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한 여자...아니, 두 여자를 만나다 (11)
“루아씨. 언...언제...부터...여기.........있었어요?”
한없이 떨리는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짧은 스커트 속에서 방금 보였던 그것이......이젠 무릎 안쪽 옆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한 살냄새....
호텔룸 침대에서 맡았던 혜린씨의 살냄새가 물씬 풍겼다. 하지만 그 향기는 조금 변해 있었다.
더욱 진했고.....무엇인가로부터 침범받아, 변형된 그런 체취였다.
그때서야 혜린씨도 이상한 걸 알아차렸는지,
한 쪽 다리가 조금 앞으로 나와, 무릎 옆 허옇게 뭉그러진 그것을 살짝 가리는 게 보였다.
“방금요....”
“아.....”
어둠에 완전히 보이진 않았지만, 혜린씨의 얼굴은 옅은 화장을 한 것처럼 은은하게 빛이 났다. 하지만 항상 붉던 립스틱은 완전히 사라져, 분홍빛살색만이 어둠에 반짝였다.
서로를 마주보며, 너무나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이 어색함을 깨어버리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건,
테이블 옆에 서서, 떨리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혜린씨도 지금 나와 마찬가지인 거 같았다.
“아.....그...그럼 먼저 들어갈게요......”
조각상처럼 완전히 굳어 있던혜린씨가 내 옆을 급히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저기....혜린씨?”
“네...네?”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우리.....육로로 국경 건너서.....태국 농카이에서 하루 자고 올까요? 메콩강 건너편에 있는 태국.....”
앞으로 나아가다 갑작스러운 내 말에, 상체만 뒤돌아 나를 보고 있는 혜린씨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아....오늘은 제가 일이 좀.....있어서요....안될거 같아요.....그럼.....먼저 들어가 볼게요....”
혜린씨는 이 말만남긴 채, 도망치듯 테라스 뒷문을 통해 로비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한참 동안 손에 꼭 쥐고 있던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불을 붙였다.
조금 전 내가 혜린씨에게 농카이에서 하루 자고 오자고 한 것은, 오늘 저녁 혜린씨가 그곳을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었다.
테이블 위에, 진한 담배 연기가 계속 피어 올랐다.
조금 전 혜린씨가 서 있던 테이블 바로 옆.....
나무 바닥에 몽글몽글 뭉쳐 있는 허연 덩어리 한줄기가 떨어져 있었다.
일어나보니 벌써 오전 10시....
새백내내 뒤척임에 몇 시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잠든 건, 발코니 창이 환하게 변해 있을 무렵이었다.
침대에 누워, 늦은 조식을 먹을까 말까 계속 고민했다.
지금 시간이라면....아마도 혜린씨와 아름이가 식사를 끝내고 창가 테이블에 앉아, 오전의 여유를 즐기고 있을 시간이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2층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혜린씨와 아름이가 매일 앉아 있던. 창가 자리....그곳이 비워져 있었다.
혜린씨와 아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홀로 앉아,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새벽에 그랬던 것처럼 머릿속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있었다.
혹시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하고, 호텔 별관에 있는 수영장으로 갔다.
수영장엔 백인들 몇명만이 수영장에 내리쬐는 따가운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아름이가 매일 타고 놀던 그 커다란 오리 튜브는 수영장 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쓸쓸하게 홀로 남겨진 그오리 튜브가....마치 지금의 내 모습 같아 보였다.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 이른 아침에 서둘러 체크아웃을 해버린 건 아닌지....
호텔 로비 데스크로 가서 룸 번호를 말하고 체크아웃 여부를 확인하니.....다행이 그런건 아니었다.
내가 지금 왜 이럴까?
왜 머릿속엔 온통 혜린씨와 아름이의 얼굴로 가득 차 있을까?
침대에 누워.....메신저 속 환하게 웃고 있는 혜린씨의 얼굴만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다.
‘혜린씨에게 메시지를 보내 볼까.....’
‘아니면 룸으로 직접 찾아가 볼까....’
이 두가지 생각만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오전.....대낮의 시간은 그렇게 흔적없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커다란 발코니 창밖에 노을이 지고 있을 무렵....
룸 안이 너무나 갑갑해 호텔 밖으로 나갔다.
이제 막 어둑어둑해지려고 하는 거리엔,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맥주 한 병을 들고 와, 테라스 테이블에 앉았다.
차가운 맥주가 입속으로 들어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순간. 오늘 하루 종일 나를 괴롭히던 고민이 너무나 허무하게도 한번에 해결되어 버렸다.
이 맥주를 다 마시고.....혜린씨가 있을 룸으로 올라가봐야겠다......
맥주가 벌컥벌컥 계속 목구멍을 타고 들었다.
그때,
호텔 로비에서 늘씬한여자가 걸어 나왔다.
내 시선이 그 여자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내 앞에 앉아 있던 백인 남자 둘의 시선도 일제히 그 여자를 향했다.
옅은 핑크색 원피스.
온몸에 딱 달라붙어, 가슴과 엉덩이가 너무나 부각되어 보이는 짧은 원피스.
여자의 등 위쪽에 리본형태로매듭지어진 그 아래.....등이 완전히 파여, 엉덩이 바로 위까지 하얀 맨살이 넓게 드러나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자가 이제 막 호텔 현관 앞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저....혜린씨!!!”
“어머!!!”
호텔 현관 앞, 마지막 계단 하나를 남겨두고, 내게 손목을 잡힌 혜린씨가 멈춰 섰다. 그리고 얼굴을 돌려 나를 보고 있었다.
화려한 화장으로 반짝거리는 혜린씨의 얼굴이 숨이 막힐 정도로매혹적이었다.
신경 쓴 옷차림과 화장이, 화려한 파티장소로 가는 셀럽 같아 보였다.
“루...루아씨......”
혜린씨의 눈이 떨렸다. 마치 새벽에....어두운 테라스에서 나를 내려다봤던 것처럼.....
“혜린씨.....가지....마세요.....”
“네?”
나는 결국......선을 넘어버리고 말았다.
“가지마요.....거기.....”
“루...루아씨.....”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향해 있는 게 느껴졌다.
떨리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혜린씨는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시간이 조금씩 지날수록......혜린씨의 표정은 차츰 변해갔다.
“루아씨......”
나를 부르는 그목소리가.....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웠다.
“루아씨. 제 일이에요....새벽에....루아씨가 뭘 봤던....난 상관없어요.
그리고....우리.....몇 번 자고....서로 즐기고....저도 좋았어요.
근데요......우린 그냥 재미 본 사이잖아요.
몇 번 그랬다고 해서....루아씨가 내 남자친구......애인은 아니잖아요.
루아씨가 이러는게......나는 지금 좀.....당황스러워요.”
“혜린씨....”
그 이름을 부르는 내 목소리가 떨렸다.
“내게 너무나 중요한 일이에요.
내게 이러지 마세요.
가야 돼요....이제 이 손 좀.....놔 주세요.......”
혜린씨의 목소리는.......이곳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처음 들었던 그 목소리........그리고 비엔티안 공항에서 현지인에게 소리를 지리던.....그 목소리처럼 너무나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내 손에서 혜린씨의 얇은 손목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아...아름이는.......”
“내가 알아서 해요. 이제 더이상 관심두지 마세요......”
혜린씨는 그렇게 내게서 한발....한발.....멀어져 갔다.
호텔 앞에 기다리고 있던 택시에 혜린씨가 올라탔다.
“Luang pool villa......Hurry.....”
그 새빨간 혜린씨의 입술에서 소리가 흘러나오자마자, 택시는 엔진 소리를 내며 급하게 호텔 앞을 빠져나갔다.
“Hey man! That's too bad......hahaha....”
뒤에서,
테라스에 앉아 이쪽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백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저녁내내 호텔룸에 처박혀있었다.
후회가 되었다......
너무나 후회가 되었다.....
나는 결국....내 스스로 그 선을 넘어 버렸다.
혜린씨 말처럼....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
단지.....
아무런 계획 없이 홀연히 떠나온 이 여행에서.
한 여자를 만나고....그 여자와 몇 번의 진한 섹스를 하고......
낯선 여행에서 만나....
서로에 대한 작은 호기심이 관심으로 변해.......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착각을 하는...
이런 스토리는 너무나 진부한 소설 속 그렇고 그런.....이야기 들이었다.
혜린씨에게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선을 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이런 한심한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나는오빠가.......아빠였으면 참 좋겠다.........]
그리고....생글거리며 웃던.....아름이의 천사같은 얼굴이 떠올랐다.
소파 앞 테이블엔 비어라오병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다시.....커다란 TV에 소주병이 박혀 있을 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계획도 없이 떠나온....이곳.
내게 평온과 안식을 결코 내어주지 않은 이 도시.....비엔티안.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시간은 그렇게 또다시 흔적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귓가에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고요한 이 순간....문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눈이 번쩍 떠졌다.
누군가가 조심스레 문을 노크하고 있었다.
이 소리를 지금까지 내게 들려준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아름이.....
“아....아름이니?”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가 들려오는문으로 달려갔다.
“아름아!!!”
기쁜 마음에 문을 활짝 열었다.
“어.......”
갑자기 내 몸이 바짝 굳어갔다.
활짝 열려진 문 앞에........한 여자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