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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핀 그곳에 있었다-27화 (27/38)

00027  5. 한 여름밤의 꿈  =========================================================================

5.4

라본다의 금지된 숲을 가로질러 동쪽 구역으로 넘어, 숙소에 도착하기까지의 침묵을 은서는 묵묵히 견뎌냈다.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왜 제르바르를 안지 못했는지, 속으로 이것저것 이유를 대본다. 두려워서 혹은 마음이 동하지 않아서? 마음은 동했으나 두려웠나? 그토록 부드럽게 다가왔는데도 겁을 먹었나? 그의 머리칼에서 나는 피 냄새 때문이라고 은서는 결론을 내렸다.

다행히 제르바르는 며칠이 지나자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때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사냥을 하고 고기를 뜯고 물을 건네고 칼을 닦았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동쪽 구역. 어차피 라본다의 길로 가는 방향이니까, 겸사겸사 아는 얼굴도 보고.

아무도 없는 숲의 나무를 헤치고 나오니, 깎아지른 산들이 먼저 보였다. 마법물품에 쓰이는 광산을 다룬다고 제르바르가 덧붙였다. 서쪽과는 또 다른 모습에 은서는 조심스럽게 그를 따라갔다.

동쪽 구역에서는 아는 사람의 여관에 머물렀다. 집주인은 어디 가고 딸이 나와 그들을 반겼다. 가슴과 엉덩이에 살집이 풍만하고 황금색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은 아라레이아는 유혹하듯이 허리를 흔들며 방을 안내했다.

-엄청 오랜만이야, 제르바르.

-어. 너 요만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아줌마가 다 됐네.

-실례야! 여성한테 할 말이 아니라고!

아라레이아가 제르바르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옆구리에 딱 붙었다.

-나 이따 밤에 가도 돼?

-안돼.

아라레이아가 힐긋 뒤따라오는 은서를 본다.

-왜? 저 아가씨 때문에?

-아니. 네 아저씨 때문에.

-피. 용기 없는 남자는 나도 싫거든?

괄괄한 집 주인은 라본다인이 그러하듯 칼 쓰는 이를 싫어했다. 딸의 남편감으로는 아마 동네 부호나 상인을 점찍어두었을 테니 제르바르로서는 괜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물론 아라레이아가 관심 가는 손님들의 방에 드나드는 것은 집주인만 빼고 모두가 아는 일이다.

은서가 방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아라레이아가 따라들어왔다. 제르바르를 따라갈 줄 알았던 은서는 놀란 듯 살짝 얼어붙었다.

-왜 이렇게 긴장해? 그러고보니 아가씨도 외국인이네. 어느 나라에서 왔어? 처음 보는 모양새인데, 말은 할 줄 알지?

아라레이아는 무척 말이 많았다. 일브라이에도 그랬던 걸 생각해보면 국민성인가 싶어 은서는 슬며시 긴장을 풀었다. 저를 미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은서? 그것 참 요상한 이름이네. 너무 짧잖아!

활발한 여자였다. 가슴을 반이나 드러낸 옷 위로 짧은 숄을 걸치고 있어, 목까지 싸맨 은서와는 거의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가 조금 부담스러우면서도 거의 처음 접하는 또래의 여자인지라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여기엔 정착하려고 온 거야? 아니면 관광? 날이 좋지 못한데.

-아니요. 라본다의 길을 이용하려고요.

-자기 돈 많구나?

아라레이아의 눈이 반짝였다. 은서는 손을 내저었다.

-내 돈은 아니에요.

-그럼 누구 꺼? 제르바르? 와, 그이도 출세했네! 역시 밤에 한 번 더 가볼까.

이상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은서는 화제를 바꿨다.

-혹시 제르바르를 좋아해요?

다급하게 묻는 말이 그거였다. 은서는 제가 물어놓고도 괜히 민망해서 낯을 붉혔다.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번복하는데, 아라레이아는 묘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심술과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어머, 왜? 제르바르에 대해 상담이라도 하려고? 아니면 질투?

-질투라니! 아니요….

이번엔 아라레이아의 눈이 동그래진다.

-제르바르가 남편 아니었어?

-아닌데요.

이번에는 은서도 정말 당황한 얼굴이었다. 자신을 아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그리 말하다니. 이 세계 사람들의 관념이란 은서에게는 정말로 이해되지 않았다. 은서는 잠시 말을 헤매다가 이전에 사막에서 제르바르가 스샤이에게 뭐라고 소개했는지를 떠올렸다. 일의 여자가 아니었다며 제르바르가 돌아서던 모습도 떠올랐다.

-내…죽은 남자의 형이에요.

망설이긴 했다. 하지만 아직은 이것 말고 딱히 은서와 제르바르 사이를 설명할 단어가 없었다.

-제르바르가 은서를 거둔 거구나. 그럼 남편이나 그거나 같지 뭐.

일전에 제르바르가 했던 말과 비슷하게 아라레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의중을 딱히 의심한 건 아니었지만 아라레이아마저 그렇게 얘기하니 아연해졌다.

-그렇게 되는 거에요? 하, 하지만 가족인데. 그… 가족의 형인데요?

-다른 남자한테 가버리는 것보다야 낫지 않아? 은서네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은가보네. 그럼 평생 혼자 살아? 아니면 재혼?

하기야 이제와서 제가 살던 나라의 도덕적 관념을 들이대기도 우습다. 아니, 제 세계에도 그런 과거가 있지 않나.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 사람들을 이상하게 볼 것도 아니었다.

-우린 마음대로 살아요. 연애도 결혼도 이혼도 그리고 사랑도요.

-그거 좋은데? 나도 언젠가는 내 마음대로 살 거야. 내 여관을 차리고 좋아하는 남자들을 불러서 파티를 여는 거지! 하지만 은서,

아라레이아가 고개를 가로 흔들고 은서의 어깨를 눌러 잡았다. 은서와 달리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사랑은 언제 어디서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거야. 그거야말로 마음에 달린 문제니까.

아라레이아가 씨익 웃었다. 환하게 웃는 앞의 여자가 무척이나 보기 좋아서, 은서는 얼결에 따라 웃고 말았다.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 근육이 당겨왔다.

근육이 놀랄 정도로 오랜만에 웃는구나 싶어서 은서는 말라붙은 뺨을 천천히 문질렀다.

============================ 작품 후기 ============================

금요일인데 한글날이군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이따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행복하세요!님. 코멘트 감사합니다. 공감 외 다른 감상도 당연히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확실히 좋은 놈인데 말이죠.^^

이리수님.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JingJing2님, vivianhu님. 확실히 아깝겠죠?...ㅎ

냥꼬붕님. 그러고보니 감정교류로는 첫 장면인 것 같기도 합니다.^^

시엔야님. 세밀한 감상 감사합니다. 은서와 삘이 맞으시군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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