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6 5. 한 여름밤의 꿈 =========================================================================
5.3
족히 한 시간은 그렇게 달린 후에야 둘은 어두침침한 숲으로 들어왔다. 개울가에 앉아 한참이나 숨을 고른다.
-여긴 안전한가요?
-라본다 사람들한텐 금지된 곳이라. 너랑 나는 상관없잖아.
개울의 물은 그리 차갑지 않았다. 목을 축이고 발을 담그고 있으려니 얼굴과 팔 언저리가 끈끈한 것이 영 불쾌했다. 은서는 옷을 입은 채 개울가로 들어갔다. 물로 얼굴과 팔과 다리와 목을 닦아내자, 피와 땀이 물을 타고 흘러내려갔다.
제르바르도 옷을 입고 물에 들어왔다. 달빛 아래 피칠갑을 한 그의 모습은 더욱 엉망이라, 은서는 조금 놀랐다.
-어, 내 피는 아니야.
제르바르가 으쓱이며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했다.
-내 솜씨는 좋은 편이거든. 하층의 배 골은 놈 몇이야 문제없지.
히죽 웃는다.
-걱정했어?
은서는 제르바르에게서 고개를 돌린다. 그의 너스레에 마음이 놓이자 불쑥 말이 튀어나온다.
-일브라이에도…그랬어요. 내 앞에서 그렇게 묶여있었는데….
제르바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첨벙이며 물소리만 났다.
-일브라이에를 구해주지 못했어요. 그 앤 나를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나는 그놈과 하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무서웠고, 지쳤어요. 내가 가만히 있었다면, 그 앨 죽이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나는 그저 너무 싫어서.
그제야 은서는 그것이 그동안 참아왔던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속 깊숙하게 응어리졌던 무언가가 물에 흘러가는 핏물처럼 풀려나갔다. 은서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눈시울이 뜨거웠지만 그대로 두었다.
-그래서 포기했어? 아까도.
은서는 대답할 수 없었다. 울지 않기로 했건마는, 이번은 예외다. 너의 죽음을 슬퍼하는 거니까 괜찮다고 은서는 자위했다.
제르바르도 은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종종…너는 금방 포기해버리는 것 같아. 당기던 줄이 끊어져버리는 것처럼. 너를 처음 봤을 때도 의외였지. 일이 들려줬던 거랑은 전혀 달랐거든.
첨벙, 청범. 제르바르가 등 뒤에까지 다가왔다.
-이를 악물고 버티더라. 꺾이지 않더라. 웃을 때는 정말 환하게 웃더라.
은서는 목구멍에서 간신히 한 문장을 뱉어낸다.
-일브라이에잖아요.
-맞아. 일은 언제나 아름답고 좋은 것만 보니까.
라본다도, 제르바르도, 은서도. 일브라이에는 그들의 또 다른 면들을 끝까지 알지 못했다. 그에게 세상은 평화롭고 형은 다정하고 여자는 아름다울 뿐이었다.
죽기 직전에는 알았을까. 제르바르는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다.
-당신이….
은서가 뒤돌았다. 피를 씻어낸 제르바르가 있었다.
-살아있어서 다행이에요. 그 애처럼…죽지 않아서.
자신 때문에 죽은 일브라이에에 대한 미안함과 똑같은 상황에서도 살아준 제르바르에 대한 고마움. 그러나 이내 그 마음이 뒤엉켜버려서, 은서는 마음의 갈피를 놓치고 제르바르에게 안겼다.
제르바르는 안겨오는 은서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젖은 어깨가 차가웠다. 입술이 어깨와 목덜미, 귓볼을 지나 뺨과 턱, 쇄골로 점차 내려온다.
젖어서 들러붙은 옷이 은서의 몸을 그대로 드러내고, 희미한 달빛을 조명삼아 속살이 옅게 비춘다. 옷 위로 살짝 불거진 연한 갈색빛의 유두 위로 제르바르의 입술이 닿았다. 더운 입김에 은서가 그의 어깨를 감싸안자, 제르바르도 은서의 허리를 안았다.
물 속에 있어서인지 제르바르의 손은 차가웠다. 손이 등에 미끄러지자 은서의 허리가 젖혀지고, 제르바르의 입이 그 선을 따라 움직인다.
-으…읏.
상체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뻗어있어 달빛에 더 빛났다.
제르바르는 은서를 들어 물가 근처의 바위에 앉혔다. 자신은 하반신을 물에 담근 채 은서의 허벅지 안쪽으로 무릎을 집어넣었다. 다리가 스르르 열리면서 은서의 아랫배가 근질거렸다. 제르바르의 허리가 다리사이로 들어오자 지레 긴장이 든다. 은서는 제르바르의 진갈색 머리에 코를 박았다.
채 가시지 않은 피 냄새가 났다. 그 순간 머리가 차갑게 식는다.
-자…잠깐…,
제르바르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다.
-잠깐…으응…잠깐만…하…,
다리로 내려가는 손길.
-그만….그만…해줘요….
은서의 신음소리에 제르바르의 입술이 멈춘다. 은서는 일브라이에보다 조금 더 짙은 갈색머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움이 잔뜩 묻어난 그 눈길은 제르바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은서는 그에게서 동생을 보고 있었다. 의문이 든다. 그와 일브라이에는 전혀 닮지 않았는데도, 사실은 피 하나 섞이지 않은 남인데도 왜 이 여자는 자신에게서 동생을 보는가.
-미안해요…제르바르…, 나, 나는…도저히….
왜 이제 와서 현실을 인식하고 그를 밀어내는가.
물이 차갑다. 애욕의 달콤함은 그저 한 여름밤의 꿈이었나보다고, 제르바르는 그렇게 납득해버렸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재미있게 읽으셨길..
nabi00님. 감사합니다^^
요하난님. 감동받으셨다니 저도 감동...
검천지룡님. ntr좋아하시는군요ㅎ
JingJing2님. 1시부터라니! 피곤하시겠어요ㅠ
냥꼬붕님. 싸움에 최고는 아니어도 중간 이상은 합니다ㅎ
vivianhu님. 오늘도 고뇌하는... 저도 그런 오류가 납니다. 오타 등 고치려고 할때마다 진땀이 줄줄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