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4 5. 한 여름밤의 꿈 =========================================================================
5.1 한 여름밤의 꿈
붉은 저택에서 가지고 나온 보석 몇 개를 팔아치우고 제르바르는 예전에 살았던 집 앞에 서있었다. 옛 집의 노인네는 밤마다 예쁘장한 청년들을 방으로 불러들였다. 사내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문 앞을 지키는 것은 고역이었지만, 어쩌면 이만큼 편한 일도 없겠다 싶었다.
다행으로 제르바르 자신은 그 취향이 아니었던지 거들떠도 보지 않았지만 아직 어린 동생은 조금 걱정이 됐다. 일브라이에는 영감의 애인들처럼 연하고 가느다란 갈색머리에 호리호리했기 때문이었다. 그 영감이 유독 일브라이에에게 신경을 쓰는 것도 불안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손자처럼 보았겠지만,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제르바르가 똑똑하게 알고 있었다.
-그 애를 데려와 봐라.
그래서 그날 밤, 영감의 명령에도 제르바르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노인은 아랫배가 수번이 뚫린 채 고꾸라졌다. 제르바르는 이어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죄는 하층 구역에게로 돌아갔다.
동생이 좋아했던 그 집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새삼 감상에 잠기는 건 역시 술 때문이려나. 허리 옆에 매단 유골주머니가 무겁게 느껴졌다.
병원으로 돌아와 은서가 자고 있는 걸 확인하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처음에는 어떻게 되는 건 아닌가 했지만 라본다의 의술은 과연 으뜸이었다. 치료를 마치고 며칠, 깨어나진 않았지만 숨소리는 편안해졌다.
제르바르는 은서의 머리를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그 옆에 앉아 찬찬히 얼굴을 살폈다. 가느스름한 뺨과 둥근 턱, 반달모양의 까만 눈썹과 검고 긴 생머리, 높지 않은 코, 옅은 쌍꺼풀과 햇빛에 그을려 붉어진 피부. 가지런히 누운 은서의 환자가운의 허리끈을 풀고 앞섬을 펼쳤다. 윗배에는 붕대가 감겨있다. 며칠전만해도 남아있던 키스마크나 자잘한 상처들은 보이질 않는다.
제르바르는 허리를 숙여 은서의 목에 입을 맞추었다. 건조한 입맞춤은 위로 올라가 입술에 닿았다. 훅 올라오는 알코올 냄새에 은서가 눈을 떴다.
-깼어?
-제르바르?
제르바르가 입으로 은서의 입을 막고 혀로 입술을 쓰다듬는다. 입술 위를 스치는 따뜻함을 느끼며 은서가 물었다.
-뭐하는 거예요.
-궁금해서.
-뭐가요.
-일이 사랑했던 여자가 궁금해서.
제르바르는 제 넙적한 손으로 은서의 가슴 위를 덮었다. 잠이 덜 깬 듯 은서는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 애가 안은 유일한 여자니까.
하얗게 마른 손이 가슴을 더듬는 제르바르의 손을 붙잡았다.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브라이에와 나는…그, 그런 걸 한 적이 없어요.
-뭐?
제르바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가 그토록 놀라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우린…끌어안은 게 다에요. 어쩌면 그때 탈출했다면 또 모르지만. 아니요, 사실은 연인도…….
자신과 일브라이에의 사이를 가늠하던 은서는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고백도 듣지 못하고 은서는 그와 헤어졌다. 도망가자던 약속과 따뜻한 눈빛, 다정함만이 그와 나눈 전부였다.
제르바르는 멀뚱히 은서를 내려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뒷목을 긁적이는 동안 은서가 앞섬을 여몄다.
-으음. 나는 네가….
제르바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쉬어.
들어왔을 때처럼 조금 흔들리는 걸음걸이로 제르바르가 병실을 나섰다. 홀로 남은 은서는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렸다.
은서의 몸이 다 낫기까지는 한 달이 걸렸다. 각종 마법을 쏟아 부었다는데, 은서로서는 그 돈이 상상도 되지 않았다. 은서가 미안해하자 제르바르는 보석알이 담긴 주머니를 흔들었다.
-어차피 이만큼 또 있어.
은서는 제르바르를 따라 상층구역의 숙소로 향했다. 내내 누워 있다가 보는 라본다 상층구역의 저녁은 은서에게는 꽤나 익숙한 광경이었다.
은색의 빛나는 구슬들이 길마다 반짝이고 건물에서는 환한 장신구가 박혀있다. 높은 건물들과 수많은 계단, 뾰족한 지붕과 높은 철탑들. 마치 모든 것이 위를 향해 바라보는 도시 같다. 구경하는 은서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참, 라본다의 길은 바로 쓰기 힘들 것 같다.
제르바르가 대뜸 말했다.
-왜요?
-시기가 안 좋아. 가을에 걷은 식량이 떨어질 때라 곳곳에서 폭동이 나서 마법사들이 차출되었어. 이런 때에는 비상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라본다의 길에도 제약이 걸려. 우선순위가 매겨지거든. 가서 표를 받아오기야 하겠지만.
-폭동이라고요?
은서가 다시 바라본 길과 광장은 별빛이 떨어진 것처럼 반짝인다. 곳곳에 연인들이 뒤엉켜 저녁을 즐기고, 달빛이 그들 머리와 아늑한 연못과 반짝이는 건물에 비춘다.
-하지만 여긴…….
-아름답지?
-이게, 일브라이에가 보았던 풍경이군요.
그러고도 둘은 한참을 말하지 않았다. 결국 은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날… 왜 나한테 키스했어요?
막 정신이 들었던 때의 기묘한 상황은 그 이후로 둘 사이에서 언급되는 일이 없었다. 제르바르는 머쓱해하면서도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때 말했잖아. 궁금했다고.
-나는 혹시 당신이, 다른 남자들처럼…….
그러나 은서는 말을 멈춘다. 제르바르는 자신을 구해주었다. 언제나 달려와서 지옥 같은 곳에서 끌어냈다. 함께 있는 동안 건드리지 않은 두 번째의 사람이기도 했다.
-아니에요. 늦은 인사지만, 줄곧 고마웠어요.
제르바르는 평소처럼 느긋하게 깍지 낀 양손을 뒤통수에 기댄다. 느린 걸음으로.
-궁금해서 널 찾아갔던 게 사실이야. 일이 부탁하기도 했고, 동생의 여자라면 내 책임이기도 하니까. 그날엔 술까지 한 잔 해서 정신이 나갔지…. 그런데 일의 여자가 아니었다니. 책임의 의무도 없었네.
-나를… 책임져요?
-강요는 아니고. 갈 데가 없었으면.
-혹시 동정하는 건가요?
돈도 없고 몸은 더럽혀지고 사람을 죽이고 좋아했던 남자는 죽었다. 은서는 자조했다. 그저 돌아갈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 하나로 라본다까지 왔지만, 사실 그것조차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걸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자신보다 세상물정에 박식한 제르바르일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해?
-노예였고 또…,
다른 남자들과의 이야기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은서는 말을 돌렸다.
-동생의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도와준다는 건, 도저히…….
머릿속에 떠다니는 말을 정리해서 내뱉기란 어려웠다. 답답했던지 제르바르가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그게 뭐? 여자는 귀해. 본래 동생의 여자라면 형으로서 책임져야 하는 게 불문율이야. 네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러나 제르바르 역시 말 잘하는 게 어렵다.
-그리고 섹스 하는 게 뭐 어때서. 여자랑 남자가 있으면 하는 게 당연하잖아. 넌 좋아서 한 게 아니었겠지만 일이었으니까. 여자들은 다들 그렇게 살잖아. 좋아하든 안 좋아하든 남자의 아이를 가지고 생명을 키우고 뺏기고 빼앗기면서.
벤치 구석에서 두 남녀가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앞에서 사람이 지나가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네가 만약 돌아가지 않겠다면 내가 책임져야 하는 거야. 물론 네가 일의 여자였을 경우지만….
어쩐지 제르바르는 조금 심통이 나 말끝을 흐렸다.
반면 은서는 할말을 잃었다. 단 한번도,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이곳에서 겪었던 모든 것은 그야말로 은서에게는 지독한 일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아간다 해서 모든 일이 없던 것으로 되는 건가.
은서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집과 가족, 친구들과 익숙한 도시로 돌아가면 예전처럼, 이곳에 오기 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나 때문에 죽은 일브라이에를 잊고, 남자들에게 당했던 일들도 잊고,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다 잊을 수 있는지를.
은서가 멈춰 섰다. 머릿속으로 지나가는 무수한 생각들에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판타지라는 건 역시 이세계에 대한 납득·설득이 기본으로 깔고 가야 하겠죠. 잘 됐는지 필자는 모릅니다만...그래도 재미있게 쓰고 있습니다.
보시는 분들도 즐감하세요!
꾸르르르르님. 데굴데굴...피폐와 치유는 공존하는 법이죠..^^;
JingJing2님. 만렙을 찍으려면 레이드를 몇 번이나 돌아야 합니다!ㄷㄷ
냥꼬붕님, 행복하세요!님, vivianhu님. 23회만에 제르바르가 언급되다니!! 매력치는 아직 한참 부족합니다만, 이미지가 좋아 다행입니다. 오늘은 어떨지..
시엔야님. 역시 쉽게 잊긴 힘드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