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3 6. 마지막 인사 =========================================================================
6.5
제르바르가 돌아왔을 때 은서는 벽에 기대어 있었다. 밝았던 얼굴은 한층 어두워져 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했나? 제르바르가 따뜻하게 구운 자몽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은서는 자몽을 받아들고 먹지 않았다. 가만히 내려다보다 까치발을 들고 한 손으로 제르바르의 목을 감쌌다. 제르바르의 허리가 숙여지고 입술이 다시 마주쳤다.
이번에는 긴 시간이었다. 제르바르가 촉촉한 열기를 느끼며 가까이 다가가고 은서는 물러섰다. 은서의 등이 벽에 닿아 물러나지 못하자 제르바르는 더욱 힘을 줬다. 혀와 혀가 얽혔다. 아까 먹은 단 과자 때문인지 무척 달았다.
그의 다른 손이 은서의 얼굴을 쥐듯 만졌을 때 비로소 제르바르는 혀를 멈추었다. 은서의 볼을 따라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
제르바르는 묻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걸 알아차리고 은서가 먼저 속삭였다.
-표가 뜨거워지더니 이름이 떠올랐어요.
라본다의 길 표의 알람이었다. 제르바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바라는 것이 있었다. 부탁하면 어쩌면 들어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때가 되니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아버린 것이다.
-역시 가야겠지?
-…….
은서는 고개를 숙였다. 뚝뚝 떨어진 눈물이 반듯하게 깔린 바닥에 점점이 떨어졌다.
-울지 마. 가고 싶어 했잖아.
-나는… 자신이 없어요.
은서는 마음의 갈등을 붙잡았다. 은서로서는 도저히 이곳에서 살아갈 용기가 없었다. 궂은일을 당해가며 혹은 민츠처럼 자유를 부르짖으며 또는 남자의 보호에 한없이 드리워져,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제르바르는 은서를 안았다. 작고 가느다란 몸이 품에 푹 안겨왔다. 앞섬이 축축하고 뜨거워져서 그 또한 숨쉬기가 힘들었다.
이틀 후, 은서와 제르바르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아라레이아가 은서를 안고 흔들었다. 아라레이아의 몸에서는 옅은 분 냄새와 진한 살 냄새가 났다. 큰 가슴이 부드럽게 은서의 몸을 짓눌렀다. 다정한 사람이다. 다른 여자들에게도 인사를 했으나 민츠는 그날 이후에 보지 못했다. 피해다니는 것 같아서 은서는 씁쓸했다.
두 사람은 여관을 떠나 중앙으로 난 길로 걸었다. 지난 번에 왔었던 마법소를 지나 중간 마을에서 두 번 밤을 지내니 셋째날 밤에는 중앙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라본다의 길이 있는 마법탑은 다음 날 아침에나 문을 열기 때문에 하루 더 기다려야 했다. 바야흐로 은서에게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이 다가온 것이다.
은서는 제르바르에게 받은 돈으로 술을 샀다. 이곳에서는 여태 마셔본 적이 없어서 세 종류를 대충 고르고 안주로 쓸 치즈와 과일도 샀다. 가격이 폭등해서 받은 돈이 금세 바닥났다.
바리바리 싸들고 제르바르의 방문을 두드리자 그가 조금 놀란 눈으로 문을 열었다. 은서가 술병을 흔들어보였다.
-인사나 할까 해서요.
탁자에 대강 차리고 술을 올렸다.
-뭐 이리 많이 샀어.
-뭐 좋아하는지를 몰라서….
제르바르가 술을 살피더니 물었다.
-곡주가 좋아, 과일주가 좋아, 증류주가 좋아?
-증류주요.
-에루비는 증류주 중에서도 상급이지. 좋은 걸 샀어.
술은 뜨끈하고 단내가 났다. 목구멍이 화했다. 정말 오랜만의 술이다.
마지막으로 먹었던 게 언제인가, 은서가 곱씹어보니 이곳으로 오기 바로 전날이다. 무슨 뒤풀이가 있었다. 학회였는지 사진동아리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술이 두어 잔 들어갔지만 은서는 안주를 먹지 않았다. 대신 제르바르의 턱을 잡고 키스를 했다. 이제는 익숙하고 부드럽게 상대방의 혀를 끌어안았다. 알코올 냄새가 코를 짓누른다. 은서의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가 제르바르의 목덜미를 훑었다. 제르바르는 감촉을 느끼다가 문득 은서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제르바르가 물었다. 은서는 조금 머뭇거렸다.
-하고 싶어서요. 하고 싶을 때는 좋아하는 남자에게 술을 먹이고 키스를 하면 된다고, 아라레이아가…
쑥스러워서인지 술 때문인지 얼굴이 발그스레해진 은서는 괜히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은 거야?
제르바르는 며칠 전 하염없이 울던 은서를 떠올렸다.
-나도 사람이니까, 하고 싶어질 때가 있는 건 당연하잖아요.
숲에서 그를 거부하던 은서도 떠올랐다. 제르바르는 조금 얼이 빠져서 물었다.
-이번에는… 거절 안 해?
그리고 바로 그는 은서의 입을 막았다. 이런 멍텅구리 같은 말이라니.
-아니야! 헛소리야, 잊어! 아, 정말 아라레… 이상한 것이나 가르치고.
투덜거리면서 제르바르는 다시 은서와 키스를 나눴다. 며칠 전, 밤길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 전에서도 키스를 했지만 언제나 거기까지였다. 숲에서는 은서가 거절을 했고 밤길에서는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은 어떤가. 제르바르는 은서를 안은 손에 힘을 준다.
아래가 흥분되는 가운데 아까부터 은서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정말 하고 싶은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괜찮다고 한 말을 다 믿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의 신호를 거절할 남자도 아니었다.
제르바르는 키스를 하면서 제 옷을 벗어버렸다. 알몸이 되었지만 은서의 옷은 그대로, 길고 긴 키스를 했다. 손만 더듬거리며 머리카락을 헤치고, 목을 어루만지고 등을 쓸어내렸다. 입술을 떼지 않고 은서를 안아들자, 은서의 양 팔이 그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침대에 눕혔다. 머리를 받치고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잠시 얼굴을 내려다본다. 눈을 감은 은서의 속눈썹이 무척 가까웠다.
옷을 하나씩 벗겨낼 때마다 은서는 흠칫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밀어내진 않는다. 제르바르는 안심하고 은서의 옷을 모두 끌러냈다.
가슴이 퍼져 부드러운 반죽마냥 손에 감긴다. 따뜻하고 찰지다. 제르바르는 팔과 손에 힘을 빼고 빳빳하게 굳은 은서의 몸을 더듬었다. 천천히, 닿을락말락하게 손바닥이 스치는 곳은 아지랑이가 피듯이 긴장이 풀렸다. 단단하게 서있던 근육들 위로 부드러운 살이 올라왔다. 그곳에는 제르바르의 입술도 지나갔다.
발가락과 복숭아뼈, 앙상한 발목과 가는 종아리, 새하얀 허벅지와 이슬맺힌 계곡, 곡선이 진 아랫배와 작은 배꼽, 갈색으로 아문 윗배의 흉터, 두 개의 복숭아과 옅은 색의 작은 구술, 깊게 파인 쇄골 위로 흰 목덜미, 바스라진 입술, 콧망울, 패인 뺨, 감은 눈, 둥근 이마, 검은 정수리.
입을 맞춘다. 그것뿐이다.
============================ 작품 후기 ============================
추천, 선작, 코멘트, 쿠폰,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요즘 감사합니다가 입에 붙었습니다만..정말 기분이 그렇습니다.
즐감하세요.
vivianhu님. 은서와 같지만 또 다르지요.
JingJing2님. 언제나 밤에 보시느라 피곤하실듯 합니다.ㅜ
시엔야님. 함께행복하기님. 쿠폰, 코멘트 언제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