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Deianeira (10)
아버지가 일하는 증권사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둥글게 말아 올린 머리, 은은한 빛을 내는 선홍색 블라우스.....그리고......엉덩이 라인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표시가 나는 스커트......
사방이 은색으로 반짝이는 엘리베이터에 비치는 나리의 모습은, 며칠 전, 한밤에 나를 찾아왔던 그모습 그대로였다.
1층 로비에멈춘 엘리베이터에 말끔한 정장을 입은 남녀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올라탔다.
엘리베이터에 타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항공사 유니폼을 입고서 내 옆에 바짝 붙어 서 있는 나리를 흘깃 보고 있었다.
나리도 그 시선을 느꼈는지. 항공사 모델 사진을 찍는 것처럼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부지점장실]
사람 키 높이만큼의 불투명한 통유리 위쪽에 붙어 있는 표식.....
그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떡해 오셨어요?”
전화기가 서너 개 놓여 있는 책상에 앉아 있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상냥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물어왔다.
아버지 비서인 거 같았다.
작은 미소를 머금고 있던 여자의 시선이 나리에게로 향하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부지점장님 뵈러 왔습니다....”
“아.....혹시 부지점장님.....아드님.....”
“네...맞습니다....”
“아....안녕하세요.....이쪽으로 잠깐 앉으세요.....지금 지점장님하고 같이 계시는데 조금만 기다리세요....”
“네. 감사합니다.”
“차 한잔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 네.....”
생글거리며 웃던 여자가 앉아 있던 책상으로 향했다.
회색 정장 스커트가, 나리의 그것처럼 엉덩이에 팽팽하게 들러붙어, 그 라인이 고스란히 표시가 났다.
여자가 의자에 앉을 때, 다시 나리의 얼굴을 한번 흘깃 봤다.
그 여자는 아마도 나하고 비슷한 나이 같아 보였다.
대학 졸업 후, 입사한지 3~4년차 정도 돼 보였다.
깔끔하고 단정한......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여비서의 모습과 너무나 부합한 이미지였다.
“오빠...여기 너무 깨끗해...”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던 나리가 조용히 귓가에 속삭였다.
안쪽에 있던 짙은 고동색 나무문이 활짝 열렸다.
“........그래 그렇게 하자고.....”
하얀 셔츠에 타이를 하지 않은,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는 남자가 앞장서 걸어 나왔다. 그 뒤를 따르는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어...너희들 왔어?
“아버님 안녕하세요....”
밖으로 걸어 나오는 아버지를 보곤 나리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승객이 비행기에 탑승할 때, 승무원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것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아이고....그래.....나리야....”
아버지의 조금 놀란 눈이, 나리가 입고 있는 승무원 유니폼을 향해 있었다.
“이분들은 누구 신가?”
아버지보다는 연배가 훨씬 많아 보이는, 앞서 나오던 중년의 남자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들래미하고.........우리 며느리요....”
“뭐? 당신 벌써 며느리 봤어?”
“하하하하....”
아버지는 답 없이 나리를 보며 웃기만 했다.
“근데......유니폼 아닌가? 어디서 봤더라....
아.....공항에서 자주 봤는데.
며느리가 스튜어디스 신가? 어디 항공사에요?”
“안녕하세요. 스카이브릿지....입니다....”
나리가 웃으며 답했다.
“아...맞다 맞다......김포 갈 때, 가끔 탔는데....거기 내 친구 놈도하나 있는데...”
나리의 얼굴에 머물러 있던 그 남자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이동해갔다.
“앞으로 저희 항공사 자주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으하하하하......요즘 스튜어디스는 영업도 하나......아가씨 말하는게 참 예쁘고 당차네....”
아버지는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그런 나리와 지점장의 대화를 지켜 보고 있었다.
“그래요...자제분하고 스튜어디스 며느리....잘 놀다 가요.....”
나와 나리는 동시에 그에게 인사를 했다.
“부지점장은 좋겠다.....저런 예쁜 며느리도 있고,
우리 아들래미는......며느리하고 매일 싸우고 난린데.......”
웃으며 나리를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혼잣말하듯 지점장은 그렇게 유리문을 빠져 나갔다.
“자...들어가자....”
아버지의 말에 사무실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나도 처음 와 보는 이곳......
생각보다 사무실은 그렇게 크진 않았지만, 고층빌딩에서 바라보는 도심의 전망이 무척 좋았다.
“우와....아버님...여기 전망 너무 좋아요....”
“하하하...그러니? 전망만 좋지......알고 보면 감옥이지 뭐...”
나리가 창가에 바짝 다가가 장난감처럼 보이는 자동차들을 내려가 보고 있었다.
“부지점장님. 차는 어떻게 내드릴까요?”
노크소리가 들리고 좀 전에 봤던 비서가 들어와 물었다.
“나리야. 뭐 마실래?”
“저는 아무거나 시원한 거요.....헤에”
아버지의 말에 창가를 내려다보고 있던 나리가 말했다.
“그래 날도 더운데.......서연씨.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거 좀 부탁해.”
“네 알겠습니다.”
비서가 빠져나가자 품이 한참 올라와 있는 소파 상석에 아버지가 자릴 잡고 않았다.
그러자 창가에 있던 나리가 다가왔다.
“아버님. 저 이제 정말스튜어디스 됐어요.
아버님한테 자랑하려고 유니폼 입고 왔어요.
저 어때요?”
나리는 아버지가 앉아 있는 소파 옆에서, 거실에서 내게 그랬던 것처럼 몸을 천천히 돌렸다.
아버지는 그런 나리의 몸을 찬찬히 둘러봤다.
“하하하.....그래....보기 좋다......예쁘다.”
“아버님. 감사합니다....헤에.....”
나리의 눈빛과 목소리엔 애교가 잔뜩 묻어 있었다.
‘누가 이런 여자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첫 출근은 언제니?”
“다음 주 월요일이에요,”
“첫 비행은어디니?”
“아직 스케줄은 안 나왔어요. 아마도 주말 전에 나올 거 같아요.”
“루아는 어쩌냐? 매일 보다가......이제는 자주 보기 힘들어 지겠는데.....”
“그동안 밀렸던 일이나 열심히 해야죠....”
순간 너무나 놀랐다.
아버지의 물음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답하고 있는 나였다.
이 모든 것이 나리 때문이었다.
“아 참....오늘 오라고 한 건.....”
소파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있는 책상 서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왔다.
“자...이거....나리야 축하한다.”
“네? 이거....”
“입사 선물이다......”
“어머.....감사합니다......
아버님...지금 풀어봐도 돼요?”
“그럼....”
투명하게 반짝이는 나리의 손이 포장지를 조심스레 풀어헤쳤다.
그 속에서 명품 브랜드 내임이 각인된 붉은 박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리가붉은 박스 한쪽 뚜껑을 위로 열었다.
“아버님.......”
너무나 예쁜.......은색의 반짝이는 시계였다.
“너 비행하면 시계는 꼭 필요할 건데......저번에 보니까 너 손목시계는 안 하더라......”
아버지의 말에도 나리는 말없이 자신이 열어젖힌 그 박스 안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버님......이거....너무......”
“그거....아는 사람 있어서, 20% 정도 할인 한 거야......그리고 어차피 결혼할 때, 예물 시계 할건 데.....그때 안 하며 되는 거고....
어때? 괜찮아....마음에 드니?
혹시 디자인 별로면, 내가 매장 알려줄 테니까....니가 가서 다른 걸로 바꿔도 돼.....”
“아니요..아니요......너무너무 예뻐요....”
28미리 정도의 그리 크지 않은 사이즈에, 비행할 때, 나리의 손에 걸려 반짝이는 이 시계가 상상이 되었다.
그때 노크소리가 들리고, 조금 전 그 비서가 다시 들어와 얼음이 가득 담긴 커피를 테이블에 하나씩 내려놓았다.
하지만 나리는 계속 그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리 앞에 커피를 내려놓던 비서의 눈길이 그 시계에 잠시 머물렀다.
우리는 커피를마시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너희들하고 저녁이라도 먹고 싶은데. 무슨 약속이 그리 많은지.....둘이 좋은데 가서 저녁 먹고 들어가라.....”
“아버님. 우리 사진 찍어요.”
“응?”
“여기서 다 같이 사진 찍고 싶어요.”
“그래? 하하하.....여기서.....그러지 뭐....”
사무실을 잠시 둘러보던 나리가 금융 서적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던 책장 쪽으로 향했다.
“서연씨 잠깐만.....”
아버지가 전화를 들고 말하자,금방 그 비서가다시 사무실로 들어왔다.
“서연씨 우리 사진 좀 찍어줘”
“네. 알겠습니다.”
“저기...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네...”
나리가 스마트폰을 비서에게 건넸다.
책장을 배경으로 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나와 나리가 섰다.
“자....찍겠습니다.....”
몇번의 찰칵 이는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
며칠 후......첫 비행 스케줄이 나리에게 공유되었다.
나리는 심각한 얼굴로 그걸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아.....어떡해......음.......”
나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나리의 첫 비행스케줄은 인천공항에서 홍콩을 오가는 노선이었다.
“오빠. 한 달 동안.....우리....자주 못 보겠다.....휴우,,,,,”
나리의 말에 애써 태연한척했지만......내 눈으로 스케줄표를 보고 나니.......마음이 답답해졌다.
“스케줄은 계속 바뀌지?”
“응 아마도.....너무해......여기서 출발하는 비행편도 많은데......왜 인천이지......”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그 스케줄표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리가 떠나는 월요일 새벽.....
나는나리 집으로 가 나리를 태우고 공항으로 향했다.
이 도시에서 출발하는 아침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서 내려 다시 인천공항으로 이동하는 여정.....
시무룩한 나리의 얼굴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공항 주차장에 도착하자 나리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리야.....아프지 말고....컨디션 조절 잘해......알았지?”
“응.....오빠도.....밥 잘 챙겨 먹고.......”
나리의 눈이빨갛게 변해 벌써 눈물이 글썽거렸다.
“오빠....”
나리가 내 목을 꼭 끌어안았다.
우리는 차에서 오랫동안 키스를 했다.
나리의 입술이 내 목으로 향했다.
나리의 입술에 깊게 빨려 들어간 그곳에서 작은 통증이 느껴졌다.
“오빠. 나 없다고 이상한 짓 하면 돼? 이건 표식이야.....”
차에서 20여 분을 나리와 그렇게 있다가 차에서 내렸다.
트렁크에 들어 있던 캐리어를 꺼내 주자, 나리의 작은 손이 캐리어 손잡이에 올려졌다.
나리의 가느다란 손목엔......아버지가 주었던 그 예쁜 시계가 반짝였다.
“오빠...전화 할께......잘 있어.......사랑해.......”
나리가 내 품에 잠깐 안기고서, 뒤돌아 멀어져갔다.
나는 나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차에 올라타서도 시동을 걸지도 못하고 한참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목이 간지러워 백미러에 비춰보니.....
나리가 새겨준 새빨간 키스마크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