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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핀 그곳에 있었다-19화 (19/38)

00019  4. 사막의 왕자  =========================================================================

4.2

이른 새벽부터 제르바르는 출발 준비를 했다. 어쩐지 은서는 피곤하여 그에게 거의 준비를 맡기고 모로루에 올라탔다. 제르바르도 금세 올라와 모로루의 긴 더듬이를 잡아당겼다. 모로루가 느릿느릿 출발했다.

-라본다에 가면 어쩔 셈이야?

-...

-아무것도 없이 가면, 넌 거기서도 몸이나 팔아야할 걸.

-라본다의 길을 이용할 거예요.

-그거 무진장 비쌀 텐데.

제르바르는 손가락을 꼽으며 계산에 들어간다. 두 개, 세 개, 발가락까지 이용하다가 품에서 손톱만한 보석을 꺼내 보인다.

-이런 거 다섯 개는 필요한데. 없지? 평생 몸을 팔아도 이만큼은 절대 못 벌지. 아니, 그 개새끼한테 예쁨 받을 때 아양 떨면서 돈이나 벌지 그랬어.

-뭐라구요?

제르바르는 시큰둥하게 모로루 위에 드러누웠다.

-빌려줄게. 어차피 네 주인 거였으니까.

-이봐요! 당신이 아무리 일브라이에의 형이래도...

-잠깐!

제르바르가 벌떡 일어섰다. 잠시 후에 멀리서 먼지구름이 보였다.

-숨어!

은서가 급히 모로루 위에 바짝 엎드려 천을 뒤집어썼다.

몰려오는 것은 낙타 열 마리와 그 뒤의 또 다른 무리였다.

앞선 무리의 선두에 앉은 남자가 소리쳤다.

-강도요! 도망쳐!

제르바르는 그러나 칼을 옆구리에 차고 활줄을 조였다.

-혼자 못 당한다니까!

-낙타가 없어서 어차피 도망 못 가. 안 도와줄 거면 어서 가쇼!

뒤의 무리는 대략 열 명 정도다. 조금 빠듯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제르바르는 앞선 무리에게서도 긴장을 놓질 않았다.

앞선 무리도 수는 비슷한데 상인치고는 짐이 많지 않았다. 쫓기는 이들치고는 얼굴에 여유가 있었고, 칼도 제법 좋아보였다. 더구나 보호자 하나 없는 상인 무리라니, 말도 안 됐다.

설사 보호자들이 당했다하더라도 이들은 너무 멀끔하고 태도도 미묘했다.

제르바르가 움직이지 않고 모로루 위에서 시위를 겨누고 있자, 그들 무리도 도망치기를 멈추고 되돌아왔다.

-여기서 혼자 저들을 상대할 셈이오?

까무잡잡한 남자가 입을 가렸던 천을 내리고 물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어차피 나는 쥐뿔도 없으니 목숨을 살려줄지도 모르고.

남자가 호쾌하게 웃었다.

-시위를 겨누며 할 말은 아니외다. 게다가 당신 혼자라면 모를까, 여자가 있으면 곤란하지 않겠소?

제르바르가 활시위를 남자에게로 돌렸다. 남자 주변에 있던 상인들이 일제히 뒤축으로 손을 가져갔다.

-역시나. 저놈들과 한패인가?

-그럴 리가.

남자는 어느새 가까워진 먼지를 보고 제르바르보다 한 걸음 앞서서 칼을 꺼냈다.

-계획을 바꾼다! 여기서 상대하자!

다른 자들도 등에 끌려있던 칼을 꺼내들었다.

-나는 호셔의 열한 번째 아들, 스샤이라고 하오.

호셔는 사막에서 가장 권세가 높았던 자였다. 잘게 흩어진 사막민족을 통합했던 호셔는 일각에서는 이미 사막의 왕으로 통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죽은 후로 사막은 다시 사분오열되었지만, 호셔만은 여전히 사막의 왕이라고 불렸다.

-대기부대가 기다리고 있지만, 강도 앞에 여행자들을 버리고 갈 순 없지.

가까워진 먼지구름사이로 강도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제르바르는 시위를 놓았다. 선두에 있던 강도가 비명을 지르며 어깨를 부여잡았다. 제르바르가 빠르게 두 번째, 세 번째 화살까지 날리고는 칼을 뽑아 들었다.

-모로루 바깥으로 나오지 마!

천을 살짝 올리고 바깥을 살피던 은서가 화들짝 놀라며 다시 천을 덮었다.

잠시 후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옅은 피비린내와 단말마가 이어졌다.

제르바르의 팔뚝에 난 상처에 은서가 흰 가루를 묻혔다. 바로 옆에서 낙타를 탄 스샤이가 두 사람을 힐끗거렸다.

-부부요?

-아니. 음...제수.

은서는 더위 때문에 긴 머리를 올려 하나로 묶고 종아리까지 꽁꽁 싸매고 있었다. 더웠지만 워낙 태양이 뜨겁기 때문에 드러난 살결이 따가워 어쩔 수가 없었다. 스샤이는 그런 은서에게서 눈을 떼고 오아시스마을에서 쉬기를 청했다.

스샤이의 안내로 도착한 오아시스는 생각보다 작았다. 조촐한 집들 사이에서 사람들이 얼굴을 드러냈다. 대부분 노인과 여자, 어린아이들이었다.

-너희 노선에서 활동하던 놈들은 모두 소탕했다!

바닥으로 열한개의 머리가 굴러 떨어지자 사람들이 환호했다. 스샤이는 강도에게서 빼앗은 무기와 음식을 분배하고, 그 사이 제르바르와 은서도 쉴 곳을 안내받았다.

-왕자님께서 곧 잔치가 있으니 함께하시랍니다.

부하 하나가 말을 던지고 갔지만 제르바르는 영 시큰둥했다.

-아까 그 사람이 왕자에요?

-왕자는 개뿔.

제르바르가 슬쩍 바깥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떠돌이 사냥꾼이야. 운 좋아서 호셔의 아들로 태어난 거지. 그것도 열한 번째면 살아 있는 게 용하긴 하지만.

-떠돌이 사냥꾼? 여기가 그 사람의 땅이 아닌 건가요?

-여긴 상관도 없는 마을이야. 전사들을 끌고 다니면서 전쟁질하다가 궁해지면 한곳에 멋대로 정착해서 먹을 것이고 물자고 싹 빼먹고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거야. 강도 같은 골칫거리들도 해결해주고 말이야.

-사람들이 엄청 환영하던데.

-놈들이 여기 머무는 동안은 그놈의 왕국이 되는 거니까. 으차, 우린 배나 채우자.

은서는 제르바르를 따라갔다. 멀리 사람들이 소란스러웠다. 웃고 떠든다.

============================ 작품 후기 ============================

글 속은 더운 사막인데 오늘은 선선한 저녁이군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harrell님, jenka92님. 일은 개인적으로도 마음에 드는 인물상이었습니다ㅠ

JingJing2님. 세상이 워낙 험해서..ㅜ

시엔야님. 일은 결코 완벽하지 않은 평범한 남자애지만 그렇기에 가장 순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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