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2 2. 붉은 저택 =========================================================================
2.5
며칠 뒤 정원에 불이 났다.
태우는 것은 나무와 풀과 꽃과 창고에 불과하지만, 타오르는 그림자는 새빨간 마귀 같다.
은서는 그 그림자를 넋을 놓고 보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사람들이 불을 끈다고 달려 나가는 와중에, 급히 반대쪽 정원의 덤불로 숨었다.
일전에 일브라이에가 알려준 대로 덤불을 지나 약속한 장소로 달리던 은서가 멈췄다.
그는 왜 이렇게나 해주는 건가. 일브라이에는 튼튼하고 일도 잘하고 주위사람들에게 예쁨도 받았으니, 비록 이런 곳이지만 무난하게 잘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은서. 나랑 같이 라본다로 가자.
그러던 그가 며칠 전 찾아와 하는 말에 은서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농락하기 좋아하는 주인이란 놈의 시험인지, 그 혼자의 결심인지, 어떻게 가자는 건지, 무수한 질문들이 떠올랐지만 간신히 나온 대답은 다른 거였다.
-형이 여기 있다며.
-형은...괜찮아. 혼자서도 강하거든. 순순히 여기 온 것도 나 때문이고.
일브라이에의 눈은 확고했다. 정작 확신이 없던 건 은서였다. 일브라이에의 눈빛이 흔들렸다.
-혹시 싫어? 그렇다면 난……. 그냥 단지 은서가…….
은서가 뒷걸음질치려는 일브라이에의 팔을 잡았다.
-정말 갈 수 있어? 라본다에.
-당연하지! 사막 건너인걸. 라본다엔 아는 사람도 있으니까 살기도 쉬울 거야. 돈 모아둔 것도 있고.
남자아이, 소년을 거쳐 청년이 되어가는 그는 정말로 환하게 웃었다.
-여길 나가면 주고 싶은 게 있어. 지금은 좀 그렇고. 일단은 이걸로 대신할게.
그렇게 말하면서 일브라이에가 카마를 귀 옆에 꽂아주었다.
-주인님이 자택을 비우는 날, 정원에 불이 나면…….
은밀한 계획이었다. 일브라이에의 속삭임을 잊지 않았음에도 은서는 마음 한 구석이 영 편해지지 않았다. 정말 불이 나기 전까지도 은서는 그것을 모의를 앞둔 두려움이니, 그날이 닥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와서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일브라이에는 도대체 왜?'
일그러지며 불타는 새파란 정원과 검은 연기, 일렁이는 붉은 저택. 주황과 노랑으로 얼룩진 불길 속에서 은서는 그동안 자신을 바라보던 일브라이에의 눈빛을 떠올렸다. 소리 없이 타오르던 눈 안의 무언가를.
꽃으로 만들어주던 반지와 가느다란 끈으로 머리카락을 정돈시켜주던 남자의 손. 단 한번도 사랑한다 고백하지 않았지만 뜨거웠던 눈길. 일브라이에는 소년이 아니라 남자였다. 결코 먼저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어른이었다.
'일브라이에..!'
곧 만날 텐데도 은서는 갑자기 그가 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받은 인간다운 대접과 평범한 사랑을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당황하여 붉어질 그의 얼굴을 직접 보고 마음을 묻고 싶었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한들 어떠랴.
은인인 그에게 고맙다 하자. 함께 이곳을 나가 길을 떠나자. 그렇게 둘이서 마법의 땅으로 도망치자. 그간의 기억 때문에 곧바로는 힘들겠지만 언젠가, 몸과 마음의 상처가 나으면 평범한 사랑도 해봐야지.
정성스럽게 애무하며 서로에게 기쁨을 주며 내 마음을 확인하자.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이곳에서 좋은 기억 단 하나만은 남겨둘 수 있도록.
은서는 아무도 없는 텅 빈 나무 사이, 정원 뒤편으로 달려갔다. 그가 기다리고 있을 약속의 장소로.
-아, 아…….
그러나 일브라이에가 만들어놓았다는 개구멍을 열 발자국 남기고, 은서는 걸음을 멈추었다.
-내것이 이제 오는군.
피투성이가 된 일브라이에, 그리고 양 손이 새빨갛게 물든 아민이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연휴를 앞두고 짧게 하나 더 올립니다.
내일 봬요.
순수빈이님. jingjing2님. 예상과 추측은 독자의 권리이지요.^^ 코멘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