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0화 〉The Garden of Paradise (3) (50/102)



〈 50화 〉The Garden of Paradise (3)

“으으으.....으아.......”

힘든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온몸이 녹초가 된 것처럼 녹아내려, 내 몸이 소파 위에 들러붙어 있었다.

꿈자리가 너무나뒤숭숭했다.

하지만 무슨 꿈인지 기억을 떠올려봐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새벽에 작업을 시작해아침이 밝아올 때쯤, 소파에 쓰러져 잠들어 버린 것 같았다.

“으아아....”

기지개를 쭉 꼈다.

뭉쳐있던 근육과 뼈가 풀리며 우두둑거리는 소리가연이어 들려왔다.



오후 3시......

스마트폰엔 혜린이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흘러나왔다.

어젯밤 늦게 혜린이 집을 떠나 이곳으로 돌아왔지만, 벌써 그 얼굴이 아른거렸다.

항상 생글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혜린이와....아름이의 얼굴이.....



한시라도 빨리 그 얼굴을 보기 위해,지금 바로 출발해 혜린이 집에서 샤워를 해야겠다 결심했다.

소파에서 일어나는 순간.


스마트폰이 울려 댔다.

아버지였다.


[네....아버지....]

[응. 집에 있니?]

[아....네....]


[너 오늘 저녁에 시간 좀 있어?]

[네? 오늘요?]

[그래. 오랜만에 저녁이나 먹자]

내 몸은 다시 소파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귀에다 대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갑자기.....무슨 일 있어요?]

[아니. 나도 요즘 계속 바빠서 오늘 시간이 괜찮네. 너 얼굴 본지도  됐고 해서 저녁이나 먹자고.]

[아...네 알겠습니다]

[그래. 시간하고 장소는 있다가 문자보내줄게]

갑자기 연락이 와서 오늘 저녁에 보자고 하는 아버지가 좀 이상했다.

내게 무슨  말이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소파에 계속앉아 있다가 혜린이의 얼굴이 떠올라 다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오빠? 왜  와요?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

혀 짧은, 귀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아름이니? 엄마는 어디 갔어?]

[아니요. 저....혜린인데요?]

[어? 하하하하......목소리가 왜 그래?]


[계속 기다려도 안 오고.....전화도 안 받고.....새벽에 작업했어요?]

[응. 좀 전에 일어났어.]

[빨리 와.....여보....보고싶어......응? 응?]


애교가 잔뜩 섞여 있는 혜린이의 말에, 아버지와저녁 약속을 잡아 버린 게 벌써 후회가 되었다.

[아....어떡하지.....]

[왜요? 무슨 일 있어?]

[거기 바로 가려고 했는데.....아버지 전화 와서 저녁에 보자고 하시네....]

[아......나 괜찮아...아버님 만나.......]

혜린이가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대신 내일 일찍 오세요....]

[하하....저녁에 보고 다시 연락할게...]

[네.여보!]

서로 존대를 하던 우리의 대화가 언젠가부터이렇게 편하게 변해 있었다.


확실친 않지만, 그날.....혜린이가 내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했던 그날 이후부터 이렇게 변한 거 같았다.

우리는 그날 이후부터 피임을 하지 않았다.

내 머릿속엔 천국의 정원 같은 언덕 위의 하얀  집에서 나와 혜린이, 아름이.....그리고 또 다른 작은 아기 천사가 함께하는 모습이 계속 그려졌다.














집에서 차를 몰고 출발을 하자마자,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와이퍼가 유리창의 빗방울을 닦으며 지나갈 때마다 혜린이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오랜만에 내리는 이 비가,
내 마음을 더욱 깊은 아련함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도심에 있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화려한 3층짜리 레스토랑이었다.

아버지 연배보단 좀  젊은 사람들이 찾아올 만한 그런 곳이었다.

아버지 이름을 말하자 직원이 3층으로 안내를했다.

오픈 테이블인 1층과는 달리 3층은 전체가 룸이었다.

“어. 왔구나.....”

“네 아버지....비 와서 차가  막히네요....”

하얀 천이 깔려 있는 테이블 위엔 방금 내온 듯한 음식과 오픈한 화이트와인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 바로 옆에 비서인 이서연이 다소곳이앉아 있었다.



“너 서연이 알지?”

“아....네......”

“이 친구도 요즘 고생 많아서 같이 먹자고 했는데....괜찮지?”

“아...네.....”

서연씨가 내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예상치 못한 이 분위기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정식으로 저 여자를 내게 소개 시켜주고, 결혼을 할 거라는 말도 안되는 그런 상상도 잠깐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3층 창밖에 펼쳐진 노란 빛으로 물들어 있는 호수의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다음엔 혜린이와 아름이를  여기에 데리고 와야겠다고 생각이들 정도로......그 풍경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아버지, 무슨 일 있어요? 갑자기....”

“일은 무슨.......넌 여기  봤어?”

“아니요.”

“여기 어때? 우리 사무실 직원들 회식할 때 가끔 오는데......분위기 괜찮치?”

“네....좋네요....”

“그래 우선 좀 먹자.....”


분위기가 무척 불편했다.

더군다나 이 자리에 서연씨가 함께 동석해 있다는 사실이 그 불편함을더욱 가중시키고 있었다.



“너 요즘 어떻게 지내? 별일 없어?”

한동안 조용히 음식을 드시던 아버지가 물었다.

“네....뭐 그냥 그렇게 지내고 있어요.”

하지만 아버지의 눈빛이 평상시와는 다르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화이트와인이  이상 줄어들었을 때쯤.....

아버지가 나이프와 포크를 접시에 살짝 걸쳐 놓았다.



“흐으음.....”

아버지의 헛기침......이제 갑작스런 오늘의 이 만남을 내게 설명하려는듯 보였다.

아버지 옆에 앉아 있는 서연씨는 시선을 조용히 내리깔고 계속 음식을 먹고 있었다.




“너희들 헤어졌다면서.....”

아버지의  말에, 내가 들고 있던 포크가 살짝 미끄러져 하얀 접시 위를 한번 두드렸다.



“한 2주 전에.....나리가 연락도 없이 회사로 찾아왔더구나. 내가  시계, 그거 돌려주려고 왔다고 하던데.....”

나는 아무런 말도  수가 없었다.



“그날 나리한테 이야기 다 들었어. 나리가 실수를 했던데.....”

나리는 아버지를 찾아가, 우리가  이렇게 된 건지 말을 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어디까지 이야길 한 건지는 알  없었다.


“나리 이야기 듣다가.....내가 좀 심하게 혼냈어. 그러니까 애가 얼마나 울던지....”

내 기대와는 달리, 결국 나리가 모든 것을 말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이런 개인적이고 가족들끼리 조차도 쉽게꺼낼  없는 이런 이야기들을........서연씨가 있는 자리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말을 하고 있는 아버지였다.

“루아야.....나리가  잘못을 했어.

나도나리가 그랬다는 게 충격이었다.
나는 나리를 절대 그렇게 안 봤거든.

하지만.....모든 사람은 완벽하지 않아.

살다 보면 의도치 않게 실수로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거야.

나리는 니가 용서해주면.....너하고 계속 만나고싶다고 하던데.......

니가 나리를 좀 이해해 줄 수는 없겠니?”

머리가 속이 하얘졌다.

나는 지금 내 귀에 들려오는 아버지의 저 소리가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버지가지금 내 앞에서......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절대......용서할 없었다.

“아버지. 아버지니까......그런 일이 이해가 되는 거예요.

아버지는 평생.......그렇게 살아왔으니까.....아무렇지 않게 그게 이해가 되는 거라고요.”

간신히 격앙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내 목소리가 한없이 떨렸다.

아버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래. 내가 니 엄마한테,  못한 건 맞아.

근데 말이야........니가 옆에서 보는 거 하고.....당사자들.....부부는 또 틀려......니가 모르는  있어.

그러니까 함부로 말하지 말아!”


아버지의 목소리 또한 조금  나와 같이 조금씩 떨렸다.

일시에 룸이 고요해 졌다.

자꾸 혜린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어머! 아버님. 죄송해요. 많이 늦었죠? 오늘 연착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에서 들려오던 여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끊겼다.

“그래....나리왔어?”

“네...네...아버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서연씨의 커다란 눈이 내 뒤를 향해 있었다.


그때서야 뒤를 돌아봤다.

문 앞에 한 여자가  있었다.
나리였다. 아니 나리인  같았다.

하지만 내가 알던 나리가 맞는지......완전히 다른 여자가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리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있었다.

“저녁 아직 안 먹었지?”

“네....”


“뭐해....어서 앉아.....”


나리가 비어 있던 내 옆자리 의자에 앉았다.

진한 향기가 퍼졌다.

처음 맡아 보는 너무나 짙은 여자의 향기였다.

‘이거였구나........아버지가 오늘 갑자기 나를 불러낸 이유가......바로 이거였구나........’

그때서야 오늘 이 만남의 목적이 명백해지는 순간이었다.

“너 내일부터 휴가라고 했지?”

“네. 아버님......다음 주까지 여기 있어요....”

“그래? 잘됐네......너근데 얼굴에 살 좀 빠졌다?”

“하아......네.....”




새로 주문한 메인디쉬가 나리 앞에 놓여졌다.






서먹한 분위에서 저녁 식사가 계속 이어졌다.


아버지 옆에 앉아 있는 서연씨의 얼굴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아마  여자도 나리가 여기에 올 거라는 걸 전혀 몰랐던 눈치였다.



“아....좀 늦었다. 서연아 지점장 지금시내에 있지?”

“네. 이번에 IPO 들어간 회사 대표님하고 계세요”

“우리는 그쪽으로 가자”

“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리야.....둘이 이야기 좀 잘 해봐......나는 뒤에 일정이 있어 간다...”

“어머! 벌써요? 음.......”

애교를 잔뜩 품고 있는 그런 목소리였다.



“하하하....나리 오늘 참....예쁘다....”

“정말요? 호호호.....”




아버지와 서연씨가 룸에서 빠져나가자,나리가 호수가내려다보이는 창가로 다가갔다.

“오빠.....여기 너무 예쁘다......”

호수를내려다보고 있는 나리의 뒷모습이 보였다.



새까만가죽 미니스커트, 베이지 컬러에 검은 도트 무늬가 있는 블라우스.

스커트 아래 새하얀 다리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오빠 잘 지냈어요?”

잠시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던 나리가 돌아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리의 얼굴이 완전히  앞에 드러나 보였다

저렇게 진한 화장을 한 나리를 지금까지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때론 여신같이 우아하고......때론 요정같이 귀여웠던 모습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눈빛 또한 여자의 진한 색이 가득 들어차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나도 놀랐어요. 아버님이 저녁 먹자고 해서 왔는데.....오빠도 있는지 몰랐어요.”

“니가  아버지하고 따로 만나 밥을 먹어?”

진한 미소를 짓고 있던 나리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오빠. 우리 만난 김에.....오랜만에 저녁이나 같이 먹어요.........나 더이상 감정 상하기 싫어.”

너무나 차가운 목소리였다.



나리가화이트 와인을 스스로 잔에 채워,그걸 천천히 마셨다.



“한 2~3주 됐죠? 우리  카페에서 마지막으로  게.....”

“응”

“잘 지냈어요?”

“응. 넌?”

“나도 뭐....잘 지내고 있어요.”

당당한 말투와 행동. 그런 나리를 보고 있자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와 헤어지고 나서 나리가 흐트러지거나.....어렵게 들어간 그 항공사를 그만둬 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었다.

“그 여자분은.....잘지내요?”

나리 입에서 혜린이의 안부를 물어오자,  느낌이 너무나 이상해 바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리가 들고 온 작은 명품백에서계속 소리가 들렸다.

무시하던 나리가 결국 백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시테이블에 올려진 스마트폰은 몇 분 단위로 계속 울려 댔다.

그럴 때마다 나리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확인을 하고.......걸려오는 전화는 그대로 끊어 버렸다.

나리의 가느다란 팔목에.....

아버지가 입사 선물로 주었던, 명품 시계가 그대로 걸려있었다.


[어머! 오빠]

또 다시 울리던 스마트폰을 들고 나리가 들고 전화를 받았다.

[네. 지금 저 집에 와 있어요]

[휴가 다음 주까지.....]

[호호호.....또? 누구하고 있는데?]


[정말? 멤버가 많이 바꿨네?]

[분위기 좋아요? 오늘도 새벽까지 거기서 놀 거예요?]

[호호.....정말? 왜요?]


중간중간 남자의 작은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너무 진한 거 아니에요? 우리 몇  만났다고.....]

[그날 나 오빠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 한숨도 못 잤단 말이야....]

[호호호.....알았어요. 술 너무 많이 마시지마.....다음주에 서울에서 봐요....]

통화를 하는 내내......

진한 화장으로 화려하게 반짝이는 나리의 두 눈이 줄곧 나를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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