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The Garden of...Silence (3)
냉골처럼 오랫동안 싸늘하게 식어 있던 거실 바닥에서 작은 열기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두근거리던 내 마음은,
나로 모르는 사이, 어둠이 내려앉아 버린 정원을 바라보며 또다시 깊은 침묵에 빠져버렸다.
항상 혜린이와 함께 였던 테라스에 홀로 앉아, 바라본 밖의 풍경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생명체라곤 살 수 없을 것 같은, 심지어 살아 있는 목숨도 앗아가 버릴 것만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몇 달 동안 주인 없이 비워져 있던 이 집에....자욱하게 내려앉아 있는 먼지를 하루 종일 닦아내며 나는 어떤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내겐 그 어떠한 기대도......희망도 남겨져 있지 않은, 그 모두가 허상이란 걸 깨달을 뿐이었다.
단지 나는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이 집,
사랑하는 혜린이의 체취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집에 머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혜린이의 작은 손을 감싸던 핑크색 기모 고무장갑을 내 손에 억지로 끼워 넣고,
오래된 시체에 덮인 곰팡이처럼 변색되고 말라비틀어져, 이미 상해버린 냉장고 속의 음식들을 하나씩 치웠다.
혜린이가 내 손을 꼭 잡고서 마지막으로 이곳을 떠나던 그날.
예쁜 옷을 입은 자신을 내게 보여주려....
홀로 드레스룸에서 얼마나 고심을 했는지, 드레스룸엔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제 막 벗어 낸 것 같은 원피스, 스커트....블라우스들.......
옷걸이에 걸리지 않은 채, 대충 걸쳐져 있는 그 몇 벌의 옷을 부여잡고 나는 한참 동안 소리 내 울었다.
그날...
화사한 화장과 예쁜 웃을 입은 혜린이는 나를 먼저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홀로 테이블 위에양초 4개를 올려놓고, 예쁜 상자 안에 짧은 편지와, 우리의 아이....그 작은 흔적이 새겨져 있는 그것을 넣어 놓고, 밖으로 나와 내게 꼭 안겼다.
[사랑해.....사랑해......]
혜린이는 내게 안겨계속 그 말을 반복했다.
주방 한쪽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커다란 유리병을 들고 테라스로 나왔다.
혜린이가 담아 놓은 블루베리 술이었다.
반짝이는 유리잔에 그 술을 가득 부어 놓고 마셨다.
너무나 진한 그 향기....차가운 날씨 탓에 이 술만은 변하지 않고, 다행이 그때 그 맛 그대로였다.
그렇게 나의 침묵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연기처럼 사라져갔다.
나를 괴롭히던 스마트폰도 더이상 울리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나를 찾지 않았지만, 단 한 사람.....
이집을내게 넘겨줬던 부동산, 그남자가 나를 한번 찾아왔다.
그의 손엔 뭔가가 잔뜩 들려 있었다.
그는 내 안부를 물었다.
아마도 그는 내가 이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몇 주의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계속 거실에서 생활을 했다.
우리의 흔적이 남아 있을 침실엔 차마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곳.
아름이의 방도 항상 문이 꼭 닫혀 있었다.
인터넷으로 조회한 내 통장엔 34,700원이 찍혀 있었다.
몇 주 동안, 주방에 남아 있던 라면...통조림 따위로 끼니를 때웠다.
매일 그렇듯 테라스에 앉아, 이제 거의 바닥이 비워져 가는 혜린이의 블루베리 술을 마시며 의미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문득 내가 미친 듯이 써 내려간 그 소설이 떠올랐다.
그리고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그 끝을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혜린이의 술을 완전히 비우고 나는 노트북 전원을 눌렀다.
언젠가부터 꿈에 아름이의 얼굴이 자꾸 보였다.
아름이는 항상 나를 보며 말없이 웃고 있었다.
굳게 닫혀 있는 아름이의 저 방에 내가 들어갈 수 없는 건,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내가...
혜린이와 함께 하던 아름이의 평범한 그 삶을 앗아가 버린 것 같았다.
꿈에서 아름이를 다시 만나고 잠에서 깨어난 어느 날 새벽.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감옥처럼 굳게 닫혀 있던 그 문을 열었다.
파우더향....여섯 살짜리 아름이의 향기가 거짓말처럼 그 방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장도 그대로였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침대....그리고 책상.....
어디론가 잠시 여행을 떠난 아름이가 내일이라도 당장 돌아올 것만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빛나는 왕관을 쓴, 예쁜공주가 웃고 있는 그림책 같은 것이 책상 가운데 덩그러니놓여 있었다.
나는 아름이의 작은 의자에 앉아 그것을 펼쳐보았다.
연필이 그대로 끼워져 있는 페이지가 저절로 펼쳐졌다.
[오늘은 캠핑을 가는날이다.
그런데 너무 무서운 꿈 때문에 일찍 일어났다.
너무 무서워서 엄마방에 갔는데.
오빠하고 엄마가 자고 있어서 그냥 돌아왔다.
꿈에서 귀신이 나와서 나를 계속 따라왔다.
엄마도...그리고 오빠도 없이 나 혼자였다.
너무너무 무서웠다.
캠핑에 가기 싫다.
엄마하고 오빠는 오늘 놀러 가는데,
나도 거기 따라 가고 싶다.
엄마하고 오빠가 일어나면 캠핑은 안 간다고 해야겠다.
어서 빨리 엄마하고 오빠가 일어나면 좋겠다....]
갑자기 숨이 막혀 왔다.
어린아이 같지 않은 그 예쁜 글씨로.....아름이는 그날 아침의 기억을 이렇게 남겨두고 있었다.
아름이의 일기장 뒤쪽에 종이 같은 게 비쭉 튀어나와 있었다.
그건 출력해 놓은 항공권 E-ticket이었다.
비엔티안으로 향하는 그 티켓엔, 아름이의 여권 번호와 이름이 영문으로 적혀 있었다.
[강루아 오빠를 비행기에서 처음 만난 날.
오빠가내게 초코쿠키 사준 날.
나는 오빠가 너무 좋다.
오빠. 사랑해요]
E-ticket 위,
하얀 여백이 남아 있는 그곳에도 아름이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아무래도...이 방에 괜히 들어온 거 같은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내 손은 아름이의 예쁜 글씨가 쓰여진그것을 놓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오늘도 술을 마신다.
매일매일 엄마는 술을마신다.
엄마는 빨간 얼굴로 웃으며 내게 먼저 자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너무 걱정된다.
그리고 무섭다.
술을 매일 마시면 빨리 하늘나라로 간다고 하는데...
엄마가 먼저 하늘나라로 갈까 봐. 나는 무섭다.]
[오늘은 엄마가 일하는 곳에 따라갔다.
엄마는 예쁜 옷을 입고 계속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던 아저씨가 나도 예쁘다고 엄마와 같이 사진을 찍어줬다.
세상에서 엄마가 가장 예쁜 거 같다.
나도 어른이 되면, 엄마처럼 예뻤으면 좋겠다.]
[새벽에 그 아저씨가 찾아왔다.
엄마는 그 아저씨가 무섭지도 않나 보다.
엄마가 왜 그 아저씨하고 술을 마시는지 모르겠다.]
[유치원에서 파티를 했다.
친구들이 엄마보고 예쁘다고 했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엄마하고 아빠가 왔는데.
나는 엄마만 왔다.
친구들이 왜 아빠는 안 왔냐고계속 물었다.
나는 아빠가 없는데....
하지만 엄마는 친구들에게 아빠가 외국에 있다고 말했다.
진짜 우리 아빠는 어디에 있을까?
엄마에게 물어도 엄마는 내게 말해 주지 않는다.
나도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엄마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새벽에 일어났다.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방을 나가보니 거실은 깜깜했다. 그런데 테라스는 불이 켜져 있었다.
엄마가 거기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아저씨하고 또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아저씨가 엄마한테 뽀뽀를 했다.
그 아저씨가 엄마 가슴을 만졌다.
그리고 그아저씨는 옷을 벗고 엄마한테 이상한 걸 했다.
너무 무서워서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숨었다.
엄마는 내가 깨어날 걸 모르는데....
아침에 엄마한테 뭐라고 이야기를 할까 고민이다.]
[엄마가 외국에 여행 가자고 했다.
나는 너무너무 기뻤다.
하지만 엄마 얼굴은 슬퍼 보였다.
왜 일까?
나는 비행기를 처음 타본다.
그리고 외국여행도 처음이다.
어서 빨리 금요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행을 갔다 와서 친구들에게 빨리 자랑하고 싶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가 펑펑 울었다.
나도 울었다.
나는 오빠하고 더 있고 싶었는데, 엄마는 택시에서 내게 화를 냈다.
나는 엄마가 오빠를 좋아는 걸 알고 있는데...
엄마는 왜 저럴까?
나는 정말 그 이유를 모르겠다.]
[여행을 갔다 와서 엄마는 매일 울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안 먹던 술도 다시 먹는다.
나는 오빠가 보고 싶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무섭다.
엄마가 오래전처럼 매일 술 마시면서 그렇게 될까 봐 무섭다.
강루아 오빠가 너무 보고 싶다.
나는 오빠가 아빠였으면 좋겠는데.....엄마는 아닌가 보다.
내가 매일매일 기도를 하면 오빠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너무 너무 행복하다.
오빠가 우리 집에 왔다.
매일매일 기도했는데 정말 소원이 이루어졌다.
엄마가 웃었다.
매일 울던 엄마가 오늘은 웃었다.
나는 엄마가 웃을 때, 가장 예쁘다.
오빠가 내방에서 책을 읽어줬다.
오빠 목소리....그리고 냄새가 너무 좋다.
지금 엄마하고 오빠는 거실에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지만, 나는 방에 혼자 있기로 했다.
나는 내방에서 오빠하고 같이 자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엄마가 오빠를 사랑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오빠도 엄마를 사랑했으면 좋겠다.
오늘밤 오빠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갔으면 좋겠다.
아니.....영원히 우리 집에서 엄마하고 나하고같이 살았으면 좋겠다.
또 매일매일 기도를 해야겠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1년 중 가장 냉혹한 기간, 겨울의 절정을 지나고 있었다.
깊은 침묵 속에서 연기처럼 흘러가던 하루하루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간다는 걸 깨달은건, 자동차 보험 갱신을 알리는 우편물 때문이었다.
통장을 확인해보니 이번 달 작가 정산금은 입금되었지만, 카드값 등 모두 빠져나가고 잔액이 0원이었다.
당장에 돈이 없어서 급한 김에 카드론을 받아 밀려 있던 보험료와 세금을 납부했다.
테라스에 앉아 바라보는 하늘이 유독 검게 변해 있었다.
차가운 날씨에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같은 그런 하늘이었다.
한동안 흐린 하늘을 바라보다가 다시 노트북에 자판에 손이 올라갔다.
정신없이 써내려 간 이 소설도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테라스 유리를 넘어, 밖에서 작은 소음이들려왔다.
그 소리가 시간이 갈수록 더 또렷해져 갔다.
언덕 아래에서 노란 택시 한 대가 이곳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쪽을 바라봤다.
택시는 내차가 서 있는 바로 옆까지 올라와 멈춰 섰다.
그리고 뒷좌석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 한 사람이 내려, 무엇인가 확인이라도 하듯, 바로 옆에 주차되어 있던 내 차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의 시선이....
테라스에 앉아,그쪽으로 바라보고 있는 나를 향해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