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9 6. 마지막 인사 =========================================================================
6.1 마지막 인사
이곳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르바르는 사라졌다. 며칠째 돌아오지 않아서 은서는 줄곧 아라레이아와 함께 지냈다.
원래 약속대로라면 그의 역할은 거의 끝이 났다. 관계를 거부했으니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곳 남자들이란 언제나 그랬으니까 그 또한 그렇지 않을까, 라고 은서는 짐짓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떠나진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은 기묘한 신뢰였다. 제르바르는 뼛속까지 이 세계의 규칙과 법을 따르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며칠 간 그의 부재는 은서로 하여금 조급하게 만들었다. 책임이 없기에 부재를 나무라지 못하는 불안이 가슴 한 켠에서 뭉클거렸다. 그 분위기를 읽었는지 제르바르가 어디 갔느냐고 아라레이아도 묻지 않았다. 원래 방랑벽 있던 사람이라, 어찌 한 자리에서 노예시절을 견디었는지 모른다고 슬쩍 말해주었을 뿐이다. 혼자 남은 자신을 위로해주려는 것이 뻔해서 쓴 웃음이 나왔다.
-떠나도, 제가 어쩌겠어요.
거절했는걸요. 그 말은 목구멍으로 넘긴다.
아라레이아는 그런 은서를 빤히 보다가 손을 잡아 끌었다.
-은서? 잠깐 나랑 어디 좀 갈래? 기분 전환하자.
은서는 아라레이아를 따라 여관을 나왔다. 골목길을 헤집어 어둔 길로 들어서자, 남자가 둘씩 엉켜 있는 모습이 왕왕 보였다. 은서가 놀라자 아라레이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요즘 저게 유행이야. 같은 성끼리 노는 거지. 물론 직접 하는 건 아니고. 사실, 넣진 못하잖아.
손가락을 까닥이며 아라레이아가 속닥거렸다. 은서는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남자들을 피해 걸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도착한 곳은 높다란 건물의 가운데층이었다. 잠시 머뭇거렸으나 은서는 기어이 발을 내딛었다. 원래의 자신이었다면 섣불리 발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요즘의 제 모습은 이상했다. 그토록 당하고도 겁이 없느냐 스스로를 꾸짖으면서도 아라레이아를 따라가다니. 담담하게 걸어가는 아라레이아의 뒷모습을 한참 보다가 은서는 이유를 깨달았다. 아라레이아를 믿기 때문이 아니었다. 제르바르의 선택을 믿기 때문이었다. 설사 그가 떠날지언정 위험한 사람에게 맡겼을 리가 없다고 은서는 확신했다. 마음이 정해지니 꺼릴 것도 없었다.
계단을 올라가 삐걱거리는 문을 열었다. 옴팡진 냄새가 풍겼다. 세세하게는 온갖 과일과 꽃, 땀과 여자의 냄새가 섞여있었다.
-짠! 우리들의 아지트야!
방 안에는 여자들이 여기저기 앉아, 물담배를 피거나 혹은 자수를 놓거나 책을 보고 있었다. 사람이 들어온 것을 신경 쓰지 않는 몇 명은 서로의 몸을 만지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에 은서는 입구에서 멈추었다.
-우울할 땐 풀어야지. 은서도 들어와. 여긴 이 동네 여자들만 올 수 있는 곳이야. 수다도 떨고 욕도 하고 담배도 펴.
아라레이아가 바짝 귀에 붙어 속삭였다.
-마사지 잘 하는 사람도 있어. 남자보다 좋을 걸?
아라레이아와 함께 들어가니 다른 여자들이 하나둘씩 관심을 보였다. 여자들은 은서를 둘러싸고 몇 살이냐는 둥 귀엽다는 둥 동정이냐는 둥 자기네들끼리 묻고 또 웃었다. 아라레이아가 말리고 서도 이야기는 끝이 나질 않았다.
-초면에 낯들도 좋으셔.
-왜 어때서. 안그래도 포목점 이라브에네 얘기 중이었는데. 이 동네에선 솜씨가 제일이라더라. 크기도 딱 좋아서 하나도 안 아프다며?
-아니지! 바라알리에가 더 잘해. 혀가 장난 아니야. 끝내줘!
-바라알리에가? 완전 샌놈처럼 보였더니만.
그곳의 여자들은 사소한 것에도 잘 웃고 먹고 남자들 얘기를 하고 투덜거렸다. 어디가 좋다더라, 무슨 음식이 좋다더라, 남자들이 남자랑 노느라 요새는 관심이 줄어들었더라는 이야기는 내용이 다르기만 할 뿐 학교 친구들의 수다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토록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은 일브라이에와 아라레이아 외에는 처음이었다. 제르바르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고 이야기에 재능도 없었다. 물론 그 전의 다른 남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기에 대수롭지 않은 수다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겪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은서는 어때. 언제가 제일 기분 좋았어?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은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겪었던 것은 쾌락과 사랑, 즐거움으로 충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은서는 노예로서, 장난감으로서 다리를 벌리고 안기고 노래를 부르고 맞았다. 거기에 기쁨은 없었다. 은서는 기어들어가듯이 말했다.
-전…모르겠어요. 전혀 즐겁지 않아서.
여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무식한 남자들은 무조건 크고 빠르면 여자들이 좋아하는 줄로만 안다니까.
-맞아! 나도 처음엔 옆집 오라버니가 억지로 집어넣는데 아파서 펑펑 울었어. 그래놓고도 지는 좋다고 웃는데 거길 차고 싶더라니까.
-맞아! 이젠 노예가 아니니까 강압적으로 할 필요도 없잖아? 하고 싶을 때 하면 돼.
그 순간 은서는 제르바르를 떠올렸다.
-하고 싶어질 때가 정말 있을까요….
끔찍하게 괴롭힌 사람들도 남자였고 피 냄새를 풍기며 자신을 구한 이 또한 남자였기에.
-그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하고 싶어질걸?
-처음엔 무서울 수도 있으니까 부드럽게 잘 하는 사람이랑 하면 돼!
-그럼 역시 이라브에네에게 부탁해 볼까? 은서, 우리가 진짜 괜찮은 사람 소개시켜 줄까? 분명 만족할 수 있을 거야.
여자들이 너도나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은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숲에서의 짧은 애무가 생각났다. 그 전에 병원에서 술 취해 입을 맞추던 마른 입술과 아픈 몸을 끌어안던 온기와 꽃을 떨어뜨리던 각 진 손가락도. 밀물이 밀려오듯이 차례대로 생각났다.
은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래? 응?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각난 거야?
고개를 저었다.
'정말 돌아오지 않으면…….'
문득 닥치는 불안에 은서의 머릿속은 한 사람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 작품 후기 ============================
6장 시작합니다.
주말 잘들 보내세요.
행복하세요!님. 남주(?)가 마음에 드시나보네요^^
dlfrrlaks님. 기대에 부응해야 할 텐데요 힘내보겠습니다!
시엔야님. 인기가 날로 날로 올라가는 듯 합니다.
nabi00님. 달달..주륵..
vivianhu님. 노력해보겠습니다!ㅎ
여왕의아침님. 정주행하셨군요. 반갑습니다.
냥꼬붕님. 다행입니다^^
검천지룡님. 아쉬우신가요?..ㅎ
국제경제학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