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에 비친 왕관-1화 (1/15)

1부 1장 : 기사의 조건

“비현실적이야.”

레이테는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책을 덮었다.

기사가 용에게 끌려간 공주를 구출하는 이야기책이었다. 알록달록한 그림도 가득해 눈이 즐거웠다.

문제는 결말이다. 기사는 상금도, 귀족 작위도 거부했다. 심지어 공주와의 로맨스마저 없었다. 그는 공주의 나라에 신앙을 전파하고 사라졌을 뿐이다.

“이런 소설은 주인공이 두둑한 보상을 받고 출세하는 맛에 읽는걸. 말도 안 되게 고결한 기사란 심심하구나. 더 재미있는 책을 구해 왔다면 좋았을 텐데.”

“이 책은 기사도 소설이 아니잖습니까. 성인(聖人)의 전기입니다.”

레이테의 맞은편에 앉은 교사는 그녀의 고해사제였다. 너무 불경한 말이었나? 레이테는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보았다.

더군다나 레이테가 새 책을 읽을 기회는 흔치 않았다. 비록 지루하게 끝났을지라도.

책을 구해 온 그에게 감사 인사는커녕 투정부터 해 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정확히 보셨군요. 이런 결말은 어디까지나 숭고한 성인이니 가능합니다.”

걱정과 달리, 사제는 인자한 웃음을 얼굴 가득 띠며 무척 흡족해했다.

“명심하십시오, 폐하. 위험에 빠진 숙녀를 구해 주는 기사는 세상에 없습니다. 오히려 짓밟아 잡아먹을 기회만 노리는 불한당뿐이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의 모습이 점점 흐려졌다.

동시에 레이테의 의식이 돌아왔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필 이런 꿈이라니…….’

언제 적 일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이런 꿈을 본 이유는 뻔했다.

레이테는 공주를 구하는 기사담이 가짜라고 배웠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자신을 구하러 올 왕자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구해 주세요. 그 편지를 보낸 지 며칠이 지났더라? 왕자가 불한당이든 무엇이든 상관없다. 탈출이 더 급하다.

‘꿈마저 나를 비웃는구나.’

성당의 종소리가 아침을 알렸다. 숨 막히는 감옥의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

레이테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몽롱한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그 순간,

“이르지만 좋은 아침입니다, 세뇨레타.”

낯선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꽂혔다.

화들짝 놀란 레이테가 눈을 번뜩 떴다. 검은 망토를 두른 남자가 침대 앞에 서 있었다.

망토 속에서 빠져나온 손이 레이테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은색 머리카락이 남자의 손을 타고 스르륵 흘러내렸다.

“누, 누구…….”

레이테는 뻣뻣하게 굳은 채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그의 손이 레이테의 머리카락에서 멀어지더니, 침대를 짚고 그녀에게 바싹 접근했다. 레이테의 뺨에 남자의 검은 머리카락이 닿았다. 그것은 차갑게 젖어 있었다.

“당신의 주인이 될 사람입니다.”

남자의 번뜩이는 붉은 안광은 섬뜩했다.

* * *

5월이 다가오지만 새벽은 여전히 추웠다. 에르난은 몸을 떨었다. 익숙하지 않은 지난밤의 잠자리 탓에 피로도 다 풀리지 않았다.

며칠째 오락가락 내리는 비에 기껏 구해 입은 새 옷마저 망가졌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츠에 진흙이 튀었다.

에르난은 어둑어둑한 골목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투박한 시골과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깔끔한 성벽이 보였다.

‘기어이 여기까지 오고 말았군.’

몸이 떨렸다. 긴장 때문인지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아 느끼는 추위 때문인지는 모른다. 에르난은 잠시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전하!”

익숙한 목소리에 에르난은 눈을 떴다. 짐마차 한 대가 골목 앞에 멈췄다. 허름한 망토로 몸을 꽁꽁 싸맨 마부는 에르난이 잘 아는 얼굴이었다. 그의 친구, 프란세스크다.

“일단 추우니 이것부터 받으시지요.”

에르난이 마차에 올라 그의 옆에 앉았다. 프란세스크는 품 안에서 새 망토를 꺼내 에르난에게 둘러 주었다. 온기 비슷한 것을 겨우 느낀 에르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웬 마차지?”

“성에서 주문한 물건입니다.”

오호. 에르난은 감탄했다. 계획보다 훨씬 안전한 방법으로 성에 잠입하게 되었다.

“대단한걸. 진짜 마부는?”

“밤새 술을 먹였으니 어딘가에서 한창 곯아떨어졌을 겁니다.”

프란세스크는 에르난에게 수건을 건네고 마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르난이 젖은 머리카락을 털고 더러워진 부츠를 닦는 동안, 그가 말했다.

“굳이 여왕부터 만나겠다고 하시니 여기까지 오긴 했습니다만……, 대주교의 군사와 함께하는 편이 역시 안전할 텐데요.”

“이미 출발할 때부터 우리는 안전 따위 포기한 셈이지 않나. 자네도 여왕의 편지는 봤지? 당신과 결혼하고 싶으니 구해 달라고, 어찌나 애타게 남편을 찾으시던지.”

“하긴, 좀 의외였습니다. 분명히 결혼 협상 때에는…….”

“남편을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며 말만 좋았지. 정작 남편의 역할이랍시고 제시한 조건은 딱 하인, 노예……. 아, 종마도 있나?”

에르난은 여왕과의 결혼 협상을 떠올리고 빈정거렸다. 아내는 남편을 허수아비로 삼고 싶어 안달이 난 듯했다. 일국의 왕위 계승자인 에르난으로서는 모멸감을 느낄 정도였다.

“종마라고요? 세상에, 방금 말씀하신 분이 에르난 왕자 맞습니까?”

부츠를 다 닦은 에르난이 옆을 돌아보았다. 프란세스크는 놀라움에 입을 떡 벌린 얼빠진 모습이었다.

“내가 틀린 말 했나?”

“……아무 말도 못 들었다고 생각하렵니다. 당신에게 씌워진 금욕주의자라는 환상을 되도록 늦게 깨고 싶거든요.”

“환상은 무슨 환상.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한테는 애초에 있지도 않았을 텐데.”

에르난은 픽 웃으며 마부석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기다리기도 이제는 질렸어. 한두 달 정도 지나고 식을 올릴 줄 알았건만 2년씩이나 질질 끌 줄이야……. 하인이든 노예든 종마든 모조리 해 줄 테니 일단 제발 결혼하고 싶어.”

지긋지긋했다. 그는 여왕을 만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진심입니까?”

“대국의 여왕과 결혼할 기회가 아무 때나 오는 줄 아나?”

설령 그 여왕이 감옥이나 다름없는 성에 갇혀 있다 해도.

아니, 오히려 에르난에게는 더 좋은 기회였다.

“그래 봤자 여왕이야. 아무리 남편을 제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애써 봤자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과거에 드물게 존재했던 여왕이란 그런 존재였다.

마차는 태연하게 성문을 통과했다. 꾸벅꾸벅 조는 경비병은 마차가 지나가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프란세스크는 주머니에서 성의 지도를 꺼내 에르난에게 건넸다.

“마지막으로 확인하십시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해가 완전히 뜨면 사람이 많아질 테니, 그전에 나오셔야 안전합니다.”

“그 정도야 문제없어.”

빠르게 지도를 훑어보며 에르난은 답했다.

“아, 그러시겠죠. 금방 끝내실 테니.”

프란세스크가 빈정거렸다. 에르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한발 늦게 의미를 깨닫고 혀를 찼다.

“금욕의 환상이니 뭐니 하더니만 하여간……. 세스크, 자네의 왕자는 미래의 아내를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건드는 파렴치한인가?”

“여태까지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이제는 아무래도 파렴치한이 될 작정이신 것 같은데요.”

왕자는 싱글싱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잘 아는군. 그러니 이왕이면 시간을 좀 끌어 줘.”

“조심하십시오, 전하.”

왕자는 사뿐히 마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 * *

지도로만 보았던 성은 실제로는 더 작았다. 성벽은 별로 높지도 않다.

이곳은 애초에 방어를 위해 지은 요새가 아니었다. 부유한 외국인이 소유했던 휴양용 성이다. 표면상으로 여왕은 요양을 위해 이곳에 왔다.

언제나 명분을 따진다. 여왕의 숙부이며 섭정인 탐브레 백작이 조카를 핍박하는 방식이었다. 아무리 그가 여왕을 대신하는 권력자라고 해도, 여론 상 대놓고 그녀를 감금할 수는 없었다.

‘정말로 감금하면 빼도 박도 못하는 반역이지.’

따라서 지나치게 삼엄한 경비는 불가능했기에, 에르난은 비교적 수월하게 성 내부를 돌아다녔다.

간혹 보이는 시종이나 병사가 많지 않아 피하기도 쉬웠다. 에르난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조심히 올라갔다.

2층은 깔끔하다 못해 삭막할 지경이었다. 사람의 흔적을 느끼기 힘들었다.

침실 입구의 경비는 다행히도 한 명뿐이었다. 무장도 가벼웠다. 에르난은 빠르게 그에게 달려가 목을 졸랐다.

“읏, 으읍……!”

길지 않은 몸부림 끝에 경비가 풀썩 쓰러졌다. 에르난은 병사를 구석진 복도로 끌고 가 눕혔다. 이곳이라면 발견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다시 여왕의 방 앞으로 온 에르난이 잠시 심호흡했다. 그는 문을 조용히 두들겼다.

똑똑…….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직 자는 중일까?’

어떡할까. 에르난은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문을 열었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내게 해 달라고, 평소에는 찾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하며.

방 안으로 들어간 에르난은 다시 조심히 문을 닫고 침실을 둘러보았다.

작지만 그럭저럭 화려한 침대가 보였다. 에르난은 발소리를 죽이며 침대로 다가갔다.

“아.”

초상화로만 보았던 여자가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아 방 안이 어슴푸레한데도 은색 머리카락만은 은은하게 빛났다. 사크틸라의 여왕 레이테가 틀림없다.

그 순간, 에르난은 모든 생각을 잊었다.

드디어 여왕을 만났다. 에르난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왕자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었다.

“으응…….”

레이테는 몸을 뒤척이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반쯤 뜬 그녀의 눈 위로 풍성한 속눈썹이 우아하게 가라앉았다. 어깨선을 타고 흘러 몸을 덮은 은빛 머리카락은 신부의 베일 같았다. 하얀 잠옷용 슈미즈가 그녀를 부드럽게 감쌌다.

마침 멀리서 들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그녀에게 고귀함을 부여하는 듯했다.

에르난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는 긴장으로 떨리는 입을 열고 태연하게 말하려 애썼다.

“이르지만 좋은 아침입니다, 세뇨레타.”

낯선 이의 목소리를 들은 여왕이 벌떡 일어났다.

당연히 놀랄 만하다. 이제 에르난이 자신을 소개할 차례였다.

그런데도 에르난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팔을 먼저 뻗었다. 레이테의 머리카락이 그의 손에 닿았다.

세상의 것이 아닌듯한 부드러움. 에르난은 잠시 그 감촉을 음미했다.

“누, 누구…….”

파들파들 떠는 목소리에 에르난은 정신을 차리고 머리카락을 손에서 놓았다.

‘내가 이런 여자를 아내로 삼는다고?’

자신의 현실이지만 믿기 어렵다. 에르난은 손을 침대에 짚고 여왕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림 속 나긋나긋한 인상과 실물은 달랐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났거늘, 에르난을 노려보는 여왕의 보랏빛 두 눈은 날카로웠다. 반면에 몸은 놀라서 덜덜 떨고 있었다.

그 부조화가 에르난의 가슴을 꽉 조여 왔다.

“저는…….”

에르난은 말을 멈추었다. 무엇을 말해야 하지? 이름. 일단 자신의 이름을 밝혀야 했다. 잘 아는데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생각지도 않은 말이 나왔다.

“당신……, 당신의 주인이 될 사람입니다.”

에르난은 여왕을 구출하려고 이곳에 왔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확실하게 여왕의 남편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이 여자를 갖고 싶다.

약속도 의무도 아닌 무언가가 단숨에 에르난을 휘어잡았다. 아마도 기쁨일까?

레이테가 벽 쪽으로 몸을 굽혔다. 그녀는 침대와 벽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가차 없이 에르난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에르난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윽……!”

칼끝이 스쳤는지 에르난의 목에서 작은 핏방울이 흘렀다.

여왕은 차갑게 얼어붙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심한 상처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토록 가까이에서 무자비하게 휘둘렀는데도 겨우 피부를 스쳤을 뿐이다.

‘검 다룰 줄은 모르는군.’

실제로 칼을 쥔 레이테의 손은 덜덜 떨렸다. 방어를 위해 꺼내 든 무기거늘, 오히려 그녀 자신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듯했다.

에르난은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쥐었다. 부드러운 촉감에 잠깐 감탄하고, 그는 여왕의 손에서 칼을 뺏어 방구석 멀리 던졌다.

레이테는 황망해 하며 멀리 던져진 칼을 바라보았다가, 단숨에 표정을 날카롭게 고쳤다.

“주인……? 주인이라 하셨나요? 재미있네요.”

머릿결만큼이나 지독하게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여왕의 눈과 입은 모두 적당한 곡선을 그리며 웃었다. 즐거움은커녕 칼날 같은 경계심만 가득했다.

“……그렇습니다.

‘저를 이 감옥에서 구해 주신다면 당신께 저를 드리겠습니다.’

폐하께서 제게 친히 써서 보내 주신 편지의 문장입니다.”

몇 번이고 다시 읽은 편지의 기억이 선명했다. 한계에 몰린 듯 극단적인 표현으로 도움을 청한 글이었다.

레이테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다가 곧바로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은 허리를 펴고 반듯하게 앉았다. 그녀가 에르난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러운 몸짓은 우아했다.

뭘까. 여왕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에르난은 속이 뒤틀림을 느꼈다.

“반가워요, 에르난 왕자. 하지만 침실에 멋대로 들어오다니.”

“죄송합니다. 하지만 갑자기 칼을 꺼내 드시다니.”

“……그러게요, 제가 너무 놀란 모양이네요.”

레이테는 대답을 피했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방안에 돌았다.

“어쨌거나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네요.”

“폐하의 편지를 받자마자 바로 출발했지요. 애타게 뵙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빨리’ 만나 뵙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빨리’이라는 단어에 묻어나는 빈정거림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가 서면으로 결혼을 약속한 지 2년쯤 되었던가요?”

“2년 하고도 38일이 더 지났습니다.”

정확한 기간을 말하니 여왕은 다소 놀란 눈치였다.

떠밀리듯이 결혼을 약속한 지 768일. 기다림만 반복하던 에르난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해 있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또 감금당할 줄은 몰랐으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폐하를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반역자 탓입니다.”

딱한 사정을 모르지 않으나, 절로 힐난조가 나오고 만다.

“이해해 주시니 고마워요.”

여왕의 눈가가 우아하게 휘며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아름답지만 역시 고마움 따위는 없어 보였다. 상냥한 목소리는 오히려 쌀쌀맞게 들렸다.

좋지 않다. 솔직히, 감금당한 여왕이라기에 좀 더 무너진 모습일 줄 알았다. 다급한 편지는 그 예상을 부채질했고.

레이테가 일어나 침대 밖으로 나왔다. 하늘하늘한 슈미즈가 우아하면서도 야릇한 느낌을 살짝 풍겼다.

“어떻게 할 생각이신가요, 전하?”

“당연히 탈출해야지요. 일단 성 밖으로만 나가면 폐하의 아군이 있는 곳까지는 금방이잖습니까?”

“맞아요. 하지만 당장은 무리예요.”

“어째서?”

“내일을 위해 숙부님께서 직접 와 주신다더군요. 아마 오늘 도착하겠지요.”

“이런…….”

낭패였다. 무작정 빨리 올 생각만 하느라, 정작 적을 고려하지 못했다.

탐브레가 조카를 만나러 오는 명분은 확실했다. 내일은 여왕의 생일이다.

“숨어 계실 곳은 있나요?”

“일행이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기다리시는 편이 좋겠네요. 괜찮을 때에 연락하겠어요.”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고생해서 속도를 내 온 보람이 없다. 하지만 서둘러 나가면 마주칠 위험이 있다.

“따라오세요. 침실 앞 복도보다 안전한 길이 있어요.”

레이테는 에르난의 앞을 지나쳐 걸었다. 나긋나긋한 걸음 위로 기다란 은발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에르난은 잠시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레이테의 뒤를 따라갔다.

침실 안쪽 벽에 작은 복도가 나 있었다. 탈의실로 보이는 곳을 지나자 이국적인 무늬의 타일로 벽을 장식한 방이 나타났다.

비는 그친 모양이다. 햇빛이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와 방 안을 서서히 밝혔다. 창가에는 욕조가 있었다. 욕조에 담긴 물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폐하, 벌써 일어나셨……, 어머, 세상에나.”

낯선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수건을 든 귀부인이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더 일찍 왔죠? 이분이 바르시나의 에르난 왕자예요.”

여왕이 말하자 시녀는 수건을 급히 내려놓고 몸을 살짝 굽혀 에르난에게 인사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저는 여왕 폐하의 시녀인 조아나입니다.”

“반갑습니다, 세뇨라.”

에르난은 가볍게 맞인사했다.

“여벌 옷을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조아나가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조아나는 목욕할 사람이 당신이라고 착각한 모양이네요.”

“무슨……?”

에르난은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되물으려다가, 문득 자신의 차림새를 살폈다. 어두웠던 침실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빗물에 얼룩진 망토가 보였다.

시녀가 오해할 만도 했다. 더군다나 망토 안의 옷은 완전히 젖어 더 엉망이다.

“아, 그래요. 목욕이라도 하시겠어요?”

“……네?”

레이테의 말에 에르난은 무심코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할 말을 잃었다. 너무나 평온한 어조였다. 에르난이 그 뜻을 이해하는 데에는 잠깐 시간이 걸렸다.

“이 감옥에서는 할 일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아침마다 목욕을 한답니다.”

아무리 결혼할 사람이라지만, 처음 보는 남자에게 목욕을 함께 하자고 말하나?

당황한 그를 바라보는 여왕은 여전히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비를 맞으셨길래 전하께 양보하려고요. 젖은 옷을 계속 입으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니까요.”

“…….”

“혹시 다른 생각 하셨나요?”

“아, 아닙니다…….”

에르난은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숙부님이 아무리 조카 인생에 간섭해도 목욕실같이 사적인 공간마저 범하지는 않는답니다.”

여왕은 모른 체 말했지만, 작은 웃음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 왕자가 무엇을 떠올렸는지 다 안다는 눈치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수건을 집어 들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몸을 닦아 드릴까요?”

“네? 아, 아닙니다. 어찌 여왕 폐하께서 시중을……, 괜찮습니다.”

레이테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온화하게 말하니, 도리어 에르난이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여왕은 여전히 고운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상냥하지만 묘하게 한기가 느껴졌다. 눈빛은 침실에서 휘둘렀던 칼만큼이나 날카로웠다.

“잠깐이라도 쉬시길.”

레이테는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아 참, 그리고.”

목욕실에서 나가려던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에르난을 바라보았다.

“사크틸라어 실력이 좋으시네요, 전하. 그런데 세뇨레타라는 표현은 바르시나어랍니다. 사크틸라어로는 세뇨리타라고 말해요. 그럼 이만.”

에르난은 얼떨떨하게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고서야 그는 정신이 들었다.

‘뭐야, 저 여자!’

그래. 알고는 있다. 선왕의 늦둥이로 태어난 레이테는 겨우 두 살에 사크틸라 왕국의 주인이 되었다. 섭정인 숙부는 조카에게 권력을 반납할 생각이 없다. 내일이면 스물세 살이 되는 여왕은 지금도 실권 없이 숙부에게 감시당하는 처지다.

그러나 오랜 궁정 생활로 인해 그녀는 타고난 여왕의 기품을 갖고 있다……라는 말은, 결혼 협상 때에 들었던 것이다. 그때 같이 들었던 내용이 뭐였더라. 현숙하며 우아하고 상냥한 여성이다…….

‘상냥하기는 무슨.’

조곤조곤한 어투와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몸짓은 확실히 우아함이 넘쳤다. 하지만 너무나 빈틈없이 다듬어진 탓에 오히려 서늘해 보였다.

‘심지어 칼도 휘둘렀잖아.’

그리고 민망하기 짝이 없는 언어 실수 지적도 있다.

에르난은 망토를 벗어 구석에 놓인 의자에 대충 걸었다. 망토 안의 옷은 정말로 엉망이었다. 이 모습을 여왕에게 보였다가는 대놓고 비웃음을 샀을지도 모른다. 그는 작게 한숨 쉬고 옷을 마저 벗었다.

욕조의 물을 조금 퍼내어 몸에 몇 번 끼얹은 다음, 에르난은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눈을 감으며 따뜻한 물에 기분 좋게 몸을 맡겼다. 그러나 곧 불쾌함이 그를 찾아왔다.

‘상상과 다를 수 있지. 그런데 왜 이렇게 불편할까…….’

에르난은 물을 떠 어깨에 끼얹으며 생각했다. 결혼을 요구하는 입장에서야 당연히 신부의 좋은 점만 말할 수밖에 없다.

외로움에 떠는 가련한 여인을 멋대로 상상한 이는 에르난 자신이었다.

더군다나 조금 전의 만남은 어떻게 보아도 그가 여왕에게 휘둘렸다. 에르난이 당황할 때, 여왕은 진심이 어떻든 간에 기품을 유지한 채였다.

마지막에 지적당한 어휘 실수는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주인이라…….”

침실에서 했던 말이 바보 같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는 아내를, 여왕을 지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택한 결혼이다.

어째 시작부터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갈아입을 옷을 가져 왔어요.”

계속 생각하던 부드럽고 쌀쌀맞은 목소리가 들렸다. 에르난은 눈을 떴다. 여왕이 들어온 줄도 몰랐다.

은색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에르난에게 휘둘렀던 날붙이를 연상시키는 서늘한 색조이면서도 몹시 우아했다.

“이쪽에 놓고 갈게요.”

“시녀를 대신 보내셔도 됐을 텐데,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제 주인이 되실 분의 벗은 몸을 남에게 보여 주고 싶지는 않거든요.”

노골적인 표현에 에르난의 눈이 커졌다.

그의 놀란 모습을 본 레이테가 또다시 곱게 웃었다. 비로소 에르난은 그녀의 웃음이 감정 없이 판에 박힌 형태로 얼굴 근육만 움직이는 동작일 뿐임을 깨달았다. 눈꼬리 또한 보기 좋게 휘었으나, 그 안은 무미건조했다.

“제 말에 놀라셨나요? 하지만 우리는 부부가 되려고 만났는걸요. 결혼을 기다린 사람은 전하뿐만이 아니랍니다.”

“아…… 예, 그렇지요.”

어째 목욕 전과 비슷한 상황의 반복이다. 더듬더듬 답하던 에르난은 문득 깨달았다.

‘잠깐, 기다렸다고?’

더군다나 여왕은 주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아닌 척할 뿐 여왕도 에르난의 말을 신경 쓰나?

에르난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그럼 이만. 편한 시간 보내세요.”

그는 떠나려는 레이테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왕자……? 꺅!”

잘됐다. 어차피 서로 ‘같은’ 생각을 하던 셈이다.

소스라치게 놀란 레이테는 뒷걸음질 치려 했다. 그러나 에르난의 강한 팔 힘에 움직일 수 없었다.

여유는 단숨에 사라지고, 당혹감에 얼굴이 얼어붙었다. 여왕은 에르난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에르난은 확신했다. 여왕의 여유는 오로지 말뿐이다.

살짝 몸을 일으킨 에르난은 그녀를 가볍게 자신 쪽으로 끌어안았다.

물에 젖은 남자의 맨몸이 자신에게 닿자 레이테의 얼굴이 단숨에 달아올랐다.

“뭐, 뭐하시는 거죠?”

“부부가 되려고 만났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요? 이, 이것 놓으세요!”

에르난은 다른 팔로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부드러운 머릿결에 손이 파묻혔다. 손이 저릿했다. 에르난은 떨리는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흥분 어린 숨결이 레이테의 귓가에 닿았다. 한 손으로 욕조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에르난을 밀어내려 애쓰던 그녀가 움직임을 멈췄다.

“실은.”

작은 속삭임이 이어졌다. 레이테는 어깨를 떨었다. 그녀가 조금 전까지 보이던 고고한 냉랭함과는 딴판이었다.

에르난의 손이 레이테의 턱을 쥐고 자신을 마주 보게 돌렸다. 불안함은 가시고 유쾌한 열기가 에르난을 가득 채웠다.

“실은 폐하를 뵙는 순간 사랑에 빠졌답니다.”

‘주인’과 마찬가지로, 그냥 목에서 저절로 흘러나온 말이었다. 주인은 사실이기라도 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생각하지도 않은 말이 나왔다.

그런데도 에르난은 자신의 말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마냥 즐거웠다.

“먼저 유혹한 쪽은 폐하십니다.”

“뭐…….”

당황한 레이테는 에르난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입만 뻐끔거릴 뿐 목소리는 내지 못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의 유혹을 그냥 넘길 수 없어요.”?“유혹? 내가 먼저?”

레이테는 그를 노려보았다. 당혹감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던 눈에 다시 날카로움이 돌아왔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떨고 있었다.

“모른 체 마십시오. 몸을 닦아 주겠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실은 기대했는데 그냥 가 버리시다니.”

“그건……!”

“지금이라도 해 달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부부가 될 텐데, 앞으로도 기회가 많지 않겠습니까? 대신 다른 것을 하고 싶습니다만.”

에르난은 완전히 일어나 다리 한쪽을 욕조 밖으로 내디뎠다. 그는 단숨에 레이테를 안아 들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요! 내려놓으세요!”

“싫습니다.”

에르난은 도로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발버둥 치는 레이테와 함께.

그는 욕조에 등을 기대고 자신의 앞에 레이테를 앉혔다. 레이테가 입은 푸른 드레스는 장식도 없이 단순했다. 물에 젖어 망가져도 아깝지 않을 옷. 잘됐다.

일어나려는 레이테를 눌러 앉히며 에르난은 천천히 드레스를 내렸다.

“망측한……!”

“제 몸을 남에게 보여 주기 싫다 하셨습니다. 그래요. 제 몸은 저의 아내가 되실 여왕 폐하께만 보여 드려야지요. 물론 그 반대 또한 기대하겠습니다.”

“됐어요, 필요 없어요! 제가 잠깐 말실수를 했군요!”

여왕은 이제 완전히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뒷모습만 보이지만.”

에르난은 레이테의 긴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겼다. 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에르난은 그곳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래도 만질 수 있으니 괜찮습니다.”

단순히 레이테를 결박할 뿐이던 손은 이제 욕망으로 떨렸다. 레이테가 몸을 굳혔다.

“놓으세요! 이러는 의도가 뭐죠? 우리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어요!”

“원칙적으로야 그 말씀이 맞지만, 현실은 조금 다릅니다. 결혼할 부부가 서로의 몸이 얼마나 잘 맞을지 확인하는 일은 미래를 위해 택할 수 있는 작은 반칙이지 않겠습니까.”

에르난은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그녀를 도로 앉혀 팔로 가두었다. 레이테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물론 우리는 맞지 않더라도 결혼할 사이지만요. 그리고 의도?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레이테의 귓가에 입술을 밀착한 에르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폐하를 뵙는 순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부디 폐하를 사랑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어깨를 움츠렸던 레이테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코끝이 서로 스쳤다. 입술은 거의 맞닿아 있었다. 상대방의 숨결이 뜨거웠다.

“당신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편지에 쓰셨던 그대로, 제게 당신을 주십시오.”

에르난의 움직이는 입술이 레이테에게 조금씩 닿으며 그녀를 간지럽혔다. 두 입술이 살짝 맞닿았다.

레이테는 저항하지 않았다. 곧, 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좋아요……. 허락하죠.”

소심한 허락이었지만, 그것을 신호로 에르난이 다시 입을 맞췄다.

여왕의 입술은 녹아들 듯 부드러웠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를 에르난의 혀가 건드렸다. 그녀는 순간 몸을 흠칫거리며 떨었다.

에르난은 좀 더 강하게 밀어붙이고 싶어졌다. 그녀가 온몸을 떠는 모습이 궁금했다.

“어때요? 제 생각에는 우리가 꽤 잘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다행…… 이군요.”

레이테가 천천히, 간신히 입을 들썩였다. 긴장 가득한 호흡 사이에서 겨우겨우 나오는 목소리였다.

정교하게 연마한 부드러움 따위는 없다. 그런데도 진득한 달콤함이 에르난의 귀를 휘감았다.

이윽고 에르난의 두 손이 그녀의 솟아오른 가슴을 쥐었다.

“제 몸을 바쳐, 언제나 기쁘게 해 드릴 테니…….”

에르난은 손에 들어온 탐스러운 것을 부드럽게 만졌다.

“간청드리건대, 저를 버리지 말아 줘요.”

레이테의 귓가에 속삭이는 에르난의 목소리는 낮고 진했다. 강한 호소력에, 레이테는 뭐라 말할 틈도 없이 그가 전하는 감각에 빠져들었다.

“흐읏, 응…….”

에르난의 손이 닿는 곳으로 온 신경이 집중되어 그녀를 뒤흔들고 있었다. 레이테의 어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기분이 좋나요?”

“모르겠어요. 그냥, 흐응……. 뭐라고 말해야 할지…….”

“좋다고 말씀하시면 되지요.”

“그런 건…… 싫어요, 앗, 흐앗!”

날카로운 통증이 레이테를 덮쳤다. 에르난이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에 튀어나온 것을 손가락으로 잡고 빙글빙글 돌렸기 때문이었다. 찌릿한 감각에 레이테가 몸을 비틀었다.

“흐응, 그만, 앗! 흐으읏……!”

“뭐, 지금의 울음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히 알겠습니다만. 좋은 목소리입니다, 폐하. 그 소리를 더 듣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에르난은 그녀의 맨살을 안고 싶었다. 그는 다시 그녀의 가슴 전체를 움켜쥐었다.

어떤 고급 옷감에서도 느낄 수 없던 극상의 부드러움이 그의 손끝을 타고 올라가 쾌감이 되었다.

“무슨, 으응, 흐앗. 싫……, 앗, 하아…….”

당황하는 사이사이 실없는 거절이 튀어나오기는 해도, 여왕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모양새였다. 에르난에게는 좋은 징조였다.

앞으로 ‘내 것’이 된다. 에르난은 레이테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그녀의 체향을 맡았다.

“자, 잠깐! 뒤에……!”

갑자기 레이테가 외쳤다. 그녀의 살결을 빨아들이려던 에르난이 고개를 들었다.

빳빳하고 뜨거운 것이 그녀의 엉덩이에 닿았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것의 정체를 직감적으로 깨달은 레이테는 당황해 몸을 굳혔다.

“뭔가 기대하는 것이라도?”

에르난의 속삭임도 열기로 가득했다. 그는 레이테의 가슴을 쥐던 두 손 중 하나를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허리를 타고 내려간 손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거긴……!”

“위쪽만 기분이 좋을 수는 없잖습니까. 아, 역시. 촉촉해졌군요.”

남편을 받아들일 곳의 입구는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레이테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부정했다.

“그야 당연히 물속이니까……!”

“아니, 그것과는 다릅니다.”

에르난은 손가락을 굴리며 욕조의 물과는 다른 미끌미끌함을 즐겼다.

“으, 으읏. 잠깐만요!”

레이테는 허리를 비틀고 고개를 최대한 돌려 에르난을 바라보았다.

날카롭게 벼려 있던 여왕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촉촉이 젖은 두 눈이 가련하게 흔들렸다.

“원래…… 이렇게 하나요?”

질문이 민망했는지 레이테는 에르난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 순간, 에르난은 온몸의 힘이 한 곳으로 모조리 모여드는 기분이었다.

“서로 합의만 한다면야 무엇인들 못 하겠습니까. 뭐 보통은…….”

잔뜩 성난 것으로 레이테를 느끼고 싶다. 에르난은 그런 충동에 휩싸였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리고 은밀한 틈으로 손가락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보통은 이렇게 한다지요?”

“흐읏, 아프잖아요!”

“긴장 풀어요. 안 아프게 될 겁니다.”

손가락을 휘감는 낯선 쾌감에 에르난은 감탄했다.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빠듯한 것 같지만, 매끈해서 좋았다. 손가락은 더 깊숙한 곳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아읏, 아…… 흐응.”

은밀한 곳에 들어온 이물질은 그녀에게 통증만을 안겨 주지는 않은 듯했다. 레이테는 훨씬 더 달콤한 신음을 흘렸다.

그에 따라 에르난의 움직임도 변했다. 마냥 안으로만 들어가던 것은 이제 밖으로 빠져나가다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흐아앗! 그, 그만!”

“이렇게 좋아하시면서 그만이라니. 우리 솔직해집시다. 정말 이게 싫습니까? 그만둘까요?”

“흐읏, 흐윽…… 이런 건 이상해, 이상해요!”

“싫다고는 안 하시네.”

에르난은 입가에 닿은 레이테의 귓불을 살짝 깨물고 근처를 혀로 핥았다. 레이테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쪽도 민감하시고.”

예상치 않던 민감한 반응을 즐기며, 에르난의 혀가 더 집요하게 그녀의 귓가를 훑었다. 손가락의 움직임도 점차 과감해졌다.

“아, 아앗! 으…… 흐으읏!”

거의 흐느끼는 신음을 흘리며 레이테가 팔을 뻗어 필사적으로 욕조를 붙잡았다. 그녀는 일어나려 했다.

그때 에르난의 손가락이 깊이 들어왔다.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자극에 떠는 몸은 레이테의 마음대로 가눌 수조차 없었다.

“어딜 가시려고.”

레이테의 귀 아래를, 가슴의 정점을, 다리 사이 깊숙한 곳을 자극하는 움직임은 집요했다.

에르난의 흥분에 찬 숨소리도 선명하게 들렸다. 그녀의 몸에 완전히 빠져든 남자의 헐떡임은 야릇했다. 허리에 닿아만 있는 뜨거운 기둥마저 쾌감을 끌어올렸다.

“으흣, 하아…… 이런 건, 앗, 잠깐, 잠깐만요, 이상해……, 그만, 잠깐만……! 앗, 흐윽…… 하으윽!”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격한 신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곧 레이테는 온몸에 힘이 풀려 털썩 쓰러졌다.

“하아…… 제가, 하지 말라는 데도…… 자꾸……. 아흣! 아, 그만…… 흐응!”

레이테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이에도 짧은 신음이 끼어들었다. 에르난이 아직 빼지 않은 손가락으로 장난치듯 꾹꾹 안쪽을 눌러 댔기 때문이었다.

“후우……, 쾌락에 떠는 당신을 뒤에서만 봐야 해서 참 아쉽습니다.”

“그런 생각을 할 여유도 있고 대단하시네요.”

레이테가 빈정거렸지만, 지쳐 버린 목소리에는 별 힘이 없었다.

“여유라니, 설마요. 당신의 안쪽 살을 완전히 맛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습니다.”

“표현이 저속하군요.”

“아직도 그런 체면을 차리십니까? 저는 더는 못 참습니다.”

에르난은 빳빳하게 선 성기를 쥐었다. 레이테에게 닿는 에르난의 숨결이 뜨거웠다.

“이대로 가능한가요? 이렇게 앉아서?”

“못할 건 없잖습니까? 밑에서 위로 들어가면 그만인걸요.”

“그런 망측한…… 흐응!”

반발하려던 레이테는 에르난의 손가락이 자신의 안에서 주르륵 빠져나가자 몸을 떨었다.

에르난이 그녀의 몸을 살짝 들어 좀 더 자신과 밀착시켰다. 단단한 살덩이가 레이테의 은밀한 입구에 닿았다. 레이테는 불안해하며 몸을 움츠렸다.

“괜찮아요. 훨씬 더 기분이 좋을 겁니다. 그러니 이제 저를 받아들여서…….”

에르난의 목소리에도 여유가 사라져 있었다.

그가 드디어 자신의 것을 막 밀어 넣으려는 찰나였다.

쾅쾅!

바깥에서 목욕실의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두 사람은 움직임을 멈췄다.

“폐하! 침입자가 성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저희가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내용은 그럭저럭 공손하지만 소리는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너무 시간을 끌었나.”

에르난은 레이테를 뒤에서 껴안았다. 그는 레이테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이다음은 나중에 이어서 합시다.”

문밖이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폐하! 들어가겠습니다! 부인, 열쇠를 주십시오!”

“안 됩니다! 목욕 중인 폐하께 대체 무슨 짓인가요!”

조아나의 목소리도 들렸다. 문이 쿵쿵 부딪치며 점점 더 격하게 고성이 오갔다. 그러자 레이테가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 밖을 향해 외쳤다.

“조용히 하거라!”

문밖의 남자를 찌르기라도 할 듯이 날카로운 외침이었다.

그 순간 에르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폐하의 안전이…….”

여왕의 기세에 눌린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갔다.

“이야기는 목욕을 마치고 듣지. 무례함에 따른 처벌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알겠습니다.”

굳은 목소리의 답변에 레이테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 다른 분들도 어서 돌아가세요. 폐하께서는 바쁘십니다. 탐브레 백작께서 정오쯤 도착하신댔어요. 어서 단장해야 한다고요! 백작은 정말로 부지런하세요. 역시 폐하의 유일한 혈육다운 정과 충심을 지니셨어요. 멋져!”

조아나가 큰 목소리로 야단스럽게 떠들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목욕실 안의 두 사람은 긴장했다.

“아무래도 우리 들으라는 소리 같네요. 저녁쯤에나 오겠거니 싶었는데 왜 이리 빨리 오는지.”

레이테가 한숨 쉬었다.

“지낼 곳이 있다고 하셨지요? 빠져나가는 길을 알려 드릴 테니 그쪽으로 나가세요.”

에르난은 능글능글 웃으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하다 마니까 아쉽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아쉽기는 무슨.”

쌀쌀맞게 대꾸하고 레이테는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움직임에 욕조의 물이 촤르르 쏟아져 에르난에게도 튀었다.

에르난은 똑바로 선 레이테의 몸을 올려다보았다. 옷을 입어서, 앉아 있어서 여태 볼 수 없던 엉덩이와 허벅지는 당장 만지고 싶을 만큼 매끈하고 관능적으로 보였다. 긴장한 머릿속에 열기가 다시 차오를 것 같았다.

“아름다우시네요, 폐하.”

욕조 밖으로 나가려던 레이테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녀는 에르난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런 말씀 하시면 여자가 감동할 거라고 생각하시나 보네요.”

기쁨도 흥분도 없이, 이곳에서의 일조차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냉정한 목소리였다.

에르난은 당황했다. 환심을 사려고 일부러 한 말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느낀 대로 말했을 따름이었다.

“진심입니다.”

“그래요?”

레이테는 대놓고 코웃음을 치더니 단숨에 욕조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다리를 들어 올리자 물이 에르난에게 잔뜩 튀었다.

눈에 물이 튀는 바람에 에르난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가 도로 눈을 떴을 때, 레이테는 이미 커다란 수건을 몸에 두른 채였다.

에르난은 그녀가 어쩐지 일부러 물을 튀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왕자가 폐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레이테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보석이 주렁주렁한 목걸이가 묵직하게 그녀의 목을 당겼다.

목걸이의 줄은 놀라울 만큼 완벽하게 동그란 진주였다. 부드럽게 도는 은빛 광택이 아름다운 진주는 레이테의 머리 색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중앙의 펜던트는 은으로 세공한 틀에 사파이어를 달았다. 큼직한 사파이어는 불순물 하나 없이 짙고 선명한 보랏빛이었다. 그 아래로 짙은 색의 루비와 물방울 모양의 진주가 이어졌다.

“정말 화려하네요. 이런 걸 쉽게 내주던가요?”

레이테는 그녀의 뒤에 선 중년의 사제, 시스로네스 대주교에게 물었다. 그는 여왕의 결혼 협상을 마치고 이 목걸이와 함께 돌아왔다.

“확실한 증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니 내어주더군요. 바르시나 왕실의 보물 중에서도 왕비가 대대로 착용하는 물건이라 합니다.”

“왕비라…… 고작?”

레이테가 빈정거렸다.

목걸이는 호화롭지만, ‘겨우’ 왕비의 물건이라 하니 그 매력이 덜해 보였다.

그녀는 여왕이다. 세상에 태어나 말도 제대로 하기 전부터 여왕이 되었다. 지금도 여왕이다. 비록 감시당하는 신세지만.

“일단 그 나라는 여성의 왕위계승이 불가능하니까요.”

또한 앞으로도 여왕일 것이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서 쉬도록 하세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대주교가 나가고 방에 홀로 남은 레이테는 한참 동안 거울을 더 들여다보았다.

목걸이는 부정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름다움보다는 그 무게가 훨씬 중했다.

목걸이는 여왕의 결혼을 약속하는 증거니까.

레이테는 작게 한숨 쉬며 목걸이를 풀어 보석함에 집어넣었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일마저 부담스럽다.

그래도 약간은 가슴이 설렜다. 목걸이를 보낸 왕자가 어떤 사람일지, 잠깐 상상해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어차피 그런 환상이 오래가는 법은 없으니.

* * *

난폭한 구둣발 소리가 점점 다가오더니 문이 덜컥 열렸다. 위압적인 거구의 탐브레 백작이 성큼성큼 들어와 여왕에게 다가가 섰다.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들어 그에게 내밀 뿐이었다. 백작은 허리를 숙여 여왕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여왕 폐하.”

“오랜만이에요, 숙부님.”

곧바로 일어선 탐브레는 외투와 장갑을 신경질적으로 벗어 뒤따라온 하인에게 건넸다. 하인이 허리를 꾸벅 굽혀 인사하고 돌아나가려는데, 백작이 그를 불렀다.

“잠깐, 그대로 있다가 따라오너라. 금방 나갈 테니.”

“나가신다니요?”

“강도를 잡기 전까지 쉴 여유 따위 없습니다, 폐하.”

탐브레는 여왕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무례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레이테는 그에 신경 쓰지 않고 고개만 갸웃했다.

“강도라고요? 이곳 암보스 성은 안전하고 쾌적하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저는 숙부님만 믿고 여기에서 몇 달째 지내고 있는걸요?”

“이방인 침입자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백작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는 진심으로 분노에 차 있었다.

레이테는 숙부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똑같이, 시간을 한참 들여 느긋하게 몸단장을 했다. 그사이, 백작이 성을 한 번 뒤엎었다고 전해 들었다.

잡일꾼 하나하나까지 전부 신원을 확인하고 곳곳을 샅샅이 뒤졌으나 ‘이방인 강도’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내일이 폐하의 탄신일이잖습니까? 사람이 많이 모일 텐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탐브레는 자리에서 일어나 초조한 발걸음으로 방을 왔다 갔다 했다.

“없을 리가 없는데…….”

그는 자신의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옷가지를 든 하인과 여왕이 주고받는 묘한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레이테는 심드렁한 얼굴로 앉아 있지만 무척 긴장한 상태였다. 일단 어디든 숨어 있으라고 급히 내보낸 에르난이 태연하게 하인인 척하며 백작과 따라 들어오다니!

에르난이 레이테를 보며 웃었다. 레이테는 잠깐 그를 노려봤다가 빠르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숙부님께서 제 안전을 챙겨 주시는데 설마 무슨 일이 생기겠어요?”

여왕의 태연한 반응에 백작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고작 왕자 따위에게 폐하의 인생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에르난의 얼굴이 비웃음으로 일그러졌다. 레이테는 깔끔하게 그것을 무시했다.

“왕자?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바르시나의 에르난 왕자를 말하는 겁니다. 그자가 감히 여왕을 노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에르난이라면 왕위 계승자이지 않나요? 더군다나 바르시나는 우리의 이웃인걸요. 고작이라고 부를 수준은 아닌 것 같…….”

“폐하! 왜 이리도 시야가 좁으십니까? 바르시나는 이곳 이베로 반도에 발을 붙이고 사는 주제에 반도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반도 내의 평화가 중요하다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탐브레는 여왕의 말을 잡아먹듯 자르고 윽박질렀다. 레이테는 몸을 움츠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를 흥미롭게 관찰하는 남자에게 이런 모습 따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테의 몸은 위협에 본능적으로 겁먹고 만다.

“죄송해요……. 그러면 숙부님께서 권유하신 대로 헤젤의 왕과 결혼하는 편이 제일 좋을까요?”

“아, 물론 그렇게 되기를 바랐지요! 그런데 헤젤의 왕은……, 교활한 작자 같으니! 왕이 폐하의 배우자가 되더라도 사크틸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제가 얼마나 협상에 공들였습니까? 잘 아시지요?”

“물론요. 배려에 감사드려요.”

에르난이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레이테는 일그러지는 자신의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는 척했다.

자신의 입으로 한 말이지만 우스웠다. 숙부의 그 잘난 배려 덕택에 내일이면 스물세 살이 되는 여왕은 여태 미혼이다.

여왕이 결혼하면 백작은 조카를 대신할 명분을 잃는다. 모든 권력이 여왕의 배우자에게 합법적으로 넘어갈 것이다.

탐브레는 권력을 놓을 마음이 없다. 결국 그는 갖은 핑계를 대며 조카의 결혼을 미루기만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헤젤은 바르시나와 몰래 교섭을 준비하지 뭡니까.”

레이테는 에르난 쪽으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공손히 고개를 숙인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무슨 일로?”

“왕의 딸인지 손녀인지, 아무튼 누군가를 에르난 왕자에게 보내고 싶어 하더군요. 우리 사크틸라를 좌우에서 압박할 생각이겠지요.”

레이테가 풉 웃었다. 백작은 눈초리를 치켜떴다.

“웃음이 나오십니까?”

매서운 목소리에, 레이테는 주눅 들지 않고자 옷소매 안에서 떨리는 주먹을 꽉 쥐며 버텼다. 오랜 연습 끝에, 공포에 떠는 중에도 목소리만은 태연하게 낼 수 있다.

“그러면 왜 숙부님께서는 왕자가 강도질을 할까 봐 걱정하시나요? 설마 그가 중혼죄라도 저지르겠어요?”

“그러고도 남을 겁니다. 바르시나인의 방탕한 도덕관은 유명하잖습니까?”

“아, 하긴…….”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웃 나라 사람의 도덕성에 레이테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다만 결혼하기도 전에 확인이니 반칙이니 운운하며 여자를 살살 꼬드겨 재미나 보는……,

‘그래, 말은 꽤 그럴듯했지만 결국은 그 의도였을 테지.’

어쨌거나 그런 짓을 한 남자가 팔짱을 끼고 레이테를 바라보고 있다.

“잘 알겠어요. 그러면 제 결혼은 어떻게 하죠?”

“일단은 신중해집시다. 폐하뿐만 아니라 이 나라 전체의 미래가 달린 일입니다.”

‘퍽이나…….’

“네, 숙부님의 말씀을 따를게요. 일찍 오셨으니 점심이라도 함께해요. 오전부터 고생하셨으니 맛있는 음식도 드시고 좀 쉬셔야지요.”

“그러지요. 이따 뵙겠습니다.”

탐브레는 몸을 휙 돌려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에르난이 그 뒤를 따랐다.

어쩔 생각이지? 레이테는 그를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숙부의 의심을 살 위험이 있으니 가만히 그를 보낼 수밖에 없다.

에르난은 문을 닫으며 그녀에게 꾸벅 인사했다. 레이테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에르난은 씩 웃고 사라졌다.

또렷한 이목구비.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 그 아래 떠오른 환한 미소. 묘하게 믿음 가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겉모습에 속아서는 안 된다. 레이테는 목욕실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숙부는 침입자의 일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점만 빼고는 레이테가 알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조카인 여왕을 섬기며 배려하는 척하지만, 여왕보다 강한 자신의 힘을 딱히 숨기지도 않는다.

‘그 모습을 보기 좋게 왕자에게 들켰고.’

초라한 꼴을 보였다. 레이테는 몸을 웅크렸다. 수치스럽다. 벗어나고 싶다.

탐브레로서는 조카가 아예 결혼하지 않는 편이 유리했다. 반면 레이테는 일단 그에게서 벗어나는 일이 무엇보다 다급했다. 숙부의 손아귀에 있는 한, 레이테는 이름뿐인 여왕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

그녀는 배우자가 될 남자가 필요했다. 숙부를 대신할 남자.

“대신…….”

레이테는 멍하니 읊조렸다.

남편이 숙부를 대체할 뿐이라면, 결혼을 할 필요가 있을까?

레이테는 간절하게 숙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녀는 무엇보다, 군주다운 힘을 가지고 싶었다.

* * *

에르난은 정원이 보이는 곳에 태연하게 앉아 쉬었다. 이제 비는 완전히 그친 듯했다. 그는 느긋하게 햇빛을 즐겼다.

백작의 병사들이 성 곳곳을 지나다녔다. 그러나 누구도 단출한 옷차림의 에르난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일단 여왕을 만났다. 그리고 원하는 일을…… 아쉽게도 일부만 했다.

탐브레 백작의 병사는 기가 막힌 타이밍에 그를 방해했다. 에르난은 진심으로 백작을 미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백작이 사라져야 정상적인 결혼생활이 가능하며 권력을 잡을 가능성도 생긴다.

여왕의 숙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 에르난은 프란세스크의 도움을 받아 하인으로 위장했다. 왕자의 침입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백작은 곁의 하인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여왕에게 신중한 결혼 운운이라니. 본인부터 신중해져야겠어.’

에르난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변장의 성과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카와 숙부의 관계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도도하게 에르난을 깔보던 여왕은 어른의 말을 잘 듣는 순진한 아가씨가 되었다. 레이테의 곱고 상냥한, 그러나 인위적인 목소리의 정체를 에르난은 짐작할 수 있었다. 생존 전략일 것이다.

딱하면서도 동시에 거슬렸다. 훈련받은 이는 다루기 힘드니까.

‘그러니 더더욱 여왕을 구출해야지.’

어쨌거나 위기에 처한 사람은 다른 이에게 의지하고 싶기 마련이다. 여왕의 편지에도 그런 느낌이 다분했다.

마음의 틈을 노린 에르난은 결국 여왕의 주인이 되고, 끝내는 여왕의 소유인 사크틸라의 주인도 될 것이다.

물론 과하게 낙관적인 예측이지만, 에르난은 기분이 좋았다. 잘될 것 같다.

“전하, 무슨 망상을 열심히 하십니까.”

유창한 사크틸라어지만, 에르난은 목소리로 그가 프란세스크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도 에르난과 비슷하게 허름한 차림새였다.

“망상이라니, 무슨. 행복한 결혼 생활을 상상했지.”

“백작의 병사는 별 볼 일 없더군요. 백작이 하도 호통을 치니 수색하는 척만 합니다. 어차피 진작 도망쳤을 테니까 소용없는 짓이라는 분위기지요.”

“그야 병사들이 수색을 귀찮아하도록 자네가 유도했겠지.”

프란세스크는 큭큭 웃으며 왕자의 옆에 앉았다.

“여왕은 마음에 드십니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에르난은 잠시 고민했다.

레이테라는 여자 자체는 마음에 들었다. 의욕이 난다. 설령 예상과 달리 덜 고분고분하더라도 좋았다.

“……어차피 본질은 경쟁자야.”

그러나 에르난의 답은 차가웠다.

짧은 교감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에르난은 지독하게 매혹적인 그 여자를 손안에 넣고 싶었다.

이 생각은 위험하다. 사랑은 반드시 수단으로서만 기능해야 하므로.?여왕의 맞은편에 앉은 탐브레 백작은 눈앞의 음식을 쉴 새 없이 먹어치웠다.

메인 요리인 새끼돼지 통구이는 접시를 세워 썰어도 될 만큼 육질이 연했다. 그러나 탐브레는 나이프조차 마음대로 못 다룰 정도로 분에 차 있었다.

답답함을 견디다 못한 탐브레는 아예 고기를 통째로 손에 쥐고 뜯어먹었다. 그는 기름 묻은 손을 닦지도 않고 포도주를 연거푸 들이마셨다.

백작의 뒤에서 손수건을 들고 대기하던 에르난은 할 일이 없었다. 그는 수건을 배 모양으로 접으며 빈둥거렸다.

탐브레가 돼지 다리를 확 잡아 뜯었다. 에르난에게까지 기름이 요란하게 튀었다. 에르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백작을 노려보았다가 접은 수건을 펴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두 남자의 정신없는 모습에 레이테는 그러잖아도 없는 식욕이 완전히 떨어졌다. 두어 입 먹었던 고기는 아예 먹고 싶은 마음 자체가 사라졌다. 좋아하던 술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성과는 좀 있었나요?”

백작은 여왕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레이테도 굳이 대답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숙부가 찾던 강도가 그의 등 뒤에 멀쩡히 서 있으니.

“애초에 정말 침입자가 있었을까요? 목격자 진술이라고 받은 인상착의마저 사람마다 전부 내용이 다르다던데요.”

“일일이 알아보셨습니까?”

술잔을 들이켜던 탐브레가 움직임을 멈추고 여왕을 노려보았다. 얼굴은 술기운으로 벌겋게 달아올랐고, 탁하게 번뜩이는 두 눈은 위협적이었다.

아차. 레이테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숙부를 자극하면 안 된다. 숙부는 조카가 자신의 일, 즉 원래는 여왕이 맡아야 할 일에 관심을 보이면 싫어했다.

“아, 아까 조아나에게 들었어요.”

“세세한 일에 너무 관심이 많으십니다?”

“침입자가 있다고 하니까 무서워서…….”

“…….”

잠시 침묵하던 탐브레는 술잔을 내려놓고 손을 가볍게 들었다. 에르난이 수건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탐브레는 우악스럽게 손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든 백작이 조카를 내려다보았다. 레이테는 그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식탁 아래, 무릎 위로 주먹 쥔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숙부의 위압적인 모습이 무섭다. 이 상황을 또 에르난이 지켜본다는 사실도 치욕적이었다.

하지만 레이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폐하의 신변 보호는 제가 알아서 합니다. 지나친 관심은 화를 부른다고, 제가 늘 말씀드렸잖습니까. 조카님은 이제 어린애가 아닌데, 왜 자꾸 말귀를 못 알아들으십니까?”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발하고 싶다. 그러나 레이테는 숙부가 주는 공포 앞에 무력했다.

오랫동안 그녀는 반항을 몰랐다. 반항할 수 있음을, 아니 반항해야만 함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깨달음을 실천에 옮기기는……, 여전히 무리였다. 분노와 수치심으로 끓어오르는 마음을 차마 터뜨릴 수 없었다. 레이테는 이 상황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랐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주제넘은 일은 하지 않을게요.”

여왕이 문제의 침입자와 만날까 봐 불안할 뿐 아니냐고 일갈하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숙부의 불안은 사실 맞았다. 우려대로 그 침입자와 만나 버렸으니까. 들키면 끝장이다.

그래서 더더욱 참으며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레이테는 마음속으로나마 중얼거렸다.

‘나는 저 사람에게 무릎 꿇지 않아. 오히려 그를 속였는걸. 절대 엎드리는 게 아니야…….’

비슷한 말을 자꾸 반복하지만,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에르난은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고개를 숙인 레이테는 그를 볼 수 없었다.

적당히 꾸짖으면 레이테는 금방 얌전해진다. 탐브레는 이 사실을 잘 알았다. 어찌 되었든 조카고, 무엇보다 여왕이다. 물리적인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탐브레는 도로 앉는 대신 레이테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큰 손이 여왕의 턱을 붙잡고 거칠게 들어 올려 제 쪽을 바라보게 했다. 목이 억지로 돌아가자 레이테는 아픔에 신음했다.

“윽!”

“폐하.”

레이테는 손으로 숙부를 밀쳐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탐브레의 다른 손이 그녀의 가녀린 팔을 붙잡았다.

“저는 폐하의 유일한 가족으로서, 여왕께서 과연 남편을 제대로 섬길지 늘 걱정됩니다. 대체 어떤 남자가 폐하를 받아들일까?”

탐브레는 조카를 붙든 손을 탁 놓았다. 레이테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녀는 식탁을 붙잡아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버텼다.

비참함에 젖을 틈은 없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야 했다.

“자기 이익밖에 모르는 교활한 외국 왕과 흥정하느라 혼기를 놓칠 바에야, 차라리 사크틸라인 남편이 낫다는 생각도 듭니다. 폐하께서 여성의 미덕을 잊지 않도록, 관대하고 끈기 있게 폐하를 지켜본 사람 말이지요.”

태연한 척 자세를 고쳐 앉으려던 레이테의 움직임이 굳었다.

‘맙소사, 설마 자기와……?’

백작이 다시 레이테를 향해 팔을 뻗었다. 레이테는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벗어나야 해! 그러나 놀라 굳어 버린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탐브레는 조카를 붙잡지 않았다. 대신 여왕이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술잔을 들어 그녀에게 건넸다.

레이테의 떨리는 손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백작은 조카의 어깨를 토닥였다. 레이테는 소름이 돋아 잔을 손에서 그대로 놓을 뻔했다.

“폐하, 현명한 결혼이란 무엇일지 생각해 봅시다. 일단 식사를 마저 하시지요. 제가 가져온 포도주입니다. 맛이 좋으니 드십시오.”

레이테는 망설였다. 끔찍한 소리를 쏟아 내고서 느닷없이 술을 권하는 태도가 수상했다.

이 안에는 뭔가 있어. 직감이 그녀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백작은 여왕이 술을 다 마실 때까지 지켜볼 기세인지 한 발짝 물러선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 잠깐…….”

레이테의 겁에 질린 눈이 미친 듯이 방황하다가, 어느새 탐브레의 바로 뒤에 다가온 에르난을 향했다.

남편이 될 사람. 하지만 아직 확실히 믿을 수는 없는 사람.

왕자는 차게 굳은 얼굴로 탐브레를 응시하며 팔을 높이 들었다. 술이 담긴 큼지막한 유리병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에르난은 술병을 인정사정없이 백작의 뒤통수에 내려쳤다.

“꺅!”

레이테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병이 산산이 조각나면서 병 안의 술도 쏟아졌다.

난데없는 공격에 탐브레는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레이테는 쓰러지는 숙부의 몸을 무심코 손으로 받아들었다. 의식 잃은 사람의 무게에 그녀의 손이 후들거렸다.

에르난이 다가와 레이테의 손을 치우고, 백작을 옆으로 밀어 쓰러뜨렸다. 깨진 조각이 난자한 바닥 위에 탐브레는 쓰러졌다.

“미쳤어요, 당신……?”

레이테는 당황하며 물었다. 에르난은 레이테가 든 술잔을 빼앗아 멀리 던져 버렸다.

“미친 건 조카를 겁탈하려는 이 짐승이죠.”

“겁탈이라니?”

레이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수상한 약을 탄 술. 고전적인 수작 아닙니까?”

에르난은 쓰러진 탐브레의 오른손을 인정사정없이 짓밟았다. 피일지 포도주일지 구분할 수 없는 액체가 흘러나오며 백작의 손을 흥건히 적셨다.

가차 없는 응징에 레이테는 경악했다.

“죄를 제대로 묻고 싶지만……, 일단은 나갑시다. 이런 곳에 폐하를 단 하루라도 더 두고 싶지는 않군요.”

에르난이 여왕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와 숙부를 번갈아 보던 레이테는 잠시 후 에르난의 손을 꼭 쥐고 일어났다.

“어쩔 생각인가요?”

“저와 일행이 가져온 말이 있습니다. 뛰어난 말이니 그것을 타면 됩니다. 속도를 내면 대주교가 있는 부르고까지 못 갈 이유도 없지요.”

“못 갈 이유도 없다니. 지금 출발하면 해가 지기 전에 도착이 가능하겠어요?”

“저는 밤마다 비를 맞으며 닷새 걸려 이곳까지 왔습니다.”

먼 길을 빠르게 이동한 경험이 없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당장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 자체는 레이테도 마찬가지다.

“각하, 무슨 일이라도…… 아니?”

밖에서 문이 벌컥 열리며 병사 두 명이 들어왔다.

“여왕의 비명에도 가만히 있더니만 뒤늦게 들어와서 백작부터 찾는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방해하지 말라는 명이라도 받았나?”

에르난이 레이테의 앞에 섰다. 병사들은 검을 뽑아 들고 여왕에게, 아니 에르난에게 다가왔다.

하인으로 변장한 에르난에게는 무기가 없다.

“머, 멈춰!”

여왕이 소리쳤다. 조금 더듬기는 했어도 단호한 외침이었다.

병사들은 당혹스러운 눈길로 쓰러진 백작과 여왕을 번갈아 살폈다.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병사들은 다시 에르난을 향해 다가왔다.

레이테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말만 여왕일 뿐, 무력하기 짝이 없다. 자신에게 등을 보이는 남자는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까.

병사가 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에르난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에르난은 레이테가 앉았던 의자를 집어 병사에게 던졌다.

“으아악!”

병사가 뒤로 넘어지며 소리 질렀다. 에르난은 바로 그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세게 휘둘렀다. 병사는 기절했다. 에르난은 멈추지 않고 다시 의자를 들어 남은 병사를 후려쳤다. 두 병사는 제대로 반항조차 못 하고 순식간에 쓰러졌다. 병사의 검 하나를 에르난이 뺏어 들었다.

에르난은 의식을 잃은 탐브레의 위에 올라탔다. 그는 칼날이 아래를 향하도록 방향을 바꾸어 검을 쥐었다.

그 모습이 보이는 의도는 명백했다.

에르난이 치켜든 검을 내리꽂으려 할 때, 레이테가 다급히 외쳤다.

“잠깐, 죽이면 안 돼요!”

움직임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 에르난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레이테는 몸을 움찔거렸다.

불길하게 빛나는 눈이 그녀를 응시했다.

레이테는 그 눈을 기억했다. 침실에서 에르난을 처음 만났을 때 환영처럼 보았던 섬뜩한 눈이었다. 두려움에 칼을 휘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죽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텐데요? 우리는 결혼하고, 폐하께서는 온전한 왕권을 되찾을 겁니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까지 혈육의 정 따위를 걱정하십니까?”

“그럴 리가. 다만 죽음으로 쉽게 끝내기 싫을 뿐이에요. 사크틸라의 법률에 근거해, 왕권을 기만한 죄를 철저하게 물어야 해요.”

백작은 정당한 절차에 따라 처벌할 것이다. 레이테의 울분 때문에라도. 또 지금까지의 비틀린 세월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레이테는 숙부가 싫었다. 하지만 숙부로부터의 탈출 자체가 그녀의 목표는 아니었다. 왕다운 왕이 되고 싶다. 숙부는 목적을 위해 넘어야 할 장애물일 따름이다.

“이러나저러나 끝은 죽음이거늘.”

에르난이 빈정거렸다.

“그렇게 치자면 죄가 있든 없든 어차피 모든 사람의 끝은 죽음이잖아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목숨을 끊는 건……, 야만인의 방식이죠.”

마지막 말은 상당히 날카로웠다. 에르난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다.

“그런 야만인이 있습니까? 뭐, 좋아요. 알겠습니다. 죽여서 간단하게 끝내기는 아깝지요. 청산할 일이 한둘이 아니잖습니까? 이 자를 사사로이 처리하는 일은 일단 참겠습니다. 왕권을 농락하는 반역자의 죽음이 왜 사사로운지는, 제가 사크틸라인이 아니라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길게 투덜거렸지만, 에르난은 결국 검을 거두고 백작의 위에서 내려와 섰다. 그는 문밖으로 향했다.

근처에 있던 병사는 에르난이 쓰러뜨린 두 명이 전부였던 모양이다. 복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레이테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침실에 비상탈출로가 있기는 하지만 백작의 수하들도 그곳은 아는지라 막힌 지 오래예요. 주방 근처에 고용인이 야간에 드나들 때 쓰는 쪽문이 있으니 그쪽으로 가지요.”

“꽤 구체적으로 아십니다?”

“당연하죠. 구하러 오는 왕자님이 없어도 도망칠 수 있도록, 이곳저곳을 파악해 뒀어요.”

레이테의 말에 에르난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제가 괜히 왔다는 말씀입니까?”?“글쎄요? 이쪽으로.”

레이테는 대답 대신 복도로 나와 왼편으로 에르난을 이끌었다.

그러나 모퉁이를 돌았을 때, 두 사람은 새로운 병사들과 마주쳤다. 에르난이 검을 세차게 휘둘러서 그들과 거리를 벌렸다.

“다른 길로 가요!”

레이테가 외쳤다. 둘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 다른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

계단 중간에서 레이테의 구두 한 짝이 벗겨졌다. 레이테가 다리를 비틀거렸다. 그대로 넘어져 미끄러질 뻔한 그녀를 에르난이 붙잡아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걸을 수 있겠어요?”

“괜, 괜찮…… 으앗!”

레이테는 에르난의 팔을 거세게 붙잡고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놀란 발은 바닥으로 내딛자마자 휘청거렸다. 병사들이 쫓아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런, 업겠습니다.”

레이테를 안아 들려던 에르난의 시선이 계단 위를 향했다. 병사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위층 난간에 낯익은 여자가 보였다. 여자가 손에 든 물건을 확인한 순간, 에르난은 레이테를 자신의 품 안으로 거칠게 밀어 넣고 몸을 웅크렸다.

그 직후,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퍽! 쨍그랑!

에르난은 단단한 팔로 그녀를 붙잡았다. 레이테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거세게 뛰는 에르난의 심장 박동이 레이테의 귀에 들렸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고개를 드니 자신을 품에 넣은 남자의 얼굴이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었다.

검은 눈은 한낮의 밝은 빛이 비치자 살짝 붉은 기가 돌아 보였다. 빛. 빛을 받으면 그렇게 보였구나. 순간 레이테는 그의 눈에 자신이 빨려들어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몸을 겹친 사이였다. 그런 주제에 고작 눈 따위에 시선을 빼앗긴다니.

하지만 그녀를 응시하는 두 눈과, 몸을 꽉 가둔 팔은 레이테의 몸뿐만 아니라 가슴마저 꽉 조였다.

“놓, 놓으세요…….”

레이테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에르난은 천천히 팔을 풀었다. 그는 여전히 레이테를 바라보았다. 시선도 상황도 부담스럽다. 레이테는 그것을 피하고 싶었으나 불가능했다.

피해 버린다면 마치 부끄럼을 탄다는 증명 같다.

“폐하, 괜찮으신가요?”

여자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비로소 서로에게서 벗어나 목소리가 들리는 위쪽을 바라보았다. 여왕의 시녀, 조아나가 위층 난간에 있었다.

레이테는 몸을 일으키려다 발의 통증을 느껴 도로 주저앉았다. 에르난이 말했다.

“저를 잡고 일어나세요. 천천히…….”

그의 어깨를 붙잡고 일어선 레이테가 주변을 둘러보니 난장판이었다. 병사들은 엉망으로 쓰러져 있었다. 깨진 화병 조각이 난자했으며 물과 꽃이 어지럽게 튀어 있었다. 조각조각 박살 난 벽돌마저 보였다.

“저더러 미쳤네 야만이네 말씀하실 건 아닐 듯합니다. 폐하의 시녀는 더 과격한데요.”

에르난이 주변을 돌아보며 헛헛 웃었다. 레이테도 할 말을 잃었다.

아무래도 조아나가 위층에서 저것들을 던져 병사들을 기절시킨 모양이다. 아니, 기절이면 다행일지도. 죽지나 않았을까 모르겠다.

조아나는 계단을 뛰어내려 레이테에게 다가왔다.

“세상에, 폐하! 다치셨나요? 제가 좀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는데!”

조아나가 울먹이자 에르난이 말했다.

“급히 달리다 넘어진 것이니 관련 없습니다. 간단히 응급처치라도 할 만한 곳이 있습니까?”

“아, 네! 성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쉬는 곳이 있어요.”

“그 사람들은…….”

“백작을 엄청나게 싫어하는, 여왕 폐하의 편이랍니다. 직접 드러내지만 않을 뿐.”

에르난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겠다는 듯 조아나가 바로 받아쳤다. 에르난은 레이테를 안아 들면서 살짝 빈정거렸다.

“여왕께서 외로이 홀로 계신 줄 알았는데, 아군이 꽤 많군요.”

“백작은 이 성에 절 가뒀지만, 이 지역 자체는 그에게 마냥 호의적이지는 않잖아요? 대주교의 영향권이니까.”

레이테의 답을 들은 그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모습을 본 레이테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닙니다. 가시죠.”

* * *

고용인 휴게실에는 마침 의사가 있었다. 그는 여왕의 발이 갑작스러운 자극에 단순히 놀랐을 뿐이라 했다. 레이테는 발목에 찬물로 적신 수건을 두르는 정도의 처치밖에 할 수 없었다. 시간을 끌수록 도주가 어려워진다.

“성문이야 당연히 막았을 테니 다른 길로 갑시다.”

그러나 성벽에 다다랐을 때, 세 사람은 병사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병사들 사이에서 오른손을 천으로 칭칭 감은 탐브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색이 파리한 백작은 에르난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어디서 감히 쥐새끼가…….”

하아, 에르난이 한숨 쉬었다. 그는 자신이 딛고 선 벽 너머를 힐끔 확인했다.

이 성은 요새가 아니었다. 성벽이 높지 않다.

성벽 아래에는 곡물 자루를 가득 실은 짐마차가 보였다. 마차에는 프란세스크가 앉아 있다. 근처에 말 두 마리가 따로 보였다.

프란세스크가 마차를 천천히 몰아 벽에 가까이 대었다. 에르난은 먼저 조아나를 밀어 뒤로 넘어뜨렸다. 조아나는 비명조차 지를 틈도 없이 뒤로 넘어갔다.

돌발행동에 놀란 레이테가 돌아보려 하자 에르난이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았다.

“에르난? 아……!”

에르난은 단숨에 레이테의 뒤에 서서 그녀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댔다.

“적당히 맞추는 척만 해요.”

레이테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인 에르난은 탐브레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백작의 뒤로는 궁수들이 에르난을 향해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명중 여부와 무관히, 누구라도 활을 쏘는 순간 이 여자 목을 끊어 버리는 줄 알아.”

“협박도 협박답게 해라. 네놈이 정말로 여왕을 죽이겠다고? 어디 해 보시지.”

어차피 에르난에게는 레이테를 진짜로 죽일 생각이 없다. 눈앞의 곤경을 벗어나고자 시간을 끄는 행동일 뿐이었다.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 의도였고, 레이테 또한 그것을 알았다.

하지만 레이테의 시선은 자신에게 닿은 검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목에서 느껴지는 차디찬 기운이 레이테의 의식 깊은 곳에서 억지로 기억을 끄집어냈다.

한낮의 햇빛은 눈이 부실 지경이지만 레이테의 눈앞은 깜깜해졌다.

무기력한 속박.

그 순간, 레이테의 손이 칼을 쥔 에르난의 팔을 거칠게 붙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팔을 끌어내리려 잡아당겼다.

생각지 못한 강한 힘에, 에르난은 살짝 몸을 휘청거렸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칼을 떼어내려 몸부림쳤다.

“안 돼……, 읍, 싫어…… 으흑, 아프…… 윽!”

“아니, 잠깐. 지나치게 몰입할 필요까지는……, 폐하?”

에르난은 레이테와 탐브레를 번갈아 보았다. 레이테는 숨이 넘어갈 듯 거칠게 헐떡이며 몸을 떨었다. 제정신이 아닌 중에도 팔만은 필사적으로 에르난을 붙잡았다. 다른 팔로는 가슴을 쾅쾅 두들겼다.

반면 탐브레는 차분해 보였다. 조카에 대한 걱정 따위가 그에게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겁에 질린 여왕을 바라보는 백작의 여유에는 무언가 수상한 데가 있었다.

에르난은 칼을 쥔 손을 펼쳤다.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레이테는 갑자기 찾아온 해방감에 몸을 비틀거렸다.

넘어질 뻔한 그녀를 품에 안아 든 에르난은 곧바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읍, 흐읍……!”

레이테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에르난은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그녀의 입 안으로 숨을 불어넣었다.

호흡이 뒤섞였다. 레이테는 눈앞이 핑 도는 것 같았다. 곧 가슴의 통증이 줄어들었다. 몸의 경직이 풀리면서, 그녀는 몸을 휘청대며 입을 떼어냈다.

“후아……!”

레이테는 크게, 그러나 천천히 숨을 쉬었다. 시야가 천천히 트였다.

살짝 울상지은 표정의 에르난이 보였다. 걱정했던 건가?

“후우, 도대체가 당신은 협조라는 걸 모르는 분이시군요. 적당히 맞춰 달랬지 그렇게 몰입하면 어떡합니까?”

알아서 할 테니 잠자코 따라오기나 하라는 식이었다. 레이테는 울컥했다.

“오늘 처음 만났으면서 저에 대해 뭘 얼마나 안다고 멋대로…….”

“일단 팔 치워 주십시오. 칼 놓은 지 오랩니다. 아픕니다.”

“아, 미안해요.”

호흡이 돌아왔음에도 레이테는 계속 에르난의 팔을 붙잡은 채였다. 그녀는 당황하여 손을 떼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미안해요…….”

레이테는 고개를 떨궜다. 의식이 돌아오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금방 파악이 되었다. 못 보일 꼴을 보였다.

단순히 추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알리고 싶지 않았다.

에르난에게도, 또 마주한 적에게도.

잠자코 지켜보던 탐브레 백작이 팔을 들고 가볍게 흔들었다. 활시위를 겨눈 궁수들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에르난은 레이테를 덥석 안아 들었다. 우아한 에스코트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짐짝이라도 드는 모양새였다.

“꺅! 무슨 짓이에요!”

레이테의 외침을 무시하고, 에르난이 호쾌하게 소리쳤다.

“탐브레 백작! 그대의 말이 맞아. 어떻게 신부를 죽이겠나. 대신에 납치해 가지!”

레이테는 다시 눈앞이 하얘질 것 같았다. 발작은 아니었다. 단지 어이가 없어 멀미가 나는 기분이었다. 레이테는 에르난의 옆구리를 세게 쳤다.

“납치라니, 왜 내가 강제로 끌려가야 하죠?”

“그야 이편이 훨씬 로맨틱하니까요.”

대답 직후, 에르난은 또다시 레이테의 입술을 덮쳤다.

“읍, 흐읍……!”

조금 전의 호흡을 진정시키던 행위와는 달랐다. 숨 대신 들어온 혀가 거침없이 그녀의 안을 탐했다. 레이테가 에르난의 등을 쾅쾅 치고서야 그는 레이테를 놓아주었다.

“방금 정말로 아팠습니다. 살살 치면 안 됩니까?”

“머릿속에서 무슨 망상을 하는지는 관심 없고, 강압적인 접촉은 로맨틱이 아니라 범죄거든요?”

“이것 봐요. 거절하잖습니까? 납치가 맞네요.”

“뭐?”

뻔뻔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레이테는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황당해하는 반응이 흡족한지 에르난이 환히 웃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저절로 신뢰가 생길 만큼 시원시원한 웃음이었다.

‘혼자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어디 한번 잘 해 보시오, 반역자!”

에르난은 마지막으로 백작에게 소리치더니, 레이테를 안고 뒤로 뛰어내렸다. 놀란 레이테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안정적으로 포대 위에 떨어진 에르난은 레이테를 꼭 쥔 채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놀라서 새파래진 얼굴의 여왕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세상에, 이러니 정말로 납치 같잖습니까?”

“미, 미쳤어…….”

“많이 놀라셨습니까?”

“이 상황에서 안 놀라나요? 성벽에서 뛰어내리다니!”

“이 성벽 별로 안 높습니다.”

레이테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는 조아나가 보였다. 처음 보는 키가 큰 남자가 함께 있었다. 레이테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묵례했다.

“세스크, 말은?”

에르난이 묻자 프란세스크가 말을 끌고 와 고삐를 에르난에게 건넸다.

“바로 출발하셔야 합니다.”

“수고했네. 아, 폐하. 말은 타실 수 있겠습니까?”

에르난은 곧바로 말에 올라타고서 레이테에게 손을 내밀었다. 말은 두 필 뿐. 에르난과 함께 말에 앉고 싶지는 않았으나 어쩔 수 없어 보였다.

레이테는 그의 손을 잡는 대신 스스로 말을 붙잡고 올라탔다. 도중에 발이 살짝 후들거렸으나 어렵지는 않았다.

“사람을 대체 뭐로 생각하시죠? 문제없어요.”

다른 말에는 프란세스크가 탔다. 조아나는 여왕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더니, 프란세스크가 내민 손을 붙잡고 말에 올랐다. 그녀는 부끄러운지 변명을 덧붙였다.

“죄송해요, 폐하. 저는 말을 별로 잘 타지 못해서…….”

“아니, 상관없는데…….”

레이테도 민망함에 말을 더듬었다. 딱히 조아나를 책망할 마음은 없었다. 자신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또 당연하게 챙겨 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에르난에게 불평했을 따름이다.

에르난은 씩 웃으며 한쪽 팔로는 레이테의 허리를 감고, 다른 팔로 말의 고삐를 쥐었다.

성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에르난은 말을 몰기 시작했다.?추격은 거셌다. 그러나 기이할 만큼 백작의 포기는 빨랐다. 레이테는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지만, 당장 그녀에게 찾아온 생체반응 때문에 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말은 많이 타 보았다. 하지만 이토록 쉼 없이 빠르고 거칠게 타 본 일은 없었다. 레이테는 속이 완전히 뒤집힐 지경이었다.

해가 질 무렵에야 한참 질주하던 말이 속도를 늦췄다. 레이테는 에르난에게 등을 기대고 심호흡을 하며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혔다.

“폐하, 물이라도 드세요.”

조아나가 다가와 물주머니를 건넸다. 레이테는 주머니를 힘없이 받아 들어 몇 모금 마시고 에르난에게 그것을 넘겼다. 에르난은 남은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빈 주머니를 조아나에게 건네던 에르난의 눈에 멀리서 다가오는 무리가 보였다. 경계하며 허리춤의 검에 손을 올리던 그는, 앞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보더니 도로 손을 내렸다.

깃발 중앙에 붉은색과 노란색의 격자무늬 방패가 보였다. 방패를 둘러싼 4단의 술이 달린 모자 그림은 고위 성직자인 대주교를 상징한다. 에르난의 눈에 익숙한 문장이었다.

완전무장한 기사 수십 명이 위엄을 뽐냈다. 기사 뒤로는 적잖은 숫자의 보병이 따라왔다. 행렬의 가장 앞, 가운데에는 주교가 입는 자색 사제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있었다.

말에서 내린 대주교는 에르난과 레이테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여왕 폐하, 무사히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시스로네스 대주교,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백작이 추격을 왜 멈췄나 싶었더니, 대주교의 군대를 알아차린 모양이군요.”

“네. 일부러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폐하의 탄신일을 축하하러 간다고요. 조금 더 서둘러야 했던 모양입니다. 송구합니다.”

“괜찮아요. 어쨌거나 만났잖아요? 의외의 사건이 터진 덕택에.”

대주교의 시선이 여왕의 뒤에 앉은 에르난에게로 향했다.

“에르난 왕자 전하! 오랜만이로군요.”

그는 대단히 놀란 듯 외쳤다. 에르난에게 그것은 꽤 연극적으로 느껴졌다. 목소리만 밝지, 눈빛은 날카롭다.

“전하, 저희 여왕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군대는 쓸모없게 되었지만요.”

“글쎄,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군사 충돌이야 어차피 시간문제 아닙니까?”

“그래도 폭력 없이 해결하는 쪽이 좋잖습니까.”

대주교의 말에 레이테가 어깨를 들썩였다. 에르난도 어쩐지 멋쩍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에르난은 자신이 탐브레에게 저지른 행위와 다른 사건을 떠올렸다. 피는 이미 꽤 많이 흘려 버렸다…….

“어찌 되었든 사크틸라에 잘 오셨습니다.”

“대주교께서 바르시나에 오셨을 때, 조만간 다시 만나자고 하셨지요. 그 조만간이 너무 길어지길래, 그냥 제가 직접 찾아왔습니다.”

길고도 지루한 기다림이었다.

약 2년 전, 시스로네스 대주교는 에르난과 레이테의 결혼을 의논하고자 바르시나 왕궁을 찾아왔다.

에르난은 그때 일을 생생히 기억했다. 대주교가 제시한 여왕의 남편 자리는 먹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에르난이 그때를 잊지 못하는 이유는 조금 더 사소하고도 악의 넘치는 대주교의 말 때문이기도 했다.

* * *

성인이 된 에르난 왕자는 바르시나 본토에서 한참 떨어진 섬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통치는 만만치 않았다. 섬이 상업적 요충지인 탓에 왕자는 각종 이권의 충돌을 중재하기 바빴다. 상선을 습격하는 해적 토벌까지 직접 나서야 했다.

왕위 계승자로서의 예행연습이나 다름없던 3년의 임기를 마친 왕자는 본토로 귀환했다. 뭍에서의 휴식을 즐기던 차에, 뜻밖의 손님이 그를 찾아왔다.

사크틸라 여왕의 심복인 알레한드로 시스로네스 대주교였다. 왕자에게 공손히 인사한 그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저희 여왕 폐하의 남편이 되어 주십시오.”

에르난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자리에 함께한 그의 아버지, 자우메 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진심이오……?”

여왕의 결혼은 두 나라가 위치한 이베로 반도에서 가장 뜨거운 문제 중 하나였다.

여왕에게는 실권이 없었다. 숙부인 탐브레 백작이 여왕의 유년기부터 사크틸라를 실질적으로 지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여왕은 성인이다. 그녀가 결혼하면 탐브레의 역할은 끝난다. 여왕이 상속받은 모든 권한은 남편의 소유가 되므로.

그리고 탐브레는 얌전히 권력을 놓을 마음이 없다.

“네. 전하께서는 동쪽의 바다를 훌륭히 통치하고 오셨습니다. 이제 서쪽의 넓은 땅에서도 활약하셔야지요.”

시스로네스는 왕자의 마음속을 훔쳐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바르시나는 반도 동부에 썩 크지 않은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 반면 사크틸라는 반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대국이었다.

넓은 땅을 호령할 기회. 망상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꿈을 이룰 수 있다니. 에르난의 눈은 이미 흥분으로 번뜩였다.

“우선, 국왕 폐하께서는 아드님을 반드시 바르시나의 다음 왕으로 세우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희 여왕과의 결혼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대주교는 자우메를 향해 말했다.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위 계승자로서 에르난의 입지는 탄탄했다. 경쟁자는 없다. 총독으로서의 임무를 훌륭히 해내어 능력도 증명했다.

“그리고 여왕께서는 남편이 단순 배우자를 넘어서, 정식으로 사크틸라의 왕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즉, 부부가 함께 사크틸라의 공동왕이 됩니다.”

환영할 만한 일이다. 결혼도 엄청나건만 아예 왕위를 주겠다니?

“그러니 왕자께서 무사히 사크틸라의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라도, 반역자의 처단에 힘을 보태 주시리라 믿습니다.”

공식적으로 사크틸라에는 반역자가 없다. 하지만 여왕의 충신인 대주교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야 뻔했다.

“좋습니다.”

어차피 그를 무찔러야 부부는 사크틸라의 정상적인 왕이 될 수 있다.

“아시다시피, 교회법에서는 부부가 동등한 의무와 권리를 지닌 공동 운명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인이라 하여 여왕을 홀대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성직자다운 발언이지만, 어째 협박 같았다.

‘하긴, 숙부에게 당한 세월이 있으니 다른 남자를 쉽게 믿을 수는 없겠지.’

“여왕께서 지닌 권한과 재산의 상속은 두 분의 자녀에게만 가능합니다. 잘 아시지요?”

에르난은 떨떠름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자 크게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당연한 말씀을.”

남편은 아내의 권리와 재산을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 단,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한정해서. 아내가 사망하면 권리와 재산은 남편이 아니라 자식에게 상속된다.

옛 제국 때부터 존재했던 규범이었고, 정식으로 법전의 조항이 된 지도 벌써 몇백 년 전의 일이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자꾸 반복하니 수상쩍었다.

“작은 양해를 구하자면, 바르시나 또한 사크틸라와 동일하게 공동왕 체제를 꾸려 주셨으면 합니다. 부부의 권력을 서로 공유하여, 완벽한 동등함을 이뤄야만 합니다.”

불안감은 금방 현실이 되었다. 에르난의 머리가 일순간 차게 식었다.

“잠깐, 조금 전 상속에 대해 말씀하셨듯이 법률적으로는…….”

“예, 법률적으로는 왕자께서 여왕을 대신해 사크틸라를 통치하셔야겠지요. 맞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바르시나의 왕이 되실 분 아닙니까? 아무리 여왕의 남편이라 해도 사크틸라가 외국 왕의 통치를 받아들이겠습니까? 반발이 클 겁니다. 그러니 보편적인 경우보다 여왕의 권한을 더 확실히 보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황한 왕자와 달리 대주교의 태도는 태연하기만 했다. 그러나 번뜩이는 회색 눈에는 거짓말로도 호의라고 분류하기 힘든 냉정함이 가득했다. 에르난은 대주교를 잠시 노려보았다가 입을 열었다.

“결혼 동맹은 좋습니다. 하지만 남편과 권력을 공유하는 아내라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로군요. 무엇보다, 이 나라는 여왕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만.”

바르시나는 여성의 왕위계승이 불가능했다. 사크틸라의 계승법만 여성을 상속자로 인정한다. 어차피 이 또한 여성의 통치를 받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정통성 유지에 목적이 있을 따름이다.

“아, 그 문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왕께서는 바르시나의 지배에 전혀 관심 없으십니다. 다만 부부의 ‘동등함’이라는 형식을 맞추기 위해서 예외적으로 바르시나의 여왕이 되실 뿐입니다. 바르시나의 법과 자주권을 훼손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사크틸라 왕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여왕 폐하와 동등한 권력이 주어지리라고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대주교는 어깨를 으쓱였다. 왕은 처음부터 상황을 짐작한 모양인지 작게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사크틸라는 전하를 우리의 왕으로 인정할 것입니다. 다만 그 왕위는 어디까지나 여왕께서 남편에게 공유해 주시는 겁니다. 또한 짐작하시겠지만, 여왕께서 존재하실 때에만 전하께서도 사크틸라의 왕일 수 있습니다.”

다 아는 상속 이야기를 꺼낸 의도는 이 때문이었나. 에르난은 깨달았다. 사크틸라는 원칙을 강조하는 척하면서 반칙을 저지르려 한다.

결혼은 하되 남편에게 모든 일을 맡길 생각이 없다. 여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각각 서로 다른 나라의 왕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핑계 삼아서. 왕위는 인질이다.

“흐음, 시스로네스……. 아, 이해 못 하겠다는 뜻은 아니오. 사크틸라에는 그 어느 때보다 왕권의 안정이 필요할 테니 말이오. 하지만 내 아들의 미래에도 중요한 일이니, 생각할 시간을 좀 주지 않겠소?”

딱딱하게 굳어 버린 아들의 표정을 살피던 자우메가 말했다.

“물론입니다, 폐하. 하지만 사크틸라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부디 여왕께 긍정적인 답을 전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주교는 몸을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마지막까지 동작만은 정중했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에르난이 빈정거렸다.

“부부의 동등함은 거짓말일 겁니다. 없는 법도 만들어서 남편을 허수아비로 세울 것 같군요.”

“그래. 아무래도 여왕 본인이 사크틸라를 직접 통치할 욕심이 있는 모양이구나. 타국 왕의 통치에 대한 거부감은 핑계일 뿐이겠지.”

여왕은 왕과 왕 사이에 놓인 다리와 같은 존재였다. 여왕의 임무는 어머니로서 후계자의 출산과 양육이며, 정치는 남편과 귀족들의 몫이다.

그래서 지난 이십여 년간 탐브레가 여왕을 대신할 수 있었다. 결혼하기에 여왕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사크틸라의 법률가들은 머리도 좋습니다. 교회법까지 끌어들여서 그럴듯하게 꾸며 내니 대단합니다. 겉보기에는 좋은 왕관을 씌워 줄 테니 시키는 일만 고분고분하게 하다가 고국에는 빈손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복잡하게도 했군요. 아, 중요한 것 하나를 잊을 뻔했습니다. ‘여왕의’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해 몸을 바쳐야겠지요!”

에르난의 목소리가 점점 격해졌다. 결국 왕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말만 왕이지, 그냥 노예 아닙니까? 세상의 어느 멍청이가 그런 조건으로 결혼한답니까? 그 여자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언제 있겠느냐.”

“기회? 남편의 목을 틀어쥐려 작정한 모양인데 기회는 무슨 기회입니까?”

“생각해 보자꾸나. 왜 여왕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릴까?”

분노에 파르르 떨던 에르난의 눈이 멈추었다.

“탐브레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비굴할 정도로 타국과의 군사 충돌을 피해 왔다. 하지만 원래 사크틸라는 전쟁이 잦은 나라야. 그 나라가 군주에게 바라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전장의 지휘관이지. 아들아, 너는 여성이 지휘하는 군대를 본 적이 있느냐?”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도 없는 성녀의 전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아무리 부부가 동등하다 해도,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은 남편뿐이야. 고맙게도 바로 기회가 있지. 탐브레 백작을 처리해야 하니까.”

“전쟁터에서 명성을 쌓아 허울 좋은 이름만이 아닌, 진짜 왕으로 인정받으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탐브레를 없애면 귀족들이 너를 보는 눈이 바뀔 거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지.”

에르난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왕의 손이 아들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여왕에게는 반드시 남편이 필요하지만, 남편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여왕이 너를 노예로 부린다고 했느냐? 내 눈에는 여왕이 노예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는구나.”?에르난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실망과 분노 대신 다시 흥분이 차올랐다.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여왕은 하필 왜 저를 택했을까요? 왕이 될 남편은 성가신 존재일 텐데.”

레이테와 결혼하려는 이는 넘쳐났다. 이베로 반도 전체, 아니 과장하여 대륙의 모든 왕실이 탐낸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심지어 사태의 원흉인 탐브레 백작마저 아직 자식이 없다는 핑계로 조강지처를 내쫓고 조카와 결혼할 계획이라는, 꽤 그럴듯한 소문마저 돌았다.

대주교의 태도를 보니, 소문이 사실이라 해도 여왕이 필사적으로 거부할 것 같지만. 어쩌면 그런 일 때문에 다급해져 에르난을 찾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 초상화를 보거라. 굉장히 아름답고 매력적이지 않느냐?”

에르난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대주교가 가져온 여왕의 초상화가 있었다.

단아하고 얌전한, 귀부인 초상화의 전형적인 그림이었다. 그러나 어디서도 보기 힘든 투명한 은색 머리카락이 에르난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보라색 눈도 신비로웠다. 초상화다운 뻔한 미소조차 뻔하지 않아 보였다.

우아함이 도드라지는 생김새에는 권력욕 따위는 조금도 없다. 에르난은 감탄을 슬그머니 거두고 퉁명스레 대꾸했다.

“세상에 미화 없는 초상화가 어디 있답니까.”

“여왕에게 청혼한 남자는 누가 있을까? 이미 손자까지 둔 늙은 왕, 첫 아내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자자한 대륙의 왕족, 심지어 어느 용병대장도 겁 없이 청혼했다더구나. 그리고 제 아버지의 동생. 죄다 그런 인간뿐이지.”

멀쩡한 자가 없군. 에르난은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편없는 인간들 가운데에 젊고 잘생긴 청년이 있다면 당연히 호감을 느끼지 않겠느냐?”

왕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르난은 눈을 찌푸렸다.

자우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들은 미모로 유명했던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또렷한 이목구비는 시원한 인상이지만, 붉은빛을 머금은 까만 눈이 진중하면서도 위험한 매력을 풍긴다며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여왕에게 몸을 바쳐야겠느냐고 했지? 틀린 말은 아니다. 여왕에게는 남자가 필요해. 그리고 네 말처럼 남편이 왕이면 성가시지. 바로 그 성가신 관계를 이용해 여왕은 권력을 사수하려는 것이다. 물론 후계자도 얻어야 하고.”

남편이 왕이어야만 주권 보존을 핑계 삼아 여왕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너를 바치는 대가로 얻는 이익이 많다. 그리고 애초에, 왜 바친다고 생각하느냐? 너야말로 아름다운 부인을 갖는데?”

“정숙하기 그지없는 초상화를 보면서도 그런 말씀이라니, 과연 아버지답습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럭저럭 말은 되는군요.”

에르난의 말에는 노골적인 가시가 박혀 있었다. 왕은 쓴웃음을 삼키며 아들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러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거라. 여왕이 너를 옭아맬수록 세상의 이치는 네 편일 거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왕은 결혼을 반드시 성사시킬 작정인가 보다. 왕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왔다.

* * *

에르난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자신 또한 그녀에게 조금 끌렸음은 인정해야만 했다.

기만적인 조건은 불쾌하면서도 그의 호승심을 자극했다. 부왕과 대주교가 주장한 기회도 제법 타당했다.

더군다나 여왕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외모에 매혹당한 자신의 현실이 한심했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노예라며 윽박질렀거늘, 그 멍청이가 내가 될지도 모르겠군.’

픽 웃으며 왕궁의 회랑을 걷던 에르난의 시야에 낯익은 여성이 보였다. 그녀는 맞은편에서 왕자를 향해 다가왔다.

“카테리나 양.”

“전하. 결혼하신다던데, 사실인가요?”

이 결혼은 일단 비밀리에 진행하는 편이 낫다. 하지만 궁정에는 벌써 소문이 도는 모양이다.

“아직은 모를 일이지요.”

“아쉬워하는 아가씨들이 많답니다. 어차피 왕자님이 내 남자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아무에게도 주지 않겠어! 다들 이런 반응이더라고요.”

카테리나가 까르르 웃었다.

“이런, 실망을 안겨 드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럼요. 죄 많으신 분.”

“아가씨들께서 하루빨리 제 짝을 찾기를 바라야지요.”

에르난은 궁정의 여인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잘 알았다. 그렇기에 그들과 거리를 두려 노력했다. 보답하지도 못할 관계는 시작하지 않는 편이 옳기 때문이다.

그녀들과의 사이 자체가 어색하지는 않다. 다만 가까이 오기를 막을 뿐.

“발란시아에 와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이곳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어머니께서 고향에서 봄을 맞이하고 싶어 하셔서요. 오늘은 근처 수도원에서 봉사활동을 했는데요, 세스크가 왕궁에 있을 것 같아서 데려가려고 왔어요. 오는 길에 만난 아는 아가씨에게 결혼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정작 세스크는 그림자도 못 봤지만요.”

“그건…….”

“도대체 뭐가 그렇게 바쁜지,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아요. 또 누군가의 뒤나 캐고 다니겠죠, 채신머리없게.”

카테리나는 에르난의 친우, 프란세스크의 동생이었다. 거의 친형제 수준으로 친밀한 왕자와 오빠 사이 덕택에 카테리나 또한 에르난과 꽤 편한 관계였다.

세스크라는 애칭으로 프란세스크를 부르는 사람도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에르난뿐이다.

“하하……. 정말 못됐네요.”

“그렇죠? 전하께서 좀 혼쭐을 내 주세요.”

“물론입니다. 가만두면 안 되겠군요. 대련 핑계로 실컷 때려 줄까요?”

“아, 좋네요. 세스크야 뭐, 어련히 맞으며 버티겠죠.”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리며 프란세스크를 어떻게 골탕 먹일지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프란세스크가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남의 뒷조사나 하는 이유는 바로 에르난의 명령 때문이었다.

그가 집에서 느긋하게 식사를 즐길 때쯤이면 에르난의 결혼 문제도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날 것이다. 프란세스크는 시스로네스를 감시하는 중이니까.

원흉은 자신이니, 에르난은 친우에 대한 미안함을 아주 살짝 느꼈다. 하지만 그를 놀리는 일은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귀부인들은 두 사람의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지나갔다. 그녀들이 지나간 자리에,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스로네스 대주교였다.

차디찬 눈으로 에르난을 응시한 대주교가 조소했다. 이내 그는 표정을 싹 지우고 왕자에게 다가갔다.

“전하.”

에르난과 카테리나의 대화는 아예 판을 크게 벌여 오랜만에 마상시합이라도 열어 보자는 수준까지 나가 있었다.

그들 사이로 시스로네스가 끼어들었다. 대주교는 성직자다운 인자한 웃음을 보이며 왕자에게 인사했다. 에르난은 그 얼굴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어쩐지 입만 웃는 것 같았다.

“각하, 이쪽은 리세우 공작의 동생인 카테리나입니다. 카테리나 양, 이 분이 시스로네스 대주교.”

“처음 뵙겠습니다, 대주교 각하.”

카테리나는 대단히 공손한 자세로 인사하며 대주교의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반갑습니다, 세뇨레타. 말씀 나누는 중에 죄송하지만, 왕자 전하와 의논할 사항이 있습니다.”

온화한 목소리로 카테리나의 양해를 구하지만, 실상은 그녀가 비켜 주기를 단호하게 바라는 태도다.

“물론이지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전하. 언제 한번 저택에도 방문해 주세요. 세스크도 꼭 데리고 오시고요.”

오빠를 자주 만나지 못하는 서운함에 투정은 부렸지만, 결국 카테리나도 프란세스크가 누구를 위해 무슨 일을 하는지 대충 짐작한 모양이다.

카테리나가 총총걸음으로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시스로네스는 입을 열었다.

“저는 전하께서 반드시 제 여왕의 반려가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예, 좋은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전하, 행실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시스로네스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인자함은 온데간데없고, 싸늘한 기운이 그를 휘감았다.

“전하, 보는 눈이 많습니다. 여성과 실없는 소리나 나누며 희희낙락하실 때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아까와 같은 행동은 전하의 상품 가치를 깎아 먹습니다.”

에르난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상품 가치?

“이보시오, 대주교. 방금 무슨 말을……”

“전하께서는 부왕과 성향이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그 믿음이 계속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에르난은 당황했다.

‘설마 방금 상황을 보고 카테리나가 내 애인이라고 생각했나?’

자우메의 여성 편력은 꽤 유명했다. 반면 그의 아들인 에르난은 철저하게 부왕과 다른 사생활을 추구하기로 유명했다. 궁정인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다.

시스로네스는 외국인이니 잘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하자며 찾아오면서 제 여왕의 남편 후보의 평판조차 알아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

“제 표현이 과했습니까? 제가 배움이 짧은지라 이렇습니다. 허나 사목자로서 길 잃은 어린 양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군요. 아무쪼록 전하의 값어치를 어떻게 올릴 수 있을지, 현명한 판단 하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물 흐르듯 유창한 바르시나어를 구사하는 외국인이 배움이 짧다고 말해 봐야 신빙성이 없다. 더군다나 프란세스크의 조사에 따르면 대주교는 영특함으로 일찌감치 이름이 높았다고 하니,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용건을 다 마친 대주교는 인사 후 곧바로 멀리 사라졌다.

에르난은 자신이 대꾸조차 제대로 못 하고 그를 보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예 대놓고 상품 가치라 표현하는 뻔뻔함은 기가 막혔다.

왕자의 거북함과 별개로, 결혼 협상은 빠르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대주교는 일방적일 만큼 결혼을 밀어붙였다. 아들을 사크틸라에 보내기로 마음먹은 자우메 왕도 대주교의 적극성을 반겼다.

결혼의 당사자로서 더 신중히 고민할 틈도 없었다. 에르난은 여왕의 배우자가 되기로 떠밀리듯 결정되었다.

* * *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여왕 일행은 부르고에 도착했다. 시스로네스가 교구장으로 재직하는 대도시였다.

일행은 언덕에 있는 성으로 향했다. 성은 암보스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단단해 보이는 요새로,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피로가 쌓인 레이테는 식사조차 거르고 곧바로 잠을 청했다.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따져 보면 피곤할 만은 했다.

에르난도 피곤했지만, 그는 바로 잠들지 않고 홀로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대주교는 결혼 사업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은 셈이야.’

왕실의 결혼이란 본래부터 투자의 성격을 띤다. 상품 가치 따위의 표현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어쨌든 여왕의 신랑감 중에서 그의 값어치가 가장 높았고, 에르난은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 값을 유지, 아니 높여야만 했다.

그래도 노골적인 표현을 다시 떠올리니 불쾌해졌다. 팔려 온 기분이 든다. 아무리 미래를 보고 택한 결혼이라지만, 기본적인 조건은 명백하게 에르난을 착취하는 형태다.

더군다나 한시가 급하다며 서두를 때는 언제고, 2년여간 실질적인 연락 두절 상태였다가 이제야 아내 될 사람을 만났다.

탐브레 백작의 탓이기는 했다. 그는 여왕의 움직임이 수상하다 판단했는지, 요양을 구실로 조카를 성에 가두고 감시했다.

‘결국 그놈이 문제야. 역시 그냥 죽일 걸 그랬나.’

에르난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은 여왕의 판단이 옳다.

탐브레만 한 거물을 바로 죽이면 전략적으로 손해다. 그저 분노에 찬 자신이 피를 보고 싶어 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백작 덕택이라 해야 할까? 처음에는 필요성 때문에 수락했을 뿐,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결혼이었다. 그러나 2년이 흐르면서 에르난은 완전히 안달이 나 버리고 말았다. 그는 아예 여왕의 몸부터 취할 생각마저 했고, 기어이 실행했다.

부왕과는 다르리라 믿는다던 시스로네스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아무리 아버지와 달라지려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고 에르난을 조소하는 듯했다.

‘……달라. 아내가 될 여자인데 욕정할 수밖에 없잖아?’

애써 부정하던 에르난은 순간 당황했다. 욕정이라는 표현도, 레이테가 아내라는 당연한 생각도 놀라웠다. 자신은 이토록 간절했던가?

가치. 시스로네스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여왕은 에르난의 목표를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서 높은 가치를 지녔다. 그 가치는 에르난의 손으로 제어해야만 한다.

입이 썼다. 에르난은 다시 잔에 포도주를 따라 단숨에 들이마셨다.?눈을 뜨니 이미 한밤중이었다.

주변을 둘러본 레이테는 짧게 탄식했다. 감옥과도 같은 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드디어 탈출했구나.’

레이테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실내기는 하지만, 공기가 어쩐지 더 상쾌하다.

허기를 느낀 여왕은 호출용 끈을 잡아당겨 간단한 식사를 요청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나와 거울 앞에 섰다. 정신없이 잠에 취한 사이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그래도 익숙한 자신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제는 변할 것이다. 에르난을 만나 버렸으니까.

약 열흘 전, 시스로네스에게 연락이 왔다. 탐브레가 에르난과의 결혼을 눈치챈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감시가 더 삼엄해질지도 모른다.

도망치고 싶다. 다급한 마음에 그녀는 왕자에게 밀서를 보냈다. 에르난은 생각 이상으로 빨리 그녀를 찾아왔다.

그리고 하루 사이 일어난 일을 떠올리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왕자는 결혼하겠다고 단단히 작정한 모양이었다. 결혼 조건에 불만이 많다고 들었는데도.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식사를 가져온 사람은 시스로네스였다.

“어머, 여태 잠자리에 들지 않으셨네요.”

“혹시 폐하께서 일어나시면 저를 불러 달라 시종에게 말해 두었습니다.”

시스로네스는 침대 옆의 테이블에 식사가 담긴 쟁반을 내려놓았다. 뭉근하게 끓인 야채 스튜였다. 콩과 당근이 씹지 않아도 될 만큼 부드럽다. 막 잠에서 깬 속에 부담스럽지 않아 좋았다.

대주교는 여왕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마침내 레이테가 수저를 내려놓자 그가 입을 열었다.

“왕자는 마음에 드십니까?”

하아, 레이테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하긴, 애초에 대주교가 이유도 없이 밤에 찾아올 리는 없다. 맛있는 식사로 편안해진 속이 도로 뒤집힐 것 같았다.

“하루 사이 그가 내게 저지른 난폭한 행동을 다 세기도 힘들 정도군요. 아무리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라지만 목에 칼을 들이대지 않나, 마구잡이로 뛰어내리지 않나…….”

“칼을?”

되묻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레이테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별일 아니었어요. 그리고 애초에…… 음, 어쨌든 무례한 사람이에요.”

목욕실에서 했던 일까지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문제가 많은 자로군요. 결혼은 없던 일로 할까요?”

푸념을 잇던 레이테의 말이 딱 그쳤다.

“불가능하잖아요.”

“하지만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고민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외네요. 참고 버티라 말하실 줄로 생각했는데.”

“저는 성직자입니다. 결혼과 연애를 별도로 즐기라는 말을 할 수는 없잖습니까. 반려의 선택은 신중해야지요.”

대주교는 목에 건 십자가를 만지작거렸다.

“신중할 때는 이미 지난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그러니 저는 사크틸라가 왕자를 환영하도록 여론을 조성하겠습니다.”

그는 레이테의 손을 그러쥐었다. 레이테에게 아직 남은 망설임을 위로하는 듯, 시스로네스의 손은 따뜻했다.

“폐하께서는 마음을 확실히 정리해 두십시오. 반려와의 사랑은 레이테라는 인간의 삶에도 무척 중요합니다.”

부모 없이 자란 레이테를 가족처럼 보살펴 준 사람은 핏줄만 연결된 숙부, 탐브레 백작이 아니었다. 시스로네스였다. 레이테를 걱정하는 그의 마음은 진심이다.

“오신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재촉 드렸군요. 피곤하실 텐데 남은 밤이나마 편히 쉬십시오. 그리고 생일 축하드립니다.”

“아, 고마워요. 대주교께서도 이만 쉬시지요.”

시스로네스가 나가자 레이테는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대주교는 자신더러 고민하라 했다. 고민은 그동안 숱하게 했다. 마음속으로 결혼을 결정했다 취소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지금도 확신은 없지만, 결혼하는 수밖에 없다. 망설임에 지쳐 버린 레이테는 차라리 지금 상황이 후련하기까지 했다.

반려와의 사랑? 그런 것을 따지기에는 너무 늦었다.

* * *

이튿날 아침, 레이테가 미사에 참석하러 갔다는 말을 들은 에르난은 성내의 소성당으로 향했다.

작지만 꽤 화려한 공간이었다. 시종과 수도사 여럿이 보였고, 레이테는 가장 앞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에르난은 조용히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기도 중인 레이테의 정결한 표정과 은은하게 흘러내리는 은발이 무척이나 청초했다. 에르난은 조심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리고 생일 축하드립니다.”

레이테는 눈을 살짝 뜨고 에르난을 힐끔 쳐다보았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다시 기도에 집중했다.

“미안. 방해 안 할게요.”

대화를 포기한 에르난도 손을 모아 쥐고 눈을 감았다.

‘신이시여, 오랜만입니다. 당신의 뜻이 제게 좀 도움이 되는 방향이면 좋겠습니다. 이왕 제 옆의 여자를 주실 거면 아내와 잘 지내도록 힘 좀…… 아니, 방해하지나 마십시오.’

더 조를 말이 없다. 짧은 기도를 마친 에르난은 눈을 떴다. 레이테는 여전히 기도에 몰두 중이다.

오랜 핍박의 세월, 외로운 여왕은 종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터다. 마침 그녀의 가장 강력한 조력자도 성직자였다.

‘이제 그 자리에는 남편이 있어야 해.’

레이테를 떠올리면 그림자처럼 시스로네스가 따라붙었다. 그가 여왕에게 끼치는 영향은 보통이 아닐 것이다.

미사가 시작되자 대주교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바탕에 금실로 수놓은 호화로운 제의를 걸치니 꽤 그럴듯한 성직자로 보였다.

미사는 지루했다. 관성적으로 일어났다 앉기를 반복하고, 기도문을 대충 읊었다. 에르난은 신앙에 관심이 없었다. 다만 레이테를 만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냥 잠이나 더 잘 걸 그랬나.’

졸음에 점점 내려앉던 에르난의 눈은, 복음서 봉독을 마친 대주교가 강독을 시작하면서 번뜩 뜨였다.

“오늘, 4월 23일은 호르헤 성인의 축일입니다. 위대한 순교자이며, 우리에게는 용의 제물이 될 뻔한 공주를 구출한 용맹한 기사로 특히 유명하지요.

아시다시피 성인의 이름은 언어에 따라 부르는 방법이 조금씩 다릅니다. 우리 사크틸라어로는 호르헤, 헤젤어로는 조르지, 그리고 바르시나에서는 조르디라고 부릅니다.

또한 오늘은 여왕 폐하의 탄신일이기도 합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로 올해는 축일도 탄신일도 큰 행사 없이 지나갑니다만, 내년에는 성대한 축제를 열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바르시나의 에르난 조르디 왕자께서 우리 여왕을 구출해 오셨으니까요.”

왕자의 정식 이름은 에르난 조르디다.

에르난은 등 뒤에 꽂히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일어나 인사라도 해야 할 순간 같지만, 미사 중이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뒤를 돌아보는 대신, 에르난은 강론대에 선 시스로네스를 올려보았다. 그가 에르난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러면 불안하잖아. 그때 에르난은 불현듯 깨달았다.

조르디 성인의 전설은 공주의 구출로 끝나지 않는다. 그다음에는…….

“이제, 용을 무찌를 일만 남았습니다.”

“아.”

감탄은 에르난이 아닌 그 옆의 레이테에게서 나왔다.

‘왜 띄워 주나 싶었더니, 하루빨리 백작을 치라는 소리였군.’

에르난의 심란함과 무관하게 미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그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기도했다.

‘신이시여, 사제가 세속에 너무 관심이 많으면 화가 생깁니다. 아시잖습니까? 사제는 사제 직무에나 충실하라고 전해 주십시오. 시스로네스가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일지는 모르겠지만요.’

* * *

미사가 끝나자 레이테와 에르난은 나란히 걸어 성당 밖으로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상대방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레이테가 먼저 말을 건넸다.

“호르헤 성인이라면 구출할 공주를 겁탈하지는 않으실 텐데요.”

“겁탈? 정말 어제 일이 겁탈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겁탈이 아니면 뭐라고 말해야 하나요? 유린? 희롱?”

“……상호 합의에 따른 육체적 즐거움의 공유라고 합시다.”

사실상 일방적 봉사 아니었느냐 말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에르난이 답했다.

“폐하께서 분명히 동의하신 일입니다. 겁탈이라는 표현만은 말아 주십시오. 제 순정에 상처가 큽니다.”

레이테는 말없이 코웃음 쳤다. ‘순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라는 조롱이 에르난의 귀에 들리는 듯했다. 물론 레이테의 빈정거리는 반응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나름, 나는 진심이란 말이야.’

“아침 식사를 같이할까요?”

천천히 대화를 나누면서 오해도 편견도 풀면 될 일이다. 그러나 레이테는 제안을 거부했다.

“점심때로 미루죠. 대주교와 의논할 일이 있어요.”

또 시스로네스. 에르난은 눈을 찌푸렸다.

“백작에게 반대하는 귀족들이 많이 왔답니다. 점심때, 그들에게 정식으로 당신을 소개하겠어요.”

말을 마친 레이테는 빠르게 떠나갔다.

* * *

여왕의 생일 축하를 겸한 오찬 연회에는 적잖은 수의 귀족이 모였다.

레이테는 에르난과 나란히 앉았다. 긴 머리카락의 일부를 섬세하게 땋아 말아 올린 모습이 우아했다. 드레스는 성모를 연상시키는 짙은 푸른색으로 기품이 넘쳤다.

식사를 마치고도 귀족들은 자리를 떠나는 대신 한참 환담을 나눴다. 가장 돋보이는 이는 시스로네스였다.

“저 같은 늙은이는 차마 시도도 못 할 도전을 젊은 기사가 해냈습니다. 과연 그 이름대로 성인의 용맹에 비견할 만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오늘이 여왕 폐하의 탄신일이니 의미가 더욱 심오하군요!”

그는 강론 때보다 훨씬 더 선동적인 어조로 에르난을 추켜세우기 바빴다. 귀족들은 박수와 환호로 호응했다.

에르난은 어색하게 웃었다. 사크틸라 귀족의 신뢰는 얻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시스로네스의 주도로 이뤄져서야, 그에게 놀아난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도 판을 만들어 주니 이용해야겠지.’

성인의 전설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은 시스로네스만이 아니다. 에르난 또한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었다.

성인은 이유 없이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 용을 무찌르는 대가로, 그는 개종을 요구했으니까.

에르난도 대가를 받아낼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르난은 잠시 대주교를 노려보았다. 그는 흐뭇함 가득한 미소만 왕자에게 보일 뿐이었다.

가증스럽지만, 이런 곳에서 얄궂은 기 싸움은 의미가 없다.

“사크틸라 귀족 여러분, 이방인인 저를 반갑게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여러분을 무척이나 뵙고 싶었습니다.”

에르난을 바라보는 귀족들의 모습에서는 별다른 적의를 읽을 수 없었다. 시스로네스의 태도로 보아, 그는 이전부터 귀족들을 구슬렸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에르난은 귀족들이 가진 호의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대주교를 거치지 않고, 자신에게 직접 향하도록.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지금 당장 에르난이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레이테.”

에르난은 여왕의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 시끌벅적하던 연회장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당신을 간절히 만나고 싶었습니다. 이제 저는 제 남은 삶과 운명을 당신에게 바치고자 합니다.”

에르난은 미리 준비한 반지를 꺼냈다.

여왕을 구출해 결혼하겠노라 결심한 에르난이 사크틸라에 오면서 챙긴 몇 안 되는 물건 중 하나였다. 반지와 한 세트인 목걸이는 이미 2년 전에 대주교를 통해 여왕에게 보냈으며, 지금 그녀의 목에 걸려 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한낮의 열기 탓일까, 에르난의 강렬한 눈 탓일까. 레이테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여왕은 에르난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물론이에요, 에르난. 저도 당신을 기다렸어요.”

에르난은 그녀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레이테의 손은 하얗고 가냘프지만,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수줍게 붉힌 얼굴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두려움과 경계.

에르난은 레이테의 반지 낀 손을 감싸 쥐었다. 다른 팔로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순순히 에르난에게 안겼다.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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