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The Garden of Paradise (4)
나리의 귀에 살짝 닿아 있던 스마트폰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진한 와인빛 푸크시아 컬러로 빤짝이는 나리의 입술 끝이, 보란 듯 천천히 위쪽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나리의 짙은 눈이 나를 향해 있었다.
“어머! 오빠 미안해요. 급한 전화라서요....”
바로 내 앞에서.....남자와 은밀한 말을 주고받고, 시시덕거리며 통화를 한 게 급한 전화였다는 나리...
지금 내 앞에 보여지는 나리의 모든 행동들이.
내 마음을 뒤집어 놓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더이상 내가 알던 그 나리는 이미 사라져버렸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오빠. 우리 한잔해요”
나리가 새로 오픈한 화이트와인을 들고 내게 바짝 다가왔다.
또다시 그 향기가 내 주위에 진동했다.
이 향기는 마치,
이렇게 달콤하고 관능적인 향기가 묻어 있는 뽀얀 내 몸, 내 몸 구석구석을 빨아 달라는 그런 느낌.
나리에게서 진하게 풍겨오는 향기는 바로 그런 향이었다.
아버지와 있을 때먹은 음식이 체했는지, 가슴이 꽉 막혀 있었다.
방금 나리가 따라준 화이트 와인을 입속에 가득 담아 넣었다.
“오빠 얼굴은보기 좋다.....근데 얼굴에 살은 좀 빠졌네?”
나리가 옆에 앉아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요즘 피곤해요? 잠을 잘 못 자요?”
“너도 좋아 보이네.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다.”
“왜요? 내가 오빠하고 그렇게 되고 나서...걱정했어요?”
“아니.”
“걱정 마요. 나 너무 잘 지내고 있어요. 사람들 만나고 그렇게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나리야...”
“네?”
“앞으로 우리.....이런 자리는 없었으면 좋겠다.”
“왜요? 불편해요?”
나리의 반짝이는 얼굴이 내게 더 바짝 다가와 있었다.
“오빠는.....불편하구나.....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물론 내가.....실수를 했지만.
우리 그냥 편하게 생각해요.
우리 사귈 때, 2년 동안 서로 너무 좋았잖아요.
나는 그냥 이렇게 편하게 지내는 것도 괜찮은 거 같은데....
오빠는 다른 여자 만나서 잘 지내고 있고.....나도 그렇고.
그냥 오빠 동생처럼 그렇게 편하게 지내요 우리.”
생글거리며 나를 보는 나리의 얼굴에 소름이 슬쩍 돋아났다.
나리와 함께 있는 답답한 이 공간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테이블위엔 나리가 먹던 메인디쉬와 새로 들어온 몇 가지가 아직 한가득 남아 있었다.
“식사마저 해.....”
하얀 접시에 담긴 그 음식이 어느 정도 없어질 때쯤, 나는 이곳을 떠나려 마음먹었다.
[언니. 왜 아직 안 와요?]
잠시 조용하던 룸에 나리에 목소리가 들렸다.
[네. 거기 맞아요.]
[다 왔구나....거기 3층에 룸이에요]
[네. 알겠어요]
나리가 전화를 끊었다.
“누...누구야?”
“아...지민언니.....언니 오늘 여기 비행이라 조금 전에 도착했거든요.”
“그럼 둘이 따로 보지 왜 여기로 불러?”
“오빠. 오늘 왜 이렇게 예민해요?
지민언니 모르는 사람도 아니면서,
몇 번 같이 잠까지 잔 사이면서....”
나리가 잔에 반쯤 남아 있던 화이트 와인을 천천히 마시고 있었다.
몇 분도 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어머! 루아씨 오랜만이에요. 나리야 안녕.....”
“언니! 왜 이렇게 늦었어요.”
“비 때문에 연착, 숙소에 들렸다가 바로 온 거야.”
지민씨가 룸으로 들어와, 아버지가 앉아 있던 맞은편에 자릴 잡고 앉았다.
비행이 끝나고 옷만 갈아 있고 왔는지, 지민씨의 머리가 비행기 안에서처럼 곱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지민씨가 나와 나리를 번갈아 가며 잠시 보고 있었다. 그 눈빛엔 수많은 궁금증들이 담겨 있었다.
“언니. 여기 분위기 좋죠?”
“응. 예쁘네.....여기 유명한 데야?
밑에 사람 엄청 많아...”
“아버님이 음식을 너무 많이 시켜주고 가셨어요.....언니 아직 저녁 전이죠? 같이 먹어요.....”
“아버님?”
지민씨가 나리에게 물으며,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다.
“아.....오빠 아버님.....”
“둘이.....다시 만나는 거야?”
“아니요. 그냥 저녁 자리예요.”
“아......”
지민씨는 나리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민씨 얼굴을 보고 있자니, 비엔티안에서의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사실 지민씨에겐그곳에서 너무 고마운 일들이 많았다. 어쩌면 우연히 이렇게라도 만나서 인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았다.
테이블에 있던 음식들이 조금씩 줄어 들어갔다.
누가 그렇게 찾아 대는지 나리의스마트폰은 계속 울려 댔다.
“어! 오빠 나 잠깐만.....”
나리가 테이블 위에 있던 스마트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보세요? 네...오빠....]
[네 저는 도착했어요.....오빠는요?]
[지금 나리타에요?]
나리가 문을 빠져나가자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지민씨가 조금 심각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참 지민씨. 그때 너무 고마웠어요. 지민씨 아니었으면.......”
“뭘요. 그 여자분은 괜찮아요?
“네. 덕분에....그때 지민씨가 알려준 병원 갔었고......지금은 괜찮아요.”
“그렇구나....참....그 애는요? 많이 놀랬던데....”
“네. 아름이도 괜찮아요”
굳이 이름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름이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아....그애 너무 예뻤는데.....”
지민씨의 말에 아름이 얼굴이 내 머릿속에가득 찼다.
“지민씨. 미안한데.....나리하고 마저 식사해요. 저 일이 좀 있어서.....먼저 일어날게요....”
“루아씨.”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차분하게 깔린 목소리로 지민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네?”
“오늘은 좀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
“네? 그 게 무슨.....”
“나....쟤....나리 불안해요......요즘 좀 이상하단 말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죠? 무슨 일 있었어요?”
지민씨가곤란한 표정으로 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게.....나리하고 계속 비행하던 선배 언니들이 자꾸 전화 와서 나리 요즘 무슨 일 있는지 물어요.
그리고.....요즘 나리 소문도 좀....그렇고......”
“소문요? 무슨....”
“아...그게.....아니에요
오늘은 좀 같이 있어주면 좋겠어요. 루아씨가....”
심각한 지민씨의 표정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지민씨....”
무슨 일인지 지민씨에게 물으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미안해요. 전화받고 왔어요......분위기가 왜 이래요? 둘이 왜 이렇게 심각해요?”
나는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아, 잔에 남아 있던 투명한 와인을 한꺼번에 모두 들이켰다.
룸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두 여자의 깔깔대는 소리로 가득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완전히 두개의 생각으로 양립되어 있었다.
첫째는 어쩌면 지금도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혜린이와 아름이의 얼굴.
그리고 두 번째는 조금 전 지민씨가 말했던 나리에 관한 그 소문이었다.
“아 참! 언니. 은우씨가 언니 남친 있냐고 묻던데요?”
“어...어?”
나리의 물음에 지민씨가 당황해하며 흘깃 나를 봤다.
“저번에 우리 이태원에서 같이 봤잖아요.
좀 전에 은우씨 전화 왔었는데,
언니하고 같이 있다고 하니까 물어보래요.”
“어...왜?”
“은우씨 선배 중에 괜찮은 사람 있나 봐요. 언니한테 소개해주고 싶대요.”
나리는 연거푸 마신 와인 때문인지 붉게 달아올라버린 얼굴로 지민씨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민씨는 아무런 대답 없이 조용히 와인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나리씨? 룸에 내려갈래요? 거긴 여기보다 야경더 멋진데.....]
[룸에요? 왜 자꾸 절, 룸에 데리고가려고 하는 거죠?]
[나리씨에게 더 좋은 곳, 보여주고 싶어서요]
[정말 그것뿐이에요?]
[하하하. 당연하죠. 친구 하기로 했잖아요. 그리고 오늘은 우리 술도 안 취했잖아요]
[후훗......그래요 가봐요....]
나를 보는 지민씨 눈빛에, 잊고 있던 그날이 떠올랐다.
나리가 깊게 잠든 사이.......몰래 거실로 나와 나리의 스마트폰을 훔쳐보던 그날.
룸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2년간의 그 찬란했던 우리의 만남을 결국 종식시켜 버린,
결정적인 이유였던 그 남자의 이름을, 이제 나리는 아무렇지 않게 지금 내 앞에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괜찮았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먹고 있어요. 전화 좀 하고 올게요”
나는 룸을 빠져나와 흡연실 표지가 있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엔 깔끔한 정장을입은 몇몇 남여 무리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옷차림을 보니 아마도 어느 정도 괜찮은 수준의 회사, 팀 회식 같아 보였다.
여전히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져 내렸다.
진한 담배 연기가 검은 하늘 위로 천천히 퍼져 나갔다.
시간을 보니 벌써 밤 9시가 다 되어 갔다.
여기에 오기 전엔, 조금 늦더라도 혜린이에게 가려고 마음먹었지만, 이렇게 술까지 마셔버려 그건 어려울 거 같았다.
전화를 하려다 요즘 계속 일찍 잠자리에 드는 혜린이의 얼굴이 떠올라 그만두었다.
옷에 배여 있던 담배 냄새가 어느 정도 빠질 때까지 느긋하게 있다가 다시 3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아래 틈 사이로 나리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도 안쪽에 있는 화장실에 가는 듯했다.
나리와 마주치기 싫어, 층과 층을 이어 놓고 있는 계단 사이에 멈춰 섰다.
“저기....강동우 부지점장님 손님이시죠?”
갑자기 아버지 이름이 들려와 계단 사이 틈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반짝이는 무엇인가로 머리를 잘 정리해 놓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아.....네.....”
뒤이어 안쪽으로 사라졌던 나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음식은 괜찮으세요?
“네. 맛있게 먹고 있어요. 근데 누구세요?”
“하하....여기 사장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부지점장님 저의 단골이시라서.......증권회사 직원이세요?”
“아....아니에요”
“술 좀 드셨나 보네요? 와인 세 병이나 들어갔던데....”
“어머!제 얼굴 빨개요?”
“하하하.....아니요 아니요. 너무 보기 좋습니다.
사실 제가 손님 우리 레스토랑 들어오실 때부터 봤는데요...
지금까지 여기서 봤던 여자분들 중에......손님이....가장 예쁩니다.”
“네? 호호호.....”
기분 좋은 나리의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저기...이거.....”
남자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나리의 모습이 사라진 쪽으로 내밀고 있었다.
“우리 따로 한번 볼래요?”
“네?”
“너무 마음에 들어서요. 따로 한번 뵙고 싶은데....”
“하아.....”
잠시 후,
남자가 내밀고 있는 명함이 진한 매니큐어가 발린 가느다란 손에 건네 졌다.
“실례지만 무슨 일 하시는 분이세요?”
“항공사 다녀요.”
“스튜어디스요?”
“네.”
“이야....내가 그럴 줄 알았어요. 이미지가 딱 그쪽이더라고요.”
“호호호....”
“여기 있다보면.....수많은 여자 손님들 보는데.......그 중에서도 느낌이 딱 오는 분이 있어요.”
“무슨 느낌요?”
“따로 한 번, 만 날수 있을 거 같은.....
조용하게 술 한잔할 수 있을 거 같은 그런느낌....”
잠시 대화가 끊기자 주위가 조용해졌다.
남자의 시선이 계속 한쪽에머물러 있었다.
“명함 하나 받을 수 있을까요?”
반짝이는 매니큐어를 바른 엄지손가락 아래 하얀 명함이 들려 있었다.
남자가 그걸 받아들어 확인을 했다.
“참! 저희 자리 옮길 건데요. 근처에 분위기 좋은 Bar 같은 곳이 있나요?”
“여기 맞은편도로가에 새 건물이 하나 있는데요. 거기 6층이 분위기 좋아요.
제가 아는데 라서 전화해 놓을게요 그리로 가세요.”
“네....고맙습니다....그럼.....”
또각거리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나리의 명함을 들고 있는 남자가 안쪽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엔 진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