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한 여자...아니, 두 여자를 만나다 (1)
눈을 몇 번이나 깜빡여 봤지만, 여전히 초점이 맞지 않았다.
천정에 달린 거실 등이 계속 빙글빙글 돌아갔다.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지 계속 반복해서 떠오르는 건,
남자에게 빨려, 온통 붉은색으로 수놓아져 있던나리의 젖가슴이었다.
나리는 내가 찾아갔던, 도쿄 그 호텔룸에서 한숨도 자지 않고 그 남자와 여러 번 몸을 섞고, 이곳에 와 나와 짧았던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곳을 떠난 다음 날 서울에서 그남자를 또 만났다.
나리는 다시 만난 그 남자에게 자신의 가슴을 완전히 내어주고,
그 남자가 자신의 뽀얀 가슴을 미친 개처럼 빨아 재껴, 온통 울긋불긋 엉망으로 만들고 있을 때도, 환희에 찬 신음을 지르고 있었을 것이다.
너무나 앙증맞은 분홍빛 작은 젖꼭지를 그 남자 입에 물려주고.....잘근잘근 씹혀 연약한 껍질이 까질 때까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보지는 그 남자의 손가락과......자지에 번갈아 가며 쑤셔지고 박힌 채...
모든 걸 지웠다고 말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이렇게 진탕 술을 마셔 일어날 수 도 없을 만큼 정신이 나가 있어도.......여전히 나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당장.....내 앞에 나리가 나타나.....그날 새벽 그랬던 것처럼,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며 내게 애원하면, 어쩌면 나는, 나리를 용서해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여자 몸이 그리웠다.
섹스가 너무 하고 싶다.
군대시절 동기들과 처음 가봤던 유흥업소를 찾아 가볼까도 생각해보고,
가끔 연락을 주고받던, 대학 여자 후배를 집으로 불러들여, 진탕 놀아볼까도 생각했다.
주말에 다시 온다던 지민씨가 어서빨리 이곳에와, 승무원 유니폼을 입은 채, 굵은 핏줄이 돋아난 내 자지를 입에 물고 정성스레 빨아 주기를 고대했다.
소파에 누워 빙글빙글 돌아가는 거실등을 바라보며,
죽은 것 같이 말라 비틀어진 자지를 꺼내 놓고,
지민씨의 알몸과 젖어 있던 보지를떠올리며 자위를 하다가.........갑자기 나리의 얼굴이 떠오르자 눈을 감아버렸다.
사라지고 싶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런 곳으로......멀리 떠나고 싶었다.
초인종이 계속 울려 댔다.
그냥 내버려두면 가겠지 하고, 소파에 그대로 누워 있어도 그 엿같은 소리는 계속 울려 댔다.
“아....씨발......”
소파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거실은 대낮처럼 밝았다.
소파 앞 테이블엔 빈 술병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여전히 술이 하나도 깨지 않은 상태였다.
비틀거리며 인터폰을 들여다보니, 얼굴이 뽀얀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인터폰에서 봤던 뿌연 색감과는 달리, 너무나 화사한 얼굴 속, 놀란 눈이 나를 향해 있었다.
“누...누구.....”
“아......안녕하세요. 부지점장님 비...비서.....이서연이에요.”
“네? 누구요?”
전형적인 오스프룩 회색 정장 투피스를 단정하게 입은 여자가 내게 인사를 해왔다.
나는 가만히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나리가 아버지의 팔을 꼭 끌어안고서 찍은 사진......
그 사진을 찍어준 여자....
“아...네...안녕하세요......근데....어떻게?”
“점심 식사하러 나왔다가 부지점장님께서......아드님 이거 좋아하신다고.......”
“아드님? 하하하......들어오세요 일단......”
이 여자는 잔뜩 긴장해있었다.
그럴만도한것이 며칠 동안 술을 처먹고, 정신없이 뻗었던 걸 반복하던 나는.....아마도 거리의 부랑자 같은 거지꼴이었을 것이다.
그 여자가 거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발길을 멈춘 채, 소주병이 박혀 있는 TV와 난장판인 거실 테이블 위를 불안한 눈빛으로 가만히 둘러보고 있었다.
“아....좀 지저분하죠? 하하.......소파에 앉으세요”
“아...아니요.....”
“일부러 오셨는데 커피 한 잔 드릴게요...”
나는 이 여자를 그냥 보내기 싫었다. 오랜만에 집안에 진하게 풍겨 대는 여자의 냄새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마지못해 소파 끝자리에 자릴 잡고 앉았다.
나는 커피를 내렸다.
따스한 커피 한 잔을 그녀에게 내어주고. 나도 소파에 앉았다.
“이거....부지점장님 자주 가시는 한정식집인데요.....아드....아.....좋아하신다고 전해드리라고 하셔서요....”
옅은 검은빛 스타킹, 그리고 몸에 딱 붙는 회색 스커트 아래가 무릎 위 한 뼘쯤 올라가 허벅지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요즘 대기업 다니는 임원 비서는.....이런 사적인 일도 하나요?”
“네? 그게 아니라....”
“앞으로 이런 거 하지 마세요....요즘 어떤 시댄데.....”
괜찮은 대학을 나와서 누구나 일하고 싶어하는회사에서 이딴 일을 한다는 건.....내가 내키지 않았다.
여자가 당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아직 술이 덜 깬......미친 나는.....개의치 않았다.
옆에서 향긋한 내음이 계속 풍겨왔다.
그리 진하지 않은 이 향기가, 삭막하고 싸늘한 사무실에서 풍긴다면 참 괜찮을 거 같았다.
투피스 정장이 꼭 감싸고 있는 여자의 몸매를 찬찬히 훑으며, 나는 이상한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우연을 가장한 의미 없는 섹스치고는 이 여자의 미모와 몸매는.......너무나 과하고, 넘치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여자는 그런 내 시선에 바짝 긴장해 있었다.
“저기 서연씨?”
“네?”
갑자기 이름을 부르자여자가 깜짝놀라면 답했다.
“실례지만....나이가....”
“스물여섯....이예요.”
“나보다 어리네.”
“아...네....”
지난번 아버지 사무실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말투나 행동이 단정해 보이면서도, 참 예뻤다.
“아버지 밑에 얼마나 있어요?”
“졸업하고바로......3년차예요”
나는 무슨 말을 할까 말까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내가 이 말을 뱉어 내기 전에, 이 여자가 내게 인사를 하고 이 집을 떠나기를 바랬다.
하지만 이 여자는 그 자리에 앉아,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가끔 나리가 그랬던 것처럼.....
“서연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어떤 거....말씀하세요”
내내 잔뜩 긴장해 있던 여자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혹시.....우리 아버지하고.....잤어요?”
나는 한참을 망설이던 그 말을 뱉어내고야 말았다.
여자는 잠시 멍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떨리고 있었다.
“아...미안해요. 우리 아버지....데리고 있던 어린 여직원하고 그런 게......한 두 번이 아니라서.....혹시나 하고 그냥 물어본 겁니다.”
나는 술도 덜 깼고, 분명히 미쳐 있었다.
그 여자의 얼굴에 스며 있던 작은 미소는 온데간데 사라져 버렸다. 대신 더욱 날카롭고 또렷해진 눈빛만이 나를 향해 있었다.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이 여자의 눈빛에, 갑자기 술이 번쩍 깨는 거 같았다.
술김에 저질러 버린 이 미친 장난을 이제 그만둬야 할 거 같았다.
진심이 담긴 사과가 필요해 보였다.
“저기...”
“네. 잤어요.”
여자의 이 한마디에.....지금까지 내가쥐고 있던 주도권이 넘어가.....완전히 역전돼 버렸다.
“그렇게 안 봤는데....참 무례하시네요.
저 부지점장님하고 오래전부터 잤어요......최근에도 가끔 자구요...
내가 좋아서 그런 거예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저는 이거 전해드렸으니까, 그만 가볼게요...실례했어요....”
여자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여자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내게 싱긋 웃어 보이며, 가벼운 인사를 하고 뒤돌아 현관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아 참.....”
멀어져가던 여자가 멈춰서나를 돌아봤다.
“루아씨 여자친구......그 스튜어디스 여자친구 참 예쁘더라고요.....잘 지내세요.
요즘 부지점장님이 나리씨 걱정 많이 하시더라고요.....”
이 말을 남긴 여자의 뒷모습이 더이상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현관문이 조용히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파에 앉아, 여자가 방금 빠져나간 현관쪽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메시지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테이블엔 나뒹구는 술병들과 언젠지 모를.......이서연이라는 그 여자가 전해준 도시락이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오랜만에 단잠에서 나를 깨운 그 메시지를확인했다.
[강루아님. 탑승일입니다.
스카이브릿지 예약번호 4457274
9/3 비엔티안 도착
여유 있는 탑승수속을 위해 출발 2시간 전까지 공항에 도착하여 주시기 바라며, 보안검색대 통과 지연시탐승이 불가할 수도 있습니다.
취급주의 수화물은............]
나는 방금 도착한 그 메시지를 읽고....또 읽고......한참 동안 보고만 있었다.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항공사 어플을 들여다보던 내가 떠올랐다.
“하아.....미친놈....”
한숨이 터져 나왔다.
술김에 발권해버린 항공권이었다.
더군다나.....그 항공권은 나리가 일하는 항공사였다.
출발은 오늘 밤 7시.........지금은 오후 5시.....
나는 다시 소파에 누워 버렸다.
“돈만 날렸네.....”
다시 단잠에 빠지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벌떡 일어났다.
오후 5시 18분.....
나는 그대로 욕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미치듯이 단 몇 분 만에 샤워를 끝냈다.
대충 닦아낸 머리엔 드라이도 하지 않아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옷을 챙겨 입고.
백팩속에 눈에 띄는 것들을 이것저것 쑤셔 넣었다.
그리고 내게 가장중요한 노트북도...
백팩을 매고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5시 42분
이 집에서 공항까지 그리 멀리 않아, 어쩌면 가능할 거 같았다.
현관문을 박차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택시를 타고 공항에 도착하자, 금방이라도 토 할거처럼 속이 계속 울렁거렸다.
오후 6시 10분...
오픈 되어있는 체크인 부스엔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머리를 곱게말아 올린 여자가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디 가세요?”
“비엔티안요...”
“어머! 조금만 늦었으면 탑승 못할 뻔했어요. 여권주세요.....”
[지지지직...지지지직...지지지직......]
반복되는 기계 소리를 내던 틈 사이에서 탑승권에 활자가 새겨져 튀어나오고 있었다.
“늦었으니까. 검색대로 바로 가세요....좋은 여행 되세요”
나리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그 여자가 활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탑승 게이트는 한산했다.
비행기에 오르기 최종단계.....탑승권 확인을 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나리를 만나러 도쿄에 갈 때 썼던 그 검은 모자를 깊게 꾹 눌러 쓰고,
비행기와 연결되어 있는 긴 터널 속으로.....
나는 한발 한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