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화 〉Deianeira (12) (13/102)



〈 13화 〉Deianeira (12)

나리가 보내주는 비행 스케줄은 계속 변경되어갔다.

조만간 나리를 만날  있을 거란 기대는 새로운 비행 스케줄을 받을 때마다 계속 딜레이 되고 있었다.


스마트폰 비디오콜 화면에 비치는 나리의 얼굴이 계속 야위어져 가는 거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내가  수 있는 일을 없었다.
따스한 말로 나리를 위로할 뿐....

비행 스케줄이 겹쳐, 서울에서 나리와지민씨가 함께 있는 사진도 몇 차례 전송되었다.

나리가 지민씨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나는 내키지 않았다.

그날...

지민씨가 옷을 받으러 집으로 찾아왔던 날....

지민씨가 말한 ‘친구’는 일반적인 의미의 ‘친구’가 아니었다

친구처럼 커피도 마시고......밥도 먹고......그리고 가끔 잠자리도 가지는....

너무나 노골적인.......그 의미가 나는 불쾌하기까지 했다.

나와 나리의 관계는 쉽게 깨어져 버릴 얇은 유리조각이 아니었다.

나는절대 용납할  없다.

완전히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를........비집고 들어와 흠집 내고, 긁어내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할  없다.

그날....

집에 왔던 지민씨를 숙소까지 차로 바래다줄 때.....

지민씨는 차에서 내리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루아씨.....한 번....생각해봐요.......앞으로.....우리 자주 봐요....’


그날 이후 가끔 지민씨가 꿈에 나타났다.

 꿈은 하나같이, 클럽에서 남자와 엉켜, 눈빛이 희미하게 변해 있는 지민씨의 모습이었다.

나는 견딜 수 없이 울적한 날이면 친구 녀석들을 집으로 불러 술을 한잔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친구들이 집을 떠나가면, 뭔지모를 이 공허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떨쳐버리고자 애써 내 일에 집중하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리가 내 곁을 떠난 지.......두 달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빠! 다음주에 우리 만날 수 있어!!!]

뜻밖의 소식이 내게 전해졌다.


[뭐? 무슨 말이야?]

[다음주 화요일에 인천에서 도쿄 비행인데......수요일에 도쿄에서 그쪽으로 비행잡혔어.]

[정말이니?]

[응! 이틀 거기서 머물 수 있을  같아....

도착 첫날은 오빠하고 같이 있고, 그 다음 날엔 집에 갔다가 다시 인천으로  거야.....]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리가 공유해준 비행스케줄엔 도쿄에서 이 도시로 오는 일정이 적혀 있었다.

두 달 만에......나리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리와 짧았던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창가 의자에 한참을 멍하게앉아 있었다.

벌써 내 머리 속엔.....나리와 함께할  꿈같은 이틀 동안 무엇을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한참 작업 중이던 워드파일을 닫았다.

그리고 노트북 하드디스크에 저장되어 있던 사진 폴더를 열었다.

나리와나의 2년간의 추억들.....

 폴더에는 그 우리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내가 나리를 처음 만난 건....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9월 어느 날이었다.

동기 한 놈이 인문대 교양수업에 그렇게 예쁜 애들이 많다고 해서아무 생각같이  놈을 따라 수강신청을  것이 시작이었다.


과제를 위해 조가 짜여졌다.

자연스레 고학년이었던 내가 조장이 되어, 수업이 끝나고 교수로부터 받은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그때 한 여자가 내 앞으로 와, 인형처럼 큰 눈을 깜빡이며 나를 보고 있다.

어수선하던 강의실의 소리도 들리지 않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한꺼번에 사라져 버렸다.

내 앞에 서 있던 그 여자만이 또렷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때 나리는 2학년이었다.

인문대에서 그렇게 유명한 애였는지도.......다른 학부에서 나리를 보기 위해 일부러 수강신청을 따라 한다는 것도......나는 전혀 몰랐다.

나리와 나는 그렇게 시작했다.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나리는 내가 혼자 살던 이 집에 자연스레 드나들었고, 엄마 몰래 집에서 예쁜 그릇과 반찬을 훔쳐 우리 집에 가져왔다.

그리고 거짓말을 꾸며내 엄마를 속이고.......가끔 이곳에서 나와 함께 잠들었다.



나리는 내가 왜 이렇게 혼자 나와살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마치.....이미 모든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나리와 사귀기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났을  즘.....

나는 나리에게 내 상황을 털어놓았다.

물론 아주 세세한 것 까지는 말 할 수 없었다.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리가 말했다.

그때.

추모공원에서 푸르른 소나무 아래에 엄마를 보낼 때....

그리고  사람.....아버지에게 미친 듯 소리를지르며 울먹이는 나를 봤다고.....







하루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행복에 겨웠다.

이제 며칠이 지나면, 두 달 만에 그렇게 그립던 나리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머릿속엔 ‘나리가 오면  해줄까?’ 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리가 보내는 비행스케줄 다시 확인했다.

나는 그것을 계속 들여다봤다.

그리고 번쩍이는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찬찬히 생각해봤다.

나리는 화요일 인천에서 도쿄로 간다.

그리고 수요일 도쿄에서 내가있는  도시로 온다......


내가 화요일에 도쿄로 간다면....

나리를 하루 일찍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다음날인 수요일.....나리가 스튜어디스로서 승객을 맞는 비행기를 타고 나리와 함께 이 도시에 올 수 있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서프라이즈.......

나를 보고 깜짝 놀랄 나리의얼굴이 노트북 화면에 가득  있었다.



나는 바로 도쿄행 비행기 티켓을 발권했다.













공항엔 수많은 사람들이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탈 도쿄행은 다행히도 딜레이 없이 정시 출발 예정이었다.


게이트 입구에 앉아 나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리야....도쿄 잘 도착했어?]

[오빠! 좀 전에 도착했어. 지금 숙소로 가는 중이야.....내일이면 우리 여보 본다!!!!]

금방도착한 그 메시지를 보고 나는 한없이 웃고 있었다.

콜 싸인이나고,비행기에 탑승하자 나리가 입고 있던  유니폼을 입은 스튜어디스들이 분주하게 비행기 안을 오가고 있었다.


 두 시간......두 시간 이면 나리가 있는 도쿄에 도착한다......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도쿄 나리타 공항에 도착해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오후 7시였다.

마음이 급했다.

[나리야. 뭐하니? 저녁은 먹었어?]

공항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초조하게 나리의 답장을 기다렸다.


[지금 선배들하고 저녁 먹으러 왔어. 안다즈에 있어.

오빠 여기 너무 좋다......다음에 우리 꼭 같이 오자.....]

그리고 바로 도쿄 시내와.....도쿄타워 야경을 배경으로 찍은 나리의 사진이 도착했다.

나리의 답장을 확인하자마자, 흡연실을 빠져나왔다.





나리타 공항에서 스카이라이너를 타고 우에노역에 도착해 다시 긴자선으로 갈아타 도라로몬역에 도착했다.

역을 빠져나오니 멀리서 우뚝 서 있는 안다즈가 눈에 들어왔다.

오후 8시 20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급히 51층 레스토랑의 버튼을 눌렀다.

혹시나 나리가 먼저 나를 알아볼까 봐.....검은 모자를 푹 눌러썼다.

커다란 전면 유리를 통해 노랗게 불을밝힌 도쿄타워가 눈에 들어왔다.

활짝 웃으며 나를 맞이하는 직원에게일행이 있다고 말하고 레스토랑을 천천히 돌아봤다.


한바퀴를 돌아도 나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한층 더 올라가 루프탑으로 향했다.

이곳인 거 같았다.


나리가 보내준 사진 배경과 비슷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선배들 하고 같이 있을 나리에게 막무가내로  순 없고......멀리서 지켜보다가 나리가 이곳에서 떠날 때 즘, 전화를 할 계획이었다.



이곳저곳 붉은 목재로 꾸며진 테라스 형식의 루프탑바.....


주위를 거닐자 다시 검은 하늘 아래 노란 불을 밝힌 도쿄타워가 보였다.

순간. 내 발길이 멈췄다.

저기 멀리서......창가에 서서 도쿄타워를 보고 나리의 뒷모습이 보였다.



너무나 예쁜 원피스였다.

나리의 잘록한 허리가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카키색 원피스였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나리의 뒷모습,나는 잠시 그 곳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리는 혼자였다.

지금이 기회인 거 같았다.

같이 왔다던 승무원 선배들이 없을 때....

선물처럼......내가 너를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걸, 어서 빨리 알리고 싶었다.

멈춰 있던 발길이 천천히 앞을 향했다.



수트를 입은 한 남자가 반대편에서 나를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나처럼 나리의 뒷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순간 내 발걸음이 멈췄다.



그 남자가 창가에서 야경을 보고 있던 나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나리가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보고 있었다.

남자가웃으며 뭐라고 말했다.

나리가 웃고 있었다.


나리의 어깨를 꼭 감싸고 있던 남자의 손이 아래로 천천히 내려와........나리의 잘록한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리의 몸이 남자 쪽으로더욱 바짝 붙어버렸다.

남자가 흐트러진 나리의 머리칼을 뒤로 넘겨 정리하고는 귓가에 뭐라고 속삭이자.....나리는 한 손을 붉은 입술을 감싸며 웃어주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느껴져 몸이 조금 휘청거렸다.

그대로 있으면 쓰러져 버릴 거 같아 뒷걸음질로 어딘지 모를 벽면에 몸을 기댔다.



나리가 내게 보여주던 그 행복한 미소......

남자가 나리의 허리를 찬찬히 쓰다듬었다.

테이블에 있던 잔을 들고.....서로의 잔을 맞추며.....남아 있던 칵테일을 한 모금마시곤.....남자가 나리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렇게 둘은 손을  잡고......내가 조금 전 올라왔던 곳을 향했다.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서야 간신히 한 발.....한 발 힘겹게 움직일 수가 있었다.



멀리서 엘리베이터 문이 이제 막 닫히는게 보였다.

엘리베이터가  층을 내려갔을 때, 나는 버튼을 눌렀다.

50층....49층.....48층......47층,,,,,,


47층에서 잠시 멈춘 엘리베이터가 다시  층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그곳에 몸을 싣고, 47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엔 나리가 항상 사용하던  향수와.....또다른 짙은 향수가 진하게 뒤섞여 있었다.



47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문이 열렸다.

나리의 향기가 남아 있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47층.......

그곳은 호텔룸이가득 있는 객실 층이었다.


그리고.....더이상 나리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고, 나는 떨리는  손만을 내려다보며 복도 중간에......그렇게  참을 서 있었다.








‘나에게는......

내겐 너무 과분한 여자친구 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땐, 항상 내 주위에 좋은 향기로 가득하다.
천사 같은 얼굴에 항상 머물러 있는 그 미소.....

 여자친구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는 이상한 마법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그 마법....
나도 그 마법에 녹아 들어버린 지........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여자친구의 그 마법은 아직도 내게......너무나.....유효하다.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런  여자친구 고나리.......



하지만...........내 여자친구는...........쌍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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