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Metamorphosis (2)
[오빠! 오빠! 내 스마트폰비밀번호 뭐게?]
[뭔데?]
[오빠 생일이당!]
[내 생일? 왜?]
[나한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니까!
오빠. 근데 오빠는 왜 스마트폰 비밀번호가 없어?]
[그냥 귀찮아서.....]
[바보. 그러다 잃어버리면 어떡하려구
이리 줘......오늘부터 오빠 비밀번호는
오빠에게 가장 소중한 날인 내 생일이야]
[오빠는 가끔 내 스마트폰몰래 보고 싶지 않아?]
[그걸 왜 내가 몰래 봐?]
[치이! 오빠는.....내가 다른 남자들하고 몰래 연락 주고받아도 괜찮아?]
[그런 놈들이 있어?]
[호호호....질투해?
있지....너무 너무 많아.
귀찮아 죽겠어 정말......
근데 나는....오빠만 있으면 돼.........호호호]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나지 않은 오래전......
나리의 그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어두운 거실에 나지막이 울려 댔다.
TV 선반 위에,나리의 스마트폰에 충전케이블이 연결되어 있었다.
갑자기 갈증이 났다.
냉장고 문을열어보니, 알록달록한과일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과일을좋아하는 내게......아마도 어제 나리가 와서 사 놓은 모양이었다.
내가 즐겨 마시는 체코산 밀맥주를 한 캔 꺼내 들고 TV 선반으로 와, 나리의 스마트폰에 연결되어 있던 충전 케이블을 뽑아냈다.
책상 구석에 길게 서 있는 스탠드를 켜지 않아도, 커다란 창가에 스며드는 가로등 불빛에 거실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리의 스마트폰 지문인식 홈에 내 손가락 하나를 가져다 댔다.
‘다시시도....다시시도.....다시시도’
액정에 반복되는 멘트가 떠오르다 결국........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메시지창과 함께 숫자패드가 떠올랐다.
‘1216’
숫자 네 개를 누르자, 스마트폰이 환하게 빛을 발하며, 어플이 깔린 배경화면이 떴다.
배경화면의사진은.....
파노라마처럼 넓게 펼쳐진 창에,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나리가 승무원 유니폼을 입은 채, 비행기 조종석 중간에 서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SNS 어플엔 아직 확인하지 않은 DM의 숫자가 가득 표시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너무 예쁘시네요.
현직 약사입니다.
한번 뵐 수 있을까요?]
[고나리님.....
너무 아름답습니다.
저는 강남쪽에 사는데, 커피한잔하고 싶네요.....]
[안녕하세요. 너무 예쁘셔서 연락 드립니다.
혹시 스폰 생각 있으세요?
한달에 두 번. 500입니다.
남성분들은 모두 사회에서 성공하시고, 젠틀한분들입니다.
저희 쪽에 나리님처럼 전문직 여성분들 많이계십니다.
교사, 모델, 대기업 비서.....스튜어디스.....
부담 없이 연락 주세요.]
[날으는 창녀....글로벌 개보지야.
씨발년이 존나게 맛있게생겼네....
기장하고 부기장하고 다 대주고 다니지?
걸레 같은 년.....
나는 안 되겠니?
한번만 대주라....제발....
니 사진 보고 딸만 하루 종일 치고 있다.]
반복되는 병신같은 메시지에 질려,
나리가 나와 항상 메시지를 주고받고......비디오콜을 하는 다른 메신저 어플을 열었다.
아직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수백개였다.
작은 프로필 사진이 리스트에 가득했다.
리스트를 쭉 내리다 가장 먼저 내 눈에 띈 건,승무원 유니폼을 입고 있는 지민씨의 얼굴이었다.
첫 메시지는 그날이었다.
나리와 내가 싱가폴에서 귀국할 때 그날..
[언니...저 나리예요. 너무 고마워요...]
[나리씨. 준비하다가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해요]
이때부터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화면을 쭉 내렸다.
[나리야....어제 너무 잘 놀았어.
루아씨 괞찮더라? 너 좋겠다?]
[헤헤헤.....]
[루아씨한테도안부 전해줘...]
[네 언니.....비행, 수고하세요!!]
[나리야. 너 오늘 오프지?]
[네 언니]
[나 지금 홍대쪽에 있는데. 너 나올래? 얼굴이나 볼까?]
[네! 좋아요. 준비하고 나가면 두 시간 정도 걸릴 거 같아요]
[알았어. 예쁘게 하고 나와.
여기 괜찮은 오빠들 많아.....]
[어머!]
[너 괜찮아? 잘 들어갔니?]
[조금전에 도착했어요......아....힘들다....술.....]
[훗. 현수 오빠가 너 맘에 들어 하더라?]
[치이! 언니도 참....]
[왜? 그냥 오빠 동생으로 한 번 만나봐.]
[언니!!! 우리 오빠한테언니가 이런다고 다 말해버린다!]
[어휴.....앙큼한 것! 좋겠다 너는 서방님.....루아씨 있어서.]
[헤헤.....]
[나리야. 저번에 루아씨 집에서 잘 때.....두고간 옷. 오늘 좀 받을 수 있을까?]
[언니 오늘 거기 비행이예요?]
[응. 오후에 루아씨 집에 있을까?]
[내가 오빠한테 연락해 둘게요]
[알았어. 루아씨 오후에 집에 있다고 하면,
루아씨 전화번호 좀 알려주고...]
[네언니....]
[근데.....나 거기 옷받으러 갔다가....
루아씨가 나 꼬시면 어떡하지?
나 그러면......자신 없는데....]
[호호호....우리 오빠는...안 그래요.]
[그럼 내가 한번 그래 볼까?]
[호호호. 네. 언니 해보시고 알려주세요!!!]
다시 리스트로 빠져나와 작은 프로필 사진들을 훑어 봤다.
[나리씨 안녕하세요?
어제 지민이하고 같이 있던 이현수 입니다.
어제 잘 들어갔어요?]
[아...네.....안녕하세요...]
[저기...어제 나리씨 보고 너무마음에 들어서요.....혹시 주말에 시간 괜찮으시면......저녁 같이 먹을 래요?]
[아...죄송해요....요즘 바빠서요....]
[그럼 언제 시간되세요? 저는 아무때나 괜찮아요, 제가 나리씨 계시는 곳으로 갈게요.]
[죄송한데요.... 저 남자친구 있어요]
[나리씨. 오늘 고생했어요.]
[앗! 부기장님도 수고하셨어요]
[좀 있다가 리츠칼튼에서 저녁 할래요?
7시쯤에.....]
[네. 알겠습니다. 언니들한테 전할게요...]
[아니아니.....나리씨 혼자만....]
[아....그러면 언니들 삐지는데.....]
[ㅎㅎㅎ. 몰래 나와요.
7시에 택시 불러놨으니까. 호텔로비 뒷문으로...]
[아.....네 알겠습니다]
[나리 씨. 오늘 즐거웠어요.]
[부기장님. 저녁 너무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거기 야경너무 멋졌어요.
근데언니들이 어디 갔다 왔냐고, 계속 물어서혼났어요...ㅠㅠ]
[하하하하.....]
작은 스마트폰 액정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니 눈가가 따가웠다.
내가 알 수 없는 수많은 남자들의 프로필 사진이 계속 넘어갔다.
대부분은 나리가 확인조차 하지 않은 그런 의미 없는......일방적인 메시지였다.
계속 반복되는 내용이 지루했다......
그리고 잠은쏟아져 내렸다......
습관처럼 화면이 계속 아래로 내려갈 때,
나도 모르게 엄지손가락이 액정 닿아 있었다.
이제 막 스르륵감기던 눈이 번쩍 떠졌다.
이미 위쪽으로 사라진 그 프로필 사진들을 다시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 프로필 사진을 터치했다.
깔끔한 수트를 입은 남자가, 커다란 원목 책상을 앞에 두고 너무나 편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뒤에 보이는 통유리 너머엔 고층빌딩이 즐비했다.
그 남자였다.
어제.....도쿄....그 호텔....52층 루프탑바에서 나리와 함께 있던, 그 남자.
그 남자의 프로필 사진 옆엔 메시지 미확인 숫자가 떠있지 않았다.
[잘도착했어?]
그 남자가 보낸 마지막메시지였다.
하지만 나리는 그 메시지를 확인하고도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손으로 액정을 훑어 내리며, 리스트를 빠르게 위로 올렸다.
중간중간 메시지가 아닌 다른 것이 쏜살같이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올라간 후......
드디어 가장 첫 메시지가 보였다.
[오전에 공항에서 서류 찾아 주신 거 받은 사람입니다.
아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가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드렸네요....]
첫 메시지는 한 달 전쯤.....
나리가 인천공항에서 도쿄를 오가는 비행 스케줄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아네....좌석 등받이 사이 틈에 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감사해서 그러는데....
혹시 시간 되시면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할 일을 한 건데요 뭐.....]
[다른 뜻이 아니라, 너무 고마워서 그래요.
제가 서울에 화요일까지 머무는데...
시간 되실 때, 꼭 식사대접 하고 싶습니다.
연락주시면 제가 모시러 갈게요...]
하지만 나리는 답이없었다.
그리고 날짜가 며칠이 지난 후 도착한 메시지가 보였다.
[나리씨. 오늘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도쿄행 비행기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아네.....하....저도 놀랐어요.....]
[인천-도쿄 노선에서 계속 일하시나 봐요?]
[네 당분간.....]
[나리씨. 이젠 정말 사양 마세요.
저녁에 꼭 식사 대접하고 싶습니다.
저는 회사가 게이오대학 부근에 있는데,
나리씨는 지금 어디세요?]
[시부야 쪽 숙소에 있어요....]
[와....너무 잘됐다. 가까운데 계시네요.
우리 오늘 저녁 먹읍시다.
더이상 저 민망하게 만드시면.....ㅠ]
[하......계속 그러시니까.....
더이상 그러기도 미안하네요...]
[숙소 알려주시면.....
제가 6시쯤에 갈 수 있을 거 같아요]
[도큐레이에 있어요]
[앗! 거기 알아요. 제가 6시 정각에 호텔 현관에 도착할게요]
[네....]
[나리씨.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네. 저도 덕분에 저녁 잘 먹었습니다.]
[나리씨.....우리 친구 할래요?]
[네?]
[음...가끔 얼굴 보고 커피 마시고....저녁 먹고....]
[저....남자친구 있어요.
오늘 저녁은 너무 잘 먹었습니다.]
[아...........]
또다시 며칠의 공백이 지난 후.....
[우리 이번이 세번째네요? 하하하...
비행기에서 두 번....도쿄에서 한 번....]
[서울, 도쿄 자주 오가시나 봐요?]
[네. 일때문에 출장이 잦아요...
근데 솔직히 말하면.....
이번엔 일부러 건수 만들어서 간 건데.........나리씨 얼굴 보려고.......]
[하아....일은 안 하세요?]
[회사는내가 없어도 알아서 돌아갑니다...ㅎㅎㅎ
이번에 서울에 며칠 머무세요?]
[금요일에 도쿄 비행이에요.]
[그러면.....돌아가는 비행기는 금요일로 변경해야겠다]
[.........]
[나리씨! 우리 오늘 만납시다.]
[네?]
몇 장이 사진이 전송되어 있었다.
그 사진엔 발목 조금 위까지오는 스키니 진과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나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개미같은 허리 아래부터 나리의 몸매를 완전히 드러내고 있는 스키니진이..........압권이었다.
나리의 시선은 카메라 쪽을 향해 있진 않았다.
마치 스파이컷처럼...
누군가가 연예인을 몰래 찍은것처럼, 나리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우리 이렇게 도쿄에서 만났으니.....
서울에서도 한번은 만나야 되지 않겠어요?]
[어머! 사진.....언제 찍었어요?]
[아....그날......너무 예쁘셔서...
저도 모르게....죄송합니다.
근데 사진이 너무......예뻐서....
하지만....지우시라면 삭제하겠습니다]
[훗.....지우세요.]
[우리 이러지 말고.....제가 지금 바로 전화 드릴게요...]
[나리씨.....일어났어요? 몸 괜찮아요?]
다음날 오전 10시에 도착한 메시지였다.
[나리씨 이거 보면 연락 좀 줘요.....
전화도 안 받으시고....걱정돼서....]
[어제...우리....좀 많이 취했죠?]
[그러려고 그런게 아닌데.....]
[나리씨. 제발 연락 좀 주세요.....]
남자가 보낸 메시지가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나리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이어지던 남자의 메시지에....
나리가 답했다......
남자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한지, 12시간이 훨씬 지난......밤 10시 37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