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0 6. 마지막 인사 =========================================================================
6.2
아라레이아가 남자를 유혹하는 소리는 매번 은서의 방까지 들려왔다.애써 모른 척 해왔으나 계단에서만은 힘들었다. 한 손님과 계단 꼭대기에서 정사를 벌이는 것을 본 은서는 계단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얼굴이 새하얘지며 속이 마구잡이로 베이는 것 같다. 계단과 왁스, 걸레질, 뒤쪽에서 박혀오는 남자의 성기. 악몽이 다시금 떠오르는 순간, 뒤에서 남자의 손이 어깨를 잡았다.
-괜찮아?
일주일만의 제르바르였다. 언제나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는 인사도 없었다. 단지 놀란 은서를 붙잡고 계단 아래로 잡아끌었다.
-괜찮은 거야?
-네. 그냥 좀 놀라서.
대답과는 달리 은서의 눈은 토끼눈처럼 뜨였다. 마치 못 본 사람을 본 듯 황급하게 자신을 잡아끄는 제르바르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 따뜻하지 않은 거친 손바닥은 꼭 제르바르의 것이었다.
'돌아왔구나.'
계단에서 보았던 광경도 잊고 은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갑자기 눈가가 시려워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런 은서의 상황도 모르고 제르바르는 건물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 품을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꺼냈다.
-받아. 잘 간직해야 해. 라본다의 길 표야.
은서는 대답 없이 표를 양손으로 꾹 눌러 받았다.
-가운데 빈칸에 이름을 써야 해. 네 나라 글로도 상관없으니까 직접 쓰고. 못 쓰면 주인장한테 써달라고 해. 이름이 다시 보일 때 출발해야 해. 한 달 지나면 무효가 되거든.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무미건조해서 은서는 망설였다. 입만 계속 벙긋거리다가 간신히 말했다.
-저…, 안 와서 걱정했어요.
-걱정은 왜 해. 어련히 안 올까봐?
퉁명스러운 말투와 달리 그는 살금 웃는다. 은서도 괜히 민망하여 웃었다. 붉으스레해진 눈가가 반달로 휘었다.
그 후로 그는 줄곧 여관에 머물렀다. 아라레이아는 서쪽의 반란이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해져서 식료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고 그에게 곧잘 투덜거리곤 했다. 그건 곧 암묵적인 요구라, 제르바르는 떨떠름한 얼굴로 품에서 돈 몇 푼을 건네주었다.
-곰살 맞은 척 굴지만 속에는 쥐가 스무 마리는 들어앉았어. 특히나 돈에 대해서는 환장하는 게 꼭 라본다인이야.
제르바르의 평은 그러했지만 은서는 아라레이아가 좋았다. 여자들의 소굴에 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곳은 일종의 금남의 구역이라 제르바르도 잘 알지 못했다. 다만 그네들과 돈거래만큼은 하지 말라고 당부할 뿐이었다.
은서에게는 정말 오랜만의 ‘일상’이었다. 여자들은 은서의 과거에 손가락질하지 않았고 지나치게 동정하지도 않았으며 비웃지도 않았다. 개중에도 민츠라는 여자와 은서는 친해졌다. 친해진 계기 같은 건 같은 노예 출신이라는 것 외에 특별히 없었다.
민츠와 길거리를 다니는 것도 꽤 마음 편했다. 민츠는 은서가 무엇에 예민한지를 금방 알아차렸고 그런 점에서는 아라레이아보다도 나았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건 라본다 동쪽이나 서쪽이나 다를 바가 없는지 곳곳에서 스킨십이 있었는데, 민츠는 은서가 거북스러워하는 광경들을 잘 피해 다녔다.
-은서. 옛날의 안 좋은 기억은 잊어야 해. 우리 고통을 아는 사람은 직접 당한 이 말곤 없으니까.
처음 빨간 지붕의 집에 맞닥뜨렸을 때, 자기도 모르게 굳어버린 은서에게 민츠가 말했다. 어깨를 감싸는 민츠의 손은 따뜻했다.
-여긴 자유 도시야.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어. 남자가 싫으면 안 하면 돼. 믿을 필요도 없어.
민츠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노예에게도 의지가 있다는 걸 아는 이들이야. 난 이곳이 정말 좋아. 은서도 여기서 같이 지내자.
은서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분명 제가 팔렸던 곳들보다는 좋은 곳이지만, 이 모든 것들이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제르바르에게 듣지 않았더라면 아마 자신도 민츠처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여긴?
은서는 약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허리까지 오는 어린 애가 약첩을 들고 달려 나오고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은서가 몸을 돌려 아이가 지날 수 있도록 비켜섰다. 갈색 머리의 아이의 뒷모습을 한참 보는데, 그 뒤편에 선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은서가 먼저 소리쳤다.
-제르바르!
약방에서 막 나온 그는 배달 가는 아이를 넋 놓고 보다가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황망했던 얼굴이 서글서글하게 펴졌다.
-마침 찾으러가려던 참이야. 근데 여긴 웬일로?
-그냥 걷다보니……. 제르바르는 어디 다쳤어요? 왜 여기서…….
-필요한 게 있어서. 지금 바쁜 일 없지? 가자. 갈 데가 있어.
은서 옆에서 민츠가 팔짱을 꼈다. 은서는 난감해하며 둘을 소개시켰는데, 무척 어색하게 인사했다. 제르바르가 남자여서인지 민츠는 특히 그를 경계했다.
-은서. 저 남자랑 갈 거야? 맛있는 거 먹으러 가기로 했잖아.
민츠의 말에 은서는 당황했다. 제르바르야 쓸 데 없는 일로 고집 피는 사람이 아니니 따라갈테지만 민츠는 아니었다. 은서가 민츠에게 미안하다 말하자마자, 제르바르가 은서의 손목을 잡고 돌아섰다. 손에 힘이 들어가서 은서는 슬며시 그의 옆모습을 올려다봤다. 화가 났나 했지만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비장함이 맴돌았다.
둘은 그 마을을 빠져나와 큰 길을 따라 걸었다. 마을 바깥은 은서도 처음 나왔는데, 마을보다도 더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각개로 이어지는 길 위로 사람과 마차가 일직선으로 지나갔다. 어느 정도 가다가 제르바르가 손을 놓았다. 잡혔던 팔목이 빨개져있었다.
-어디 가는지 안 물어봐?
-어디 가는데요?
-마법소.
제르바르가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뒷춤에 매달고 다니던 동생의 유골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그 안에 아까 약방에서 받은 가루 한 줌을 섞는다. 다시 걸으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한다.
-일을 만나러 갈 거야.
은서의 걸음이 멈춘다. 제르바르가 돌아본다. 착 가라앉은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마지막으로-.
말끝을 길게 늘어뜨렸다.
-이곳을 좋아했으니까, 이곳의 방식대로 보내주는 게 맞다 싶어서.
난달 끝에 마법소가 있었다. 벽은 번쩍거리고 건물은 길쭉하다. 건물 벽만큼이나 길쭉한 통유리와 스테인 글라스 때문에 교회처럼 보이기도 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피해 긴 나선형 계단을 올라 몇 개의 문을 지난다. 글자가 적힌 문들 중 한 군데에 서서 제르바르가 노크했다. 잿빛의 곱슬머리 남자가 나와 맞이했다.
-제르바르, 늦었네. 그쪽은?
-에루미르이. 이쪽은 은서, 동행이야.
-여자라……. 그럼 두 분 장례식 치를 준비는 되셨습니까?
에루미르이가 사무적인 말투로 물었다.
대답대신 제르바르는 은서의 손을 세게 붙들었다. 아까보다도 훨씬 제르바르의 손이 차가웠다. 은서는 제르바르의 굳게 다문 아랫입술과 마른 침을 삼키는 목울대를 엿보며, 그가 긴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려 몇 달이나 지난 후의 장례식이다. 그동안 은서와 제르바르는 함께 일브라이에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며 눈물로 정리해왔는데, 그는 또 다시 이토록이나 얼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은서는 언제나 자신을 돕기 위해 손을 잡아주었던 그를 위해, 양손으로 맞잡는다. 제르바르가 놀란 얼굴로 은서를 보았다. 슬며시 손에 힘을 빼지만 은서가 놓지 않았다.
-괜찮아요.
제르바르가 실없이 웃었다.
-그래. 마지막 인사하러 가자.
에루미르이에게 유골 주머니를 건네주자 한쪽 벽 끝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그 빛 끝에 일브라이에가 서있었다.
일브라이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르바르와 은서를 보더니 주저앉아 꽃을 따고 나무를 꺾는다.
그제야 은서는 주변이 온통 풀밭이라는 걸 인지했다. 온통 초록빛에 흰 카마가 흐드러졌다. 쪼이는 태양빛과 빛을 가리는 거대한 수목. 건물 안으로 들어왔던 것도 잊은 채 은서는 풍경에 압도되었다. 그 사이 일브라이에가 나뭇가지를 제르바르에게, 꽃은 은서에게 건넸다.
어디 하나 긁힌 자국 없이 말끔한 얼굴과 선한 눈동자. 상처입고 떨던 은서에게 꽃을 주던 소년이 바로 여기 있었다.
-보고 싶었어.
은서는 간신히 말했다. 목구멍 가득히 울음이 차올랐지만 억지로 넘겼다.
-미안해.
일브라이에는 여전히 웃고 있다. 아주 조금 난감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젓는다. ‘웃어’라고 움직인 입 모양을 은서는 간신히 알아봤다. 꽃을 가슴에 안고 웃는다.
-모든 걸 버리고 나를 도와줘서 고마워. 네 형을 보내줘서 고마워.
해사한 미소. 은서는 참지 못하고 그를 부둥켜안았다. 따뜻하고 조금 거칠지만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진다. 낮은 숨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은서는 처음으로 그에게 입을 맞췄다. 깨질듯이 조심스러운 입맞춤이다.
-나는 곧 이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갈 거야. 이곳은 정말 지옥같이 힘들고 무섭고 끔찍해서 모든 걸 잊고 싶지만…
웃어야지.
은서는 생각했다. 이런 것이 마지막 인사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다른 남자의 품에서 울던 모습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 아니게 되어, 은서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너는 잊지 않을게.
은서의 눈은 흔들림이 없고 양 볼은 싱싱하다. 그들 사이로 바람이 나부낀다. 평화로운 풍경과 불타오르던 일브라이에의 눈빛이 이제는 은서의 눈 속에 있었다. 벌써 옛 기억이 되어버린 그의 속삭임. 주고자 했지만 줄 수 없었던 선물과 하고자 했지만 하지 못했던 고백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은서가 속삭였다. 다시 한번 그가 기억할 수 있도록.
-나는, 너를 사랑했었던 거 같아.
그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했었어.
목이 메여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웃는다. 얼굴을 붉힌 일브라이에의 손을 맞잡자 온기가 느껴졌다. 꿈도 환상도 상상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그의 ‘진짜’ 모습이었다.
그런 그들을 제르바르는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 또한 많은 말을 참아 넘기는 듯 해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에게도 시간을 줘야지. 은서는 마침내 그를 놓았다. 마지막 인사는 “안녕.”이었다.
============================ 작품 후기 ============================
재미있게 보셨길 바랍니다. 내용상 오늘은 분량이 듬뿍입니다.
일요일 잘 보내세요.
달가치님. 감사합니다. 후원 쿠폰이라는 걸 오늘 봐서 인사가 늦었네요^^;
JingJing2님. 생각나는대로 생각하시면 될듯합니다.^^
시엔야님. 냥꼬북님. vivianhu님. 오늘 보신대로입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