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8화 〉The Garden of...Silence (5) (98/102)



〈 98화 〉The Garden of...Silence (5)

선반 안으로 손을 깊숙이 밀어 넣고, 어지럽게 쓰러져 있는 라면 봉지들을 하나씩 헤집었다.

선반 가장 깊은 곳에 손가락 하나가 닿을 무렵,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그곳에서 들려왔다.

 손에 끌려 나온 파란 비닐로팩킹된 그것을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져갔다.

그건,

마트에  때마다 아름이가 그 작은 손으로 한아름 들고 오던, 해외브랜드 초코쿠키였다.

또다시 잠시 잊고 있던 아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통기한을 보니, 다행히 아직 2주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뜯어, 혜린이가 아끼던 예쁜 그릇에 장식을 하듯, 보기 좋게 올려놓았다.

그리고 좀 전에 마셨던 에스프레소와는 다른, 산미가 가득한 캡슐을 머신 속에 떨어트렸다.


‘윙’ 소리를 내며, 머신이 돌아가는 소리가 거실 쪽으로 퍼지고 있었다.


그제야 소파에 앉아 이쪽을 보고 있는 지민이를 바라봤다.

“나리 결혼한다고?”

내 얼굴엔, 아름이 생각에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는지, 지민이가 날 보는 표정이 참 측은하게 변해 있었다.

“네....내일요.....”

“잘됐다....”

조금  선반을 뒤적이다뒤에서 들려오는 지민이의  소리를 듣고, 나는 가장 먼저....’다행이다’ 라는 단어를 조용히 읇조렸다.


커피 두 잔을 내리고, 아름이의 초코쿠키가 담긴 접시를 들고 소파로 갔다.


“지민씨 오는지 알았으면, 뭐라도 좀  놓을 걸 그랬다....”

내가 소파에 다시 앉는 순간까지도 나를 보는 지민이의 측은한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이거 한번 먹어봐 맛있어.”

아름이의 초코쿠키가 담긴 접시를 지민이 쪽으로 슬쩍 밀어 놓았다.


“괜찮아요?’

“응? 뭐가?”


“나리......결혼....”

지민이가 말을 하다 멈칫했다.

지민이의 그 측은한 얼굴에도 나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리를 마지막 보았던 그  이후,

나리가 나쁜 마음을 먹거나.....무슨 일이 생길까 봐....걱정 했었다.

하지만  걱정들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한 달이 지난 지금,
내게 들려온 나리의 결혼 소식은,

내 속에 남겨져 있던, 나리에 대한 부채 의식 같은 것들이 조금 가시는.......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한 달이라는 그 시간 동안 왜 그렇게 서둘러 결혼을 하려고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누군데? 나리하고 결혼할 사람이.....”

“치과의사래요....”


지민이의 말을 듣고, 잊혀진 기억들이 이제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기억이무엇인지 금방이라도 생각날 것 같았지만, 나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러자 동시에 희미하게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던 기억들도 다시 어둠 속에 사그라들었다.

“잘됐네. 지민씨는 만나 봤어? 나리 결혼할 사람?”

“아니. 그냥 이야기만 들었어요.
나리보단 나이가 좀 많다는 거하고.....”

지민이가 말을 하면서 자꾸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나리가 자세히 이야기 안 하는데.......원래 알고 있던 사람 같아요,

치과에 치료받으러 갔다가 알게 된 건지....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치과의사의 와이프가 될, 나리의 그 모습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그 이미지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아 보였다.


접시에 예쁘게 담겨 있던 초코쿠키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오랜 시간 선반 안에 있어서인지, 조금 건조했지만, 달콤한 그 맛은 예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순간.

잊고 있던 중요한 뭔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초코쿠키를 씹지도 않은 채, 지민이의 얼굴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응? 왜요?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 지민아.”

“응?”

“내가 부탁 하나 하려고 하는데....괜찮아?”

“네? 뭔데요?”

“잠깐만.....”


나는 곧장 아름이 방으로 향했다.

일주일 넘게 굳게 닫혀 있던 그 문을 열자, 아기 향기....파우더 향이 물씬 풍겨왔다.


책상 위에 있던 아름이의 일기장을 펼쳐, 그 속에 접혀 있던 A4 용지를 들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지민이는 소파에 앉아, 내가 들고 있는 그 종이를 궁금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게 뭐예요?”

나는 말없이 그 A4용지를 지민이게 건네줬다.

지민이의 시선이 가장 위쪽을 향해 있었다.

[강루아 오빠를 비행기에서 처음 만난 날.

오빠가 내게 초코쿠키 사준 날.

나는 오빠가 너무 좋다.
오빠. 사랑해요]

“좀 알아봐 줄 수 있어?”

지민이는 출력된 E-ticket을 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그....그 애예요? 혜린씨....딸?”

“응...”

지민이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아마 해외에나간 거 같아....좀 알아봐 줄 수 있어?”

한동안 아름이의 E-ticket을 확인하던 지민이가 백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E-ticket을 소파 앞 테이블에 올려놓고서 스마트폰으로 그것 찍었다.

굳이 내가 뭐라고 말을 하지 않아도,
지금 내가 무슨 부탁을 하고있는지, 지민이는 이미 알고 있는  같았다.









지민이가 이 집에 들어섰을 때, 조금은 어색하고 불편했던 마음이, 이젠 조금씩 편안하게 변해있었다.

우리는 일상적인 그런 이야기를 계속 주고받았다.

그 대화 속에 나리는 없었다.

그건 아마도 나를 향한 지민이의 배려였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오래된 친구처럼 우리의대화는 그렇게 계속 이어졌다.













“음....이제 가봐야겠다....”

“그럴래? 내가 바래다줄게....”


“아니요. 괜찮아.번거롭게......택시 부르면 돼요......”

“아니...”

내가 말리기도 전에 지민이는 스마트폰을 들어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네. 택시 좀 부르려고 하는데요.....]

[네.  번호 맞아요.]

[아까 오후에도 이용했었거든요.
그 기사분이 여기 위치 아실 거예요.]


[네?]

통화를 하던 지민이가 놀란 듯,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아...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통화는 끝났다.

“왜?지금 시간엔 여기까지 안 온대?”

“아니.....”

지민이가 소파에서 일어나 테라스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영문을 몰라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지민이는 테라스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었지만, 마당에 등을 켜 놓지 않아 온통 까맣게 보일 뿐 창밖은 암흑천지였다.

벽에 달려 있던 스위치를 올렸다.

“어머!!!!”

지민이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노란 LED등이 환하게 비추는 마당은......

모든 게 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눈이 언제 이렇게 왔지?
여기 올라오는 길, 교통 통제됐대요....”

지민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상상치도 못한 그 광경에, 나는 쏟아져 내리는 하얀 눈덩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택시 못 올라오면 내가 바래다줄게.....있어봐...”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거실에서 보았던 그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세상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펑펑 내리는  속에 파묻혀, 검은색.....잡티라곤 하나 찾아볼  없었다.

마당으로 걸어나가자, 슬리퍼가  속에 푹푹 빠져 그 형체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눈 내리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한 달 동안.....

내게 그렇게 냉혹하기만 하던 이 정원이......하얗게 화장을 한 것처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가슴이 울컥했다.


“루아씨!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추워요.....들어와요......”

집 밖에 살짝 빠져나온 지민이가, 추운지 상체를 바짝 움츠리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쏟아져 내리는 눈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기 우리 완전히 갇혀버린 거네?”

렌지에 올려져, 이제 막 다 되어가는 라면을 휘젓고 있을 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괜히 나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지민씨가 고생이네....”

“피이~”


렌지 불을 끄고, 기다란 Bar 형태의 식탁에 냄비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미 돌려놓은 즉석밥과 캔에 담긴 장조림을 꺼내 접시에 담았다.

“먹자...자꾸 미안하네....
오랜만에 보는데....대접이 이래서....”


지민이는 식탁에 올려진 그걸 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한 달 동안 매일 이렇게 식사했어요?”

“그렇지 뭐....”


“루아씨...건강 좀 챙겨요. 이젠 혼자....잖아....”

항상 혼자라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 소리를 들으니, 느낌이 참 이상했다.


“후훗......”

라면을 먹던 지민이가 자꾸 웃었다.

“왜? 맛이 이상해? 간이 안 맞아?”

“훗....아니.....너무 맛있어서....
나 사실은 라면 안 먹거든요......훗.....근데....너무 맛있다.....

루아씨. 라면 잘 끓이네요?”

그렇게 우리의 단촐한 저녁 식사는 이어져갔다.












저녁을 먹고 나서, 지민이의 스마트폰이 계속 울려 댔다.

아마도 오늘 저녁 중요한 약속이 있는 모양이었다.


[응. 그래....나  일 있어서 잠깐 나왔는데.

눈이 너무 와서 오늘 못 갈  같아]


[정말? 거기도 그렇게 많이 와?]

[그래 오늘은 너희들끼리 봐...]


“시내에도 지금 눈 엄청 많이 온대요.....”

지민이가 전화를 끊자, 내게 말했다.


“내일.....나리 결혼식 몇 신데?”

“12시.....”

“예보 보니까, 새벽엔 눈 그친다고 하니까....그때까진.....”

“루아씨. 편하게 입을  좀 줄래요?”

“어...그래....”

몸을 타이트하게 감싸고 있는 레더 스키니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드레스 룸에 들어서서, 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떤 옷을 내줘야 할지......

아직 정리를 하지 못해, 내가 입던 반바지나 티셔츠가 어느 박스에 들어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루아씨. 그냥......혜린씨.....입던 거....아무거나......”

거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너무 고마웠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혜린이가 입던 옷을 지민이에게 내어주면.........지민이가 찝찝해 할 거라 생각했다.

지민이는 비엔티안에서 엉망이 되어있던 혜린이를 단 한번 봤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혜린이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너무 고마웠다. 그런 지민이가....



혜린이가 집에서 입던 편한 옷을 내어주자, 지민이는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테라스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마당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속에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후우~~~”

한 숨인지, 담배 연기인지 모른 것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흘러나오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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