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2 6. 마지막 인사 =========================================================================
6.4
장례식이 있던 후로부터 제르바르가 부쩍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그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역시 아라레이아였다. 은서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흐음.”하고 콧소리를 내며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던 것이다.
-제르바르랑 잘 되는 거지?
밤중에 찾아온 아라레이아는 즐거워하며 물었다. 아라레이아가 세상의 모든 것을 연애와 돈으로만 보는 것을 이제는 은서도 알고 있었기에,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럼 아예 같이 사는 거야?
-그건 아니고요.
은서가 이미 라본다의 표를 받았다고 얘기하자 아라레이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가려고? 근데 꼭 그거로 가야해?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이지만, 그건 너무 비싼데. 어차피 몸뚱이로 가는 길, 그 돈이면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그게, 좀 멀어서요.
-그럼 다시 오기도 힘들겠네?
-…그럴 거예요.
제르바르는 라본다의 길에 대해 더 말한 것이 없었다. 가는 곳이 어디냐, 얼마나 머냐, 어떤 곳이냐 묻지도 않았다.
-근데 왜 같이 안 가고?
오로지 은서의 바람은 돌아가는 것이었다. 거기에 이변은 없었고 다른 생각도 없었다. 일브라이에를 만났을 때에도, 제르바르와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이제와서 이라레이아의 말이 가슴을 찔러대는지 모를 일이다.
그날 밤 늦게 은서는 제르바르와 길을 나섰다. 제딴에는 도움을 주려는지 아라레이아가 청소해야 한다고 둘을 함께 밀어낸 것이다. 얼결에 나와 수정구 아래 걸었다.
-그때 그 여자랑은 또 안 만나?
-누구요?
-나 싫어하던.
-민츠요? 싫어하는 건 아닐 거예요. 그냥, 기분이 조금 그랬을 거예요. 아마.
제르바르는 얘기하다 말고 옆으로 빠져나간다. 다시 와서 은서를 끌고 가게 앞으로 갔다.
-단 거 좋아한다면서?
설탕으로만 만든 과자는 뽑기처럼 생겼지만 더 까맣고 달았다. 너무 달아서 은서 입맛에 맞지 않았으나 은서는 하나를 다 먹었다.
-제르바르는 무슨 음식 좋아해요?
-단 걸 좋아하지만 굳이 가리지 않아. 힘이 모자랄 때 먹으면 좋더라고.
실제로 그의 손에는 아까 산 과자가 한 움큼 쥐어져 있어, 벌써 세 개째 입안에 넣고 있었다.
라본다는 서쪽이든 동쪽이든 밤인데도 무척 밝았다. 사람들은 밤을 즐길 줄 알았고 즐길 거리도 있었다. 노래를 하는 이는 동전이 떨어질 때마다 ‘아리따운 숙녀분,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노신사분!’하고 인사를 했다. 노래가 끊어져도 사람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밤늦게까지 좌판에서 빛나는 돌을 팔고 있었다. 수정석인가 했더니 아니라고 했다.
-마법석이야. 밤의 기운을 받아야 하는 것들은 밤에만 팔거든.
제르바르가 돌아다니며 설명해주었다. 평화롭고 부유한 풍경에 은서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뒷모습이야 어떻든 이곳 사람들은 나름의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작은 두려움도 있었다.
-여기에는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서쪽이나 남쪽이면 모를까 여기까진 안 올 거야. 그리고 까짓 거, 오라면 오라지.
의외의 허세에 은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달이 어둠에 가려져 한순간 어두워지자 수정구의 빛이 더 강해졌다. 빛무리가 졌다. 제르바르가 허리를 굽혀 입을 맞추었다.
-……!
깊지 않지만 따뜻한 입맞춤이었다. 은서는 눈을 감았다.
길 한가운데라 창피했지만 라본다에서는 다들 그러하지 않았나. 그새 낯이 두꺼워졌는지도 모른다고 은서는 생각했다.
제르바르는 입술을 떼자마자 붙잡은 은서의 팔뚝을 쓸어내렸다. 날이 아직 덜 풀려서인지 소름이 돋아 있었다.
-따뜻한 거라도 먹어야겠다.
또 다시 가게로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부끄러웠다. 곧바로 저렇게 가버리는 걸 보면, 어쩌면 그도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얼굴을 가리고 은서는 돌아섰다. 어떻게 봐야할지 몰라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 지를 몰라서 방방 뛰었다. 그러다 낮게 뜬 수정구로 다가갔다. 유리처럼 얼굴을 비추어본다. 당혹과 기쁨 사이.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 한 번 잃어버린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금방 알아차렸다. 은서의 마음에 한차례 바람이 몰아쳤다.
동시에 눈동자가 멈춘다. 수정구에 비친 또 다른 모습에 은서가 고개를 돌렸다. 골목 사이로 사라져가는 남자 그리고 여자. 은서의 발이 그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좁은 골목 사이에서 음습한 습기가 밀려왔다. 발정 난 고양이 소리가 나서 보지 않았다면 신경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은서는 골목에 들어섰다. 발바닥부터 긴장이 올라왔다.
-하읏, 읏!
여자는 벽을 잡고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익숙한 신음 소리와 마찰음. 여자의 드러난 하체 뒤로 남자가 붙어 있었다.
-민츠?
여자가 화들짝 남자를 밀쳐냈다. 도망가려다 남자에게 붙잡혔다.
-어딜 가! 하던 거 마저 해야지!
-이따 다시 와!
민츠는 남자를 반대편으로 밀어냈다. 바지춤을 올리며 남자가 길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네 년한테 돈 주나 봐라.” 정확히는 몰라도 그렇게 들렸다. 은서는 뺨에 멍이 든 민츠를 보고 놀랐지만 정작 민츠는 소매로 슥 문지르고 말았다.
-위험할 뻔 했던 거 아니야?
은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민츠는 그런 은서의 눈을 가만히 보다가 슥 들이밀었다. 중얼거리듯이 속삭였다.
-자유도시에서 그럴 리가. 괜한 말 하지 말아줘.
-하지만 왠지 아깐…….
-쉿.
민츠의 손가락이 은서의 입을 막았다. 민츠는 어쩐지 짜증이 난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은서. 이건 내 의지로 하는 거야. 누구의 강요도 없이, 하고 싶어서.
남자 따윈 다 죽어버리라고 말했던 며칠 전 모습이 떠올랐지만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은서는 제르바르에게서 배운 경험을 잊지 않았다. 민츠를 동정하지 않았다. 그가 먼저 아픔을 밝히고 위로를 요청하지 않는 이상은 함부로 가엾어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도 민츠는 은서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빨갛게 독이 올랐다.
-가! 사람들한테 말하려면 해! 노예에서 벗어났으면서도 하층 계급 여자들처럼 엉덩이로 돈 버는 여자 있다고. 어차피 오늘 치는 너 때문에 공쳤으니까 가서 말도 해버려!
은서가 민츠에게 손을 뻗었다.
-아니야. 민츠, 나는…….
-하지만 말이야. 이건 내 의지야.
목소리는 마치 우는 것 같았지만 민츠는 울지 않았다.
-아무렴. 여긴 자유로운 곳이니까.
돈이 없으면 몸이나 팔게 될 것이라던 조언대로인가. 은서는 새삼 충격을 받았다. 이런 것이 노예와 다를 게 뭐지?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잠깐의 평온을 누리면서, 제르바르와 돈의 안락함에 젖어 이곳만은 다르리라 여겼던 건지도 모른다.
-맞아. 민츠. 너는 자유로워. 미안해.
-네 애인이 돈이 많다고 소문났던데. 미안하면 오늘치 주던가.
은서는 고개를 돌렸고 민츠는 은서를 지나쳐 골목을 나갔다.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누가 볼세라 민츠는 급히 닦아냈다.
============================ 작품 후기 ============================
설문조사는 삼일 정도 열어두겠습니다.
jenka92님. 역시 그렇죠?
vivianhu님. 안그래도 감기 기운 때문에 골골거립니다.ㅠ vivianhu님은 건강 잘 챙기세요.
nabi00님. 땡깡이야 얼마든지 받아드립니다.ㅎ
시엔야님. 즐겁게 읽어주시니 언제나 감사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