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7 외전. 하므나의 문장 =========================================================================
외전. 하므나의 문장 1
서쪽에서 온 전사들은 제법 솜씨가 좋았다. 한 명 당 다섯을 치고도 지치지 않았다. 사막에서 굴러먹던 것들이라 그런다고, 호아두는 침을 퉤 뱉었다.
-그래도 덕분에 살았잖아요.
아나하가 호아두의 비위를 맞춰 살살 구슬렸다.
-그런 거라도 잘 해야지. 너도 괜히 그네들 옆에서 알짱거리다 욕보지 말어라.
-네, 네.
말과는 달리 아나하는 모여있던 서쪽 전사들을 힐끗 바라봤다.
성산을 두고 몇 년 째 동쪽 땅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네 민족과 두 나라가 얽힌 전장엔 영원한 아군도 적군도 없었다. 한때 성산에서 타타르마 사람들을 쫓아낸 두라족이 그들을 돕는 것도 그런 양상이었다.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타타르마 사람들은 두라족이 보낸 용병을 받아들였다. 간신히 정착한 땅에서도 쫓겨날 판이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두라놈들. 약게 용병이나 보내고 말이야.
-그놈들이 도와준답시고 직접 왔다면 이뻐 보였겠나.
-거죽을 다 뒤엎지 마.
-거보라고. 호아두 자네 성깔에 그거 참는 게 용하다니까.
-네놈들 밸이 좋은 거야!
호아두와 젊은 장로의 대화에 머뭇거리던 아나하가 끼어들었다.
-그래도 제르바르는 괜찮아요.
-그놈도 똑같아!
-제르바르는 완전 서쪽 사람도 아니라구요. 이번에 새로 온 건데.
-저것도 여자애라고 또 괜히 추근거리다 된 일 당할라고.
아나하가 샐쭉거리며 돌아섰다. 호아두에게 주려던 호리병은 안고 왔던 길로 가버렸다. 얼이 빠진 호아두는,
-하여간 키워준 은혜 모르고.
하고 혀를 차고 젊은 장로는 옆에서 허허 웃었다.
아나하는 움막을 돌아서자마자 멀리 종으로 쓰던 사내애를 불렀다. 더벅머리 소년이 달려오자 한 푼 쥐어주고 속삭였다.
-오늘 아름별 뜰 때 강가로 오라고, 제르바르에게.
아이가 빨빨 가버리고 나서도 아나하는 주위를 한참이나 두리번거렸다. 새빨개진 얼굴로 혼자서 꺅꺅 소리를 질렀다. 밤까지 무척 길게 느껴졌다.
아름별이 뜨면 세상은 어렴풋하게 빛이 난다. 그 아래서 보는 강물은 반짝거려서 연인들이 함께 보기 딱 좋더라고, 막 결혼했던 언니가 한 말이 생각나서 아나하는 혼자 볼을 붉혔다. 제르바르는 언제 오나. 목이 빠져라 보는데 멀리 한 남자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제르바르!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마을 여자가 구운 단 빵을 물고 놀란 얼굴이었다. 아나하는 반가우면서도 어쩐지 심술이 나서 앞으로 달려갔다.
-왜 이제 와요!
-네가 오라고 한 거야?
-네!
-왜?
-왜긴요….
막상 그리 물으니 아나하는 할 말이 없었다.
-그것보다 오늘 밤이 좋죠?
-이름이 뭐였지?
-저요?
맥이 빠져서 아나하는 강가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입이 삐죽 나와서는 ‘아나하’라고 말했다.
-전에도 물어봐놓고!
-까먹었어.
제르바르는 무심하게 대답하고 그 자리에 눕는다. 풀이 바스락거리며 바람에 흔들렸다. 달이 참 높기도 하지. 그의 눈이 달 사이의 별을 훑었다.
-근데 제르바르는 고향에 애인 있어요?
제르바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물우물 씹던 빵을 다 삼키고 나서도 묵묵히 별을 셌다. 아나하는 벙찐 얼굴을 했다가 홱 돌아섰다.
-진짜 있나보네.
있다한들 여기 없음 장땡이지. 그리 생각하는데 제르바르는 손을 저었다.
-고향은 망했고 가족은 죽고 여자는 떠났어.
-어, 미안…해요.
제르바르는 쏟아질 것만 같은 은하수 아래서 눈을 감았다. 어린 여자애가 하는 농담에 진지해질 생각은 없었다. 다만 하늘의 별무리와 반짝이는 강을 보니, 요 근래 꾸었던 이상한 그 꿈이 다시금 생각났을 뿐이었다. 낯선 땅,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온통 회색빛의 번쩍이는 세상. 그런 곳에도 꽃은 피는지 한줌 작은 꽃무더기를 안은 여자가 보였다. 검은 머리를 올려묶고 앞머리를 쓸어올린 여자는 책을 보고 있었다.
‘은서!’
이곳에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이것이 꿈이라면 제 상상력은 얼마나 풍부한가. 웃음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한숨도 나왔다. 미련인가, 붙잡아야 했나, 그러나 어떻게? 이 세상이 무섭다 하는데 어떻게 붙잡나. “그럼 네가 가질 그랬냐.” 에루미르이가 나무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그는 또 머리를 흔들었다.
제르바르가 혼자 생각에 잠겨서 아나하는 금방 심심해졌다. 천진하게 제르바르의 허리춤을 더듬어 칼이고 주머니를 뒤적인다. 보석들이 한 가득 담긴 주머니도 있었다. 서쪽 놈들이야 돈에 눈 뒤집힌 것들이라고 욕했던 아버지도 생각났다. 하지만 아나하의 눈에 보석은 참 예쁠 뿐이었다. 두 눈을 빛내니 제르바르는 가장 작은 것 하나 던져주고 만다.
‘지금 자면 또 꿈 꿀 수 있으려나.’
아나하가 주머니에서 나무로 짜인 작은 문장을 꺼내들었다.
-어, 이거?
-그거? 성산 노인네한테 받은 건데.
-성산 할미한테 받았다고요? 그분을 봤어요? 왜요? 그분 아무한테나 보이지도 않고 이런 거 막 주지도 않는데.
이번엔 제르바르의 표정이 묘해졌다. 눈썹을 씰룩거리더니 조금 심각해져서는 묻는다.
-만나면… 안 좋은 건가?
-신경 쓰여요? 뽀뽀해주면 알려주지요.
-됐다. 네 어른들한테 쫓겨날 일 있나. 어차피 그런 거 안 믿은 지 오래야.
아나하의 속셈을 안 제르바르는 옷을 털고 일어났다. 여기서 누워봤자 잠도 안 왔다. 들어가서 제대로 자보자고 결심하는데 아나하는 시무룩하게 나무 문장을 내밀었다.
-이 하므나의 문장이나 가져가요.
-근데 하므나가 누구야?
-잠과 꿈의 여신이요. 보고 싶은 걸 보여준대요.
-잠과 꿈? 효능이 뭐라고?
-보고 싶은 걸 실제로 보여준다고……. 하지만 전해져만 오는 말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제르바르는 닁큼 하므나의 문장을 받아 허리에 맸다. 그럼 그게 꿈이 아니라고? 그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몇 달 전 제르바르는 두라 족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어 성산에 왔었다. 나이 든 용병 몇은 성산에 발을 들이는 것을 무척 두려워했다. 신비한 힘이 깃든 곳이라 제르바르도 말만 들었던 곳이었는데 막상 가니 별 건 없었다. 어디에나 있는 산이었다. 단 하나 커다란 하얀 나무를 제외하고는.
하얀 나무는 두라 족도 어쩌지 못하는 오래 된 영역이었다. 나무의 힘보다는 나무의 정령 때문이었다. 오랜 시절을 보낸 나무의 정령은 흰 머리 샌 노파였다.
노파는 처음부터 제르바르를 집어 불렀다.
-자네, 정신이 딴 데 있구만.
-뭐?
-몸은 여긴데 정신은 딴 데 있어. 도와주랴?
-나무의 정? 뭐 바라는 거라도 있나보지?
-타타르마의 술을 가져다 줘. 매년 제사 때마다 그 술을 받아먹었는데 못 먹은 지 몇 년이 지났어.
어린애처럼 투정하는 게 기가 찼다. 제르바르는 다른 용병들 몰래 나무에 가까이 가서 따지듯 말했다.
-두라 족 용병으로 온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타타르마가 쫓겨나는 걸 보고만 있었으면서 이제 와서 제사상을 찾나?
-나는 원래 아무 힘이 없네. 바라보기만 할 뿐. 타타르마든 두라든 사람 사는 것.
-그럼 두라족 술이나 받아잡수십쇼.
나무 위에서 작은 나무토막이 툭 떨어졌다.
-타타르마족 아무나에게 그걸 보여주고 술을 달라고 하게. 내가 시켰다고 하면 줄 테니 가져다오. 그럼 특별한 선물을 주마.
제르바르는 나무토막을 줍지 않았다. 주우면 받아들이게 되는 거니 애써 모른 척 지나갔다. 문제는 다음 날부터였다. 벌레가 두라 족 용병단을 습격했다. 벌레 떼는 교묘하게 제르바르를 공격했고 기어이 항복을 선언하게 만들었다. 더불어 소동을 일으킨 제르바르를 포함한 몇 명이 타타르마로 파견을 나가게 되어 버렸다.
화를 억누르는 제르바르 앞에서 성산의 노파는 낄낄 웃었다.
-그러게. 처음에 들어주잖고. 하여간 인간들이란.
-근데 도대체 왜 나한테 부탁하는 거요?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타타르마 술장이 딸 취향이 딱 자네거든.
그 말엔 더 기가 찼다. 제르바르는 대꾸도 않고 낚아채듯 나무토막을 챙겼다. 그러고도 오기가 생겨 성산 할미라든가 술을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었다.
그때 생각이 나자 이 여자애가 수상스러웠다. 제르바르는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아나하를 향해 돌아섰다.
-혹시 네 아버지가 술장이야?
-네! 저희 아버지가 만든 술은 타타르마 최고예요. 왜요?
-…아니야.
망할 노인네. 속으로만 욕을 지껄인다. 화가 났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을 받은 이후로 꿈을 꾼 건 사실이었다. 상상이 아니라 진짜란 말인가?
잠을 자러 제르바르는 돌아갔다. 혼자 남은 아나하는 한참이나 반짝이는 강물을 보며 상대 없이 짜증을 냈다.
아래 초원의 감족들이 몰려든 건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몇 안 되지만 용병들의 활약은 그럴듯했다. 타타르마가 쫓겨나서 감족들이 이곳을 차지하면 두라족은 골치가 아파진다. 고래 등에 끼인 새우처럼 타타르마는 여기저기로 이동해가며 감족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기습 공격을 한 감족 전사 다섯을 베고 제르바르는 피 묻은 칼날을 닦았다. 그 옆에서 아나하가 술단지를 안고 앉아서 빤히 보고 있었다.
-고맙다고 아버지가 한 동이 주셨어요.
어차피 제 할 일인데 비싼 술동이를 주니 제르바르는 내심 감동했다.
-그래도 되는 거야?
-실은… 더 놔두면 상해서요.
아나하는 솔직한 여자였다. 제르바르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술동이를 보니 성산 할미에게 술을 가져다주기로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하지만 제르바르는 곧바로 술을 뜯었다.
‘얼마나 맛있는지 맛이라도 보아야 심부름 할 마음이 들지.’
과연 이름값을 하는지 맛이 좋았다. 본래 증류주를 좋아하는 그도 이것만은 꽤 마음에 들었다. 문득 ‘은서도 먹여 보내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했다 쓰게 웃었다. 이보다 맛있는 것이 훨씬 많을 텐데 별 생각을 다 한다 싶었다.
-왜요? 벌써 상했어요?
-아니. 맛있어. 노인네가 달라고 한 이유를 알겠네.
-노인네요? 성산 할미가 달라고 했어요?
-어.
-왜 이제야 말해요!
-깜빡했어.
제르바르는 제법 술이 마음에 들었다. 계속 들이키며 아나하에게 대강 대답했다. 의외로 성산 할미에게 술을 주는 게 중요한 일이었는지 아나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익은 술이 남았는지 모르겠네!
아나하는 제 아버지에게로 가버렸다. 혼자 남은 제르바르는 조금 더 여유롭게 술을 마셨다. 고소하고 달짝지근하면서도 끝엔 감칠맛이 돌았다. 호아두의 두터운 손에서 이런 섬세한 맛이 나온다는 게 신기해서 실소가 나왔다. 도수도 제법 높은지 눈앞이 금세 흐려졌다. 이럴 때 감족이 오면 감당이 안 될 테지만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제르바르는 그대로 누워 잠이 들었다.
제르바르는 또 낯선 길 위에 서있었다. 길바닥은 새까맣고 단단했다. 요즘 도통 꾸지 못했던 꿈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은서를 찾았다. 사람들과 함께 길 반대편에 서있는 은서에게 제르바르가 달려갔다.
-은서! 너 진짜야?
그러나 은서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가만히 손을 내밀어 은서의 어깨를 만지지만 그대로 통과했다. 그는 당황하여 제 손을 보다가 은서의 볼을 만져본다. 역시 그대로 지나갔다. 역시 이건 꿈에 불과한가. 그리 생각하는 순간 은서가 걸어갔다. 제르바르를 스치고 지나가 걸어가 버린다. 그는 그 자리에서 뒤돌아 가는 은서의 뒷모습을 보았다.
“은서야! 여기야!”
“지현아! 저 분은?”
“선배 친구래. 솔로 삼 년 차, 어때?”
은서는 친구를 만나 웃으며 대화를 나눈다. ‘그래. 좋아 보이면 됐지.’ 제르바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함께 있는 남자는 영 거슬린다. 노려보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다. 인상을 푹 쓰고 있던 제르바르는 은서가 손을 내저으며 혼자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걸 보며 천천히 표정을 풀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 작품 후기 ============================
12시쯤에 2편도 올리겠습니다.
잠안와님. 감사합니다!
라라세미님. 저도 외전을 드릴 수 있어 햄볶습니다.
JingJing2님. 동의합니다!
jenka92님. ㅎㅎ외모에 속으면 안되는 케이스입니다.
vivianhu님. 네 개의 외전 중 이게 선택된 이상...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