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1 2. 붉은 저택 =========================================================================
2.4
흰 꽃의 이름은 카마라고 했다. 그날 이후로 먹은 적은 없어서 효능까지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스산하고 냉정한 저택에서 꽃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사람이 있다는 것은, 굉장한 마음의 안정이 되었다.
둘은 말을 놓았다. 일브라이에는 존댓말만 배운 은서에게 말을 더 가르쳐주었다.
짬짬이 먹을 것도 가져다주었다. 일브라이에는 은서가 너무 말랐다며 단 과자와 설탕물을 주로 가져왔는데, 설탕물은 먹어봤다고 하자 놀란 듯 했다. 단 과자는 사실, 은서가 먹었던 과자에 비하면 전혀 달지 않았지만 담백하고 고소해서 맛은 더 있었다. 부엌에 형이 있어 또 얻어주겠다며 일브라이에는 수줍게 웃었다.
일브라이에와 대화를 한 밤에는 아민의 지하실로 끌려갔다. 은서는 손톱을 세우고 아민의 팔뚝에 상처를 내며 반항했지만, 결국에는 그의 채찍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성기가 입속으로 들어오면 반드시 물어 잘라버리리라 마음먹지만, 언제나 그는 뒤에서 왔다.
뒤쪽에서 은서의 가슴을 세게 쥐고 꽁꽁 묶인 허벅지를 쓰다듬는다. 허벅지를 따라 올라오던 손이 사타구니를 지나 은밀한 곳까지 서슴없이 침범했다. 그의 손에 유린당하면서 은서는 소년을 떠올렸다.
여러 갈래로 꽃잎이 펼쳐진 하얀 카마. 그리고 카마를 건네던 일브라이에의 크고 거칠지만 따뜻했던 손. 마찬가지로 크고 각이 잡혔지만 너무나 차가운 또 다른 손. 살갗에 닿는 서늘함에 오한을 느끼며 은서는 문득 일브라이에의 천진하고 서글서글한 눈동자가 보고 싶어졌다.
일브라이에는 은서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좋았다. 머리카락을 올렸을 때 드러나는 흰 목덜미가 좋았다.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 했는데도 매번 꽃을 받을 때마다 냄새를 맡는 표정이 좋았다. 계단 위에 앉을 때 드러나는 하얀 허벅지가 좋았다.
열여덟은 그의 나라에서는 이미 성인이었다. 그러나 노예 신분이기 때문에 주인의 허락이 있어야지만 결혼할 수 있었고, 아민은 그런 하찮은 것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은서는 주인님의 여자였다. 손 댈 수 있을 리가 없다.
일브라이에가 은서를 처음 본 것은 은서가 붉은 저택에 온 날이었다. 하얀 알몸으로 입구에 들어서는 것은 여자를 모르던 그에게는 충분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두 번째로 본 것은 계단에서였다. 그의 주인이 계단에서 은서의 머리를 풀어헤치자, 머리를 싸매고 있던 흰 머릿수건이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모든 시종과 노예들이 자리를 피하는 순간, 그는 서둘러 그것을 주웠다.
주인의 괴상한 취미와 악독한 행위는 본래 유명했다. 보통 노예들은 채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폐인이 되거나, 질려 사창가로 팔렸다. 이번에는 좀 독한 것 같다느니, 얼마 못 버틸 것 같다느니 하는 사람들의 말을 뒤로 넘기고, 일브라이에는 몰래 은서의 하얀 머리수건을 들고 자위했다.
짧은 만족은 오래가지 않았다. 계단에는 여전히 접근할 수 없었고, 일브라이에는 우울한 얼굴로 손을 씻었다. 머릿수건은 줄곧 품속에 있다.
이후 은서의 팔다리에 생채기가 늘어나자 일브라이에는 꽃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이 안에서 구할만한 건 그것뿐이었다.
둘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은서가 그를 보고 웃었다.
-매번 고마워.
일브라이에는 웃고 있는 은서의 하얀 목덜미 아래의 채찍자국을 발견했다. 숨이 막혔다.
-라본다에 대해 더 말해 줘. 그곳에 가고 싶어.
-라본다는...
간신히 그 상처에서 눈을 뗀다.
-반짝거리는 게 가득해. 밤에도 환하고, 사람들도 많아. 거긴 노예가 별로 없어. 노예라고 해도 돈을 받아서 자립할 수 있어. 하지만 먹을 건 많지 않아서 음식이 엄청 비싸.
-라본다의 길은?
-그것도 비싸다고 들었어. 그건 둥근 문인데, 앞에서 보면 뒤가 뻥 뚫렸지만 들어가면 다른 곳으로 나온대. 들어가면 그곳으로 가는 빛의 길이 있어서 거길 따라 걸으면 된다고 했어.
일브라이에가 말하면 은서의 눈은 반짝였다. 일브라이에가 물었다.
-라본다에 가고 싶어?
-응.
그 표정은 절실하고 아름다워서 일브라이에는 넋을 잃었다.
-갈 수 있어. 은서는 갈 수 있을 거야.
은서가 그를 한참이나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물을 흘렸다. 단 한 방울 떨어지자마자 일브라이에를 포옹했다. 은서로서는 처음으로 자진해서 남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었다.
-고마워.
은서의 체온에 일브라이에는 당황하며 벌떡 일어섰다. 도망치듯 자리를 피한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일브라이에는 알고 있다. 은서는 주인의 여자고 시도 때도 없이 주인을 받아들였다. 주인의 매를 맞고 주인과 몸을 섞으면서도 매번, 정말로 매번, 박박 소리 지르며 반항했다. 지독하게 당했을 텐데도.
그 순간 일브라이에는 제 마음이 당혹스러워졌다. 은서에 대한 마음은 동정인가, 연민인가.
머리를 감싸쥔다. 새하얀 다리를 생각한다. 검고 긴 머리와 웃는 얼굴, 상냥한 목소리, 라본다에 가고 싶어 하는 아름답고 가엾은 여자.
보고 싶고 안고 싶었다. 은서를 안고 있을 주인을 생각하며 피가 끓었다.
일브라이에는 이런 마음이 고작 연민일리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형에게조차 미처 다 말하지 못한 마음이 벅차오른다.
-이곳에서는 안 돼.
은서의 웃는 얼굴과 주인의 새빨간 눈동자가 겹쳐진다.
그의 주인은 잔혹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은서는 그런 사람에게 맞서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되어가며, 언젠가 다른 여자들처럼 널부러지거나 혹은 팔릴 때까지. 그 기간은 아마 길지 않을 것이다.
-은서...
일브라이에는 고이 간직해두었던 머릿수건을 굳게 쥐었다. 그의 짧은 18년의 인생을 걸고, 좋아하게 된 여자를 도망시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 작품 후기 ============================
추천 선작 코멘트 감사합니다.
선선해졌군요. 감기 조심하세요.
JingJing2님. 몰입하여 보셨다니 감사합니다. 상황이 쉽게 해결되지는 않습니다만 주인공은 강하니 잘 이겨내리라 생각합니다!
이라샤님. '차원이동 후 운이 좋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가 이 소설의 시작이었습니다. 결국엔 작가가 고난의 원인입니다^^;
딩가딩가딩가딩가님. 사실 은서는 포기와 오기 사이에서 흔들리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역경 속에서 강해지기도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