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Tinnitus (1)
한동안 택시 창밖으로 햇살에 반짝이는 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매일 보던 그 강이 오늘을 조금 특별해 보였다.
오랜 시간 동안 멈춤 없이 흘러내렸을 이 푸른 강도, 나름대로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런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거 같았다.
비엔티안에서 매일 마주치던 메콩강의 그것처럼...
내겐 너무나 익숙한 곳.
그리고 비엔티안에 있던 마지막 며칠 간 그렇게 그리웠던 우리 동네, 우리 집....
나는 택시에서 내려, 3층 창가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면서 가슴이 계속 두근거렸다.
술김에 발권한 항공권 한 장으로, 갑자기 떠나간 이 집.
술병과 먹다 남은 음식 따위로 엉망이 되어 있을 거실이 뻔하게 그려졌지만, 나는 어서 빨리 들어가 거실 소파에 쓰러져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현관문이 열리자 상쾌한공기가 내게 뿜어져 나왔다.
술냄새가 진동할 거라 생각했던 거와는 정반대였다.
현관 구석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슬리퍼를 신고 거실에 들어서자, 지금 이 상쾌한 공기의 출처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창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누가 일부러 환기라도 시켜 놓은 듯이....
소파 앞 유리테이블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내가 급하게 이곳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엉망진창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이곳에 머물다, 이제 막 거의 사라져버린 옅은 향기도 느껴졌다.
여자의 향기.....
백팩을 벗어 놓고, 창가 블라인드를 완전히 내리자, 거실은 단번에 시간을 뛰어넘은 것처럼 거짓말같이 어둠이 내려앉았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소파에 지친 몸을 뉘었다.
TV에 여전히 박혀 있는 소주병이 눈에 들어왔다.
내겐 이미 아련한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지던 그날의 일들이 또다시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공항에서 보았던 나리의 얼굴,
너무나 화사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오던 그 모습.
헬쓱한얼굴이었지만, 여전히 빛을 뿜어내던 그 얼굴...
[오빠. 잘 다녀왔어요?]
나리는 내가 어디에 갔었는지 이미 알고 눈치였다.
[오빠. 우리 이야기 좀 해요....]
[나 지금....너무 피곤해......그리고 너하고 더이상 할 이야기도 없고....]
차가운 내 말에도 나리의 화사한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래요. 오늘은 좀 쉬어요. 내일 다시 연락할게요....]
나리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나는 바로 택시에 올라타 공항을 떠나 버렸다.
나를 보던 마지막 나리의 얼굴이 계속 아른거렸다.
그리고.....혜린씨.....
[나는 오빠가.......아빠였으면 참 좋겠다.........]
생글거리며 웃던.....아름이의 천사 같은 그 얼굴이 떠오르자, 나는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손이 계속 따끔거렸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수많은 꿈을 정신없이 꿨던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달콤한 속삭임,
이명처럼 끊임없이 들려오던 그 여운이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눈이 조금씩열리자 오랫동안 암흑 속에 갇혀 있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하얀 얼굴이 내 눈앞에 아른거렸다.
동시에 진한 꽃향기가 진동을 했다.
“어......”
소파 아래 하얀 재킷을 입은 나리가 앉아 있었다.
나리는 내 손에 감겨 있던 붕대를 풀어놓고, 패여 있는 상처속에 무언가를 열심히 바르고 있었다.
“오빠. 일어났어요? 손이 왜 이렇게 됐어요?”
나리는 방금 깨어난 내 눈을 한번 보곤, 다시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손에 닿아 있는 나리의 그 손길이 너무나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어...언제 왔어?”
“조금 전에......”
거실은 내가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불과 몇십 분이 지난 것 같았다.
“내...내가.....오늘 피곤하다고.....했잖아.....”
내 손바닥에 닿아움직이던 나리의 손이 멈췄다.
“오빠. 우리....어제 공항에서 만났어요”
“뭐?”
“꼬박 하루가 지났어요.....오빠.....하루 종일....이렇게 잔모양이에요. 오빠 많이 피곤했나 보다......”
나리는 더욱 환하게 웃으며, 내 손에 남겨져 있는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있었다.
“음.....병원에 가봐야 할까 봐요......”
아무 일도없었다는 듯,
웃으며 내게 말하는 나리의 모습에, 순간 나는 기억하기 싫은 악몽을 꿈을 꾼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도쿄그 루프탑......나리의 스마트폰......지민씨....비엔티안....혜린씨.....은솔이 시은이......그리고 6살 소녀 아름이....
이 모든 게 꿈이었나.....
그리고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나리의 그 예쁜 얼굴까지.....
갑자기 울컥했다.
제발 그 모든 것들이 한낮....악몽이었기를 바라면서.....
“오...오빠...잠깐만......움직이지 마요....”
소파에서 급하게 몸을 일으켜......TV를 보자......헛된 기대는 또다시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나는 내 손을 꼭 잡고 있는 나리의 그 하얀 손을 쉽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나리는 마지막까지 상처 난 그곳에 연고를 바르고, 절대 떨어지지 않게 습윤밴드를 꼼꼼하게 붙여주고는 내 손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어제보단 얼굴이 좋아 보여요. 어젠 오빠......너무 피곤해 보였어......”
나를 바라보는 나리의 그 얼굴은, 오래전 나리를 처음 만났을 때, 그토록 설레였던, 그 얼굴과 똑같았다.
그래서 내 마음이 너무나 이상했다.
“오빠.....나 모두 그만둬 버릴까?
모두 그만둬 버리면 다시 예전처럼 오빠하고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
미안해요....정말....”
“나리야.....”
“네?”
나리를 불러 놓고도 한참을 망설였다.
“나.....비엔티안에서 지민씨 만났어.”
환하게 웃고 있던 나리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지민씨만나서......내 방에서 잤어.
그리고 그날지민씨를 호텔 룸으로 데리고 오기 전에, 너희 항공사.......은솔이.....그리고 은솔이 친구 시은이하고, 클럽 화장실에서......셋이 번갈아가면서 했어.....미친듯이.....
나 지금까지 여자 두 명하고 섹스 한적은 없는데.....너무 기분이 좋더라....
너......어제 공항에서 나하고 같이 있던.....선글라스끼고 있던 그 여자 봤지?
그 여자는 비엔티안 갈 때, 비행기에 안에서 만났는데, 그 여자하고 계속 같이 여행 다녔어.
애도 하나 있고, 나보다 나이도 한 살 많은 여잔데.....
그 여자하고도 여러 번 자면서.....그렇게 지내다 왔어.
그러니까....우리는 이제.......”
“비엔티안은 어땠어요? 나는 아직 거긴 가본 적이 없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나리가 내 말을끊었다.
“좋았어요? 비엔티안? 어땠는지 좀 들려줘요.......나도 가보고 싶다.....거기.......”
나리의 한쪽 뺨이 내 허벅지 위에 살포시 올려졌다.
나리의 표정이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오빠....나는 괜찮아요. 오빠만 있으면 돼.......”
나도 모르게 내 손이 움직였다.
떨리는 그 손이 향한 곳은 뜻밖에도 화장으로 투명하게 반짝이는 나리의 뺨 위였다.
나리의 뽀얀 그 뺨을 떨리는 내 손이 찬찬히 쓰다듬고 있었다.
[띵동....띵동......]
나리의 뺨을 쓰다듬던 내 손이 현관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에 멈춰 섰다.
내 한쪽 허벅지위에 살포시 올려져 있던 나리의 얼굴이 그곳을 떠나 현관쪽을 향했다.
[띵동.....띵동.....띵동.....]
나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아...아버님....”
“어? 나리야! 너 어떻게 여기 있어?
이 녀석 하도 연락이 안 돼서 걱정돼서 와봤더니....”
현관에서 아버지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야! 강루아! 너 임마 뭐하는 놈이야? 무슨 연락이 그렇게 안 돼?”
검은 양복을 입은 아버지가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앉아 있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소파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아버지.......”
아버지는 내게 다가오다, 뭔가 이상했는지 TV쪽을 둘러보고 있었다.
“저...저건....뭐야? TV가 왜 저래?”
아버지가 TV에 박혀 있는 소주병과 나를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다.
온 김에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는 아버지를 따라, 한 중식당에 우린 도착해 있었다.
“너는 어디 가면 간다고 이야길 해야지, 무턱대고 그렇게 가버리면 어떡하냐? 연락도 다 끊어 버리고...”
“네....저도갑자기가게 돼서....죄송합니다.”
아버지는 화가 좀 난 거 같았지만,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나리 때문에 스스로 그 수위를 조금 조절하고 있어 보였다.
“하도 연락이 안 되니까. 나리한테 연락하니.....나리도 너 하고 연락 안 된다고 울고.....둘이 싸웠어?”
아버지의 말에 나와 나리 모두 그 시선을 피했다.
한동안 코스 음식을 조용히 먹고 있었다.
“둘이 싸우지 말고 잘 지내.
데리고 있는 밑에 애들 보니까, 요즘 애들 별일도 아닌 거 가지고 다투다가 금방 헤어지고 그러던데......너희는 절대 그러지 마라.
어른들 보이게 좋지 않아.
뭘 그렇게 쉽게 헤어지고......”
아버지의 말에 병원에 누워있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님....오빠한테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제가....저 때문에 그런 거예요......제가 잘못해서....”
“니가 잘 못할 게 뭐가 있어? 요즘 니가 바빠서 잘 못 만나니까....저 녀석이 쓸데없이 고집 피운 거겠지....”
“아.....아버님 그게 아니라.....사실은....제가....”
“고나리! 가만히있어.”
나리의 입에서 갑자기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급하게 나리를 막아 세웠다.
“죄송합니다......아버지....”
“그래....나리는 요즘 어떻게 지내? 힘들지않아?”
갑자기 아버지의 목소리 톤이 달라졌다.
“아...네....괜찮아요. 일 잘하고 있어요”
“너 저번에 사무실 왔을 때. 우리 지점장 봤지? 그 양반이 너희 항공사 임원 하나 알고 있다고 하던데.....혹시 연락받았어?”
“네....저희 객실담당 본부장님이 호출해서 갔더니, 말씀하시더라고요......그 지점장님 친구분이시라고.....그 날....칭찬 많이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아버님.....”
“하하하...그랬어? 잘됐다.....잘됐어......힘든 거 있으면 이야기해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예전으로 돌아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이상하고.....복잡하게 계속 꼬여만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