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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핀 그곳에 있었다-38화 (38/38)

00038  외전. 하므나의 문장  =========================================================================

외전. 하므나의 문장 2

아나하가 입방정을 떨어댄 덕에 제르바르에게는 귀찮은 임무가 생겼다. 해야 할 일이긴 했지만 하기 싫었던 일이었다.

-그래서, 나보고 다시 성산에 몰래 들어가서 술을 주고 오라고?

-제르바르 심부름이잖아요!

그 말에는 대꾸할 말이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에는 빠르게 포기하는 미덕을 알기에 제르바르는 주는 술동이를 받아들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아나하가 신나서 짐을 챙기고 있었다.

-넌 어디가?

-제르바르랑 같이 가려고요!

-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성산에는 두라족이 쭉 깔렸는데 타타르마 여자애를 어떻게 데리고 가나. 안 된다고 했지만 이미 아나하는 짐을 가지고 홀랑 나가버렸다. 뒤쫓으려는데 때마침 호아두가 한 짐을 어깨에 지고 왔다.

-호아두! 당신 딸이 나를 따라온다는데.

-그럼 데려가.

-뭐? 부녀가 같이 미쳤나?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따라와!

-어차피 이 땅에 있는 한 어딜 가든 전쟁터인걸. 게다가 열일곱이면 시집갈 나이도 됐고, 자네는 성산 할미에게 선택까지 받았고, 두라족도 아니고…….

의외로 구구절절 이유가 흘러나오기에 제르바르가 말을 막았다.

-잠깐, 잠깐! 난 아직 결혼할 생각 없는데? 당신 딸이랑 할 생각은 더 없고.

-누가 지금 하래? 그냥 세상 구경이나 시켜줘.

-당신네가 가장 미워하는 두라족 용병한테 데려가라고?

-이미 다 아네. 거기 갔다가 바로 떠날 거잖나.

두라족 밑에서 그만둔다고 동료한테 말했던 걸 어느새 안 건지, 제르바르는 혀를 내둘렀다. 그렇다고 한들 역시 무리였다. 그는 대답 없이 고개만 흔들고 나머지 짐을 챙겼다. 호아두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넉넉히 나누어 주었다.

-아나하 정말 안 데려갈 건가?

-내 어디 여자 꼬일 팔잔가. 전쟁터나 전전할 텐데 괜히 고생해.

-그냥 데려가. 책임지라고 안 할게. 그냥 좋은 사람 만날 때까지 세상 구경이나 실컷 시켜주고 싶어서 그래.

그제야 어딘가 수상한 분위기를 읽었다. 제르바르는 주변을 살피며 무슨 일이 있는 거냐 물었다. 호아두는 씁쓸하게 웃었다.

-두라에게 쫓겨 여기까지 와서 애 엄마는 감족한테 죽었어. 감족을 물리친다고 우리가 안전할까? 어차피 이것 또한 두라에서 지켜주는 거나 마찬가진데, 그네들이 여자와 돈을 요구할 게 뻔하지. 나는 바보 천치가 아냐. 그 애는 어리니 어딜 가든 여기보단 잘 살거야.

처음 이곳에서 만났던 호아두는 악에 받친 사람이었다. 두라 족이 보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용병들을 괄시하고 욕해댔다. 사정을 아는 용병들은 비웃기만 할 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제르바르는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무거운 책임감과 연민을 느끼고 말투를 풀었다.

-그래도 딸이잖아. 함께 있는 게 낫지 않겠어?

-여기서 불안해하느니 눈에 안 보이는 게 나아.

호아두의 말에 제르바르는 멈칫 그를 보았다.

-정말 그럴까?

-그럼! 어차피 다 큰 애 끼고 뭔 일 있을까 걱정할 바엔. 안보이면 잘 살겠거니, 하지 않나.

-안 보이면 잘 살겠거니…….

역시 그런 걸까. 꿈 따위, 안 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제르바르는 머리를 흔들었다.

기어이 옆에 아나하를 달고 제르바르는 성산을 올랐다. 본래 이들이야말로 성산 토박이라 두라족이 모르는 길들을 잘 알았다. 좀 험하긴 해도 어릴 적부터 산에서 자란 아나하는 곧잘 산을 탔다.

-근데 아직도 그 사람 좋아해요? 그… 떠났다는 여자.

아나하가 힐끗 눈치를 보며 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던 제르바르는 순순히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좋아하는 건지 어쩐지. 근데 한번 보고 싶긴 하다.

-그게 좋아하는 거 아닌가. 근데 왜 보냈어요?

-고향에 가고 싶다는데 어째.

-같이 가지 그랬어요.

-이럴 줄 몰랐거든.

마음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나. 안 보이면 멀어지고 또 잊혀지는. 그래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바보! 여자는 원래 남자가 붙잡길 바란다고요.

-아냐. 그 사람은 아니야. 여기에서 사는 걸 힘들어 했거든. 고향에 가서 잘 사는 게 낫지.

-찾아가지 그래요?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걸리는 무수한 장애물들을 굳이 말로 꺼낼 필요도 없었다. 대신 그는 다짐하듯 말했다.

-마지막이야.

-네?

제르바르는 꿈에서 그 여자를 보았다고 간단히 설명했다. 아나하는 양 손을 모으고 그 나이대 여자애들처럼 꺅꺅 소리 질렀다. 제르바르가 얼른 입을 막았다.

-낭만적이에요! 근데 뭐가 마지막이에요?

-마지막으로 만나면, 인사를 하고 끝낼 거야. 꿈에서 보는 건 이제 그만 두려고.

아나하는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워낙 제르바르의 표정이 단단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성산 중턱에 올랐을 때, 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 근처에는 다행히 두라족이나 용병이나 아무도 없었다. 아나하는 아래에서 망을 보기로 하고 제르바르 혼자 나무에 다가갔다.

-술 가져왔어.

대답이 없더니, 술마개를 따자마자 노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맙네. 역시 내 안목은 여전하구만.

-특별한 뭔가를 준다더니?

-나무에 꽃이 필 게야. 그 아래에서 잠이 들면 좋은 꿈을 꿀 거네.

노파는 품에서 작은 잔을 꺼내 술을 따랐다. 다디단 향기가 제르바르의 코를 자극했다. 꿀꺽 침을 삼키자 노파는 약올리듯 술잔을 한 바퀴 돌리고 들이켰다.

술을 마실수록 노인네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주름이 사라지고 흰 머리카락은 길어졌다. 미소띤 얼굴은 해사한 여인의 형상이었다.

-설마 당신이 하므나?

-그래. 나는 꿈가루를 뿌리는 마지막 하므나 나무네. 다른 나무들은 모두 죽고 혼자 남았지. 올해로 천년을 채워서 나는 진짜 신이

돼. 가기 전에 이걸 꼭 마시고 싶었어.

-축하해.

-고맙다. 좋은 꿈 꾸렴.

하므나 나뭇가지가 벌어지고 잎이 솟았다. 첫 잎이 떨어지고 꽃이 피어났다. 가느다란 솜털같은 꽃잎에서 가루가 떨어졌다. 제르바르는 고꾸라지듯이 나무 아래 쓰러졌다.

기대와 달리 제르바르의 꿈은 이전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절벽처럼 깎아지른 건물과 소음, 라본다보다도 번쩍이는 불빛. 그로서는 낮인지 밤인지도 종잡을 수 없었다. 그는 익숙한 느낌이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연두색 무늬가 있는 방. 언제나처럼 침대에 곤히 누워 잠을 자는 여자. 꿈에서 보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이왕에 온 거 인사라도 하려고 다가갔다.

-하긴. 괜히 더 특별한 것을 받을 필요가 없지.

그에게는 이 꿈 자체가 특별한 것이기 때문이다.

제르바르가 혼잣말하는데 은서가 눈을 번쩍 떴다. 눈이 마주쳤다. 마치 보이는 것처럼 눈을 떼지 않기에 제르바르는 속는 셈치고 앞에서 손을 휘저었다. 은서의 눈이 동그래진다.

-당신이 나오는 꿈은 처음이네요.

순간 자신에게 거는 말인가 싶어 제르바르가 뒤를 확인했다. 역시 자신 혼자뿐이었다.

-내가 보여?

-네. 이렇게 실감나는 꿈도 처음이에요. 괜찮아진 줄 알고 약을 안 먹어서 그런가…….

은서의 중얼거림에 제르바르는 멋쩍게 웃었다.

-네가 문제가 아니라 이쪽이, 하므나가……. 이런 거 말해도 소용없지만.

변명처럼 말해놓고 짧은 한숨.

-잘 지내는 것 같아 좋네.

-제르바르도요. 꿈이지만 좋아 보여요. 실제로도 그렇겠죠?

-은서. 왠지 산통 깨는 것 같은데, 이거 꿈이 아니야. 성산 노인네가 보여준 문장의……. 간단히 말하면 라본다의 장례식 같은 거야.

제르바르는 설명을 그만뒀다. 오히려 마법의 힘이라 말하는 게 쉬웠다.

-진짜에요? 제가 미친 게 아니라?

-실은 나도 모르겠다. 이건 내 꿈이거든.

그렇게 말하고 제르바르는 멋쩍게 웃었다. 은서는 그런 그를 한없이 올려다보더니,

-그렇게 웃는 걸 보니 제르바르가 맞긴 하네요.

라고 수줍게 말했다. 그 후로 나눈 이야기는 무척이나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제르바르는 굳이 자신이 꿈에서 보러 왔었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함께 다닐 때에는 거의 대화가 없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할 말이 많았다. 성산에서 노인네를 만난 이야기, 술장이 딸을 만난 이야기, 추근거려서 귀찮다는 이야기.

은서도 말했다. 여기저기서 물어보는 사람들, 남자를 소개시켜준다는 친구, 오랜만에 먹는 고향 음식, 여전히 불합리하지만 익숙한 것들, 지금은 하고 싶은 게 생겨서 공부 중이라고 했다.

한참을 이야기 하다 제르바르는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을 툭 내뱉었다.

-사실 나도 너를 만나러 갈 용기가 안 났어.

은서 주변의 풍경을 가리켰다.

-이런 데서 살 엄두도 안 나. 알다시피 난, 칼질이 밥벌이라.

그 말을 은서도 이해했다. 자신 또한 그러했다.

-나도에요. 이곳에 돌아와서도 종종 그 세계 꿈을 꿨었어요.  당신이나 일브라이에는 나오지 않는, 무서운 꿈이었어요.

-여긴 잊어. 이제.

제르바르의 걱정스러운 말에 은서는 의외로 웃었다. 처연하지만 연약하지만은 않았다.

-거기도 현실이었는데 어떻게 잊겠어요. 하지만 계속 살 힘은 있어요. 그거 알아요? 여기도 카마가 있어요.

-그래?

-어쩌면 당신의 세계와 내 세계는 조금씩 겹쳐지는 것이 있을지도 몰라요. 당신과 내가 꿈속에서 만난 것처럼.

어쩐지 꿈속의 은서는 사람이 아니라 요정 같다. 밝아진 얼굴로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낯설다. 이런 모습이 은서의 원래 모습이었나 싶다.

-고마웠어요. 이 말 꼭 하고 싶었어요.

-맨날 그 소리만 하네.

-정말 고마우니까요.

-나도야. 여러모로…….

그의 모습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은서는 다급하게 손을 내뻗었다.

-보고 싶었어요. 저요, 생각보다도 훨씬 당신을…….

그러나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는 사라졌다. 눈을 뜨니 역시 제 방이다. 유령처럼 흐리게 있던 인영이 사라지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꿈일까? 이런 꿈이라면 얼마든지 꾸어도 좋을 텐데.’ 은서는 아쉬움을 느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제르바르도 벌떡 일어섰다.

-왜 하필 지금!

아나하가 그를 흔들며 속삭였다.

-두라 족이 왔다 갔어요! 들킬 뻔 했단 말이에요!

-꿈꾸던 중이었는데.

재빨리 짐을 챙겨 일어나는데 하므나의 문장이 떨어졌다. 얼른 줍자 아나하가 나무랐다.

-뭐예요! 마지막 인사라면서요.

-그렇긴 한데, 중요한 말을 못 들었어. 네가 깨우는 바람에.

-중요한 말이요? 뭔데요?

-못 들었는데 어떻게 알아. 보고 싶었다는 데까지밖에 못 들었어.

-쳇. 그 정도면 되지, 욕심도 과하시네요. 어차피 이젠 꾸지도 못하는데.

-들고 다니면, 또 모르지.

둘은 성산을 내려왔다. 세상을 여행하고 싶은 철없는 여자애를 데리고 갈림길에서 제르바르는 고민 헀다. 아나하가 서쪽으로 가자고 했으나 제르바르는 고개를 저었다.

-동쪽으로 더 가봤어?

-아니요.

-그럼 동쪽으로 계속 가보자.

멀리 멀리 가다보면 어쩌면…….

때마침 새벽이 끝나갔다. 동 틀 시간이었다.

-그쪽에도 해는 동쪽에서 뜨겠지?

붉어져가는 지평선을 보던 제르바르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리 웃겨요?

-내가 요리를 잘 한다는 게 막 생각났어.

-그게 왜요?

-굳이 칼질로 먹고 살 필요가 없잖아.

아나하는 기분 좋은 듯한 제르바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제르바르 뒤따라 달려갔다. 붉어지는 동쪽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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