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Harmonia (7)
정면을 향해 있는 나리의 시선이 무척 불안해 보였다.
잔뜩 겁을 먹은 거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리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곳엔 승무원 유니폼을 입은 두 명의 여자가 각자 캐리어를 손에 쥐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보기 좋은 단발펌을 한 여자는 나이가 좀 있어 보였다.
멈춰 있던 나리의 발걸음이, 그 여자들이 서 있는 곳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나는 얼마의 간격을 두고 나리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무장님......”
앞에서 한 여자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나리의 소리가 들렸다.
“그래. 나리야! 오랜만이네.”
단발펌을 한 여자가 나리와 인사를 한 후, 시선이 곧장 내게로 넘어왔다.
붉은 입술을 살짝 벌려 놓고, 가식적으로 웃고 있던 그 여자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져 버렸다.
그 여자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여자의 눈빛이 나리에게 계속 머물러 있었다.
그 여자의 눈빛은.
조금 전 체크인 부스에서 나리를 바라보던, 그 여자들의 눈빛과 똑 닮아 있었다.
나를 보고 놀란 그 여자의 시선이 다시 나리에게로 향했다.
“그...그래...일은 할 만해?”
“네. 사무장님.”
사무장이라는 그 여자에게 나리가 왜 이렇게 주눅이 들어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나리씨! 일하는 공항에서 이렇게 다녀도 돼요?”
사무장이라는 여자 옆에 서 있던 여자는 나리보다 어려 보였다.
하지만 말투가 무척 날이 서있었고, 예의가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스튜어디스가 일하는 공항에서 남자와 손을 잡고 다니는 것이 매우 부적절해 보이는 건 맞는 말이었다.
“저....저분은 누구?”
사무장의 목소리!
나를 보는 눈빛.
순간.
커다란 가슴 위에 바짝 서 있는 젖꼭지, 그 갈라진 틈에서 뭔가가 주르르 흘러나오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우리집 4층 현관 앞,
희미한 달빛 아래,
옥상으로 올라가는 난간을 꼭 쥐고 있던 하얀 손.
허리를 깊게 숙여 놓고, 내게 엉덩이를 바짝 밀어 내놓고 있던 그 여자. 진한 소리를 토해내던...
지금 나리 앞에 서 있는 여자는 바로그 여자였다.
서른 셋.....6살짜리 딸아이가 있는
김민정....
“남.....남자 친구.....”
나리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끝을 흘렸다.
사무장 옆에 서 있던 어린 여자는 기가 차다는 눈으로 나리를계속 쏘아보고 있었다.
“그래....담에 보자.”
사무장의 말에, 나리는 서둘러 인사를 하고 두 여자를 지나쳤다.
나도 나리를 따라, 두여자를 스쳐 지나갔다.
“오빠.....미안해.....나 들어가 봐야 할 거같아....”
두 여자와의 거리가 충분히 멀어지고 나서야 나리가 조용하게 말했다.
“그래. 들어가. 수고하고....”
“응. 미안해요.”
나리는 한번 나와 눈을 맞추고, 직원들이 드나드는 공항청사 문으로 급히 들어가버렸다.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봤다.
조금 전, 스쳐 지나왔던 그 두 여자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4층 현관문 번호키를 누르며 나도 모르게 자꾸 옥상으로 올라가는 난간이 눈에 들어왔다.
민정씨와 꼭 들러붙어 엉켜 있던 그날 밤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집에 들어와서까지 계속 찝찝한 마음이었다.
민정씨를 공항에서 마주칠 거라고는꿈에도 생각치 못했던 일이었다. 더군다나 나리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그리고 경멸의 눈빛으로 나리를 쏘아보던 체크인 부스의 여자들과, 민정씨 옆에 서 있던 어린 여자의 눈빛이 지워지지가 않았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같이 일하는 여자들에게 따돌림당하고, 칼날 같은 경멸의 눈빛이 향하는 나리의 마음은 어떨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 모든게.....나리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착잡했다.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약봉지.
머리가 복잡해 좀 쉬고 싶었다.
저 약봉지에서 알약 두 개만 꺼내 삼키면, 편히 잠들 수 있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현관 입구에 서서 한동안 고민을 하다, 나는 그냥 커피를 한 잔 내려 창가 책상으로 갔다.
내가 선택한 것은 식탁 위의그 신경정신과 알약이 아니라, 일이었다.
작업을 하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지워져 버린다.
노트북 전원을 깊게 눌렀다.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직전처럼, 따스했다.
창가를 관통하던 햇빛이 어느새 모두 사라져 있었다.
창밖엔 서쪽 하늘을짙게 수놓고 있는 붉은 노을만이 가득했다.
책상 끝에놓여 있던 스마트폰 상단 표시등이 천천히깜빡였다.
[오빠. 잘 들어갔어요?
아깐 미안해요....]
[오빠? 작업해요?
냉장고에 어제 사 놓은 과일 있어요. 꺼내서 드세요.]
[오빠 보고 싶다.......]
메신저 앱에 나리의 메시지가 몇 개 들어와 있었다.
오후 5시 55분.
아마 지금쯤 나리는 고단했던 하루를 정리하고, 퇴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나리가 오면 저녁을 어떡할지 고민에 빠졌다.
나리에게 좀 특별한 저녁을 선사해주고 싶었다.
책상 의자에서 일어서는 순간.
들고 있던 스마트폰 액정이 환하게 빛을 발했다.
[오빠. 어떡하죠? 퇴근 준비하는데..
갑자기 저녁 약속이 잡혔어요.
오빠저녁 혼자 먹어야 할거 같아요.
냉장고에 집에서 반찬 가져온 거 있어요.
아니면 시켜먹을래요?
휴....오늘 저녁에 오빠하고 맛있는 거 해먹으려고 했는데.....]
나리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래. 난 괜찮아. 맛있는 거 먹고.
올 때 연락해. 데리러갈께.]
[저녁만 먹고 바로 들어갈게요.
택시 타고 갈게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바로 답장이 왔다.
의자에 편히 기대어 앉아,
짙은 어둠에 조금씩 잠식되어 가는, 붉은 노을의 종말을 그렇게 지켜보고 있었다.
밥 생각이 없어, 새로 내려온 커피만 계속 홀짝이고 있었다.
나리가 지상직으로 발령받고 나서 처음으로 저녁을 먹고 온다는 그 메시지가, 철저히 고립되어 있는 나리에게 어쩌면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노란 가로등불 밖에 보이지않는 창밖의 광경에 흥미가 사라져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때.
전화가 울려 댔다.
[여보세요?]
[오빠! 저녁 먹었어요?]
[어? 아니....]
[오빠. 나 지금 집 근처에 다리 건너서...
우리 예전에 자주 가던 패밀리 레스토랑에 있거든요.
오빠 저녁 안 먹었으면, 이리로 올래요?]
[너 저녁 약속 있다고 했잖아.]
[오빠 여기 근처 산다고하니까. 사무장님이 같이 저녁 먹재요]
[내가 왜.....너 누구 하고 있는데?]
[아까 공항에서 봤던 그사무장님하고 둘이있어요]
갑자기 말문이 막혀 버렸다.
[오빠? 여보세요? 오빠?]
나를 찾는 나리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나리에겐 괜찮다며 둘이 저녁을 먹고 오라고 했지만, 계속 신경이 쓰였다.
나리가 민정씨와 단둘이, 그것도 내가 처음 그 여자를 만났던 그 장소에서 저녁을 먹는다는게 우연치고는 좀 이상했다.
한참을 고민하다. 옷을 챙겨 있고 집을 나섰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아, 차로 몇 분 남짓 그곳에 도착했다.
주차장에는 차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안녕하세요! 예약하셨습니까?”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직원이 웃으며 나를 반겼다.
“아니요. 일행 있어요”
테이블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자릴 잡고 있어서 나리의 얼굴을 찾기 힘들었다.
한참 둘러보다 창가 맨 끝자리에 앉아 있는 나리의 모습이 보였다.
나리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있었다.
“오빠!”
테이블 앞에 거의 다가갔을 때, 나를 발견한 나리가 깜짝 놀랐다.
나리는 공항에서 옷을 갈아입었는지, 이 시기에 잘 어울리는 베이지 스커트와 하얀 니트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는 공항에서 봤던 스튜어디스 올림머리 그대로였다.
테이블엔 스테이크접시와 3분의1정도 비워진 하얀 와인병이 놓여 있었다.
나리 맞은편에 앉아 있던 민정씨가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서 와요!”
민정씨가 웃으며 내게 말했다.
눈을 한껏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진한화장, 그리고 가슴이 파여 있는 새까만 블랙 원피스.
위에서 내려다보는 민정씨의 파여 있는 원피스 사이, 뽀얀 가슴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평상시보다 수수해 보이는 나리와는 달리 이 여자는 한껏 치장한 그런 옷차림이었다.
나리 옆에 자릴 잡고 앉았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붉은 입술이 위쪽으로 치켜 올라간 민정씨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또 뵙네요’ 라는 민정씨의 말이,
오늘 공항에서 나를 본 걸 말하는지, 아니면 그날 이곳에서 나를 본 걸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직원이 내민 메뉴에, 속이부대껴 가장 간단한 파스타 하나를 주문했다.
“나리한테 들었어요. 둘이 만난지 좀 됐던 돼요?”
“아...네....”
민정씨가 알 수 없는 미소로, 나와 나리를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는 나리의 표정이 무척 부자연스러웠다.
그 모습이 불편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무심결에 흘러나오는 그런 모습이었다.
“여기 근처 사신다고 해서,
그냥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제가 괜찮다고 했어요.”
“아네.....고맙습니다.”
내 말도 나리의 표정처럼 부자연스러웠다.
우리는 조용히 각자 음식을먹고 있었다.
그리고 민정씨가 권하는 화이트와인은 입술만 살짝 적히곤 다시 내려놓았다.
“사무장님. 전화 좀....”
“응, 받아.”
[여보세요? 네 선배님.....]
[네....]
나리의 작은 목소리가 떨렸다.
[스케줄은 퇴근 전에....정리해서 메일로 보냈어요]
[네?]
나리가 들고 있는스마트폰에서 여자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내가 앉아 있는 여기까지 그 소리가 들리려면, 그 여자는 지금 소리를 지르고 있는게 분명했다.
“사무장님. 상희 선배 전환데요.....
좀 받고 와야 될 거 같아요. 죄송합니다.”
“응 그래.”
“오빠. 잠깐만.....”
나리가 내게 속삭이고 자릴 벗어났다.
스마트폰을들고멀어져가는 나리의 뒷모습을 계속 보고 있었다.
“내가...루아씨한테 실수했네요?”
갑자기들리는 소리에 정면을 바라봤다.
민정씨가 빨간 입술로 와인잔을 가져갔다.
“왜 말 안 했어요? 그날...여기서 지민하고 있을 때......나 지금 괜히 이상한 사람 된 거 같은데?”
민정씨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내가 처음 나리 이야기 꺼냈을 때, 루아씨나 아니면 지민이라도사실을 알려줬음.....그러지 않았을 건데.....그쵸?”
“그땐...그렇게 됐어요.”
내 목소리 또한 이 여자의 표정처럼 무척 차가웠다.
“루아씨. 나리 참 좋아하나 보다.
어떻게 그런 소릴듣고......훗
루아씨. 그날 내가 말한 거....소문 아니에요.”
민정씨가 내게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마치 비웃는 것처럼.
“루아씨. 내가 솔직히 말할게요.
나리 만나지 마요.”
“왜요?”
“루아씨.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이건 정말루아씨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나리....보통 애 아니에요.
그때 말한 홍콩에서기장하고 부기장하고 셋이 호텔룸에서 그런 것도 사실이고.
나리 인천에 있을 때,
얼마나 유명했는데.....
내가 한둘이면 루아씨한테 이야기하지도 않아요.
너무 선을 넘어 버렸어...나리가....
그 기장하고 부기장뿐만 아니라, 우리 항공사에 다른 직원들.....그리고 심지어 공항에서 일하는 이상한 애들도 나리하고 그랬다는 소문이 있어요.
나리가 얼마나 남자 좋아하는지 모르죠?
비행하면서 남자 승객들이 주는 명함 다 받아서, 골라가며 만났던 애예요.
나 정말 이 일 하면서....저런 애 첨봤어.....”
말을 끝내고,
나를 바라보는 민정씨의 표정은 처음과는 다르게, 너무나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