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2 4. 사막의 왕자 =========================================================================
4.5
은서가 기억을 되짚으며 멍하게 있는 걸 보고, 약효가 다시 들었나싶어 작달만한 남자는 술잔을 들어 은서의 목 언저리에 부어버렸다.
"!"
차가운 술을 알몸에 뒤집어쓰자 소름이 돋았다.
"이게 뭐 하는..!"
남자는 은서를 껴안고 목덜미에서 흘러내리는 술을 핥아 마시기 시작했다. 은서가 주춤주춤 밀어내다가 모래 위로 스러졌다. 남자는 아예 은서의 몸 위에 타고 올라가 퍼진 유방을 따라 흐르는 술을 받아마셨다. 술은 허리를 따라 배꼽 언저리에 고여 있다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옆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시..싫어! 하지 마!"
은서가 소리 지르자 남자들이 다가와 한 마디씩 던진다.
-약이 다 떨어졌나본데.
-가져다줄까?
-됐어. 내가 저 병신처럼 약 없으면 못하는 놈이냐. 신경 끄고 꺼져.
-맛있게도 먹네. 같이 좀 어떠냐?
남자들이 너도나도 다가오기 시작했다. 작달만한 남자는 자기가 우선이라고 소리쳤다.
소란한 때에 은서는 제 손이 뻗어있는 곳에서 뭔가를 붙잡아 휘둘렀다. 바로 앞에 붙어있던 작달만한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고기 자르는 칼끝으로 막 베어낸 핏물이 흘렀다.
-이게……!
귓불이 베인 남자는 피를 줄줄 흘리며 일어섰다. 눈에 노기가 어렸다. 주변의 다른 남자들은 실실 웃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어느새 은서와 작달만한 남자가 대치 상태로 서있었다.
-계집애 하나 못 눕혀서야. 불알을 잘라버리지 그래!
-내가 다 창피하구만.
남자들의 비웃음과 웃음소리에 귀가 베인 남자는 화를 냈지만, 은서에게는 그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은서는 자신이 제정신인가를 스스로 되물었다. 그동안 순응하고 반발하고 포기했다가 기어이 도망쳤다. 이제 이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런 세계 어디를 가든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알몸으로 칼을 쥐고 서서 은서는 속으로 빌었다.
‘도와줘. 누군가가 도와줘.’
대답은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도망치자.'라고 말해줄 사람은 이제 없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스스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설령 그것이 죽더라도. 아니, 이들에게 당하느니 그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다른 이의 목숨으로 협박받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나.
조소마냥 웃음이 나왔다. 은서는 이 세계에 온 뒤 내내 가지고 있던 망설임을 내던졌다.
-이 계집이!
남자는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여전히 은서를 만만하게 본 모양인지 무기는 들지 않았다. 은서가 몸을 돌려 그의 공간을 빠져나왔다.
팔 한쪽 길이만한 고기 칼은 뾰족하진 않았지만 날카로웠고, 두껍지 않았으나 가벼웠다.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팔을 내질렀다. 칼이 남자의 팔을 그었다. 피가 튀었다. 이번에는 남자도 주춤거리며 뒤춤에서 손칼을 꺼내들었다. 번들거리는 눈빛을 마주보며 은서는 어깨를 노린 칼날을 피했다.
술과 약에 취했으나 그는 전사였다.
은서의 명치가 베여 피가 흘렀다. 거의 동시에 남자의 목에 고기 칼이 반 정도 박혔다. 남자는 소리도 없이 무너졌고 은서는 사정보지 않고 남자의 급소를 뒤꿈치로 짓눌렀다.
"이번에는 절대로……!"
이겼다. 은서는 남자를 밟고 서서 허탈하게 웃었다. 다친 곳이 무척 아프고 또 통쾌했다. 세상이 몽롱했지만 지금 쓰러질 수는 없었다. 차마 목에 박힌 칼을 빼어들지는 못하고 남자가 떨어뜨린 손칼을 주었다.
남자들은 웃지 않았다. 더러는 모래바닥에 던져놓은 칼을 주었다. 은서를 노려보는 눈빛들은 흐렸지만 짜증이 배어있었다. 그네들 중 하나가 어이 없이 죽었는데도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쉽게 다가오는 사람도 없었다.
차슈스는 두꺼운 팔 위에 작고 가느다란 여자를 올려놓은 채 흥미로운 눈으로 소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은서가 차슈스와 눈이 마주쳤지만, 피하지 않았다.
-나를 돌려보내줘요!
외려 은서는 칼을 그에게 뻗고 크게 소리쳤다. 다리가 비틀거렸지만 팔은 꿈적하질 않았다.
-당신들은 즐길 만큼 즐겼잖아요! 이제 나를 돌려보내요!
차슈스가 입술을 비틀며 뒤로 넘어갈듯이 크게 웃는다. 칼을 쥔 부하들을 발로 걷어차며 다가왔다.
-뭘 그리 빳빳하게 긴장하고 섰어? 사내놈들 여럿이서.
부하들은 슬그머니 칼을 내리고 물러섰다.
-이 병신 같은 놈들보다 낫군. 그러나 놓아주진 못한다. 우리 병사의 애를 낳아줄 여자는 있어도 있어도 부족하니까 말이지. 너는 용기를 높이 사 특별히 예뻐해 주마.
차슈스가 담배를 꼬나물었다. 바지춤에서 주머니 몇 개를 꺼내어 그 중 하나를 부하에게 던졌다.
-그거 피워라.
부하가 약을 들고 불에 다가가는 걸 보며 은서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까지다. 저걸 피우면 뜻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도망칠 수도 없이, 저놈들의 노리개가 되거나 애 낳는 도구가 되겠지.
여전히 눈물은 나질 않는다.
"좀처럼, 안 나."
일브라이에가 죽었는데도, 못난 꼴을 당하는데도, 심지어 제 죽음 직전에조차 울음이 나오질 않았다. 그저 자신이 조금 안쓰러울 뿐이다.
은서는 차슈스에게 덤벼들었다. 차슈스에게 가까이 가기도 전에 손칼이 튕겨나가고 다른 이의 칼이 은서의 몸에 파고들었다.
칼은 깊이 박히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몸도 함께 쓰러진다.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모래 사이로 파묻히며, 은서는 일브라이에가 아닌 그를 떠올렸다.
‘제르바르. 여기까지 데리고 와주었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은서는 희미하게 웃었다. 눈이 점점 감겨왔다.
============================ 작품 후기 ============================
환절기라 날씨가 오락가락 합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dwrwerqxs님. 재밌게 봐주셨다니 기쁩니다!
JingJing2님. 폭우가 지나고 소나기가 지나면 가을이 옵니다^^
냥꼬붕님. 오늘도 재밌게 읽으셨나요. 행복은 언젠가......^^;
vivianhu님. 그리 생각하시니 고맙습니다. 요즘은 소설보다 무서운 세상이죠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