대주교에게 상품 취급당했다는 말까지 들은 레이테는 한참을 웃었다. 에르난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카테리나 양은 수녀의 삶을 원하는데, 집안의 반대가 심합니다. 하지만 이미 스스로를 신의 신부라고 여긴 지 오래입니다. 남의 여자를 탐내면 안 되고, 애초에 관심도 없습니다. 의심 안 하셔도 됩니다.”

“후훗, 안 해요, 그런 거.”

레이테로서는 남편이 망신당한 일화가 보통 재밌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민망했던 기억을 제 입으로 아내에게 풀어냈더니 에르난은 기운이 쫙 빠졌다.

그때, 불현듯 에르난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과거에는 오해를 샀다지만 이제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 부부의 일에 대주교가 끼어들지 않으면 좋겠군요.”

신혼답게 뜨거운 첫날밤 따위는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어차피 글렀다면 차라리 실리를 찾자. 침대 위에서 이미 오만가지 이상한 말이 오갔는데, 무슨 말을 더 못 하겠는가?

남편의 진지한 태도와 달리, 레이테는 심각한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한참을 더 웃었다.

“그런데 지조를 말씀하시는 분께서, 그때는 왜 그러셨죠? 아, 혹시 하다 만 이유가…….”

“잠깐! 동정과 불능은 서로 다른 의미입니다. 부인, 저도 알 만한 것은 알고 관심도 많단 말입니다.”

에르난은 이제 아무래도 좋을 기분이었다. 정복은커녕 아내에게 완전히 말려들어 멋대로 다뤄지고 있다.

알면서도 화는 나지 않았다. 거부당하지는 않으니까.

“흐응, 그토록 순결한 분께서 합법적으로 취하게 될 여자를 만나니 참을 수 없어졌나요? 아니면…….”

레이테는 반쯤 누운 몸을 일으켰다. 에르난의 뒤로 다가간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의 몸을 밀착했다.

등에 닿는 아내의 감촉은 푹신하면서도 자극적이었다. 에르난은 긴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레이테는 남편의 귀에 속삭였다.

“아니면, 참을 수 없을 만큼 레이테 ‘여왕’이 탐났나요?”

에르난은 자신의 귀에 착 감기는 소리를 잠시 음미했다. 달콤한 울림이었다.

남편의 폐부를 정면으로 찌르는 내용은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오히려 오싹한 쾌감을 그에게 선사했다.

“맞아요. 여왕을 갖고 싶습니다.”

레이테의 코웃음 치는 소리가 작지만 또렷하게 에르난의 귀에 꽂혔다. 여왕은 양팔로 남편을 끌어안고 나른하게 말했다.

“그런 솔직함, 좋네요. 남편에 대한 호감이 살짝 생겼어요. 딱 그만큼은 당신을 관대하게 바라볼 수 있겠어요.”

“좋은 소식이군요.”

에르난은 자신을 안은 아내의 팔을 붙잡았다.

“부인, 저는 허튼소리나 반복하며 밤을 새우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을 당장 안고 싶어요. 처음 만난 날의 일? 제가 끝내고 싶어 끝냈습니까? 당신 숙부의 병사가 방해한 겁니다.”

“아, 맞는 말이네요. 좋아요. 그때 다하지 못했던……, 아까 당신이 하려던 일을 해 볼까요?”

관대해질 수 있겠다더니, 레이테는 단숨에 너그러워졌다. 웃음을 선사한 데에 따르는 보상 같은 느낌이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아내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다시 붉은빛이 선연히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명백하게 정욕을 말하고 있었다.

에르난은 아내를 다시 눕히고 입을 깊게 맞췄다.?

질척이는 타액 소리가 난잡했다. 부부는 상대의 몸을 끌어안고 살의 감촉을 탐했다.

레이테의 다리가 에르난의 몸에 감겨들었다. 에르난은 레이테의 가슴을 손안에 쥐고 탐하기에 바빴다.

“에르난…….”

잔뜩 달아오른 아내의 애원에 흥분한 에르난의 손놀림이 거칠어졌다.

“아, 흐응!”

집요한 손길에 레이테의 신음이 커졌다. 그녀 또한 남편을 더듬는 손길을 멈출 수 없었다. 넓고 단단한, 자신의 몸과 다른 남자의 감촉은 신기했다.

에르난은 자신의 몸을 아래로 낮추어 아내의 곳곳을 탐했다. 부드럽게 키스하고, 살짝 깨물기도 했다. 그때마다 레이테는 떨리는 숨을 뱉어냈다.

“잠깐.”

에르난이 허리를 레이테에게 밀착할 때였다. 레이테가 양손으로 남편의 가슴을 밀쳤다.

그는 당황했다. 아내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조심했는데…….

“걱정하지 말아요. 원하는 것이 있어서 그래요.”

“뭡니까? 어서 알려 줘요.”

에르난이 재촉했다.

레이테는 남편의 밑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거침없이 남편을 밀어 눕히고 그의 위에 올라탔다.

“……!”

“당신만 이러라는 법은 없잖아요?”

남편을 내려다보는 레이테의 두 눈이 반짝였다.

“부인, 이런 것은 대체 어디서 배웠습니까?”

“호기심이 왜 당신한테만 있다고 생각해요?”

“교회에서 말하기를, 부부관계에서 남성이 위에 있는 자세가 임신에도 용이하고 바람직하며…….”

“신앙심도 없는 분께서 오늘따라 종교에 신경을 많이 쓰시네요. 혹시, 여자 아래에서는 할 줄 모르나요?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거나?”

“아닙니다.”

그는 재빨리 부정했다.

아내의 두 다리 사이에 자신이 있다. 허리 아래로 피가 더 쏠리는 듯했다. 아내에게 짓눌린 에르난의 허리께에는 축축함이 느껴졌다.

에르난은 천천히 시선을 위로 향했다. 날렵하게 굴곡진 허리선과 아래에서 바라보는 가슴은 미치도록 선정적이었다. 그 위로 흘러내린 은발이 빛났다.

“당신은 내게 자신을 바치겠다고 말했지요.”

“아래에 놓인다고 제가 바쳐지는 겁니까?”

“제 위에서 당신이 나를 어떻게 봤는지 알아요? 당신 의식도 똑같이 생각할걸요.”

얄미운 목소리에 에르난은 오기가 생겼다. 하지만 그 마음은 잠시 미뤄 두기로 했다. 그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좋습니다. 원하는 대로 저를 취하시지요.”

레이테가 손을 내려 에르난의 기둥을 쥐었다. 생각보다 뜨겁고 단단한 감촉에 놀란 레이테는 순간 손을 뗄 뻔했다. 아내의 손이 흥분되는지 에르난이 몸을 떨었다.

그녀는 엉덩이를 들어 조금씩 움직였다. 축축이 젖은 입구와 기둥의 끝이 서로 닿았다. 레이테가 잠시 몸을 떨고 천천히 엉덩이를 내렸다. 단단한 것이 닫혀 있던 틈을 갈랐다.

“으윽…….”

그녀는 더 움직이지 못하고 통증에 신음했다.

“아직 밤은 한참 남았으니,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여유로운 척하지만 에르난은 잔뜩 안달이 난 듯했다. 도발적이기도 했다. 레이테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다음 엉덩이를 곧바로 내렸다.

몸 깊숙이 들어오는 이물질이 어색했다. 레이테는 통증에 찌푸려지는 눈을 간신히 떴다.

남편의 눈에 감도는 붉은 빛이 보였다. 불쾌하지 않았다. 욕망이 번뜩이는 그것은 오히려 대단히 유혹적이었다.

레이테는 다시 몸을 아래로 내렸다. 좁은 틈을 가르는 고통은 여전하지만 한결 더 매끄러웠다. 그녀는 조금씩 흥분에 물들기 시작했다.

“흐응…….”

쾌감에 사로잡히기는 에르난도 마찬가지였다. 몸부림치고 싶어 안달이 날 만큼 자극적이었다.

에르난이 팔을 뻗었다. 그는 레이테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에 가득 들어오는 살덩이를 음미하며 허리를 들썩이고픈 충동을 버텼다.

“흐응, 앗…….”

민감한 곳들을 동시에 자극받자 레이테는 당황했다. 안절부절못하며 신음하는 사이, 그녀는 마침내 남편의 위에 완전히 주저앉았다.

“하아…….”

레이테가 긴 숨을 몰아쉬었다. 에르난은 그녀의 가슴을 쥐던 손을 미끄러뜨려 허리를 천천히 매만졌다.

“어때요? 괜찮습니까?”

“글쎄…… 이런 느낌은 처음이에요.”

레이테는 천천히 앞뒤로 움직여 보았다. 낯설고 수줍은 데다 이물에 저항하는 몸의 통증도 여전했다. 하지만 묵직하게 꽉 찬 느낌은 좋았다.

아내가 편히 움직일 수 있도록, 에르난은 그녀의 양 허벅지를 붙잡았다. 성기를 압박하는 살덩이가 슬금슬금 움직인다. 지독히도 짜릿했다.

에르난은 그녀를 더 느끼고 싶어 허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레이테는 몸을 흠칫거렸다.

“읏! 아파. 이상해요. 가만히 있어요.”

레이테는 작은 자극도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부인, 위아래로 움직이면 어떻겠습니까?”

잠깐 망설이던 레이테가 허리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내려오며 남편을 안으로 받아들였다.

그 순간, 에르난은 뛰어오를 뻔했다.

“윽!”

“에르난? 아픈가요?”

아내에게 대답할 정신은 없었다. 살짝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짜릿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는 아내를 붙잡은 손에 힘을 꽉 주고 애원했다.

“레이테. 제발, 더……!”

간절히 쾌락을 갈구하는 남편의 모습에 레이테는 온몸이 확 달아올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능적인 감각을 쫓는 움직임은 서툴렀지만 점점 바빠졌다.

“아, 하아…… 응, 아앗!”

자잘한 고통도, 잡다한 감정도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레이테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맨살끼리 부딪칠 때의 마찰음이 진득했다. 그 소리는 최음제가 되어 두 사람을 더 흥분으로 몰아갔다.

에르난이 다시 허리를 들썩였다. 레이테는 거절하지 않고, 어설프게나마 그와 움직임을 맞추면서 남편이 주는 자극을 받아들였다.

“앗, 흐응……! 하아…….”

쿵쿵 몸을 내리치던 레이테는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지친 그녀가 앞으로 쓰러지려 하자 에르난의 팔이 그녀를 받쳤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상반신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은 자세가 되었다.

“나를 붙잡으면 훨씬 편할 겁니다.”

에르난이 아내에게 입을 맞춰 왔다. 말캉한 혀가 입 안을 애무하자 레이테는 기분 좋게 몸을 떨었다. 그녀의 팔이 남편을 껴안았다.

입술이 서로 떨어졌다. 두 사람은 어쩔 줄을 모르고 몸부림치며 서로를 탐했다.

“아, 으응……! 아, 아읏, 앗, 아…… 흐앗!”

정신없이 끓어오른 정욕이 이내 터지고 말았다. 레이테는 자신의 안쪽에 뜨거운 무언가가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후우……. 레이테…….”

부부는 땀에 젖은 서로의 몸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힘들어…….’

온몸을 휘감은 나른함은 나쁘지 않았다. 레이테는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레이테는 눈조차 뜨기 싫을 만큼 기운이 없고 피곤했다. 그러나 몽롱한 가운데에서도 남편이 그녀의 살결을 빨아들이는 자극만은 점점 또렷해졌다.

“흐응…….”

아내의 가슴골에 얼굴을 파묻고 흔적을 남기던 에르난이 고개를 들었다.

“일어났네요. 괜찮습니까?”

에르난은 더없이 상냥한 투로 속삭였다.

“몰라, 피곤해요. 더 잘래요…….”

침실은 여전히 어두웠다. 날이 밝은 것 같지는 않다. 레이테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안 됩니다.”

그때, 단호한 목소리가 레이테를 붙잡았다.

에르난이 순식간에 아내의 위로 올라탔다. 레이테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무슨 짓이에요!”

레이테는 남편을 밀치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에르난의 팔에 붙잡히고 말았다.

“우리는 일치와 동등을 서약했습니다.”

아내를 내려다보는 에르난의 눈이 핏빛으로 번뜩였다.

위험 기류가 가득한데도 레이테는 저항할 수 없었다. 그녀를 짓누르는 남편의 힘 때문만은 아니었다. 불길한 두 눈에 자신이 붙잡힌 것만 같았다.

“마, 맞아요. 그래서요? 일단 좀 내려와서 말하면 안 될까요?”

“동등한 관계인데 왜 저만 몸을 바쳐야 합니까?”

“뭐……? 꺅!”

몸을 숙인 에르난이 아내의 가슴을 입에 머금고 빨아들였다.

“흐읏……!”

그녀는 남편을 밀치지도 못하고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막 잠에서 깨 몸에 힘이 없기도 했거니와, 야릇한 농락에 몸이 곧바로 열기를 띠며 반응한 탓이다.

에르난의 손이 아내의 다리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젖은 입구를 확인한 그는 입을 떼고 말했다.

“이제 할 마음이 듭니까?”

그는 승리를 확신한 듯 여유만만했다. 레이테는 기가 막혀 소리쳤다.

“어쩌자는 뜻이죠? 나와 당신이 한 번씩 상대의 위에 올라야 한다? 그러면 밤마다 무조건 짝수 횟수로 하라고요?”

남편의 그림자로 살지 않겠다. 그에게 내 것을 빼앗기지 않겠다. 동등함은 생존을 위한 레이테의 간절함이었다. 침실에서의 부부생활이 아니라!

“아, 괜찮은 생각입니다. 당신과 되도록 많이 하고 싶거든요. 아까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에르난은 진심으로 감탄한 듯했다.

“뭐? 짝수는 그냥 말이…… 잠깐, 오지 마요!”

에르난은 아내의 다리를 벌리더니 자신의 성기를 그 사이로 가져다 대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안쪽으로 기둥을 박아 넣었다.

“흐읏!”

레이테는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의 안쪽은 거침없이 남편을 환영했다. 기둥에 찰싹 감기는 자극이 지나치게 강했다. 곧바로 사정할 것 같을 정도로.

“으윽……, 후우.”

에르난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허리를 묵직하게 밀어 넣었다.

“으읏…… 흔들지 마요.”

“아직도 아픕니까?”

가차 없이 삽입한 주제에, 에르난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건 아니…… 꺅! 잠깐, 말 좀 듣……, 앗, 아!”

아니라는 답이 끝나기도 전에 에르난은 허리를 쳐올렸다.

쾌락은 무자비하게 레이테에게 몰아쳤다. 견딜 수 없다. 넘치다 못해 터져 버릴 것 같다.

“우리의 계약은 동등함입니다. 저를 먼저 당신께 드렸으니 저도 받아야지요.”

“흐읏……, 앗, 흐앙!”

레이테의 손톱이 남편의 등을 날카롭게 찔렀다. 에르난은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가 곧 복수하듯이 퍽퍽 허리를 쳐올렸다.

“재촉도 잘하시는군요.”

“흥, 으응! 흣! 하아……, 하응, 흐앗!”

“이런,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덜컹거리는 몸을 감당하기 힘들어진 레이테는 엉엉 울다시피 남편에게 매달렸다. 한계를 넘어선 흥분에 점령당한 그녀는 자신을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안 들리시나 보네요.”

에르난은 짐짓 여유로운 투로 말했다. 그는 아내의 몸부림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느긋함은 에르난에게도 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꽉 붙잡고 자신을 더욱 힘껏 밀어붙였다.

“아, 흐윽! 아…… 윽! 읏! 아…… 아아, 흐아아앗!”

절정에 격렬히 떠는 레이테가 쓰러지려 하자, 에르난은 그녀를 붙잡고 사정했다. 그가 아내를 침대에 조심히 눕혔을 때, 레이테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 * *

눈을 뜬 레이테는 남편의 품에 안겨 있었다.

혹시 아까와 같은 상황이 또 반복될까?

망설이는 사이, 에르난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춰 왔다. 가벼운 접촉에도 레이테의 몸은 파르르 떨렸다.

에르난이 그녀를 마주 보았다. 새까만 눈이 상냥하고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일어난 줄 어떻게 알았나요?”

“숨소리가 달라지더군요.”

“지금 시각이……?”

“날이 밝으려면 한참 남았을 겁니다. 당신, 별로 길게 자지 않았어요.”

“그래요?”

레이테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남편을 밀었다.

“뭐, 뭡니까?”

에르난은 당황했다. 아내는 오늘 밤에만 세 번이나 그를 밀쳤다.

“나가요.”

“뭐?”

에르난의 입이 떡 벌어졌다.

“볼 일 다 봤잖아요. 돌아가세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할 것 다 해 놓고 이제 와서 무슨? 아니, 다 했으니 쫓아낸다?

“부인, 남편은 뒷간에 일 보러 나온 사람이 아니라…….”

“초야를 치르고 소박맞는 이야기 안 들어 봤나요?”

“잠깐, 그건 여자 이야기 아닙니까?”

에르난이 아는 한, ‘소박’이라는 사크틸라어 단어는 남편이 부인을 박대한다는 의미였다. 반대말은…… 모르겠다.

“왜 당신에게는 해당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죠?”

에르난은 정신을 다잡으며 아내를 껴안았다. 그는 나긋나긋한 손길로 아내의 등을 쓰다듬었다.

“남성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여성의 고통은 들어 보았습니다. 당신의 논리대로 따지자면 처음이 아니지만, 그래도 고생이 많았어요.”

쾌락에 완전히 풀어져 버렸던 여체가 에르난의 손에 부드럽게 감겨 왔다.

“남편이라면서 눈치가 없어서 미안…… 윽!”

갑자기 찾아온 통증에 에르난은 신음했다. 아내가 무릎으로 그의 다리 사이를 친 것이다.

“당신 마음대로 넘겨짚지 좀 마시죠. 혼자 있고 싶으니 나가세요.”

“정말로?”

끙끙대던 그가 얼이 나간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이에요!”

“남편, 아니 부부의 체면을 좀 생각해 봅시다.”

에르난은 간절했지만, 레이테의 기세는 더 살기등등해졌다.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다. 그는 엉거주춤 침대 밖으로 나와 옷을 입었다.

“외로우실 텐데…….”

황당함이 가시지 않은 채 아내를 향하는 에르난의 목소리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레이테는 끝까지 매몰찼다.

“외로운 건 그쪽 허리겠죠. 잘 가요.”?

침실 밖의 방은 아무도 없이 난로의 장작불만 타고 있었다. 에르난은 난로 앞으로 의자를 끌고 가 털썩 주저앉았다.

사크틸라의 국토 대다수는 고원으로, 절기상 봄이라 해도 밤은 상당히 쌀쌀하다. 그래서 난로 앞에 자리를 잡았거늘, 에르난은 오히려 더위를 느꼈다.

몸 안의 열기가 그를 괴롭히는 듯했다. 흥분을 해소하지도, 자연스럽게 수그러지게도 못한 채 강제로 쫓겨난 탓이다.

결국 에르난은 의자를 난로에서 떨어진 탁자 쪽으로 옮겨 앉았다. 그는 탁자에 머리를 대고 엎드렸다. 이런 식으로 밤을 보내면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침대에서 아내와 함께 이불을 덮고 자야 하는데…….

‘대체 이게 뭐야…….’

그러기는커녕 레이테는 남편이 밖으로 나가 문을 닫을 때까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 그를 아예 보지도 않았다.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르난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설마?

“……아, 전하. 송구합니다.”

열린 문은 에르난이 기대하던 침실 문이 아니라, 바깥 복도와 연결된 문이었다. 물 주전자를 든 시녀가 몸을 조아렸다.

“이쪽에 놓고 나가거라.”

시녀는 테이블에 주전자를 놓고 황급히 나갔다. 에르난은 한숨 쉬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문제가 뭐였을까?’

레이테는 어색해하기는 했어도 남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느끼기에 아내는 충분히, 아니 분에 넘치게 즐긴 것 같았다. 특히나 ‘처음’은 아예 아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두 번째가 문제인가.’

에르난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자신이 유치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결말은…… 역시 무리였다. 마음에 입는 상처가 너무 크다.

에르난은 한숨을 푹푹 쉬며 조금씩 잠에 빠져들었다.

한심한 상황에서도 졸음이 쏟아지다니, 확실히 오늘 밤의 자신이 좀 과격하긴 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진심으로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첫 번째란 아내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에르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 * *

이제 진짜 아침이구나. 레이테는 눈을 뜨자마자 생각했다.

지난밤은 길기도 길었다. 처음으로 겪은 부부의 일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꽤 많이. 남편에게 무작정 자신을 맡기지 않고 레이테가 주도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다음은……, 무참하게 당하고 말았다.

남편이 순순히 레이테의 의도에 따르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야심 없는 남자라면 여왕과의 결혼을 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런 남자가 자신을 대놓고 억누르려는 시도를 얌전히 받아들일 리도 없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졸렬할 수가 있지? 동등하니까 위아래로 한 번씩? 기가 막혀서!’

에르난은 계약을 보란 듯이 모독했다.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레이테는 아예 그를 쫓아냈다.

‘하지만 쫓아낸 것은…… 음, 조금 심했나.’

그는 무얼 하고 있을까? 다시 들어왔을까? 레이테는 침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으나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피로가 덜 풀렸는지 몸이 무거웠다. 일단 물을 마시려던 그녀는, 늘 아침이면 침대 옆에 준비된 물이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침실 밖으로 나오고서야 레이테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았다. 에르난은 탁자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 옆에 주전자와 잔이 보였다.

레이테는 남편에게 다가갔다. 단단한 이목구비와 까만 머리카락이 레이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느긋하게 살펴보니 확실히 궁정인들이 설렐 만도 했다.

그래서 레이테도 아주 조금은, 이 잘생긴 얼굴을 괴롭힌 데에 미안함을 느꼈다. 레이테는 남편의 어깨를 살짝 두들겨 그를 깨웠다.

“에르난.”

그 순간, 레이테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의 목소리가 완전히 쉬어 있었다.

‘세상에, 이 인간이……!’

이유는 뻔했다. 지난밤의 일 때문이다. 레이테는 잠깐 느꼈던 남편에 대한 미안함이 싹 사라졌다.

“레이테……?”

에르난은 바로 깨어났다. 자세가 불편해 깊게 자지 못한 듯했다. 그가 레이테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래도 다시 찾아 주시는군요.”

낮게 감긴 목소리와 몽롱한 눈빛, 나른한 손짓이 레이테를 유혹했다. 레이테는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고 남편의 손을 피했다.

“침실에서 쉬어요. 저는 아침 미사에 갈 테니까. 침대는 비어 있어요.”

잔뜩 갈라진 목소리는 엉망진창이었다. 민망함에 레이테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런……. 물을 마시면 좀 나아질 겁니다.”

에르난은 잔에 물을 따라 아내에게 건넸다. 살짝 지은 미소가 따뜻했다.

무언가 자신만 완전히 당한 것 같다.

레이테는 물을 찾아 밖으로 나왔지만, 고개를 돌려 그것을 거절했다. 에르난은 잠시 고민하더니 자신의 입에 물을 머금었다.

“읍……!”

그는 아내를 안고 입을 맞춰 왔다. 레이테는 남편을 통해 자신에게 들어오는 물을 거부할 방도가 없었다. 적잖은 물이 입술 사이로 흘러내렸다.

에르난은 탁자 위로 아내를 천천히 밀어 눕혔다.

그는 차갑고 딱딱한 탁자와 레이테의 등 사이로 자신의 손을 집어넣었다. 레이테를 받친 손은 따뜻했다.

레이테는 남편을 밀쳐 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에르난이 입술을 떼었다.

“물을 드셔야 좋아지죠.”

“이것 놔요!”

레이테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에르난은 물러나지 않고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쪽, 입맞춤은 불쾌할 만큼 달콤했다.

“눈뜨자마자 당신을 만나니 기쁩니다. 당신이 나를 쫓아냈던 일은 생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권태롭던 눈빛은 레이테를 짓누른 힘만큼이나 강렬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런 말, 사랑하는 척은 싫다고 했을 텐데요.”

“제가 그렇다고 했습니까? 그저 당신을 안고 싶습니다.”

“흥, 결국 그것이군요. 싫어요.”

“밤에도 무척 좋아하셨잖습니까.”

에르난은 손으로 아내의 뺨을 가볍게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그러나 곧 그의 손길이 멈췄다.

아내가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지난밤, 그를 쫓아낼 때의 강한 거부와 같다. 물기를 머금은 그녀의 눈은 가련하기보다는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쫓겨나고서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네요. 싫으면 싫다는 뜻이니 수작 부리지 말고 당장 놓으세요!”

크게 외치는 레이테의 쉰 목소리는 처절할 정도였다.

남편은 그녀의 몸을 더 갖고 싶어 할 뿐이며 그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가 원하는 대로 몸을 맡길 수도 있다. 어젯밤, 즐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 이상으로 레이테의 미래를 냉소하는 듯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계약 따위로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은 지금처럼 남편에게 짓눌리고 끌려다니는 생을 보낼 것이다…….

레이테는 다시 남편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한발 앞서, 그가 먼저 몸을 떼었다.

에르난은 아내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그는 의자 옆에 쪼그려 앉다시피 하여 눈높이를 낮추고 아내를 올려다보았다.

“몸은 어떠십니까. 밤에 무리가 심했을 텐데요.”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알고 계셨군요.”

레이테의 쉰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미안합니다.”

남편의 사과를 들은 레이테는 벌떡 일어났다. 무언가 쏟아내고 싶은지 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하지만 결국 레이테는 결국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 * *

성당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어제 부부의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이다. 에르난은 그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레이테 쪽으로 다가갔다. 아내는 역시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그는 아내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기도 중인 그녀는 눈도 뜨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편의 등장을 모르지는 않을 테니, 일부러 무시하는 것이 뻔했다.

일단 에르난도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에르난은 여왕인 아내의 권력을 갖고 싶어 결혼을 택했다. 아내는 자신의 미래를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아내를 도구로만 취급할 마음은 없었다. 행복한 부부로 살고 싶다.

남편에게 안긴 레이테가 헐떡이며 울던 지난밤이 좋았다. 최고였다. 즉, 아내의 눈물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를 때 터져야만 했다. 오늘 아침 같아서는 곤란하다. 침실에서 쫓겨났다는 망신 이상으로 끔찍했다.

‘권력을 뺏으러 왔는데 미움도 받기 싫다니. 앞뒤가 안 맞잖아.’

미사가 시작되었다. 레이테는 남편을 없는 사람 취급하듯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에르난은 아내를 보고픈 욕망에 사로잡혔지만 참아야 했다. 남편의 시선을 받기만 해도 레이테는 불쾌해할 것이다.

결국 에르난은 미사 내내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했다. 아내에게 거절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건한 울림의 오르간 연주마저 그에게는 쓸쓸하게 들렸다.

* * *

미사가 끝나자 레이테는 곧바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남편을 상대할 마음은 역시 없어 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두 분 폐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하지만 시스로네스 대주교가 부부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그러잖아도 엉망인 아침부터 저자를 만나 태연한 소리나 듣다니……, 에르난은 헛구역질이라도 나올 것 같았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좋은 밤을 보냈지요.”

아내는 여전히 목 상태가 좋지 않을 테니, 에르난이 대신 대답해 줘야 한다. 좋은 밤이라는 표현에 레이테는 불만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두 사람 사이의 난리를 말할 필요는 없다.

레이테는 엷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남편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시스로네스는 무언가 이상한 기색을 느낀 모양이었다.

“여왕 폐하, 몸이 불편하십니까?”

무심코 답하려던 레이테가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 탓에 주저하는 듯했다. 에르난은 아내를 덥석 품에 안고 그녀를 토닥였다.

“성직자라 하셔도 이것저것 들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아내가 실은 많이 피곤합니다. 급한 일이 없다면 일단 좀 쉬게 해 주고 싶습니다만.”

“물론입니다. 편히 쉬십시오.”

대주교는 부부가 지나갈 수 있게 옆으로 물러서 길을 비켜 주었다. 에르난은 레이테를 안은 상태 그대로 천천히 이동했다.

레이테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손에 힘을 주었다가 주변을 슬쩍 훑어보더니 포기했다. 성당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이 부부의 다정한 모습에 감탄했다.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놔 두는 편이 낫다. 그들은 부부의 사이가 무척 좋으며, 자신들의 여왕이 수줍음을 탄다 생각할 것이다. 진실이 어떻든 간에 불화를 내보일 수는 없었다.

남편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온 레이테는 조아나와 다른 시녀들을 발견했다. 그녀는 바로 남편의 품에서 벗어나 수행 시녀들에게 향했다. 에르난은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조금은 의외였다.

‘보는 눈이 많으니 그럴지도.’

레이테는 남편을 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

* * *

식사 때 여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아 도로 침실에 들었다고 조아나가 전했다. 빈 옆자리를 보며 에르난은 조그맣게 한숨 쉬었다.

피곤하리라 생각한다. 목소리도 엉망이 되었으니. 정말로 잠들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의사만은 또렷했다. 남편을 보기 싫다.

시스로네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에르난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대다수의 하객들은 여왕의 부재를 다른 식으로 해석했다.

“너무하십니다, 폐하. 저희 여왕을 독점하시다니요!”

심발로 백작이 짓궂은 말을 건네자 그의 형인 팀파노 후작이 해맑은 웃음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유쾌한 형제였다. 그들의 가문은 사크틸라 남부에서 손꼽히는 명문으로 여러 개의 작위를 소유했다.

“든든한 남편이 생겼으니, 이제 여왕께서도 근심을 덜고 편안히 지내실 수 있겠지요.”

“이미 그러고 계시잖나, 허허.”

하객으로 온 이들은 모두 탐브레 백작을 싫어하고 여왕을 지지했다. 그래서 에르난에게도 상당히 호의적인 편이었다.

에르난에게는 좋은 징조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은 불편했다. 여왕에 대한 그들의 인식 때문이었다.

“여왕 폐하는 힘든 시간을 너무 오래 겪어 오셨습니다. 부디 그분께서 이제 행복한 여성으로 지내실 수 있도록 이끄는 배우자가 되어 주십시오.”

나이 지긋한 귀족이 말했다.

하객들은 여왕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했다. 문제는 행복의 종류다.

여성의 행복? 틀렸다. 레이테는 자신의 왕관이 가진 힘을 남편에게 넘길 마음이 없으니까. 계약서가 그렇게 말하는데, 저들은 여왕의 의도를 모르나?

문득 에르난은 깨달았다.

아내는 20여 년째 왕이지만, 왕다운 일을 거의 못 했다. 오랫동안 탐브레 백작이 여왕을 대신했으므로. 하필 그런 탓에 여왕에게 지배받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지도 모른다.

‘과연, 이러니 결벽증처럼 부부의 동등함에 집착할 만도 하겠어.’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사크틸라와 경들의 여왕 폐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레이테를 아내로 맞아 저는 무척 행복합니다. 물론 어제도 했던 말이지만, 제 기쁨이야 몇 번을 반복해도 다 표현하기에 한참 부족하니까요.”

우렁찬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폐하, 이왕이면 후계자도 하루빨리 저희에게 소개해 주십시오!”

“무리 없어 보입니다만? 하하하!”

저들에게 악의는 없다. 오히려 정직한, 너무 정직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았을 호의뿐이다.

그리고 에르난은 저 호의의 맹점을 노리고 레이테의 남편이 되었다.

‘알 만큼 알면서도 이용하려는 내가 저들보다 못됐지.’

에르난은 환한 얼굴로 손님들과 일일이 대화를 나눴다. 귀족들을 하루빨리 완전한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씁쓸할지언정 마음이 약해질 수는 없었다.

* * *

결혼식에서 제왕다운 화려함이라고는 신부의 드레스와 500년의 전통을 지닌 부르고의 대성당 정도가 전부였다. 하객들이 바친 선물조차 왕의 결혼치고 수수했다. 급하게 준비한 탓이다.

사냥도 마상시합도 없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하객들은 환담을 나누며 가벼운 오락을 즐겼다.

여왕은 여전히 침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에르난은 수시로 사람을 보내어 아내의 안부를 살폈다. 피곤해 쉬는 중이라는 답변만 반복해 받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 죄지요.”

에르난이 넉살 좋게 말하자 짓궂은 폭소와 환호성이 터졌다.

분위기를 띄우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어째 불안하다. 에르난은 여왕을 직접 만나고 오라며 아예 프란세스크를 보내 버렸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에르난은 체스를 두었다. 상대는 심발로 백작. 젊고 붙임성이 좋아 대화하기도 편했다.

아내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한 탓일까? 게임의 흐름은 영 엉망이었다. 아무래도 질 것 같다.

그때 마침 프란세스크가 나타났다.

“폐하, 여왕께 가 보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아닙니다. 그저 폐하를 뵙고 싶으시다는군요.”

아하. 에르난은 손에 쥔 체스 말을 내려놓았다.

“백작, 미안하게 되었군요. 아내에게 가야 할 것 같은데.”

“아닙니다, 폐하. 부인이 찾는데 응당 가셔야지요!”

대결을 지켜보던 이들도 맞장구쳤다. 에르난은 프란세스크를 자신의 자리에 대신 앉혔다.

“나머지는 이 친구가 해 줄 겁니다. 내 실력은 보잘것없지만 세스크는 달라요. 꽤 재미있을 겁니다. 그럼 이만.”

“내일 뵙겠습니다, 에르난.”

프란세스크가 던진 농담에 장내는 폭소로 가득 찼다.

“폐하,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심발로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에르난은 속으로 픽 웃었다.

10분만 지나면 심발로는 두통에 시달릴 것이다. 프란세스크는 정말로 체스를 잘 두니까.

* * *

“어서 와요, 에르난.”

레이테는 문을 직접 열어 주며 남편을 맞았다.

“목소리가 괜찮아지셨군요.”

“네. 푹 쉬니 좋아졌네요.”

레이테는 에르난을 의자에 앉히고 직접 차를 따라 주었다. 찻잔에 작은 꽃송이 여러 개가 피어올랐다.

바르시나에서도 유행하는 캐모마일 차다. 한 모금 마시니 입 안에 단맛이 감돌았다.

“사크틸라에서는 꿀을 더해 마신답니다.”

레이테가 설명했다. 탁자에는 두루마리와 작은 꿀단지가 있었다.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낯설지만 괜찮은 조합이다.

남편의 맞은편에 앉은 레이테는 단지에서 꿀을 잔뜩 떠 자신의 잔에 여러 번 넣었다. 에르난은 주전자를 들어 아내의 잔에 물을 가득 따랐다.

“물이 너무 많아요.”

“꿀을 많이 넣으시길래요. 그래도 넘치지는 않았잖습니까?”

“그건…….”

잠시 머뭇거린 레이테는 꿀을 한 수저 더 떠 잔의 물이 넘치지 않게 조심히 흘려 넣었다.

아내는 단 것을 좋아하나 보다. 에르난의 입가가 히죽 올라갔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인의 취향을 몰라봤군요. 그런데 저는 단맛을 당신만큼 즐기는 편은 아니니까, 기호품 취향까지 동등하게 맞추지는 않기를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남편의 말이 꽤 재밌는지 레이테가 키득키득 웃었다.

부부는 한동안 말없이 차만 마셨다.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온종일 사람을 상대했던 에르난은 꽤 피곤했기에 조용히 차를 음미하는 시간이 반가웠다.

그뿐만이 아니다. 부부의 공간은 차분하고 평화로운 기운으로 가득했다.

레이테는 화가 풀렸을까?

“부인, 아침에는 정말 미안했습니다. 어젯밤도요.”

“네. 그런 줄 아시니 다행이에요.”

반사적으로 ‘괜찮아요.’라는 답변을 예상하던 에르난은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미안했다.

“당신께 다시는 그런 강요를 하지 않겠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여기에 추가해요.”

레이테는 기다렸다는 듯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두루마리를 집어 들어 매듭을 풀고 탁자 위에 펼쳤다.

부부의 결혼 계약서였다.

“…….”

에르난은 할 말을 잃었다. 계약서가 이 상황에서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리가 믿을 구석이라고는 이것뿐이죠. 저와 일치한 당신 또한 동의하시지요?”

“……그렇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느긋한 여유에서 갑자기 현실로 끌려 나와 버렸다. 무언가 억울하다.

“분위기를 깨는 데에 탁월한 재능을 지니셨습니다……, 폐하.”

비꼬는 말도 풀죽은 목소리로는 별 힘이 없었다. 여왕은 남편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계약서의 빈 곳에 새로운 문장을 더했다.

부부의 모든 활동은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행해야만 한다.

“어때요?”

에르난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라지.

레이테는 방긋 웃고 펜을 내려놓았다.

“우리의 계약인데 우리끼리 직접 대화해 본 일이 없었지요? 어제 하면 좋았겠지만……. 뭐, 지금이라도 이야기를 나눌까 해요.”

그 말을 들은 에르난은 허리를 반듯이 펴 고쳐 앉았다. 기회다.

“좋습니다. 계약서 관련 일은 늘 시스로네스를 거쳤으니까요. 하지만 당신 말대로 이 계약은 사크틸라 공동왕의 일입니다. 그리고 사크틸라의 주인은 왕입니다. 당신과 나.”

“당연하지요.”

여왕은 실소가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아직 왕은 아닌 남편은 은근슬쩍 자신을 사크틸라의 주인으로 끼워 넣는다.

“대주교가 얼마나 유능한 충신인지 압니다만, 당신은 여왕입니다. 이제 결혼까지 한 성인이기도 하고요.”

“저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말은 불편하네요. 그리고 설마 당신은 대주교가 저를 조종한다고 생각하나요?”

레이테는 남편의 지적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하긴, 갑자기 나타난 외국인이 20여 년 동안 의지한 주춧돌을 뽑아내려 하니 호의적일 수 없겠다.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참는 편이 대화를 지속하기에 좋을 듯했다.

“시스로네스는 여왕을 섬기는 종이지요. 종의 권한이 지나치면 곤란합니다.”

“대주교는 저와 함께 왕이실 당신을 섬기기도 해요. 그를 믿으세요.”

‘영 못 믿겠는데요.’라는 말 또한 입 안으로 삼켜야 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질 것이다.

진심이 어떻든 레이테는 에르난을 ‘남편’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스로네스에게 에르난은 여왕을 위해 쓰고 버릴 상품에 불과할 것이다. 2년 전에 말했듯이.

“당신의 염려는 잘 알겠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남편인 당신이야말로 저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 아니겠어요?”

결국 대주교의 권력을 당신이 갖고 싶을 뿐 아닌가? 아내는 그렇게 물었다.

에르난은 엷게 웃고 차를 마셨다. 소극적인 긍정의 표시였다.

생각을 숨길 이유가 없다. 어차피 대주교는 이런 상황을 예상할 것이며, 아내 또한 마찬가지니까.

* * *

레이테는 결혼 계약서를 기어이 꼼꼼하게 다 읽었다. 그녀가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몇 번이고 반복했다. 에르난은 함께 읽으며 때때로 그녀와 대화를 나눴다.

자신의 권리 사수를 위한 아내의 의지는 보통이 아니었다. 지금 행동은 조금 과한 것 같지만.

아내는 한 문장씩 읽을 때마다 남편을 향해 단호한 눈을 빛냈다. 그녀를 보며 에르난은 어렴풋이 짐작 가는 점이 있었다.

‘불안하겠지.’

남편을 믿을 수 없지만 버릴 수도 없다. 그러니 불안하고, 문장에서라도 길을 찾고 싶어 계약서에 집착한다.

정말 이 안에 답이 있을까? 존재한다면 에르난도 알고 싶었다. 불안은 아내만의 것이 아니다.

* * *

“후우. 이제 정말로 그만할게요.”

드디어 레이테도 지친 모양이다. 에르난은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었다.

한밤중이 다 되어 있었다. 아내는 물론 자신도 꽤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 버티다니.

“솔직히 당신이 화낼 줄 알았어요. 이미 맺은 계약인데 구차하게 뭐 하느냐고.”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입니다만, 우리끼리 대화하자는 당신의 말은 지당합니다.”

“시스로네스 없이?”

“맞습니다. 그거죠.”

웃으며 답한 에르난은 주전자를 들었다. 주전자는 지나치게 가벼웠다. 안을 확인하니 텅텅 비어 있었다.

“물을 더 가져오라 할까요? 아니면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간단히 포도주나 한잔하지요.”

잠시 후, 부부는 술잔을 기울이며 소소한 잡담을 나눴다. 곁들여진 과일이 허기를 달래 주었다.

“이 술은 헤레스(Jerez)라고 해요. 심발로 백작의 영지 특산품이라, 어제 그에게 잔뜩 진상 받았답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거든요. 원래는 디저트용인데 지금처럼 따로 마셔도 맛있어요.”

과연, 아내가 좋아할 만도 했다. 술은 무척 달았다.

“달긴 한데 꽤 강한 술 같습니다. 당신의 음식 취향은 다양하군요. 달콤한 먹을거리와 강한 술이라.”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나요?”

“바르시나의 바닷가에는 질 좋은 해산물이 많습니다. 간단히 굽거나 튀기기만 해도 훌륭합니다.”

“좋네요. 아무래도 내륙에서는 먹을 일도 적고 상태도 좋지 않아요.”

두 사람은 포도주의 맛처럼 달콤한 분위기에 나른하게 취해 갔다. 마치 사랑하는 부부의 평범한 밤 같았다.

“레이테,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바르시나에도 한 번 갑시다. 제대로 된 해산물 정찬을 대접해 드리지요. 더군다나 당신은 바르시나의 왕이 될 사람이잖습니까.”

“바르시나도 수도는 내륙 한가운데 아닌가요?”

“맞습니다. 하지만 항구 쪽이 훨씬 발달했지요. 어쨌거나 당신에게 바다를 보여 주고 싶습니다.”

“어머, 이 사람 봐. 또 저를 어린아이 취급해요? 사크틸라에도 바다는 있다고요.”

레이테가 소리를 높였다. 취기가 꽤 도는지 혀가 꼬인 목소리였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아니, 그런 취급 안 합니다! 어린아이라니, 당신이야말로 성인 중의 성인 아닙니까. 첫날밤부터 남편 위에 올라타서…….”

“그만! 그만! 그 얘기 하면 또 쫓아낼 거예요!”

레이테는 과장된 몸짓으로 팔을 내저으며 외쳤다. 에르난은 입을 딱 다물었다. 쫓겨나기 싫다.

아내는 술은 좋아해도, 그다지 술에 강한 편은 아닌 것 같다…….

에르난은 일어나 아내에게 다가갔다. 그는 레이테가 여전히 흔드는 팔을 지긋이 감싸 쥐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저와 함께 가는 바다는 처음이 되겠지요.”

“내 남편은 그럴듯한 말을 하는 데에 소질이 많네요. 좋아요. 가 드리죠.”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 당장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요.”

레이테를 일으킨 에르난은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레이테는 저항하지 않고 콧소리를 내며 생글생글 웃었다.

“흐응, 어디려나요?”

부부는 서로를 안고 침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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