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7 1. 카나리아 =========================================================================
1.6
예정보다도 조금 늦은 귀가였다. 아그랑은 두 명의 손님과 함께 왔다. 노예들은 참가할 수 없는 길고 긴 파티가 이어졌다. 은서가 불려간 건 이틀이나 지난 후였다.
널찍한 방 끝에는 길고 푹신한 소파가 이어져있고 테이블엔 이름도 모르는 각종 음식이 널려있었다. 소파에 아그랑과 손님 둘이 앉아있고, 바닥엔 여자들이 몇 명 앉아있었다.
-예쁘장하군요.
-제법 공을 들였습니다. 너, 그동안 배운 걸 해봐.
남자들의 시선을 받으며 은서는 쭈뼛쭈뼛 그들 앞에 섰다. 가슴과 엉덩이에 치렁치렁한 레이스와 방울이 달린 옷은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났다. 배운 대로 다리와 팔을 움직였다. 제가 아는 춤은 아니지만 이들은 이런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움직임이 절제된 기묘한 동작들. 아는 누군가가 본다면 폭소를 터트렸을 테지만, 은서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춤 중간부터는 노래를 같이 불렀다. 발음 따라 외운 거라 사실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그랑과 두 손님은 껄껄 웃으며, 혹은 담배를 빨며 끈적거리는 눈빛을 보낸다. 노래와 춤이 끝나자마자 은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훌륭하군요. 멋진 아이입니다.
-예쁘기만 한 아인 재미가 없으니까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은서는 아그랑 옆에, 다른 여자들처럼 앉았다. 방의 공기는 어둡고 축축하다. 보여줄 것을 보여줬는데 돌려보내지 않는 것이 불안했다.
-간만의 여흥이니 어떻습니까?
-좋소이다.
다른 손님이 시종을 부르자 이번에는 여자 둘이 나체로 들어왔다. 은발 여자는 곧바로 그들을 향해 다리를 벌리고 누웠다. 금발머리의 여자는 은발여자의 가슴을 빨며 엉덩이를 흔들었다. 은발여자의 손이 그 엉덩이를 어루만졌고, 이내 둘은 양 머리를 거꾸로 하여 서로의 성기를 핥았다. 침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남자들은 잔을 부딪쳤다.
은서는 여자 둘이 뒤엉킨 모습에 경악하며 남자들을 슬쩍 올려보았다. 남자들은 모두 눈을 떼지 못하며 웃고 있다. 그러는 중 한 손님과 눈이 마주쳤다. 얼굴이 빨개진 은서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여흥은 쉬이 끝나지 않았다. 여자들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자리를 바꾸었고 각종 기묘한 체위로 서로의 그곳을 만지고 빨고 교성을 질렀다.
-그 계집애는 어떻소?
도중에 한 손님이 아그랑에게 물었다.
-노래와 춤은 썩 하던데.
아그랑이 난처하게 웃는다.
은서는 제 이야기임을 감지하고 눈치를 본다. 아까 자기와 눈을 마주쳤던 손님이었다.
-그럼 어떻습니까?
-그..그럴까요?
손님의 제안으로 은서는 엉겨있는 여자들에게로 안내되었다. 금발의 여자가 눈이 풀린 채 엉금엉금 다가와 은서의 옷을 벗기려 했다. 놀란 은서가 여자를 밀어냈으나, 이번에는 은발 여자가 뒤에서 은서를 잡고 상의를 벗겨냈다. 새하얗게 감추었던 살결이 드러나자 거침없이 얼굴을 파묻는다. 은서는 자기도 모르게 은발 여자의 머리채를 붙잡고 잡아당겼다.
-싫어!
은발여자가 우스꽝스럽게 넘어졌다. 금발 여자가 눈을 크게 뜨고 은서를 노려봤다. 남자들도 당황한 듯 말이 없다.
조용한 가운데 아그랑은 이를 악물었다.
-뭐하는 거냐!
아그랑은 술잔을 깨버릴 정도로 화를 냈다. 얼굴이 붉어져, 으르렁거렸지만 은서는 드러난 가슴을 양 손으로 가리고 가만히 서있었다.
차라리 쫓겨나자. 이대로…….
-가파르 공, 저 계집 파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한 손님이 침묵을 깨뜨렸다.
-하, 하지만 방금 보셨다시피…….
아그랑이 당황한 듯이 연거푸 말을 더듬는 한편, 머릿속으로 각종 계산을 하고 있다. 제가 산 노예값과 손님에게 넘겨받을 것들. 생김새는 희귀하나 어차피 외지인 노예는 쉽게 구한다. 선생을 붙여 가르쳤으니 덤을 받아도 좋을 것이다.
-저렇게 뻗대는 계집이온데, 루다르 님께 괜히 폐가 될까 걱정입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능숙하고 적극적인 여자를 좋아하는 아그랑은 만족스럽게 입맛을 다신다. 생김새는 제 취향이나 여자 길들이는 취미는 없다.
손님이 조건을 덧붙였다.
-가파르 공은 음악을 즐긴다지요. 제게 북방출신 가수가 있습니다.
-루다르 님께서 그렇게 편의를 봐주시니, 저로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손님의 노예는 질이 좋지 않기로 유명하지만, 굳이 주제도 모르고 뻣뻣하게 구는 노예를 고집할 필요도 없었다. 아그랑은 노여움을 죽이고 너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아, 이 앤 아주 처음이라 솜씨가 영 없습니다만.
-괜찮습니다.
-하하, 역시 루다르님은 사내 중의 사내로군요.
그밖에도 돈을 더 얹어준다는 것을 아그랑은 거절했다. 이 손님이 원하신다면야. 대신 그는 좋은 인상을 남긴 것으로 만족했다.
-오늘 바로 방으로 들일까요?
-아닙니다. 어차피 내일 출발할 테니, 일찍 쉬고 싶군요.
은서는 구석에 서서 대화에 집중했다. 다는 모르지만 무슨 대화인지는 대충 알아들었다. 팔린다, 여자, 음악, 감사, 내일...
은서는 아그랑과 대화하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팔린 것인가. 물건처럼 팔리고 넘겨진 건가. 그런데 왜? 저들의 유흥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자신을 왜 사는지 또 어디로 가게 되는 건지, 머릿속이 팽팽 돌았다.
그 남자가 은서를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큰 키의 새빨간 머리, 새빨간 눈, 정장바깥으로 드러난 근육질의 몸. 잘생긴 남자지만 흰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얼굴에는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 작품 후기 ============================
추천, 선작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