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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핀 그곳에 있었다-18화 (18/38)

00018  4. 사막의 왕자  =========================================================================

4.1 사막의 왕자

은서는 모로루의 등이 여전히 낯설었다. 모로루라는 이름의 왕전갈은 사막에서 가장 싸게 이용되는 운송수단이었는데, 이름만 왕전갈이지 사실상 생김새는 전혀 달랐다. 긴꼬리나 독은 없으며 두꺼워서 성문방어용으로 쓰이는 껍데기가 이 순한 갑각류의 유일한 무기이자 방패였다.

모로루를 보자마자 질겁했던 은서는 어느새 그 갑각류 위에 앉아 하염없이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건조한 하늘은 시리도록 파랬다.

일브라이에는 이곳에 없었다. 은서가 붉은 저택을 떠난 다음 날에 죽었다고 했다. 노예의 무덤이 있을 리가 없어서, 쓰레기를 모은 곳에 던져져 썩어가던 것을 나중에야 찾았다고 그는 말했다.

뒤늦게야 소식을 전한 남자는 너무 무뚝뚝해서 슬픔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일브라이에의 형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너야말로.

일브라이에의 형이라고 밝힌 제르바르는 은서가 충격에 쓰러지거나 통곡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심지어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그저 심장 한 토막이 텅 빈 듯. 혹은 바람에 날아가 버린 카마를 떠올릴 때의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사람은 라본다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은서는 사막에 들어온 지 이틀이 지나서야 제르바르에게 물었다.

-제르바르는 왜 라본다로 가나요. 고향이라서?

-일이 너를 라본다에 데려다달라고 했으니까. 나는 그곳이 고향이 아냐.

-하지만 형이라면서요.

-친형은 아니고, 라본다에서 만났지. 나는 남쪽 유목민 카흐다르의 아들이었다가 전쟁에서 패해서...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지. 여하튼 그래.

-그럼 일브라이에에 대해서 말해줘요.

제르바르가 은서를 힐끗 바라본다. 은서는 새하얀 사막언덕 어딘가를 보고 있다.

-......일은, 착한 애지.

-알아요.

-라본다에서 그 애는 약을 배달했어. 나는 주인 노인네를 지키는 칼잡이였고. 라본다는 장난 아니게 살벌한 곳이거든. 마법과 관련된 곳이면 어디든 하층민들의 습격이 있었지.

비장하기까지 한 제르바르의 목소리에 은서가 말을 끊었다.

-자, 잠깐만요. 라본다는 평화로운 곳이라고, 일브라이에가…….

-약을 배달하는 곳은 상층구역이니까. 일은 사실 그쪽 세계밖엔 몰라. 하층 구역에서는 매일 사람들이 굶고 싸우고 죽어나가지. 놈들이 종종 상층민들을 암살하고 약탈하곤 해서, 노인네같은 상층 사람들은 호위를 둬야 했어. 꽤 살벌한 동네지.

은서의 머릿속에서 라본다의 아름다운 풍경이 깨져나갔다.

-그런데 노인네가 죽어버리자마자 자식들이 일과 나를 이곳으로 팔아넘긴 거야. 나는 칼을 쓸 수 있다는 걸 최대한 숨기고 요리를 배웠어. 요리사는 칼도 쥐고 목숨도 안전하니까.

-그건 당신 이야기네요.

-음.

역시 이야기에는 자신이 없던 제르바르는 모로루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일은 똑똑한 편이여서 독학으로 의약을 공부했었어. 다만 눈치가 없어서 노인네 자식들이 자기를 싫어하는 것도 몰랐을 거야. 마법을 숭상하고 상층 무리에 끼고 싶어 했지만 결국 외국에 팔려버렸지. 그때 그 애는 제 처지를 깨달았을 거야. 여기에 와서 일은 변했거든. 결코 의사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포기한 것처럼 보였어.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래서 라본다로...

-그곳은 돈만 있으면 뭐든 될 수 있거든. 돈이 없으면 노예보다 못하지만.

라본다에서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언젠가 그곳에서 알려주겠다며 웃던 일브레이에.

그러나 은서는 자신의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로서는 하루하루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것밖에는 기억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조차 몇 번이나 순응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나.

-네 이야기나 해 봐. 일이 입 닳도록 듣긴 했지만, 듣던 것과는 좀 달라서.

은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뭐, 들리던 말로는 그 개새끼의 마음에 제법 들었던 모양이던데.

제르바르가 탁 침을 뱉는다.

-그래봤자 개고생이었겠지만.

은서는 대답 대신에 다시 물었다.

-당신이 그를 죽인 거지요?

-그래.

-일은, 그가 죽인 거예요?

-그럼 놈이 제 것을 눈독 들인 노예를 가만뒀겠어? 그나마 더 큰 고통을 당하기 전에...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해. 다른 지독한 짓을 겪지 않아서. 그래도 아팠을 거야. 얻어맞고...또 맞고...열이 엄청나게 올랐거든. 후유증이 심했어.

제르바르의 말이 군데군데 끊겨서, 은서는 천천히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제르바르가 양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옆구리에 달린 주머니가 스산하게 흔들렸다.

또 다시 말이 끊겼으나 둘은 억지로 대화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은서는 동생의 유골가루를 지고 가는 형을 한참동안 바라만 보았다. 무덤덤해보였던 그의 마음을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은서는 붉은 저택의 붉은 방에서 눈을 떴다. 지하실을 아민은 붉은 방이라고 불렀다. 그곳의 피가 엉긴 바닥에 은서의 팔과 다리가 결박되어 있다.

탈출한 건 꿈이었나. 일브라이에가 죽은 것도 그의 형을 만난 것도 꿈인 걸까. 그렇다면 일브라이에는 살아 있는 건가. 은서는 반항할 생각도 없이 멍해졌다.

-너는 내 것이야.

오랜만에 보는 아민은 탐욕스러운 눈을 빛내며 은서의 위에 제 몸을 겹쳤다. 소리치려고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너는 내 것이야.

아민의 성기가 마른 은서의 그곳을 비집었다. 은서의 몸이 위 아래로 흔들릴 때마다 묶인 팔과 다리가 조여 왔다. 성기가 그곳을 오가는 느낌은 뻑뻑하고 아팠다. 평소와 달리, 그는 깊이 들어오지 않았고 입구에서 슬쩍 넣었다 뺐다. 그의 양 손이 바짝 선 유두 위를 스쳤다.

-기분 좋은가?

어느새 다리를 묶은 줄이 풀려있었다. 채찍이 허벅지와 엉덩이에 감겼다. 차갑고 날카로운 소리와 가늘게 찢어지는 고통. 아니, 그것은 쾌락 같기도 했다. 적의 손에서 은서는 가벼운 희열마저 느끼고 있었다. 신음소리가 커져갔다.

아민은 허리를 움직이다 유두를 깨물었다.

-아읏..

아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은서는 양 손으로 그의 등을 할퀸다. 그제야 그는 제 것을 깊이, 꾹 눌러 박는다.

-으응..더...

은서는 그에게 매달리다시피 애원한다.

-더 깊이..흣..안쪽으로...흐응..

철벅이는 소리와 헐떡이는 소리, 들뜬 애원소리가 뒤섞인다. 은서는 자신이 드디어 미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래서야 도망간다는 말이 무색하다. 자기혐오에 휩싸이면서도 은서는 그를 놓지 않았다. 온 몸이 예민해져 감각 하나 하나가 찌르는 듯 하다.

마침내 그가 은서를 안아들고 몸을 떨었다. 그 순간 어른거리는 빛에 남자의 얼굴이 비추었다. 그 남자는 아민이 아니었다.

-일브라이에...

벅차오르는 안도감.

‘그래. 그럴 리 없지. 아민 그 개새끼한테 매달릴 리가 없지. 그 자식은 죽었는걸.’

은서는 편해진 마음으로 일브라이에를 끌어안고 입술에 제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의 고개가 꺾이며 혀를 섞는다. 달콤함에 취한 상태로 은서는 천천히 눈을 떴다.

모로루의 그늘에 간단히 세워놓은 천막이 모래바람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바로 옆에서는 제르바르가 자고 있었다.

은서는 그를 잠시 보다가 검푸른 하늘을 보고, 축축하게 젖은 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늘이 텅 비어 구름도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 작품 후기 ============================

약속대로 이세계 어드벤쳐 편입니다.^^;

루시니엘님.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즐겁게 쓰고 있습니다.

Pharrell님. 필자는 언제나 주인공 편입니다! 고로...^^;

JingJing2님. 오랜만에 마음 편한 화였습니다.

시엔야님. 예리함에 뜨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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