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Harmonia (9)
“오빠? 괜찮아?”
내 볼을 감싸는 따스한 손길에 선잠을자고 있던 눈이 열렸다.
머리를 곱게 말아 올려놓고 있는 나리가 침대 곁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나 포근했다.
올림머리 바로 아래, 드러나있는 이마에 은은한 광채가 보기 좋게 반짝였다.
나리는승무원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오빠? 아파요?
나 오늘 쉴까요?”
“아니야....몸살 때문인가 봐....”
“열 있어요.....걱정돼....”
“좀 자고 나면 괜찮아. 출근해....”
나리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 뺨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날.
민정씨를 만난 그날이후, 나리는 아주 조금씩 변해갔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나리의 화사한 얼굴 이면에 숨겨져 있던, 근심이 조금씩 지워져 가고 있었다.
나리는 퇴근 후, 이젠 집에서 편하게 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통화를 하면서 ‘선배’ 혹은 ‘언니’라고 지칭하는 걸로 볼 때, 대부분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살가운 전화였다.
출근을 한 나리가 가끔 내게 사진을 보내왔다.
점심은 뭘 먹었는지 그런 소소한 일상의 사진들이었다. 사진 속엔 승무원 유니폼을 입은 여자들의 웃고 있는 얼굴도함께 담겨 있었다.
다행이었다.
갑갑하기만 하던 나라의 일상이 변하게, 정말 민정씨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리가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 안심이 되고 좋아 보일 뿐이었다.
반면, 나는 계속 몸이 좋지 않았다.
매일 잠을 설쳤다.
그렇게 미친 듯, 써 내려가던 새 소설도 언젠가부턴 답답하게 막혀, 이야기가 잘 이어지지가 않았다.
한동안 입에도 대지 않던 신경정신과 약을 하나씩 먹기 시작한 지가 일주일이 지나 있었다.
약 기운 때문인지 잠은 오래 잘 수 있었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항상 머리가 멍한 상태가 몇 시간 동안 계속 지속되었다.
“늦겠다. 출근해.....”
내 말에.
나리가 담요를내게 꼼꼼하게 덮어주고, 불을 끄고 침실을 빠져나가는 마지막 모습을 보고, 그대로 다시 눈이 감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온몸에 근육통이 온 것처럼 아팠다.
꿈자리가 너무나 요란스러웠다.
무슨 꿈을꾼 건지 내용은 하나도 나지 않았지만, 꿈속에서 내가 미친 듯이 뛰어다니던 건 얼핏 기억이 났다. 그래서 온몸이 쑤시는듯했다.
거실로 나가, 커피를 내리고 창가 책상에 앉았다.
거실 바닥에 내려앉은 따가운 햇살이, 이 계절의 것이라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포근하고 따스했다.
[오빠? 좀 괜찮아요?
퇴근하자마자, 바로 갈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출근을 해 얼마 되지 않았을 시간, 오전에 도착한나리의 메시지였다.
하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책상에 있던 명함통을 꺼내, 그 속에 담겨 있는 명함을 책상 위에 모두 쏟아냈다.
그중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명함에 찍혀 있는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여보세요? 오빠?]
놀란 여자의 목소리였다.
아마도 내 전화번호를 저장해 놓은 모양이었다.
[서연씨.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
[네? 말씀하세요....]
[혜린이 어디에 있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없었다.
[여보세요? 서연씨?]
전화가 끊어진 거 같아 다시 서연씨를 찾았다.
[혜린씨....어머님....계신 곳에 있어요...]
서연씨 말에 가슴이 울컥.....뜨거워졌다.
그랬구나.....
혜린이가 그곳에 있었구나....
[서연씨....고마워요]
[루아씨! 오빠!!!]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어?]
[집이죠? 내가 지금 갈게요....]
[일 안 해요?]
[오늘 토요일이에요.]
전화는 그렇게 끊겨버렸다.
이제야 혜린이를 찾아간다는게 너무나 미안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너무 무서웠다.
차마....상상하던 그곳에서 혜린이를 다시 만난다는게 너무나 무서웠다.
서둘러 샤워를 했다.
서연씨가 여기에 오든 말든, 빨리 준비를 하고 혜린이를 만나러 그곳에 가고 싶었다.
샤워를 하고, 침실 화장대에 앉아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초점없이 껌뻑거리는 두 눈,
바짝 말라버린 입술....
얼굴엔 살이 쏙 빠져 있었고, 생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엉망인 모습으로 혜린이를 다시 만나러 가는게...미안했다.
셔츠에 검은 수트를 입고, 책상에 있던 스마트폰을 집어 드는 순간, 현관 벌컥 문이 열렸다.
“오빠!!!”
서연씨가 거친 숨을 고르며, 거실 입구에 서 있었다.
항상 보던 대기업 여직원의 사무실 옷차림이 아니었다. 사석에 친구를 만나러 갈 때, 입을 만한 그런예쁜 옷이었다.
하지만 얼굴엔 그 어떤 메이크업도 하지 않은 맨얼굴이었다.
투명한 피부 때문인지 서연씨가 훨씬 어려 보였다.
“왜 왔어? 나지금 출발하려고 하는데....”
막상 서연씨 얼굴을 보니 반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같이...같이 가요.....내 차로 가요!”
서연씨가 왜 이렇게 서둘러 이곳에 달려왔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홀로 가서 한참 동안 혜린이를 찾아 헤매는 거보단 괜찮을 거 같았다.
“오빠. 요즘....괜찮아요?”
서연씨가 운전을 하며 말했다
“뭐가?”
“그냥....이것저것....”
“괜찮치....”
“나리씨는 오늘......어디....”
“출근했어...”
더 이상의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구름 한점 없이 햇살이 내리쬐고 있는 창밖의 모습이, 마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따스한 어느 봄날 같았다.
차가 40분 정도를 달리자, 내게 익숙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엄마가 계신 곳.
엄마가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추모공원.
차가 계속 언덕 올라갔다.
멀리서 회색 건물이 보이자, 그때서야 내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아.....하아.....하아...”
숨이 가빠졌다.
깊은 숨이 계속 터져 나왔다.
운전대를 잡고있는 서연씨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계속 나를 돌아봤다.
주차를 하고 서연씨가 앞장서 나아갔다. 나는 그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추모관에서 몇몇의 사람들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한발, 한발...나아 갈 때마다,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한쪽 벽면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는 그곳에 서연씨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너무나 신기하게도......
그 작은, 수많은 정 사각형 유리 속에 혜린이의 사진이 가장 먼저 내 눈에 띄었다.
혜린이는 한 변이 40센티가 될까 말까 한, 그 작은 정사각형의 유리 공간에.......갇혀 있었다.
혜린이가 나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힘겹게 한발그리고 또 한발 혜린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사진속에 활짝 웃고 있는 혜린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았다.
눈물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대신 내 가슴속이 터질 듯, 쿵쿵대며 울려 댈 뿐이었다.
“미안해....늦게 와서....미안해.....”
미안하단 소리만 입에서 계속흘러나왔다.
나는 사진속의 혜린이와 눈을 맞추며, 시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그곳에 서 있었다.
아니.....정말 이렇게 시간이 멈춰 버리길 간절히 기도하고....기도했다.
나는 지갑에서 내 주민증을 꺼냈다.
그곳엔 오래전.....대학시절의 내 사진이 담겨 있었다.
답답한 유리 문을 열어 놓고 혜린이 사진 아래, 내 주민증을 놓아두었다.
뒤 돌아서자, 몇 시간 동안 멈춰 있던다리가 굳어 버린 것처럼 뻣뻣했다.
맞은편 끝에 서 있는 서연씨가 나를 보고 있었다.
추모관을 빠져나와 서연씨 차에 올라타자 차가 출발했다.
한동안 아래를향해 내려가던 차가 멈춰 섰다.
“어머님....뵙고 갈래요?”
서연씨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길게 뻗은 소나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그냥...그냥 가...”
피곤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 철저하게 홀로 남겨지고 싶었다.
그 작은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는 혜린이처럼 그렇게...
시내로 접어들 무렵, 스마트폰이 울려 댔다.
아버지였다.
[네. 아버지.]
[그래. 뭐하니?]
아버지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부드러웠다.
[밖에 잠깐 나와 있어요.]
[오늘 저녁 먹자.]
항상 내게 시간이 되는지 먼저 확인을 하던 아버지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 한정식집.......아니다....거기 말고.....]
아버지가 항상 가던 한정식집.
지금 아버지가 말한 그곳이, 나는 어딘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혜린이를 처음 보여줬던 그곳.
아버지가 서둘러 다른 곳을 찾는 거 보니, 아버지도 방금 그 생각이 떠올랐던 모양이었다.
[저번에....나리하고 같이 봤던, 호수 그 레스토랑에서 보자.....]
아버지는 내 답을듣기도 전에 전화를 서둘러 끊어 버렸다.
“서연씨..”
“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서연씨가 깜짝 놀라며 답했다.
“아버지한테.....말했어?”
“아니요...말 안 했어요...”
서연씨는 서둘러 부인을 했지만, 얼굴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그대로 표시가 났다.
나를 홀로 두는게 걱정됐을 서연씨가.....아버지에게 내가 헤린이를 만나러 왔다고, 이미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서연씨가 운전하는 차가 우리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호수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는 레스토랑....
3층 룸, 창가에서 나는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벌써 하늘이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이 레스토랑에 왔던 날.
깜깜한 밤, 음주운전을 하며 천국의 정원, 혜린이집으로 미친 듯이 달려가던 그날.
그리고 빨간 오토바이...
그 남자의 집, 그리고 혜린이의 동영상....
그리고.....이 레스토랑 맞은편 Bar에서의 나리....
호수가엔 웃고 있는 혜린이의 얼굴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오빠!”
뒤를 돌아보니, 이제 막 룸을 들어선 나리가 한없이 생글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나리는 집에 들었다 옷을 갈아 있고 왔는지,오랜만에 몸매가 드러난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왔어?”
“우와....우리 오빠 오늘 너무 근사하다....”
“나리씨 왔어요?”
“안녕하세요. 서연씨.”
나리가 서연씨와 간단한 인사를 하곤, 곧장 창가로 다가와, 내가 입고 있는 검은 수트 깃을 하얀 손으로 쓰다듬었다.
“아버님 전화받고 깜짝 놀랐어요.
오빠 오늘 몸 안 좋아서,
밖에서 저녁 먹는 건 좀 힘들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벌써 오빠하고 통화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이제 좀 괜찮아요?”
나리가 내 이마에 살짝 손을 짚어 놓고 물었다.
“응. 이제 괜찮아....”
나리는 내가 오늘 어디에 다녀왔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오빠! 본부장님 조금 늦으신데요.
우리 먼저 먹고 있으라고 하시네요.”
밖에 나갔던 서연씨가 다시 룸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화장을 하고 왔는지, 맨 얼굴이었던 서연씨가 나리의 얼굴처럼 화사하게 물들어 반짝이고 있었다.
나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연씨를 보고 있었다.
아마도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서연씨 때문인 것 같았다.
주문한 음식이 하나씩 들어왔다.
하지만 내 손이 가장 먼저 닫은 것은 레드와인이었다.
오늘은 술을 마시고 싶었다.
혜린이가 매일 밤 내게 내어주던......그 블루베리 술처럼.....그 예쁜 색깔과 똑 닮아 있는 술을 마시고 싶었다.
레드와인과 함께 하는 음식이 잘 넘어갔다.
의외로 음식을 잘 먹는 내 모습이 마음이 드는지 나리는 해산물을 내가 먹기 좋게 발라내 주었다.
“안녕하세요....”
문을 작게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연씨. 본부장님은 아직 안 오셨어요?”
“사장님 안녕하세요. 본부장님은 좀 늦으신다네요.”
반가운듯, 서연씨가 웃으며 답했다.
테이블 앞쪽에 한 남자가 활짝 웃으며 서 있었다.
건장한 체격에 머리를 보기 좋게 위로넘긴, 그 남자의 얼굴이 반들반들 빛이 났다.
“어....나리씨도 왔네요?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나리가 웃으며 답했지만, 내 눈엔 어색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사장님. 나리씨 알아요?”
“네. 잘 알죠!
우리 레스토랑에같이 근무하시는 승무원분들하고 가끔 오셨는데......
근데 요즘은 통 안 오시더니....
오랜만에 나리씨 보니까, 참 반갑네요...하하하하.....”
그 남자가 나리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며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