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4 1. 카나리아 =========================================================================
1.3
은서는 아그랑에게 팔렸다. 은서는 외국인이라 가격이 높았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어차피 밤시중만 들 테니 상관없었다.
어쨌든 아그랑이 입찰했을 때 다른 귀족들도 놀라지 않았다. 아그랑은 고귀하고 희귀한 것들을 좋아했다. 고서적, 옛 노래, 싯구와 비단, 아탈식 글씨체, 이국의 것들.
아그랑은 선생을 데려와 은서에게 말을 가르치게 했다. 노예에게 말을 가르치는 건 이례적인 일이지만 그것이 마음에 드는 밤노예라면 흔한 일이 된다. 귀족들은 밤노예 자랑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그는 더했다. 물 흐르듯 능숙한 어조로 글귀를 낭송하는 소리도 좋아하지만, 낯선 외국노래를 듣는 것도 좋아했다.
은서는 며칠 동안 주인의 명령을 알아들을 정도, 일상 대화가 통할 정도로 간신히 말을 터득했다. 죽어버린 여자 때문에 뒤숭숭했던 기분도 좋은 음식과 배움으로 점차 추스르자, 이번에는 기억을 되짚었다.
그날의 은서는 갑자기 낯선 길에 서있었다. 외국인 듯 익숙지 않은 어느 곳에서, 멍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들려왔다.
왜 여기에 있게 된 건지 곱씹으며 길을 헤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납치되었던 걸까, 말로만 듣던 인신매매를 당했던 걸까. 대사관을 찾아가야 할까. 도무지 중간의 기억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그때 친절한 듯 말을 거는 남자들이 있었다. 왜 그때 도망가지 않았을까. 도망갈 수는 있었을까. 은서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묻는다.
붙잡혀서 팔리고, 골방에서 몹쓸 짓을 당하고, 한 여자가 죽는 것까지도 보았다. 그때 그곳의 여자들은 어떤 조의도 표하지 못하고 곧바로 사람들 앞에서 품평을 받았다.
호기심과 정욕이 가득한 눈빛들이 가슴과 다리에 꽂혔다. 사람들이 팻말을 들었다. 가가르가 소리를 지르며 가격을 매겼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그것이 자신을 사는 몸값이라는 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느끼하게 생긴 남자를 따라 이 대저택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노예. 은서는 그 단어가 주는 낯설음을 인정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옛 시대에나 있음직한 비인도적인 제도지만, 아마 어딘가에서는 아직도 유효했나보다. 하지만 인신매매라는 것은 본래 은밀한 영역일텐데도, 이토록이나 공공연하게 사람이 팔릴 줄은 은서조차 예측하지 못했다.
여러가지 잠자리에서 쓰이는 말을 배운 은서는 홍등가나 이곳이나 자신이 할 것은 매한가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나마 아직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게 작은 위안일 뿐이었다.
은서는 선생에게 영어로 이곳이 어디냐고 물어봤지만 선생은 알아듣지 못했다. 곱슬거리는 금발과 불그스름한 얼굴, 갈색 주근깨가 박힌 여선생은 허리를 졸라매는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무척 촌스럽고 이상했다.
결국 은서는 말을 배운지 나흘이 지난 후에 다시 물어봤다.
-여긴 가파르 주지의 자택이지. 네 주인이 아그랑 가파르되신다.
‘나라’가 무슨 단어인지 몰라서 은서는 그게 아니라고 고개만 저었지만, 선생 역시 알아듣지 못했다. 은서는 말을 더 배울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그 주인은 기다리지 않았다.
-씻고 이거 입고 나와. 어떻게 입는지 알지? 여기서 기다릴게.
대충 선생이 말하는 단어는 알아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빠른 말은 알아듣지 못했다. 배운 말들을 웅얼거리는 은서에게 시종은 천천히, 다시 말했다.
-씻고 옷 갈아입어.
은서는 옷을 받아들었다. 지금 입고 있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는 희고 나풀거리는 원피스였다. 몸을 씻고 옷을 입고 나오자 시종이 기다리고 있다가 가슴과 귀 뒤쪽에 유향을 발라주었다.
-3층으로.
계단을 오르니 창문 너머로 온통 검은 하늘이 보였다. 밤이라는 걸 인식하자마자 걸음이 멈추었다. 생각은 그 다음에야 이어졌다.
밤중에 꾸며 부르는 이유야 뻔하지 않나.
시종이 거칠게 팔을 잡아 이끌었다. 버티려 했지만 역시나 안 된다. 시종은 짜증이 난 얼굴로 은서를 끌다시피 하여 올라와 어느 방문을 열고 거칠게 밀어 넣었다. 문이 잠겼다.
그날 그 방에서 은서는 노래를 불렀다. 가사는 기억나지 않아서 그냥 마음대로 지어 불렀다. 중간 중간 욕이 들어갔지만 듣는 쪽은 어차피 모른다. 노래를 부르다가도 신음을 흘리며 노래가 멈추면 주인이라는 자가 명령한다.
-움직여! 계속!
은서는 삐그덕 삐그덕, 어색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노래를 불렀다. 누가 불렀는지도 모를 노래를 하염없이.
============================ 작품 후기 ============================
끝을 오묘하게 잘라서그런지 이번엔 좀 짧습니다. 점점 길어질 듯도 합니다만...