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Harmonia (5)
“오빠! 저녁 뭐 먹고 싶어요?”
공항 주차장을 빠져나가려는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나리는 여전히 불게 물들어 있는 눈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활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점심을 걸렀지만, 전혀 밥 생각이 없었다.
“고기 좀 사갈까요?
오빠 불고기 좋아하잖아요.
김치찌게 끓여서 집에서 먹을까요?”
재잘대는 나리의 소리에도 나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퇴근 시간과 겹쳐 수많은 차들이 쏟아져 나와, 빡빡하게 밀려 있는 공항 앞 도로를 차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차 안이 잠시 조용했다.
“나리야! 너 점심은 먹었어?”
“네?”
조용한 차 안에 내 목소리가 차분하게 흘러나오자 나리가 놀라며 나를 돌아봤다.
“요즘 점심은 어디서 먹어? 공항에서 먹니?”
“네.....공항.....음식점.....”
“누구하고?”
“선배들하고.......”
기어들어가는 나리의 목소리였다.
앞쪽에 늘어선 차들에 밀려 잠시 정차해 있는 사이, 고개를 돌려 나리의 얼굴을 가만히들여다봤다.
곱게 화장을 한 나리의 얼굴은 참 화사했다. 빛이 날 정도로.....
하지만 화려한 화장에 가려, 깊게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얼굴엔 전혀 생기가 없어 보였다.
“밖에서 먹고 들어가자. 먹고 싶은 거 있어?”
나리는 내 물음에 답을 하지 않고, 내 얼굴만 뚫어져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서 있던 차가 다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이에요....오빠가 먼저 말 걸어준 거.....처음이야.....”
옆에서 들릴 듯, 말 듯한 나리의 작은 소리가 내게 전해지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우리가 자주 가던....나리가 좋아하던 그 고깃집으로 갔다.
식당에 들어설 때, 항공사 유니폼을 입고 있는 나리에게 시선이 쏟아졌다.
“어! 아이구.....정말 오랜만에 오시네......”
사장이 우리를 알아보고 반겼다.
카운터에 있던 중년의 사장,
홀 서빙을 하던 아주머니,
연기가 피어오르는 테이블에서 고기를 먹고 있던 아저씨,
다정해 보이는 젊은 커플.
그리고 부모와 함께 온 꼬마 녀석들까지, 그렇게 유니폼을 입고 있는 나리를 흘깃거리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그 호기심 어린 눈빛은,
나이, 성별에따라 각기 그 의미가 분명 서로 달라 보였다.
나리는 사람들의 그런 시선들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는지, 이젠 완전히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았다.
나리는 테이블에 앉아, 주문을 하고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차에서 보다 나라의 얼굴이 조금 더 나아 보였다.
작은 입으로 갈빗살을 오물거리는 나리를 보고 있자니, 참 여러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그렇게 나리와, 나는 정말 오랜만에 밖에서 둘만의 저녁을 먹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자, 거실에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었다.
분명히 집을 나갈 때, 거실 불을 꺼 놓았던 거 같은데, 내가 착각을 했나 싶었다.
“아버지....”
창가에 하얀 셔츠와 타이를 한 아버지가 서 있었다.
아버지는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위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머! 아버님! 언제 오셨어요?”
현관문을 닫아 놓고, 이제 막 거실에 올라서던 나리도 예상치 못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놀란 것 같았다.
“왔어? 어디갔다 왔니?”
“네. 저녁 먹고 왔어요.....아버지 식사는 하셨어요?”
“그래 먹었다.”
아버지가 베란다 문을 닫아 놓고 거실 중간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루아씨......나리씨.....”
커피머신이 올려져 있는 주방 한쪽에 서연씨가 서 있었다.
H라인 스커트, 밝은 컬러 블라우스....전형적인 오피스룩을 입고 있는 서연씨가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서연씨 얼굴에 옅은 미소가 살짝 지어져 있었다.
나리도 그런 서연씨에게 조금 어색하게 눈인사를 전했다.
“너 아직 전화 안 되더라?”
“아..네.....”
아버지말에 TV선반 한쪽 구석에, 까맣게 변해 있는 내 스마트폰이 눈이 들어왔다.
배터리가 다해 꺼져 있는 내 스마트폰이 저곳에 있다는 걸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아버님....저한테 전화하시지....”
“하하...안 그래도 오기 전에 너한테 했었는데, 통화가 안 되더라....”
“어머...죄송해요. 백 속에 있어서 몰랐나 봐요....”
거실 테이블에 방금 서연씨가 내려온 캡슐커피 네 잔이 올려져 있었다.
나리는 유니폼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 러그가 깔려 있는 거실 위에 무릎을 가지런히 놓고 앉아 있었다.
“어디.....아픈덴 없고?”
조금 어색한 분위기 속에 아버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네....괜찮아요.”
“너 본지도 좀 되고 해서 지나가는 길에 와봤어.”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는 아버지의 표정과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게 무척조심스러웠다.
“그래. 나리는 이제 여기 공항에서 일한다고?”
“네. 당분간 그럴 거 같아요.”
“잘됐다. 오래 비행하는 거.....여자들한테 안 좋다고 하니까....
그리고 나리야! 고맙다.
일한다고 바쁠 건데......루아.....챙겨줘서....”
“아니에요.아버님......”
아버지는 내게 무슨 할 말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커피를 마시며, 내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나리와 계속일상적인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반면, 나리와 비슷한 자세로 러그 위에 앉아 있는 서연씨는 시선을 내리깔고, 조용히 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계속 이어지는 대화의 주제에 완전히 벗어나 있는 나는 계속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너...여기서 계속 지낼 거니?”
“네?”
갑자기 나를 향한 아버지의 물음에 계속 딴짓을 하던 걸 들킨 것처럼 깜짝 놀랐다.
“너 할머니집에 안 들어갈래?
할머니도 혼자 적적하고.......너 언제 오냐고 계속 찾고....”
사실 생각해보니. 내가 이 집에 있든지, 아니면 할머니가 있는 본가에 들어가든지.....내겐 별 상관이 없었다.
나는 할머니를 좋아한다.
아마도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와 완전히 연이 끊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고집부리지 말고.....생각 좀 해봐.
여기 너 혼자 지내는 거.....신경쓰이니까....”
아버지는 ‘신경쓰인다’ 라는 말로 대신했지만, 그 본 의미가 ‘걱정된다’ 였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선택할수 있는 그 질문을 던져두곤 더이상 묻지 않았다.
평상시와는 조금 다른 아버지의 그 모습에 내 마음도 편치가 않았다.
아버지는 조만간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말을 남기고 현관을 빠져나갔다.
현관에서 웃으며 아버지를 배웅하던 나리가 그제서야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답답했을 승무원 유니폼을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샤워를 하러 욕실로 갔다.
창가로가 베란다 문을 열어 놓고 천정을 올려다봤다.
내가 집에 왔을 때. 아버지가 그랬던 거처럼....
갑자기 목이 따끔거려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불이 꺼진 베란다로 들어가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거실문을 닫았다.
담배에 불을 붙이던 라이터가 그곳을 환하게 한번 밝혔다가 꺼졌다.
가로등불에 전체가 노랗게 변해 있는 강변도로가 너무나 고요해 보였다.
[처음....오빠가 먼저 말 걸어준 거.....처음이야.....]
차에서 나리가 했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커다란 가로수 잎사귀에 가려져 있는 도로에 반짝이는 아버지 차가 보였다.
아버지가 현관을 빠져나간 지, 10분은 족히 지났을 시간인데, 아직 출발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강변으로 이어져 있는 계단을 두사람이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아버지와 서연씨였다.
아마도 강변으로 내려가 잠깐 산책을 하고 다시 계단을 올라는 모양이었다.
아버지 옆에서 계단을 올라오던 서연씨가 아버지에게 깊게 팔짱을 꼈다.
그러자 계단을 올라오던 두사람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버지의 얼굴이 서연씨 쪽으로 향해 있었다.
어울리지않는 그 둘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참 다정해 보였다.
서연씨가 아버지에게 계속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서연씨를 보며 웃고 있는 거 같았다.
아버지가 몸을 돌려 서연씨를 살짝 안았다.
서연씨는 그렇게 안겨 아버지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서연씨에게 짧은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잠시 떨어져 있던 두 얼굴이 다시 포개어졌다.
비스듬히 겹쳐 있던 두 얼굴이 한동안 떨어지지가 않았다.
아버지의 한 손이 서연씨의 타이트한 스커트, 엉덩이 바로 위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아버지와 서연씨는 사람들의 시선이 머물지 않는 그 계단에 멈춰 서서 진한 키스를 하고 있었다.
창가 책상에앉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자정이 다가오는 시간이었지만, 나리는 소파에 앉아 자신의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마 내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이따금씩 노트북을 두드리는 그 소리조차 죽이려 노력하는 거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지났을까.
정신없이 작업을 하다 다시 소파를 봤을 땐, 나리가 소파 위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노트북을 끄고, 소파 곁에 앉아 깊게 잠들어 있는 나리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화사하게 빛이 나던 나리의 얼굴엔.....
피곤과 깊은 근심들이 숨김없이 모두 드러나 있었다.
자신의 속마음을 완전히 드러내 놓은 채, 색색거리며 자는 나리의 핼쑥한 얼굴이 왠지 모르게 안되 보였다.
소파에 누워있던 나리를 조심스레 안아 올려 침실로 들어갔다.
축 처져 있는 나리의 몸을 침대 위에 살짝 올려놓을 때까지도 나리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너무나 허전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눈이 천천히 열렸다.
항상 따스하던 침대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침대위엔 나 혼자 덩그러니 누워있었다.
나와 살을 맞대 놓고, 색색거리며 잠들어 있던 나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있는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 없었다.
침대 곁에 놓여 있던 물컵이 바짝 말라 있었다.
목이 말라거실로 나갔다.
노란 가로등 불빛만이 창가 바로 앞, 거실을 환하게 밝혀 놓고 있었다.
하지만 나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방문 앞에 멈춰서 주위를 둘러봤다.
어디선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창가 쪽이었다.
TV를 지나 창가로 가자 그 소리가 조금씩 선명해 졌다.
베란다 였다.
베란다 문은 꼭 닫혀 있었지만, 속삭이는 듯한 그 소리가 분명 베란다 쪽에서 들려왔다.
“............싫다고 했잖아.”
나리의 목소리였다.
“더이상 연락하지 말라고...그날....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제발 정신 차려......이제 너 볼일 없어.......그러니까 연락하지 마.....”
“나 결혼할 거야.....이 사람하고....”
“이게 너 하고 마지막 통화야. 더이상 메시지도 전화도 하지 마......”
굳게 닫혀진 베란다 문 앞에서 서서, 거실에 흘러나오는 나리의 작은 소리를 나는 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