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The Garden of...Silence (4)
택시 운전기사가 운전대를 잡은 채, 테라스가 있는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테라스 창문을 활짝 열었다.
택시에서 내린 사람이 운전석으로 다가가자, 운전석 창문이 빠르게 내려왔다.
“기사님, 가셔도 될 거 같아요. 고맙습니다...”
기사에게 웃으며 말하던 그 사람이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그에게 내밀었다.
“아이고....좀....많은데....”
“수고하셨는데요....괜찮아요,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기사는 그 돈을 건네 받고, 반색하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택시 뒷모습 보였다.
고요하던 바람이 길게 한번 언덕 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멈춰 있던 갈대가 춤을 추듯 부드럽게 허리가 휘어져 흔들리고 있었다.
마당에 서 있던 사람의 긴 머리칼도 그 바람에 덩달아 춤을 췄다.
기사에게 웃으며 상냥스레 말하던 그 사람의 표정이 나를 보곤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그 여자가 테라스로 걸어오고 있었다.
하얀 털이 소복이 쌓여 있는 코트에,
진인지 레더인지 모를 블랙 스키니,
그리고 스웨이드 롱부츠를 신고 있는,
늘씬하게 뻗어 있는 긴 다리의 그 발걸음이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정성스레 포장한 한 예쁜 크리스마스 선물 같아 보였다.
“지민씨......어떻게 여기.....”
방금 택시에서 내려, 내게 걸어오고 있는 여자는 지민이었다.
지민이가 어떻게 여기를 알고 찾아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혜린이가 뱃속에 품고 있던 우리 아이의 흔적을발견했던 그날....
사고 후, 병원에서퇴원을 하고.....지민이와 함께 이곳에 왔던 그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저번에 여기 같이 왔잖아요......”
어느새 지민이가 테라스 바로 앞까지와 있었다.
먹구름이 잔뜩 껴 있는 흐린 날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화사한 화장을 한 지민이의 얼굴엔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는 그런 지민이를 보고만 있었다.
“이렇게 계속 세워 둘 거예요?
문 안 열어줘요?”
지민이의 붉은 입술 사이에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아. 미안....잠깐만.....기다려...”
거실을 거쳐, 서둘러 현관으로가 문을 열었다.
현관 앞에 서 있던 지민이로부터 진한 여자의 향기가 차가운 바람을 타고 집안으로 왈칵 흘러들어왔다.
현관에 들어오자마자, 지민이가 롱부츠를 벗으려 허리를 숙였다.
“어머!”
롱부츠 지퍼를 내리다 지민이가 휘청거리자, 내 손은 반사적으로 지민이의 한쪽 팔뚝을 꼭 잡았다.
종아리까지 타이트하게 꼭 감싸고 있는 그 롱부츠는벗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지민이는 조금 낑낑대다 결국 그걸 벗어내고 거실에 올라섰다.
우리는 그렇게 어색하게서로를 보며 잠시 거실 입구에 서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내 입에서 그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누구에게 말을 한다는 게 참 어색하게 변해 버린 나였다.
이 집에 도망치듯 이사를 오고 나서 한 달 동안 내가 말을 한 건,
내게 집을 판, 부동산 그 아저씨가 뭔가를 잔뜩 사 들고 왔을때,
‘감사합니다.....’ 이 짧은 한마디뿐이었다.
“어....밖에 많이 춥지? 커피 마실래?”
그 어색함이 불편해, 나는 혼잣말처럼 말을하곤 거실을 가로질러 바로 주방으로 갔다.
커피머신에 캡슐을 하나 넣어 놓고 내 시선이 거실로 향했다.
지민이가 입고 있던 코트를 소파 끝에 벗어 놓고, 벽에 붙어 있는 혜린이의 사진을 보고있었다.
주방에 커피향이 진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혜린이의 사진을 보던 지민이가 테라스 창 앞에 서서, 예전과는 너무나 변해버린 그 침묵의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다.
방금 벗어 놓은코트와 비슷한 하얀 털이 몽실몽실 올라와 있는 스웨터, 그 아래로 쭉 뻗어 있는 늘씬한 다리.
그리 밝지 않은 광택이 은은하게 반사되는 레더 스키니가, 엉덩이 살을 볼록하게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허벅지 사이가 긴 다이아몬드 형태로 너무나 보기 좋게 벌어져 있었다.
참 이상한 노릇이었다.
나는 커피를 내리며, 나도 모르는 사이 지민이의 몸매를 찬찬히 훑어보고 있었다.
분명 그건 내가 의도한 게 아니었다.
내 몸이 자연스레 반응하는 것이었다.
한 달 만에 사람......여자를 본 것 때문일까.
여자의 몸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 몸의반응이었다.
“지민아....커피....”
커피 두 잔을 들고 소파로 가자, 밖을 내다보던 지민이가 소파로 와 자릴 잡고 앉았다.
소파에 앉아 잠시 나를 바라보는 지민이의 두 눈빛엔 모든 게 의문투성이로 가득 차 있었다.
“루아씨. 어떻게된 거예요?”
수많은 의문 중에 하나를 내게 던졌지만,지민이도 무슨 말부터 시작할지 혼란스러워하는 그런 눈치였다.
“잘 찾아왔네? 여기 한번 와보고......”
“하아.....”
내 말에 다시 돌아온건, 지민이의 황당한 헛웃음이었다.
“본가.....집엔 연락하고 이렇게 나온 거예요?”
“아니....”
“루아씨!왜 이렇게 살아요?”
한 달 동안 정리를 하지 않아 덥수룩한내 머리......그리고 수염....
불규칙한 수면과 하루하루 대충 때우기 위해 먹는 인스턴트 음식들로 까칠하게 변했을 내 얼굴.....
지민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의 이곳저곳을 훑어보며 말했다.
“루아씨 하도 연락이 안 돼서, 2~3주전에 여기 비행일 때, 그 집에 가봤더니....
다른 사람이 문을 열어 주더군요.
자기는 이사 온지 얼마 안 됐고, 사람들이밤낮으로 계속 루아씨 찾아와서 힘들다고 하면서....”
“아....그랬구나.....”
“나리하고.....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한 달 동안 까맣게 잊혀져 있던 그 이름......그 이름이 지민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잘 지내? 나리? 별일은....없고?”
“잘 지내요....”
“다행이다......”
진심이었다.
그날 새벽.....
한참을 거실에 쓰러져 울던 나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 힘겹게 일어나,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현관을 빠져나가던 그 뒷모습까지도.....
한 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리의 소식을 들었지만, 잘 지낸다고 하니, 안심이 되고 마음이 놓였다.
나를 보는 지민이 눈엔 뭔가를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내게 무슨 말을 해줄 듯 고민하다가 결국 그 말을 다시 뒤로 숨겨버린 거 같았다.
“혹시나 하고 와봤어요. 여기....
지난번에루아씨하고 여기 왔을 때가 생각나서....혹시나 하고...”
“지민아.따뜻할 때 마셔, 커피 마셔 식겠다....”
나는 괜히 커피잔을들어 내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그렇게 좋던 커피맛이 지금은 맹물같이 아무런 향도....맛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 집에서 나와서.....이집에 이사 온 거예요? 여기에 계속 있었던 거예요?”
나를 보는 지민이의 얼굴이 너무나 안쓰러운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응....”
“그래도.....집에는 말을 해야죠. 그리고 나리도.....
나리하고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나리도 아무 말 안 해서...물어 보진 않았어요.
말하기 싫어하는 거 같아서....”
“아니....그런 거 없어....아무일 없어...”
“루아씨....한달전에 둘이 결혼한다고.....”
지민이의 말이 갑자기 뚝 그쳤다.
무슨 큰 실수라도 한 것처럼, 지민이의 눈빛이 떨렸다.
그리곤 우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둘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하얀 머그컵에 담긴 커피만을 홀짝일 뿐이었다.
이따금씩 바라보는 테라스 밖의 풍경은 그쪽에 시선이 갈 때마다 조금씩 더 어두워져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실엔 온통 지민이의 좋은 향기로 가득 채워져 나갔다.
달달하고 은은한 향기가, 마치 디퓨져처럼 지민이의 몸에서 계속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자꾸 지민이의 몸에 시선이 갔다.
혜린이의 사진이 걸린 소파 앞에서, 보기 좋은 여자의 몸을 그렇게 훑고 있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도 기도 찼다.
홀로 남겨진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사람을 그리워했는지......아니면 여자.....여자의 몸을 그리워했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 몸은,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여자의 몸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난 한달 동안 샤워를 할 때나 잠에서 깨어날 때,단 한 번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지금 내 성기가 그 반증이었다.
나리와 만나던 그 긴 시간 동안, 그렇게 많은 섹스를 하고....
나리와 헤어지고 혜린이를 만나.....우리는 매일 밤....서로를 깊게 안아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날. 김 민정과의 그 지독한 섹스.
하얀 화장이 엉망으로 번져 얼룩진 그 얼굴에,
내정액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울부짖는 그 여자의 머리칼을 쥐어 잡고......제발 멈춰 달라는 소리가 터져 나올 때까지, 그 여자의 보지와 항문을 미친 듯 쑤셔 댔었다.
그걸 떨쳐버리려 소파에서 일어섰다.
지민이의 커피잔이 비어져, 짙은 크레마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다른 거 좀 내줄까? 밥은먹었어?
뭐 있는지 좀 찾아봐야겠다.
우리 집에 온 손님은 처음이라.....”
주방으로 가 식료품이 들어 있는 선반을 열었다.
그 속엔 라면과 각종 통조림만이 가득했다.
“결혼해요.....나리......”
뒤에서 지민이의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아, 계속 선반 안쪽만 둘러보고 있었다.
“나리 결혼해요. 내일....
내일 나리 결혼식에 가려고 왔다가......루아씨 생각나서여기 찾아온 거예요.....”
라면 봉지가 가득한선반 속을 헤치던 손이 갑자기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