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이 핀 그곳에 있었다-31화 (31/38)

00031  6. 마지막 인사  =========================================================================

6.3

나타났을 때처럼 빛과 함께 일브라이에는 사라졌다.

남은 이들이 서 있는 곳은 휑한 방이었고 에루미르이와 제르바르가 앞에 있었다. 은서는 바닥에 떨어진 카마 한 송이를 주었다.

-흔적이 남았군요. 그건 가져가셔도 됩니다. 가끔 그런 게 남아있을 때도 있어요.

에루미르이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장례식은 끝입니다. 아시겠지만 회귀는 한 번밖에 하지 못하고요. 회귀에 쓰인 유품은 돌려드리지 못합니다.

은서는 여운을 잊지 못하고 뜨거워진 손으로 카마를 잡는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으려는 듯, 힘을 준다.

제르바르는 그대로 서서 에루미르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허공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에루미르이가 제르바르의 뺨을 몇 대 두드렸다.

-제르바르! 정신차려!

그리고는 은서를 향해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종종 이럴 때가 있어요. 걱정 마세요. 감정이 북받쳐서 그런 거니까 마음이 안정되면 정신 차릴 겁니다.

-그건… 뭐였나요? 진짜인가요? 마법으로 만든 환상인가요?

-에? 제르바르에게 설명 못 들으셨나요? 사망인의 일부를 가지고 오면 회귀할 수 있습니다. 마법으로 마지막 남은 잔상을 긁어모으는 거죠. 상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영혼을 잠시 되살리는 겁니다. 보통은 아주 짧지만, 이번처럼 온 신체를 이용하면 꽤나 오래 가기도 하고요. 라본다에서는 이걸 ‘장례 치른다’고 한답니다. 정말로,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는 기회니까요.

에루미르이의 목소리는 더 이상 사무적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일과 마지막 인사는 잘 하셨나요?

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환하게 웃어 보이는 걸로 대신했다. 에루미르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바르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정신을 차렸다. 그는 한동안 말을 삼키더니 묵묵하게 에루미르이와 악수를 하고 마법소를 빠져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은서가 자연스레 제르바르의 손을 잡았다.

-정말 고마워요. 언제나 인사해도 부족하네요.

제르바르는 말없이 은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돌아섰다. 어째 그가 더 거리를 두는 느낌이라 은서는 바짝 다가갔다.

-근데 무슨 말을 그렇게 오래했어요?

-궁금해? 말해줘?

-아, 아니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급히 은서는 질문을 물렀다. 자신 또한 일브라이에에게 한 말을 떠벌리고 싶지 않은데, 물어보다니. 무례했다. 하지만 제르바르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나는….

그러나 결국 입을 다물고 만다. 은서도 더 묻지 않았다. 한 사람의 기억을 공유한 두 사람이 잡은 손을 따라 온기가 이어졌다.

돌아오는 짧은 시간에 제르바르는 일브라이에와 처음 만났던 때를 이야기했다. 더듬더듬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천천히 읊는 목소리가 좋아서 은서는 귀를 기울였다.

제르바르의 부족은 전쟁에서 패하고 포로들은 뿔뿔이 흩어져 팔렸다. 남쪽 전사 출신인데다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라 꽤 험하게 다뤄졌다고 했다. 그것이 대략 열 살도 전이었다. 이제는 단편적인 영상만 남아있는.

젖먹이였던 일브라이에를 만난 건 그때였다.

-일의 어머니는 내게도 어머니같은 분이었어. 한번은 맞아죽을뻔 했던 걸 목숨을 걸고 구해줬어.

그러나 젊었던 일브라이에의 어머니는 아이를 두고 홀로 팔렸다. 갓난 일브라이에와 그 어머니의 팔에는 머리카락이 묶여있었는데도, 먼 곳에서 온 손님은 막무가내였다.

비인간적인 노예 시장에도 관례는 있었다. 한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묶인 이들은 함께 파는 것이 그 중 하나였다. 가족이나 어린아이가 있는 경우에 주로 이 방법을 썼는데 무시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다. 그러나 노예상인도 결국엔 장사치라 손님이 웃돈을 얹어주니 더 따지지 않았다.

-너 그때 은혜를 갚는다 했지?

-응!

-그러면 내 부탁 들어주련?

막 젖을 뗀 일브라이에를 남겨두고 떠나야 했던 어머니는 제르바르의 손목에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묶었다.

-많이 바라지도 않아. 이 애가 어디가서 심부름 할 나이가 될 때까지만이라도 같이 있어줄래?

제르바르는 어머니 대신 아이를 안았다.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지. 그렇게 시작된 형제관계였다. 라본다로 팔린 이후로는 이곳저곳 많이도 다녔다고 했다. 사냥꾼 밑에서 심부름도 하고 배달도 하고 사냥도 하고 사람도 죽였다.

이야기를 듣는 은서의 표정이 울적해졌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왜 그런 표정이야?

-표정이 어떤데요?

-울 거 같은데.

제르바르의 얼굴이 눈 앞에 다가왔다. 무거운 이야기와 달리 표정은 한없이 산뜻했다. 은서는 제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무난한 기억들이다. 유치원 시절에 친했던 짝궁, 초등학교 때 일기장이 찢어져 울었던 기억, 친구와 다른 중학교로 배정받아 슬퍼했던 시간,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시험을 봤다. 제 세상의 불합리함에 적당히 분개하고 굴레에서 편안하게 살았던 시간들.

스스로에게 묻는다. 상대방에 비해 편안한 삶을 살았다 해서 그를 동정할 자격이 생기는가. 아무리 끔찍해보이는 일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이겨낼 수 있는 정도의 시련일 수 있고, 바늘 같은 일이라 해도 죽을 만큼 괴로운 사람이 있는 거였다. 그렇데 어떻게 감히, 타인의 과거가 불쌍하다 눈물지을 수 있을까.

은서는 그제야 제르바르가 자신을 보는 시선을 깨달았다.

'아아, 이 사람은 이런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구나.'

제르바르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강한 사람이라, 그의 삶은 물론이고 자신의 삶까지도 의연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표정이 그래요?

은서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아니. 아주 좋아.

제르바르는 안도하여 앞을 향해 걷는다.

-뭐,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제르바르의 혼잣말. 또 멋쩍은지 혼자 웃는다. 그 옆모습을 은서가 자세히 훑었다. 대충 흘러내린 앞머리, 외꺼풀의 눈, 왼쪽 뺨에서 목 언저리로 이어진 가느다란 흉터, 거칠거리는 턱, 매듭 진 카라 안쪽으로 보이는 짙은 피부. 그동안 봐왔는데도 새삼스러워져 하늘 멀리 눈을 돌리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가을을 얼마 누리지도 못했는데 겨울이 온 것 같네요. 건강 조심하세요.

하뉴★님. 라라세미님. 시엔야님. 즐겁게 보신 것 같아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vivianhu님. 네. 마지막 인사였습니다!

jenka92님. 천년만년은 아니지만 감사합니다.ㅎ

JingJing2님. 우주는 사실 우리 곁에... 농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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