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이 핀 그곳에 있었다-20화 (20/38)

00020  4. 사막의 왕자  =========================================================================

4.3

밤중의 사막이란 지독하게 조용해서 은서는 이런 시끄러움이 낯설었다. 한편으로는 저 즐거움을 잠시라도 맛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아마 너무 지쳤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앞에 선 제르바르가 짧은 머리카락을 가렸던 두건을 풀러 허리에 둘둘 말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일브라이에와 전혀 달랐다. 생김새나 말투, 성격조차 달랐지만 뒷모습은 묘하게 닮은 것도 같았다. 가슴이 시큰거렸다.

갑자기 그가 멈추었다. 제르바르는 돌아서서 은서를 오던 길로 밀어냈다.

-은서. 넌 돌아가는 게 낫겠다. 아니야. 같이 돌아가자. 배는 안고프지? 정 배고프면 가져다달라고 하고...

-여기까지 오셨는데, 가려하오?

그들 뒤에 스샤이가 다가왔다. 스샤이는 아랫도리만 입은 채 껄껄 웃으며 두 사람을 잔치를 벌이는 곳으로 안내했다. 제르바르는 어쩐지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다.

-아니. 피곤해서..

-배는 채우셔야지. 우리들이 여행자를 얼마나 극진히 대접하는지 알지 않소?

결국 스샤이를 따라가던 제르바르가 갑자기 은서의 손을 잡았다. 은서가 놀라 제르바르를 보았다.

그동안 두 사람은 급할 때를 빼고는 신체를 접촉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손을 뺄까 했지만 워낙 제르바르의 힘이 굳세서 은서는 그대로 있었다.

웅성거림이 커졌다.

군데군데 켜진 횃불로 환한 모래 위에 술과 음식, 담배들, 그리고 헐벗은 남자와 여자가 곳곳에 널부러져 있었다.

제르바르는 은서의 손을 꽉 잡은 채 스샤이의 왼쪽에 앉았다. 은서는 얼굴이 새빨개져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이놈들은 원래 이래. 말한다는 걸 깜빡했다.

제르바르가 속삭였다. 그는 아까의 걸쩍지근한 반응과 달리 앉자마자 고기를 연거푸 뜯었다. 은서의 손은 놓았지만 주변으로 남자가 다가올 때마다 슬쩍 눈치를 주곤 해서, 은서도 한결 안심하고 배를 채웠다.

맞은편에서는 한참 절정에 달아오르고 있는지, 여자가 교성을 질러댔다. 바로 옆에서는 한 남자가 두 여자를 가슴을 만지고 있었고, 뒤쪽에서는 끙끙거리는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스샤이는 그들을 훑어보다가 제르바르에게 술을 권했다.

-여자를 붙여드릴까하오만?

-아니.

-흐음...여자를 거부하는 남자는 단 두 종류요. 병신이거나 숨겨둔 여자가 있거나.

스샤이가 은서를 위아래로 훑는다.

-형제가 별 관심이 없다면, 당신 제수를 오늘 빌려줄 수 있겠소?

-아니.

-아깝구려.

스샤이는 입맛을 다시며 술을 연거푸 마신다. 은서는 소름이 돋아 먹는 것을 멈추었다. 제르바르는 고기 몇 점을 더 먹고 나서야 일어섰다.

-자알 먹었다! 역시 호셔의 아드님이라 베풂이 풍족하구만.

스샤이의 너털웃음에 인사하고 두 사람은 광란의 잔치에서 서둘러 빠져나왔다.

며칠간 스샤이의 신세를 지면서 제르바르와 은서는 물자를 보급했다. 그 와중에 두 가지 실수를 저지른 제르바르는 간신히 화를 참고 있었다.

그 첫 번째 실수는 길을 찾는답시고 은서를 여자들의 마을에 두고 간 것이며, 두 번째는 수색 중에 만난 강도 무리의 유인에 스샤이와 함께 따라간 것이었다. 이틀이나 지나 전사들과 돌아온 마을은 텅 비어있었다. 핏자국 하나 없는 이유는 마을에 남자들이 없기 때문이었다. 여자와 어린애는 귀한 자원이니 마구 죽일 리는 없다.

숨어있던 노인들이 스샤이의 군대를 보고 머리를 내밀었다. 차슈스가 쳐들어왔다고 했다. 강도 무리 또한 차슈스의 계략임이 틀림없었다.

스샤이는 텅 빈 창고를 보며 허공에 대고 마구 소리를 질렀다. 물가에 있던 새들이 날아갔다. 제르바르도 모로루의 등을 쾅 내려쳤다. 그 옆에는 은서의 머리를 둘러싸던 천만 덩그러니 떨어져있었다.

-미안하게 됐소. 괜히 말려들었구려.

-차슈스는 누구지?

-휴전을 맺었던 넷째요. 그러나 놈들이 약속을 어겼으니 복수를 해야하오.

제르베르도 동의했다.

-은혜와 복수는 반드시 갚아야지. 나도 가겠어.

-그 여인을 걱정하는 거라면, 내가 찾아올 테니 걱정 마시오.

-남의 손에 맡길 만큼 여유롭지 못해서.

제르베르는 스샤이 또한 믿을 수는 없었다. 차슈스에게서 되찾은들 그가 순순히 넘겨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제르베르는 스샤이의 전사들과 함께 차슈스의 마을로 낙타를 몰았다.

은서는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온 몸이 나긋나긋하게 풀어지고 팔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질 않았다. 머릿속이 뿌옇게 안개가 껴서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쉬고 싶어. 이대로...

은서는 무언가 기묘한 감각은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았다.

어딜 가고 있었지. 무슨 일이 있었지. 누구랑 있었지. 지금 뭘 하는 거지. 무수한 질문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느껴지는 감각이라고는 목이 마르다는 것이었는데 물을 찾아가기가귀찮았다. 숨 쉬는 것조차 의미 없게 느껴졌다. 앞이 흐릿했고 소리도 웅성거릴 뿐이다. 잠시 후 온 몸이 흔들거렸지만, 그것은 제 의지가 아니었다. 그저 한없이 졸음이 쏟아졌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20편!입니다.

추천 선작 코멘트는 기쁘게 받고 있습니다.

jenka92님. 감사합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더 힘내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