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The Garden of Paradise (14)
아버지가 룸에 들어서자, 지난번 맡았던 그 무겁고 진한 향기가 뒤이어 따라 들어왔다.
혜린이 얼굴을 잠깐 보던 아버지가 안쪽으로 들어가 검은 정상 수트를 벗으려 하자, 혜린이가 서둘러 뒤따라갔다.
이제 막 어깨에서 풀려나오는 수트 윗깃을 뒤에서혜린이가 두 손으로 살짝 잡았다.
“어....고마워요.”
수트를 벗는 걸 도와주려는 혜린이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아버지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아버지 몸에서 벗겨진 수트를 혜린이가 조심스레 받아 들어, 어깨를 푹신하게 받칠 수 있는 옷걸이에 걸어 놓곤 다시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아버지가 자리에 앉자, 나와 혜린이도 동시에 푹신한 방석이 깔린 바닥에 앉았다.
“본부장님 오셨어요?오늘은 음식은 어떻게 드릴까요?”
문이 있는 뒤에서 나긋나긋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뭐가 괜찮지?
아니다....그냥 너무 헤비한거 말고 알아서 줘요.
참...술도 몇 병 좀 주고...”
“네! 알겠어요...호호호”
조금 이상한게 있었다.
‘본부장?’
주문을 받으러 온 여자가 왜 아버지를본부장이라고 부르는지 궁금했다.
“승진....하셨어요?”
내 물음에 아버지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좀 됐다. 자식 하나 있는게.......아휴.....”
돌아오는 깊은 한 숨소리에 쓸 때 없이 괜히 물어 본 거 같았다.
옆을 잠깐 돌아보니, 혜린이가 흐트러짐 없이 방석위에 무릎을 곱게 모아 앉아,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빛나는 하얀 얼굴엔 표시가 날 듯, 말 듯한 은은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말없이 나와 혜린이를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그 시선이 나보다는 혜린이의 얼굴에 머물러있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 보였다.
“참.....대책 없다. 너희들....”
답답한 침묵의 무거움을 단번에 깨부수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요즘 둘이 같이 지낸다고?”
“네. 같이 살아요. 혜린씨 집에서....”
내 목소리 또한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럼에도 나는 상관이 없었다.
“그쪽은.....나이가 어떻게 돼요?”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혜린이의 몸이 살짝 떨리는게 그대로 느껴졌다.
“네. 스물아홉입니다.”
“나는.....참 이해가안 된다. 너희가 철없는 대학생들이야? 지금 이게 뭐하는 거야?
그러다가....애라도 덜컥 생기면......어쩌려고? 피임은 제대로 하니?”
“아버지!!”
내가 데리고 온.....
내가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더군다나 정식으로 처음 보는 여자 앞에서 피임을 하는지묻는 아버지.......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쪽 부모님은알아요?”
“오늘 아버님 뵙고, 정식으로 인사드리고.....저희 부모님께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님...말씀 편하게 하세요.”
하지만....뜻밖에도 혜린이의 목소리는 너무나차분했다.
“저번에 봤던 그 애는? 그 애는......”
“아버님....제 딸이에요...6살이예요.”
혜린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아버지의 얼굴이 뻘겋게 변해 갔다.
지금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아마도 혜린이의 너무나 차분하고 당당하기까지한 그 모습에 조금 당황해 하는 거 같았다.
“결혼은 몇 살에 했는데.....벌써 딸이 있어요?”
“아버지! 그만 좀 하세요.
밥 먹자고 사람 불러 놓고, 보자마자 이러는 법이 어딨어요?”
그냥 듣고 있으면 상황이 더 나빠질 거 같아, 서둘러 아버지의 말을 막아 세웠다.
혜린이가 갑자기 내 손을 살짝 잡았다.
“자기야.....어머! 죄송합니다.”
혜린이가 내 손을 잡고 내게 말을 하려다가, 아버지 앞에서 서로를 부르는 호칭으론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아버지에게 곧바로 사과를 했다.
“루아씨. 잠깐만.....그냥 있어요.
아버님 말씀 듣고 싶어요.”
아버지는 그저 기가 차다는 얼굴로 그냥 우리를 보고 있었다.
“조금 일찍.....애를 가졌어요.”
“그럼 애 아빠는? 이혼했어요?”
혜린이는 답이 없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이 질문에......하루가 꼬박 넘어간다고 해도.......혜린이는 절대 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별했어요. 사별......엄마처럼....”
“내가 지금 너 하고 이야기 하는 거 아니잖아.....너 가만히 있어!”
아버지의 목소리 톤이 지금 자신의 얼굴처럼 조금 상기돼 있었다.
“학력이 어떻게 돼요? 대학은 나왔어요?”
참....기가 찼다.
사람을 멸시하는 듯한 저 눈빛....
아버지가 저녁을 먹자고 했을 때.....혹시나 하는 작은 희망을 품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더불어 혜린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내 마음을 완전히 갈갈이 찢어 놓기 위해 아버지는 작정하고 나온 거 같았다.
“네. 서울대 영어영문 전공했습니다.
2학년 재학중에......아이를 가져서 휴학을 하고, 여기 본가로 내려왔습니다.
출산을 하고 2년후에,
아이 때문에 다시 서울로 올라갈 형편이 안돼서, 국립대 학점 이수 프로그램으로 여기서 나머지 학점을 이수하고 졸업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혜린이 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뜻밖이었다.
혜린이가 어떤 대학을 다녔는지 무슨 전공을 했는지 궁금할 때도 있었지만, 불행으로 얼룩졌던 대학생활을 다시 떠올릴 혜린이가 걱정되어 일부러묻지 않았던 나였다.
아마도 아버지는 혜린이가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할 정로 문란하고, 자기 관리와 생활 환경이 엉망인 여자일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혜린이를 보는 아버지의 얼굴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이해를 할 수 없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아버지 후배네요. 대학 후배.....”
내 말에도 아버지의 시선은 그대로 혜린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럼....지금은.....뭐하는데?”
좀전과는 달리 아버지의 말이 낮아졌다.
“예전에.....모델활동을 좀 하다가 지금은......쉬고 있습니다.”
“모...모델?”
“네. 광고나 패션 쪽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대답을 한 후, 혜린이는 말없이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룸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어지는 정적이 답답해질 때쯤 문이 열렸다.
테이블엔 온기를 그대로 품고 있는 음식들이 하나 둘 씩 놓였다. 그리고 소주와 맥주 몇 병도 한쪽에 자릴 차지하고 있었다.
“일단 먹자....”
아버지가 젓가락을 들었다.
“혜린씨, 재킷 벗어요....편하게 먹어요.”
“아니....나는 괜찮아요....”
무슨 중요한 면접을 보는 것같이 투피스 정장 재킷을 입고 있는 혜린이가 불편해 보였다.
혜린이가 아버지 눈치를 보고 있었다.
“편하게 먹어....편하게.....”
아버지 말에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 놓곤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그다지 튀지 않는 평범하고 무난한 스타일의 하얀 블라우스였지만, 블라우스를 바짝 밀어내고 있는 혜린이의 가슴 때문인지 옷이 조금 야해 보였다.
잔뜩 긴장을 한 탓인지, 블라우스 위로 작은 유두의 흔적이 희미하게 표시 나는 거 같았다.
아버지가 이제 막 다시 자리에 앉는 혜린이를 보다 서둘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음식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더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스스로 소주를 맥주잔에 반정도 따라 몇 번 마셨다.
“아버님...제가 한잔 드릴게요....”
혜린이가 무릎을 꿇은 채 몸을 세워, 소주병을 두 손으로 들고 아버지의 빈 잔으로 가져갔다.
소주를 빈 잔에 따를 때, 혜린이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너....소주마시니?”
“네!”
아버지가 소주병을 들자, 혜린이가 소주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혜린이가 고개를 반대로 돌려 아버지가 따라준 소주를 천천히 마시고, 빈 잔을 다시 테이블에 조용히 올려놓았다.
나도 소주가 무척 땡겼지만, 차를 가지고 왔기에 맥주 한 모금만 마시곤 그대로 두고 있었다.
“너희들도 알겠지만,이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야....”
음식을 먹으며 소주를 한 병 정도 마신 아버지가 다시 말을 시작하려는 거 같았다.
“너희들 정말 그렇게 지내다가 애라도 생기면 어쩔 거야?”
“결혼할 겁니다....”
“임마! 강루아.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
니가 책임질 수 있어?
그리고 유혜린!”
“네?”
갑자기 아버지가 이름을 부르자 혜린이가 깜짝 놀랐다.
“너는 지금 이게 가능 할 거 같아?
너는 그 어린 나이에 결혼도 한번 했었고....그리고 6살짜리 딸이 있어.
니가 만약에 내 입장이라면.....부모라면.....이게 가능할거 같아?”
아버지를 보던 혜린이의 얼굴이 조금씩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버지. 그만 하세요.
그냥 저녁 한끼 먹으러 나온 거예요.
보기 불편합니다.
이 사람한테 더이상 그런 이야기 하지 마세요.”
“결혼이 너 혼자 하는 거니?
부모고....가족이고 다 필요 없어?
만약 니 엄마가 살아 있다면, 지금 이런 널 이해해 줄 거 같아?
내가 장담하는데. 너희 엄마 쓰러질 거야.
내가 둘이 만나는거까지 뭐라하고 할 생각은 없어. 내가 뭐하고 한다고 니가 들을 놈도 아니고.....”
“저는....그것 만이라도 너무 감사해요.”
혜린이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루아씨하고 이렇게 만날 수만 있다면 괜찮아요.
만약....루아씨가....저를 떠난다고 해도 언제든지 그냥 놓아 줄 거예요.
아버님......진심이에요....”
아버지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는 혜린이를 보며 가득 들어찬 소주를 마셨다.
차가 빼곡히 서 있는 주차장에, 얼마 전에 뽑은 듯한 검은 세단 한 대가 후진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기사가 내려 뒷문을 열어 주자 아버지가 차로 향했다.
“너희들 어디로 가니? 태워줘?”
“아니요, 차 가지고 왔어요.”
“그래...조심해서 들어가라.”
“아버님! 조심해서 가세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혜린이가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리고 뒤돌아보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으며말했다.
몇병의 소주로 달아 올라 있는 아버지의 굳은 얼굴이 혜린이를 향해 있었다.
혜린이는 아버지가 올라탄 차가 떠날 때까지 그곳에 멈춰서 있었다.
“가자....”
혜린이 손을 꼭 잡았다.
항상 따스했던 손이.......땀으로완전히 젖어, 얼음장같이 한기가 돌 정도였다.
“미안해....마음 많이 상했지?”
“아니....”
나를 조용히 따라오던 혜린이의 발검음이 멈춰 섰다.
“루아씨.....나 좀......안아 줄래?”
마당 앞 주차장에 사람들이 여럿 보였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혜린이를 꼭 끌어 않았다.
싸늘하게 식어 있는 혜린이의 몸을 내 온기로 따스하게 데워주고 싶었다.
혜린이의 꼭 안고 있던 내 손이 조금씩 흔들렸다.
“사랑해.......미안해......흐흑.
루아씨......미안해.....너무 미안해....흐흑.
나 때문에......어어엉엉!!!!”
그 넓은 주자장에....
혜린이의 서글픈 울음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