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3 4. 사막의 왕자 =========================================================================
4.6
-여자라 아깝구만.
차슈스는 은서를 인정했다. 무엇이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자신과 같은 사막의 전사들이나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여자 관리를 못한 제 부하를 노려보며, 치솟는 짜증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약탈혼의 가장 큰 문제는 여자들의 반항이었다. 대개는 순응하지만 외지인이나 드센 여자들이 문제였다. 그래서 그는 약초를 이용했다. 라본다에서 짐승을 죽이고 교미시킬 때 쓰는 약을 이용해 만든 향초는 과연 사람에게도 먹혀들어갔다. 수요도 있었고 가격도 비싸서 중간에서 사고팔기에 아주 좋았다.
호셔의 아들들은 이제 몇 남지 않았기 때문에, 차슈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돈이 수중에 쓸어 담듯이 모였고 차슈스의 군세 또한 함께 커졌다.
그러나 약에 취한 사람들은 제때 싸울 수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본래 사막의 전사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서, 가림막 없는 술자리에서 정사를 벌이곤 했다. 술을 마셔 혀가 꼬여도 칼을 옆에 두었고, 정신이 풀어지는 약은 물론 쓰지 않았다. 차슈스의 부하들은 약이 주는 쾌감과 풀어짐에 익숙해졌버린 뒤였다.
-여자들을 돌려받으러 왔다! 차슈스!
스샤이의 부하들이 그들을 포위했을 때에도 차슈스의 부하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은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더러는 칼을 떨어뜨렸다. 결과는 싱거웠다.
제르바르가 겉옷을 벗어 은서의 몸을 감싸 안았다. 피가 가슴 아래쪽에 모래와 함께 엉겨있다. 싸우는 듯 마는 듯 은서를 들쳐 안고 건물들 쪽으로 피했다.
-그 여자는 내 것이다. 스샤이의 부하야.
제르바르는 제 앞을 가로막은 차슈스를 보고 코웃음 쳤다.
-나는 스샤이의 부하가 아니다. 그리고 지금은 나한테 있으니 내 여자야.
심드렁하게 대꾸했지만 마음은 초조하기 그지없다. 피가 천에까지 스며들고 있다. 차슈스는 곱게 비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제르바르는 은서를 내려놓을까 하다가 제대로 고쳐 안고 칼을 꺼냈다. 어디서 이놈 부하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몸에서 떼어놓는 건 역시 불안했다.
차슈스의 칼날을 비켜 흘리고 제르바르는 비틀거리다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힘이 엄청났다. 게다가 자신은 짐까지 있었다.
결국 은서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차슈스와 칼을 부딪쳤다. 둥글게 휜 차슈스의 칼날은 면이 넓어서 상대적으로 짧고 얇은 제르바르의 칼이 튕겨져 나왔다. 흘리면 그는 곧바로 몸을 틀어 다른 한손으로도 칼을 내리쳤다.
제르바르는 곁눈질로 은서를 확인하다가 힘에 밀려 주저앉았다. 식은땀이 났다. 온 힘을 다해 칼날을 밀어붙이지만 차슈스의 원형의 두 칼에서 밀려오는 무게가 묵직했다.
-흐….
차슈스의 입술 사이로 싯누런 이와 잇몸이 드러났다. 혀가 윗니를 훑고 지나간다. 침이 칼날 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힘은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미친놈.
제르바르는 밀리는 와중에도 욕을 내뱉는다.
어깨 한쪽을 포기하자.
칼날을 왼쪽으로 밀어내며 위치를 뒤바꿀 생각을 하는데, 차슈스의 힘이 갑자기 빠져버렸다. 눈이 풀리며 차슈스는 부르르 떨었다. 벌어진 입가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제르바르가 발로 밀자, 그는 그대로 넘어갔다. 뒤에 은서가 몸을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서서 피 묻은 꼬챙이를 들고 있었다. 음식을 익혔던 쇠꼬챙이가 툭 차슈스 위로 떨어졌다. 차슈스가 누운 모래 위로 가느다랗게 피가 흘러나왔다. 곧바로 다리가 풀리며 주저앉는 은서를 제르바르가 안아들었다. 멀리 차슈스의 부하가 달려오고 그 뒤에 바짝 스샤이도 오고 있었다.
제르바르는 꿈틀거리는 차슈스의 머리를 한번 짓밟고 다시 건물들 쪽으로 달렸다. 이제 싸움은 저들에게 맡기고 응급처치를 해야했다.
잠시나마 정신을 차렸던 은서가 힘없이 품에 늘어져있어서, 제르바르는 달리면서도 몇 번이나 가슴에 귀를 기울였다. 마음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라본다의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은서는 두 번 정신을 차렸다. 한번은 차슈스의 마을에서 응급조치를 할 때였다.
은서는 피를 닦아내던 제르바르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눈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은서가 제르바르의 손을 놓지 않아서 이후의 치료는 마을의 여자가 했다. 차슈스 마을의 여자는 땀과 모래가 묻은 은서의 몸을 닦아내고 새 옷을 입혀주었다. 떠나기 전에 제르바르가 품에서 동전 한 푼을 던져주었다. 은서는 횡설수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다가 또 미안하다 말하고 기절했다.
급히 제르바르는 낙타에 올랐다. 스샤이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소?
-라본다로 바로 가봐야 할 것 같아. 모로루를 부탁해. 낙타는 나중에 돌려줄게.
-스샤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낙타머리를 돌렸다. 제르바르는 며칠 전에 스샤이와 닦아두었던 길로 달려갔다.
두 번째 정신이 든 것은 출발하고 삼 일이 지난 후였다. 꼬박 이틀을 달리고 반나절 쉬었다가 다시 달리던 제르바르는 굉장히 지쳐버렸다. 심지어 그는 차슈스 마을에 갈 때에도 쉬지 않고 달렸기 때문에 허리와 다리, 당기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래서 은서의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것조차 뒤늦게 알아차렸다.
제르바르는 천막을 치고 물을 은서의 입술 위에 떨어뜨렸다. 웃옷을 벗기고 물에 적신 머릿수건으로 땀을 닦아냈다.
은서의 상체에는 멍과 핏자국, 키스마크가 선명하게 남아있어서, 목욕탕에서 보았던 은서의 나신을 떠올리게 했다. 수증기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매끄러운 살결은 탐스러웠었으나 지금은 너무나 엉망이었다. 욕구가 끓기도 전에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제르바르는 묵묵히 손으로 은서의 몸을 주물렀다.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팔과 어깨, 가슴을 문지르며 마사지했다.
은서의 몸이 어느 정도 식은 뒤에야 그는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옆에 드러누웠다. 날이 저물고 있어 어차피 더는 갈 수도 없었다. 밤이 되면 온도가 급히 떨어지기 때문에 제르바르는 은서의 몸을 안고 위에 천을 두 겹이나 덮었다. 졸음이 금세 쏟아졌다.
그 조용하고 스산한 사막의 한밤중에, 은서는 눈을 떴다.
몸이 움직이지 않아 당황했지만 제르바르의 품에 안겨있다는 걸 깨달았다.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은서는 가만히 누워, 가슴 아래가 쑤시며 아픈 이유를 천천히 더듬어나갔다. 차슈스는 어떻게 된 걸까. 제르바르 언제 온 걸까. 모로루는 어디 있을까. 스샤이와는 아예 헤어진 건가. 나는 결국 살아난 건가.
그러나 물어도 대답할 사람은 깊이 잠에 빠져들어 있었고 자신도 아직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은서가 통증이 몰려오는 느낌에 눈을 꽉 감고 제르바르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머리위로 남자의 잔잔한 숨소리가 지나갔다. 은서는 그를 깨우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며 밤새 아픔을 견디다가 정신을 잃듯 잠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4장은 조금, 아주 조금 더 길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지만..^^;
갑자기 많은 분들이 보셔서 놀랐습니다. 열심히 쓸 일만 남았네요!
죽가령님. 희생양입니다ㅜ
청야화님. 사실상 은서 원톱주인공이라...마음가는대로 생각하셔도 됩니다.
검천지룡님. 뜨끔뜨끔뜨끔하군요ㅎ
jenka92님. 로맨스야 어쨌건 남주인공이 나와서 로판으로 왔습니다. 예전에 다른 분들 소설 읽을 때, 작가분들이 코멘트 달아주시는 게 좋더라고요. 그럼 전 어제자 투베 구경하러 이만...
시엔야님. 감사합니다. 저도 재미있게 쓰고 있습니다.^^
JingJing2님. 첫술에 저 정도면..(으쓱)
vivianhu님. 주말 잘 보내셨나요. 다음 편 여기 있습니다!
냥꼬붕님. 렙1 꼬붕 잡고, 보스 막타까지 날리는 초보자의 위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