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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핀 그곳에 있었다-35화 (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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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두 달 후

사진 동아리는 오랜만에 활기가 돌았다. 은서가 복학하고 전 멤버가 모두 출사를 나간 건 거의 1년 만이기 때문이다.

은서는 대략 1년 전에 지현과 함께 샀던 카메라를 건성으로 만지작거렸다. 동아리도 친구 따라 들었던 거라 딱히 흥미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나오니 바람은 시원했다.

“은서야! 저기 봐봐! 풍경 근사하다.”

지현은 신나서 방방 뛰는데, 바로 옆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 선배가 지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지현의 얼굴이 빨개졌다.

“좋은 때구나…”

짧은 감상을 남기고, 은서는 근처 바위에 앉아 고즈넉한 들판을 구경했다. 확실히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햇볕을 쬐고 있으면 기분이 풀어진다. 원래 악몽을 꾸면 그날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모르겠다.

낯선 곳에서 돌아온 후, 기억상실이라는 이유로 경찰이나 상담 선생님의 추궁을 피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날들은 종종 꿈속에서 재현되곤 했고 그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겪은 걸 없는 일로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돌아왔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

정말 행복한가? 은서는 문득 되물었다.

모든 것이 너무 다행스럽고 또 평온해서 종종 기묘한 기시감에 빠져들곤 했다. 그것은 악몽을 꾸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여전히 믿을 수 없는 현실감과 심장을 옥죄는 불안함과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의 공포가 마구 뒤섞여 흥분상태가 되버렸다. 상담사는 어떤 증후군이라고 했는데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것조차 제3자의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정말 현실인걸까. 어쩌면 이조차 꿈일 수도 있지 않을까. 깨어나면 노예와 마법이 있는 땅, 옆에는 그가 있는. 아니면 그것이 꿈인 걸까.

요즘 들어서는 이런 몽환상태가 심해져서 악몽이 나은지 이런 비현실적인 두려움이 나은지조차 알 수가 없다.

살랑이며 부는 바람에 꽃과 나뭇잎이 흔들렸다.

“!”

은서가 불쑥 일어났다. 저 멀리의 흰 꽃무덤에 다가갔다.

“카마…….”

흰색과 연보라색이 어우러진 수더분한 꽃밭은 어디에서나 흔히 보던 들판에 불과했지만, 그 꽃만큼은 확연하게 알고 있었다.

이것도 환상인가. 정말 이 세상은 망상인건가. 라본다의 길 어딘가에서 떨어져 진짜 꿈속에 빠져든 건 아닐까. 은서의 머릿속에서 사념이 무수하게 흘러갔다.

“은서라고 했지? 나도 들꽃 사진 좋아하는데, 관심 있니?”

이번에 은서와 같은 학기에 복학한 선배가 옆에서 불쑥 말을 걸었다.

“이거 카마, 아니에요?”

“응? 아냐. 데이지 종류고……, 학명은 잘 모르겠는데.”

똑같다.

“거의 연보라색일 텐데 여긴 흰색도 있네. 사진 찍는 거 도와줄까?”

기억 속에서 바랜 카마가 아니었다. 현실에서 바람을 맞으며 눈앞에서 살아 있는 ‘진짜 카마’가 발길에 채일 정도로 곳곳에 피어있다. 이토록 흔한 꽃이라니.

“앗! 은서는 저랑 하늘 사진 찍으려고요! 죄송해요, 선배!”

지현이 은서를 선배에게서 끌어내며 속삭인다.

“야아, 저 선배 소문 별로야.”

은서는 지극한 현실감에 젖은 채 지현과 걸었다. 지현이 옆에서 조잘거리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진짜야, 진짜였어…….”

아이러니하게도 은서는 그제야 이곳에 돌아왔다는 확신을 받는다. 지나가버린 10개월이나 가슴께의 흉터조차도 부유물로 여겨지던 감각이 비로소 피부에 맞닿는다. 그와 동시에 그곳에서의 기억들이 한순간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일브라이에가 은서를 구하려다 죽었다. 아민을 죽인 제르바르가 카마를 들고 찾아왔다. 제르바르와 사막을 넘어 마법의 땅에서 정을 나누고 은서는 떠났다. 그토록 바라던 귀환이었다. 고통과 치욕, 그리움과 사랑, 그곳에서 받은 모든 것을 다 놓고 왔는데도.

“은서야, 너 괜찮아? 창백해…”

꽃은 그곳에도 이곳에도 있었다.

“괜찮아.”

그곳도 이곳도, 모두가 현실이었다.

은서는 더 이상 꽃을 보지 않았다. 땅에 굳건히 양 발을 딛고 서서 하늘을 향해 렌즈를 돌렸다. 하늘이 온통 물빛이었다. 멀리 누군가에게 대답했다.

“난 괜찮아요.”

꽃이 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 작품 후기 ============================

20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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