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7 3. 카마의 약속 =========================================================================
3.5
거구의 남자는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찾아왔다. 이미 받아버린 후였고, 돈도 두둑하게 주는지 주인장은 거절하지도 않았다. 시키는 대로 은서는 그 냄새나는 작자를 상대하며, 틈이 날 때마다 바깥 소식에 대해 물었다.
주인을 죽인 노예가 잡히지 않았다는 것만이 은서의 마음에 위안을 주었다.
일브라이에를 생각하면, 은서는 자신이 언제 그렇게 그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내심 놀라고 만다.
처음에는 그저 이야기 상대에 귀여운 동생쯤으로 여긴 소년이었는데. 도망가자던 목소리는 어느새 남자의 것이었다. 그 짧은 만남 어디쯤에서 그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은서도 알지 못했다.
이곳에서 그토록 남자들에게 시달렸으면서도 은서는 그의 손을 붙들고 함께 도망치는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키스 한번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건 아마도 그가 지금까지의 남자들과는 다르다는 믿음 하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억들을 차곡차곡 안고 은서는 안뜰에서 카마를 찾곤 했지만 이곳에는 없었다. 더 나가서 찾고 싶어도 여자들은 조막만한 안뜰을 빼고는 건물 밖으로 결코 나갈 수 없었다. 그저 작은 방에서 남자의 성기를 빨다가, 창문 있는 방에서 남자 아래 깔린 채 햇볕을 쬐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은서는 나날이 활기가 돌았다. 얼마 안 되는 끼니를 꼬박꼬박 챙겼고 건물 안을 다닐 때마다 구조를 기억하려고 애썼다. 한번은 일하는 아이를 꼬드겨 도망갈까 했지만, 고작 중고등생으로 보이는 어린애에게선 일브라이에의 그림자가 비쳐져 쉽게 마음먹지 못했다. 탈출하고 남은 이가 또 희생되도 괜찮은가. 은서는 쥐 고양이 생각하는 마음에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같이 일하던 여자 중 하나가 도망을 가다 붙잡혀 매타작을 맞았다는 소문이 들려오기도 했다. 또 어떤 여자는 이뻐하던 남자가 값을 치르고 사갔다고 했다. 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는 달라지는 게 없다. 아주 잠깐은 일브라이에가 구하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으나 그것 역시 우스운 망상으로 끝났다.
은서는 더욱 더 필사적으로 꽃을 찾았다. 황량한 안뜰엔 잡초꽃조차 없었다. 포기할까 하면서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 손님이 발치에 카마를 떨어뜨렸을 때 은서는 작은 감동마저 느꼈다.
두 손으로 카마를 들고 응시하다가 남자에게 돌려주었지만 남자는 받지 않았다.
-그게 마음에 듭니까?
존대하는 남자는 드물었다. 짙은 눈썹에 진한 갈색 머리카락이 짧게 쳐진 남자였다. 전혀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은서가 대답하지 않고 있자 다시 묻는다.
-그게 무슨 꽃인지 압니까?
-카마...라고 하죠. 통증에 좋다고 해요.
-그런가요. 드릴 테니 가지시죠.
-감사합니다.
은서는 남자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그의 앞에 공손히 앉았다. 고마움의 보답으로는 고작해야 이런 짓을 잘 해주는 것뿐이었다. 남자의 허리춤에 묶은 수건을 풀러내리려는데 말투가 바뀌었다.
-들었던 것과 다르네.
-?
-쉽게 꺾이지 않는다더니. 이제는 능숙해 보이기까지.
그러나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자신을 아는 듯한 내용에 놀란 은서가 그를 올려다보며 다시 얼굴을 살핀다. 이곳에 와서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리지만 역시 없다.
은서는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그의 앞에 가슴이 드러났지만 억지로 가리지 않았다. 손에 카마를 굳게 쥐었다.
-나를 아나요? 누구죠, 당신은?
-약속을 지키러 왔어.
-약속…….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는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소년의 얼굴이 이 청년의 얼굴에 겹쳐진다. 닮지는 않았다. 그러나 익숙한 그림자, 탈출하자던 목소리, 소중하지만 이루어지진 못했던 약속.
목소리가 떨려온다.
-그가 보낸 건가요? 그는 잘 있는 거죠? 일브라이에는...
-어쩔 거야. 아직도 라본다로 갈 생각 있어?
남자는 냉혹하게 말을 끊었다. 묻고 싶은 말만 묻는다.
은서는 카마를 가슴에 품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만은 벌써 기다리고 있을 일브라이에에게로 달려가, 그의 품에서 풋풋한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다음날 그가 다시 왔다. 약속대로 은서는 그와 별실로 향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넉넉해 보이는 품에서 여벌옷을 꺼냈다. 은서가 입자 헐렁하긴 했지만 길이는 얼추 맞았다. 긴 머리는 자르려했지만 돌돌 말아올려 모자를 쓰라고 했다.
-어떻게 나가죠?
-창문.
은서는 남자를 따라 창문을 나섰다. 바람이 불었다. 창문 아래에는 어차피 안뜰로 이어져있어 소용이 없을 테지만, 어쩐지 남자는 자신 있어 보였다.
남자는 내려가지 않고 옆으로 향했다. 창틀이 바깥으로 길게 나있어 벽에 바짝 기대면 충분히 걸을 만 했다.
-아래로 안 가요?
남자는 묵묵히 옆으로 가서 다른 창에 매달렸다.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조금 기다려.
남자가 창문을 열고 훅 들어갔다. 안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잠시 후 고개를 내밀고 은서의 손을 잡아끌었다.
방안은 난장판이었는데, 바닥에 남자 둘이 쓰러져있었다.
-여긴..
-목욕탕엔 친한 남자 둘이 오기도 한다더군. 여자를 부르지 않을 때에는 가장 값싼 방 끝의 구석진 곳을 주지. 우린 이들처럼 입구로 나가기만 하면 돼.
남자가 기절한 두 남자를 가구 안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은서도 그를 도왔다.
남자는 은서의 옷 안에 천을 구겨 넣어 품을 더 채우고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웃어. 이제 나간다. 우린 친구인거고, 넌 말하면 안 돼.
복도를 지키던 남자가 그 둘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둘은 무시하고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간다. 더 마주치는 사람은 없었다.
싱거웠다. 이토록 싱거운 일이었다.
-다음에 또 들러주십시오!
주인의 살가운 인사를 뒤로 은서는 코 아래에까지 두른 스카프를 말아 올렸다. 문을 나서는 사이, 안쪽에서는 남자들이 우루루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크, 큰일났습니다!
복도에서 인사했던 남자의 목소리였다. 둘은 그대로 문을 지나쳐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안쪽이 더 소란스러워져서, 남자는 은서의 손을 잡고 골목 안쪽으로 달렸다. 은서는 숨이 차면서도 그와 엇비슷하게 달렸다. 바람에 옷이 젖혀지며 품속의 꽃이 떨어져버렸다.
-카마가!
되돌아가려는 은서를 남자가 끌어당긴다.
-하, 하지만..!
-바깥에는 널리고 널렸어. 저거 하나 가지고 그곳에서 평생 살래?
은서는 카마를 남겨둔 채 달렸다. 스카프가 벗겨져 찬바람이 코로 들어왔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드디어 은서는 자유였다.
============================ 작품 후기 ============================
답변
코멘트 숫자가 제대로 안 나오네요..
그동안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화부터는 "본격! 이세계 어드벤쳐"가 펼쳐집니다!...는 농담입니다.
jingjing2님. 함께 화내고 응원해주시니 언제나 힘이 납니다^^
시엔야님. 불쾌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우려하던 부분이라.. 아무래도 은서의 현시창에 몰입할 수 있는가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