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5 5. 한 여름밤의 꿈 =========================================================================
5.2
제르바르는 멈춘 은서의 옆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는 사막의 전사들에게 납치당한 여자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알고 있다. 전의 제 주인이 얼마나 손속이 더러운 자인지도 알았다. 말하진 않았지만, 은서가 노예로서 겪어왔던 일들 또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뭐 어떠랴.
그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노예와 여자들이 살아가는 것은 본래 녹녹치 않았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뺏고 뺏기며 목숨을 보존했고, 그 와중에 누군가의 아이를 낳아 길렀다. 여자가 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설사 다른 남자의 손을 거쳤다한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한들, 지금 자신의 품에 있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죽은 동생의 여자라 해도 말이다.
그래서 제르바르는 한잔 걸쳤던 술을 원망했다. 처음부터 은서를 안을 생각은 없었다. 술이 들어가니 묵묵히 참아왔던 호기심이 불쑥 고개를 들었을 뿐. 여자에 무심한 일이 이 여자의 무엇에 빠졌던 것인가 하는, 단순한 호기심이다.
그날, 병원을 나오자마자 제르바르는 끊었던 담배를 찾아다녔었다. 일이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여자인 줄도 모르고 지분거렸던 게 괜히 창피했다.
‘좀 빨리 물어볼걸.’
처음의 마음이야 어쨌든 여자의 나체를 보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을 리 없다. 결국 제르바르는 담배를 포기하고 다시 술을 마시러 갔다. 그 후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제르바르는 그때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올해의 폭동은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라본다에 자본을 대주던 기아나아르의 루다르 주지가 죽은 탓에 마법사들은 새로운 줄을 찾아야 했다. 물론 그 외에도 줄은 많았지만, 루다르에게 가장 많이 의존하고 있던 마법약학 구역으로서는 의도치 않은 큰 손실이었다. 마법사들이 외부로 많이 빠져나간 마법약학 구역이 폭동에 가장 먼저 뚫린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사실을 은서가 알았을 리가 없다.
숙소에 갑자기 쳐들어온 사람들은 물건을 깨고 훔치고 먹어치웠다. 하층 구역의 사람들이라는 것은 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길에서 고고하게 다니던 이들과 달리, 지독한 냄새가 나고 머리카락은 기름졌다. 기운 옷가지는 라본다에서는 두 달 만에 처음 보았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라본다의 폭동이었다.
삐쩍 마른 남자들은 은서가 소리 지르기도 전에 입을 틀어막았다. 듬성듬성 이 빠진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여기 남자도 있어!
남자들은 은서를 숙소 거실로 끌고 갔다. 자다가 급습을 당했는지 제르바르도 꽁꽁 묶여있었다. 그러고 보면 제르바르는 한번 잠이 들면 도통 깨어나질 못하곤 했다.
-히야, 상층 여자들은 때깔도 곱지.
-사내놈은 어쩔까.
-죽여. 아니, 구경시키다 죽여도 되겠지.
번들거리는 웃음에 은서는 소름이 돋았다.
-안돼!
-그럼 가만히 있던가. 우리 기분이 좋아지면 살려줄 수도 있거든.
아민은 일브라이에의 앞에서 은서를 농락하고 결국 그를 죽였다. 직접 죽이지는 않았다지만 그건 그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일브라이에의 목숨으로 은서를 꼼짝하지 못하게 해놓고 결국에는 배신했다.
사막에서도, 라본다에서도, 루다르 아민의 그림자가 발밑에 짙게 깔려있는 것 같아서 은서는 구역질이 나왔다.
이들도 앞에 묶인 남자를 죽일 것이다. 일브라이에처럼 제르바르의 목숨으로 겁박하고 몸을 유린하고 결국에는 죽일 것이다. 은서의 눈이 제르바르를 향했다. 이를 악물고 온 몸을 비틀며 탈출하려는 제르바르. 그 모습은 동생과 무섭도록 닮아있었다.
남자들은 은서의 몸에 걸쳐진 옷을 손쉽게 벗겨낸다. 남자들의 손가락엔 살이 없어서 뼈마디가 툭 튀어나온 해골 같다. 그런데도 황급히 벗어제낀 다리 사이의 그것만은 꼬챙이처럼 잔뜩 서있었다.
혼자만의 목숨이라면 겁없이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질 앞에서의 저항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끝을 이미 온 몸으로 겪지 않았나.
‘더 이상은 안 돼! 제발….’
은서는 순순히 다리를 벌렸다.
온 도시가 비명소리로 술렁였다. 은서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남자들이 헐떡이는 소리, 여자들의 고함소리, 아이가 우는 소리. 차라리 모든 것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은서가 생각하지 못했던, 그때와 다른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남자들은 아민과 달리 식욕과 성욕 모두 굶주린 자들이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붙잡힌 사람이 제르바르라는 것이었다.
제르바르는 허리 뒤축에 묶어두었던 작은 칼날로 끈을 풀자마자 어깨를 잡고 있던 남자의 턱을 올려쳤다. 동시에 한 손으로는 칼을 빼앗아 은서의 다리 사이로 고개를 들이미는 남자의 뒤통수에 집어던졌다. 눈을 감은 은서의 얼굴로 뜨거운 액체가 확 튀었다. 이어지는 단말마에 은서가 눈을 떴다.
-왜 또 그러고 있어!
제르바르가 남은 한 놈의 목에 칼을 꽂아 넣으며 물었다. 넝마가 된 네 구의 시체를 돌아보며, 은서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분명히 핏자국이었다.
-나가자. 이 구역은 위험해.
제르바르가 손을 내민다. 은서가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거리는 여전히 불빛으로 번쩍였지만, 그 아래에 널린 것은 시체와 피였다. 도망가는 사람들과 소리지르며 쫒아가는 사람들, 보석을 줍는 사람들, 먹는 사람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지나간다. 제르바르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고 손아귀는 단단했다.
============================ 작품 후기 ============================
요즘 자꾸 올릴 때마다 오류가 나는 군요. 코멘트 오류도 있고.
즐감하세요.
검천지룡님. 사실 은서원톱 주인공이지만, 편한대로 생각해주세요.
시엔야님. 현실적인 건조남에게 로맨스란..ㅜ
vivianhu님. 로맨스전문가셨군요! 아마 판타지와 로맨스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좋게 봐주시니 무척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