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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핀 그곳에 있었다-6화 (6/38)

00006  1. 카나리아  =========================================================================

1.5

다음 날에도 은서는 그 방으로 불려갔다.

아그랑은 침대에 누워 손짓만 했다. 은서는 쭈뼛 다가가 옷을 벗었다. 사타구니가 쓸리고 아팠다.

-올라와서 움직여라.

노래, 노래, 노래... 비명과 신음과 노래가 섞여 밤새도록 울렸다.

전날에는 두 번을 채 끝내지 못하고 결국 까무러쳤다. 잠깐 좋은 음식을 먹었다 한들, 줄곧 갇혀서 오래 굶었던 은서의 체력은 좋지 않았다. 깨어나니 제 방이었다. 우는 것도 지쳐 가만히 누워 있다가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었다.

전날의 여파인지 마치 몸살이라도 온 것처럼 온 몸이 후들거리고 아팠다. 그런데도 두 번을 채우고 나서야 은서는 방을 나올 수 있었다. 배운 바로 밤노예는 주인의 옆에서 잘 수 없었다. 아내나 첩이 아닌 이상, 시중만 들면 그걸로 끝인 것이다.

은서의 방은 작은 노예 방들 중 하나였다. 굉장히 작아 몸만 누이면 가득했다. 텅 빈 방에서 은서는 내내 앓았다. 열이 끓어오르고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다. 비몽사몽간에도 어제 오늘의 밤은 잊히지 않았다. 방을 나오자마자 얼음장 같은 물을 끼얹었는데도 남자의 냄새, 누린 땀냄새와 정액냄새에 코가 비렸다.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는 건가.

결심은 계속해서 무너졌다. 간신히 세워놓아도, 앞으로의 삶을 생각하면 눈앞이 아득해졌다.

“자야하는데…….”

마음이 더 무너지기 전에 자는 것이 나을 성 싶었다. 은서는 간신히 눈을 붙였다.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베개로 흘러내렸다.

은서에게는 다행히도 다음 날부터 약 두어 달 간 아그랑이 자택을 비웠다. 수도에 불리는 건 위세 높은 이들 뿐이라며 노예장은 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은서에게는 하등 와닿지 않는 자랑이었다.

아그랑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그는 은서에게 노래와 춤 선생도 붙였다. 그가 돌아오면 앞에서 선보여야 한다고 했다. 생전 춤이라고는 춰본 적 없던 은서는 시키는 대로 따랐다. 밤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걸 참을 수 있었다.

다른 노예와 달리 은서는 오후에 수업을 듣고 주인이 없는 저녁에는 쉴 수가 있었기 때문에 노예들이나 시종들의 눈초리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까짓 괄시야 무섭지 않았다. 다만 노예가 빈둥거리는 꼴을 더 못 보겠는지, 어느 날부터는 노예장이 굳이 은서를 불러 다른 시종을 돕게 했다.

시종 에일은 비쩍 마른 남자였다. 그는 은서에게 마구간 내 허드렛일을 시켰다. 긴 머리를 질끈 묶고 바삐 오가는 은서를 에일은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네 이름이 뭐지?

며칠이 지나고 에일이 물었다.

-은서요.

이곳에서 이름을 물어본 건 처음이었다. 은서는 오랜만에 제 이름을 말하고는 말 등을 석석 긁어냈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일이었다. ‘차라리 이런 일을 하며 지냈으면 좋았을 텐데.’생각해보니 그저 한숨이 나왔다.

-주인님이 없으니 너도 심심하지?

뒤에서 에일이 은서의 허리를 확 안았다.

“무슨!”

놀란 은서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말갈기를 놓았다. 에일이 한 손으로 은서의 입을 막고 뒷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조용히 해!

단단해진 에일의 물건이 뒤에 붙어 움찔거렸다. 허리를 꽉 안던 손이 스르르 치마 아래로 내려갔다. 은서는 그 손을 막고 몸을 돌려 에일을 밀쳐냈다.

-뭐하는 거예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에일은 단단히 결심한 듯 은서를 더러운 마구간 바닥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탔다. 은서는 그를 밀어내고 발로 찼다. 에일이 쓰러지자 황급히 일어나 한번 더 걷어찼다. 오물에 널브러진 그를 두고 화드득 마구간을 뛰쳐나왔다.

말 분뇨를 뒤집어쓴 은서는 쳐다보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물터로 달렸다. 말 물을 길러 갔었던 물터에는 물지게 진 노예들이 많았다. 냄새 때문에 힐끔거리는 그들 사이에서 찬 물을 머리 위로 쏟아 부었다. 뼈까지 시렸다. 순식간에 차오른 분노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얇은 천이 젖어 몸에 달라붙었다. 찬 물 때문에 유두가 솟아올라, 은서는 가슴께를 가리고 젖은 채 방으로 돌아갔다.

의외로 에일은 그 후 은서에게 집적거리지 않았다. 종종 눈이 마주치며 오히려 먼저 피했고, 노예장도 에일에게 은서를 보내지 않았다. 물론 그것이 어떤 호의나 동정 때문이 아니라는 건 은서도 짐작했다. 다만 자신이 '주인의 것'이기 때문이라 아랫사람은 함부로 손댈 수 없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어쨌건 간에 건들지만 않는다면 상관없었다.

나른하고 또 조용하게 시간이 흘렀다. 은서는 곰곰이 생각했다.

에일에게 반항했던 것처럼 아그랑에게도 거부해볼까. 그도 나를 포기하지 않을까. 내가 뻣뻣하게 반항하고, 재미없는 여자라는 걸 알면 쫒아낼지도 모른다.

기회를 기다리며 순응하자던 계획은 단 두 번의 밤이 지났을 때 이미 사라졌다. 그렇다고 곧바로 도망가는 건, 이 대저택의 정원을 지나 병사들이 깔린 문과 높은 담장을 건너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병사들이 드문 곳엔 송곳니를 드러낸 개들이 침을 흘리며 지키고 서있었고 저택 바깥에도 병사들이 있다고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두 달이 찼다. 마침내 아그랑이 돌아왔다.

============================ 작품 후기 ============================

초반부라 하루 한 편씩 올렸습니다.

올리고 보니 짧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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