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8 5. 한 여름밤의 꿈 =========================================================================
5.5
허리 위에 올라탄 여자가 길게 푼 머리를 묶어 올리자 나신이 환하게 드러났다. 여자가 어깨를 누르고 허리를 흔들자 제르바르가 낮게 신음소리를 냈다. 여자는 그를 내려다보며 웃는다. 허리를 감싼 다리에 힘이 들어가며 제르바르를 조여왔다. 제르바르는 여자의 허벅지를 굳게 잡는다. 여자의 머리가 젖혀지며 묶었던 머리카락이 또 다시 풀러 내렸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머리카락의 장관은 제르바르에게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제르바르는 여자를 들어 눕힌 다음 제 허리를 움직였다. 여자가 교태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제르바르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소리에 그 또한 고조되어 몇 번이나 더 깊게, 여자의 머리가 들썩였다.
-아으응!
여자는 제법 소리가 능숙했다. 끝마치는 소리도 끝낸 후의 소리도. 남자의 물건을 서게 만드는 콧소리다.
여자는 바로 나가지 않고 지쳐 누워있는 제르바르의 몸 위에 앉았다. 손가락이 허벅지를 더듬었다.
-자기, 남쪽 전사 일족이야?
제르바르가 여자를 흘깃 바라본다.
-응.
-어쩐지. 허벅지에 큰 흉터가 있기에, 그런가보다 했지.
여자는 허벅지에 가로로 길게 찢긴 흉터에 입을 맞춘다. 제르바르는 그대로 체온을 느꼈다.
-예전에 새로 온 여자애 중에 이런 흉터가 있었는데, 남쪽 전사라고 했었어. 성인식의 흔적이라나. 근데 걔 어떻게 됐게?
여자는 꽤나 수다스러웠다. 제르바르는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죽었겠지.
-역시 동족이라 잘 아네. 그 자리에서 남자 아홉 명을 죽이고 결국 죽었지 뭐야. 그다지 예쁘지도 않았는데… 그때 이후로 처음이야. 남쪽 전사를 본 건.
여자가 웃으며 제르바르의 입술에도 입을 맞춘다. 여자의 입에서는 백초 냄새가 났다. 매콤한 향신료로 쓰이곤 해서, 라본다에서 곧잘 먹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백초는 임신한 여자가 먹어서는 안 되는 것 중에 하나라고, 오래 전 동생이 떠들던 말이 떠올랐다.
-그럼 당신도 그렇게 강하겠네?
여자는 제르바르를 힘차게 껴안았다. 여자의 마음을 알아차렸음에도 그는 무심했다.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고나니 남은 건 허탈함이다.
-…응? 어때?
-뭐?
제르바르가 멍하게 되묻는다.
-아이 참! 내가 나가도록 도와주면, 내가 언제든 당신을 만족시켜 줄게. 응? 난 그 여자애만큼 강하지도 못하고 이곳에서 평생을 썩고 싶지도 않단 말이야.
다시 입을 맞추려는 여자를 제르바르가 밀어냈다. 불쑥 상대가 없는 짜증이 치솟았다.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어 한숨도 나왔다.
-뭐야! 싫으면 싫다고 말하던가!
그러나 제르바르는 주머니 속에서 돈을 꺼내 침대 모서리에 올려놓기만 했다. 여자는 흐응, 하고 콧방귀를 끼며 돈을 낚아챘다.
-치사하게.
제르바르는 방을 나왔다.
기운을 오랜만에 쏟아내고 나니 금세 몸이 노곤해졌다. 한숨 자고 싶었지만 낯선 여자 옆에서는 아니었다. 차라리 술을 마시는 게 나았을지도……. 제르바르는 술 생각을 간신히 접었다. 나온 김에 일을 다 마치고 돌아가려고 억지로 발을 움직였다.
사실은 은서의 얼굴을 바로 보기가 왠지 민망스러운 이유도 있었다. 어차피 제가 거절당한 거고 은서는 아무렇지 않아보였으나 어째 영 껄끄러웠다. 어차피 상대는 신경도 안 쓸 텐데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이 우스웠다.
책임의 의무가 없기 때문인가. 풀 데 없는 자극을 받아서인가. 그렇다면 다 풀어낸 지금은 괜찮아져야 하는 거 아닌가.
찝찝한 기분은 그로선 마뜩치 않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겠지.
-제르바르? 라본다로 팔려갔다고 하더니만.
중앙 협회 앞에서 마법사 에루미르에가 그를 알아보고 달려왔다.
-금의환향했지.
돈주머니를 흔들자 에루미르이의 표정이 환하다. 돈맛이라면 죽고도 맛 볼 라본다인이라, 그건 마법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라본다의 길은 언제쯤 쓸 수 있나?
-글쎄. 서쪽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말이지. 제법 깊이 들어온 모양이야.
-으응, 알지. 거기서 왔는걸.
제르바르는 고개를 끄덕인다. 애초에 이 나라는 뭔가가 비틀려있는지 부잣집 노예가 하층구역의 사람보다도 살기 편한 곳이다. 돈으로 계층이 정해지는 만큼 폐쇄적이지는 않지만, 때문에 하층구역은 무능력자 취급을 받으며 욕먹기 일쑤였다.
-어디 급히 갈 데가 있어? 차라리 직접 가는 게 나을 텐데.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아니. 남쪽으로는 안가. 다른 사람이 쓸 거야.
그러고 보면 은서의 고향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얼마나 멀기에 라본다의 길을 이용하는 건지. 애초에 이곳은 ‘급히’ 이용하는 자들이 주로 쓴다.
-예약해놓고 가. 언제 정상화될지는 모르겠지만.
제르바르가 보석을 건네자 에루미르이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었다.
-너무 많은데?
-장례식도 부탁해.
옆구리에 매단 유골 주머니를 내밀자 에루미르이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 또한 제르바르를 잘 따르던 어린 노예 아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제르바르의 등을 툭툭 두드린다.
-걱정 말아라.
허리에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은 제르바르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 작품 후기 ============================
라본다편은 앞에 비해 진행이 느려지는군요. 빠른 걸 좋아해서 손이 근질근질 합니다.ㅎ
내용상 전편(은서), 후편(제르바르)로 이어져서 한번에 올립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두 개를 같이 올렸어도 됐을 듯 하네요.
냥꼬붕님. 한글날이라..ㅎ
vivianhu님, 시엔야님. 오늘까지는 삭막하네요. 곧 본격 치유물로 들어갑니다만 갭이 너무 크지 않을까 걱정은 좀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