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Harmonia (13)
환하게 빛나는 실루엣이 나를 향해 있었다.
흐릿하던 시야가 조금씩 또렸해져 갔다.
나리가 화장대 원목 의자에 앉아,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나와 눈이 마주친 나리가 활짝 웃어보였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보던 나리의 얼굴은 너무나 슬픈 표정이었다.
나리는 조금 전 샤워를 끝냈는지, 풍성하던 긴 머리에 습기를 조금 머금고 있었다.
화장기 하나 없는 뽀얀 나리의 얼굴,
유독 두 눈이 잔뜩 부어 있었다. 마치 한참을 울었던 것처럼...
“일어났어요?
오빠. 열 있어요. 몸살 오려나봐요.”
나리의 손이 내 이마 위에 살짝 내려앉자, 싸늘하게 식어 있는 그 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새벽, 나리와의 뜨거웠던 그 섹스를 마무리할무렵.
나리의 보지속에 깊게 사정을 하며, 내가 내뱉었던 그 말이 떠올랐다.
“출근은? 안 늦었어?”
“오빠. 오늘 일요일.....”
“아...그렇구나.”
하늘하늘한 까만 슬립을 입고 있던나리가 침대로 올라와, 내 품을 파고들었다.
“오빠. 오늘 어머님 뵈러 갈까요?”
“아니. 오늘은.....쉬고 싶어...”
“많이 아파?”
“아니....”
내 품속을 비집으며,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들어오려는 나리를 끌어안았다.
얼음장같이 식어 있는 나리의 몸이 내게 닿자, 뜨겁게 달아 올라있던 내 몸이 서서히 나리의 체온과 뒤섞였다.
“오빠?”
“응?”
“많이 힘들죠?”
“뭐가?”
잠시 나리는 말이 없었다.
“오빠. 나는 괜찮아요.”
나리의 한줄기 뜨거운 숨이 내 가슴에 흩어져 내렸다.
“우리 결혼하면.....계속 여기서 살까요?
나는 이 집이 너무 좋아....
너무 편하고....
오빠하고 나하고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까...
밖에서 나쁜 일이 있어도,
이 집에만 들어오면 기분이 좋아져요.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오빠...
난오빠 없으면, 안될 거 같아...
나 때문에.....
오빠하고 헤어지고 그렇게 오래 따로 지냈지만.
사실 단 한 순간도....
내 마음에서 오빠 지운 적 없어요.
나 정말 오빠 너무 사랑해.
나......기다릴게요...”
기다린다는 나리의 그 말에, 내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언젠가부터 내 몸에 바짝 닿아 있는 나리의 몸이 뜨겁게 변해 있었다.
식어 버린 내 몸이, 나리의 달아오른 체온으로 다시 조금씩 데워져 가기 시작했다.
“오빠. 나 집에 좀 갔다 올게요.
엄마한테 우리 결혼할거란 거 말하고.
아버님이 뵙자는 거, 시간도 잡아야 되고.....”
“같이 갈까?
어머니한테 내가 말씀드려야지....”
“아니.....오늘은 쉬어요.
오늘 밖에 쌀쌀한데, 몸살 기운 있을 때, 나가면 안돼요.
엄마한테는 내가 잘 이야기 할게요.”
한동안 내게 꼭 안겨 있던 나리가침대에서 일어났다.
눈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리의 눈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오빠. 뭐 먹지 말고, 기다려요.
집에서 오빠 좋아하는 거 잔뜩 가져올게요.”
나리는 활짝 웃으며, 그렇게 침실을 빠져나갔다.
분명 웃고 있었지만,
유난히 슬퍼 보이는 나리의 마지막 얼굴에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미안했다...
이젠 날씨가 완연히 초겨울로 접어 들어있었다.
이따금씩 최저기온이 영하로 떨어졌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10도 이상 벌어져 있었다.
스튜어디스 유니폼 위에 따뜻한 코트를 입고 출근하는 나리가 마음에 걸려, 매일 차로 나리를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다.
마치, 벌써 나리와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어 있는 것처럼....
가끔은 퇴근 시간에 맞춰, 미리 공항에 도착해, 멀리서 나리를 지켜봤다.
체크인 부스에 앉아, 수많은 승객을 대하는 나리의 얼굴엔, 한결같은 보기 좋은 미소로 가득했다.
그리고,
나리를 차가운 시선으로 보던 다른 여자들의 표정이 변해 있었다.
나리와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여타 다른 직장 동료들의 그런 사이처럼 보였다.
이젠 완전히 적응을 했는지, 나리는 지상직으로 일하는 게 편해 보였다.
오전과 오후로 나눠진 2교대 근무였지만, 기내승무원보다 훨씬 규칙적인 생활이 가능했고, 보통 직장인들처럼 일상을 누리기에 시간적인 여유도 충분했다.
앙상하게 말라 있던 나리의 얼굴과 몸이,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기억하던 예전의 모습으로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리와 잠자리는 뜸해졌다.
그날의 실수가 깊은 트라우마처럼 내 머릿속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로부터 거의 매일 연락이 왔다.
나리와 결혼을 하면 집은 어떻게 할지, 필요한 게 뭐가 있는지......대부분 결혼에 관련된 그런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이번 주말에 나리의 어머님과 상견례를 잡았다는 것도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그와 더불어....
답답했던 내 마음도 조금씩 편해져 갔다.
며칠간 매일 먹던 그 신경정신과 약을 더이상 찾지 않았다.
가끔 악몽에 시달리고, 불면증에 빠져 그 약이 눈앞에 아른거릴 때도 있었지만, 나는 참았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래전.....그날들처럼...
“오빠? 오늘 저녁 밖에서 먹을까요?”
어둠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이른 아침 공항 주차장.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나리가 생글거리며 물어왔다.
“응. 뭐 먹고 싶은데?”
“음.....따뜻한 거? 요즘 너무 추워....”
“오랜만에 그 집 갈까?생태찌게?”
“맞다! 그 집....좋아요.
아.....벌써 먹고 싶다.......”
“6시쯤에 데리러 올게.
오늘도 수고하고....”
“응!”
나리가 운전석으로 슬쩍 넘어와 내 뺨에 입맞춤을 했다,
잠시 머물다 다시 떨어져 나가던 나리의 얼굴을 감싸고 키스를 했다.
너무나 달콤한 립글로즈 향이 나리의 도톰한 입술과 혀를 타고, 오랫동안 내 입속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책상에 앉아 작업을 시작했지만, 생각대로 글이 잘 쓰여지지 않았다.
내게 다시 그 약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지금 집필중인 소설은이제 중반을 훌쩍 지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집중을 하고 노력을 해도 노트북 화면, 하얀 워드페이지에 적혀진 글이 한페이지를 넘어가지 못했다.
책상에 앉아, 그렇게 씨름하던 와중 시간은 어영부영 흘러가 벌써 정오가 지나 있었다.
참 이상하게도 오늘은 더이상 작업을 할 수 없을 거 같았다.
한참을 고민하다 노트북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전 내내 창가에 비치던 깨끗하던 하늘이, 마치 비가 올 것처럼 그렇게 흐려져 있었다.
[호호호......]
옆에서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눈을 떠보니, 나리가 창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 저기 봐. 너무 예뻐!!!]
나리가 비행기 창가 좌석에 바짝 붙어 앉아, 무엇인가를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나리야....뭔데?]
[오빠! 일어났어? 저기 봐! 너무 예뻐!!!]
창가를 가리고 있던 나리의 얼굴이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리 진하지 않은 투명한 화장의 크리스털처럼 반짝이는 얼굴,
웃음기 가득한 눈빛으로 큰 눈을 깜빡이는 그 모습이, 영락없이 대학 시절 처음 만났던 날, 나리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나리가 내 팔을 창가좌석으로 끌어당겼다.
[오빠! 저기 봐 너무 예쁘지?]
비행기,
작은 창가 아래엔 솜털 같은 구름들이 부드러운 융단처럼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있는게 아니라, 구름 위에 살짝 올려져 미끄러져 가는 거 같았다.
[오빠?]
[응?]
[오빠 요즘 새로 쓰는 그 소설 말이야. 결말이 어떻게 돼?]
[글쎄.....아직 고민중인데.....]
[나는 해피엔딩이면 좋겠어....]
[왜?]
[불쌍하잖아.....]
[어? 무슨 말이야? 뭐가 불쌍해?]
나리의 얼굴로 완전히 가려져 있던 창가가 조금씩 다시 눈에 들어왔다.
모든 게 핏빛이었다.
솜털처럼 하얗던 구름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대신 핏물같이 새빨간 파도가 거칠게 일렁이고 있었다.
잔잔하던 비행기가 갑자기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없는 거친 터뷸런스를 만난 것처럼, 그렇게 비행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요동치는 비행기 속에 사람들이 튕겨져 나와,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몸이 부딪쳤다.
지독한 비명소리.
사람들의 팔이 떨어져 나가고, 흉하게 다리가 꺾이고......목이 떨어져 나갔다.
비행기속에도 창가에내려다보이는 그 핏물처럼 새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은 지옥이었다.
앞좌석에 앉아 있던 한여자의 얼굴이 좌석 위로 삐죽 올라와 나를 내려다보고있었다.
사방에서 튀는 핏물로 범벅된 얼굴로 그 여자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여자의 입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사람이 아닌 기괴한 표정으로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아아악!!!!”
눈을 떴을 때, 거실에 여전히 내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소파 아래에 굴러떨어져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런 생생한 악몽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꿈에서 깨어났지만, 사지가 잘려 나간 사람들의 핏물이 내 얼굴에 범벅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한동안 바닥에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팬티까지 축축하게 변해 있었다.
간신히 거실 바닥을 딛고 일어섰지만, 터질 것 같은 심장이 내 가슴을 미친 듯 계속 두드려 댔다.
어둠이 내려앉은 창가가 완전히 뿌옇게 변해 있었다.
목이 타들어 가는 갈증에, 냉장고로가 500밀리짜리 생수 한 통을 꺼내 단번에 마셔버렸다.
하지만 내 가슴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식탁에 올려져 있던 약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떨리는 손으로 그 속을 헤집어 보니, 딱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 약을 뜯어, 물도 없이 입속에 넣어 삼켜버렸다.
거실을 가로질러 온통 뿌옇게 변한 창가로 다가갔다.
새까만 하늘 한쪽 구석에 불과 얼마 전에 사라진 듯한 옅은 붉은빛이 보였다.
눈이 오고 있었다.
새까만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 아래 도시가 온통 뿌옇게 변해 있었다.
첫 눈이었다.
펑펑 쏟아지는 하얀 눈을 물끄러미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심히 요동치던 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 이유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눈 때문인지,
아니면 마지막 남은 그 약 하나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순간 잊고 있던 나리의 얼굴이 번쩍 떠올랐다.
현관을 향해 거실을 가로질러가다, 벽에 달린 시계를 보니 오후 6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나리와 저녁을 밖에서 먹기로 약속했는데,
말도 안되는 그 악몽 때문에 내가 연락을 받지 않아, 나리가 집으로 온 거 같았다.
“나리야!!!!”
현관이 가까워지지도 않았는데, 괜히 나리의 이름을 커다랗게 불러 댔다.
서둘러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하늘에서 하얀 솜 뭉치 같은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창가에서 바라보던 것과는 너무나 달라 보였다.
현관 앞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얼마나 진하게 화장을 했는지, 어두운 하늘 아래서도 하얗게 빛이 났다.
그여자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